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한 번 김초엽을 장애적으로 읽어보려 합니다. 흥미로운 독해로 다가오길 바라요.
1. 기술: 20세기, 뉴욕주의 도시계획을 총괄했던 로버트 모제스는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습니다. 인종차별주의자였던 그는 존스비치공원에 흑인이 아예 접근조차 못하기를 원했거든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그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립니다. 경제적 사정상 흑인들이 버스를 주로 이용하니 롱아일랜드의 고가도로를 애당초 낮게 설계하면 되지 않겠냐는 것이었죠. 버스가 진입조차 할 수 없다는 악명 높은 고가도로는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STS의 대가인 랭던 위너는 로버트 모제스의 사례를 자세히 분석하며 기술은 세간의 통념과 달리 "간헐적이고, 제한되고, 별로 문제가 될 것이 없는 상호작용"이 아니라 "우리 일상적 존재의 맥락에 엉켜들면서 […] 우리 인간됨 자체에 한 부분이" 된 '삶의 형태'라고 단정짓습니다.
다시 말해, 기술(techne)은 정치(politeia)입니다. 그것은 부지불식간에 차별과 혐오를 재/생산하지요. 문득 소설이 하나 떠오르지 않나요? 소설집의 표제작인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말이에요.
소설의 배경은 "고차원 통로를 이용하"여 "시간 지연 없이 우주의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도달할 수 있"는 웜홀 항법이 개발되자 우주 연방이 경제성을 이유로 이전의 항법을 금지시킨 어느 미래입니다. "제때 떠나지 못"해 "가족이나 소중한 사람들과 생이별을 하게 된 사람들"은 어떠한 사회적
배려도 받지 못하지요. 이러한 모티프는 '문학3'에서 웹으로 읽을 수 있는 「달온의 밤」에서 변주되어 반복됩니다. 성간이동이 대중적으로 확산되자 "우주에 간다는 말은" 크게 "생애 한두 번 정도 태양계 여행을 떠나 가니메데와 이오의 기이한 표면을 감상하는" 일시적 여행을 의미하게 되거나
"지구에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 "밀려난" 영구적 정착을 의미하게 되었지요. 전자를 누리는 사람들은 후자를 택하는 사람들에 무심하고 무감합니다. 뮤른 행성과 보어 행성의 사태가 있었건만, 그들의 외계의 재난에 여전히 미적거릴 뿐이지요.
김초엽이 에세이에서 스스로 밝혔듯, 그녀는 어떠한 기술도 인류를 더 나은 세계로 인도해주지 못할 것이라 믿습니다. 새로운 항법이 누군가를 배제하듯이, 아니, 그에 앞서 성간 이동 자체가 누군가를 배제하듯이 말이에요.
이것을 가장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는 소설은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입니다. "얼굴에 결코 지워지지 않는 흉측한 얼룩"이 있어 멸시를 당했던 릴리는 인간 배아 시술을 완성시켜 아이들에게 "오직 뛰어난 특성들로만 구성된 삶은 선물"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연구는 "결과적으로 […] 세상을 배제의 층계로 나누"어 "아름답고 유능하고 질병이 없고 수명이 긴" 개조인과 "자신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믿"는 비개조인을 구획히켰죠. 저의야 어떻듯 릴리의 기술은 "경멸"과 "동정"이 섞인 "불편한 시선"을 만들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김초엽은 어째서 기술에 회의적인 것일까요? 포항공대에서 석사까지 받았는데 말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그녀의 술회한 과거를 잠시 엿볼 필요가 있습니다.
2. 장애: 김초엽은 보청기를 처음으로 꼈을 때 낙관적 미래를 기약했다고 합니다. "더 나은 성능의 보청기가, 새로운 난청 치료제가, 완벽한 인공와우가 개발될 그날을 기다리면서" 말이지요. 하지만 이내 그녀는 깨달았습니다. 정상으로의 회복을 목표삼아 기술이 교묘하게 자신을 결함 있는 존재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을요. "완벽한 보청기로 도움을 받고 청신경을 회복해서 무사히 소리를 듣는 미래"를 약속하며, "그럼으로써 […] 더 이상 말을 되묻지 않고 대화를 끊지 않으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는 […] 미래"를 약속하며, 기술이 청인을 위한 세계를 설계하려 한다는 것을요.
