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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 7, 2022 1014 tweets >60 min read Read on X
#대화산파_연월록

2차 정마대전에서 마교의 사술에 당해 모조리 청명을 잊어버리는 화산과 구파 문파들.

※ 1000화 이후의 스포가 있습니다. 열람 주의.
※ 날조 심합니다.
※ 청명이가 성격이 많이 죽습니다.
다시 한번 전쟁이 발발했다.

각 문파에서 사상자가 꽤 나왔지만 백 년 전에 비하면 별거 아니었다. 오히려 백 년 전보다 선전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젖살 덜 빠진 애송이들로 선전이라니.

“빌어먹을 화산! 저주받을 화산!”

이변은 그때 일어났다. 한 놈이 연막탄 비스무리한 것을 던진 것이다.
연막탄은 펑 소리를 내며 오검과 화산의 제자들을 덮쳤다. 사방에서 비명이 울렸다. 청명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연막탄을 던진 놈의 목을 날렸다. 날리자마자 뒤에서 백천의 목소리가 들렸다.

“큭, 우린 괜찮다! 청명아!”

평소라면 바보같이 그것도 못 피하고 자빠졌냐며 핀잔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청명은 핀잔을 주는 대신 그들의 상태가 괜찮아 보이는 걸 확인하고는 다음 마교도 쪽으로 이동했다. 분노에 몸이 끓어서 눈속임 용도로 던진 것이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전쟁은 약 반년간 치뤄졌고, 중원이 승리했다. 청명은 십만대산의 꼭대기에 서서 피로 젖은 검을 떨쳤다.
아직 전장의 여파가 가시기에는 일렀다. 전쟁은 승리했지만 마교의 잔당들이 몸을 숨기고 도주했으니까. 그놈들도 추적해서 잡아야 완전한 승리다. 청명은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다. 사형제들은 곳곳에 주저앉거나 널브러져서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저것들이 제일 고생했지.
청명은 십만대산의 꼭대기에서 훌쩍 뛰어내려 그들에게 걸어갔다. 제일 먼저 백천의 안색을 살피려는데,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을 보는 순간 청명은 멈췄다.

“너는…… 누구냐?”

그것이 백천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였다.
남아 있는 마교의 잔당들은 뒤로하고 전쟁의 여파를 빠르게 수습했다. 사상자가 나온 문파에 묘를 세우고 각 문파들은 서로에게 위로품을 돌렸다. 부서진 전각을 고치고 마교의 손에 집을 잃은 양민들 구휼 활동을 시작했다. 양민들은 정파가 임시로 마련해 준 거처에서 지내면서 수군거렸다.
“화산이 마교와의 전쟁에서 크나큰 일등공신을 했다는구먼!”
“이보게, 이 사람이! 일등공신이 뭔가! 화산이 마교를 무찔러 준 영웅이나 다름없지!”
“그것도 아니네. 저 화산검협이 화산을 이끌고 전쟁의 목을 따 왔다니까!”
“화산검협은 정말 영웅이야!”

모두가 화산 이야기를 하기 바빴다.
구파일방도 그에 뒤지지 않게 활약했다지만 양민들은 그 얘기를 믿지 않았다. 전 중원의 양민들이 화산만을 칭송했으나 정파들은 막지 못했다. 달리 반박할 거리가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렇게 백 년 전 매화검존의 위용을 다시금 떠오르게 했던 화산검협은 화산에서 파문당했다.
시간을 조금 되돌리자면, 전쟁의 여파가 어느 정도 수습되자 청명은 곧바로 옥에 갇혔다. 마교의 첩자거나 주교 중 한 명일 거라는 의심을 샀기 때문이었다. 청명은 어이없어하면서도 순순히 옥에 들어갔다. 장문인의 고압적인 얼굴을 거역할 수 없었고 마교가 무슨 술수를 부린 건지 생각해야 했다.
그가 차가운 옥에서 홀로 머리를 굴리는 동안 천우맹은 회의를 열었다.

“아무리 봐도 화산에서 본 적이 없는 놈입니다. 화산의 제자라는 사실도 제대로 증명되지 않습니다.”
“저놈이 정말로 삼대 제자이기나 합니까? 마교의 주교가 아니라?”

누군가의 말에 장내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다들 똑똑히 보셨잖습니까. 그놈이 주교를 도륙 내는 모습을요. 그게 어딜 봐서 삼대 제자입니까? 놈이 정녕 일개 삼대 제자에 불과하다면 여태까지의 전쟁은 누가 세운 공입니까?”

지난 반년간 치른 전쟁에서 가장 활약한 이가 누구냐고 하면 당연히 화산검협이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천우맹은 그 별호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놈의 손속에 과연 ‘협’이 존재할까? 마교의 주교가 아니라? 윤종이 거들었다.

“잠시만요. 섣불리 추측해서는 안 됩니다. 첩자 같은 게 아니라 마교 출신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오검이 눈을 빛내더니 저마다 한마디씩 꺼냈다.
“맞아요. 그자가 어딜 봐서 정파예요? 십만대산의 지리며 경로, 은신처까지 꿰고 있더만.”
“사파도 그 정도로 마교에 대해 지식이 해박하지 않습니다.”
“마교를 배반하고 들어온 자가 아닌가요?”

마지막 말이 폭탄이었다. 잠시간의 침묵 후, 모두가 장문인을 돌아보았다. 남은 건 장문인의 판단이다.
정파에 마교가 숨어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추문. 양민들이 입을 모아 칭송하는 화산검협의 영웅담. 삼대 제자치고는 압도적인 무력. 불분명한 출신. 이상하리만치 마교에 대해 해박한 지식.

억겁의 시간 같은 침묵이 흐른 후, 장문인이 입을 열었다.
옥 내부는 창 하나 뚫려 있지 않아 암흑으로 깜깜했다. 이곳은 청명도 처음 와 보는 곳이었다. 보통 화산에 해를 끼친 자들을 가둬 두는 곳인데, 제가 여기에 들어올 줄은 몰랐다.

온몸이 아프고 욱신거렸다. 외상은 내력으로 대부분 회복했지만 내상이 문제였다. 멀미 마냥 뇌리가 어질어질했다.
마기를 정면으로 수백 번 넘게 받아서 속이 진탕 뒤집혔다. 금방이라도 핏물이 꿀렁거리며 올라올 것 같았다. 이것도 내력으로 어떻게든 해 보겠으나, 외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다.

문득 시야에 가느다란 실 같은 게 보였다. 자세히 보니 실이 아니라 머리카락이었다.

‘어, 이거…….’
머리카락이 반쯤 하얗게 세어 버렸다. 선천지기를 과도하게 사용한 부작용이었다. 그는 신기하다는 눈으로 희게 물든 머리카락을 쓸었다. 주화입마까지 각오하고 사용한 힘이니 놀랍지는 않았다. 자칫하다 신체까지 훼손될 수 있는데 이 정도면 싸게 먹혔지.

‘아님 부작용이 다른 데로 이동했나.’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들자 이마에 영웅건을 두른 사내가 차가운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저 시선이 지독하게 어색했다. 저게 정녕 사형제를 바라보는 시선인가?

“나와라.”

죄인더러 명령하는 듯했다. 청명은 비틀대며 몸을 일으켰다. 오랫동안 미동도 안 한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사지에 달린 사슬이 절그럭 소리를 냈다. 백천은 사슬을 쥐고 억지로 이끌었다. 청명은 끌려가다시피 하며 장문인의 처소에 도착했다. 이전보다 배는 넓어진 처소에 천우맹의 각 대표들이 모여 있었다. 청명을 보는 시선이 하나같이 싸늘했다.

백천은 청명을 무릎 꿇리고 오검의 곁에 가 앉았다.
“화산파 사칭범은 들어라.”

현종이 입을 열자 청명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사칭범이라니. 누구? 나? 그가 눈을 깜박이는데 현종은 냉엄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사칭범은 본래의 출신을 숨기고 화산에 입문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마기와 피로 점철된 몸으로 정과 협을 자칭했다. 틀렸는가?”
“장문인, 제자는 지금 장문인께서 하시는 말이 무슨 뜻인지…….”
“그 입 다물어라! 어디 사악한 마교 놈이 장문인의 앞에서 입을 놀리느냐!”

청명이 무어라 반박하려고 하자 운암이 크게 일갈했다. 당군악이나 맹소, 설소백도 운암과 비슷한 태도였다. 누구도 고운 눈으로 보지 않았다.
“하여…… 천우맹의 맹주이자 화산의 장문인인 나 현종은 화산을 사칭한 죄와 출신을 기만한 죄를 물어, 화산검협을 화산에서 파문한다.”
“장문인!”

청명이 놀라 외치자 언제 등 뒤로 접근했는지 모를 백천이 그의 머리를 찍어 눌렀다. 대리석에 금이 갔다.

“왜 제가 화산의 사칭범이라는 겁니까?”
제압당하면서도 청명은 꿋꿋하게 현종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스릉, 섬뜩한 소리가 나더니 그의 목울대에 은빛 칼날이 닿았다.

“그 이상 입을 놀렸다간 피를 보게 될 것이다.”

백천은 현종보다 더 냉혹한 눈으로 한 손은 청명의 머리를, 다른 손은 검 손잡이를 쥐었다. 청명은 눈을 돌렸다.
“사숙은 저 말을 믿어? 사칭하기는 누가 뭘 사칭했다는 거야.”
“닥쳐라. 나는 네 사숙이 아니다.”
“아니, 뭔 말을 못…….”
“닥치라고 했어.”

급기야 칼날에 목덜미가 약간 베이며 피가 흘렀다. 청명은 입을 다물었다. 짓눌린 머리 위로 차가운 목소리들이 떨어졌다.
“화산에 사기꾼이 숨어 있을 줄은 몰랐군.”
“맹주님께서 빠른 판단을 내리셨어.”

그들은 더 이상 천우맹의 위상을 극적으로 끌어올려 준 화산검협을 보지 않았다. 그들의 시선에 남은 것은 출신을 기만하고 화산을 사칭한 죄인. 그뿐이었다. 청명은 으득 이를 갈았다.
‘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린 거야, 마교 새끼…….’

그게 단순한 연막탄이 아니었나. 우리 애들이 맞았을 당시에 아무 이상도 없었는데. 검을 휘두르는 와중에도 몇 번이나 확인했고. 애들은 그렇다 쳐도 다른 사람들까지 왜 저러는 거지? 대체 어떤 술수를 부린 거야. 빌어먹을.
“긴말할 것 없다! 운암! 당장 죄인의 무공을 폐하고 화산에서 쫓아내라!”
“장문인.”

청명이 입을 열었다. 그러잖아도 그에게 집중되던 시선이 더 냉혹해졌다. 그가 턱 밑에 검을 단 채 현종을 똑바로 응시했다.

“파문이라 함은 제가 아직 화산의 제자라는 뜻. 부디 곡해하지 마시고 들어 주십시오.”
짧게 숨을 고르고, 자세를 바로 했다. 차분한 어조로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어디서 그런 소리를 듣고 오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화산파 사칭범이 아닙니다. 마교 출신은 더더욱 아니고요.”
“이놈이!”

운암이 분노하자 현종이 손을 들었다. 청명은 고개를 한번 꾸벅였다.
“저는 그저 화산의 제자입니다. 화산의 이십삼대 제자, 청자 배. 그러나…… 장문인께서 원하신다면, 제가 화산의 제자임을 증명할 방도가 없으니 스스로 화산을 나가겠습니다.”

현종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청명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등 뒤로 감춘 양손을 조용히 쥐었다.
“현재 화산은 양민들 사이에서 신이 내린 영웅이라며 칭송을 받고 있습니다. 그 상황에 화산을 사칭한 자가 나타나면 문파 이름이 더럽혀질 테니, 늦기 전에 제가 떠나겠습니다.”
“네가 욕먹을까 봐 겁나서가 아니고?”

조걸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윤종이 진정하라는 듯 그의 어깨를 눌렀다.
윤종은 상대적으로 태연해 보였으나 그의 눈빛은 조걸보다 더 형형했다. 유이설만이 속을 알 수 없는 투명한 눈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청명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간청드립니다, 장문인. 화산을 추문으로 더럽히고 싶지 않은 제 마음을 헤아려 주십시오.”

현종은 그 정수리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흰색으로 반쯤 물든 머리카락은 쥐면 부서질 듯 여렸다. 바닥에 늘어진 머리카락 위로 불빛이 아른거렸다. 그것을 한참 보다가, 결단을 내렸다.

“허하노라.”
“장문인! 어찌…….”
“화산의 장문인으로서 명한다. 두 시진의 유예를 주겠다. 두 시진 안에 떠나지 않으면 단근참맥의 형을 내릴 것이다.”
모두가 당혹스러운 가운데 청명은 고개를 들었다. 하얀 머리카락을 힘없이 늘어트리며, 대답했다.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판결은 그걸로 끝이 났다. 처분이 결정되자마자 청명은 떠날 채비를 했다. 채비랄 것도 없이 무복 몇 벌과 검만 챙기면 되었다. 방 안에 홀로 앉아서 생각했다.
틀림없이 마교의 소행이다. 잔당들이 중원 구석에 도사리고 있을 테니 놈들을 잡고 단서를 취해야지. 수천의 놈들 중 한두 명 꼴이 저지른 일이라고 해도 단서는 나올 것이다. 청명은 숨을 내쉬고, 문을 향해 말했다.

“왔으면 들어오지, 왜 그러고 있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벌컥 열렸다.
심통이 난 어린아이 같은 얼굴을 한 백천이었다. 제 딴에는 표정을 한껏 굳혔겠지만, 청명의 눈에는 어디로 보나 아이였다.

“나는 네 말을 믿지 않는다.”

백천이 대뜸 할 말을 했다. 청명은 검을 옆에 내려놓고 그를 응시했다. 그가 문간에 서서 짓씹을 듯 쏘아붙였다.
“장문인께서 내리신 판단이니 입을 열지 않겠다만, 떠나는 날부터 한 번이라도 화산에 모습을 보였다가는 내 직접 너를 베어 버릴 것이다.”

살벌한 기세를 눈앞에서 받으면서도 청명은 아무 말도 않았다. 신기했다. 저를 모르는 사람 보듯 보는 저 눈이. 제가 마교 출신이라고 믿는 저 눈이.
감각을 넓게 펼치니 청자 배와 백자 배의 기척이 제법 잡혔다. 장문인의 명이니 넘어가겠는데, 당장이라도 베고 싶어 안달이 난 모양이다. 청명은 말했다.

“두 시진만 지나면 갈 거야. 너무 열 내지 마, 사숙.”
“한번만 더 나를 그리 불렀다간 피를 볼 것이다.”

백천이 허리에 찬 검을 쥐었다.
왠지 익숙한 광경이다. 비무 대회 때였나? 그때도 피를 볼 거라고 했었는데. 동룡이, 전쟁을 치르고 나서도 막무가내인 건 똑같아. 그런데…….

“정말 기억 안 나?”
“뭐?”
“나에 대해서. 모조리 잊어버렸냐고.”

백천이 무슨 소리냐는 듯 노려보았다. 청명은 한숨을 쉬었다. 기대한 사람이 바보지.
“됐어. 그만 나가 줘. 여기 더 있다가는 다른 애들이 눈 돌아서 나를 족칠지도 모르니까.”
“…….”

백천은 할 말이 있는 듯 어물거리다가 입을 다물고는 등을 돌렸다. 문을 닫기 전, 그가 한마디 던졌다.

“왜 하필 화산이지?”

탁, 문이 닫혔다. 청명은 닫힌 문을 빤히 쳐다보았다.
질문의 의도가 얼추 짐작이 갔다. 왜 화산이냐고. 저도 모르겠다. 몰라도 괜찮다. 이제부터 그 이유를 추적하러 갈 거니.

창밖에서 눈이 내리고 있었다. 겨울의 시작이었다.
소담스럽게 내리던 눈은 두 시진이 지나자 사납게 몰아쳤다. 기세가 폭풍이나 다름없어서, 세상의 모든 잡음이 눈보라에 묻힐 듯했다.

백매관의 문이 살짝 열렸다. 열린 문으로 청명이 나왔다. 얼굴에 눈보라가 끼치자 확 인상을 썼다. 한 손으로 눈가를 가리고 툴툴댔다.

“어우, 더럽게 춥네.”
춥기만 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전쟁 중에 입은 부상은 대부분 자력으로 회복했지만 선천지기를 끌어다 쓴 부작용만은 어찌할 수 없어서, 이전보다 약해진 몸에 한기가 정통으로 들어오니 근육이 달달 떨렸다. 내력을 돌려도 달라진 게 없었다. 일부러 도톰한 무복에 긴 장포도 걸쳤는데.
챙긴 것은 돈주머니와 무복 몇 벌을 넣은 보따리, 암향매화검이 전부였다. 영약까지 챙기려다 관뒀다. 새삼스레 화산에 개인 물품이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산문으로 나서다 옥천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지막으로 장문 사형에게 인사하고 갈까 고민했으나 이것도 관뒀다.
키이이이이이!

뒤에서 익숙한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하얀 것이 섬전같이 날아와 목덜미에 달라붙었다. 백아가 물기로 젖은 눈으로 그에게 뺨을 비볐다. 청명은 백아를 빤히 보았다. 짐승도 기억이 날아갈 수 있나.

“너는 어때?”
키이이이이!
“아니네. 기억하고 있네. 괜찮겠어? 날 따라와도.”
네가 없어진 걸 알면 난리 날 텐데. 백아는 고개를 젓고는 더욱 찰싹 붙었다. 절대 떨어지지 않을 기세였다. 청명은 백아의 뒷덜미를 잡고 품에 넣었다.

“안에 들어가 있어. 너도 추위 잘 타잖아.”

끄덕끄덕. 품이 조그맣게 들썩였다. 청명은 정말 마지막으로 한번 더, 화산의 정경을 바라보았다.
눈보라에 반쯤 묻힌 화산은 고요했다. 보고 있자니 발끝에서부터 분노가 올라와 가슴을 꽉 채웠다.

‘마교 출신.’

무슨 짓거리를 저질렀기에 사형제의 입에서 저딴 소리가 나오는가. 저 소리를 지껄인 게 그의 사형제가 아니었으면 팔에 어린 기운만으로 상대의 목을 갈라 버렸을 것이었다.
‘반드시 찾는다. 찾아서 죽인다.’

굳게 다짐하고 산문을 나섰다. 질끈 묶은 머리카락이 눈보라에 길게 흩날렸다. 가슴 깊은 곳에서 또 다른 자신이 물었다.

원인을 찾고 나면 어떻게 할 건데?

글쎄. 당장은 떠오르지 않는다. 마교가 우선이라.
화산검협은 마교의 첩자다.

그 한 줄 문장은 중원에 빠르게 퍼졌다. 구파일방에도 한 차례 파란이 일었으며 소문의 증거를 찾기 위해 토론에 토론을 거듭했다. 계속된 논의 끝에 소문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파가 갈렸다.

“애초에 현재로서는 마교에 대해 그렇게 박식한 사람이 없다니까요!”
“그래서 자네는 화산검협이 마교 출신이라고 주장해 보려고? 화산검협이 그동안 펼친 활약을 생각해 보게!”
“활약과 출신은 별개의 얘기죠. 그자가 정말 마교 출신이었다면 지금까지 중원을 속인 게 되지 않습니까!”
“저도 솔직히 그 소문에는 동의합니다.”
“이것들이! 자네들이 그러고도 장로인가!”
일부 사람들은 화산을 찾아갔지만 이미 파문했다고 한다. 파문이라는 대답에서 사람들은 확신을 느꼈다. 설마, 화산검협인데. 그치만 증거가 없잖아. 당사자가 와서 해명해야 하는데, 화산검협은 어디에서 뭘 하는 거야?

세간의 분위기가 과열된 끝에 화산검협을 찾는 자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이게…… 이게 뭔.”

홍대광은 거지가 들려준 정보를 듣고 아연실색했다. 얼마나 놀랐는지 동공이 지진이 난 듯 떨렸다. 그가 외쳤다.

“야, 너는 그 상황에 그걸 보고만 있었냐!”
“증거가 없는데 뭘 어떻게 합니까. 저도 갈팡질팡했는데.”
“그래도 그렇지! 네가 그러고도 거지냐!”
홧김에 옆에 놓아둔 쪽박을 집어던진 홍대광은 씩씩 숨을 내쉬었다. 모든 게 기가 찼다. 전쟁이 막을 내리자마자 전 중원이 거짓말처런 화산검협을 잊었다. 심지어 화산검협이 마교의 첩자니, 마교 출신이라서 그토록 마교에 대해 박식한 거라는 헛소문까지 돌기 시작했다.
화산검협을 잊은 건 개방도 마찬가지였다. 홍대광만이 유일하게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골치 아프고 사고 회로가 안 돌아갔다. 홍대광은 머리를 털고 거지에게 명했다.

“어쨌든, 지금 당장 애들 풀어서 화산검협을 찾으라고 해. 농땡이 피우는 애들까지 다 끌어서!”
“예!”
거지가 밖으로 나갔다. 홍대광은 지끈대는 이마를 짚었다.

‘이게 뭔 난리냐고. 누가 단체로 저주라도 내리기라도 했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찾아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야 한다.

‘화산검협…….’
청명은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 위주로 순찰을 돌았다. 이 시점의 마교라면 중원에 나타나지 않고 어딘가에서 숨을 죽이고 있을 테니 구석부터 뒤지는 게 빨랐다. 아무리 중원에서 멀리 떨어졌다지만 사람이 없는 건 아니라서, 세간에 떠도는 소문이 제 귀에도 들어왔다. 내용이 웃기기만 했다.
“화산검협이 마교의 첩자라는군!”
“그게 정말인가?”
“그렇다니까! 구파일방이 얘기하는 걸 똑똑히 들었어!”
“믿을 수가 없네. 그 화산검협이 왜?”
“화산은 일찍이 그를 파문했네.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든지.”

양민들이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지나갔다. 청명은 그들을 쳐다보았다.
저 소문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당사자가 행방불명인 이상 머지않아 잠잠해질 것이다. 반대로 당사자가 파문당하고 자취를 감췄으니 그 물증으로 소문은 더욱 불을 지필 것이다.

“쿨럭.”

입을 가리고 기침하자 손바닥에 검붉은 피가 흠뻑 묻어났다. 짧게 손을 털고 도포 자락을 단단히 여몄다.
키이…….

백아가 걱정스럽게 쳐다보자 청명은 괜찮다는 듯 웃어 주고는 몸을 피했다. 멀리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꼈다. 수는 어림잡아 예닐곱 명.

“화산검협이 여기에 있으면 좋은데. 진짜 하늘로 솟은 건지, 땅으로 꺼진 건지.”
“투덜대지 말고 찾아. 그 양반 화내면 무섭잖아.”
개방에서 온 거지들이었다. 청명은 그림자 속에 숨어서 그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기척이 완전히 멀어지자 밖으로 나왔다. 찬바람이 불었다. 머리카락이 마구잡이로 날렸다. 청명은 거지들이 간 방향을 응시하다가, 반대편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머리 위 하늘로 먹구름이 몰렸다.
‘장문 사형, 이번 전쟁에도 달라진 건 없소. 내가 전쟁을 끝내 주면 뭐 합니까. 기억하는 사람이 없는데. 웃기지 않소? 세상이 나를 잊었어요.’

발아래로 눈이 소복소복 밟혔다. 이미 쌓인 덩어리 위로 새 눈이 내렸다. 공기가 아까보다 차가워졌다. 잇새로 뿌연 김이 새어 나왔다.
‘애같이 질질 짤 마음은 없습니다. 나이가 백이 넘었는데, 이제 와서 나잇값 못할 수는 없잖소. 사형, 아십니까? 글쎄, 우리 애들이 나더러 마교 출신이랍니다. 내 살다살다 별 거지 같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흐린 하늘에서 눈송이가 떨어져 내렸다. 깨끗한 풍경이었다.
‘뭐, 한탄하려고 부른 건 아니고. 어서 남은 잔당 새끼들 족치려고요. 그리고 생각해 보시오, 사형. 우리 애들이 나를 잊은 게 잘된 걸 수도 있소. 난 원래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는데.’

눈송이 하나가 눈가에 내려앉아 뺨을 타고 흘렀다. 그것이 꼭 눈물 같았다. 청명은 다시 앞을 주시했다.
‘나도 알고 있다니까 그러네. 우리 애들 대가리 날려 버린 새끼, 내가 꼭 족칠 테니까. 거기서 뒷목 잡지 마시고 지켜보고 있으쇼.’

기척을 지우고 눈보라 속으로 녹아들었다. 아, 애초에 좋아한 적도 없었던 세상. 끝까지 날 놓아주지 못해서 무어가 그리 안달인지.
본격적으로 겨울이 오면서 청명은 야숙과 야영을 반복했다. 대부분 여관보다 밖에서 취침하는 일이 많았다. 식량도 짐승을 사냥하거나 양민에게 해를 끼치는 사파를 잡고 보답으로 받은 음식으로 해결했다. 그러나 받은 음식들은 겨울이 와서 식량 구하기가 어려운 자들에게 모조리 나눠 주었다.
“아이고, 도사님께서 드시지 않고.”
“저는 제 손으로 식량을 구하면 돼요. 걱정 마시고 가져가세요.”

발견되는 사파는 죽이지 않고 잡는 족족 마교의 자취에 대해 캐물었다. 물어보면 열에 셋 꼴로 흔적을 알고 있더라. 물론 대답마저 엉망이었지만 단서를 알아낸 것만으로 충분했다.
오래도록 뒤를 추적한 끝에 마교 잔당의 은신처를 발견했다. 은신처도 한 군데가 아니라 여러 곳에 골고루 퍼져 있었다. 차례대로 들이닥쳐서 그곳의 잔당들을 모조리 죽였다. 검의 반경 밖으로 달아난 놈들은 산과 강을 타고 도주했다. 청명은 그들도 밤새도록 추적해 죽였다.
약해진 몸으로 놈들을 상대하는 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무력은 변함없었지만 놈들의 공격에 더 많은 부상을 입었다. 무턱대고 달려든 건 아니었다. 검을 휘두르기 전에 대화 정도는 시도해 봤었다. 돌아온 건 울분에 찬 분노뿐이라 소용없었다.
종국에는 고문을 해서라도 놈들에게서 대답을 끌어냈다. 신체 부위를 도려낼 때마다 분노에 찬 저주가 귀를 찔렀다. 정말 긴 시간을 버틴 끝에, 한 놈에게서 대답을 얻었다.

“큭큭, 그것이 궁금한가? 그것은 우리가 공을 들이고 또 들여서 완성한 걸작이다. 언젠가 네놈에게 선물하려고 했지.”
마교가 공을 들이고 또 공을 들여서 완성한 연막탄. 광범위로 퍼트려서 조금이라도 흡입한 대상은 술자가 지정한 자에 대한 기억을 잃게 된다. 청명이 전쟁을 토벌하는 동안 마교는 당가를 비롯한 천우맹의 모든 문파, 구파일방 전체에 연막탄을 뿌렸다. 오직 한 사람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빌어먹을 배교자들은 우리를 업신여기고 욕하지!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아! 네놈도 우리의 심정을 똑똑히 느껴야 해! 알겠나? 우리의 고통을?”

청명은 악에 받친 놈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고작 그런 이유로 제 존재를 세상에서 지워 버렸나.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고작 그런 이유로.
원인을 찾기까지의 과정이 쉽지 않으리라는 건 알았지만, 막상 눈앞에서 원인을 확인하니 어이가 없었다. 고작 그 몇 줄 안 되는 이유를 들으려고 또다시 검을 피로 적셨나.

“사술을 해제하는 방법 따위는 없다! 네놈도 우리처럼 억겁의 시간 속에서 홀로 고통받아라! 영원히! 끄륵…….”
검을 찔러 목숨을 끊자 놈이 피거품을 뿜으며 늘어졌다. 청명은 공허한 눈으로 주위에 널브러진 시신을 둘러보았다. 시신에서 쏟아진 피만 아니었으면 어린아이가 아무렇게나 던져 둔 장난감 같은 모양새였다.

이유를 알았으니 그걸로 됐다. 더는 눈에 불을 켜고 잔당의 뒤를 쫓지 않아도 된다.
거창한 성취감 같은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유를 알았으나 해결 방책이 존재하지 않아서 절망이 밀려오는 것도 아니다. 애초에 이 술래잡기를 시작할 때 꼭 화산의 제자들의 기억을 돌려주겠다는 마음가집을 굳힌 적도 없잖은가. 이것으로 충분했다.

‘그리고…… 내가 없는 편이 훨씬 나을 거고.’
키이이이이!

그의 기색을 눈치챈 백아가 앞발로 그의 뺨을 꾹꾹 눌렀다. 청명은 검에 묻은 피를 떨치고 은신처를 나왔다. 피칠갑이 심해서 근처 강이나 계곡에서 몸을 씻어야 할 듯했다. 백아는 피 냄새에도 아랑곳 않고 제 목덜미에 보드라운 털을 비볐다. 조그만 온기가 따듯했다.
“다시 한번 물어보는데, 화산으로 안 돌아가도 괜찮겠어?”
키이이이이이!
“나랑 있어 봤자 얻어먹을 것도 없을 텐데.”
키이! 키!

백아는 행여 그가 떨어트릴세라 앙증맞은 앞발로 그의 목을 껴안았다. 붙어 봤자 부려 먹는 것 외에 주는 것도 없는데, 쓸데없이 끈질겼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강에서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겨울이라 물이 꽁꽁 얼었으나 검집으로 깼다. 겨울 물이라 어마어마하게 차가웠다. 개의치 않고 삼매진화로 수분을 말렸다. 그리고 머리가 핑 돌았다. 시야도 일순 아찔해졌다.

“윽…….”
어찌 보면 당연했다. 정양에 들었어야 할 몸으로 마교의 잔당을 뒤쫓으러 열흘이나 지새웠고 그 시간 동안 숙면도 제대로 취하지 않고 끼니도 대충 때웠으니. 과로로 수십 번 혼절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손으로 이마를 짚고 천천히 주저앉았다. 백아가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괜찮아.”
대답으로 다독이고 일어섰다. 또 휘청일 뻔했으나 자세를 바로 하고 보따리를 챙겼다.

