「하필이면 평론가라서」에서 자세히 밝힌 바 있지만, 제게 가장 크게 영향을 주었던 평론집은 2010년대 초반에 읽은 『몰락의 에티카』와 2010년대 후반에 읽은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이었습니다.
전자에 대해선 원체 많은 논의가 (지금까지도) 쏟아졌으니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겠죠. 후자에 대해 간략히 이야기나 풀어볼까 합니다.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의 가장 주요한 특징을 꼽으라면 저자가 '작품'에 대해서 별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물론 이것은 저자가 작품을 부주의하게 읽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대신 저자는 작품을 둘러싼 '시선'에 대해서 많은 말을 꺼냅니다.
예를 들어 저자는 천명관과 정유정의 소설 자체를 논하기보다는 상이한 글쓰기 스타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그들이 '이야기꾼'으로 뭉뚱그려 호명되는지 논하며(「'장편의 시대'와 '이야기꾼'의 우울」), 조남주의 소설 자체를 논하기보다는 어째서 '미학성'과 '정치성'이 분리된 평가 기준으로
도입되는지 논합니다(「비평의 백래시와 새로운 '페미니스트 서사'의 도래」). 그래서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은 여타의 평론집과 결이 다릅니다. 저자가 문제화하는 것은 '작품'이 아니라 '시선'이니까요.
그렇다면 저자가 이러한 독특한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한국의 문학(장)이 남성(정확히는 다수자)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저자는 신경숙 사태를 둘러한 수많은 발화에서 남성적 욕망을 추출해내며(「퇴행의 시대와 'K문학/비평'의 종말」),
퀴어소설에 대한 기존의 독해에서 혐오의 정동을 추출해냅니다(「지금 한국문학장에서 '퀴어한 것'은 무엇인가」). 그러니 이렇게 정리할 수도 있겠네요.『지극히 문학적인 취향』은 젠더화된 한국문학(장)을 정확하고 정밀하게 분석하고 비판하는 평론집이다.
덧붙여,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이 다루고 있는 범위는 한국문학에 국한되어 있지 않습니다. 영화를 비롯한 문화 전반을 세세히 다루고 있지요. 그래서일까요. 평론집에서 가장 힘겹게 읽히는 부분은 작품 해설을 모아놓은 3부입니다. 원래 평론집을 읽는 이유는 그런 글을 읽기 위해선데 말이죠.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에 비판을 가해볼 수도 있겠습니다. '문학=소설'이라는 등식을 너무도 굳건하게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나 언론의 수사를 끌어와 작품에 대한 시선을 단박에 요약하고 있다는 점 등등을 말이죠.
하지만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의 장점은 단점을 상회하고도 남습니다. 민주주의를 이룩하기 위한 공동의 자산으로 여전히 문학이 유효하다 믿으며 이렇게 분투하는 평론집은 쉽사리 만날 수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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