김초엽이 문제삼는 것은 기술이 장애를 해결해 주겠다며 은연중에 '정상성'을 상정하고 있는 순간입니다. 후술하겠지만, 장애는 사회적으로 구성되며 문화적으로 생성됩니다. 어떤 구조나 기능에 문제가 있어 장애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구조나 기능을 문제로 생각하기에 장애가 발생하는
것이지요. 미국 남부에 위치한 마서스 비니어드 섬은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사례를 제공합니다. 마서스 비니어드 섬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청각의 상실을 결함으로 인식하지 못했는데, 그것은 그들의 공용어가 수어였기 때문이었죠. "그들은 장애인이 아니었어요.
[…] 단지 듣지 못하는 사람이었지요." 올리버 색스의 말마따나 수어를 사용하는 농인은 '손상을 가진 환자'가 아니라 '독창작인 소수 언어를 사용하는 문화 공동체'의 일원입니다. 그들의 신체적 특성이 결함으로 인식된다면 그것은 주변의 사회와 문화가 그들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쯤에서 올해에 젊은작가상을 수상한 「인지 공간」을 펼쳐봅시다. 격자의 형태로 배열된 공동의 지식은 "발을 헛디디지 않을 만큼 강건한 신체"를 요구했고, "아주 작은 몸집으로 태어"난 이브는 격자에 진입하지 못해 자연스레 공동의 지식에서 소외되지요.
공동체는 이브가 일상을 무사히 꾸릴 수 있도록 "낮은 층수에만 접근할 수 있"는 "특수한 사다리"를 제작해주는데, "누군가가 매일 이브에게 긴 설명을 반복할 수도 없는 노릇"이란 진술이 함의하듯 이것의 근저에는 이브를 '의존적인 비정상적 존재'로 설정한 다음 '자립적인 정상적 존재'로
개조하여 주류 사회로 편입시키겠다는 음험한 계획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질문을 던질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그게 잘못된 건가요? 어찌됐든 도와주는 거잖아요.'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죠. 이브를 동등한 존재로 봐준다면요.
공동체는 이브를 하위의 존재라 생각합니다. "최초의 이야기마저 지워지고 있"다는 이브의 발견은 "성장한 정신은 성장한 신체만이 도달할 수 있"다는 전제 아래 "근거 없는 상상"이나 "몽상에 가까운 […] 허황된 생각"으로 취급됩니다.
'특수한 사다리'가 문제적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이브의 장애를 '극복 대상'으로 명시하며 이브의 고유한 감각을 '결핍'에 가까운 것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존재의 위계를 교묘하게 도입해 차별과 혐오를 정당화하고 있기도 하고요.
사실 이것은 머나먼 이야기가 아닙니다. 장애를 겪는 이들이 거의 매일 맞닥뜨리는 불편하고 불쾌한 상황이기도 하지요. 예시를 하나 들자면, 누군가 흰지팡이를 사용하고 있으면 사람들은 으레 물어보곤 합니다. '도와드릴까요?' 그들은 흰지팡이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감각이 정상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간과한 채 상대를 부족한 인간으로 격하시키고 있습니다. 『기억하는 몸』에서 이토 아사는 이것이 상당히 무례한 언사라고 지적하며, 장애의 감각은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편한 몸을 만들기 위해 분투해온 기나긴 시간의 축적" 속에서 "그 사람의 […] 아이덴티티"로서 긍정되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지요. 「캐빈 방정식」은 이러한 인식적 전환을 명징하게 보여줍니다. "뇌에서 시간을 인지하는 회로에 문제가 생긴" 유현화는 "시간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져 "시간 거품을 온전히 감각"해내기도 하지요.
약갸 논의가 흐트러진 감이 적잖이 있으니, 여기서 가다듬어 봅시다. 김초엽은 보청기를 착용했던 경험을 통해 기술이 표준의 장벽을 구축하여 차별과 혐오를 음험하게 공고화시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인지 공간」은 그것에 대한 자전적 소설이기도 하고요.