노숙 생활은 변함없었다. 발길 닿는 대로 정처 없이 떠돌며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양민이 있으면 곡식을 사서 주거나 인근에 상가가 없으면 돈을 일부 떼서 주었다. 잠들지 못하는 이들의 보초를 서 주기도 했다.
선천지기 부작용의 악순환인지 청명은 날이 갈수록 마르고 수척해졌다. 식사를 하려고 해도 입맛이 없어서 도중에 숟가락을 내려놓는 빈도가 늘었다. 숙면도 악몽 탓에 중간에 깨는 일이 많아졌다. 잊으려고 해도 진득하게 들러붙어서 떨어지질 않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검게 죽은 피를 토했다.
언제는 강물 한가운데 드러눕다시피 둥둥 떠서 운기를 하다가 그대로 의식을 잃는 바람에 백아가 기겁한 적이 있었다. 백아가 조그만 앞발로 옷자락을 붙들고 육지로 질질 끌고 와서야 정신이 들었다.

“아니, 미안하다고.”
키이이이이! 키이이!
“나도 거기서 자빠질 줄 몰랐다니까.”
두세 번 말대꾸로 받아치다 솜방망이 같은 앞발로 뺨을 맞았다. 아프지 않았으나 조막만 한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걸 보니 절로 가슴이 쓰렸다.

“알았어, 안 할게. 강에서 운기 안 하면 되잖아. 어차피 꽝꽝 얼어서 깨기도 힘들어.”

청명이 암향매화검을 들어서 흔들어 보였다.
소매 밖으로 드러난 손목이 부지깽이처럼 마르고 희었다. 백아는 또 눈물을 터트리더니 아예 그의 품에 뛰어들어서 앞발로 가슴을 툭툭 쳤다.

“뭐야, 왜 이래. 진짜 안 한다니까.”

청명은 놀라면서도 한 팔로 백아를 받쳐 안았다. 옷자락이 금세 물기로 젖었다.
백아는 가슴이 아팠다. 신화로 떠받들어야 할 제 주인이, 세상에게 되도 않는 오명을 씌이고 노숙자 마냥 정처 없이 유랑하는 꼴이. 저와는 비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울 텐데도 파리해진 안색으로 괜찮다고 말하는 저 얼굴이.

“울지 마. 봐, 나 멀쩡해.”

태연하게 거짓말하는 저 얼굴이 미웠다.
아니, 진짜로 미운 대상은 따로 있었다. 아무리 마교의 소행이라지만 제 주인을 까맣게 잊은 화산에 배신감이 들었다. 전쟁을 끝낸 게 누구인지도 모르고 제 주인을 매도하는 중원이 증오스러웠다.

“괜찮아.”

주인은 제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짐작이 안 가는 투로 말했다.

“괜찮아.”
“이 녀석이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홍대광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상을 내리쳤다. 그는 얼굴이 벌게진 채로 이를 악물었다. 상황이 이리도 엿 같을 수가 없었다. 거지들을 풀어서 화산검협을 수색하는 동안 그 홀로 화산에 찾아가서 이야기라도 나누자고 했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가관이었다.
‘화산검협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듣지 않겠습니다. 돌아가 주십시오.’

화산마저 화산검협을 잊었다는 소식은 마지막까지 믿지 않았다. 불신 가득한 상태로 제가 착각했음을 확인하고 싶어 화산을 올랐다. 한 줄기 희망이라도 잡으려고 무심결에 물었다.

‘장문인, 정말 화산검협을 파문하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어째섭니까? 장문인께서는 지금 어떤 행동을 하셨는지 몰라서 그러시는 겁니까?’
‘마교와 연이 닿아 있는 자에게는 자비를 베풀 필요가 없습니다.’

홍대광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한 자 한 자 씹어 뱉듯 말했다.

‘그건 오명입니다. 화산검협은 그런 녀석이 아니란 말입니다.’
현종의 입에서 파문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까지도 희망을 놓지 않았다. 잘못 들은 거라고 부정하며 현종을 보니 그의 안에서 희망이 산산조각 났다. 저 냉혹한 얼굴이 현실이었다. 홍대광은 낯선 것을 보듯 현종을 보았다.

‘장문인. 정녕 그것이 장문인과 화산의 뜻입니까?’
‘분타주 이전에도 제게 비슷한 질문을 던진 사람이 몇몇 있었습니다. 거기에 저는 매번 똑같은 답변을 들려드렸지요.’

현종은 뒷짐을 진 채 더없이 평온한 표정으로, 그러나 눈은 차가운 빛을 발하며 대답했다.

‘마교의 비밀을 간직한 자는 화산 사람이 아닙니다.’
‘장문인!’
홍대광이 참지 못하고 악을 쓰려고 하자 현종의 뒤에서 허리에 검을 찬 오검이 나타났다. 그 이상 장문인을 곤란하게 하지 말라는 듯. 다들 눈빛이 싸늘했다. 화산검협이 없는 화산은 이렇게 차가울 수 있구나. 홍대광은 생각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화산검협은 중원에서 완전히 잊혔다.
‘……잘 알아들었습니다. 답변 감사합니다, 장문인. 분타주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가기 전에 딱 한마디만 더 올려도 되겠습니까?’
‘예.’
‘훗날 모든 진의를 알았을 때 후회하지 마십시오. 그게 아니라면 화산검협과 재회했을 때 녀석을 보며 조금이라도 미안해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홍대광은 산문을 내려갔다. 현종은 작게 숨을 들이쉬고 몸을 돌렸다. 오검이 곁을 따랐다. 조걸, 윤종, 당소소가 차례로 말했다.

“장문인, 괜찮으십니까? 하루가 멀다 하고 저런 사람이 찾아와서 여간 피로하실 텐데.”
“다음부터는 보초에 더 신경을 쓰겠습니다.”
“정말 화산검협을 파문했냐는 등, 얼굴만이라도 보게 해 달라는 등. 들을 가치도 없는 질문들인데 장문인께서 고생이 많으세요.”

화산검협이라는 별호도 자격이 없다. 기만자에게 어디 화산 이름을 붙이는가. 검협이라고 줄여 부르기도 싫다. 당소소는 속으로 기만자, 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개방은 진작 사람을 풀어서 놈을 찾고 있다고 하더군요. 구파일방도 수배령을 내렸고.”

윤종이 말했다. 그가 잠시 산을 내려갔을 때 섬서에도 바삐 돌아다니는 거지들을 발견했다. 들리는 이야기로 구파일방도 곳곳에 수배령을 뿌려 화산검협을 수색하고 있다고 한다.

‘해명할 기회를 주려나 보지.’
화산검협의 행방 따위 알 바 아니다. 세인들은 화산검협이 파문당했다고 하나 실제는 그가 제 발로 나간 것이다. 그러나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 이러다 그가 외부에서 의문사를 맞으면 화산이 화산검협을 죽였다고 난리를 필 것이었다.

‘그러게 거짓으로 접근하지 말았어야지. 인과응보다.’
유이설만이 속을 알기 어려운 눈으로 산문을 쳐다보았다. 그 투명한 눈동자에 산문이 아니라 다른 이의 모습이 비치는 것 같았다.

‘정말 기만자일까.’

최근 침소에 들 때마다 어김없이 같은 꿈을 꾼다. 매화가 새겨진 검을 들고 너울지듯 춤을 추는 청년이 나오는 꿈이었다.
가까이 갈 생각도 안 하고 홀린 듯이 지켜보았다. 안개가 낀 것 마냥 모습이 흐려서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사흘 연속으로 같은 꿈을 꾸니 꿈의 마지막이 어떻게 끝나는지 어렴풋하게 알았다.

‘매화였어. 그건.’

그렇게 아름답고 생생한 매화는 처음 보았다. 동시에 슬픔이 느껴지는 매화였다.
진짜 마교와 내통하는 자라면 매화를 피우는 검이 그토록 아름다울 리 없다. 단순한 사칭범이라면 연기가 그 정도로 뛰어날 리 없다. 유이설은 결심했다.

‘직접 만나 봐야겠어.’

개인 수련 시간을 깎는 한이 있어도 찾을 것이다. 찾아서 물어볼 것이다. 너의 매화는 정체가 무엇인지.
톡. 이마에 물방울이 떨어졌다. 서늘한 감촉에 청명은 눈을 떴다. 흐린 시야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종유석이 다닥다닥 붙은 천장이었다. 머리가 멍했다. 울퉁불퉁한 천장을 한참 바라보자 초점이 선명하게 잡혔다.

‘맞다, 잠자리를 구하려고 이 동굴에 들어왔지.’
고개를 돌리니 바로 옆에 백아가 몸을 오므린 채 자고 있었다. 등허리가 미약하게 오르내렸다. 그 움직임도 한참 바라보다가, 몸을 덮은 장포를 치우고 일어났다. 터벅거리는 걸음으로 밖으로 나왔다. 눈부신 햇살이 내려왔다. 웬일로 하늘이 맑았다. 주위에 쌓인 눈덩이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햇살만 보면 한없이 따듯했으나 공기는 서리가 어린 듯 시렸다. 청명은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가 정해진 걸음이 아니었다. 산책처럼 느긋하게 주변 풍경을 둘러보았다. 동굴 앞은 나무와 풀로 우거져 있어서 무성했다. 바닥에 드리운 나뭇잎 그림자가 산란하게 흔들렸다. 멀리서 새소리도 들렸다.
젊었을 때는 이런 풍경에 별 관심 없었는데, 회춘하니 온갖 궁상을 다 떤다. 가당치도 않은 소리를 듣고 다닌 탓인가. 사람 마음이란 게 참 이상하다. 저를 향한 세상의 시선이 뒤집힌 것만으로 기분이 여간 평소 같지가 않다. 사람들이 저더러 정파를 배신한 자란다. 기만자라고 수군거린다.
머릿속 한편에서 또 다른 자신이 나무랐다. 궁상 떨지 마. 이번에야말로 전쟁을 끝내면 세상이 너를 칭송해 줄 것 같았어? 진정 바랐던 건 화산의 부흥이지 너의 신화가 아니잖아. 마교에 대해 가장 잘 알면서 왜, 이제 와 놈들의 지독함에 혀를 내두르려고? 만약 그렇다면 천하의 머저리야.
‘그래. 세상이 나를 칭송해 주길 바란 건 아니었어. 나는 과거의 망령일 뿐이니까.’

머리로는 착실히 알고 있다. 가슴으로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다만 가끔씩은 이렇게 사색에 잠기곤 한다. 내 일인데 남 일처럼 느껴졌다. 세인들이 수군대는 소리도 멀기만 했다. 지독한 위화감이 뇌리를 덮쳤다.
약 오십 걸음을 걷자 길은 절벽으로 끝났다. 절벽 아래로 마을이 펼쳐졌다. 양민들이 도구를 들고 집 앞에 쌓인 눈덩이를 치우고 있다. 오래도록 떠돌면서 저 광경도 수 차례 봐 왔다. 저런 풍경이 자꾸 세상은 평화롭다고 믿게 한다.

키이이!

뒤에서 울음소리가 나더니 하얀 솜뭉치가 목에 감겼다.
백아가 제 몸으로 그의 목을 감싸고 올려다보았다. 왜 자길 깨우지 않았냐고 질책하는 시선이었다. 청명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묘하게 힘이 없었다.

“곤히 자고 있어서 안 깨웠어.”

백아는 꼬리로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울음소리였으나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다. 호들갑은.
절벽 끄트머리에 서서 뒷짐을 지고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눈덩이를 치우는 모양새가 분주하면서 보기 좋았다. 묶지 않아 부스스하게 늘어트린 머리카락이 살랑였다. 보고 있자니 마음이 평온하게 가라앉았다.

‘만약…… 전쟁을 끝낸 사람이 내가 아니라 다른 녀석이었다면, 결과가 조금은 달랐을까?’
맑은 새소리와 절벽 아래 흐르는 계곡물 소리가 겹쳤다. 시야 위로 엷은 햇살이 드리웠다. 햇살이 시야를 채웠다. 푸른 하늘과 마을 풍경이 빛 너머로 가려졌다. 세상이 빛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눈앞이 훅 꺼졌다.

‘어……? 왜 몸에서 힘이 빠지지?’
키이이이이이이이이!
백아가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잠깐 휘청인 청명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대로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풍덩, 계곡물에 큰 파문이 일었다. 꼬르륵 소리가 나며 공기 방울이 올라왔다.

세상은 평화로웠다. 누군가에게 이변이 나타나도 멀리서는 작은 파문일 뿐이다.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사방은 암흑으로 깜깜했다. 온몸이 물먹은 솜 마냥 무거웠다. 모든 것이 모호했다. 내가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이게 사람의 몸인가? 엄청나게 차갑군. 담요를 좀 더 가져오게.”
“계곡에서 발견했을 때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웬 짐승도 같이…….”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전신에 감각이 하나둘 돌아왔다. 수면에 잠긴 것처럼 아득하던 정신도 선명해졌다. 천천히 눈을 뜨자 흐릿한 시야에 세 명의 사람이 잡혔다. 중년 여성 하나와 남성 둘이었다. 그들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지켜보다 청명이 깨어나자 안색이 밝아졌다.

“오! 정신이 드는가?”
담요를 가져오라고 일렀던 남성이 물었다. 청명은 입을 벌렸다. 목소리 대신 힘 빠진 바람 소리만 났다.

“물을 잔뜩 먹어서 목이 아픈 거예요.”

여성이 그의 상체를 조심스럽게 일으켜 등 뒤에 푹신한 베개를 받쳐 주고 물이 든 잔을 내밀었다. 청명은 고개를 꾸벅인 후 잔을 받아 마셨다.
“감사합니다. 여긴 어디인가요?”

생수로 목을 축이고 질문했다. 아까보다 나아졌지만 목소리가 탁했다. 여성은 그의 어깨에 담요를 여며 주었다.

“변경의 작은 마을이에요. 제 남편이 도사님이 계곡에 떠내려가는 걸 발견해서 얼른 실어 왔어요. 괜찮으세요?”
“아…… 네. 괜찮습니다. 고맙습니다.”
청명이 고개를 숙이자 여성이 손사래를 쳤다.

“어유, 아니에요. 키우시는 족제비가 신호를 보내지 않았으면 정말로 큰일 났을 거예요.”

족제비? 청명이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백아가 제 몸을 타고 올라와 어깨에 자리 잡았다. 백아가 꼬리를 내리치며 무어라 외치는데, 대강 뜻이 이해됐다.
“족제비가 도사님 물건도 같이 끌고 왔어요. 애완동물 하나 잘 키우셨어요.”

여성이 침대 아래로 손을 뻗어 큼직한 보따리를 들어 올렸다. 청명은 보따리를 가만 바라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옷은 깨끗한 걸로 갈아입혀졌고 오른쪽 손목에 붕대도 감겨 있었다. 손목이 약간 부었다.
“저, 그리고 도사님. 실례가 안 된다면 혹시, 그…….”

여태까지 아무 말 않던 남성이 어물어물 서두를 뗐다. 그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청명의 어깨 아래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힐끔거렸다. 청명은 그 뜻을 알고 대답했다.

“단순한 부작용이에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그렇군요.”
물어볼 만도 했다. 노인도 아니고 갓 약관을 넘은 청년의 머리카락 절반이 흰색이면 누구라도 시선이 갈 것이었다. 청명은 혹시 머리 묶는 끈도 보따리에 있냐고 물어보려다가 여성이 먼저 말을 건넸다.

“여하튼 다행이에요. 사정은 묻지 않을 테니 조심해서 돌아다니세요. 요즘 소문이 흉흉한데.”
“어떤 소문인데요?”
“도사님 모르시는구나. 중원에서 파견된 무인들이 이곳저곳을 뒤지고 있어요. 화산검협에게 수배령이 내려졌나.”

제 이름이 나오자 청명이 눈을 크게 떴다.

“……그자가 왜요?”
“화산검협이 마교로부터 중원을 구했지만 그가 마교와 내통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요.”
여성의 이야기로는 구파일방이 화산검협에게 완벽한 해명을 듣기 위해 수배령을 뿌렸다고 한다. 지금도 정파 무인들이 중원을 이 잡듯 수색하고 있을 거라고.

“이 마을도 중원에 속하지만 중원과 꽤 떨어져 있어서 여기까지 소문이 닿지 않았어요. 우리 사람들도 아는 데 시간이 걸렸죠.”
“……그렇습니까.”
“도사님도 조심하세요. 사파도 화산검협과 비슷하게 생긴 자라면 닥치는 대로 잡아들이거든요.”

여성의 뒤편에서 뒤통수 긁는 걸 멈춘 남성이 투덜댔다.

“무능한 정파 놈들. 고작 사람 하나 잡지 못해서 일을 이렇게 크게 부풀리다니.”
“고작이 아니라 화산검협이라니까요.”
“알 게 뭡니까. 실제로 본 적이 없는데. 어쩌면 소문이 사실일지도 몰라요. 화산검협이 마교 출신이라는 거.”
“실제로 본 적이 없다면서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알아요?”

여성이 핀잔을 주자 남성이 코웃음을 쳤다.

“화산검협이 화산에서 파문당했다잖습니까. 그것만으로 견적은 나왔죠.”
청명은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소문의 향방이 알아서 흐르도록 내버려 두었지만, 설마 자신을 잡으려고 수배령까지 뿌릴 줄은 생각도 못했다. 게다가 사파도 움직였다고. 구파일방이라면 모를까, 사파는 양민들을 가만둘 리가 없었다. 그 말은.

‘내가 여기 있으면 이 사람들이 위험해져.’
그가 몸을 덮은 이불을 치우자 여성이 기겁했다.

“아이고, 도사님. 좀 더 누워 계세요. 몸도 성치 않으신데.”
“아니에요. 폐는 충분히 끼쳤으니 이만 가 볼게요.”
“저, 도사님.”

여성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사실 도사님께서 잠드시는 동안 의원을 불러서 몸을 살펴봤어요. 그런데…….”
여성이 입술을 달싹였다.

“몸 안의 내력이 크게 상했다고, 당장 정양에 들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이 도사님은 누구시길래 몸이 이리 엉망진창이냐고.”

청명은 대답이 없었다. 남성이 거들었다.

“그래요. 저도 계곡에서 봤을 때는 시체인 줄 알았습니다. 부담 갖지 마시고 며칠 쉬다 가세요.”
청명은 그들의 말에서 의원도 무인임을 알아차렸다. 내력이라는 단어에서 눈치챘고, 아마 양민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해 준 거겠지.

그리고 상황이 위험하건 어쨌건 이들 덕에 목숨을 건졌다. 그 빚을 청산할 겸 이 마을에 머물면서 나쁜 발길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켜 주는 것도 좋겠지.
“알겠습니다.”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청명은 자신이 표할 수 있는 모든 예를 담아 말했다.

“정 그러시다면 며칠 동안만 신세 좀 지겠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청명은 마을 주민들에게 정성껏 보살핌 받으면서 정양에 지냈다. 혼절했다 깨어났었을 때 그에게 처음 말을 걸었던 남성은 마을의 촌장으로, 그에게 비어 있는 민가를 통째로 주었다.

“어차피 아무도 안 써서 빈집이나 마찬가질세. 외부인을 위해 늘 깨끗하게 정리해 두니 자네가 지내게.”
촌장의 말대로 민가는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다. 넓이도 적당해서 한 사람이 지내는 데 문제없었다. 거처를 내준 건 고마웠지만 감격스러울 정도는 아니었다. 이미 노숙을 일상으로 굳혀서 편안한 잠자리가 생겼다고 크게 기뻐할 수 없었다. 되레 어색했다.
그래도 보답할 거리가 하나 더 늘었으니 일손이라도 돕자. 그리 결심하고 주민들에게 다가갔더니 극구 사양했다.

“환자가 도울 손이 어디 있다고. 들어가서 쉬세요.”
“사람 한 명 구한 게 뭐가 대단하다고. 도사님이야말로 몸 보신 꾸준히 해 주세요. 피골이 상접해서는.”

밭에 가도 쫓겨났다.
백아마저 제가 일손을 거들려고 하면 털을 곤두세우며 두 앞발로 목을 조였다. 가당치도 않은 협박이라 무시할 수 있었으나 청명은 얌전히 평상에 앉아서 구경했다.

“몸은 어떠십니까.”

의원이 다가와 물었다.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 올린, 저보다 몇 살 많아 보이는 남성이었다. 청명은 대답했다.
“강제로 쉬어서 꽤 나아졌어요. 매번 살펴봐 주셔서 감사해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걸요. 그보다,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만.”

의원이 낮은 어투로 말했다.

“기억하고 계시겠지요? 절대 무리하셔선 안 됩니다. 부작용으로 피가 역류하는 걸 간신히 막아 놔서, 또 언제 변이 도질지 모릅니다.”
“알고 있어요. 염려하지 마세요.”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무조건 절대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의원이 재차 당부했다. 청명은 그의 눈에 깃든 걱정을 읽었다. 촌장보다 이 사람이 더 충격받았을 것이다. 선천지기의 부작용으로 내력이 몸 안을 어지럽게 도는 걸 직접 확인했을 텐데.
의원은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이 청년은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촌장이 데려와 눕히는 걸 봤을 땐 지나치게 창백해서 시체인 줄 알았다. 물기를 잔뜩 먹어서 축축해진 하얀 머리카락 덕에 더욱 시체 인상이 강했다.

‘선천지기의 영향으로 머리가 하얗게 세는 부작용은 못 들어 봤는데.’
첫인상이 워낙 강렬해서 지금도 그 인상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했다. 잘 먹고 푹 쉬어서 나아졌다지만 여전히 말랐고, 안색도 파리했다. 눈까지 붉어서 정말 귀신이 아닌가, 의심도 들었다.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걱정 말라고 하는 저 목소리도 얼마나 태연한지. 기이하고 이질적이었다.
“꼭, 조심해 주십시오. 꼭.”

견디기 어려운 이질감 앞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건 조심하라고 당부하는 것이 전부였다.
홀로 남은 청명은 의원이 두고 간 미음을 먹으면서 눈을 내리깔았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웃으면서 괜찮다고 하고 끝이었을 텐데, 저 사람에게는 그 말만 들려주기가 어려웠다. 의원 특성인가.

‘말해 봐요. 도대체 왜 그러셨어요?’
‘몸뚱이가 걸레짝이 됐으면 얌전히 치료나 받을 것이지!’
당소소와 비슷했다. 끓는 감정을 삭이면서도 애가 타는 얼굴로 바라보는 게. 그녀를 시작으로 파도처럼 기억이 밀려왔다.

‘우리는 네가 죽은 줄 알았다, 이 빌어먹을 놈아!’
‘청명아, 참아라!’
‘오늘은 또 얼마나 했기에 이렇게 늦게 왔어?’
‘사고니까. 사고는 사질을 지키는 거야.’
없다. 제가 기억하는 사람들은 이제 없다. 애당초 저와 연이 닿아서는 안 되는 이들이었다. 이제야 제자리로 돌아간 것뿐이다.

“윽…….”

청명은 양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웅크렸다. 일그러지는 세상 속에서 청문의 모습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장문 사형. 사형이라면 어찌하시겠습니까?’
모르겠습니다. 이 엿 같은 기분을 어찌해야 할지, 저는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사형.

모두가 나를 배신자 취급해요. 누구도 나를 기억해 주는 사람이 없어요. 이럴 때는 어찌해야 합니까? 제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면 됩니까?
마을에서 신세 진 지 일주일이 지났다. 의원의 훌륭한 실력 덕에 몸 상태가 수월하게 회복되었고 주민들의 정성 어린 보살핌 덕에 회복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이제는 저 멀리까지 산책 나갈 정도는 되었다.

“도사님, 중원의 무인들은 엄청 강해요?”
“도사님, 이것 보세요. 제가 만든 화관이에요!”
청명의 허리쯤 올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그의 주변을 종종걸음으로 따라왔다. 소녀가 그의 옷자락을 당기자 그가 상체를 숙여 주었다. 소녀가 그의 머리에 화관을 씌우며 밝게 웃었다.

“도사님 예쁘다!”
“도사님, 중원에서는 뭐가 제일 유행이에요?”

소년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물었다.
“유행은 모르겠고…… 가장 유명한 건 있지.”
“정말요? 뭔데요? 알려 주세요!”
“정파 무인들이 한 사람에게 현상 수배령을 내렸어. 지금 그 사람을 찾고 있대.”
“왜요? 그 사람이 뭘 잘못했어요?”

소년의 순진한 물음에 청명은 소년의 머리를 가만 쓰다듬어 주었다.

“글쎄. 잡아서 이유를 듣겠다나.”
제 몸은 하나뿐이니 그곳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모른다. 지역을 가리지 않고 수색하고 있을 텐데, 백사장에서 바늘 찾는 기분이겠지. 귀한 시간 깎아 가며 뒤졌는데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았으니.

“저 누군지 알아요! 제 오라버니도 함께 찾고 있거든요.”

소녀가 손을 들었다.
“제 오라버니도 중원의 무사인데, 어머니께서 가끔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화산검협이라는 사람을 온 중원이 찾고 있다고.”

아이의 입에서도 제 얘기를 들으니 신기했다. 정리되지 않고 날것 그대로 말하는 소녀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저는 솔직히 화산검협이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어요.”
소녀가 불퉁한 낯으로 뺨을 부풀렸다.

“중원의 모든 무사님들이 힘을 합쳤어도, 전쟁을 끝낸 건 화산검협이잖아요? 저희한테는 영웅이나 다름없는데, 왜 화산검협이 쫓기는 신세가 돼야 해요?”
“내 말이!”

소년도 맞장구를 치고 언성을 높였다.

“어른들한테 실망이야. 감사한 줄도 모르고!”
“맞아! 은인이 누군데! 정말 너무해!”

두 아이는 열이 올라서 자기들끼리 구파일방의 흉을 봤다. 청명은 두 아이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이제 세상에 저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는데, 뒷담과 매도로 점철된 세상 아래에 이토록 순수한 마음이 잠들어 있었다.
“도사님은 화도 안 나세요? 천하의 영웅이 욕을 먹고 있는데!”
“나?”

자신에게 화살이 날아오자 청명은 눈을 깜박였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딱히 할 말도 없지 않은가. 욕을 먹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소문의 장본인이 해명할 생각도 안 하고 침묵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화산검협이 알아서 하겠지. 본인도 생각이라는 게 있을 거야.”
“빨리 나타나서 오해를 풀었으면 좋겠어요. 죄지은 것도 없는데 그분이 왜 숨어 있어야 해요…….”

소년의 어깨가 처졌다. 청명은 제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수도 있다고 신기해했다.

“글쎄. 이젠 그 별호도 안 어울릴 텐데.”
처음 그 별호로 정해졌을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주제에 협은 무슨. 실천해 봤자 돌아오는 것도 없는데. 혀를 놀릴수록 현실감이 흐려졌다. 주위 풍경이 아득했다.

“세상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겠지. 화산검협이 다시없을 악마든, 전 중원을 속이고 정의를 기만한 배신자든.”
두 아이가 자신을 어떤 눈으로 쳐다보든 청명은 제 할 말을 마쳤다.

“지금도 전 중원이 혈안이 돼서 찾고 있는데 안 나타나는 걸 보면, 소문을 잠재울 마음이 전혀 없나 봐.”

휭, 살을 에는 바람이 불었다. 흰 머리카락이 나부끼며 입가에 서글픈 그림자를 드리웠다.
마을에서 지낸 지 한 달. 청명의 몸 상태는 처음 발견됐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좋아졌다. 선천지기의 부작용은 없애는 게 불가능하나 부작용을 앓고 있는 것치고는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해졌다. 나아진 만큼 의원의 잔소리도 심해졌다.

“나아졌다는 게 완치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시겠습니까?”
“알았다니까요.”

갈수록 좋아지고 있는데 왜 잔소리도 나날이 발전하는지. 나만큼 회복 속도가 빠른 사람은 없다고. 더구나 몸 상태가 그 꼬라지였던 걸 감안하면.

산책 겸 절벽을 타고 오려고 짐승의 가죽을 두른 옷을 입었다. 백아가 품으로 들어와 몸을 둥글게 말았다.

“멀리 가지 마세요!”
아이들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청명은 손을 휘젓는 것으로 대충 대답하고는 가파른 길을 폴짝폴짝 올랐다. 도포 자락이 날개처럼 펄럭였다. 발놀림이 가벼웠다. 이만큼 회복됐는데 저들은 아직도 날 깨지기 쉬운 알 보듯 본다. 걱정도 심하면 병이라니까.
청명이 사라지고 얼마 안 지났을 즈음, 마을 입구에 한 무리가 나타났다. 무복을 정갈하게 차려입고 매서운 눈빛을 뿜는 병사들이었다. 주민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촌장이 대표로 나섰다.

“무슨 일이십니까?”
“실례합니다. 잠시 조사를 나왔습니다. 협조 부탁드리겠습니다.”
맨 앞에 선 병사가 대답하고는 뒤에 도열해 있는 병사들에게 턱짓했다. 그들이 일사불란하게 마을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예?”
“아니, 저기…….”

병사들은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주민들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폈다. 물가에서 놀다가 돌아온 아이들도 살폈다. 접촉은 일절 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만 팔을 들어 보시겠습니까?”
“네? 네.”

주민들에게 손을 대는 대신 정중하게 부탁했다. 의미도 모를 작업이 마을 안에 있는 모든 주민을 점검할 때까지 이어졌다. 지시를 내린 병사가 촌장을 향해 말했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는 현재 화산검협을 찾는 중입니다.”
“화산검협이라고 하시면……?”
“예. 마교와 내통한다는 소문이 도는 자 말입니다. 진상을 밝히기 위해 화산검협과 인상착의가 비슷한 사람을 수색하고 있습니다.”

병사들의 다 끝났다는 얘기가 들렸다. 지휘관은 모이라고 대답하고는 촌장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썰물처럼 마을을 빠져나갔다.
“흠.”

그리고 까마득하게 높은 절벽 중간에 튀어나온 바위에 걸터앉아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청명이 턱을 쓰다듬었다. 눈빛이 차게 가라앉았다.

‘슬슬 여길 떠야겠는데.’

벌써 구파일방의 수색이 여기까지 닿았군.
“떠나겠다고?”
“네.”

