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냐냔 Profile picture
Oct 6, 2021 124 tweets 15 min read Read on X
자신과 그룹은 어떨지. 잘 버틸 자신이 없었다. 머리는 잊어도 한구석 깊숙이 패인 허무함이 언제까지나 잔존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한때 그를 뜨겁게 달궜던 열정도, 유대도 사랑도. 한순간에 뭉텅 잘려나간 빈자리에는 그저 공허함과 우울이 도사리고 있을 뿐일 것이다.
이세진은 둥글게 모인 맴버들의 얼굴을 잠깐 바라봤다가, 입술을 뗐다.

"다들 잘 들어요~ 제가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가 다소 비현실적일 수 있어요."

다들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이세진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도 믿어야 됩니다. 지금 상황도 말이 안되는데,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믿는 수밖에 없어요."

이세진은 어디서부터 말해야할지 고민하다가 구구절절 늘여놓기보다 결론부터 스타트를 끊기로 했다.

"우선, 문대는 살아있어요."

"What!!??"

"사실입니까??"

"장례도 치뤘잖아!"

흥분한 차유진과 김래빈, 그리고 배세진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가 다시 앉았다.
선아현은 제 두 손을 꽉 맞잡으며 초조하게 뒷말을 기다렸다.

"세,세진이 말. 끄,끝까지... 들어봐요."

"예, 저도 최근까지 몰랐는데 살아계시더라고요~ 모습은 다르지만."

이세진은 휴대폰 갤러리를 뒤적이다가 동영상 하나를 재생시켰다. 신청려와 류건우가 했던 대화였다.
["박■대는 죽었어."]

저번에 들었을 땐 멀쩡하던 동영상에 노이즈가 껴서 박문대의 이름이 잡음에 뭉개졌다. 눈치빠른 류청우가 이세진이 말하려던 틈에 끼어들었다.

"잘들리지 않는 이름, 문대인거지?"

이세진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영상을 보여줄 필요는 없었지만,
제 말보다는 영상이 더 믿음을 줄 것이다.
처음부터, 그리고 류건우가 박문대의 삶을 언급했던 것을 지나 노래를 부르던 그 끝까지. 가만히 숨을 죽이고 청각을 잔뜩 곤두세우던 맴버들은 하나같이 벙찐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보다가, 해명을 원하는 듯 이세진을 쳐다봤다.
"청려 선배님은 알고 있었단말입니까? 문대, 아니 건우형께서는 저희에게는 왜 말을 안해주시고..."

다소 서운한 낯의 김래빈이 중얼거렸다. 그 말을 끊고 배세진이 말을 얹었고.

"그러니까, 건우형이 문대라고?"

선아현이 혼란스러운 듯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이,이게...어떻게..."
"확실히. 건우형은 문대랑 닮은 점이 많았어."

"문대형이었어요! 문대형이 부활해서 돌아온 것 같았어요."

한껏 어수선해진 분위기에 이세진은 손바닥을 세게 맞부딪혔다.

[짝-]

"자, 집중!"
너도 나도 입을 열려던 맴버들이 한순간에 조용해지고 나서야 침묵 속에 이세진은 입을 열었다.

"문대는 원래 류건우라는 사람이었는데, 빙의 아시죠 다들?"

어려운 단어가 나오자, 차유진에게로 시선이 쏠렸다. 차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있게 말했다.

"I know! 얕보지 말아요."
"눈을 떠보니 어느순간 박문대로 빙의했다네요. 그리고 문대가 죽고 나서는, 원래 몸으로 돌아온 것 같다고 청려 선배님이 말씀해주셨어요."

소설같은 이야기에 다들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지금, 문대의 존재가 지워지고 있고."

배세진이 말하고, 류청우가 입술을 뗐다.
"머지않아 우리도 문대를 잊게 될 거라는 거지?"

한참 생각하던 류청우는 다시 말을 이었다.

"...건우형이 얼마 전에 친척 중에서 화재로 돌아가신 분이 없냐고 물었어. 다들 알지? 건우형이랑 나는 친척이야. ...지금 내 기억으로는 없는데, 그때는 있었던 것 같다고 그랬거든."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짐작컨데, 그 분들은 분명 돌아가신게 맞을 거야. 문대처럼 잊혀졌을 거라고 생각해. 이 상태를 막지 못한다면,"

류청우는 굳은 낯으로 고개를 들었다.

"박문대라는 존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거야."
"잊는 거라면...!"

골똘히 생각하던 배세진이 벌떡 일어나 볼펜과 노트를 가져왔다.

"기록하면 되잖아!"

배세진은 곧장 노트를 펴 새하얀 종이 위로 박문대라는 이름 세 글자를 적었다. 모두의 시선이 종이 위로 쏠렸다.
꾹꾹 눌러 곧게 쓴 이름이 흐려지는가 하더니 이내 새하얀 종이만 남기고 사라졌다. 볼펜이 눌린 자국도 없이, 애초에 박문대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배세진은 입술을 꾹 깨물더니 세로로 읽을 수 있는 간단한 트릭의 눈속임 글자를 적어냈다.
기발한 생각이었지만, 그것조차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모든 글자가 싸그리 사라졌다. 박문대를 의도하는 글은 뭐든 순식간에 사라지는 건가? 새하얗게 질린 배세진이 힘없이 펜을 놓쳤다.

섬찟했다. 세상이 박문대를 지우고 싶어한다는 것이, 새삼스레 와닿았다.
결국에 자신도 무력하게 그를 잊고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잃게 될 미래가 눈앞에 선연히 비췄다.

'발버둥을 쳐봤자 잊게 될 텐데.'

"이런 걸...어떻게 막아."

그 순간, 배세진의 기억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박문대의 얼굴은 깨진 유리조각마냥 조각나서 시커먼 판만 남기고 후두둑, 아래로 떨어졌다.
순식간에 등 뒤로 식은땀이 솟구쳤다. 눈을 크게 뜬 배세진이 겨우 고개를 들어 맞은편의 이세진을 쳐다봤다. 눈동자에는 거친 동요가 끊임없이 몰아쳤다.

"이름, 이름이 뭐였지? ...누구였지?"

배세진이 순식간에 기억을 잃었다. 반면, 이세진은 멀쩡히 기억하고 있던 이름을 입밖으로 내뱉었다.
"박문대. 문대요."

간절함과 들리는 세 글자가 맞물려 배세진은 단번에 거미줄처럼 줄줄이 기억을 떠올렸다.