그녀는 이에 대응하여 크게 두 가지를 말하려 합니다. 첫째, 장애의 감각은 결핍보다 충만에 근접하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캐빈 방정식」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둘째, 장애는 사회적으로 구성되며 문화적으로 생성된다. 이것 역시 앞서 언급하긴 했지만, 이왕에 장애학을 인용했으니 부연하도록
하겠습니다. 휠체어 이용자는 언제 장애인이 될까요? 바로 휠체어를 이용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을 때입니다. 통로가 좁거나 빗길이 없을 때가 해당되겠죠. 그렇다면 수어 구사자는 언제 장애인이 될까요? 바로 수어를 구사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을 때입니다. 누구도 수어를 해석하지 못할 때가
해당되겠죠. 넌센스 퀴즈처럼 들리지만, 이것은 매우 중요한 함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곳곳에 경사로가 깔려져 있다면 휠체어 이용자에겐 이동의 제한이 없어지며, 수어 교육이 기본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수어 구사자에겐 소통의 제한이 없어집니다.
즉, 장애는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회와 문화의 문제지요. 실제로 세계 각지에서 행해진 지리학적·문화인류학적 연구는 이러한 시좌(position of view; 관점을 의미하는 point of view와 대별되는 단어)가 옳다고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자음과모음》 2019년 겨울호에 수록된 「브라운 모션」은 이것에 대한 소설이기도 하고요. 음성언어를 사용하는 원형 인류 조안은 후각언어를 사용하는 숨그림자 사람들 사이에서 정상 밖의 범주인 "괴물"로 지칭되지요. 하지만 후각언어를 사용하는 단희가 음성언어를 사용하는 지구에 있었다면
반대의 상황이 펼쳐졌을 겁니다. 자, 그렇다면 김초엽은 기술을 밑도 끝도 없이 불신하고 있는 걸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그녀는 장애를 극복하려 들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기술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3. 사이보그: 새로운 형태의 기술이 어떠한 윤곽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려면 웹진 비유 2019년 11월호에 수록된 「로라」를 읽어봐야 합니다. 소설에서 세계 트랜스휴먼 연합에 소속된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신체를 변형하고 개조하"여 "인간의 신체적 한계를 넘어서"려 합니다. 첨단의 기계로 온몸을
무장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듯이 말이죠. 그러나 '증강'과 '향상'을 내세운 트랜스휴머니즘은 모종의 이분법 속에서 한쪽을 수혜자로 가정한다는 점에서 차별과 혐오를 재/생산한 기존 기술의 논리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트랜스휴머니즘은 본질상 새로운 종류의 착취를 야기할 수밖에
없지요. 새로운 기술의 단서는 아예 다른 방식의 접근에서 나옵니다. "세 번째 팔이 실존하는 것처럼 느"끼던 로라는 "어긋난 현실과 인식의 차이를 바로 잡"기 위해 세 번째 팔을 어떻게든 부착하려 들죠. 겉보기에 로라의 결정은 "신체에서 무언가를 […] 추가한다는 점에서" 트랜스휴먼과 비슷해
보이지만, "끔찍한 불일치감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몸에 대한 훼손"까지 감행한다는 점에서 몸 정체성 장애를 지닌 사람들과 훨씬 비슷합니다. 일찍이 도나 해러웨이는 "기계와 유기체의 잡종"을 의미하는 '사이보그'가 수많은 이분법적 체계를 와해시키며 "우리의 존재론"이 되리라 적었죠.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로라는 "공통 언어를 향한 꿈"(=트랜스휴먼)보다 "이종 언어를 향한 꿈"(=사이보그)를 꾸고 있는 셈이며, 인간과 기계의 접합부를 통해 정상으로도 비정상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새로운 존재의 모형을 제시하여 자신의 "결함"을 '정체성'으로 확립시키려는 셈입니다.
결국 로라는 사이보그로 변모하여 "자주 진물이 흘렀고, 징그러운 흉터가 생겼"는데도 꿋꿋이 "세 번째 팔을 가진 채로 살아야겠다" 말할 만큼 신체의 기이한 감각과 화해하는 데에 성공합니다. 트랜스휴먼과 달리 누구도 착취하지 않으면서 말이지요.
김초엽이 구상하는 새로운 형태의 기술이란 바로 사이보그를 경유하여 "저마다의 신체와 감각으로 세계를 자유롭고 향유할 수 있"는 기술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훗날을 가정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앤디 클락이 주창한 '확장된 마음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감각은 신체에만 의존하지 않습니다.