촌장은 난데없는 말에 어리둥절한 얼굴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사실 난데없는 말이 아니긴 했다. 며칠 머물다 갔어야 했을 사람을 고집스럽게 붙잡아 한 달이나 묶어 뒀으니까. 결국 몸 상태가 문제였으니, 이만하면 많이 회복되었다는 건가. 청명은 고개를 나른하게 기울였다.
“한 달이면 신세는 충분히 졌고, 몸도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으니까요. 그리고 전 원래 한 자리에 오래 머무는 사람이 아니라서요.”
“흠, 그렇군. 알겠네. 갈 거라면 조금만 기다려 주게나. 식량과 약을 챙겨 오겠네.”
“네? 아니에요. 받은 것도 많은데.”
“환자를 지나치지 못하는 양민의 마음일세.”
그냥 받아 달라며 촌장이 너스레를 떨고는 집으로 들어갔다. 청명은 덩그러니 남아서 헛웃음을 흘렸다. 그동안 받아먹은 식사와 약이 얼만데, 그만큼 먹여 놓고도 만족스럽지 않은 걸까. 이런 게 양민의 마음이었다. 소소하고 간질간질한 웃음이 나는 마음.

“도사님! 떠나신다고요?”
소식을 들은 어른들과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청명은 그들의 질문에 일일이 답해 주었다. 아이들의 반응이 제일 격했다. 자상하고 장난도 잘 받아 주는 도사님이 가셔서 어지간히 서운했다.

“도사님, 나중에 또 오실 거죠?”
“보고 싶을 거예요.”
“다쳐 오지만 말아 주세요.”
한 소녀가 달려와 청명의 품에 안겼다. 일전에 그에게 화관을 씌워 주었었던 아이였다. 아이가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사님, 나중에 또 놀러 와 주세요. 약속이에요.”
“……그래. 여유가 생기면 꼭 들를게.”
“진짜죠!”

그는 조용하게 미소 짓는 것으로 답했다. 슬퍼 보이는 미소였다.
“자! 여기 받게.”

마침 촌장이 보따리를 싸 들고 나왔다. 들고 다니는 걸 고려했는지 적당한 크기임에도 속이 딱딱했다. 엄청나게 넣은 듯했다.

“이렇게 많이 안 챙겨 주셔도 되는데요.”
“안 될 소리. 우리가 돈이 없어서 재산을 떼 주는 건 못하지만 이런 건 해 줄 수 있네. 부담 갖지 말고 받게.”
촌장이 청명의 품에 보따리를 안겨 주었다. 청명은 얼결에 보따리를 받고는 푸슬 웃었다. 보따리 속에서 맛있는 냄새가 났다.

“감사합니다. 촌장님의 씀씀이 잊지 않을게요.”
“밥이나 꾸준히 먹고 다니게. 잘 가게나.”
“예. 그간 감사했습니다.”

청명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몸을 돌렸다.
“참, 그러고 보니 자네 이름을 안 물어봤군. 자네 이름이 뭔가?”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촌장이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청명은 등을 돌린 채 대답이 없었다. 바람이 한번 불고, 바람결에 청명의 고요한 목소리가 흘렀다.

“제 이름은…… 아실 필요가 없으세요. 그냥 무명의 도사로만 기억해 주세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바람이 제법 거세졌다. 차가우나 제게는 따스한 바람이었다. 청명의 등에 양민들의 목소리가 닿았다.

“잘 가세요, 도사님!”
“살펴 가세요! 또 놀러 오시고요!”
“나중에 꼭 도사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마구잡이로 펄럭이는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대답을 대신해 주는 듯했다.
“따듯하지.”

옷자락 속에 몸을 말고 있는 백아에게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백아가 올려다보자 청명은 앞을 응시한 채 조그만 중얼거림을 흘렸다.

“이렇게 따듯한 대접은 처음이야.”

이전에도 양민들에게 도움을 주고 몇 번 대접을 받아 봤었지만, 이건 경우가 완전히 달랐다.
한 것도 없는데 대접을 받았다. 무뢰배의 손에서 구해 주거나 재산을 갈취한 산적을 혼내 준 것도 아닌데 잠자리가 생기고 멀쩡한 식사를 하게 됐다. 이유랄 게 없었다. 제가 죽어 가고 있었으니까. 숨이 끊어질 만큼 위태위태한 상황이었으니까. 궁금한 게 많았을 텐데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고마워도 이만큼 고마울 수가 없었다. 빚은 한 달 동안 넘치도록 졌는데도 떠나는 날에 또 한 무더기의 빚을 졌다. 무어라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 속에서부터 뭉클거리며 올라왔다. 청명은 그 감정의 이름을 굳이 알고 싶지 않았다.

“이 온기를 오래 간직했으면 좋겠다.”

바라지 못하는 소망이다.
다시 혼자로 돌아왔다. 달라진 게 있냐면 눈에 띄게 한가해졌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쫓기듯이 의복을 정돈하지 않아도 되고 걷는 속도도 느긋해졌다. 늘 어깨에 들어가 있었던 힘도 풀렸다. 그 한 달 동안이 무슨 영향을 주었기에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이리도 허전한지.
“이거 맛있다. 더 먹어 봐.”

높은 나뭇가지 위에 앉아서 백아와 함께 촌장이 싸 준 음식들을 먹었다. 하나같이 영앙식인 게 환자를 고려한 요리임이 틀림없었다. 촌장 혼자서 만들지는 않았을 테고, 아낙들을 동원했나. 백아가 앞발로 당과를 쪼개서 볼이 빵빵해지도록 우물거렸다.
심신이 안정되었다고 놀고먹은 건 아니었다. 언제든 주변에 대비할 수 있도록 기척을 곤두세우고 다녔다. 구파일방의 수색이 이전보다 강화됐으니 한시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 마침 좋은 수도 하나 있고.

“이걸로 주세요.”

장신구를 주워다 파는 것 같은 노점상에서 가면을 하나 샀다.
검은색과 하얀색 위주로 칠해진 요괴 탈이었다. 깔끔하고 단조로운 데다 무표정이어서 마음에 들었다. 이걸 쓰고 다니면 적어도 얼굴이 팔릴 걱정은 안 해도 되었다. 그리고 심신이 편안해진 탓인가, 쓸데없는 호기심이 떠올랐다.

‘잠깐 돌아가서 구파일방이 얼마나 바쁜지 구경할까.’
누구랑 접촉하는 것도 아니고 잠깐만 둘러보다 나오는 것이다. 구파일방의 웃기기만 한 노동을 눈앞에서 직관하면 기분이 약간 풀릴 것 같았다. 판단을 굳히자 오른손으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가리려면…… 제대로 가리는 게 좋겠지.’

노점상에서 머리에 뒤집어쓸 검은 천도 샀다.
중원은 거들떠도 안 본 지 오래돼서 돌아가는 데 시간이 상당히 걸렸다. 그래도 감각으로는 확실히 기억하고 있는지라 수월하게 이동했다. 되도록 인적이 드문 경로를 탔다. 하늘이 어둑어둑해질 즈음 익숙한 길로 접어들었다. 높이 솟은 산봉우리에 서서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풍경을 관찰했다.
‘정신없네.’

밤중에도 무인과 거지들이 한데 섞여서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여기저기를 번개처럼 쑤시고 다녀서 보는 것만으로 어지러웠다. 한 무인이 제 얼굴이 그려진 전단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다. 사람들은 전단을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청명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이걸로 한 달쨉니다. 이미 죽은 거 아닙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화산검협이 죽었을 리가 없어. 분명 어딘가에서 몸을 숨기고 있을 거야.”
“골 때리겠네요. 증거를 찾으려고 당사자를 뒤지고 있는데 당사자는 안 보이지, 화산은 묵묵부답이지.”
“헛소리 지껄일 시간에 몸이나 움직여!”
무인들의 시시콜콜한 잡담을 듣던 청명은 산봉우리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자연스럽게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풍성한 나뭇잎과 수풀 사이로 검은 그림자가 쏜살같이 지나갔다.

두 번째로 도착한 곳은 입에 담기에 아픈 곳이었다. 어둠과 동화된 채로 연무장을 달리는 이들을 주시했다.
“더 빨리 달려! 그렇게 느려 터져서는 어느 세월에 오백 바퀴 달성할래!”
“검이라고 하면 역시 하체지!”
“사고! 저 어때요? 잘했어요?”

제자들이 넓은 연무장에 모여서 수련하고 있었다. 그들이 뿌리는 땀방울이 사방에 흩뿌려졌다.

“오늘 할당량 못 채우면 백천 사숙이 아침밥 없다고 하셨어!”
“빌어먹을! 꼬장은!”
“제발 한 대만 때리고 싶다!”
“네 사숙이야! 임마!”
“저도 알아요!”

성난 소리와 검 휘두르는 소리, 달리는 소리가 한데 어우러졌다. 지극히 익숙한 광경이었다. 누구 하나 설렁설렁 하지 않았다. 모두가 진지하게 수련에 임하고 있었다. 청명은 절로 흐뭇하게 웃었다.
‘이거 봐. 내가 있을 필요가 없잖아.’

구태여 잔소리를 하지 않아도 모두가 자발적으로 수련에 동참했다. 구박만 하기 바쁜 아이들을 한 발짝 떨어져서 보니 벌써 어엿한 무인이 되었다. 뿌듯함과 동시에 위화감이 들었다. 제 화산인데 제 화산이 아닌 것 같았다. 모두가 익숙한 얼굴임에도 낯설었다.
나름 각오하고 온 것임에도 어쩔 수 없이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더 봤다간 실수로라도 기척을 드러낼 듯싶어 발길을 돌렸다.

제자들이 연무장에 몰려 있어서 산은 조용했다. 산에는 아직 눈덩이가 쌓여 있었다. 발자국도 내지 않고 산을 올랐다. 머리에 쓴 검은 천이 길게 늘어져 흔들렸다.
수련할 때 자주 찾았었던 산을 둘러보니 묘한 향수를 느꼈다. 제가 기억하는 이곳의 나무들은 나뭇잎으로 풍성했었는데, 잎이 죄다 빠져서 눈이 내려앉아 있으니 그것도 묘했다.

“후.”

짧게 숨을 내쉬자 뿌연 김이 새었다. 공기가 살벌하리만치 차가워서 숨결도 딱딱하게 굳으면서 흩어졌다.
제가 화산에 왔다는 걸 들키면 난리가 날 것이었다. 기척을 지우면 문제없겠지만 그럼에도 불안해서 거추장스러운 가면과 천까지 쓰지 않았던가. 그래도 딱 한 사람은, 제가 약간의 인기척만 흘려도 틀림없이 감지할 것이다. 다섯, 넷, 셋, 둘, 하나…….

“거기, 잠깐.”

바로 지금처럼.
돌아보지 않아도 알았다. 뒤에서 자박대는 발소리가 두어 번 들리고, 멈췄다. 숨을 가다듬는 소리에 이어 나직한 음성이 들렸다.

“나랑…… 나랑 얘기 좀 해.”

정적이 흘렀다. 후두둑, 어디선가 눈덩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약간의 정적이 더 지난 후에야 청명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유이설이 잔뜩 헝클어진 머리를 늘어트린 채 숨을 헐떡이며 저를 보고 있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아까까지 당소소의 훈련을 봐주고 있었는데, 한달음에 산을 오르다니. 대단한걸.

사이의 거리는 약 열 걸음 남짓. 결코 가깝지 않은 거리였으나 유이설은 그 자리에 딱 붙어 섰다.
한 발짝이라도 다가갔다간 그대로 제가 사라져 버릴까 봐 염려하는 듯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청명은 그녀의 저 태도가 어색했다. 쟤가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나.

“너…… 화산검협. 청명. 맞지.”
“…….”

침묵이었으나 그것만으로 대답은 충분했다. 그녀는 연이어 질문을 꺼냈다.
“화산엔 왜 왔지?”
“…….”
“추궁하는 거 아니야. 그냥, 궁금해서.”

고저가 거의 없는 목소리였으나 청명은 그녀의 목소리 아래에 큰 격랑이 일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제가 대답을 않자 그녀가 말했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로 할게. 비밀로 할 테니까…… 시간을 좀 내줘.”
유이설이 간절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았다. 꿰뚫릴 듯한 시선에, 청명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이설은 바로 질문했다.

“고마워. 그래서 화산엔 왜 왔어?”

청명은 뒷짐을 지고 주변을 느긋하게 둘러보았다. 유이설은 그 행동에서 답을 읽었다.

“오고 싶어서 왔다고?”

끄덕였다.
유이설은 입술을 달싹였다. 얘기 좀 하자며 붙잡아 놓고는 막상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지 머리를 굴리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해야 할 질문을 내뱉는 데 마음의 준비가 덜 됐거나.

“지금까지, 어디에서 뭐 하고 있었어?”

침묵했다. 몰라도 된다는 듯. 유이설은 그 행동의 뜻도 알고 다음 걸 물었다.
“몸은 괜찮아?”

끄덕였다.

“널 잡으러 다닌다는 소식은 들었어?”

끄덕이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별문제 없다는 듯.

“머물 곳은?”

고개를 저었다. 유이설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노숙?”

끄덕였다. 그녀의 눈살이 더더욱 찌푸려졌다. 청명이 고개를 기울였다. 뭐가 불만이냐는 듯.
“난 소문 안 믿어.”

그녀가 대뜸 다른 말을 꺼냈다. 청명은 고개를 기울인 그대로 그녀를 응시했다.

“처음부터 이상하게 생각했어. 마교의 첩자가 맞다면 같은 편을 몰살하려고 그렇게 치밀한 전략을 세울 리가 없는데.”

첩자라는 오명 자체부터 모순이었다.
소문을 하나부터 열까지 뜯어고쳐 살펴봐도 이 청년과 마교 사이의 연결점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설령 진짜로 마교 출신이라고 해도 그가 마교와의 전쟁을 끝낸 일등공신이 아니지 않은가. 출신이 어떻든 그의 행보를 본다면 출신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유이설은 몇 번이고 의심했다.
‘소문이 사실일 리가 없어.’

장문인의 명이 아니었으면 그녀는 저자가 제 입으로 화산을 나가겠다고 선언했을 때 필시 만류했을 것이었다. 지금도 머릿속에 전장을 누비는 그의 검이 생생하게 떠오르는데, 그 검에 되도 않는 추문을 가져다 붙일 수 없잖은가.

“너의 매화를 기억해.”
생기라고는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가면을 똑바로 주시하며, 유이설은 말했다.

“네 매화는 진짜. 소문 따위로 네 매화를 속일 수 없어. 너는 틀림없는 화산의 제자야.”

요즘은 다른 꿈을 꾼다. 저자와 수 차례 전장을 함께하는 꿈이었다. 꿈속에서 다양한 장면들을 보았다.
‘둘 다 조용. 등에 칼 박히고 싶지 않으면.’
‘그 검. 매화를 피우는 검.’
‘사질 주제에.’
‘아무리 휘둘러도 안 죽잖아. 살초를 써도 돼. 마음껏.’

꿈속 모든 순간에서 그녀는 저자를 보고 있었다. 드문드문 스쳐 지나가는 말들도 저자에게 한 말이었다. 잠에서 깨어나면 어김없이 머리가 복잡했다.
분명 기억에 없는 장면들이다. 그런데 왜 이리 익숙한 기분이 드는 걸까. 더구나 친숙했다. 기억에도 없는 사람인데 남이 아닌 양 거부감이 없고 편했다. 그래서 그녀는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화산의 제자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것과는 별개로 물어봐야 했다.

“넌 정체가 뭐야?”
왜 매번 꿈에 나타나서 사람 속을 복잡하게 헤집는지. 아는 사람을 넘어 동료 마냥 친근하게 대하는 그의 태도에 어째서 자신은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지. 잠에서 깨어나면 왜 어김없이 그리움이 밀려오는지. 알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왜. 어째서.
같은 자리에 서로 마주 보며 서 있는데 그와 한 공간에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모습도 밤하늘을 연상케 하는 깨끗한 검은색이어서 금방이라도 주위 어둠과 동화되어 사라져 버릴 듯했다. 그나마 형체를 잡을 수 있는 건, 펄럭이는 검은 천 속에 드문드문 보이는 하얀 머리카락.
가면 너머의 얼굴도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했다. 문득 저 가면이 억울했다. 그가 잘못한 건 없을진대 왜 본인이 얼굴을 가리고 다녀야 하는가. 죄인을 따져야 한다면 그를 멋모르는 추문으로 더럽히고 마교 출신이라고 매도하는 전 중원이 죄인이지 않은가. 그녀는 무심결에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녀가 무어라 하기 전 청명이 한 걸음 물러났다. 물러나면서 검을 뽑았다. 달밤에 드러난 암향매화검이 투명하게 빛났다. 유이설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 가운데 그가 오른손으로 검을 잡고 허리를 반쯤 틀었다. 춤추듯 허공에 유려한 궤적을 그리기 시작했다. 유이설은 순간 넋을 놓았다.
눈이 도톰하게 쌓인 땅 위로 발놀림이 일정한 박자를 이루었다. 검은 빠르고 쾌속하게 허공에 선을 그렸다. 머리에 씌인 천과 도포 자락이 날개처럼 펄럭였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검무였다.

이윽고 칼날에 붉은 검기가 어리더니 한 송이의 매화가 맺혔다. 허공에 빠르게 붉은빛이 퍼졌다.
휘둘러지는 검의 궤적을 따라 붉은 꽃송이가 피어났다. 꽃송이는 검이 일으키는 바람에 나풀나풀 날리며 하늘로 솟아올랐다. 어두운 밤하늘을 매화가 수놓으며 순식간에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매화만개梅花滿開.

유이설은 홀린 듯한 얼굴로 그 아름다운 광경을 바라보았다.
넋을 놓고 바라보는데 코앞으로 검고 하얀 가면이 나타났다. 그가 주먹 쥔 왼손을 내밀었다. 유이설도 저절로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바닥 위로 종잇조각이 떨어졌다. 그녀가 종이를 쳐다보았다. 구김이라곤 없이 반듯한 종이에 한마디가 쓰여 있었다.

고마워.

그녀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강렬한 매화의 빛 말고는 보이는 게 없었다.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들이 날아왔다.

“사고!”
“사매! 여긴가?”

당소소와 백천이었다. 두 사람이 유이설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당소소가 상기된 어투로 재잘거렸다.
“산에서 누가 매화를 피우기에 궁금해서 와 봤더니, 역시 사고였군요! 아름다웠어요. 잠깐 본 게 전부였지만 그렇게 생생한 매화는 처음이었어요.”
“사매, 노력하는 것도 좋지만 쉬어 가면서 해. 그러다 몸 축나. 안색 봐라.”

백천이 혀를 차며 타박했다. 유이설은 멍한 얼굴로 두 사람을 보았다.
꼭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묻지 못했다. 다시 마주친다고 해도 물어볼 자신이 없었다. 당소소가 그녀를 불렀다.

“사고? 왜 그래요? 어디 아프세요?”
“……아냐, 괜찮아. 내려가자.”

유이설은 고개를 젓고 산 아래로 내려가는 길로 향했다. 아까 본 매화의 밤이 뇌리에 똑똑히 각인되었다.
‘너는…… 오명을 씻을 마음이 없어?’

가장 중요하나 그렇기에 절대 물어보지 못할 질문이었다. 다음에 또 언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결심했다.

‘다음에도 내가 널 먼저 찾으러 갈 거야. 그곳이 어디든.’

잠시 내리깔았다가 고개를 든 그녀의 눈에 굳건한 빛이 어렸다.
한 달이 지나도 화산검협 수색에 진전이 없자 구파일방은 화산에 정식으로 항의했다. 화산이 죄인을 파문한 척 숨겨 놓은 거냐고. 현종은 담담하게 아니라고 대답했다. 원한다면 화산에 들어오셔서 샅샅이 살펴봐도 좋다고 덧붙였다. 그 말대로 다음 날 무당의 장로들이 방문해서 꼼꼼히 뒤졌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실례를 범했습니다.”
“아닙니다. 수색은 꼼꼼해야 하는 법이지요. 살펴 가십시오.”

화산에서 가장 험한 산까지 뒤진 뒤에야 그들은 사죄하고 물러났다. 그들은 이 결과를 가져가 구파일방에 전했다. 화산이 죄인을 숨긴 게 아니라면 그자는 대체 어디 있는가? 또다시 원점이다.
구파일방은 반대로 마교의 흔적을 찾아보기로 했다. 한 달이나 지나서 지금쯤 시신이 썩었겠으나 그토록 오래 전쟁을 치렀으니 흔적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푸른 달이 뜬 밤. 청명은 사천에 들렀다. 섬서는 대강 훑어봤으니 다음으로 오고 싶은 곳에 왔다. 내심 두근거렸다.
화산 못지않게 근황이 궁금한 곳이 사천이었다. 저를 만나기 이전의 분위기로 돌아가 있을까. 아님 구파일방처럼 저를 곱씹으며 분노를 삭이고 있지 않을까. 가까워질수록 긴장감도 강해졌다.

잠입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당가의 구조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꿰고 있으니까.
무엇보다 어둠에 완벽하게 물든 기척을 제가 스스로 드러내지 않는 한 들킬 걱정은 없을 것이다. 가벼운 발놀림으로 당가 내부를 안방처럼 누볐다. 내부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화산을 먼저 보고 온 덕에 설렜던 가슴이 점차 가라앉았다. 식솔들이 지나가는 걸 포착하기 전까지는.
“가주님은 오늘도 저기압이셔?”
“예. 집무실에 들어가신 지 한 시진이 넘었는데 아직까지 안 나오고 계세요.”

당패와 당잔이었다. 둘은 집무실 방향을 걱정스럽게 힐끔대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당패가 말했다.

“아마 화산검협 때문이겠지. 그자가 가주님을 배신했잖아.”
“배신이요?”
“가주님께서 화산검협을 얼마나 좋아하셨는데. 전쟁 중 회의할 때도 서로의 의견을 가장 먼저 들었고. 틈만 나면 주안상 펼쳐 놓고 대작했잖아.”
“가주님 인생에 처음으로 생긴 친우인데, 안타깝습니다.”

당잔이 유감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곧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이제 화산검협이라고 부르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파문당했는데.”
“나도 그러고 싶지만 화산검협이 마지막으로 남긴 자취가 그 별호뿐이잖아. 이거라도 기억해서 증거가 돼야지.”

당잔이 슬쩍 웃었다. 당패가 물었다.

“왜?”
“아닙니다. 생각해 보니 웃겨서.”

당잔이 웃음을 가다듬었다.
“다들 죄인이라고 욕하면서 꿋꿋하게 화산검협이라고 부르니까요. 그자를 정의할 수 있는 별호가 그거 하나뿐이라고 하지만 그자와 협을 같이 논하는 게, 좀…….”

당잔이 소매로 입가를 가렸다.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화산검협이 실은 마교와 내통하는 자라니. 웃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전쟁 중에 그자가 떨친 활약만 보면 협이라는 칭호가 넘치도록 어울리지. 그런데 출신은 속이지 못했던 모양이야.”

당패가 한숨을 쉬었다. 그러게 왜 마교 출신인 걸 들켜서. 화산검협이 결코 허술한 성격은 아닐진대, 어리석게.

“얼른 가자. 잠자리에 들려면 한 시진은 더 지나야 해.”
“예.”
두 사람의 기척이 완전히 멀어졌다. 청명은 천장에서 내려왔다. 사뿐히 발을 디디고 두 사람이 사라진 방향을 응시했다. 시선이 고요했다.

‘당보야, 너네 집도 엉망이다. 내심 기대했었는데.’

당보가 이 꼴을 봤다면 어땠을까. 다 뒤집어엎어서 뭇매를 맞게 할지도 모르겠다.
뼈를 도려낼 기세로 뒤지게 족친 다음 중원이고 새외고 가리지 않고 기억이 돌아올 방법을 물색할 것이다. 기억이 원래대로 돌아오면 또 거꾸로 매달아서 온몸에 독침 구멍을 뚫었겠지. 운이 나쁘면 우리 애들도 같이 혼날 것이다.

‘설마. 거기까지 가면 내가 뜯어말려야지.’
━형님은 화도 안 나시오? 저 머저리 새끼들이 형님이 중원을 구해 주었건만 싸그리 잊어버리고!
‘걔들 잘못이 아니잖아.’
━아니, 형님…… 아오…….

청명은 피식 웃고는 천 자락을 꾹 눌렀다. 검은 물결이 다시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딱 한 사람만 더 보고 가자.
창밖으로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렸다. 당군악은 집무실에 홀로 앉아서 서류를 훑었다. 눈가가 침침했으나 반 시진은 더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어야 했다. 말이 업무지 실상은 반 시진 동안 시간 때우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 사람이 머릿속을 점령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화산검협.’
그의 내통을 알았을 때 화산 다음으로 가장 분노한 이는 당군악이었다. 누구보다 마교를 싫어하는 것처럼 굴더니 정작 그가 마교 출신이었으며, 마교와 내통하는 자라고 밝혀졌을 때 분노에 사로잡혀 체통을 잃을 뻔했다.

‘기만이었군.’

주먹을 꽉 쥐었다. 지금도 그자를 생각하면 속이 뒤집힌다.
분노와 별개로 호기심도 떠올랐다. 이렇게까지 찾아도 안 보이는데, 그는 현재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가. 게다가 마지막으로 판결에서 본 그의 얼굴이 쉬이 잊히질 않는다. 영문을 몰라 어쩔 줄 모르던 얼굴. 맹주께서 파문을 명하셨을 때 스치듯 지나갔던, 씁쓸한 미소.
온갖 독을 뿌릴 만큼 꼴도 보기 싫지만 다시 한 번 볼 수 있다면 보고 싶었다. 그때의 표정을 잊지 못하는데, 지금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당군악 딴에는 사소한 호기심이라고 부정했다. 그건 나중의 얘기고, 지금은 다른 데 집중해야 했다.

“그만 나오시게.”

차가운 목소리가 울렸다.
“무슨 배짱으로 가주의 집무실에 숨어든 건지 모르겠군. 당장 나오지 않으면 그 목이 피를 뿌릴 걸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집무실 한가운데에 탓, 가벼운 발소리가 나더니 검은 인영이 내려섰다. 천 자락이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요사스러운 가면이 이쪽을 주시했다. 당군악은 서늘하게 말했다.
“당가의 집무실, 그것도 가주가 머무는 곳에 잠입한 이는 여태까지 한 명도 없었건만. 세간에 휩쓸려 당가가 얕보인 모양이군.”

그가 양손을 소매 안으로 넣어 비도를 잡았다.

“마지막 말쯤은 들어 줄 수 있겠지. 이곳에 온 이유는 뭐지? 이유가 되지 못한다면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집무실 안 공기가 팽팽하게 조여들었다. 당군악에게서 위압적인 기세가 풍겨 나왔으나 검은 인영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멀쩡하게 서 있다. 당군악은 미간을 구겼다.

‘도통 파악이 안 가는 자군.’

어둠을 사람의 형상으로 빚은 듯한 인상이었다. 전신을 감싼 흑색 도포에 표정 없는 가면.
“말을 안 할 셈인가?”

가면 탓에 저자의 시선이 어떤 생각을 담고 있는지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알 바 아니었다. 가주의 집무실에 무단으로 침입한 이상 대가는 받아야 했다. 당군악의 손이 소매에서 나오는 것과 비도가 발출되는 것이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은빛 비도가 쾌속하게 날아갔다.
소리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빠른 속도였으나 인영이 오른손을 들어 비도를 잡아챘다. 손아귀에 잡힌 비도에 담긴 내력이 빛처럼 흩어졌다. 당군악은 눈을 부릅떴다. 저걸 한 손으로 잡아채?

인영이 오른손에 잡은 비도를 고쳐 쥐고 왼손바닥에 갖다 댔다. 비도의 날카로운 날을 왼손바닥에 죽 그었다.
발치로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단숨에 흉터가 생길 만큼 깊게 그은 인영은 왼손을 뒤집었다. 왼손 손등에 핏물이 맺힌 비도 끄트머리로 뭔가를 끄적였다. 당군악은 경계하는 것을 잊고 그 기행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쓰는 걸 마친 인영이 당군악에게 다가왔다. 당군악은 다시 날을 세웠다.
인영은 개의치 않고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비도를 탁자에 내려놓고, 왼손 손등이 당군악에게 향하도록 보여 주었다. 붉은 핏줄기로 적힌 글이 당군악의 눈에 들어왔다.

고생하지 말고 휴식도 취해 가면서 해요.

마지막 단어까지 읽고 당군악은 눈을 들었다. 코앞에 가면이 있었다.
극히 짧은 순간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물렸다. 가까이서 보자 당군악은 저 가면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약간 알 것 같았다. 그건…….

인영이 손을 치우고 물러났다. 당군악은 흠칫 놀라 손을 뻗었으나 인영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눈 깜박할 새에 혼자가 된 당군악은 드물게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귀신에라도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계속 멍하니 인영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다가 이상한 사실을 알아차렸다. 인영의 손등에 쓰인 글도 글이지만, 필체가 왠지 익숙했다. 그래, 꼭 그때처럼.

왜 쓸데없이 고생하고 있어요. 다 때려치우고 일단 화산으로 오세요.

그때 받은 서찰과 필체가 똑같았다.
무의식적으로 창밖을 돌아보았다. 창 너머로 달이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 잠은 자긴 그른 것 같다.
당가를 나온 청명은 근처 가까운 숲으로 몸을 숨겼다. 잎이 풍성하게 피어난 나뭇가지에 걸터앉아서 숨을 길게 내쉬었다.

“후우, 심장 떨어질 뻔했네.”

하필 거기서 기척을 드러내 버렸다. 당가주라면 제가 무심하게 흘린 기척도 잡아내지 않을까, 호기심에서 비롯된 생각이었다.
얌전히 그림자 속에 숨어서 지켜보다가 나오면 될 것을, 굳이 모습을 드러낸 이유가 뭐였을까. 제가 헤아려 봐도 모르겠다. 제가 무척 위험한 상황이라는 자각은 있는지.

키이이이…….