'이건...아마.'

배세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기억났어. 단번에...! 내 생각에는 이 상황에 체념하거나 무너지면 그대로 순식간에 기억을 잃는 것 같아."
"그리고 문대형 계속 생각하고 있지 않으면 잊어요!"

차유진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써 박문대를 잊는 걸 늦출수 있는 방법이 있다. 모든 맴버들의 머릿속에 스쳐지나간 결론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럴수는 없지.

"그렇다면, 잠을 자고 일어나면 다 잊을 수도 있어."
"그 시간동안 문대 꿈이라도 꾸지 않는 한, 기억할 수 없을 테니까. 해결방안을 찾아야해. 적어도, 우리는 문대를 기억할 수 있는."

류청우가 휴대폰을 꺼냈다. 이어지는 전화번호를 내리다가 "신청려 선배님" 그 위에서 멈췄다.
이세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저도 그에게 연락을 해보려던 참이었으니까.

"문대의 원래 정체를 알고 있던 청려 선배님이라면 이 상황을 해결할 실마리를 아실지도 몰르죠."

이세진이 말을 끝내자마자 류청우는 주저없이 전화 연결 버튼을 눌렀다.
-뚜르르... 뚜르르...

수신음이 몇 번 울리지도 않았는데 신청려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후배님 일로 연락했죠?"

"네, 지금 상,"

이세진이 하려던 말을 중간에 잘라내고 신청려는 곧장 본론을 꺼내들었다.

-"결론부터 말할게요. 미안하지만 지금 이 상황, 저도 파악이 안돼요."
-"후배님은 알지도 모르겠네요. 당장은 후배님이 깨어나는 걸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요."

테스타 맴버들 중에, 신청려가 지칭하는 후배님이란, 박문대를 뜻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이세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제가 아닌, 류청우가 전화를 걸 때부터 신청려는 눈치를 챘다는 거겠지.
테스타 전원이 박문대가 류건우였고, 또 류건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걸. 눈치도 빠르고 머리도 잘굴러가는 남자였다.

'문대가 깨어나면, 정말 브이틱한테 빼앗기는 거 아냐?'

이세진이 께름칙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차운진이 냅따 소리질렀다.
"건우형 우리 매니저에요! 그리고 곧 테스타 보컬도 할거예요! 브이틱 보컬 아니에요! 넘보지 말아요. Okay?"

꽤나 강단있는 발언이었지만,

-"하하, 글쎄. 적어도 브이틱은 무대에서 사고난 적이 전무한데. 앞으로도 없을 예정이라서요. 이제 건우형 목숨은 하나니까, 아끼는 편이 좋지 않겠어요?"
신청려의 신랄한 직설에 장렬하게 실패했다. 자기가 들은 게 맞냐는 듯 차유진은 입을 떡하니 벌렸고,

"나,나 때문에..."

선아현은 창백해진 낯으로 중얼거렸다.
그걸 보고있던, 얼굴이 시뻘개진 배세진이 납치범 소리를 입밖으로 내뱉기 전에 이세진이 다급하게 그 입을 틀어막았다.
화를 꽉 밀어누른 이세진이 말을 내뱉었다.

"아이고~ 도움이 안돼서 아쉽지만 감사합니다! 청려 선배님~ 혹시 해결 방법을 찾으면 연락 주세요."

-"그러도록 할게요. 그럼."

신청려만 보면 주먹을 쥐던 박문대에게 격한 동질감을 느낀 맴버들이 다시 고민에 휩싸였다.
잠깐의 정적 속, 류청우가 말했다.

"문대가 깨어날 때까지만 버텨보자. 가망이 없는 건 아니야. 생명에 지장은 없다 했잖아."

류건우는 그 높은 곳에서 떨어진 샹들리에에도 크게 상처를 입지는 않았다. 등 뒤에 얻어맞은 것 같은 타박상이 생기긴 했지만, 깨진 유리조각이 박히긴 했지만
치료할 수 있는 외상뿐. 우려했던 잔류 전기에도 류건우는 이상하리만치 멀쩡했다. 깨어나는 건 금방이라고 말한 의사의 목소리가 류청우의 귓가에 맴돌았다.

"잠은 돌아가면서 자는 것이 어떻습니까? 일주일째 문대형이 의식을 못찾고 있으니 며칠 더 걸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어지는 래빈의 의견에 맴버 전원이 고개를 끄덕였고, 류청우는 차유진을 보며 입술을 뗐다.

"내 생각에도 그래. 유진아, 자고 일어나서는 완전히 문대를 잊었던거야? 지금은 모두 기억해?"

청우의 질문에 차유진은 기억을 되짚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푸른 눈동자를 굴렸다.
"Umm....지금은 다 알아요. 자고 일어나서 조금 기억했어요! 근데 얼굴, 이름 전부 기억 안났어요. 문대형같은 사람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한 기분? Feel?"

"아, 흐릿했다는 거지? 나중에 가면 반에 있었나 싶은 친구 한 명쯤 있잖아...!"

배세진이 손뼉을 치며 차유진의 말에 설명을 보탰다.
불현듯 이세진이 한쪽손을 들며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여기서 잠깐 물어볼게요~ 문대 잊어도 괜찮은 사람?"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이세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세진이는 절대 싫습니다~"
그러자,

"나,나도 절대 싫어."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한 선아현을 시작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기억할겁니다!"

"No! 절대 안잊어요!"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잊고 싶은 사람이 있겠어? ...잊기 싫어."

약속이라도 한 것 마냥 다들 같은 답을 내놓았다. 이세진은 들었던 손을 내리더니 일전의 장난기 묻은 목소리를 걷어냈다.

"...비록 다른 몸이지만 문대는 살아있으니까. 굳이 기억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까봐 물었어요."
눈을 내리깐 이세진의 언뜻 스쳐지나간 낯은, 감정은. 겹겹이 쌓인 푸른색으로 얼룩져 심연처럼 시커멓게 넘실거렸다.

깊이, 더 깊이. 제 안에 숨겨왔던 감정.