가령 누군가 시계를 착용한 사람에게 "시간이 어떻게 되나요?" 물어보면 그는 '모른다'고 대답하는 대신 "잠시만요" 말하며 '안다'는 전제 하에 시계를 확인할 것입니다. 여기서 시계를 착용한 사람이 '단지 시간을 쉽게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실제로 시간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상당히
주목을 요하는 부분입니다. "무엇이든 간에 바로 거기에 있으며, 필요할 때면 언제나 값싸고 쉽게 활용할 수 있는 정보와 묶음으로", 즉 신체의 일부로 기계가 간주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죠. 통념과 달리 인간은 "벌거벗은 생물학적 유기체"가 아닙니다. "자연적으로 타고난 사이보그"죠.
「관내분실」과 「감정의 물성」은 어떻게 신체와 기계가 교접하는지 보여주는 소설입니다. 「관내분실」에서 도서관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고인들의 기억과 행동 패턴을" 데이터로 전환하는 전자적 보철을 이용해 "타인의 죽음이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을 해소합니다. 한편 「감정의 물성」에서
이모셔널 솔리드의 제품을 구매하는 사람들은 "중추신경계에 특정한 방식으로 작용"하는 정서적 보철을 이용해 우울과 같은 감정을 "실재하는 감각"으로 느낍니다. 두 소설의 인물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이보그가 되어 인지적·심성적으로 확장된 영역을 체험하는 셈이지요.
결국 "우리는 기술의 공생자이고, 생명과 기계의 혼종체"입니다. 인간과 기계를 서로에게서 분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죠. 손을 씻는 단순한 행위만 하더라도 세면기, 수도꼭지, 배관시설, 급수시설 등 수많은 기계가 동원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앞서 넌지시 언급한 '자립적인 정상적 존재'와
'의존적인 비정상적 존재'의 구분이 자의적이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인간과 기계의 긴밀한 연결 앞에서 순수한 자립의 개념은 허구에 불과하기 때문이죠.
김도현은 장애의 개념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고찰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일할 수 있는 몸을 선별하기 위해 일할 수 없는 몸을 명확히 규명하고자 했고, 이로부터 '장애인'이라는 개념이 '발명'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근대사회로의 전환기에 생겨난 장애인이라는 범주는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적 노동 체제에서 배제당한 사람들, 즉 '불인정 노동자(unrecognized worker)' 집단을 가르킨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낸시 프레이저도 비슷하게 지작합니다. "[산업사회로의 전환기까지만 해도] 의존은 비정상과 반대되는 정상적인 조건이었으며, 개인적 특징이 아닌 사회적인
관계였다. […] 의존에는 어떠한 윤리적 낙인도 찍혀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도 되지 않을까요? '자립하는 정상적 인간'도 '의존하는 비정상적 인간'도 없으며 그저 '연립하는 사이보그'만 있다고.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를 다시 설계하려 하지 말고 세계를 다시 설계하려 해야 한다고.
소아마비를 앓았던 건축가 로널드 메이스는 이러한 인식의 연장선에서 보편성에 입각해 색다른 사유를 주문했습니다. 특정 존재를 배려하는 설계가 궁극적으로 모든 존재를 배려하는 설계라고. 이른바 보편 설계(universal design). 가령 저상 버스는 휠체어 이용자의 편의를 극대화하면서 동시에
유아차 이용자의 편의도 극대화하지요. 「인지 공간」의 스피어와 「브라운 모션」의 의미합성기도 그렇습니다. 스피어는 공동체의 일원이라면 누구든 "세계의 모든 기억을 남"기면서 "더 많은 종류의 진실을 만들" 수 있게 돕고, 의미합성기는 "늙고 쇠약해져 […] 스스로 입자를 합성할 수 없는
사람들"도 꾸준히 대화에 참가할 수 있게 돕지요. 하지만 "신성모독이라도 되는 듯이" 스피어에 분개하는 공동체의 모습과 "사람들이 나를 위해 그 '대화'를 멈춘 적 있"냐는 조안의 반문에서 확인되듯 이러한 재설계는 거대한 인식적 개변이 뒤따르지 않는 한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김초엽은 사이보그에 내장된 어떤 본능이 우리를 끝내 밝은 미래로 인도하리라 확신합니다.