백아가 속살이 드러난 제 왼손바닥을 핥았다. 손등에 적은 글은 바람에 쓸려서 핏자국만 남았다.
이상하게 말을 하지 못했다. 가면을 쓰고 있어서 무언의 압박을 받은 건지 모르겠으나, 저들에게 제 목소리를 들려줄 자신이 없었다. 길게 그은 상처가 새겨진 왼손바닥을 조용히 그러쥐었다. 가슴 한구석이 욱신거렸다. 버리고 싶으면서도 죽 간직해야 할 것 같은 감정이었다.
잡념을 떨치고 나뭇가지에서 뛰어내렸다. 백아가 하도 닦달해서 구급약을 꺼내 왼손바닥에 발랐다. 음식을 다 먹고 남은 보따리 자루를 찢어서 상처를 동여맸다. 새벽이 넘어서 한산해진 사천을 거닐었다. 지나다니는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다. 하늘을 달이 비추고 있어서 밤치고는 밝고 푸르렀다.
아아.

내 핏줄과도 같은 아이들.

세상은 어찌 이다지도 아름답고 깨끗해서 나를 슬프게 하는지.
그날 이후 세간에 기이한 이야기가 돌았다. 밤만 되면 장소를 불문하고 검은 옷을 입은 괴인이 이곳저곳에서 나타난다는 소문이다. 호기심이 동한 사람들이 괴인의 종적을 쫓았으나 그 행보가 귀신과도 같아 도무지 발견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이를 야행귀夜行鬼라고 불렀다.
나타났다 하면 신기루처럼 사라져서 목격자도 거의 없는 데다 야행귀가 모습을 드러낸 장소들 사이에 공통점도 없어서 소문이 거짓이 아니냐는 얘기도 나왔으나 개방이 직접 전한 정보라 대다수의 사람들은 믿었다. 최초로 야행귀가 출현한 곳이 사천이라 그곳으로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당가의 가주께서 야행귀를 직접 보셨다는군.”
“정말인가? 나는 어젯밤에 숲에서 야행귀가 자는 걸 봤다네!”
“어떤 숲인지도 모르면서 농담하지 말게. 나는 섬서 객잔에서 야행귀가 당과를 사는 것도 봤다네.”
“섬서 객잔은 늦은 밤에는 영업 안 하네만?”
“뭐라고? 진짜로 봤다니까!”
기존에 존재하던 흉흉한 추문 위로 새로운 소문이 덮였다. 세인들은 언제 화산검협을 욕했냐는 듯 새 설화에 관심을 가졌다. 가십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사파 무리가 양민들 사는 곳에 들이닥쳐서 그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이고 있다. 아이, 청년, 중년, 노인 등 가리지 않고 납치해 갔다.
청명은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녹림을 떠올렸다가 머리에서 지웠다. 녹림은 아니다. 임소병 그놈은 이익을 먼저 생각할지언정 양민에게 피해를 끼치는 놈이 아니다. 녹림이 아니라면 경우는 하나. 만인방이나 사패련밖에 없다. 이유야 불 보듯 뻔했다. 나 한 사람을 잡기 위해서겠지.
장일소 그놈도 양민을 해할 것 같지 않지만, 저 때문에 양민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 망설일 여유 없이 당장 쳐들어가야 한다. 머릿속에서 만인방까지 이동하는 경로가 복잡하게 그려졌다.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에 청명은 개방을 떠올렸다. 저 혼자서 행동하기에는 정보가 부족하다.
‘거지 양반을 만나 봐야겠어.’

판단은 빠르고 몸은 더 빨랐다. 청명은 신속하게 개방으로 향했다.
“하, 진짜 뒷목 잡겠네.”

홍대광은 손에 쥐고 있는 서류를 팽개치며 의자에 늘어졌다. 한 달 사이에 몰골이 더 초췌해졌다. 잠을 못 잤는지 눈가는 퀭했고 얼굴은 나뭇가지처럼 말랐다. 그 와중에도 눈만은 형형하게 빛나서 섬뜩했다.

“거지들은 제 일을 못하지, 사파 새끼들은 판을 치지.”
이런저런 사건으로 심란해 죽겠는데 새로운 가십이 떴다. 이결개가 말하길, 야행귀라고 장소를 불문하고 밤에만 출현하는 신묘한 괴인이라고 한다. 유령문도가 마실 가려고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걸 착각해서 정보를 잘못 전한 거겠지. 홍대광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잖아도 바쁜데.”
화산검협이 보고 싶었다. 구파일방은 너 하나 잡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날뛰고, 사파 놈들까지 애꿎은 양민을 납치하는데 넌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냐. 죽은 건 아니겠지? 내가 아는 넌 그런 녀석이 아닌데.

불현듯 스르륵, 비단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눈앞으로 검고 하얀 머리카락이 내려왔다.
“하하, 요새 잠을 못 잤나. 이젠 환상까지. 그래도 내가 명색이 분타준데 몸뚱이가 이리 비루해서야…….”

하하 웃으며 위를 보았다가 멈칫했다. 목각 인형처럼 생기 없는 가면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홍대광은 말마따나 명색이 분타주답게 비명 지를 뻔한 것을 참았다.
“야, 야, 야행귀…….”

기척도 없이 나타난 자는 저벅저벅 걸어와서 홍대광 맞은편의 의자에 앉았다. 홍대광은 떨리는 동공으로 그자를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가면. 머리에 쓴 반투명한 천. 먹에 담갔다가 뺀 것 같은 새카만 무복. 다쳤는지 왼손을 묶은 천 조각.
거지들이 전한 정보와 인상착의가 일치했다. 이자가 왜 갑자기 여길 왔는가? 그것보다 이자를 마주치기까지 이자의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과연 야행귀라고 불릴 만했다.

무슨 일이기에 분타주가 있는 곳까지 찾아오셨냐고 물으려다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야행귀가 허리에 찬 검이 익숙했다.
‘저 검은……?’

새카만 검집에 붉은 매화가 새겨진 고급스러운 보검이었다. 손잡이 끝에는 녹색 수실이 달려 달랑거렸다. 익숙한 검이었다. 놈을 쫓아다닐 때마다 봐 온 검이라 기억에도 생생했다. 홍대광은 저 검의 주인을 반사적으로 불렀다.

“화산검협?”
야행귀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 미묘한 변화가 홍대광에게 확신을 가져다주었다. 야행귀에 품에서 새하얀 담비까지 고개를 들자 홍대광은 벌떡 일어났다.

“화산검협! 야, 이 자식아! 진짜 화산검협이 맞구나!”

그가 탁자를 걷어차고 달려들자 야행귀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꾸엑!”

홍대광이 돼지 멱 따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엎질러졌다. 야행귀는 세 걸음 떨어진 자리에 서서 그를 보고 있었다. 그는 아랑곳 않고 헛웃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하, 하하. 야, 진짜 너 맞냐? 어떻게 생각하자마자 바로 나타날 수가 있냐. 아니, 하하. 하하…… 참.”
놀람, 황당함, 당혹, 반가움이 복잡하게 어우러졌다. 홍대광은 바보처럼 비식비식 웃음을 흘렸다. 야행귀는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혼잣말하듯 툭 던졌다.

“기억하는 사람이 한 명 정돈 있었네.”
“당연하지! 내가 널 왜 잊어! 그래그래, 어서 와. 뭐 마실래? 곡차 줄까? 잠시만 기다려라!”
홍대광은 청명이 반응하기 전에 재빨리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술을 한 바가지 들고 돌아왔다. 제가 걷어찬 탁자를 세우고 잔에 술을 따라서 청명 쪽으로 밀었다. 제 잔에도 술을 따르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래, 아주 잘 왔다. 여태까지 뭐 하고 있었냐? 얘기 좀 해 봐라. 난 네가 죽은 줄 알았다.”
홍대광은 싱글벙글 웃었다. 안광이 형형해서 누구 하나 잡아먹을 듯하던 기세는 사라지고 반푼이 마냥 웃는 바보가 자리했다. 그는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

“요새 괴상한 소문이 돌고 있던데, 네가 그 소문의 주인공이었구나. 야행귀라니, 하여튼 붙는 별호도 다 이상하다니까.”
홍대광은 신기한 눈으로 청명을 훑었다. 겉으로 보아 잘 지내고 있었던 듯했다. 반투명한 천 속으로 얼핏 보이는 하얀 머리카락이나, 매화 문양이 없는 무복이나, 결정적으로 얼굴에 쓴 가면이 어색했지만 아무렴 어떤가. 이리 건강하게 돌아온 걸 보니 제가 다 뿌듯했다.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응?”
“이젠 화산 사람이 아니니까.”

청명이 무심하게 중얼댔다. 홍대광은 눈을 가늘게 떴다. 목소리에 담긴 감정이 이전과 달라졌다. 늘 화로 가득 찼던 목소리가 눈에 띄게 가라앉았다. 고저도 평온했다. 알 수 없는 이질감이 느껴졌다.

“큼, 그래. 어쨌든 무슨 일로 왔어? 말해 봐라.”
“정보가 필요한 일이 있어요.”
“어떤 정보?”

청명은 일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홍대광이 고민하는 것과 일치했다. 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파 출몰 장소라면 거지들을 풀어서 알아낼 수 있지. 그런데 알아내서 뭐 하려고?”
“뻔한 걸 물으시네요. 잡아야죠.”
“너 혼자서?”
문제 있냐는 듯 청명이 고개를 기울였다. 홍대광은 어물거렸다. 강호에서 문제가 터지면 이 녀석과 화산이 나서서 처리해 주었지만, 현재는 다르다. 화산에서 파문당하고 세상 모두에게 잊힌 지금 그를 도와줄 사람이 없다. 만일 그가 홀로 사패련으로 들이닥쳤다가 변을 당하면…….
“그럴 게 아니라 내가 화산에 연통을 넣으마. 협행을 혼자 해서는 안 되지.”
“네.”

의외로 순순한 대답이 돌아왔다. 화산과 마주치면 부담스러울 거라는 등의 대답을 할 줄 알았는데. 홍대광이 손짓으로 거지 한 명을 불렀다. 거지는 지시를 듣고 즉시 사라졌다. 홍대광이 청명에게 말했다.
“빠른 시일 내로 사파의 활동 영역을 조사해서 보내마.”
“고맙습니다.”

용건을 끝낸 청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자락 스치는 소리도 나지 않고 그가 밖으로 향했다. 홍대광이 불현듯 불렀다.

“화산검협.”

청명의 걸음이 문턱에서 멈췄다. 홍대광은 그 등에 대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화산으로 안 돌아갈 거냐?”

대답이 없었다. 괜히 던진 물음이었나, 아쉬워하는 참에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화산을 다시 보게 해 준 것만으로 고마워요. 며칠 뒤에 올게요.”

검은 물결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혼자가 된 홍대광은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기분이 엉망진창이다.
“내가 뭘 본 거지. 한 달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어.”

홍대광은 반 시진이 넘도록 청명이 나간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나가던 거지가 그걸 발견하고 뭐 잘못 먹었냐고 물었다.
청명은 정말로 며칠 뒤에 홍대광을 찾아왔다. 주위 거지들을 물리고 혼자 서류를 정리하고 있던 그는 예의상 기척을 드러낸 청명에게 자리를 권하고 곡차를 내 왔다.

“자, 며칠 동안 조사한 사파의 활동 내역이다.”

홍대광이 내민 서류를 받아 든 청명은 내용을 찬찬히 훑었다.
홍대광은 서운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데, 자기랑 있을 때만이라도 가면을 벗어 주면 안 되나. 넌지시 부탁하려고 했으나 서류에 집중하고 있어서 서두를 떼기가 어려웠다.

“청성, 점창, 곤륜, 남궁…….”

청명이 서류에 적힌 내용을 하나하나 읊었다. 아래로는 죄다 양민들의 마을이었다.
많이도 건드렸다. 빌어먹을 사패련. 청명은 물었다.

“이게 끝이죠?”
“그래. 최소한으로 간추린 게 그거야. 거지들을 죽어라 굴리고 있으니 며칠 지나면 서류의 양이 두 배로 불겠지.”

며칠, 그 짧은 시간에 양민이 이만큼이나 납치됐다는 뜻이다. 하루빨리 구해야 한다. 홍대광이 우물쭈물 말했다.
“저, 그리고…… 화산에 도움을 요청했는데 수락했다. 다음 날에 출발할 거야.”
“그렇군요.”

긴장하고 꺼낸 말임에도 김 빠지는 대답이 돌아왔다. 홍대광은 결국 노호성을 터트렸다.

“넌 화도 안 나냐? 화산이 널 내쳤잖아!”
“내친 게 아니라, 제가 스스로 나온 거예요.”
“그게 내친 거지! 넌 모르겠지만 내가 장문인께 찾아가서 이런 소리를 들었다. 마교의 비밀을 간직한 자는 화산 사람이 아니라느니, 지금도 생각하면 복장이 터져서…….”

홍대광이 제 가슴을 쥐어뜯었다. 청명은 묵묵부답이었다. 가면 때문에 평소에도 종잡을 수 없던 녀석이 더욱 알기 어려워졌다.
분위기에 형태가 있다면 이 녀석의 분위기는 뜨겁게 타오르는 불이다. 닿는 사람도 불태우는 불. 한데 눈앞의 녀석은 차갑게 가라앉은 물 같다. 바람이 불어도 수면이 일렁이지 않아서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은 물. 예전과 현재의 괴리감이 심해서 홍대광은 낯선 사람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홍대광이 머리를 부여잡는 동안 청명은 시선으로 서류를 훑으며 머릿속으로는 화산을 떠올렸다. 궁금했다. 사파를 토벌할 때 필연적으로 한 번 이상 마주칠 텐데, 제자들이 무슨 반응을 보일지. 바다에 처음 가 본 어린아이처럼 가슴이 기대로 부풀었다. 덕분에 서류 넘기는 손길이 조금 느려졌다.
“재미있겠네.”

청명은 제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모르고 중얼댔다.

“마주치면 부디 좋은 말 들려줬으면 하네.”
“우와아아아아! 화산이다!”
“화산이 악적을 쓰러트리러 간다!”

화산의 제자들은 양옆으로 줄지어 늘어선 양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당당하게 걸어갔다. 이런 시선에 많이 익숙해진 제자들은 겸연쩍은 기세를 필사적으로 숨겼으나 선두에 선 백천은 부끄러운 기색 없이 은은하게 미소 짓는 얼굴이었다.
백천의 뒤에 나란히 선 오검도 무표정이거나 백천처럼 웃는 낯이었으나 그들의 신경은 다른 데 팔려 있었다. 조걸이 윤종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그런데 사형. 사형은 만인방이 왜 양민들을 납치해 가는지 아십니까?”
“모르지. 지금 그 이유를 알아내러 가는 것 아니냐.”
“우선 생포하라고 하셨죠.”
백천이 말하길 숨통을 끊기 전에 무조건 생포하라고 했다. 잡은 놈들의 입을 통해 만인방의 근거지를 알아내고 그곳에서 양민들을 구출할 것이다. 간결하고 빠른 계획이다. 아니, 계획도 계획이지만 조걸은 다른 걸 묻고 싶었다.

“……이상합니다, 사형. 그놈이 자꾸 신경 쓰입니다.”
“그놈이라면?”
“아시잖습니까. 화산을 속인 배신자요.”

그를 화산에서 내친 지 일주일도 안 된 시점부터 조걸은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툭하면 가슴이 울컥 솟구치고 죄지은 것도 없는데 미안한 마음에 사로잡혔다. 조걸은 제가 왜 이러는지 도무지 모르겠어 잡념을 떨치려고 수련에 박차를 가했다.
평소보다 배는 활기차게 검을 휘둘렀음에도 머릿속이 맑아지기는커녕 복잡하게 얽혔다. 신경질적으로 검을 팽개쳤다가 주워 드는 일의 연속이었다. 윤종이 말했다.

“음,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너처럼 검을 던지진 않았지만, 뭔가…….”

중단세를 취한 자세에서 도통 명상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머리가 복잡한 건 다른 오검도 같았다. 당소소와 혜연은 태연한 낯이었으나 눈빛이 불투명했다. 유이설만이 올곧은 시선으로 앞을 응시했다. 그래, 저 사람은 원래 저랬지. 윤종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다시 한 번 볼 수 있다면 이 마음의 정체를 알 것 같다만. 헛된 희망이겠지.’
청명은 화산보다 일찍 행동에 나섰다. 사파가 제일 먼저 출몰한 청성으로 가 그곳에서 진을 치고 있는 놈들을 토벌했다. 어림잡아 오백과 붙을 것을 각오했는데 예상한 것보다 수가 적어서 의외였다. 다음으로 점창으로 이동했다. 그곳도 앞서 상대한 놈들과 수가 비슷했다. 누가 먼저 선수를 쳤나?
의문은 금방 풀렸다. 지름길로 이용하려고 산길로 접어든 그때, 익숙한 면면들이 보였다. 약 칠십 걸음 떨어진 거리에 중년 하나와 중년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이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 근처는 깨끗하게 정리했습니다, 녹림왕.”
“고생했어. 양민들을 보호하는 것이 먼저니까 허투루 하지 마.”
청명은 높은 나뭇가지 위에 숨어서 둘을 지켜보았다. 저것들이 진작 나서서 정리하고 있었군. 어쩐지 수가 적더라니. 그나저나 어쩌지. 빨리 도착하려면 여길 지나야 하는데.

“녹림왕. 누가 우릴 지켜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응, 나도 알아.”

고민하기 전 저쪽에서 먼저 눈치챘다.
임소병이 울퉁불퉁한 길을 가볍게 뛰어넘어 청명이 숨어 있는 나무 아래에 서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부채를 한 손에 쥐고 팔짱을 꼈다.

“동료의 부고를 듣고 싶어서 왔나? 부고를 들을 필요 없이 내가 손수 보내 줄 수 있는데.”

살벌한 말이었다. 들켰네, 원. 청명은 나무 아래로 뛰어내렸다.
고양이처럼 부드럽게 착지했다. 검은 천 자락이 펄럭이며 가라앉았다. 임소병은 그 물결 같은 천 자락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야행귀?”

제 소문은 유독 퍼지는 속도가 인위적으로 빠른 것 같다. 청명은 속으로 한탄하고는 그를 똑바로 주시했다. 목소리가 조금 탁했다.

“……만인방 일로 나섰죠?”
“흠, 그렇습니다만. 야행귀께서는 어인 일로 이 산을 찾아오셨는지?”
“그쪽한테 용건 없어요. 나도 그쪽과 같은 일이거든요.”
“같은 일이라면 만인방이 납치한 양민들?”
“네.”

임소병이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임소병이라 이해가 빠르다. 그가 농담조로 말했다.
“야행귀는 밤에만 나타난다고 들었는데, 실제로 보니 귀신이 아니라 사람이었군요.”
“시답잖은 소리는 그만하시고, 비켜 주세요. 가야 해요.”
“예예. 원래라면 통행세를 내야 하지만 시급이 시급이니까. 그런데 도장께서는 혼자 오신 겁니까?”

청명이 말을 않자 임소병이 놀란 투로 물었다.
“혼자서 만인방을 상대하시겠다고?”

청명이 가려고 하자 임소병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잠시만요, 도장. 만인방이 어떤 곳인지 잘 모르시나 본데. 혼자 가시면 십중팔구로 죽습니다. 차라리 제 휘하를 빌려드릴 테니 그들과 함께 가서…….”
“왜요?”

청명이 그의 말을 끊었다.
“산적이 언제부터 이렇게 인정이 많은 집단이었나요? 모르는 사람한테 제 정예도 내주고.”
“그건…….”
“그리고 제가 누군지 알고 계실 텐데. 그쪽 부하를 내게 붙였다간 내가 그 부하를 잡아먹을지도 몰라요.”

임소병이 입을 다물었다. 청명은 그에게 보이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녹림왕이 염려할 필요는 없으니 제 측근들이나 돌봐 주세요.”
“잠시만요, 도장!”

청명은 그가 또 붙잡기 전 몸을 날렸다. 검은 그림자가 나무로 무성한 길 너머로 사라졌다. 임소병은 허공에 뻗은 손을 쥐었다가, 내렸다. 눈살을 찌푸리고는 혼잣말하듯 말했다.

“방금 내가 뭘 본 건지.”
청명은 개방의 정보대로 점창, 곤륜, 차례차례 거듭하며 지나간 곳마다 피로 청소했다. 만인방의 단치고는 핵심 인물이 보이지 않아서 단숨에 베어 나갔다. 검을 휘두를수록 은빛 칼날이 검붉게 물들었다. 날개 같은 자락에도 어쩔 수 없이 피가 튀었다.
과정은 수월하고 깔끔했다. 선천지기 부작용이 낫지 않아서 곳곳에 생채기를 입었지만 생채기 위로 적이 뿌린 피를 칠했다. 검 손잡이를 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직 이 정도는 무린가.’

적들과 무기를 부딪힐 때마다 팔을 타고 지진 같은 충격이 덮쳐 왔다.
마지막 적의 목을 날리고 인근 민가로 들어갔다. 사람이 안 쓰는 집이라 체력을 보충하기에 적합할 듯했다. 바닥에 앉아서 검을 내려놓고 운기를 시작했다. 날뛴 여파로 가슴께가 욱신거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들이 날아왔다.

“히야…… 이게 다 뭡니까?”
“누가 이랬지?”
운기를 끝내자마자 머리가 핑 돌았다. 피 묻은 손으로 가슴께를 누르고 진정시켰다. 간신히 숨을 고른 후 몸을 일으켰다. 뚫린 창으로 바깥 풍경을 보았다. 가슴에 매화 문양을 새긴 무복을 입은 무리가 시신들을 살피고 있다.

“죄다 급소만 노렸는데요. 엄청난 실력자인가 봅니다.”
“같은 사파가 공격한 건가?”
“갑자기 내분이 일어날 리가 없잖아.”
“누구 짓이지?”

오검이 신기함과 기겁함이 담긴 시선으로 시신들을 둘러보았다. 청명은 그들을 확인하고 도로 자리에 앉았다. 누군가 했더니. 쟤들 사라지면 움직이자. 벽에 뒤통수를 기대고 몸에 힘을 뺐다. 어깨가 나른해졌다.
정신이 안정되려는 찰나, 누군가 이쪽으로 오는 게 느껴졌다. 사박, 조그만 발소리가 바로 옆에서 멈췄다. 청명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유이설이 문간을 짚고 전에 보았던 표정 그대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매! 거기에 뭐가 있느냐?”
“사고!”

오검도 달려왔다. 그들도 청명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음?”
“너는…….”

조걸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윤종과 당소소도 당혹스러운 낯이었다. 가장 늦게 온 백천은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다 청명을 발견하고 표정을 굳혔다. 유려했던 눈빛이 삽시간에 적의로 타올랐다. 그가 낮게 깔린 음성으로 물었다.

“여긴 왜 왔지?”
청명은 손에 묻은 피로 손바닥에 글자를 적으려다 탁자에 놓인 지필묵을 발견하고 그것을 집었다. 종이를 팔락 넘기고 붓 끝을 피로 적셨다. 먹이 없어서 핏물로 글자를 썼다. 종이를 오검에게 보여 주었다. 간단한 세 글자.

만인방.

“만인방? 그럼 밖에 널린 시신들도 네가 죽인 거냐?”

끄덕였다.
의외였다. 가면을 썼으니 바로는 못 알아볼 줄 알았는데. 거지 양반이 내 얘기를 전했나. 생각하는 동안 윤종과 조걸도 그제야 눈치채고 더더욱 겸연쩍은 얼굴을 했다. 백천만 얼굴을 굳혔다. 굳힌 낯과 달리 그도 나름 동요하고 있었다. 기만자가 무슨 자격으로 낯짝을 비추냐는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입에서 나온 것은 전혀 뜻밖의 말이었다.

“옷에 그건 네 피인가?”

고개를 저었다. 백천은 청명을 위아래로 빠르게 훑었다. 군데군데 찢어진 옷자락과 얕게 베인 생채기들. 별거 아닌 상처였으나 백천은 어째선지 그 생채기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약은 가지고 있나?”

고개를 저었다.
사이로 정적이 내려앉았다. 백천은 입속으로 혀를 굴렸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뭐라고 꺼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그것보다 자신은 이걸 왜 고민하는가. 이대로 모른 척하고 지나가면 될 것을. 생각이 거기까지 치닫자 그는 무의식적으로 저질러 버렸다.

“상처, 치료하자.”
“……?”
청명이 백천을 쳐다보았다. 가면을 쓰고 있어서 얼굴을 보지 못하지만, 아마 눈을 동그랗게 떴을 것이 분명했다. 백천이 재차 말했다.

“상처 치료하자고. 피도 씻고. 소소, 놈에게 약을 발라 주어라.”
“네? 네.”

당소소는 의아해하면서 금창약과 대침을 꺼냈다. 청명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 반응을 읽은 백천이 눈살을 찌푸렸다.

“지나가던 양민들이 그 꼴을 보고 기절할 수 있다. 진정으로 양민을 위한다면 말 들어.”

청명은 고개를 젓고는 민가의 뒤쪽에 뚫린 문으로 나가려고 했다. 막 문간에 발을 디딘 순간 섬전처럼 이동한 유이설이 그의 팔목을 잡았다. 힘이 상당했다.
그가 뒤도 돌아보지 않자 유이설이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치료해. 얼른.”
“…….”

청명은 결국 눈을 감았다. 이것들은 기억을 잃어서도 어째 부상에 관해서 이리 한결같은지.
“다 됐어요. 큰 부상은 없고 자잘한 생채기뿐이라 문제 될 건 없지만, 무리하면 상처가 벌어질 테니 조심해야 해요.”

상처를 소독하고 금창약을 바른 후, 마지막으로 붕대까지 감은 당소소가 도구를 정리했다. 백천이 그녀에게 물었다.

“내상은?”
“보이는 게 외상뿐이라 잘…….”
근데 휴식이 절실한 상태인 건 알겠다며 그녀가 눈을 부라렸다. 과거와 상관없이 환자가 걸렸다 하면 이를 가는 게 의원 특성이었다. 청명이 일어나려고 하자 당소소가 붙들었다.

“방금 말 못 들었어요? 휴식이 절실한 상태라고요. 몸에 피로가 쌓였다니까요? 사형들! 옷 좀 벗어 주세요.”
윤종과 조걸이 걸치고 있는 도포를 벗었다. 조걸이 도포를 바닥에 반듯하게 깔고 윤종은 제 도포를 둥글게 뭉쳐 베개로 만들었다. 임시로 마련된 이부자리에 당소소가 청명을 눕혔다.

“사람은 많으니까 쉬어요. 경상이라고 해도 상처는 상처예요.”

청명은 그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이들이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마지막으로 봤을 때까지만 해도 배신자에 기만자라며 치를 떨었으면서. 다시 만난 지금은 면면들이 눈에 띄게 누그러졌다. 당소소도 말은 뾰족했으나 눈빛은 유했다. 문득 이 장면이 예전과 흡사함을 깨달았다. 어색했다. 지독하게 어색했다.
“크흠, 큼! 저기…… 그동안 잘 지냈어? 전보다 마른 것 같은데.”

청명의 오른편에 앉은 조걸이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조걸의 곁에 앉은 윤종도 한마디 했다.

“그래. 가면도 왜 쓰고 있는 거냐? 혹시 소문의 야행귀가 넌가?”

머리맡에 쪼그려 앉은 유이설은 말없이 내려다보기만 했다.
어색하기로 따지면 청명보다 오검이 더했다. 장문인의 명 없이 행동했다는 죄목으로 참회동에 갇히는 한이 있어도 화산에서 배신자를 마주치는 즉시 베어 버릴 거라며 늘 경계 태세를 갖췄건만. 막상 배신자를 마주하니 분노와 적의 대신 뻘쭘하고 부끄러운 감정이 솟았다.
“우리끼리 많이 의논했다. 네가 정녕 배신자가 맞다면 거의 모든 정파가 밤낮을 지새우며 증거를 물색했는데도 왜 종잇조각 하나 안 나왔는지.”

왼편에 앉은 백천이 말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과거를 돌아봤다. 왜 우리는 너를 내쳤을까? 왜 갑자기 네가 마교 출신이라는 설이 터졌을까?”
다른 제자들도 슬금슬금 느끼고 있는 사실이었다. 오검도 의문을 품기 시작한 날부터 모여서 말을 나눴다. 구파일방의 수색, 마교, 화산검협의 정체. 하나로 공통된 주제였으나 세부적인 사건이 많아서 이야기가 복합적으로 얽힐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결론에는 딱 한 가지 의견이 남았다.
화산검협은 정말로 마교와 내통하고 있을까?

이전이라면 첫머리도 생각 못했을 의문이었다. 거듭된 궁금증이 그들의 눈에 깃든 분노를 차츰 씻겨 주었다. 백천이 우물쭈물 말했다.

“꿈을 꿨다. 내가 너에게 검을 겨누는 꿈이었지.”

청명이 흘깃 보았다. 가면을 썼음에도 시선에 꿰뚫린 느낌이었다.
“꿈속에서 나는 원독에 찬 얼굴로 너에게 검을 겨눴고, 너는 대응도 안 하고 얌전히 서 있기만 했지. 정적을 참지 못한 내가 너를 찌르는데, 칼날이 네 가슴에 닿기 전 꿈이 끝난다.”

눈을 뜨면 없을 걸 알면서도 청명을 찾았다. 이름을 몰라 별호를 부르짖으면서 반 시진을 소모했다.
현재는 꿈이 각인처럼 뇌리에 새겨져서 눈을 감고도 그의 모습을 떠올리는 게 가능할 정도였다. 언젠가 다시 보게 될 날을 위해 꿈의 모습을 더듬으며 초상화도 그렸다. 백천은 애타는 얼굴로 말했다.

“말해 다오. 우리가 모르는 사실이 있는 것이냐? 아님 네가 감추는 정보가 있는 것이냐?”
청명은 그의 간절한 눈을 마주 보았다. 제가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도 백천은 저런 얼굴을 하지 않았다. 제가 생각한 백천의 표정과 눈앞의 얼굴은 결이 달랐다. 죽어라 헤맸음에도 답을 찾지 못해 좌절한 얼굴이다. 제가 입을 열어 몇 마디만 읊으면 답이 나오겠지만…….
청명은 몸을 일으켰다. 오검을 지나쳐 구석에 놔둔 종이와 붓을 들었다. 몸에 묻은 피 중 덜 마른 부위에 붓을 적시고 글을 썼다. 저를 바라보는 오검에게 내용을 보여 주었다. 붉은 글씨라 더욱 눈에 잡혔다.