모두가 힘든 걸 알기 때문에 굳이 드러내지는 않았지. 아마 다른 맴버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관 앞에서 박문대의 죽음을 부정하던 류청우,

올리 없는 박문대를 기다리던 선아현,

상하기 직전까지 박문대가 준 간식을 아껴두다 입에 꾸역꾸역 구겨넣고서 결국에 토한 차유진,

작업실에 처박혀서 박문대의 모든 무대를, 목소리를, 순간들을 돌려보며 매일을 눈물로 지새운 김래빈,
앞에서는 맴버들을 다독여줬던 배세진도 밤이 되면 이불에 고개를 처박고 울었다.

그렇게 흘린 눈물들이 모이고, 또 모여서 가득 차고, 끝끝내 흘러넘친 눈물에 잠긴 테스타가 선택한 건.

바닷속이 지상이라도 되는 것마냥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을 멀쩡하게 흉내내는 것.
위기와 슬픔을 딛고 일어난 사람처럼 다들 푸르고 차가운 감정을 한계까지 내리눌렀다.

단지 대중에게 일거수일투족을 노출하는 직업인 까닭으로, 뭍으로 올라오기 보다 살을 찢어 아가미를 피워내는 쪽을 선택한 것이었다.
"문대를 잊어도 저희에게 건우형으로 남겠죠. 어쩌면 그걸로 충분할지도 몰라요. 근데 있잖아요, 그럼 무슨 의미가 있는 거예요?"

"우리랑 같이 올랐던 무대, 함께 지냈던 추억, 감정. 모든 걸 잊으면 무슨 소용이냐고요."

이세진은 느슨하게 풀어뒀던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분명 지금이 더 높은 위치이지만, 더 빛났던 건...갖고 싶은 건, 뼈에 사무치도록 그리운 건. 문대랑 같이 있었던 그 날들이더라고요."

이세진의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방울이 턱끝에 아슬아슬히 매달렸다가 툭, 떨어졌다.

떨리는 목소리로 힘겹게 내뱉은 말.

"난 박문대 못 놓아줘요."
["외면하고, 잊으려고 안달난 사람같이."]

문득 신청려의 목소리가 스쳐지나갔다. 이세진은 고개를 숙이고 팔뚝으로 제 눈가를 거칠게 닦고서, 코도 한 번 삼키고나서야 자신있게 턱을 쳐들었다.

"다들 똑바로 보고. 기억하려고 안달 내봅시다."
네가 우리를 놓쳐도, 세상이 널 거부한다는 이런 터무니없는 상황 속에서도 절대 놔줄 순 없지.

이세진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씩 웃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중도 포기는 없는 거 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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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대를 기억하기로 한지 26시간. 맴버들은 의식적으로 박문대에 관한 이야기를 입밖으로 계속 내뱉었다. 체력은 점점 바닥을 쳤고, 피곤한 눈꺼풀을 억지로 끌어올려가며 다들 그렇게 버티던 찰나,

"저희 슬슬... 잠을 자는 인원을 나눠야될 것 같습니다. 이대로라면..."
피곤에 찌든 김래빈이 퀭하게 중얼거렸다.

이대로라면 무조건 전멸이다.

다들 조금만 더 버텨보자고. 그렇게 미뤄왔던 순간을 더 미룰수는 없었는지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렇게 이어진 정적 속, 까칠해진 얼굴을 쓸어내린 류청우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여태 둥굴게 모여앉아있는 맴버들을 돌아봤다. 파리하게 질린 배세진이 눈에 확 튀었다. 다들 근래에 편안한 수면을 한 건 아니라 하나같이 창백한 인상이었지만, 배세진은 그 중에서도 유난히 돋보였다.

"못버티겠는 사람 있어?"
류청우의 말에도 그래도 끝까지 손을 들지 않고 뻐기는 것도 그다웠다. 선뜻 나서려하지 않는 분위기에 그나마 쌩쌩해보이는 차유진이 입을 뗐다.

"전 괜찮아요! 근데 세진형은 안괜찮아요. 자야돼요!"
불린 제 이름에 새하얗게 질린 배세진이 고개를 저었다.

"아냐, ...나 괜찮아."

'안 괜찮아 보이는데.'

보다못한 이세진이 배세진을 일으키고선 방으로 등을 떠밀었고.

"자자, 괜히 버티지말고 주무시죠."

"시,싫어!"

떠밀려 주춤거리던 배세진이 돌연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기 시작했다.
억지로 버티고 서있는 배세진을 바라보던 이세진은 한숨을 쉬더니 입을 열었다.
피곤으로 붉게 충혈된 배세진의 눈이 안쓰러웠다.

"형님 그러다 정말 쓰러져요. 문대 일어나면 자느라 보지도 않으려고요?"
"나 진짜...괜찮아."

타이르는 이세진의 말에도 배세진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이대로 잘 순 없었다. 설령 맴버들이 박문대를 기억한다고 해도, 내가...

한참 부들거리던 배세진은,

"....자고 일어나서 박문대 이야기를 들어도, 떠오르지 않으면 어떻게 해."
울먹이며 입술을 꾹 짓씹었다. 메마른 살갗 위로 앞니가 파고들어 피가 베어나왔다. 비릿한 혈향이 입안에 쓰게 맴돌았다.

"저 줄초상 치르기 싫어요. 괜히 버티지 말고 자요."

배세진의 말에도 이세진은 한치의 물러남 없이 단호하게 끊어냈다.
지금 상황으론 체력에 한계가 온 배세진이 제일 먼저 쓰러질게 분명하니 어찌됐건 배세진을 재워야한다. 이성적인 방향으로나 효율성으로나. 이세진은 피곤한 기색을 누르며 다시 배세진에게 말을

"... .... "

하려했다.
돌연 제 어깨를 세게 쥐어짜내는 악력에 배세진이 인상을 찌푸리며 이세진의 두 팔을 거칠게 쳐냈다.

"뭐하는 거야, 아프잖아!"

순식간에 힘없이 이세진의 두 팔이 떨어졌다. 짜증스럽게 그대로 뒤돌아본 배세진은 표정을 굳혔다.

"...안 나와."
이세진은 형용할 수 없는 공허와 두려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멀거니 서있었다.

...

...죽은 눈동자가 천천히 굴러가더니 배세진과 마주친 그 순간, 이세진은 울 것처럼. 고통스럽게 무너진 얼굴을 하고서 입술을 뻐끔거렸다.

"...."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배세진은, 충동적으로 제 앞의 몸뚱어리를 끌어안았다. 이세진이 고개를 숙이자 어깨죽지가 축축해지는 걸 느끼며 배세진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포기하지마. 이세진 네가 그,그랬잖아. 중도 포기 없다고 했잖아."
눈썹을 늘여뜨린 이세진이 흐려지는 시야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얕은 빗물처럼 흐르던 눈물이 굵게 맺혀 뺨을 헤집고 배세진에게 스며들었다.