4. 공생: 1967년, 린 마굴리스는 20세기 초중반의 문헌들을 토대로 엽록체나 미토콘드리아 같은 세포의 소기관이 원래는 별개의 세균이었으나 융합의 과정을 거쳐 세포의 일부가 되었다는
'연속 세포내공생 이론'을 발표했습니다. "나는 종이라는 개념 자체가 공생을 전제로 한다고 믿는다"고 자신할 만큼 그녀는 '공생'을 진화의 주요한 추동력으로 삼았죠. 「공생 가설」에서 김초엽은 "인간성이라고 믿어왔던 것이 실은 외계성"일지도 모른다는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마굴리스의 이론을
사실의 차원에서 당위의 차원으로 끌어내는 자연주의적 오류를 의도적으로 범하며 자신의 신념을 독자에게 관철하려 합니다. 소설에서 연구진은 일련의 연역과 귀납을 통해 "별개로 출발한 두 종이 […] 공생하"여 진화하지 않았다면 인류는 "오직 욕구만을 위해 행동"하여 지금 같은 "지성의 진화와
문명의 탄생"은 도래하지 않았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기원=본질이 "자기 완결적이고 자율적인 개체"에 있지 않고 "다른 생물과 물질과 에너지, 그리고 정보를 교환하는 공동체"에 있다는 사실을 지시하며, 나아가 그것이 "오래된 그리움"을 환기하는 류드밀라의 그림처럼 인간의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지시합니다. 우리가 공생에서 태어났으므로 공생하며 살아야한다는 소설의 결론은 《문학동네》 2020년 봄호에 수록된 「오래된 협약」에서 행성 단위로 발전합니다. 대기 중에 분포한 클로포늄의 독성을 중화하기 위해선 오브를 먹어야 하는데, 벨라타의 사람들은 이를 종교적
금기로 여기지요. 태초에 그들의 선조가 "행성 자체로 기능"하는 오브에게서 "행성의 시간을 나누어" 받는 대신 "개체 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그들과 더불어 살기로 협약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생물들을 위하여 스스로 적당한 물리·화학적 환경을 조성할 수 있도록 피드백 장치나
사이버네틱 시스템을 구성할 수 있는 거대한 총합체"인 '가이아' 속에서 공생은 당연한 의무라는 듯 말이지요. (여담으로 공생 이론의 마굴리스와 가이아 이론의 러브록은 절친한 관계였으며 서로에게 계속해서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김초엽은 믿습니다. 「스펙트럼」에서 희진이 태생적인 한계로 "루이가 '다르다'고 표시하는 수많은 붉은색을 사이의 차이점을" 전혀 구분하지 못했는데도 종국에는 색채언어를 드문드문 읽어냈던 것처럼 공생을 향한 인간의 본능이 우리를 표준의 장벽이 부서진 어느 불가능한 미래로 안내할
것이라고요. 그러고보면 김초엽이 창조한 인물들은 하나같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온갖 자료를 참조해 소외된 존재의 시좌를 내면화하고, 기꺼이 세계와 맞서기 위해 '목숨을 건 도약'과 '어둠 속의 도약'을 문장 그대로 단행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최후의 라이오니」가 보여주듯
아름다운 순간으로 귀결되지요. 언젠가 'SF'의 어원이 되는 '사이언티픽션'을 최초로 제시한 휴고 건스백은 "오늘의 허황된 허구"와 "내일의 엄연한 미래"과 과학소설의 모토라고 적었습니다. "가상의 세계를 탐구하는 과학소설"을 통해 "가장 유토피아적인 기술"에서 "디스토피아를 고안"하며
끊임없이 사고실험을 수행하는 김초엽의 소설을 읽으며 우리가 장애의 맥락을 계속해서 숙고한다면, 그녀의 소설이 선사하는 아름다운 순간은 더 이상 '공상'이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긴 타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족: 저는 이제 김초엽의 신작을 읽으러 갈게요. 이번 타래를 읽고 장애학에 관심이 생기신 분들은 리트윗에 적어놓은 관련 저작을 읽으시면 되겠습니다.
사족: 위에서 나온 이야기를 좀만 더 할게요. 식당이나 카페 바깥에 설치된 테라스를 보며 '예쁘네'라는 생각보다 '경사로가 없네'라는 생각을 먼저 하는 미래가 오기를, 우리나라의 국어는 '한국어'와 '한국 수어'인데 어째서 다들 '영어'를 제1외국어로 공부하는지 고민하는 미래가 오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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