가자. 양민들 구출하러 가야지.

창가로 빛이 들어왔다. 겨울답지 않게 포근한 빛이었다.
이후 청명은 화산의 제자들과 함께 사파의 활동 영역을 토벌해 나갔다. 제자들은 소문에 의문을 느꼈지만 오검처럼 대놓고 의심하는 건 아니어서 청명을 껄끄러워했으나 뭐라고 하는 이는 없었다. 토벌 중간중간에 휴식도 취하면서 이동했다.

오검은 청명에게 한마디라도 말을 붙이기 위해 노력했다.
혼자 멀찍이 떨어져서 쉬는 청명의 곁에 조심스럽게 다가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건넸다. 아까 어르신 두 분이 보답으로 밭에서 캔 감자를 바구니에 담아서 주셨는데, 같이 먹자는 등. 아프면 눈치 보지 말고 말하라는 등. 졸리면 우리가 보초를 설 테니 안심하고 누우라는 등.
혼자 있으려고 하면 어김없이 누가 따라와서 거머리 마냥 달라붙었다. 어딜 가도 한 명 이상 쫓아다녔다. 그게 반복되니 화산의 제자들도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곁으로 다가왔다. 껄끄럽긴 해도 오검이 달라붙는 짓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너는 왜 말이 아니라 종이로 대화해?”
곽회가 순진한 낯으로 물었다. 용기를 내고 질문한 티가 역력했다. 청명은 백천이 사다 준 먹에 붓을 적셔서 종이에 썼다.

궁금해?

“궁금하지! 혹시 말을 못 해? 병이라든가?”

몰라도 돼.

“아…… 응. 미안. 내가 괜한 걸 물었지. 언짢을 텐데. 앞으로 주의할게.”

곽회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별것 아닌 대답에 그러잖아도 조심하던 표정이 더욱 미안해졌다. 청명은 고개를 돌렸다. 어쩔 수 없었다. 이들이 저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상 제 낯과 목소리를 보일 자신이 아직은 부족하다. 그는 속으로 자조했다.

‘너희나 나나 소심하긴 마찬가지지. 내가 조금 더 소심할 뿐이고.’
계속된 강행군 끝에 드디어 한 적에게서 만인방의 근거지를 알아냈다. 턱 아래에 검을 단 채 정보를 있는 대로 털어놓은 적은 청명에게 덧붙였다.

“그, 그리고…… 패군께서 통보하셨습니다. 자신을 만나고 싶으면 동료를 거느리지 말고 혼자 오라고. 거절하면 여기 있는 양민들을 죽여 버리겠다고.”
“뭐?”
“뭐라고?”

화산의 제자들 사이에 파란이 일었다. 백천이 낯을 험악하게 일그러트리며 적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다시 말해 봐. 누굴 혼자 오라고?”
“컥…… 정말입니다! 패군의 서신을 가져왔습니다. 직접 보시지요.”

적은 백천에게 멱살이 잡힌 채 품을 뒤적여 서신을 꺼냈다.
청명은 서신을 받아서 펼쳤다. 금가루를 뿌린 서신에는 우아한 필체로 간략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온 천하에게 잊힌 기분은 어떻니, 화산검협? 서신을 봤다면 나에게로 오렴. 이걸 전해 준 아이는 죽이지 말고.

서신을 쥔 손가락이 움찔했다. 백천이 말했다.

“가지 마라. 함정일 수 있다.”
청명은 듣지 않고 내용에 시선을 고정했다. 간만에 사고 회로가 빠르게 돌아갔다. 저를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한 명 더 늘었다. 그리고 저를 손에 넣기 위해 죄 없는 양민들을 납치했다는 사실에 손에 쥔 종이를 우그러트렸다. 조걸이 성을 냈다.
“장일소 그 새낀 대체 뭐 하는 자식이야? 고작 한 사람 데려가려고 양민들을 납치하는 게 사람이 할 짓인가?”
“장일소는 양민에게만큼은 손을 뻗지 않는 줄 알았는데.”

윤종이 눈에 사나운 빛을 띠었다. 흉흉한 적의가 피어오르자 적이 헛숨을 삼키고 물러났다. 유이설이 물었다.

“어떻게 할 거야?”
청명은 파고들 것처럼 서신을 노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오검은 물론 다른 제자들도 염려 가득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면면들을 하나하나 살핀 뒤,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조걸이 물었다.

“설마 가려고?”

끄덕였다.

“제기랄, 가긴 어딜 가! 함정일 게 뻔한데!”
어쩌겠어. 가야지. 청명이 그런 의미를 담아 고개를 젓자 조걸이 이를 악물었다. 화가 났다. 그리고 그의 또 다른 자신이 말했다. 화산을 속인 배신자인데 화날 게 뭐가 있어? 쟤더러 미끼를 맡으라고 하고 우리가 붙잡힌 양민들을 데려오면 되지.

‘알아. 아는데.’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조걸이 머뭇대는 사이 윤종이 말했다.

“같이 가는 걸 들키지만 않으면 되지 않느냐? 네가 장일소를 상대하는 동안에 우리가 양민들을 빼돌려서…….”

청명이 손을 들자 윤종이 입을 다물었다. 청명은 품에서 지필묵을 꺼내 들고 내용을 썼다.

걱정 마. 장일소라면 절대 양민을 해하지 않아.
“어떻게 확신하는데?”

장일소는 그런 놈이거든.

윤종은 떨떠름한 얼굴이 됐다. 백천이 청명의 어깨를 짚었다.

“하나만 약속하자. 약속만 하면 보내 주겠다.”

그는 어깨를 세게 잡으며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담아 말했다.

“무사히 살아 돌아오겠다고 약속해라.”
백천은 도통 속을 모르겠는 가면을 꿰뚫을 듯 응시하며 재차 말했다.

“반드시 살아 돌아오겠다고.”

대답하지 않으면 눈에서 불을 뿜을 기세였다. 청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천은 그제야 얼굴을 풀고 어깨를 놓았다. 그가 덧붙였다.

“우린 너를 믿는다. 만일 네가 장일소에게 변을 당한다면…….”
그의 목소리가 살벌하게 울려 퍼졌다.

“우리가, 화산의 이름을 걸고 장일소에게 복수하러 갈 것이다.”

그 눈빛이 퍽 결연해 전혀 농담으로 보이지 않았다. 동룡이 주제에. 청명은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토닥여 주었다.

“……?”

그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청명은 그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물러나 있는 적에게 턱짓해 보였다. 그 턱짓을 알아본 사내는 손짓으로 제 동료들을 불렀다. 그들이 은색 쇠줄을 꺼내 청명의 몸을 단단히 결박했다. 마른 몸이 쇠줄에 묶이자 오검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조걸이 검을 뽑으려다 윤종에게 제지당했다.
동료들 중 제일 우락부락한 자가 쇠줄을 억세게 이끌었다. 청명은 끌려가는 대로 순순히 따라갔다. 뒤통수에 오검의 시선이 꽂혔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어디 확인해 보실까. 나를 보자고 한 이유가 뭔지.’
금실로 용이 새겨진 휘장이 펄럭였다. 비단으로 장식한 옥좌에 앉은 사내 위로 눈부신 빛이 쏟아졌다. 그 사치스러움에서 권력과 재력이 동시에 묻어났다.

“패군, 데려왔습니다!”

우렁찬 외침과 함께 문이 열렸다. 백홍포를 입은 일련의 무인들이 한 사람을 포박해서 데려오고 있었다.
사내, 장일소는 무인들 사이에 선 청년에게 시선을 줬다. 쇠줄에 꽁꽁 묶였음에도 반항기 없는 몸. 늘어진 천 자락. 얼굴을 가린 차가운 가면. 장일소는 흐음, 하고 비음을 흘렸다.

“데려오라고 했지, 누가 끌고 오라고 했니?”
“죄송합니다, 패군.”

그들은 청명을 알현실 한가운데 세우고 물러났다.
넓은 공간에 도열한 백홍포 무리의 살벌한 시선이 오롯이 청명에게 쏟아졌다. 압박이 무시무시하건만, 청명은 이런 거에 영향을 받아야 하냐는 듯 고개를 꼿꼿하게 쳐들고 장일소를 주시했다. 당당한 자세에 장일소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가 손짓했다.

“구속을 풀어 주어라.”
“예!”
여러 개의 손들이 다가와 쇠줄을 풀었다. 꽉 매인 구속이 풀리자 청명이 으르렁댔다.

“양민들은 어디 숨겨 뒀지?”
“진정하렴. 그들은 무사하단다. 털끝 하나 다치게 하지 않았어.”

장일소가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저 여유로운 태도가 역겨웠다.

“날 보자고 한 이유가 뭐야.”
“성격 급하긴. 이유랄 게 있겠니. 화산에서 파문당한 화산검협의 근황이 듣고 싶어서 초청했지.”
“애꿎은 양민들을 납치하고 그들을 인질로 삼는 것도 초청이라고 부르나 보군.”

칼날이 짙게 벼린 대답에 장일소가 푸핫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무릎 위에 팔을 얹어서 턱을 괴었다.
“얼굴에 쓴 가면은 뭐지? 나더러 광대라며 욕하더니, 내심 취향이었나?”
“헛소리나 지껄일 거면 꺼져.”
“이런, 서운해라. 여긴 내 방인데.”
“손님이 나갈 수는 없잖아.”
“그것도 맞지.”

장일소는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어깨를 들썩이며 키득거렸다. 그가 눈물을 닦고 물었다.
“사실은 이걸 물어보려고 불렀단다. 화산검협, 정식으로 사패련에 가입하지 않겠어?”
“……뭐?”

청명은 가면에 가려진 눈을 크게 떴다. 저놈이 지금 뭐라고 한 거지? 장일소가 다시금 말했다. 웃음이 요사스러웠다.

“화산을 버리고, 사패련으로 오렴. 너에게 더 적절한 길을 제공해 줄 수 있어.”
“내가 어떻게 반응할지를 알고 그딴 걸 묻는 건가? 그리고 난 더 이상 화산파가 아니야. 이것도 알고 있을 텐데?”
“아니지. 몸은 쫓겨났어도 마음은 여전히 그들에게 향해 있잖니. 그래서 네가 화산검협인 거야. 네 별호를 지은 사람이 누구인지 기억할 텐데?”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청명의 기세가 들어올 때보다 더 흉흉해졌다. 도열한 무인들 몇 명이 검을 뽑아 들었다. 장일소가 괜찮다는 듯 손짓으로 다독였다. 청명이 물었다.

“처음부터 이걸 노리고 양민들을 잡아들인 건가?”
“그래. 양민을 인질인 척 내세우면 가장 격렬하게 반응할 문파가 딱 한 군데 있잖니.”
장일소가 가느다란 눈매를 더욱 둥글게 휘었다. 청명의 머릿속에 만인방의 구조가 그려졌다. 여기로 오면서 계산해 둔 출구로 빠져나가면 될 것이다.

“참, 멋대로 탈출하는 짓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너를 초대하기 전에 조사는 진작 마쳤거든.”

장일소가 긴 손가락으로 청명이 쓴 천을 가리켰다.
“그 머리, 선천지기의 부작용이지?”
“……!”

장일소의 시선이 청명의 천 속에서 흔들리는 하얀 머리카락에 정확히 닿았다.

“내가 그것도 모를 줄 알고. 부작용이 발발한 지 한 달은 지났고. 후유증이 엄청났을 텐데, 용케 버텼네?”
“……협박하는 거냐?”
“농담도. 헛짓거리만 하지 말라는 거지.”
그가 안쓰럽다는 듯 눈썹을 늘어트렸다.

“안타까워라. 피와 살을 태워 가며 중원을 구했거늘 기억하는 사람은 없고, 마교의 첩자라는 오명을 쓰고 화산에서 파문당하기까지.”
“닥쳐.”
“그뿐인가. 금방이라도 죽을 듯한 몸을 이끌고 이곳저곳을 유랑하는 와중에 자신을 향한 매도는 갈수록 강해지고.”
“닥치라고 했어.”
“복수심에 휩싸여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정파를 불지옥에 빠트려 버려도 비난하는 이는 없을진대 미련스럽게 침묵하고.”

말이 끝나자마자 세찬 바람이 일었다. 장일소가 오른손을 뻗었다. 그 손에 암향매화검이 잡혔다. 순식간에 장일소의 앞으로 짓쳐든 청명이 검을 휘두른 것이다.
두 사람에게서 가공할 기운이 피어났다. 청명이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장일소는 눈썹 하나 까딱 안 하고 칼날을 움켜잡았다.

“하핫, 그래. 이래야 화산검협이지. 하지만…… 이 얘기를 듣고도 동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가 암향매화검을 확 끌어당겼다. 그 서슬에 청명도 끌려갔다.
두 사람의 품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장일소가 청명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대었다. 그가 비밀 얘기를 하듯 은근하게 속삭였다.

“내가 전 중원 사람들에게 기억을 되돌려줄 방법을 알고 있다고 하면, 사패련에 들어올 건가?”
청명은 이번에야말로 진심으로 놀랐다. 그가 고개를 들자 지척에 우아한 미소를 짓고 있는 장일소가 보였다. 이 녀석이 그 방법을 어떻게 알아냈지. 사람들에게 기억을 되찾아 줄 방법?

“아니. 그 얘기가 거짓이든, 설령 진짜로 알았다고 해도 네놈 아래에 들어갈 마음은 추호도 없어.”
“신기하네. 큰마음 먹고 꺼낸 제안인데 호쾌하게 걷어차 버리는군.”

장일소가 예상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손을 놓았다. 청명은 암향매화검을 검집에 넣지 않은 채 물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았지?”
“믿을 건가?”
“닥치고 설명해.”

하여튼 성질은. 장일소가 중얼거리며 이마를 짚었다.
“따라와. 서서 얘기하기에는 장소가 맞지 않으니.”

그가 장포를 펄럭이며 걸음을 옮겼다. 청명은 거리를 두고 그의 뒤를 따랐다. 무방비해 보이는 등을 찌르고 싶은 욕구를 참으면서.

도착한 곳은 넓은 연회장이었다. 둥근 탁자에는 만찬이 차려져 있는데, 윤기가 반질반질하게 흘렀다.
장일소가 자리에 앉자 청명도 못마땅해하면서 맞은편에 앉았다. 장일소가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어디부터 얘기하면 좋을까…… 그래, 불과 칠 주야 전 일이었던가. 단을 거느리고 고혼이 떠돌고 있는 전장에 갔지.”

마교의 시신을 조사한 것은 사소한 호기심이었다.
마교가 전 중원에게 화산검협이라는 인물을 앗아 갔으니 그 원인을 마교에게서 찾을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판단은 정확했다. 장강처럼 펼쳐진 마교의 시신을 뒤진 끝에 그들의 몸에서 희미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천 명 중 삼백 명 꼴로 몸에 숨기고 있는 비급도 채집했다.
“비급에는 불특정 다수의 머릿속에서 한 사람의 모든 것을 잊게 하는 사술이 기록되어 있었지. 총 삼백 명의 마교도가 똑같은 비급을 지녔단다. 그것들을 가지고 돌아와서 밤낮을 지새우며 조사했어.”

비급에 그려진 그림, 반쯤 정신이 나간 문장들을 좇으며 휘하의 측근들을 갈아 넣었다.
사흘을 내리 지새운 끝에 마교가 꾸민 사술과 똑같은 연막탄을 만들어 냈다. 마교의 것과 반대로 사술에 걸린 자에게 뿌리면 잃어버린 한 사람에 대한 기억이 돌아온다. 결과물이 완성되자 부하들을 부려서 양민들을 납치했다. 양민을 미끼 겸 소환장 삼아 화산검협이 알아서 나타나도록.
“이게 그 연막탄이야. 받으렴.”

장일소가 제 뒤에 시립한 부하가 두 손으로 받친 연막탄을 집어 청명에게 넘겼다. 탁 소리 나게 연막탄을 잡은 청명은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가늘고 긴 검은 통에 붉은 줄로 묶인 연막탄은 표면이 투명하고 매끄러웠다. 표면에 죽은 듯한 가면이 비쳐 보였다.
어느 순간부터 이 가면이 제 신체의 일부인 것 마냥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통에 비친 가면을 보고 있자니 이 가면이 제 표정을 대신하는 것 같았다. 돌이킬 수 없이 뒤틀려 버린 사건을 단숨에 해결할 열쇠가 손에 들어왔다. 나는 이것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네가 나를 싫어하는 건 알지만, 설마 제 명예를 되찾을 구원의 수단이 눈앞에 있는데도 반응이 없다니. 믿어도 된다. 내가 뭐 하러 거짓을 놀리겠니.”
“아니.”

청명이 연막탄을 도로 던졌다. 장일소가 탁 받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필요 없어.”
“뭐라고?”

그가 잘못 들었다는 듯 눈을 깜박였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다시 한번 말해 줄래?”
“필요 없다고.”

장일소는 바보처럼 눈만 깜박이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어째서? 모두에게 네 기억을 돌려줘야 하지 않나?”
“그래야 할 이유가 있어?”

청명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싸늘한 음성으로 명했다.

“양민들을 어디 숨겼는지나 말해.”
장일소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믿을 수 없다는 시선을 보냈다. 청명이라면 쌀쌀맞게 쳐 낼지언정 중원 사람들의 눈을 씻겨 줄 기회를 걷어차지 않으리라고 믿었는데.

“푸훗…… 하하하핫! 내가 괴물 하난 정말 잘 만났다니까. 어쩜 날마다 새로운 면모를 보여 주네.”

장일소가 실소를 흘렸다.
“그래, 내가 졌어. 협상은 결렬이야. 이거 참, 사공이 물고기를 낚으려다 낚싯대와 함께 바다에 끌려간 꼴이 되었네. 낚을 수 있다는 자신감은 애초부터 없었지만.”

연극처럼 어깨를 으쓱여 보이고는 손짓으로 사람 하나를 불렀다.

“화산검협에게 양민들이 머물고 있는 처소로 안내해 주렴.”
“예.”
부하가 따라오라는 듯 눈짓하자 청명이 뒤를 따랐다. 그의 가면을 보며 장일소가 덧붙였다.

“잊지 마라, 화산검협. 협상은 실패지만 이 연막탄을 내가 어떻게 할지는 말하지 않았어.”
“창고에 수십 개는 더 보관해 두고 있겠지.”

장일소는 입을 다물었다. 속을 읽어 내기 어려운 모호한 표정이었다.
“여기다.”

부하가 안내한 곳은 열다섯이 넘는 문이 양옆으로 붙어 있는 복도였다. 복도가 얼마나 긴지 끝이 없었다.

“복도를 따라서 가면 출구가 나온다. 허튼짓을 저질렀다간 죽는다.”

부하는 그리 말하고는 사라졌다. 모습만 감췄을 뿐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청명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두려움에 떠는 목소리가 들렸다.

“누, 누구십니까?”
“긴장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들을 구하러 왔습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대답이 없었다. 청명은 천천히 문을 열었다. 내부는 제법 넓고 화려했다. 안에는 열다섯이 넘는 양민들이 모여 있었다.
낯선 곳으로 끌려와서 벌벌 떨 만도 하건만, 밖에서 들은 목소리와 달리 그들의 얼굴에는 무서워하는 기색이 옅었다. 장일소가 어지간히도 극진히 대접해 준 듯싶었다. 청명은 그들을 꼼꼼히 훑었다. 자잘한 생채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청명은 그들이 경계하지 않도록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저는 여러분을 구하러 왔습니다. 이곳을 빠져나가게 해 드릴 테니 부디 손을 내밀어 주세요.”

뒷짐을 지고 고개를 숙였다. 양민들은 그럼에도 믿지 않는 눈치였다. 소속이라도 밝히면 모를까, 다 버린 마당에 소속은 무슨. 이름도 밝히지 못하는 판에. 아이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도사님?”
고개를 들자 어른들 속에 숨어 있는 여자아이 하나가 이쪽을 쳐다보았다. 옆에 또래의 남자아이도 함께였다. 두 아이는 청명을 보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도사님! 전에 우리 마을에 들렀던 도사님! 맞죠?”
“도사님!”

소년이 달려와 청명의 품에 안겼다. 청명도 놀랐다. 이 애들이 왜 여기 있어?
“도사님, 보고 싶었어요! 어제 무섭게 생긴 아저씨들이 우리 마을 어른들을 여기로 데려왔는데, 아저씨들이 우리한테 원하는 게 뭐예요? 돈이에요?”

소년의 순진한 물음에 청명은 어깨에 힘을 뺐다.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답했다.

“원하는 건 없어. 해칠 마음도 없고. 여기서 나가자.”
“네!”
소년이 해맑게 웃고는 청명의 손을 잡았다. 소녀도 곁으로 따라붙어서 그의 반대쪽 손을 잡았다. 어른들은 얼떨떨한 얼굴이 됐다. 저승에서 온 듯한 사신 같은 모습의 청년이 구하러 왔다고 하는데, 어느 누가 쉽사리 믿겠는가. 어른들 중 하나가 아, 하는 탄성을 흘리더니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전에 우리 마을에서 지냈었던 도사님이세요!”
“뭐? 진짜?”

그제야 다른 이들도 알아봤다. 가면을 쓰고 있어서 몰랐는데, 목소리나 체격이 그때 본 도사와 일치했다. 그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아이고, 도사님! 이게 얼마 만입니까!”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식사는 꼬박꼬박 하시고요?”
“세상에, 전에 봤을 때보다 더 마른 것 같네. 아픈 데는 없으시죠?”
“자, 잠시만.”

머리 위로 쏟아지는 질문 세례에 청명이 한 걸음 물러났다. 그가 말했다.

“잘 지내고 있었던 거 맞아요. 여러분이 챙겨 주셔서 아픈 데도 없고요. 회포는 나중에 푸시고, 우선 나가요.”
나가자는 말에 다들 질문 세례를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다른 방에 숨어 있는 양민들도 차례로 꺼내 주었다. 청명이 나서는 것보다 같은 약자가 손을 내미는 쪽이 빠르고 설득력 있었다.

“근데 도사님. 도사님은 왜 가면을 쓰고 계세요?”

소녀가 동그란 눈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청명은 소녀에게는 보이지 않을 미소를 지었다.

“그런 일이 있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모든 방에서 나온 양민들은 어림잡아 백 명가량이었다. 적은 수였으나 그리 넓지도 않은 복도에 백이 넘는 인원이 빽빽이 들어찼으니 많아 보였다. 청명은 그들을 이끌었다.

“이쪽이에요. 저를 따라오세요.”
긴 복도를 지나 출구로 나오자 서늘한 바람이 가면 양옆으로 스쳤다. 청명은 머릿속에 계산해 둔 길을 따라 양민들을 이끌었다. 만인방이라는 적진 한가운데임에도 주위에서 공격하는 이 하나 없었다. 이것도 장일소의 안배라고 생각하면서, 만인방에서 나온 지 한 시진이 지났다.
“허억, 헉…….”
“아버지! 괜찮으십니까?”

원래라면 더 가야 하는데, 양민들이 먼저 지쳐 쓰러졌다. 사방은 사각지대. 질 나쁜 괴한에게 걸려들기 알맞은 영역이다. 당장 뒤에서 화살이 날아올 수 있음에도 청명은 평온했다. 그도 그럴 게, 몇 분 후면 이곳으로 올 산적 때문이다.
“두목! 여깁니다!”

우렁우렁한 외침이 퍼지며 거한이 나타났다. 번충이었다. 그가 뒤쪽을 향해 소리치자 거한에 비해 비쩍 마른 사람이 달려왔다. 학창의가 펄럭이도록 빠르게 달려온 그는 양민 무리를 발견하고 기겁했다.

“아니, 이분들이 여기에 왜…… 다들 괜찮으십니까?”
임소병이 부채를 집어넣고 그들의 상태를 살폈다. 청명은 자연스럽게 뒤로 빠져서 먼 곳을 내다보았다. 임소병이라면 사방에 부하들을 퍼트릴 테니, 이쯤 접어들면 녹림의 손길이 닿을 것이라 예상했다. 제가 할 일은 끝났으니, 슬슬 가야지. 무심하게 생각하고 발을 움직인 찰나였다.
“저 도사님께서 구해 주셨어요!”

한 아이의 외침에 임소병과 양민들의 시선이 청명에게 쏟아졌다. 청명은 입 안쪽 살을 깨물고는 등을 돌린 자세 그대로 훌쩍 뛰어올랐다.

“잠깐! 멈추십시오!”

뒤로 바짝 따라붙은 임소병이 그의 손목을 낚아챘다. 임소병이 말했다.

“도장, 저랑 얘기 좀 합시다.”
양민들은 산적들의 비호 아래 본래 마을로 돌아가고 임소병은 청명과 단둘이 남았다. 경사가 느긋한 언덕에 나란히 앉은 둘은 한쪽만 상대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청명은 그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할 말만 하고 끝내지.

“도장.”
“네?”
“도장은 혹시 화산검협이십니까?”

청명이 임소병을 돌아보았다.
질문과 달리 그는 확신에 찬 얼굴이었다. 이렇게 직선으로 꽂히는 질문은 처음이었다. 뭐라고 대답하지. 망설이자 임소병이 말을 이었다.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화산검협은 실종 상태여서 근황을 조사하려고 해도 도통 잡히는 게 없더군요. 그런 와중에 당신을 만났습니다.”
“…….”
“한눈에 봐도 수상한 차림새. 어두운 밤에만 활동한다는 소문. 저를 잘 아는 듯한 말투며, 단신으로 만인방에 들어가 양민들을 구해 온…… 정체불명의 무인이요.”
“…….”
“물론 전 당신을 몰라서 이게 충분한 증거가 되지 않겠지만, 당신이 화산검협이 아니라는 증거도 없지 않습니까.”
둘의 머리 위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아니라고 잡아뗄 수 있다. 겨우 그런 걸로 증거가 되겠냐고 반박할 수도 있었다. 청명은 반박하는 대신 시선을 돌렸다. 시릴 정도로 푸른 하늘에 가슴이 아렸다. 홍대광과 또 다른 느낌이었다. 제 정체에 대해 확신하는데, 매도보다 궁금증이 깃든 저 눈이.
“그쪽 말이 맞아요.”

그래서 그 투명한 시선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내 정체를 처음으로 눈치챈 존재.

“내가 화산검협이에요.”

어렴풋한 씁쓸함이 묻어나는 어조로 답했다. 임소병의 반응이 어떤지는 굳이 보려고 하지 않았다. 가면 아래 낯을 숨긴 채로는 확인할 자신이 없었다.
청명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임소병이 손을 뻗었으나 그 손은 천 자락 사이를 물처럼 빠져나갔다. 그의 머리 위로 목소리가 떨어졌다.

“나에 대해 모른다고 했죠. 이름만은 기억해 두세요. 청명이라고 해요. 화산검협 청명.”

청명의 어깨 위로 햇살이 내려앉았다. 신처럼 강렬하고 눈부신 빛이었다.
납치당했던 양민들을 기적적으로 구출한 후, 화산의 이름은 한번 더 하늘로 치솟았다. 사람이 세 명 이상 모였다 하면 어김없이 화산이 거론되었으며 그들 모두 화산을 칭송하느라 입속의 침이 말랐다. 또 다른 소식으로, 양민 구출에 야행귀도 동참했다고 한다.

“그 얘기가 진짠가?”
“이 사람은 명색이 이야기꾼이면서 의심이 이리 많으면 쓰나! 정보 출처가 개방이야!”
“아, 그럼 믿을 만하지. 그래서 야행귀도 양민들을 구했다고?”
“개방이 전하길 단신으로 만인방에 쳐들어가서 구출했다는군. 협객이 따로 없어!”
“그런데 야행귀는 화산파도 아닌데 왜 화산이랑 함께 움직였지?”
“협객행에 소속이 뭐가 중요한가! 야행귀도 정보가 없어서 그렇지 마음은 화산과 함께하고 있을 거야!”
“듣고 보니 맞는 말이군.”

말은 말을 타고 퍼져서, 화산의 명예 옆에 야행귀의 위용이 나란히 서게 되었다. 소식이 이러니 한 가지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야행귀의 정체는 뭘까?
소리 소문 없이 나타나서 형태가 없는 안개 마냥 중원을 떠돌던 야행귀가 강렬한 업적을 이뤘으니 그에게 관심 가지는 자가 배로 불어났다. 야행귀에 대한 소문에도 점점 날조가 더해졌다.

“야행귀는 얼굴에 큰 화를 입어서 가면을 쓰고 다니는 거라고 하더군!”
“목을 다쳐서 말도 못 한다고 했어!”
날조에 날조가 쌓인 나머지 야행귀의 이야기를 꾸며 극을 펼치거나 책으로 파는 사람이 많아졌다. 아이들을 모아 놓고 만담을 들려주는 이야기꾼도 생겼다.

그리고 며칠 후, 새로운 소식이 세간을 강타했다. 천우맹에서 축제를 주최하기로 했다.
섬서에서 사천까지의 길목을 등으로 장식하고 각종 먹거리를 나열하며, 거의 모든 정파를 초대해 인사를 나누는 자리가 될 거라고 한다. 아직은 결정만 났을 뿐 언제 축제를 열지는 공표하지 않았다. 덕분에 세간은 불에 기름을 부은 꼴로 더욱 이야깃거리를 불태웠다.
화산과 당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외부 객을 맞이하기 위해 전각을 증축하고, 입구로 올라오는 길을 섬세하게 다듬고, 개방에서 나르고 온 정보를 토대로 고급 다기와 식기를 구매하고, 제자와 식솔들을 투입해 길목에 등을 장식했다. 당가의 지휘 덕에 과정이 수월했다.
그리고 청명은 한 편의 연극을 관람하는 기분으로 그 과정을 지켜보았다. 구경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느 길을 가도 검은 무복과 녹색 장포로 밭을 이루고 있었으니까. 천우맹 측에서 여는 축제는 이번이 두 번째인가. 오래간만이라 감회가 새로웠다. 여기에 제가 낄 자리가 없다는 사실만 빼면.
아린 사실을 제하더라도 화산과 당가가 힙을 합쳐 연회를 준비하는 광경은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화산이 재고를 나르고 당가가 전각을 짓는 등 역할 분담도 훌륭했다. 주최가 천우맹이니 천우맹에 속한 모든 문파가 모일 것이다.