"...형 어쩌죠? 이름이, 그 애와 연관된 모든 게... 목소리가 안 나와요."

문대야, 난 어떻게 해야할지.

너 하나 기억하는 게 왜이리 어려운지.
******
....roding....
[선택 강제까지 23시간 58분 02초]
[상태 이상 지속‼️]

->삭제 대상 : 박문대
... ....roding,....

error‼️....

[ 정상화 거부 대상을 찾는 중... ]

....
....‼️ 발견‼️

[가속화 적용대상 : 류청우, 배세진, 선아현, 이세진, 차유진, 김래빈]

가속화 진행 시작.

눈을 감은 류건우의 얼굴 위로 푸른 상태창이 조용히 떴다가, 가라앉았다. 고요히 닫힌 눈꺼풀 아래로 도르륵, 눈동자가 굴러갔다.
텅 빈 큰서트장. 무대 한 가운데 산산이 부서진 샹들리에. 타다 남은 붉은 천. 사방으로 퍼진 반짝이는 유리 조각. 꺼져버린 화려함 밑에 깔린, '류건우.'

류건우는 샹들리에 밑에 피를 흘리며 죽은 것마냥 꿈쩍도 안 하고 있는 자신을 내려다봤다.

...이건 좀 찝찝한데.
"상태창."

아무것도 뜨지 않는다. 상태창을 불러도 나오지 않는다.

'뭐야...그럼 진짜 내가 죽기라도 한건가?

떠오르는 가설에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그러니까 저건 내 시체고, 난 영혼 상태이고?

'아냐... '

그렇다기에는 보이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시체를 그대로 내버려 뒀을리도 없겠지.

나는 시체가 있는 곳부터 관중석까지를 쭉 둘러봤다.

'내가 밀쳤으면 저쯤. 빗물 때문에 바닥이 미끄러웠으니까 더 멀어져서...'

눈대중으로 어림짐작한 거리를 바라봤다.
운이 나빠도 튄 유리조각이랑... 팬스가 있으니까 충격은 한 번 흡수해서 바닥에 떨어진 타박상 정도.

됐다.

'일단 선아현은 살았다.'

비교적 무사히.
지금 난 사경이라도 헤매는 건가? 아니, 죽었다는 것도 완전히 배제할 순 없지. 백일몽때도 떴던 상태창이 안 뜨니 말이다.

관중석을 보고 있던 몸을 돌렸다. 뒤를 돌았더니,

'아 X발 깜짝이야!'

죽은 줄 알았던 내 시체가 날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더라. 순식간에 온 몸의 피가 식었다.
"야,"

"이것 좀 치워봐."

류건우가 들썩이며 몸을 일으키려했다. 순간 샹들리에를 다가가 밟아버릴 뻔 한 걸 억지로 눌러 참았다.

저 새낀 뭐지? 또 다른 나?

"머리 굴리지말고 이것 좀 치워 달라니까. 아프지는 않은데. 꼴이, 하....됐다."
몸을 일으키려 시도한 류건우는 포기한 듯 몸에 힘을 뺐다.

"너 뭐야"

"류건우."

찝찝한 기분에 뒷걸음질 치다가 순간 밑으로 훅, 떨어졌다. 무대의 끝자락이었다. 그대로 땅바닥으로 처박을 줄 알았더니, 의외로 푹신한 느낌이 내 몸을 감쌌다.
전에는 없었는데, 영화관에나 있을 법한 의자에 앉아있었다. 적어도 여기가 현실이 아니라는 건 알겠군.

달빛이 스포트라이트처럼 샹들리에에 처박힌 류건우를 내리쬐고 있었다.

"이대로 둘거야? 죽을텐데."
저걸 다시 가서 도와야하나? 아니면 현실의 내가 죽나?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내 생각을 읽은 듯, 류건우는 바로 대답했다.

"아, 안 도와줘도 돼. 이해 못했으면 말고."

아리송한 말에 짜증이 솟구쳤다.

'내가 언제부터 저렇게 싸가지가 없었지.'
류건우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창백한 입술을 붉은 피가 적셨다.

"넌 원래 빌어먹을 새끼잖아. 어디서 내숭이야. 꼴 같잖게."

보자보자하니 다 죽어가는 놈이 말을 좆같이 했다.

"뭐 이새끼야?"

"왜 이새끼야."
'됐다. 싸워봤자 내 얼굴에 침뱉기지.'
류건우와 싸우는 류건우라, 남이 봤으면 꼴이 좀 웃겼겠네. 내가 등받이에 등을 완전히 기댔더니, 류건우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계속 미루고 미루더니. 넌 도대체 안 돌아가는 이유가 뭐야?"

"박문대로?"

뭐 중요한 이유가 있었던가. 아, 그건가?
"내가 돌아가면 우리 엄마 아빠는 어쩌라고."

굳이 류건우를 완전히 포기할 이유가 있나? 물질적으로 풍족한 건 박문대나 류건우나 마찬가지인데.

"...."

류건우가 돌연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정신차려 미친놈아. 너도 알고 있잖아."

"뭘."
"그거 너희 엄마아빠 아닌거."

....그랬나? 어쩐지 박문대일 적 한 번도 찾아간 적이 없던 것 같다.

아, 돌아가셨지. 근데 그게 왜? 세계만 다를 뿐 이쪽도 분명 내 부모님이다. 똑같은 사람이니까. 기억도 있겠다, 완전히 내가 소속되는 건 얼마 남지도 않았다.
내 생각을 읽은 류건우가 질색하는 낯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내가 너 빌어먹을 새끼라고 했지."

그래서 뭐 어쩌라고. 다시 혼자로 돌아가라고? 또 혼자서 살아남으려 고군분투 해야하나?
"혼자는 살아남기 각박한 거 알잖아. 세상 살아가는 사람이 차고 넘치는데 그 중에 나를 신경쓰는 인간이 어딨다고."

혼자 살며 느낀 건, 내 행동은 오롯이 내 책임으로 되돌아오는 것. 무엇이 됐든 간에 그렇다.
혼자 내몰린 그 기분. 주변을 둘러봐도 사람들은 끼리끼리 몰려 금을 그어놓는다.

그걸 내가 밟으면 안되는 거지. 이방인이니까.

돌아갈 곳 없는 나는 다시 작은 내 원안으로 들어가는 것밖에 길이 없었다. 아무리 현실이 개같고 힘들어도 난 나아가는 길밖에 트여있지 않은데.
혼자서. 원래 그렇잖아. 사람들은 남이랑 깊이 연관되는 걸 꺼름칙하게 여긴다. 괜히 무슨 일에 말려들까봐. 더욱이 아무것도 가지고 있는 게 없는 인간이라면 기피하게 되는 건 당연한거지.
박문대가 죽고, 류건우의 안정된 관계 속에 나오는 감정은 더럽게 달았다. 외로움에 무뎌지고 혼자 사는데에 익숙해졌는 줄 알았는데. 막상 놓기가 힘들더라.

"애새끼처럼 굴지 좀 마. 니가 언제부터 혼자였다고."

류건우가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다 부질 없네. 애쓰면 뭐해. 정작 네가 외면하고 있는데."

비웃던 류건우가 사라지고, 샹들리에가 위로 부유했다. 시간을 거꾸로 돌린 것처럼 흩어진 유리 조각들이 허공에서 맞춰지는가 하더니 멀쩡해 보이는 샹들리에가 다시 천장에 매달려 화려하게 빛났다.
순식간에 사람들이 물밀듯 밀려왔다. 무대가 다시 짜맞춰지는 광경을 멍하니 보다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더니.

그대로 시야가 반전됐다. 물결처럼 불빛으로 일렁이는 관중석의 불빛들, 마이크를 쥐고있는 나.
거대한 화면에 떠오른 내 얼굴은.

...박문대였다. 멍청한 얼굴로 카메라를 보자마자 시끄러운 함성소리가 여기저기 터졌다. 돌연, 양옆에서 누군가가 날 끌어안았다. ...이세진, 류청우, 차유진, 김래빈, 배세진, 선아현. 전부 다 익숙한 얼굴들.
숨막히도록 끌어안은 맴버들에 짓눌려있는데 여기저기서 축축한 물기가 느껴졌다.

너희 표정들이 다 왜 그래. 뭔데 울고있어.

일렁이던 관중석의 불빛들이 하나 둘 꺼져가고, 화면에 비친 맴버들한테 껴안긴 내 모습이.
박문대의 형체가 흐려져갔다.

"형, 안돼요! 가지마요 제발."

"시,싫어 문대야. 너 잊기 싫어."

차유진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터질듯 날 꽉 끌어안았다. 일그러진 채 눈물을 방울방울 쏟아내는 선아현의 얼굴을. 다들 말을 쏟아내려 동시에 입을 여는, 애닳은 표정들을.
꽉 붙잡은 손길들을 느끼고 나서, 그제서야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류청우의 말들이 선명히 떠올랐다.

'...난 혼자가 아니었네.'

멍청하게 뭐에 그렇게 목을 맸는지. 류건우로 돌아가서도 난 왜 결국 다시, 내 발로 돌아왔는지.

막혀오는 숨을 난,
----
"허억!,"

순간 감긴 눈이 트였다. 숨을 다급하게 들이마쉬고 나서 나를 짓누르던 압박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차유진이 날 끌어안고 울고 있더라. 새하얀 천장에 몰려든 맴버들이 입을 뻐끔거렸다. 다들 절박한 표정으로 금붕어마냥 뻐끔거리다가 참다못한 이세진이 내 손을 끌었다.
[-너, 박문대.]

낭패였다. 다 들켰군. 어떻게 알게된 경로는 지금 별로 중요하지 않지.

"상태창."

[ Enjoy your happy life! ]

※오류 보상 선택 강제까지 30초
‼️상태이상 지속! : 삭제 대상 박문대
...error 정상화 거부 대상 [ 류청우 배세진 선아현 이세진 차유진 김래빈 ]

->받기
->백업
다들 벙찐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시간이 별로 없네. 재볼 것도 없지. 결정은 이미 났으니까.

"상태창...?"

"나 잊기 싫어요!"

"지금 어디보고있,"

쏟아지는 질문에 망설임 없이 백업 버튼을 눌렀다.

[띠링-]
[백업까지 10...9...8...]

"잊어."

"난 시,싫어 문대야!"

"어? 문대문대! 목소리가 나와!"

[7...]

차유진 위로 둘이 더 날 압박해왔다. 죽일셈인가? 이세진이 코를 훌쩍이며 날 쥐어짤듯 끌어안았다. 가슴팍이 축축하게 젖어가는 게 느껴지더라.
"문대야! 진작 ...다 말하지, ...그랬어."

류청우, 너도 우냐?

"그,그래! 말도 안 하고 너..!"

옆에 있던 배세진이 울다 소리를 빽 질렀다.

[6... 5...]

"비록 몸은 건우형이지만 저는 문대형이 살아돌아와서 기쁩니다! 현실성이 없어 다소 믿을수 없기는 하지만 지금 상황에..."
난 김래빈을 뒤로하고 방금 막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부모님을 바라봤다. 다급하게 숨을 고르며 흐트너진 옷무새로. 신발을 짝짝이에다 꼴이 볼품없었다. 마지막이겠지. 비록 진짜 내 엄마 아빠는 아니더라도. 돌아가시기 전보다 주름이 늘었네.
들러붙은 이세진의 뒷통수를 내쪽으로 끌어안으며 침대 근처까지 온 부모님에게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정신없이 날 끌어안고 놔주지 않는 맴버들 때문에 가까이 오지 못하시더라.

웃는 내 얼굴에, 내게 머리를 파묻은 차유진과 이세진을 제외한 다른 맴버들이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봤다.
순간 이어지는 정적 속, 입을 열었다.

"감사해요. 짧게나마 아들이어서 행복했습니다."