‘모든 문파…….’

천 자락을 꾹 누른 청명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세월이 유수처럼 흘러가고, 마침내 천우맹이 여는 축제가 시작되었다. 색색의 종이가 뿌려지고 양민들은 길가에 늘어선 음식을 마음껏 먹고 마셨다. 구파일방도 공식 석상에 참가해 한 번씩 축하 인사를 건넸다. 연회를 위해 비무장을 화려하게 단장한 무대에서도 연극, 춤, 노래가 펼쳐졌다.
“사악한 악적 놈들! 썩 꺼지지 못해?”
“나왔다! 영웅이다!”

양민들이 연극에 열광하는 가운데 오검은 좀처럼 축제에 녹아들지 못했다. 자꾸만 시선을 딴 데로 돌리고 멍 때렸다. 그들도 자신이 이러는 이유를 알았다. 그 녀석이 와 줄 것 같아서. 축제는 길게 지속되니 한 번쯤은 나타날 것 같아서.
약속만 남기고 헤어진 후 동네 이곳저곳을 필사적으로 뒤졌건만 좀처럼 종적을 발견할 수 없어서 답답하고 심란한 상태에 축제 준비까지 거들었으니 속이 말이 아니었다. 한 번이라도 보면 묵은 체증이 풀릴 것 같은데. 어째 그림자조차 비춰 주지 않는다. 망할 놈.

‘그때 본 모습은 환상이었을까.’
아직도 민가에서 대화를 나눴던 게 꿈만 같았다. 딱 한 번 마주쳤을 뿐인데 그날의 인상이 가슴속에 각인되었다. 그것은 환상이었다. 눈에는 보이나 닿으려고 하면 사라져 버릴 듯한 환상. 접촉하고 싶어도 접촉할 방도가 없고, 그놈이 알아서 나타나 주기를 기다리는 것밖에 못한다.
괜찮다. 아무리 귀신 같은 놈이어도 축제에 몰려든 사람은 많다. 이 부산스러운 인파에 스며들어서 몰래 축제를 구경하고 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백천은 굳게 믿었다.

“야행귀…… 화산검협.”

백천은 희미하게 상기된 낯으로 중얼댔다. 그는 설렘을 가라앉히고 걸음을 움직였다.
청명은 의외로 양민들과 함께 연극을 관람하고 있었다. 객석의 맨 앞이나 중간 쪽이 아니라 구석진 뒤에서. 워낙 인파가 붐비고 혼잡한 덕에 제 기척도 그들 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밀 수 있었다.

‘좋네. 이런 분위기.’

떠들썩하고, 웃음이 끊이지 않고, 지나가는 곳마다 즐거움이 가득하다.
연극이 막을 내리고 다음 극이 시작되자 객석을 벗어났다. 보통 유명인은 사람 많은 곳에 가면 단숨에 주목받기 십상이지만 청명은 행인들의 눈에 띄지 않은 양 조용하게 이동했다. 지나가던 행인 하나가 천 같은 것이 자기 손을 간질이자 뒤를 돌아보았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인파가 드문드문 끊긴 숲에 도달하자 익숙한 인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제 또래지만 몇 살 어려 보이는, 수려한 미모의 청년이었다. 청년이 바위에 걸터앉아서 꼬챙이에 꿰인 당과를 먹고 있다. 청명은 고민했다.

‘날 알아볼까.’

못 알아볼 것이다. 딱 한 번 본 게 전부고, 가면을 썼으니까.
어쩌면 우리 애들과 임소병이 그랬던 것처럼, 저 녀석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실낱같은 가능성이라고 해도. 청명은 용기를 쥐고 청년에게 다가갔다. 청년이 앉아 있는 바위를 주먹으로 가볍게 두어 번 두드렸다. 청년이 아래를 돌아보았다. 그가 순진한 눈매를 깜박였다.

“누구십니까?”
‘청명아. 아까 보니 네가 설 궁주님께 반말을 하더구나. 존대하거라.’

아득한 옛일에 들었었던 현종의 지적을 회상하며, 청명은 품에서 지필묵을 꺼냈다. 글로 대화하는 게 익숙해져서 몇 초도 안 되어 종이를 들어 올렸다.

북해빙궁의 궁주님을 뵙습니다. 어째서 호위도 없이 혼자신지요.
설소백은 전신을 감싼 흑의에 가면을 쓴 낯선 자가 지필묵으로 말하는 걸 신기하게 보다가, 바위에서 내려왔다.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분위기에 취해서 머릿속을 환기할 겸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천우맹의 이름으로 중원에 온 게 이번이 두 번째인데, 축제가 정말 즐겁습니다.”
귀인께서는 어디 가는 길이십니까? 끝에 덧붙인 질문에 청명은 능숙하게 붓을 휘갈겼다.

저도 요 앞을 걷고 있었습니다. 사람에 치여 멀미가 나서요.

“그렇습니까. 혹 실례가 안 된다면 그 걸음에 저도 함께해도 될까요? 혼자 있다 보니 제법 심심하네요.”

그래도 됩니까?
“예. 본디 산책에는 말동무가 필요한 법이죠.”

설소백은 흔쾌히 답하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청명은 제가 말했지만 예상외라는 듯 가만히 있다가, 그의 걸음에 보폭을 맞춰 걸었다. 발아래에서 눈덩이가 소복소복 밟혔다. 지나는 걸음마다 발자국이 점점이 찍혔다. 조용하고 한산했다.
“귀인께서는 화산검협이란 자를 아십니까?”

제 얘기가 나오자 청명은 모르는 척 고개를 기울였다. 설소백은 이야기를 들려주듯 나른하게 말을 이었다.

“알고 계실 겁니다. 화산검협은 지옥 같은 전쟁을 끝낸, 전설로 회자될 만한 인물이니까요. 그런데 그자가 마교의 첩자라지 뭡니까.”
“…….”
“귀인과는 관계없는 여담이지만, 제게 화산검협은 은인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자가 마교의 첩자라는 소식을 접하고 어찌나 충격받았던지…….”

설소백이 숨을 갈무리했다.

“처음에는 수없이 원망했습니다. 어떻게 정파를 속일 수 있냐면서. 그런데 현재에 이르러 보니…….”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화산검협이 진짜 마교의 첩자가 맞는지 의심이 갑니다. 증거가 나오지 않아서 의심하는 게 아닙니다. 순수한 의문일 뿐입니다. 사실 그것은 오명이 아닐까? 화산검협은 그런 사람이 아닌데.”

그의 음성이 떨렸다.

“모르겠습니다. 어느 쪽이 진실인지, 전 모르겠습니다.”
길을 헤매는 미아 같은 눈동자였다. 말이 끊기니 기다렸다는 듯 정적이 찾아왔다. 등 뒤 나무에서 눈덩이가 떨어진 후, 청명은 붓을 놀렸다. 내용을 설소백에게 보여 주었다.

아서라, 꼬맹아. 네가 머리를 굴려서 뭐 하게.

“……!”

설소백은 눈을 부릅뜨고 청명을 보았다. 곧 다음 내용이 적혔다.
제가 화산검협이라면 이렇게 말했을 거예요.

설소백은 멍하니 있다가, 푸슬 웃어 버렸다. 그가 풀어진 얼굴로 말했다.

“그렇네요. 그렇겠죠. 화산검협이라면 필시 그렇게 말했을 것 같네요.”

이어 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청명은 고개를 돌리고 모른 척했다.
이놈도 변했다. 마음에 의심의 싹을 틔우기 시작한 순간부터 나를 향한 증오가 옅어지기까지 머지않았다. 확인했으니 속이 후련해야 하는데, 어째서 후련해지기는커녕 갈수록 갑갑해지는 걸까.

‘장문 사형. 이걸 내 입으로 말하지 못해 아쉽습니다. 사형도 내가 바보 같다고 뒷목 잡으시겠죠?’
약 오십 걸음 후 숲의 출구에 다다랐다. 설소백이 정중하게 인사했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말동무가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감사했습니다. 살펴 가세요, 궁주님.

설소백은 궁주답지 않게 공손한 태도로 인사하고는 빙궁도의 부름을 받고 떠났다.
청명도 숲을 떴다. 사람이 잘 드나들지 않는 경로를 탔다. 만나고 싶은 존재가 있다.

그의 뒤로 어렴풋한 매화 향이 풍기는 듯했다.
당군악은 정파 인사들이 가지는 회담에서 빠져나왔다. 계속 있다간 머리가 아플 것이다. 그는 나무가 양옆으로 늘어선 산책로를 걸었다. 겨울이라 나뭇잎은커녕 꽃도 피지 않았지만 새하얀 눈이 내려앉은 모양새가 퍽 예뻤다.

“음?”

문득 눈앞으로 붉은 꽃 한 송이가 사락거리며 내려왔다.
자세히 보니 매화였다. 주변에 매화가 피는 나무는 없는데. 어디서 날아왔지? 의문도 잠시, 두세 송이의 매화가 더 날아들었다. 자기를 따라오라고 하는 것 같았다. 신기하군. 당군악은 나풀거리는 매화를 따라갔다.

스무 걸음을 더 가자 나무로 둘러싼 길이 끝나고 너른 공간이 펼쳐졌다.
잔디와 수풀 대신 하얗고 깨끗한 눈으로 덮인 땅. 들판처럼 광활한 땅 한가운데 고목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 굵은 나뭇가지 위에 상대적으로 작고 마른 청년이 앉아서 당군악을 바라보았다. 당군악은 저자가 일전에 집무실에서 본 그자라는 걸 알아차렸다.

“자네는?”

저도 모르게 다가갔다.
그가 고목 앞에 서자 청년이 나뭇가지에서 뛰어내렸다. 도포 자락이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무게가 없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청년이 그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를 대하는 것 같은 태도였다.

“자네가 여긴 뭐 하러 왔지?”

추궁이 아니라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본 질문이었다.
청명은 지필묵을 꺼내 들고 미리 적어 뒀던 답변을 보였다.

축제 구경하러 왔죠. 그리고 휴식은 많이 취하셨어요?

당군악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이후로 새벽 업무는 철통같이 끊었고 평상에 앉아서 술을 마시는 등 여유도 만끽했다. 가끔 맞은편 자리가 허전하지만.
“나는 충분히 쉬었지. 자네야말로 제대로 못 쉰 모양이군.”

그 말에 청명이 멈칫하고는 붓을 놀렸다. 당가주님께서 그걸 어떻게 아세요?

“직감이지. 부정하지 않는 걸 보니 맞나 보군.”

청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당군악이 부드러운 어투로 물었다.

“그 매화는 자네 것이겠지?”

끄덕였다.
“화산에는 참 다양한 매화가 있네만, 자네의 매화와는 근본부터가 다르군.”

왜 확신하세요?

“살아 있기 때문이지. 자네의 매화는.”

당군악이 고목의 몸통에 편하게 기대섰다. 당가의 가주가 보이기에는 체통 없는 행위지만 왠지 이 청년 앞에서는 체통이고 뭐고 내려놓아도 될 것 같았다.
청명도 그의 옆에 기대섰다. 저번에 대면했을 때와는 분위기가 비교할 수 없이 부드러웠다. 당군악은 이곳에 도착한 순간부터 경계가 풀렸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다. 그의 신경은 온통 옆의 청년에게 쏠렸다.

“세인들이 자네에 대해 이야깃거리를 많이 늘어놓더군.”
“……?”
“얼굴에 화를 입었다느니, 목을 다쳐서 말을 할 수가 없다느니…… 자네의 얼굴을 알고 목소리를 들어 본 사람으로서는 재미있기만 한 소문이야.”

그가 낮게 웃음을 흘리다가 불현듯 그쳤다.

“그런데, 최근에는 자네의 얼굴이 잘 기억나지가 않다네. 목소리도.”

그가 청명을 돌아보았다.
“부탁일세. 아주 잠깐이라도 좋으니 자네의 얼굴을 보여 주면 안 되겠는가? 목소리까지는 바라지 않네. 딱 몇 초만, 그 가면을 벗어 주게.”

당군악은 본인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몰랐다. 청명이 그의 낯에 떠오른 표정을 보고 어깨가 미묘하게 굳을 정도였다.
청명에게는 어떻게 들릴지 몰라도 당군악에게는 중요한 얘기였다. 어깨를 대고 나란히 서 있음에도 금방이라도 흩어져 버릴 것 같았다. 그게 무서웠다. 대수롭지 않게 다른 곳에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돌아보면, 이미 어둠 너머로 사라진 뒤일까 봐.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 잡아야 했다.
부탁하는 지금도 언제 제 부탁을 들었냐는 듯 신기루처럼 사라질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당군악은 가슴이 바짝 조여들었다. 청명은 붓을 들었다. 아까보다 느린 동작으로 글을 썼다.

제 얼굴은 당장 보여 드리지 못해요. 나중에 모든 걸 깨닫게 되는 날이 오면 제 얼굴이 기억나실 거예요.
“모든 걸 깨닫게 되는 날?”

청명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장 아래에 새 문장을 썼다. 대신 다른 걸 보여 드릴게요. 얼굴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이 특별한 걸. 지필묵을 품에 넣고 몇 걸음 물러났다. 스르릉, 암향매화검을 뽑았다. 투명하고 매끄러운 검신이 드러났다. 칼날에 불꽃 같은 검기가 어렸다.
발끝이 땅을 그리듯 빙글 돌며 허리를 틀었다. 허공에 붉은 선이 그림처럼 일렁였다. 불규칙적으로 나타나는 붉은 선을 따라 매화가 피어났다. 봉오리를 열고 자라나듯 피어난 매화가 솟아오르며 허공에 만개했다. 하늘에 붉은빛이 번졌다. 아름다운 광경에 당군악은 일순 숨을 삼켰다.
잘게 찢기고 짓밟혀도 매화는 매화다. 청명은 한때 친우였던 자에게 정성을 다해 매화를 펼쳐 보였다. 한 송이, 한 송이가 자아를 가진 것처럼 하늘을 수놓았다. 그 중심에서 춤을 추는, 밤을 닮은 검수. 당군악은 문득 이 광경이 낯익었다. 예전에도 이 광경을 봤었던 것 같은데.
“……!”

별안간 벼락 같은 충격이 머릿속을 꿰뚫었다. 눈을 부릅뜨는 순간 매화의 빛 사이를 가르고 나온 청년이 그에게 종이를 보여 주었다.

축제가 지속되는 동안에 저는 이곳 어딘가에 죽 머물고 있을 거예요. 또 봬요.

거짓말처럼 매화의 환상이 사라지며 청년의 모습도 안개처럼 흩어졌다.
당군악은 제가 뭘 봤는지도 모르고 멍하니 서 있었다. 종이에 적힌 내용만 떠올랐다. 또 봬요. 그 한마디가 메아리처럼 뇌리에 퍼졌다. 그리고 들려오는 양민들의 목소리.

“어, 매화다!”
“화산이다!”

양민들 틈에서 오검이 나왔다. 그들이 매화의 흔적을 쫓아 허둥지둥 달려왔다.
“뭐야, 어디 있어?”

그들도 잔치를 즐기고 있던 중 먼 하늘에서 솟구치는 매화를 보고 한달음에 이곳으로 달려왔다. 틀림없이 그 녀석이다. 그러나 매화는 사라진 뒤고 당군악만 보이자 오검이 어리둥절했다.

“당가주님? 당가주님이 왜 여기에…….”
“아버님! 그 사람은요?”

당소소가 물었다.
당군악은 그녀의 질문을 못 들었는지 매화가 사라진 자리에만 하염없이 시선을 고정했다. 그 반응을 보고 백천은 확신했다. 그가 입가를 비틀었다.

“이 새끼, 역시 축제에 와 있었네.”
“진짜요? 놈이 여기 왔다고요?”
“안 보이는데?”

조걸과 윤종의 호들갑을 뒤로하고 백천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왔으면 왔다고 우리한테 말이라도 할 것이지. 빌어먹을 새끼. 절로 이가 갈렸으나 기분이 전혀 나쁘지 않았다. 속이 간질간질하고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가 하늘에 시선을 고정하며, 어딘가에서 이곳을 지켜보고 있을 놈을 떠올리며 짓씹듯 말했다.

“그래, 누가 더 빠른지 내기해 보자고.”
청명은 반짝이는 등과 함께 늘어선 노점상들에 시선도 주지 않고 경치만을 구경했다. 섬서를 벗어난 길목도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축제의 바다에 직접 뛰어들지 못해 아쉽냐면, 아니다. 이렇게 지켜보는 것만으로 배가 차는 기분이다. 분위기만으로 취한다는 게 이런 건가.
즐거운 웃음소리에 의식이 팔린 나머지 앞에서 걸어오는 행인과 어깨가 부딪혀 버렸다. 청명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이는 것과 행인이 말하는 게 거의 동시였다.

“아, 죄송합니다. 다치지 않으셨습…….”

거기까지 말한 행인이 저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청명도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 멈칫했다. 백천 못지않게 화려하고 재수 없는 미남이 어리둥절한 시선을 보냈다. 청명은 예의상 고개를 꾸벅여 준 다음 자리를 피했다.

“앗, 저! 잠시만요!”

청명의 등에 행인의 외침이 꼬리처럼 따라붙었다. 청명은 한참을 이동해 사람이 없는 곳에 도착했다.
뒤를 흘끔대자 한참 떨어진 곳에서 행인, 남궁도위가 사람들 틈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게 보였다. 옆에는 남궁의 장로들도 함께였다. 남궁도위가 장로들에게 무어라 말하는 것 같다. 그들은 얼마 안 지나 인파 너머로 사라졌다. 청명은 가면의 이마 부분을 짚었다.

“후우…….”
제가 먼저 찾아가는 건 상관없다. 하나 상대가 예고 없이 나타나는 건 어찌하지 못해서 저도 모르게 굳어 버린다. 굳을 필요가 없음에도 몸이 멋대로 반응해 버린다. 설마 또 아는 사람과 실수로 마주치지는 않겠지. 만날 거라면 내 쪽에서 먼저 찾아가고 싶은데. 애써 불안을 달랬다.
목적지는 정해 두지 않았으니 청명은 노숙 생활을 했을 때처럼 발길 닿는 대로 떠돌았다. 이야기꾼이 아이들을 데리고 화산의 무용담을 들려주는 길목을 소리 없이 지나치고, 어둠이 내려앉은 길에서는 천 자락을 조용히 나부꼈다. 마음이 겨우 평온해지려는 와중 청명은 들었다.
“보셨다고요? 확실합니까?”
“예. 그 길가에서 보았습니다. 전신에 흑의를 둘렀고 얼굴에 가면을 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남궁도위와 백천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오검도 함께였다. 그들은 남궁도위가 전해 준 얘기를 듣고 하나같이 경악한 낯이었다. 조걸이 물었다.
“지금은 어디 있습니까?”
“죄송합니다. 마주친 지 반 시진이 넘어서, 현재 어디에 있는지는…….”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는 기억하십니까?”
“아마 저쪽일 겁니다.”

남궁도위가 정확히 제가 있는 방향을 검지로 가리켰다. 청명은 괜히 움찔했다. 오검이 고개가 이쪽 방향으로 홱 향했다.
여기 있으면 안 될 것 같다. 본능적인 판단이 서는 즉시 청명은 냅다 걸음을 놀렸다. 새처럼 가벼운 보법이었다. 한 발 한 발 뗄 때마다 양옆 풍경이 휙휙 스쳐 지나갔다. 엄청난 거리를 이동함에도 파공음 하나 터지지 않았다. 도포 자락이 춤추듯 펄럭였다. 거의 날다시피 하며 태연하게 부정했다.
‘도망치는 거 아니야.’

찾아가야 한다면 제 쪽에서 먼저 찾아가고 싶다. 저쪽에서 예고 없이 들이닥치면 곤란하다.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 자체를 안 준 거나 다름없으니 준비를 할 시간을 스스로 버는 것이다. 변명 같지만 어쩔 수 없다. 내가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어쩌라고.
마지막 보법으로 지면을 세게 밟고 뛰어올랐다. 발아래가 파일 정도로 강한 도약이었다. 시야로 다양한 건물들이 스쳐 지나가고 까마득한 창공에 도달했다. 순간 가슴이 뻥 뚫렸다. 위로는 드넓은 하늘이 펼쳐지고 아래로는 복잡하게 얽힌 전각들과 그 사이를 이은 등이 내려다보였다.
청명은 건물들 중 가장 높은 전각 꼭대기에 사뿐히 내려섰다. 도포 자락이 펄럭이며 가라앉았다. 주변에 커다란 전각도 많았지만 이 전각이 제일 거대했다. 어지간한 전각의 두세 배는 가뿐히 뛰어넘었다. 여기라면 들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설마 양민들이 보는 앞에서 경공을 전개하겠어.
그는 편하게 앉아서 다리를 흔들었다. 발치가 까마득했으나 신경 쓰지 않고 풍경을 구경했다. 시야에 걸리는 게 없어서 축제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살랑, 바람이 불자 천 자락이 나부꼈다.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가 멀었다. 가면 속 청명의 눈동자에 불투명한 막이 드리웠다.
장일소의 제안이 자꾸만 뇌리를 떠돌았다. 겉으로는 안 그런 척해도 내심 놈의 제안을 거절한 게 마음 쓰렸다. 사패련에 가입하라는, 제게는 굴욕적인 대가지만 제 한 몸을 더럽히는 대가로 화산의 제자들을 넘어 전 중원의 기억을 돌려줄 수 있다면 그럭저럭 싸게 먹히는 셈이다.
처음 마교의 첩자인 거 아니냐는 소식을 들은 순간부터 단 한 번도 짚어 보지 않았던 생각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기억을 되찾으면 분명 좋겠지. 저를 더럽혔던 오명이 씻기고 저주와 비난의 시선이 깨끗하게 없어지며, 화산의 제자들은 죽어라 사죄하겠지. 굳이 거절한 게 이상할 정도였다.
이제 와 이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그때 이름 없는 마을에서 깨어난 날부터 희망을 버렸던 것일지도 모른다. 나 자신을 포기하니 세인들이 하늘이 떠나가라 욕해도, 화산의 제자들을 비롯한 동료들의 저를 향한 시선이 변해도 일말의 동요도 일지 않았다. 내 이름은 진작 내동댕이쳐졌으므로.
‘이 상태를 영원히 지속할 거야?’

마음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또 다른 자신이 물었다. 그 물음을 외면했다. 답해야 할 건 없다. 대답은 오래전에 전부 끝마쳤으니. 그저 하루만이라도 더 머릿속을 맑게 비우고 싶다. 설령 저들이 영영 기억을 되찾지 못한다고 해도…….
“야! 이 새끼야아아아!”
“어디 갔어!”
“잡히면 죽인다!”

사색이 깨지며 강제로 현실로 끌려 나왔다. 청명은 소리가 들린 방향을 쳐다보았다. 거의 비명에 가까운 외침을 지르며 오검이 사방팔방 날뛰고 있었다. 살기등등한 광경에 청명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바보같이 왜 저래.
“사숙! 아무래도 여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코빼기도 안 보입니다!”
“다른 데 더 찾아봐! 숨죽이고 숨어 있을지 몰라!”
“나와. 얼른.”

가까운 거리도 아닌데 시끌시끌한 소란이 여기까지 선명하게 들렸다. 청명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속이 통쾌하리만치 시원한 웃음이었다.
이렇게 속이 뚫릴 정도로 웃어 본 게 얼마 만인지. 마지막으로 폭소를 터트린 게 언제인지 기억나지도 않았다. 그는 허리에 찬 암향매화검을 뽑았다. 칼날에 붉은빛이 아른거렸다. 웃음기 어린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열심히 찾고 있는데 단서 정도는 줘야지.”
칼날에 매화가 하나둘 피었다. 검을 휘두르자 매화가 바람을 타고 날아갔다. 찬란한 붉은빛을 뿜으며 매화가 허공에 흩날렸다. 청명은 애틋한 눈으로 매화를 바라보았다. 마지막 미련을 보내듯이.
“내가 그 새끼 찾으면 대가리부터 깬다.”
“헉…… 여기가 아니라 아예 다른 방향에 있는 거 아녜요?”
“도위 이 자식, 누나한테 거짓말한 거 아니겠지?”

백천, 조걸, 당소소가 차례로 내뱉었다. 그들의 눈에서 새파란 살기가 타올랐다. 상대적으로 평정을 유지하는 윤종도 주먹을 꽉 쥐었다.
유이설은 웬만해서는 참으려고 했으나 결국 못 참겠는지 다른 이들처럼 이를 갈거나 주먹을 쥐는 대신 불특정한 방향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기세가 어마어마했다. 그리고, 그들의 시야에 붉은 꽃 한 송이가 잡혔다.

“……? 저게 뭡니까?”
“꽃인가?”
“꽃이 왜 여기로 날아오지?”
의아해하며 하늘에서 내려오는 꽃을 보았다. 곧 그것이 매화임을 알아채고 소리를 질렀다.

“매, 매화! 매화다! 그 새끼 여기 어딘가에 있습니다!”
“다들 일어나라! 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미 다 일어났어요! 뭐 해요! 어서 움직이지 않고!”

살기로 이글대던 분위기가 다시 평소로 돌아왔다.
그들은 나풀대는 매화를 따라갔다. 매화는 의지를 가진 것처럼 생기 있게 날아갔다. 조걸이 윤종에게 속삭였다.

“사형, 저 매화가 꼭 우리를 안내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 중이다.”

의아함과 신기함이 섞인 기분으로 걸었다. 한동안 눈 밟는 소리만 이어졌다.
얼마나 걸었을까, 눈앞에 커다란 전각이 나타났다. 주변에 널린 전각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까마득하게 큰 전각이었다. 위를 올려다보자 그 전각 꼭대기에 검은 점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점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사람이 전각 꼭대기에 걸터앉아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 사형! 저거, 저놈!”
“나도 알아!”

사람 주변에 매화가 날리는 것을 보고도 어찌 모르겠는가. 오검은 비명을 지르며 전각을 타고 올라갔다. 다급한 마음도 함께하여 실로 가공할 속도가 나왔다.

“야! 야 이 새끼야! 우리가 얼마나 찾았는데!”
“빨리 올라가! 저놈 도망 못 가게!”
청명은 오른손에 쥔 검으로 매화를 뿌리면서 그들이 올라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기세가 굉장해서 전각 표면이 부서질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꼭대기에 도착한 오검이 숨을 고르고는 청명에게 달려들었다.

“너, 너 이…… 으악!”

제일 먼저 달려든 조걸이 청명이 있던 자리에 엎어졌다.
눈 깜짝할 새 뒤로 물러난 청명은 검을 검집에 넣고 지필묵을 꺼냈다. 잘 찾아왔네. 짧은 한마디를 본 조걸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오라고 미끼를 던졌는데 안 올 수가 있냐! 그것보다 너무한 거 아니야? 우린 네가 장일소에게 잡혀가고 나서 소식이 없길래 잘못된 줄 알았더니!”
어떻게 축제가 시작될 때까지 코빼기도 안 비칠 수가 있어! 그의 원성이 하늘 널리 퍼졌다. 귀를 막았다가 뗀 청명은 무심한 손놀림으로 답변을 썼다. 생사 확인만 했으면 됐지.

“야, 이…….”

또 발작하려는 조걸을 누르고 윤종이 앞으로 나섰다.

“다친 데는 없어 보이는구나. 다행이다.”
그가 부드러운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

“하나 강호행을 함께한 동료로서 적어도 무사하다는 서신 한 통은 보내 줬으면 좋겠다. 구출된 양민들과 개방의 입을 통해서 네가 잘 있다는 사실만 겨우 알았다.”
“…….”
“꼭 기억해 줘라. 네 소식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듣고 싶지 않으니.”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상냥하게 파고드는 뒷말에 청명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소소가 말했다.

“이거 아세요? 세인들이랑 이야기꾼이 온통 당신에게 주목하고 있어요. 저도 우연히 들었는데 재미있는 얘기가 많더라고요. 당신도 들었죠?”

청명은 붓을 놀렸다. 다 헛소문이야.
“맞아요! 그런데 이런 설이 도는 건 다 당신이 원인이에요. 우리 앞에서도 얼굴을 보이지 않고 꼭꼭 숨기고 있으니까…….”

당소소가 말끝을 흐렸다. 마지막 말에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당소소는 말끝을 흐린 그대로 굳었다. 그녀가 재빨리 말을 바꿨다.

“이럴 게 아니라 거리 구경하러 가요!”
본의 아니게 어색해진 분위기는 거리를 둘러보면서 차츰 풀어졌다. 색색의 줄에 꽃이나 구슬이 달린 장신구를 돌아보고, 간식거리도 사고, 옷가게에도 들렀다.

“이거 당신한테 어울릴 것 같아요. 입어 보세요!”

옷가게에서 청명은 당소소의 재촉에 강제로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칙칙한 장포는 벗어던지고 검은 무복 위에 꽃 자수 놓인 붉은 장포를 걸쳤다. 뒤집어쓴 천도 벗고 머리를 단정하게 빗은 다음 반만 틀어 올려서 비녀를 꽂았다. 덕분에 우중충하던 인상이 약간 화사해졌다. 오검이 감탄했다.

“꾸미니까 좀 나은데?”
“그래, 훨씬 보기 좋다. 다른 것도 입어 봐.”
옷 종류는 상상 이상으로 다양했다. 남색에 금실로 바람결을 수놓은 장포. 나비 날개처럼 얇은 천을 겹겹이 두른 장포. 금속을 세공한 귀걸이. 백금으로 다듬은 귀걸이.

“이것도 입어 봐요. 이것도, 이것도, 이것도!”

어지러운 기분으로 그녀에게 휩쓸리다가 청명의 눈이 어느 장포에 닿았다.
치맛자락처럼 넓게 퍼진 진녹색 장포였다. 장포에는 흰 자수로 꽃과 나비가 새겨져 있다. 청명이 그 옷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당소소가 물었다.

“왜요? 저 옷이 마음에 들어요?”

대답하기가 그래서 고개만 끄덕이자 당소소가 얼른 그 장포를 가져와 건넸다. 청명은 그것을 천천히 몸에 걸쳤다.
장포는 얇고 가벼웠다. 청명은 몸을 감싼 장포를 내려다보았다. 다르다. 제가 기억하는 장포는 이것보다 소매가 좀 더 넓고 빛깔도 영롱하다. 그럼에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 기억 속에 존재하는 놈의 복장과 가장 비슷한 옷이기 때문일까.