잠자코 듣던 어머니가 손을 뻗어 내 손을 어루만졌다. 따뜻하게 느껴지는 온기를 마지막으로... 시야가 소용돌이 치듯 꼬이더니 밑으로 훅, 끌어당기는 기분에 꺼져가는 정신을 완전히 놓았다.
----
차유진은 박문대가 사줬던 간식과 똑같은 걸 방바닥에 늘여놓고 선아현은 제 무릎을 끌어안고 쭈그려앉았다. 아마 박문대와의 기억을 곱씹고, 되짚고, 다시 되새김질 하는 것 같았다.
김래빈은 아마 박문대의 파트인 듯 한 가사를 죄다 줄줄 읊고 있었고 배세진도 머리를 붙잡고 박문대와 있었던 일들을 열심히 뻐끔거렸다. 류청우는 조용히 앉아있는 듯 했지만 그 답지않게 극도로 불안해보였다. 그리고, 이세진은.
노트에 박문대의 이름을 계속 써내려갔다. 장수는 넘어가지 않았다. 쓰자마자 흐릿해진 글자가 사라지는 건 단 1초. 끊임없이 생겨나는 빈공간에 미친듯이 쓰고 또 썼다. 땀인지 눈물인지 턱끝에서 타고 내려온 물방울이 노트를 적셨다.

초인적인 힘으로. 그렇게 버틴게 5시간.
견딜 수 없는 불안감과 긴장이 숙소를 무겁게 깔고 앉았다. 그러던 중, 울리는 전화벨소리.

그건, 류건우가 깨어날 조짐을 보인다는 것이었다.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류청우가 차키를 집어들었다. 다들 퀭해보이는 낯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모두 뛰쳐나갔다.
보이는 게 없었다. 신발이 서로 뒤섞였다. 이세진은 배세진의 신발을, 배세진은 차유진, 차유진은 선아현의 신발을 구겨신고서 차를 타고, 병원에 달려가는 내내 맴버들은 똑같이 빌었다.

박문대를 잊지 않게 해달라고. 그가 깨어나면 해결책이 있기를.

잃기 끔찍하게 싫었다. 잃을 수 없었다.
병원으로 무작정 달려가서 남은 자리에 차를 대자마자 빠르게 걷던 맴버들은 서서히 뛰기 시작했다.

"어?"

"테스타아냐?"

"뭐야, 뭔데?"

따라붙어오는 시선들, 주변에 하나 둘 켜지는 카메라. 모든 걸 무시하고 뛰었다. 물에 잠긴 것처럼 웅성거리는 소리가 멀어져갔다.
그렇게 뛰어 도착한 병실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고 들어가자, 류건우는 침대 위에 고요히 잠들어있었다. 그 넓은 vip 병실도 6명이 들어서자 좁게 느껴졌다. 맴버들은 류건우가 누워있는 침대를 애워싸고 가만히 그가 쉬는 숨소리를, 오르락 내리락 거리는 가슴팍을 빤히 바라봤다.
울컥이는 감정이 솟구쳤다. 류건우가 박문대라는 걸 알고 난 뒤, 호흡하는 작은 소리가. 멈추지 않고 울리는 심장이. 평소와 다르게 와닿았다.

멍하니 있던 류청우가 손을 뻗어 류건우의 뺨을 쓸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손끝에 쓸렸다. 살아있다. 분명 생김새는 박문대랑 다른 것이 분명한데
류건우 위로 박문대의 얼굴이 겹쳐보였다. 단정하게 입혀진 병원복 위로 류청우의 눈물 방울이 떨어졌다.

아, 넌 이렇게 살아있었구나.

다른 어떤 감정보다도 먼저, 안도감이 밀려왔다.

이어 선아현이 조심스레 류건우의 손끝을 건드렸다. 피가 돌아 선분홍빛으로 물이 든 손톱을 매만졌다.
박문대가 흰 천에 덮인 그 날. 안식보 바깥으로 아주 조금. 튀어나왔던 손끝을 생각했다. 미동도 없는. 바깥으로 나온 손끝은 온기가 제일 빨리 식어 싸늘해보였다. 손톱의 푸르스름한 색을, 선아현은 기억한다.
다시. 박문대에 관한 모든 기억들을. 수십번, 수백번도 더 생각했던 너와의 일들을 되감는다.

그렇게 눈을 감은 선아현 옆으로 차유진은 별안간 덥썩 상체를 눕혀 류건우를 끌어안았다.

두근, 두근-

울리는 심장 박동이, 느껴지는 진동이 차유진의 모든 삶의 순간들 중에서 가장 감격스러웠다.
장례식의 그 날, 김래빈을 끌어안았지만 차유진이 안아주고 싶었던 건. 박문대. 이별할 시간도 없이 급하게 떠나보냈어야 했던 박문대에게 작별의 인사를 할 수 있었다면 온 힘을 다해 끌어안아줬을 것이다. 그랬다면 이렇게 박문대를 온몸으로 느꼈을 텐데.
그때 차유진이 할 수 있었던 건 작고 딱딱한 유골함을 끌어안는 것 뿐이었다. 차유진의 머릿속에, 타고 남은 하이얀 뼛가루 위로 드문드문 다 타지 못한 굵직한 뼈조각을 직원들이 부숴 가루를 내는 무자비한 장면이 스쳐지나갔다. 박문대의 모습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는 걸.
작은 항아리에 담긴 재가 박문대라는 걸 차유진은 믿을 수 없었다.

이번에는 류건우의 어깨죽지가 축축히 젖어갔다. 다들 그렇게 박문대의 죽음에 관한 기억들을 곱씹고 있었을 때.

"허억-!"

류건우가 발작하듯 숨을 들이쉬며 눈을 떴다.
깨어난 류건우의 얼굴을 바라보며 맴버들은 똑같은 이름을 외쳤다.

'문대형!'

'문대야!'

'박문대!'

류건우가 깨어나도 박문대의 이름을 입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건 여전했다. 이세진은 박문대의 손을 끌어잡고 손끝으로 글을 적었다.
[-너, 박문대]
맞지? 라고 글을 쓰기도 전에 류건우가 허공을 보며 작게 읊조렸다.

"상태창"

"...상태창?"

차유진을 제외한 모든 맴버들이 머릿속으로 물음표를 띄웠다.
그도 그럴게, 게임에서나 나오는 것이지 않나.
그러거나 말거나 아무것도 모르는 차유진이 빽 외쳤다.

"나 잊기 싫어요!"

그래도 허공을 바라보는 류건우의 모습에 배세진이 멍하게 물었다.

"너 어디를 보는 거야?"

그 말도 씹고 류건우는 허공을 누르더라. 뭐가있나 싶어 다들 실눈을 뜨고봐도 보이는 건 없었다. 쟤 눈에만 보이는 건가?
류건우가 차유진에게, 모두에게 단호히 말했다.

"잊어."

잊으라고. 뭘? 맴버들 모두 지독한 반발심이 마음 속으로 빗발쳤다.

"난 시,싫어 문대야!"

선아현이 눈물을 흩뿌리며 소리쳤다. 저가 말해놓고 문대라고 내뱉은 단어에 놀랐는지 선아현은 눈을 크게 떴다.
"어? 문대문대! 목소리가 나와!"

이세진이 박문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이름 부른 게 대단한 난제를 해친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벅차고 서러운 감정에 복받친 이세진은 차유진 위로 박문대를 끌어안고서 눈물을 질질 흘렸다.
그 위로 선아현이 엎어진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해결될 거라 막연하게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간단히 될 줄은 몰랐는데. 마음 속으로 되씹던 이름을 류청우가 내뱉었다.

"문대야! 진작... 다 말하지 ...그랬어."
네가 어딘가에서 잘 살아있다는 이야기만 해주지 그랬어. 류청우의 목이 메인 목소리가 혼탁했다.

분위기에 휩쓸려 울다가 정신을 차린 배세진이 한 마디를 얹었다.

"그,그래! 말도 안하고 너...!"
"비록 몸은 건우형이지만 저는 문대형이 살아돌아와서 기쁩니다! 현실성이 없어 다소 믿을 수 없기는 하지만 지금 상황에 현실성을 따지는 건 무의미하기 때문에...어, 그런데, 상태창이"

여태껏 말을 정리하던 김래빈은 거침없이 줄줄 읊어댔다. 류건우는 그런 김래빈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빗껴, 이세진을 끌어안으며 그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슬픔... 애절함 체념. 갖은 감정이 뒤섞인 표정으로 류건우는 어딘가를 쳐다봤다. 김래빈은, 선아현은, 류청우는 배세진은. 그런 류건우의 표정을 넋놓고 바라보다가 마지막으로 희미하게 웃는 미소에 무심코 모두 고개를 돌렸다.
병원을 오가면서 자주 뵈었던 류건우의 부모님이었다. 순간 류청우는 머리를 때리고 가는 생각에 입술을 멍하니 벌렸다. 그때, 류건우가 물었던 돌아가신 분은.

"감사해요. 짧게나마 아들이어서 행복했습니다."
손을 뻗은 류건우의 어머니가 그의 손을 감싸쥐었다. 그 순간을 끝으로 모두의 시야가 어그러졌고. 바닥이 없는 듯 순식간에 무언가가 몸뚱어리를 밑으로 끌어당기는 어지러운 기분에 정신을 잃었다.

-----
"허억,"

박문대는 다시 숨을 들이쉬었다. 정말이지 좆같은 기분이었다. 그냥 얌전히 정신만 꺼지면 될 것을 가져다가 몸과 영혼이 분리되는 괴이한 느낌까지 주고 지랄이었다. 시야에 잡힌 건 익숙한 숙소 천장. 손을 뻗어 휴대폰을 들었다.
날짜를 확인해보니 20XX년 XX월 XX일. 박문대가 심장마비로 죽었던 그 날이었다.

'자다가 죽었었지.'

멀쩡하게 아침을 맞은 박문대는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우당탕탕-!]

불안한 소리가 방문 밖으로 울렸다. 여러개의 발자국 소리가 시끄럽게 찍혔고, 박문대는 불안한 기운을 떨칠 수가 없었다.

'설마.'

방안으로 맴버들이 들이닥쳤다.
"문대 문대!"
"박문대!"
"문대형!"
"문대형님!"
"무,문대야"
"문대야!"

여섯명이서 동시에 내 이름을 외쳐대니 머리가 울렸다.

'나야 그렇다치고, 쟤네는 왜 다 기억하냐?'

눈짓으로 상태창을 켰더니 어이가 없더라.
[백업 완료!]

[‼️정상화 패치 불가 대상 : 류청우 배세진 선아현 이세진 차유진 김래빈‼️]

요컨데, 박문대가 잊혀져 가는 중에도 저 독종들이 부득불 날 기억한 탓에 아예 정상화 패치 불가 대상으로 고정됐나보다.
'이왕 들킨 거, 다 털어놓아야겠네.'

어디서부터 설명하지?

다 큰 성인 남성 여섯이 다짜고짜 날 끌어안아왔다. 나는 조용히 팔을 벌려 날 껴안은 놈들의 등을 토닥여줬다.
그래. 저 기분 알지.

죽었던 사람이 돌아온. 그것도 내 가족이 살아돌아온 그 기분을 느낀다는 건, 예상보다 훨씬 벅차고, 기쁘고, 행복하고 서러운. 복잡한 기분일 것이다.

한 번 겪어본 경험자로서.
‼️완결‼️

생각보다 긴 타레가 됐네요. 이 이후로는 모든 걸 털어놓고 박문대가 부모님 빈소를 찾아가서 사죄하고, 그 곁에는 테스타 맴버들이 같이 있구요! 전 이 썰로... 은근히 맴버들과 선 긋고 있던 문대가 테스타를 완전히 가족으로서 받아들인다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건우에게 가족을 만들어주고 싶었어요ㅠㅠ 문대가 다 말하고 나서 맴버들 한 번씩 상태창 외쳐봤다는... 다들 자기 스탯은 어떻냐고 눈 반짝거리며 물어보는 테슷까지 쓰고싶었는데 기력이 없네요 특히 차유진은
자기 특성 듣고 멋지다며 붕붕뛰고 이세진은 저런 얘를 내가 어뜨케 이기냐며 툴툴거리는 거 듣고싶었는데 ^^... 쨌든 긴 타레 여기까지 봐주신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여러분 아니었으면 저 중도포기 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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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 8, 2021
선아현 난 무표정이면 차갑고 아름다운 남자일 거라고 생각함. 아현이 흑화시키고 싶은데 감히 선아현을?? 흑화해도 12세 이상의 나쁜 언어는 절대 안 쓸 것 같음 그래서 거따가 류건우 집어넣어보고 싶음((??
브이틱 류건우로 해서 어느날 테스타 선아현과 몸이 바뀐 둘.
진짜 들어가고 눈 뜨자마자 들통날 듯ㅋㅋ 류건우 어쩐지 포근하고 처연하고 아름다운 가녀린 나에 아기 종달새 엘프같은 표정이랑 분위기 풀풀 풍기고 선아현 이쪽은 존나 이쁜데 냉철하고 만만찮을 것 같고 까탈스러운 미인광공st 로 순식간에 변하는 거 생각만 해도 침 오톤질질처흘림
류건우 일러 없을 때 하는 적폐인데 몸 되게 탄탄하고 허리는 얄쌍한데 흔히 한국인들이 말하는 짐승돌st라고 밀고 있는데... 왜냐면 류청우랑 사촌이니까... 가슴도 크다고 밀래...난 그게 좋아 쨌든 박문대는 우리 강강쥐는 무대를 찢어. 하면
Read 28 tweets
Nov 29, 2021
청려문대 캐붕⚠️

부부싸움으로 개싸우다가 박문대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처돌아버릴 것 같은 거. 그래서

"아~ 할아버지는 모르시죠? 엊그제도, 그 전에도. 사귀기 전에도. 제가 그러지 말라고 말했는데. 어쩌겠습니까. 뇌가 늙으면 자주 깜빡하실 텐데. 제가 감안해야죠."