“마음에 들면 이 옷에 맞는 장신구도 골라 볼까요?”
그의 기색을 눈치챈 당소소가 진녹색 장포와 어울리는 색상의 비녀와 관, 귀걸이 등 각종 장신구를 가져왔다. 청명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는 방에서 나온 그는 어색하게 허리를 틀었다. 기다리고 있던 이들은 숨을 삼키거나 안면 근육이 멈췄다.
진녹색 장포는 그대로, 속에는 옆트임이 있는 검은 무복을 입었다. 반만 틀어 올린 머리에는 나비 장식이 달린 비녀를 꽂았다. 귀걸이는 뚫는 형태가 아닌 특수 제작한 귀걸이를 달았다. 화장을 하지도 않았고 장신구 몇으로만 치장했을 뿐인데 눈에 띄게 화려해졌다. 당소소가 손뼉을 쳤다.
“와, 이게 사람이지. 엄청 예뻐요! 비녀 착용하느라 애먹었을 텐데 고생 많았어요.”

원래 비녀는 그녀 자신이 꽂아 주려고 했으나 청명이 사양했다. 그녀는 그가 비녀가 흐트러진 모양새로 나오면 제가 고정시키려고 했는데 예상외로 단정해서 감탄했다. 액세서리에 관심 있어 보이지 않았는데.
청명은 방에서 나오면서 허리를 틀었다.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귀걸이가 짤랑 소리를 내며 진녹색 장포에 고운 주름이 잡혔다. 별 느낌은 안 들었다. 몸에 가벼운 무게가 추가된 것 말고는 생각이 없었다. 하나 저들의 반응을 보자니 그도 나름 기분이 좋았다. 그대로 면경을 보았다가 멈칫했다.
면경에 비친 머리카락이 대부분 하얀색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검은색도 보이나 그것도 서서히 색이 옅어지는 중이다. 부작용이 악화된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는데.

“예쁘다, 예뻐. 빈말이 아니라 진심이야. 앞으로는 이렇게 하고 다녀.”
“그래, 괜히 칙칙한 거 입고 다니지 말고. 보기 좋잖아.”
이들은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고 밝게 웃는 낯으로 치장한 모습을 치켜세워 주었다. 당소소가 제일 신났다.

“검은색만 고집하니까 귀신이라는 소문이 붙지, 색색을 다양하게 꾸미면 이렇게 예쁜데.”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상사병 앓는 거 아니야?”
“이참에 가면도 바꿔 보는 거 어때?”
마지막에 말한 이는 조걸이었다. 그가 싱글싱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꾸며서 훨씬 나아졌지만, 가면 때문에 인상이 아직도 칙칙해. 표정이 꼭 우는 것 같잖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청명의 앞으로 가면 하나가 불쑥 들이밀어졌다. 그가 쓰고 있는 것과 동일한 색이었으나 포정은 웃는 가면이었다.
유이설이 가면을 내민 채 응시했다. 투명한 시선. 청명이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어도 묵묵부답이었다. 백천이 조심스럽게 거들었다.

“그래. 죽 가면을 쓰고 다닐 거라면 그나마 보기 좋은 걸 골라야지. 이걸 써라.”

청명은 유이설이 건넨 가면과 백천을 번갈아 보다가, 내밀어진 가면을 집었다.
방까지 들어가서 가면을 바꿔 쓴 다음 나왔다. 오검은 더욱 만족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이후 꾸미기는 계속되었다. 무복만 빼고 겉에 걸치는 장포와 장신구만 열 번 넘게 착용했다 빼길 반복했다. 최종적으로 고른 상품은 진녹색 장포와 붉은 장포, 녹색 비녀와 붉은 비녀였다.
길고 가는 붉은 끈과 녹색 끈도 추가로 골랐다. 가게를 나올 때는 녹색 끈으로 머리를 묶고 붉은 장포를 걸쳤다. 조걸이 그 모습을 보고 백천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옷이랑 장신구 색상이 따로 놉니까? 색을 맞추지 않고.”
“왜. 매화와 함께 핀 나뭇잎 같고 좋잖느냐.”

백천이 흐뭇하게 답했다.
그는 청명의 곁으로 다가와 그를 내려다보았다.

“어떠냐. 복장을 바꿨으니 주변에서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이는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야행귀라는 소문을 두고 말하는 듯했다. 그의 말마따나 주변에서 청명을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없었다. 가면을 썼음에도.
시전의 행렬을 지나니 넓은 비무장에서 활쏘기 대회를 연 것이 보였다. 조걸이 비무장을 보더니 눈을 빛냈다. 그가 청명의 옷자락을 살짝씩 잡아당기며 말했다.

“저기 대회 열었다. 우리도 가서 참가시켜 달라고 하자!”

청명이 고개를 젓자 조걸이 시무룩해졌다.
“……알았어. 나 혼자 참가할게. 대신 내가 우승해서 상품 타는 거 가만히 앉아서 지켜봐야 한다!”
“야! 잠깐만!”

그는 멋대로 외치고는 비무장으로 우다다 달려갔다. 윤종이 말릴 틈도 없었다. 저걸 진짜, 하고 윤종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내내 조용하던 백천이 유이설과 당소소에게 말했다.
“사매, 소소. 난 잠시 이 녀석과 할 말이 있으니 윤종이와 같이 조걸이 놈을 봐주겠느냐? 금방 돌아오겠다.”
“네! 다녀오세요.”

당소소가 흔쾌히 답했고 유이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청명이 의아하게 보는 가운데 백천이 그의 어깨를 이끌고 사람이 없는 곳으로 향했다.
사박, 사박. 잔디 대신 눈 밟는 소리가 음률처럼 이어졌다. 청명은 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 백천의 옆얼굴을 힐끔댔다. 옆머리가 얼굴을 가려서 표정을 읽기가 어려웠다.

도착한 곳은 붉은 꽃이 밭을 이룬 광활한 평원이었다. 얼마나 넓은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쪽으로.”
백천이 청명이 엉뚱한 방향으로 가지 않도록 그의 어깨를 정중하게 감싸 꽃밭 사이로 한 줄기 물처럼 흐르는 길을 따라 걸어갔다. 길의 끝에 보이는 것은 우뚝 솟은 언덕이었다.

“보아라. 아름답지? 화산과 당가가 고용한 원예가들이 꾸민 꽃밭이다. 너에게 꼭 보여 주고 싶었지.”
언덕에 다다르니 꽃밭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먼 곳에서 분 바람이 붉은 바다 위로 물결을 그리고 지나갔다. 꽃잎 서너 송이가 바람을 타고 날아갔다.

탄식이 나올 만한 광경이었으나 청명은 백천이 무슨 얘기를 꺼내려고 하기에 단둘이서 따로 보자고 하는 건지 궁금했다.
“우선…… 화산검협. 되도 않는 추문에 휩싸여 너를 미워하고,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 것에 대해 사죄하마.”

백천이 난데없이 양손을 앞으로 모으고 허리를 반듯하게 숙였다. 거의 직각이었다. 청명은 화들짝 놀랐다. 입을 열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잡았다.
“이는 화산의 문도로서 저질러서는 안 되는 치명적인 죄. 나는, 우리 화산은 아무 증거도 없이 그저 마교의 첩자라는 설이 나왔다는 이유로 너를 화산에서 내쫓았다. 그것도 모자라 소문이 퍼지는 걸 방관했고 소문의 출처가 어디인지 조사하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는 명백한 대역죄다.”
어깨를 잡은 손길에도 백천은 꿋꿋하게 몸을 세우지 않았다. 되레 더 깊이 고개를 숙였다.

“화산의 대제자로서, 그리고 화산의 모든 문도들을 대표해 그대에게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바람이 멎었다. 멎은 덕에 정적이 생생하게 다가왔다. 청명이 말을 못 하는 사이 백천이 천천히 몸을 세웠다.
“소문의 출처를 알아낸 것도 아니면서 무지한 상태에서 사과를 건넨다고 비난해도 좋다. 오히려 소문이 사실이 아님을 알아챈 이 시점에서 사죄하고 싶었다.”

단정하게 정돈한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얼굴은 참을 수 없는 미안함과 후회, 괴로움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가 또렷한 발음으로 말했다.
“이건 그저 시작을 튼 것뿐이다. 나중에, 소문의 출처를 알아내고 모든 진실을 깨닫게 된 그때. 그때 한 번 더 너에게 진심을 담아 사과하겠다. 그때까지 기다려 다오.”

얼핏 비장하게 들리는 음성 곳곳에 미약한 물기가 어려 있었다. 물기의 감정은 표정과 같았다.
“그리고…… 사죄를 해야 하는 입장인 주제에 이런 부탁은 정말 염치없지만, 그래도 들어 다오.”

아까보다 무거워진 어조였다. 안색도 약간 창백해진 것이, 대체 무슨 부탁을 꺼내려는 걸까. 청명이 가만히 응시하는 가운데 백천이 짧게 호흡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너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
“제발, 주제넘고 염치없는 부탁인 건 안다. 하지만 한 소절이라도 듣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 같아서…… 딱 한마디라도 좋다. 네 목소리를 듣고 싶어.”

청명은 백천과 같이 다니면서 그가 이런 얼굴을 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제가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도 이런 얼굴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도 이들 앞에서 목소리를 들려주기 싫어서 서면으로 대화를 대신한 게 아니다. 저를 모르는 사람 취급하는 자들이 먼저 그어 놓은 선을 넘을 생각이 없어서다. 저는 애당초 선을 그은 적도 없었다. 이들이 저를 버림으로써 그어진 선이다.
그 상황에서 추문으로 이름과 명예까지 더럽혀진 제가 그들이 그어 놓은 선을 아무렇지 않게 넘어 버리면, 그건 너무 불공평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더 이상은 선을 긋지도 못하겠네.’

청명은 가면 속에서 짧게 심호흡을 했다. 혀로 입술을 핥은 다음,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숙.”
“……!”

설마 진짜로 부탁을 들어줄 줄은 몰랐는지 백천이 벼락을 맞은 것처럼 눈을 부릅떴다. 청명은 나직이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표정이 왜 그래. 바보 같게.”
“어, 어. 어…….”

백천은 고장 나기라도 했는지 동공이 쉴 새 없이 떨렸다. 그 모양새가 우스웠다.
“얼굴 근육 풀어. 안 그래도 못난 얼굴 흉하게 구겨질라.”

백천은 머리에 김이 나도록 혼란스러워하면서도 그 말을 듣고 표정을 갈무리했다. 한번 더 웃은 청명은 웃음기 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사과해 줘서 고맙다는 말은 안 할게. 대신 나도 질문 하나 하자.”
“……?”
“사숙은 후회 안 해?”
“무슨……?”
“차라리 이유 없이 원망하는 지금이 나을지도 몰라. 모든 기억을 되찾고 난 후에는 죽어 버리는 게 낫다는 판단이 서서 혼자 자결해 버릴 게 뻔하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 우리더러 계속 널 미워하라는 말이냐? 뭘 의미하는지 알고?”
“응. 의미를 아니까 묻는 거야.”
한 박자 쉬고 청명은 귀에 각인시키듯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물었다.

“정말, 후회 안 하냐고. 나한테 사과한 거.”

백천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가, 서서히 안색을 굳혔다.

“후회 따윈 안 한다. 죄를 알았음에도 사죄하지 않는 짓이야말로 진정 죽어 버리는 거니까.”
멎었던 바람이 다시 불기 시작했다. 청명은 그의 티 없이 결연한 얼굴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걸로 됐어.”

대답을 들었으니 만족한다. 청명은 추가로 덧붙였다.

“만일 진짜로 기억이 돌아오면 사숙이랑 화산 애들이 나한테 뭐라고 한마디 할 거야. 반드시 나오는 한마디.”
백천의 눈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그 눈이 귀여워 청명은 또 웃을 뻔했다.

“그 말을 하면, 내 대답을 들려줄게. 사숙도 마찬가지로 기다려 줘.”

그는 백천에게 그 답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구태여 설명하지 않았다. 지금은 이 약속만으로 충분하다.

서로의 운명이 움직인 밤이었다.
“지금쯤 화산검협은 축제를 즐기고 있겠지.”

옥좌에 눕다시피 앉은 장일소가 호가명이 보낸 서류를 읽으며 중얼댔다. 치장을 하지 않아 흐트러진 모양새임에도 눈빛은 변함없이 선명했다.

“겉은 안 그런 척해도 내심 내 제안을 승낙하고 싶었을 텐데.”
그는 화산검협을 잘 알았다. 겉으로는 매몰차게 내쳤어도 그가 준비한 기적의 수단을 남모르게 아쉬워했을 가능성이 다분했다.

“이러면 내가 네 말을 안 들을 수밖에 없잖니.”

자세를 똑바로 한 그가 손짓했다. 시립해 있는 무인이 바로 달려와 부복했다.
“창고에 있는 연막탄을 모두 가져오너라.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예!”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무인이 창고 쪽으로 사라졌다. 혼자 남은 장일소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천우맹이 축제를 즐기고 있을 방향을 내다보았다.

“협상은 깨졌지만, 이건 내가 너에게 주고 싶어서 마련하는 선물이란다.”
청명은 축제 기간이 지속되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마침내 축제가 끝났을 때도 입가에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 백천의 입을 통해 오명을 벗을 가능성이 생겼고, 그의 내면에 담긴 진심을 엿보게 되었으니.

키이이이이이!
“응, 기분이 좋아.”

목덜미에 둘러앉은 백아가 제 귓불에 뺨을 비볐다.
백아의 애교를 받으면서 금색 공단으로 만든 상자를 들어 올렸다. 상자는 크기에 비해 가벼웠다. 덮개를 열자 안에 곱게 접힌 장포와 포장지에 감싸인 장신구들이 보였다. 본래 치장의 치 자에도 관심을 주지 않았었는데, 그때는 무의식적으로 마음이 끌렸다. 저 눈에 익은 장포 때문이었다.
시선만으로 뚫어 버릴 듯 진녹색 장포를 내려다보다가, 기것을 집어 들었다. 옷과 같이 산 새 무복 위에 진녹색 장포를 걸쳤다. 매듭을 지을 필요 없이 걸치기만 하면 되는 형태라서 편했다. 이런 점까지 그놈의 것과 닮았다. 한 바퀴 돌자 장포 자락이 부드럽게 물결쳤다.
퍼지는 자락을 자세히 보면 나비를 연상케 했다. 전투에서는 거추장스러울 수 있는데, 그놈은 이것보다 두 배는 더 거추장스러운 장포를 입고도 제 뒤를 보조했다. 가슴이 아릿해져서 얼른 회상을 관뒀다. 그는 팔을 들어 올리고 반대쪽 손으로 소매를 가만히 쓸었다.

“나한테는 필요도 없는 건데.”
속에서 뭉클거리며 올라오는 것을 삼킨 그는 녹색 끈을 들어 머리를 질끈 묶었다. 비단실 같은 끈이 길게 늘어졌다. 어쨌든 기분 전환 용도로 적합하다. 그는 뛰어오르려다 불현듯 쾅 하고 울리는 굉음을 들었다. 머릿속에서 나는 소리였다. 충격에 휩쓸려 공중에서 도약한 자세 그대로 쓰러졌다.
“아윽……!”
키이이이이이이!

백아가 비명을 질렀다. 다행히 지면에 눈이 쌓여 있어서 딱딱한 바닥에 부딪히는 것은 면했다. 폭신한 눈에 반쯤 묻힌 청명은 오싹한 한기보다 먼저 머릿속에 닥친 충격에 정신도 못 차렸다. 누가 쇠망치로 뇌를 연신 내리치는 것 같았다. 쿨럭, 기침하자 피를 토했다.
검게 죽은 피가 아니라 새빨간 피였다. 피가 주위 눈덩이를 붉게 물들었다. 청명은 쓰러진 자세 그대로 미동도 않다가, 팔로 짚어 상체를 일으켰다. 몸에 붙은 눈이 후두둑 떨어졌다.

“쿨럭!”

한번 더 기침하자 아까보다 많은 피가 나왔다. 덕분에 장포와 옷에도 피가 묻었다.
그는 피로 젖은 손으로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심장이 기이할 정도로 빨리 뛰었다. 어깨가 잘게 들썩이며 귓가에 이명이 들어찼다. 또다. 축제 동안에는 괜찮아서 부작용 현상이 사라진 줄 알았는데. 눈앞으로 사락거리며 하얀 머리카락이 내려왔다. 탁함이라곤 없이 깨끗한 머리카락이었다.
그 색이 꼭 제 상태를 말해 주는 것 같아서 그저 웃었다. 축제에서 즐기고 웃는 동안 심장에서 시작한 부작용이 전신에 퍼졌던 모양이었다. 지금이 부작용이 발발한 순간이고.

“그래도 목소리는 나와서 다행이네.”

목소리는 잘 나왔으나 바람 소리 마냥 가늘고 쉬었다.
잠시를 더 가만히 있자 이명이 멈추고 머릿속 충격도 줄어들었다. 그제야 전신을 타고 한기가 올라왔다. 그는 눈을 털고 일어섰다. 백아가 당장이라도 혼절할 듯한 얼굴로 제 몸 이곳저곳을 살피더니 안 되겠는지 다시 품에 들어갔다. 제게 받은 기운으로 부작용을 완화시켜 주려는 것이다.
“괜찮아.”
키이이이이이이이!

거짓말하지 말라는 듯 백아가 날카롭게 울었다. 몸속을 점령한 한기가 한층 약해졌다. 청명은 무복 소매로 대충 입가를 닦고, 쓰러지면서 벗겨진 가면을 들어 얼굴에 썼다. 시야를 하얗게 채우던 눈덩이가 가면 아래로 가려졌다.

‘이 꼴이면 한동안 정양에 들어야겠네.’
삼 주가 지났다. 화산의 제자들은 그 삼 주 동안 청명을 보지 못했다. 볼 수 있으리란 기대는 안 했다. 중원의 음지까지 샅샅이 뒤져도 발견되지 못하는 놈이니까. 그래도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쩌지 못했다. 화산뿐만 아니라 개방, 녹림을 비롯한 곳들도 청명의 소식을 기다렸다.
그리고 삼 주가 끝나는 시점에서 사패련이 나타났다. 일개 사파도 아니고 사패련이 본대와 함께 나타난 것이다. 본디 사파 출몰은 개방의 정보를 통해 미리 아는 것이 보통인데, 사패련이 예고도 없이 들이닥쳤다. 구파일방은 전쟁이 끝난 상황에서 또 다른 전쟁이 벌어지나 대비했다.
그러나 막상 정파 한복판에 들이닥친 사패련은 전투태세를 갖추는 대신 긴 검은 통을 꺼냈다. 그들은 통을 묶은 끈을 풀고 허공에 던졌다. 다른 방향에서도 통이 솟구쳤다. 동시다발적으로 던져진 통들은 폭탄 마냥 펑 소리를 내며 뿌연 연기를 퍼트렸다.

“으악!”
“이게 뭐야!”
여기저기서 비명이 울렸다. 콜록대는 기침 소리도 연신 이어졌다. 개중은 무기를 빼 들고 연기를 마구잡이로 휘저었다. 그것도 잠시, 사방을 덮친 연기에 아무 효과도 없자 몇몇 사람들이 의문을 느꼈다. 의문을 눈치챘을 때 사패련도들은 이미 이동하고 없었다.
같은 시각 섬서, 사천, 소림, 무당, 청성 등 각 문파에 분포해 있는 사패련도들이 연막탄을 뿌렸다. 흡사 전염병을 퍼트리는 모양새였다. 문파의 제자들이 무기를 꺼내 대응하려고 했으나 사패련도들은 공격 의사가 없다는 듯 연막탄만 뿌리고 사라졌다. 이상한 광경이다. 왜 저리 쉽게 물러나지?
이변은 그때 눈치챘다. 연기를 흡입한 자들의 머릿속에 한 인물이 아른아른 떠올랐다. 의식과 상관없이 인물의 모습은 점점 또렷해졌다. 질끈 묶어 올린 치렁치렁한 머리. 검은 무복. 손에 든 매화가 새겨진 검. 어딘가 서글퍼 보이는 눈동자. 저 사람은…….

“화산검협?”
누군가가 말했다. 그자를 시작으로 다양한 곳에서 기억 속의 인물을 알아차렸다. 소림에서 명상하다가 소란을 느끼고 나온 혜연, 남궁에서 체력 단련을 하던 남궁도위, 당가에서 독을 제조하고 있던 당패와 당잔. 그 외 한 명도 빠짐없이 화산검협에 대한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

백천은 머리에 직선으로 내리꽂히는 충격에 동공이 확장되었다. 지워져 있던 공백이 차근차근 채워지기 시작했다. 화산의 문도로서 처음 만났었던 날. 그토록 간절하게 갈망하게 해 줬던 화종지회에서의 매화. 전신을 피투성이로 물들고 돌아온 화산검협에게 화내는 자신.
꼬리를 흔들며 유혹할 기세로 자신을 꼬드기는 화산검협. 악에 받쳐 발작하는 화산검협을 만류하는 자신. 사악한 폭소를 터트리며 적을 섬멸하는 화산검협. 싸늘하게 굳은 채 일갈하는 화산검협. 인위적으로 사라졌었던 공백이 차곡차곡 들어차며 기억이 총천연색으로 물들었다.
마지막으로 눈앞에 다가온 것은 슬퍼 보이는 화산검협의 얼굴이었다. 저에 대해서 모조리 잊어버렸냐고 물은 얼굴. 그 얼굴이 이제 와서 지독하게 아팠다.

“컥…….”

한꺼번에 많은 정보를 받아들여서 숨이 턱 막혔다. 백천은 손을 들어 목을 잡았다. 그 손은 곧 눈가로 올라갔다.
눈가를 덮은 손 아래로 투명한 눈물이 떨어졌다. 뺨을 타고 눈물이 주륵주륵 흘러내렸다. 그는 눈가를 덮은 채 꿈쩍도 않았다. 바위 마냥 굳은 그의 입에서 잔뜩 목이 졸린 음성이 새어 나왔다.

“……청명아.”

드디어 기억이 제 색을 되찾은 그는 처음으로 제 목을 졸라 버리고 싶은 충동에 빠졌다.
옆에서 털썩 주저앉는 소리가 났다. 유이설이었다. 그녀도 표정 없는 낯으로 눈물만 방울방울 흘리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애처롭게 떨렸다. 윤종과 조걸도 머리를 짚은 채 비틀댔고 당소소는 양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의미 모를 신음이 공허하게 퍼져 나갔다.

“아, 아아…….”
“아…….”
흑백이기만 했던 기억이 본래 색을 되찾음과 동시에 여태까지 수면 아래에 잠들어 있었던 무의식이 위로 떠올랐다. 울음이라는 이름의 무의식이었다. 그것이 화산의 제자들의 가슴을 치고 솟아올라 눈으로 흘러나왔다. 신음이 점차 강해졌다.

“윽, 으으…… 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악!”
신음이 울분으로 변해 터져 나왔다. 그들은 머리를 움켜쥐거나 바닥에 엎어진 채 주먹으로 땅을 내리치면서 절규를 토했다. 가슴이 지독하게 뜨거웠다.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고 나서는 후회였다. 그제야 자신들이 청명에게 무슨 망발을 지껄였는지 사무치게 깨달았다.
제 한 목숨 바쳐 가면서 천하를 구한 청명에게 마교의 첩자 아니냐며 손가락질했다. 청명이 죽도록 증오하는 마교와 내통하는 배신자라고 비난했다. 어떤 증거도 없이. 설령 증거가 있었다고 해도 감히 그런 날조 따위로 청명을 오물에 처박으려고 한 자를 갈기갈기 찢어 죽였을 것이다.
그런 이가 있었다면 필시 그리했을 것이다.
“흑, 으…….”

백천도 참지 못해 주저앉았다. 주먹 쥔 그의 손등에 새파란 핏줄이 돋아났다. 핏줄 위로 눈물이 점점이 떨어졌다. 그는 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런 거였냐, 청명아? 네가 말한 게, 이런 거였냐고.”
그때의 속삭임. 차라리 이유 없이 원망하는 지금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한 속삭임. 모든 기억을 되찾고 난 후에는 죽어 버리는 게 낫다는 판단이 설 정도라고. 그 말이 맞다. 당시에는 기억을 찾는다느니, 이해를 못했었는데 공백이 채워진 현재는 정말 죽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죽는 것이야말로 죄에서 도망치는 거나 다름없는 무책임한 짓이다. 축제 당시의 제가 말했듯이, 죄를 알았음에도 사죄하지 않는 짓이야말로 진정 죽어 버리는 것이다. 저승으로 달아나는 게 청명에게 무슨 사죄가 된단 말인가.

“우리가 그놈에게 뭔 짓을 한 걸까요.”
조걸이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물었다. 대상을 지목하고 말한 게 아닌 듯 그는 연신 눈물을 방울방울 흘리며 한탄했다.

“우리가, 그 녀석한테, 대체 무슨 짓을…….”

차마 말을 못 하겠는지, 간신히 그쳤던 울분이 다시 터져 나오기라도 하는지 그가 이를 악물었다. 윤종이 대신 말을 받았다.
“사과해야 합니다. 당장 청명이 놈을 찾아가서 사과해야 해요.”

말이 헛나오는 건 그도 마찬가지여서 목소리 군데군데 물기가 어렸다. 사과하자는 말에 제자들 모두 고개를 들었다. 윤종이 낯을 일그러트렸다.

“사과하러 가야 해요. 지금도 놈이 혼자서 외로이 식어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요!”
제자들이 반응하기도 잠시, 한 인물이 나왔다. 현종이었다.

“장문인!”

제자들이 현종을 돌아보았다. 온화하던 인상의 장문인은 어디 가고 냉혹하게 굳은 얼굴로, 현종이 제자들에게 명했다.

“천우맹주의 이름으로, 천우맹 회의를 소집한다.”
회의실 내 분위기가 무거웠다. 천우맹에 속한 문파의 대표들은 서신을 받고 급히 회의실에 참석했다. 측근을 대동할 여유도 없었다. 장내를 뒤덮은 침묵은 심히 무거워서, 그 분위기만으로 누구 한 사람을 질식시켜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먼저 입을 여는 이는 없었다. 서로의 눈치만 볼 뿐이었다.
“크흠, 큼. 사람이 모였으면 말을 하셔야지요. 벙어리 마냥 입 꾹 다물고 계시기는.”

참다못한 임소병이 서두를 뗐다. 다들 그걸 알고 있으나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죄의 무게를 알기 때문이었다. 전에 청명을 한 번 본 적이 있는 당군악은 남들보다 안색이 훨씬 어두웠다.
고생하지 말고 휴식도 취해 가면서 해요. 집무실에서 청명이 보여 주었던 문구가 망령처럼 당군악의 뇌리를 떠돌았다. 그때 청명은 무슨 심정이었을까. 생판 모르는 사람 보듯 쏘아보는 제 친우를 보면서 울고 있지 않았을까. 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 같았을 텐데,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고…….
“이럴 수가, 도장님…….”

설소백은 아예 혼이 빠져나갔다. 맹소가 옆에서 어깨를 짚었으나 그도 낯빛이 창백하긴 마찬가지였다. 돌이킬 수 없는 죄 앞에서 모두가 바보가 되어 버렸다. 유일하게 평정을 유지하는 이는 임소병뿐이었다.

“다들 그만하십시오.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주목되었다. 그가 안색을 차게 굳히고 말을 이었다.

“여러분이 여기 모인 이유는 한 가지잖습니까. 화산검협을 찾아서 사죄하는 것.”
“압니다. 하지만 저희가 무슨 염치로…….”
“염치가 있으니까 사죄해야 하는 겁니다. 염치가 없으면 인두겁을 쓴 악마죠.”
남궁도위의 소심한 말을 단칼에 자르고는 현종을 보았다.

“맹주님, 한시라도 빨리 사람을 풀어서 화산검협을 찾아야 합니다. 이 순간에도 화산검협이 홀로 죽어 가고 있을지 모릅니다.”

선천지기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기억을 되찾으면서 청명이 선천지기 부작용을 앓고 있다는 사실도 떠올려 냈다.
“맹주님?”

현종이 대답이 없자 임소병이 불렀다. 현종이 감고 있는 눈을 떴다. 참을 수 없는 죄책감으로 점철된 눈이었다. 그가 조용히 입을 뗐다.

“……증오스럽습니다. 과거의 저 자신이.”
“…….”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 아이를 파문하려고 했던 저 자신을 죽여 버리고 싶습니다.”
그가 고개를 푹 숙였다. 머리를 짓누르는 죄책감이 지나치게 무거웠다.

“마음 같아서는 순간 이동을 해서라도 그 아이에게 가 엎드려 빌고 싶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에 머리가 닳을 지경입니다. 한데…… 어찌 제가 무슨 주제라고 그 아이에게 용서를 구한단 말입니까. 제가 어찌.”
죄의 무게로 치면 이들 중에서 현종이 제일 깊었다. 화산과 천우맹의 이름으로 청명을 파문시킨 장본인이다. 정녕 그 일이 현실인지 믿기지가 않았다. 정말 그 일이 제 입으로 저지른 만행인지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계속된 부정에 머리에서 연기가 날 지경이었다.
고개를 숙인 현종의 망막에 당혹스러워하는 청명의 얼굴과 억울함을 참고 침착하게 화산에서 나가겠다고 하는 얼굴이 새겨졌다. 당시 그 아이는 지금의 저보다 수천 배는 더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우리가 죄를 깨달은 것만으로 이런데, 그 아이는 세인들의 비난까지 한 몸에 받으면서.
“화산의 장문인이자 천우맹의 맹주로서 명하겠습니다. 즉시 수색대를 꾸려서 청명이를 찾아 주십시오. 갈 만한 곳 따지지 않고 모든 중원을 뒤져야 합니다.”
“명을 받듭니다!”

기다리던 말이 나오자 모두가 예를 갖췄다. 현종은 탁자 아래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주먹이 잘게 떨렸다.
‘기다려라, 청명아. 우리가 어떻게든 찾으마. 그리고 몇 번이고 사죄하마. 네가 원한다면 내 목숨을 대가로 바쳐서라도…….’