이렇게 비아냥 대는 거.
이래서 신청려 하던 말도 잊고 충격 받아서 멍하니 박문대 쳐다볼듯

"그거..말이 너무 심한 것,"

"뭐래...영감탱이가..."

신청려 말끊고 박문대 크리티컬로 또 중얼거림. 회귀 나이 삼백년 이상 신청려는 할 말을 잃었다가 진짜 밀려오는 설움에 입을 꾹 다뭄.
박문대 그거보고 코웃음 치는데 신청려 꾹 다문 입술 밑에 턱이 호두턱 되는 거. 신재현 저거 찌푸린 눈썹도, 그 끝이 점점 쳐짐. 어라? 싶은데 신청려 뿌앵ㅠㅠ 이런 말이 어울리게 울어버리는 거.

"...후배님 진짜 나빠요. ...너무해요..."
Read 19 tweets
Nov 24, 2021
숭하긴하지만 류청우가 부끄러워 하는 게 보고싶어서. 취미겸 작은 스케이트 보드를 산 박문대. 이세진과 덥앱 중이었음. 마침 오늘 스케이트 보드 배송이 와서 러뷰어분들께 보여준다고 주섬주섬 뜯었는데, 지나가던 류청우도 차유진 핫초코 타주고 커피잔 든 채로
옆에와서 조용히 구경했음. 화면에는 보이는데, 얼굴은 잘림. 의자가 없어서 문대 옆에 그냥 서있었음. [이세진 박문대 류청우] 이렇게.

🐶스케이트보드를 샀는데요, 심심풀이로 산 거라. 작고 싼 걸 일단 사봤어요.

깜찍한 강아지가 그려진 스케이트 보드를 꺼냈는데,
🐻문대문대~ 그거 애기들 거 아냐?

좀 사이즈가 작았음.

한참 들고 만지작거리던 박문대, 설명서 보다가 일단은 한번만 올라가 보기로 함.
그렇게 의자를 저쪽 구석으로 밀어두고 스케이트보드를 마룻바닥에 내려놨음.
Read 21 tweets
Nov 1, 2021
[띠링]

Wlive
-안녕 러뷰어. 저는 문대🐶

am3:00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고정된 화면에는 검은 후드티의 박문대가 방에 혼자 있었음.

"안녕하세요. 새벽에 알림 갔겠네요. 죄송해요. ...제가 깨웠나요?"
빠르게 올라가는 채팅창을 보던 박문대가 주저하는 것 같이 미간을 찌푸리다가 툭, 툭, 툭. 간헐적으로 손톱이 책상 위를 치는 소리가 났음. 그리고 허공 어딘가를 유심히 보더니 입술을 뗌.

"오늘은 이야기가 무거울 수도 있어요."
"네. 제가 새벽 감성에 차서. ...최근, 주변 사람 중에 한 분이 돌아가셨어요. ...많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박문대 옆에 있던 노트북을 꺼내더니 무언가를 키보드로 치기 시작함. 마우스도 딸깍거리고, 그러면서 말은 계속 이었음.
Read 73 tweets
Oct 26, 2021
왜 흔한 클리셰... 동물 주웠더니 갑자기 사람으로 변했다!? 이거 원래 동물 맞았는데 갑자기 인간으로 변한 테슽 친구들.

차이는 이거지 박문대는 변하자마자 자기 손 내려다보고 손가락 다섯개.. 주인이랑 같은 신체군. 하면서 옷 껴입고 이족보행에다 내가 오면 청소에 밥까지 싹 해놓고 소파에서
폰만지면서 나 마중 나올 것 같고 차유진은 그냥 빤쓰도 못 입고 네발로 기어다닐 것 같은... 야옹야옹 거리는 거 한달은 가르쳐야 겨우 하는 말 응애일 것 같음ㅋㅋㅋㅋㅋㅋ
눈치껏 옷 다 입는 애들 : 이세진 박문대
간신히 바지만 : 류청우 배세진
상의만 : 김래빈(할머니가 쪼마난 니트 래빈토끼한테 입혀줬던 거 길들여져서)
옷 안 입을 것 같은 애 : 차유진

나중에 부끄러워 할 친구 : 김래빈

그건 모르겠고 다른 인간들보다 거기 크다고 자랑할 친구 : 차유진
Read 4 tweets
Oct 14, 2021
한 나라의 명장이었던 류건우... 근데 이제 환생해서 전생 기억 그대로인데 박문대로 아이돌함.

-우리 집안이 좀 그래. 울엄마 신내림 받았고 다른 동생들은 괜찮은데 나만 약간 그런 기운 있거든. 저번에 박문대 실제로 봤는데 기운 진짜 장난아니더라 그 뒤에 뭐 장군? 있었는데...
ㄴ구라같지만 좀 흥미 돋는다 더 말해줘 어케 생겼음?
ㄴ박문대랑 완전 반대야. 류청우랑 오히려 더 비슷할 것 같은데 키도 엄청 크고 좀 피곤해보이는 냉철한퇴폐미남... 아이돌해도 될 것 같음
ㄴ야 무슨 장군이 그렇게 생겨 구라진짜 오지네
ㄴ러뷰어 망상질이죠?
ㄴ진짜라니까?ㅠ 다시 생각하니 장군 맞는듯 박문대 조상 중에 장군있나? 화살 맞고 죽은 건지 심장 부근에 화살 꽂혔던데 화살맞고 죽은...
ㄴ응 없음

신기 있는 러뷰어 좀 억울했지만 그냥저냥 묻힘. 그러다 사극에 단역으로 박문대 출현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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