잠시 감았다가 뜬 그의 눈에 비장함이 깃들었다.
사패련이 뿌린 연막탄으로 전 중원의 화산검협을 향한 평가가 뒤집어졌다. 세간이 아주 난리가 났다. 화산검협이 마교와 내통하는 자라는 설은 이 사건이 마교의 소행이라는 설로 바뀌었다.

“그럼 우리는 뭣도 모르고 화산검협을 욕했다는 건가?”
“이런 천인공노할!”
“그럼 화산검협은 어디 있는가?”
마교를 향한 분노 끝에 논하는 것은 화산검협의 행방이었다. 설은 총 세 가지로 나뉘었다. 자신을 향한 매도를 못 이겨 자취를 감췄다, 소문의 출처에게 복수하기 위해 떠났다, 혹은 이미 중원에 돌아왔는데 발견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어느 쪽이나 신빙성이 있는 설이었다.
개방이 발품 팔아 정보를 나르지 않아도 진실은 알아서 퍼져 나갔다. 구파일방도 제자들을 파견해서 화산검협을 찾도록 명했다. 그 결과 사람이 다니지 않아 인적이 끊긴 길에도 화산검협을 찾는 이들이 수시로 돌아다녔다. 수색 도중에 모르는 자끼리 만나면 필시 화산검협의 행방을 물었다.
“지나가시는 길에 실례합니다. 혹시 도장께서는 화산검협이라는 자를 보지 못하셨는지…….”
“죄송합니다. 저희도 찾고 있습니다. 소속 문파가 어디 되십니까? 나중에 찾으면 그 측으로 서신을 보내겠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남궁세가입니다.”

비슷한 곳에서도 이런 약속을 주고받았다.
사람이 둘 이상 있는 곳이라면 발보다 말이 빨라서, 화산검협의 행방 얘기가 실시간으로 타고 날아갔다. 소식 넘어가는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수색 지역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도 넘어오는 소식을 통해 화산검협의 행동 경로를 미리 추측할 정도였다. 그리고 가장 절박한 심정을 애태우는 문파.
“저는 청명이를 보면 제일 먼저 제 대가리를 깨 달라고 부탁할 겁니다.”

조걸이 달리면서 말했다. 말하면서 그의 눈은 형형하게 주변을 샅샅이 훑었다. 감각도 있는 대로 펼쳐서 신경의 끝에 미세하게 걸리는 것이 있다면 바로 고개가 돌아갔다. 조걸뿐만 아니라 다들 눈빛이 절박했다.
윤종은 평온해 보였으나 질끈 깨문 입술에서 피가 났고 유이설과 당소소는 누가 잘못 건드렸다간 검을 뽑아 베어 버릴 것같이 신경이 날카로웠다. 백천은 사형제들을 한번도 쳐다보지 않고 달리는 속도를 높였다. 날아가다시피 이동하며 입 안쪽 살을 깨물었다.

‘청명아.’
죽도록 후회했다. 그때 너의 말을 약간이라도 더 진지하게 경청했어야 했다. 처음부터 잘못되었다. 마교의 첩자라는 의심이 가는 놈이니 화산에서 내쫓겠다는 게 아니라 소문의 근본부터 파헤쳤어야 했다. 네가 화산을 떠나기 전 내가 너의 방에 찾아갔을 때, 너를 잡았어야 했다.
네가 화산을 떠나기 전까지 얼마든지 기회가 있었음에도 딱 한 번 외에는 너를 찾지 않았다. 결국 모두가 잠든 시간에 너는 소리 없이 화산에서 영영 자취를 감췄다. 내면에서 증오가 새빨갛게 타올랐다. 나 자신을 향한 증오였다. 미칠 것 같았다. 뭐라도 부수지 않고서는 이 증오를 버틸 수 없었다.
“으아아아아아아!”

일순 눈앞이 붉게 일그러져 손에 든 검을 휘둘렀다. 근처 나무 다섯 그루의 몸통이 잘려 나갔다. 잘려 나간 것에서 그치지 않고 섬뜩하리만치 새빨간 검기가 나무 몸통을 조각조각 가루로 분질렀다. 가루가 흩날렸다. 나무가 있던 자리에 밑동과 검기에 파헤쳐진 눈덩이만 남았다.
오검은 거기에 반응을 보이는 대신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시간이 오래 걸려도 상관없다. 수색에 몇 년이 걸려도 상관없다. 우리는 반드시 너를 찾을 테니까. 백천은 청명이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건넨 말을 기억한다.
‘만일 진짜로 기억이 돌아오면 사숙이랑 화산 애들이 나한테 뭐라고 한마디 할 거야. 반드시 나오는 한마디. 그 말을 하면, 내 대답을 들려줄게. 사숙도 마찬가지로 기다려 줘.’

너는 우리에게 기다리라고 했다. 지금쯤 너는 누구의 눈도 닿지 않는 곳에서 홀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걱정 마라. 세상 어느 누구도 너를 찾지 못할지언정 우리는 반드시 널 찾아낼 테니까. 그때까지, 죽지 말고 살아 있어 줘.
홍대광은 정신없었다. 화산검협의 행방에 관한 서찰만 하루에 몇백 번을 받았다. 그것들을 검토하고 화산검협을 봤다고 알려진 지역으로 수색대를 꾸려서 보냈다. 덕분에 제가 직접 발로 뛰어서 찾아다니고 싶어도 실시간으로 갱신되는 정보에 묶여서 여기 틀어박혀 있다.
“분타주! 방금 막 들어온 서류입니다!”
“가져와!”

불과 일각도 안 되어 새 서류가 서른 장 넘게 쌓였다. 홍대광은 핏발 선 눈으로 서류를 파라락 넘겼다. 처음 화산검협의 종적이 발견된 장소는 사천 부근이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장소가 중원에서 멀어지고 있다. 뜻하는 바는 명백했다.
‘이대로 사라지려고?’

화산도, 천우맹도, 구파일방도, 아직 너에게 제대로 된 사과도 못했는데. 너한테는 사람의 마음이란 게 존재하긴 하는 거냐? 화났잖아. 억울했잖아. 분노했잖아. 상처란 상처는 다 입어 놓고 사과도 받지 않고 떠나려고? 영원히? 용납 못 해.

‘꼭 찾는다. 빌어먹을 자식아.’
화산검협 수색을 시작한 지 두 달이 흘렀다. 숙면을 제한 시간을 모조리 수색에 쏟아부었음에도 머리카락 한 올 발견하지 못했다. 녹림이 산이란 산을 다 뒤지고 장강 밑바닥까지 살펴봤는데도 보이지 않았다. 일부 사람들은 이 수색 자체가 화산검협의 시신을 찾는 여정이냐고 물었다가 얻어맞았다.
“악! 왜! 틀린 말은 아니잖은가!”
“뭐가 틀린 말이 아닌가! 시신이었다면 화산이나 개방에서 공표했겠지! 여지껏 화산검협은 실종 상태일 뿐 죽었다는 얘기는 티끌만큼도 듣지 못했는데! 어디서 그딴 망발을 올리나!”
“악! 내가 잘못했네! 그만 때리게! 악!”
그러나 시간이 이만큼이나 흘렀어도 찾지 못했으니 양민들 사이에서 화산검협이 죽은 거 아니냐는 의심이 은연중에 나오기 시작했다. 화산은 양민들의 소리를 필사적으로 무시했다. 그들은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전과 다름없이 청명을 찾으러 나섰다. 그 녀석이 죽었을 리 없어.
“잠깐만요. 저 아주 좋은 생각이 났는데요.”

조걸의 부름에 오검이 쳐다보았다. 조걸은 좋은 생각이라고 말한 것치고는 떨떠름한 낯으로 뺨을 긁적였다.

“이게 진짜 좋은 생각인데요, 말하면 절 패실 것 같아요.”
“왜, 무슨 생각인데. 안 팰 테니 말해 보거라.”

윤종이 채근했다.
그럼에도 조걸은 입만 여닫을 뿐 말을 꺼내기 어려워했다. 백천까지 말해 보라고 하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

“이만큼 뒤졌어도 안 보이는데…… 차라리 한 사람에게 가서 물어보는 게 어떨까요?”
“누구?”
“장일소요.”
“뭐?”

윤종의 목소리가 꺾였다. 백천도 눈을 부릅떴다. 조걸이 다급히 외쳤다.
“잠시만요! 때리지 마시고! 이건 그냥 순수한 의견이니까 뭐라고 하지 마세요!”
“……좋아.”

유이설이었다. 그녀가 눈을 들고 말했다.

“그쪽은 아직 살펴보지 않았어.”

윤종과 백천도 의외로 반대하지 않았다. 둘도 그럴 것 같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걸이 갸웃했다.

“반대하실 줄 알았더니.”
“반대할 이유가 없지. 장일소는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청명이를 인질로 삼았을 수도 있지.”

윤종과 백천이 차례로 동의했다. 백천의 말에서는 살기마저 느껴졌다. 결정은 판단으로 실행되었다. 그들은 사패련이 있는 방향으로 발을 박찼다. 어마어마한 속도가 나왔다.
장일소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은 청명의 생사 확인이라는 중요한 임무 아래 묻혔다. 엄청난 강행군으로 사패련의 본도까지 도달했다.

“멈춰라! 여기가 어디라고!”
“되었다. 말릴 필요는 없으니. 무슨 일이지?”

경악한 병사를 뒤로 물리고 냉정한 눈빛의 병사가 물었다. 백천이 대표로 답했다.
“우리는 패군을 만나러 왔다.”
“패군께서는 너희 같은 존재가 함부로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들여보내 주렴.”

병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가 지키고 있는 문 너머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병사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날 찾아온 손님이잖니. 들여보내 주렴.”
병사는 망설이는 듯 굳어 있다가, 숨을 토하고 문을 열어 주었다. 살벌한 병사의 눈빛을 아무렇지 않게 넘기며 오검이 안으로 들어갔다. 야릇한 향이 훅 끼치며 천장이 높은 알현실이 펼쳐졌다. 장일소가 죄다 물렸는지 좌우를 지키는 무인 하나 없고 그 혼자만 옥좌에 앉아 있었다.
그의 뒤에 시립한 시비가 그의 손에 든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장일소가 나른한 태도로 알현실로 들어온 다섯 명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눈꼬리를 휘었다.

“그래, 화산을 대표하는 제자들께서 장일소에게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청명의 행방을 아나?”

백천이 다짜고짜 치고 물었다. 음성이 차갑다.
장일소는 무어가 그리 즐거운지 쿡쿡 웃었다.

“나더러 화산검협의 행방을 알고 있냐고 묻는 건가?”
“질문에 대답해.”

고압적인 음성. 백천과 어깨를 나란히 한 오검에게서 싸늘한 기운이 우러나왔다. 장일소가 한숨을 쉬었다.

“이런, 이런. 언젠가 올 줄은 알았다만 이렇게까지 저돌적이라니.”
오검의 살벌한 기운을 아무렇지 않게 넘긴 그는 술을 한 모금 홀짝였다.

“내가 왜 말해야 할까? 나라면 화산검협의 행방을 알 게 뻔하니까?”
“뭐…….”
“아, 오해하지 말렴. 비꼬는 게 아니니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거란다. 풋.”

말하면서도 웃음을 참지 못한 장일소의 시선이 똑바로 꽂혔다.
“기억이 없을 때는 정파의 탈을 쓴 배신자라며 수도 없이 욕해 놓고, 기억이 돌아온 현재는 언제 그랬냐는 듯 간절하게 중원 어딘가에 있을 화산검협의 자취를 쫓는 꼴이라니. 한 편의 희극이 따로 없어.”
“…….”
“나쁘다는 건 아니란다. 나 같았어도 너희와 똑같이 손가락질했을 거니까. 그런데.”
그가 웃음을 뚝 그쳤다.

“기억이 없던 당시의 너희는 변명의 여지도 없이 화산검협을 증오했지. 그렇지 않니?”

백천이 고개를 숙였다. 장일소가 잔을 흔들었다. 잔에 담긴 술이 찰랑였다.

“모든 사태를 관망하게 된 내 입장에서는 이보다 웃긴 일이 없어. 화산검협이 얼마나 어이없어할까.”
“…….”
“내가 화산검협이라면 나를 잊은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았을 거란다. 그게 믿었던 동료라면 더더욱. 동료에게 받은 비난을 뼈에 새겨서, 훗날 철저하게 복수하겠지.”

오검이 침묵했다.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자 장일소가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아찔한 웃음이 천장까지 퍼졌다. 그가 말했다.
“뭘 기죽고 그러니. 양심에 타격을 줄 생각은 없었는데. 하하하하핫!”

정신 나간 것처럼 웃어 대던 그가 다 마신 술잔을 내려놓고, 어느 방향을 가리켰다.

“여기서 서쪽으로 두 시진 정도 가면 동굴이 있어. 도착하고 나서 판단은 너희 몫이란다.”

흔쾌히 방향을 알려 주자 백천이 고개를 들었다.
“착각하지 말아 주련. 나는 이 재미있는 희극을 좀 더 보고 싶을 뿐이니까.”
“……거짓말이면 대가를 받으러 다시 올 것이다.”

싸늘하게 일별한 백천은 오검과 함께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그들의 기척이 멀어지자 장일소는 옥좌에 편히 기대앉았다. 그가 손짓하자 시비가 새 술을 가져와 잔에 따랐다.
“성이 나서 날 죽여 버리겠다며 발악하지만 말아, 화산검협.”

그가 여유롭게 술을 홀짝였다. 붉은 입가를 적신 농밀한 액체를 혀로 핥고,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게 네 명예를 되찾아 준 사람에게 보이는 최소한의 예의거든.”
주변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바람이 어마어마하게 세서 머리카락이 마구잡이로 흩날렸다. 실제는 바람이 센 게 아니라 달리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옷자락이고 뭐고 펄럭펄럭 소리를 냈다. 백천은 속도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리에 더 많은 내력을 주입했다.

‘청명아…….’
다급했다. 만약 도착했을 때 싸늘한 주검이 발견되면 어쩌지. 우리가 늦어서 도착하기 전에 숨이 끊어진 거라면? 진짜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 그의 몸에서 내력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그가 비명처럼 외쳤다.

“더 빨리!”
“흐아아아압!”

조걸이 기합을 내질렀다.
속도의 한계를 넘으니 주변 풍경이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다리의 근육을 쥐어짜 사력을 다했다. 영원 같았던 두 시진이 훌쩍 지나갔다. 장일소의 언질이 거짓은 아니었던 듯 눈앞에 동굴이 드러났다. 날카로운 절벽 아래 입구가 뚫린 바위는 내부가 어두컴컴했다. 조걸이 침을 삼켰다.
“……여기에 있는 거겠죠?”
“들어가 보자.”

백천이 긴장 섞인 투로 답하며 먼저 발을 내디뎠다. 네 명이 그의 뒤에 따라붙었다. 동굴 안으로 들어오자 기다렸다는 듯 사방에 암흑이 드리웠다. 내부는 밖에서 본 것보다 훨씬 어두웠다. 터벅터벅, 발소리가 울렸다. 돌멩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앞을 제대로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되는 대로 감각을 펼쳤음에도 잡히는 게 없었다. 그야말로 어둠 속이었다. 의지해야 할 건 오로지 청각과 촉각뿐이었다. 발소리가 울리길 오십 번, 한 생물의 기척이 잡혔다.

“적인가?”

그들이 전투태세를 갖추는 동시에 멀리서 하얀 그림자가 쏜살같이 날아왔다.
검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으나 하얀 그림자는 아랑곳 않고 꽁지가 빠져라 날아와 오검 앞에 착지했다. 그 보송한 털을 본 순간 백천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백아?”
키이이이이이이!

왜 여기 있냐고 반응하기 전에 백아가 사납게 울었다. 무언가를 전하려는 울음인 듯했다.
백아는 연신 울부짖으며 앞발로 동굴 안쪽을 가리켰다. 따라오라는 듯. 백아는 몇 번 안쪽을 가리키고는 그 방향으로 달려갔다. 오검이 뒤를 쫓았다.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양옆이 넓어지고 천장도 높아졌다. 곧 드러난 광경에 백천의 낯이 굳었다. 오검도 숨을 죽였다.
탁 트인 공간 한가운데에 한 청년이 쓰러져 있다. 끈이 풀려 제멋대로 흐트러진 백색 머리카락.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창백한 안색. 호흡이 없는지 오르내리지 않는 가슴. 피로 얼룩진 진녹색 장포. 대충 던져진 암향매화검. 그런 것보다 백천의 시선이 얼굴에 꽂혔다. 저 시체 같은 낯빛.
“처, 청명…….”
“저, 저거…….”

오검의 눈이 떨렸다. 제가 본 게 현실이 맞는지 동공이 미친 듯이 떨렸다. 백아가 오검의 곁을 치고 지나가 청명의 곁에 달라붙었다. 백아가 두 앞발로 청명의 가슴을 꾹꾹 눌렀다.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백천이 섬전같이 달려와 청명의 반대편 옆에 주저앉았다.
“청명아! 정신 차려라! 청명아!”

그가 두 팔로 청명의 상체를 받쳐 들었다. 축제 때보다 더 말랐다. 몸도 지나치게 차가웠다. 차갑다. 그걸 느낀 순간 호흡이 가빠졌다. 백천은 고개를 숙여 청명의 가슴팍에 귀를 대었다. 희미한 박동이 들렸다. 심장이 뛰고 있다. 그러나 언제 멎을지 모르는 상황.
“청명아! 야 이 새끼야!”
“청명아! 청명아아아!”

오검도 청명의 주변을 둘러쌌다. 당소소가 청명의 맥을 짚었고 윤종과 조걸의 그의 손을 하나씩 감쌌다. 유이설은 그녀답지 않게 푸르게 질린 안색으로 청명의 뺨을 만졌다.

“소소야! 청명이 살아 있어?”
“네, 맥은 뛰고 있어요! 그런데 이게…….”
그녀의 뒷말이 무엇인지 다들 눈치챘다. 백천이 청명의 몸을 유이설에게 맡기고 제 장포를 벗었다. 그걸 청명의 어깨에 두르고 매듭을 꽉 묶었다. 암향매화검을 제 허리에 차고, 청명의 등과 무릎 뒤에 팔을 넣어 안아 올렸다. 백천이 그를 단단히 안고서 말했다.

“돌아가자.”
굳건한 말과 달리 백천의 낯도 청명과 다를 바 없었다. 그걸 알아챈 이는 없었다. 주변이 어둡기 때문일까.

동굴에 오는 데 두 시진, 화산으로 돌아가는 데는 세 시진 넘게 걸렸지만 올 때보다 더한 강행군으로 예상 시간보다 일찍 화산에 도착했다. 현종은 오검이 돌아오자 버선발로 뛰쳐나갔다.
“청명아!”

아이들의 면면을 살핀 후, 백천의 품에 안긴 청명을 확인했다. 장포에 감싸인 몸은 생기 없이 축 늘어졌다. 장포 아래로 손이 가만가만 흔들렸다. 현종은 덜덜 떨리는 손을 뻗었다. 청명의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치우고 들여다보았다. 아무것도 없다. 제일 먼저 느낀 감상이었다.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기본적인 생기가 이 얼굴에서는 느껴지지 않았다. 현종은 철렁한 심정에 청명의 가슴팍에 귀를 댔다. 온 신경을 귀에 집중하자 미약하게 박동하는 소리가 닿았다. 뛰고 있다. 그걸 깨닫자 그는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그의 뒤에 장로들도 함께였다.

“의약당으로 옮겨라.”
청명은 바로 의약당으로 옮겨졌다. 얼룩덜룩하게 눌어붙은 피를 닦고, 상처가 난 부위는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았다. 옷은 깨끗한 걸로 갈아입혔다. 따듯한 등으로 방 안을 데우고 침대에 조심스럽게 눕혔다. 당소소가 옆에 앉아서 계속 여기저기를 살폈다. 현종이 물었다.

“어떠냐?”
“일단 고비는 면했어요. 정양에 집중하기만 하면 회복될 거예요. 그런데 선천지기의 부작용을 꽤 오랫동안 앓아서, 몸이 정상으로 돌아올지는…….”

그녀가 말을 흐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현종은 뒷말을 묻는 대신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여 주었다.

“고맙다.”
그는 침중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청명을 내려다보았다. 또다시 감정이 울컥 솟구쳤다. 이 아이가 이 지경이 된 게 제 탓인 것 같아 그는 손톱이 손바닥 살을 파고들도록 주먹을 세게 쥐었다.

“나는 어떤 것도 바라지 않는다.”

현종의 말에 오검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울분을 누르며 말을 이었다.
“이 아이는 우리 때문에 잃지 말아야 할 것까지 잃었다. 건강, 명예, 위용…… 우리가 이 아이를 이 지경으로 내몰았는데 또 어디까지 밀어 넣어야 한다는 말이냐? 나는…….”

괴로움에 숨을 골랐다.

“다른 건 다 필요 없다. 그저 이 아이가, 우리가 사죄할 수 있는 기회만이라도 주었으면 한다.”
“걱정 마세요, 장문인. 청명이는 반드시 깨어날 겁니다. 다른 놈도 아니고 청명인데요.”

백천이 격려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도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제발, 청명이가 삶에 지쳐서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기를. 이대로 가 버리면 우리도 억울하잖아. 사죄할 기회는 줘야지.

꼭 깨어나야 해.
화산검협을 찾았다.

고대하던 소식이 중원을 강타했다. 구파일방을 비롯한 정파와 양민 가릴 것 없이 화산을 방문했다. 한꺼번에 들이닥칠 수는 없어서 장문인의 입으로 화산검협은 무사하다고, 의약당에서 치료 중이라는 답변을 들은 후에야 돌아갔다. 이후 화산 산문 앞에 간간이 선물이 쌓였다.
전부 화산검협에게 보내는 위로품이었다. 부르는 게 값일 무가지보 영약부터 시작해 몸에 좋은 각종 영단,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담요, 중원에서 제일 귀하고 찾기 힘들다는 보물, 신화에 나오는 영물과 쏙 빼닮은 새, 약해진 몸을 빠르게 회복하는 비결이 기록된 비급. 가지각색이었다.
양민들의 선물은 식량 위주였다. 대부분 소화가 쉬운 부드러운 음식이거나 영양식이었다. 그들은 무인보다 화산을 오르는 게 배는 힘들 텐데도 가끔씩 꾸준하게 와서 선물을 두고 갔다.

“저희는 화산검협에게 큰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이 정도는 선물이라고 하기에 한참 모자랍니다.”
사패련에 납치당했었던 양민들은 다른 이들보다 짧은 간격으로 부지런하게 방문했다. 선물을 보내는 자들의 마음은 다 같았다. 하루라도 빨리 화산검협이 깨어나길 바랐다.

청명이 잠들어 있는 침소에는 한 명씩 찾아와서 곁을 지키다 갔다.

“이 망할 놈아…….”
조걸이 울어서 붉게 달아오른 눈으로 청명의 손을 잡았다. 이 손은 늘 강하고 튼튼했는데, 제게 잡힌 손은 한없이 연약했다. 그것에 또 울음이 터졌다.

“잘 지내고 있을 줄 알았더니, 이게 뭐야…….”

내심 청명을 발견했을 당시에도 무사할 거라고 믿었다. 믿을 수밖에 없었다.
기억이 없었을 때도 장소를 가리지 않고 멀쩡한 모양새로 잘만 나타났었으니까. 이번에도 그러리라 여겼다. 그 대책 없는 믿음이 청명을 죽음의 문턱으로 내몰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약이라도 챙겨 줄걸. 몸 상태가 어떤지도 모르고.”

청명의 손을 감싼 채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미안해. 입속으로 연신 사죄의 말을 되뇌었다. 너를 잊어서 미안해. 너를 혼자 둬서 미안해. 죽게 내버려 둬서 미안해.

“나중에 네가 해 달라는 거 다 해 줄 테니까, 내 대가리 수백 번 깨도 좋으니까…… 무사히 깨어나 줘.”

꽉 다물린 조걸의 턱에 눈물이 맺혔다.
윤종은 의자를 끌어다 앉아서 고요한 시선으로 청명을 훑었다. 이제는 완전히 하얗게 세어 버린 머리카락. 그것이 아팠다. 그동안 천 자락을 뒤집어쓰고 다닌 게 이해가 됐다. 선천지기의 부작용을 가리려고. 단순히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함이라고 생각했거늘.

“지금은 아무 말 않겠다.”
그는 청명의 얼굴 위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면서 말했다.

“나중에 의식을 차리면, 그때 제대로 사과하겠다. 지금은 내 바람을 먼저 들어 줘라.”

바짝 목이 졸린 음성으로 속삭이듯 내뱉었다. 마지막 말을 하는 순간에는 평정이 무너졌다.

“……제발 일어나.”
“바보.”

유이설은 핏기 없는 안색에 대고 툭 던졌다. 그녀는 의약당에 들어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침묵하다가, 그 한마디만 짧게 뱉었다. 도통 속을 읽어 내기 어려운 눈동자에는 차마 숨기지 못하는 격랑이 일고 있었다.

그녀는 주머니를 뒤적여 종잇조각을 꺼냈다. 고마워, 라고 적힌 종이.
그가 화산에서 파문당하고 아무도 모르게 그녀와 화산의 산에서 대면했을 때 그가 건넨 쪽지였다. 이 쪽지를 줄곧 부적처럼 간직하고 다녔다.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 그를 찾으러 나서는 데 힘이 될 것 같아서. 그가 환상처럼 그녀 앞에 나타날 것 같아서.

이번에도 그는 나타났다. 최악의 의미로.
“파문당했어도 너는 내 사질. 이건 변하지 않아.”

그녀는 결심했다. 훗날 그가 깨어나면 이 쪽지를 그에게 돌려주면서 그의 한이 풀릴 만큼 사죄할 것이다. 풀리지 않는다면 그것도 좋다. 지금처럼 숨만 쉬는 시체로 있는 것보다는.

이제는 그녀가 받은 걸 그에게 돌려줄 차례다.
“이 망할 사형 놈아. 내가, 아…….”

당소소는 침대 옆에 주저앉아서 고개를 처박았다. 도무지 얼굴을 들 면목이 없었다.

‘정말 화산검협을 파문했냐는 등, 얼굴만이라도 보게 해 달라는 등. 들을 가치도 없는 질문들인데 장문인께서 고생이 많으세요.’
청명을 향해 나불댄 망발이 악몽처럼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왜 사람은 과거로 돌아가는 게 불가능하고 후회라는 감정도 그래서 생기는지 알았다. 제가 딱 그 상황이다.

“이제 보니 배신자는 사형이 아니라 우리였네요. 사형 일어나자마자 우릴 죽이겠다고 달려들면 어쩌지.”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죽으면 심장을 태워 버릴 기세로 타오르는 죄책감을 못 느끼니까. 당소소는 고개를 들었다. 이불과 얼굴이 흠뻑 젖어 있다.

“있잖아요, 사형. 나는 사형이 깨어나도 볼 면목이 없을 거예요. 어떻게 봐요. 진짜 배신자가 누군데.”

그녀는 뺨도 닦지 않고 말했다.
“그러니까 얼른 정신 차리고 일어나요. 사형 전에 제가 먼저 질식해 죽을 것 같으니까.”

그녀는 해가 질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양손은 죽 청명의 한 손을 붙들었다. 손아귀에 감싸인 손은 마르고 차가웠다.
당소소가 나가고 한 시진 후, 백천이 침소에 들어왔다. 그는 자연스럽게 의자를 가져와 앉아서 청명을 살폈다. 천천히 손을 뻗어 이마를 쓸고, 뺨과 목덜미를 훑고, 어깨를 어루만졌다. 손길은 이윽고 가슴에 닿았다. 미미하게 오르내리고 있다.

죽은 줄 알았다. 우리가 늦어서 가 버린 줄 알았다.
청명의 모습 위로 동굴에서 시신처럼 쓰러져 있는 청명이 겹쳐 보였다. 심장 박동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진심으로 죽은 줄 알았다. 미약한 박동 소리가 나를 살린 것이다. 동시에 애처로웠다.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았을 상황인데 애써 호흡을 간직해 살아 있으려고 했던 그 모습이.
내가 이 녀석이었다면 나를 잊은 중원과 동료들을 맨정신으로 보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마교의 소행이라지만 나를 마교와 한패라며 손가락질하는 비난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든 비밀을 파헤치고 모두가 잃은 기억을 돌려주려고 하겠지.

이 녀석은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 위화감을 느꼈다.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걸 모조리 놓아 버린, 매사애 초연해진 모습은 처음이어서. 기억이 없을 때 만남을 거듭하면서 쌓인 위화감을 현재 뼈저리게 깨달았다. 우리가 이 녀석을 망가트렸다. 본래 면모라고는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이.
“청명아.”

내가 네 이름을 부를 자격이 있을까.

“우리는 너에게 죄가 많다. 언제까지 무의식에 잠겨 있을 셈이냐.”

의자를 좀 더 침대 쪽으로 가까이 당겼다. 느릿하게 상체를 숙여 청명의 가슴께에 뺨을 살포시 대었다. 귓가에 심장 박동 소리가 파고들었다. 금방이라도 꺼질 듯 미약한 소리.
“거기는 너 혼자라 외롭고 쓸쓸하니 않느냐. 어서 눈을 떠 다오. 이대로 가서는 안 된다.”

백천은 눈을 감았다. 귓가를 타고 뇌리에 전해지는 박동 소리를 들으며 제 상체 아래에 있는 청명의 손을 감싸 쥐었다.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의약당 안에 두 사람의 숨소리가 얽혀 들었다.
모든 제자가 한 번씩 다녀가고 천우맹의 중진들도 현종의 허락을 구해 문병을 왔다. 임소병은 떨떠름하게 청명을 내려다보았다. 이 사람은 어떻게 된 게, 만날 때마다 새로운 모습을 보여 준다. 산에서 처음 대면했었을 때는 어디서 날아들었는지 모를 흑조 같았는데, 눈앞의 인물은 전혀 달랐다.
“이 양반은 하…….”

알 수 없는 울화가 치밀었다. 울화가 향한 대상은 임소병도 몰랐다. 화산인지, 구파일방인지, 멋모르고 험담해 댄 양민들인지, 똑같이 뭣도 몰랐던 주제에 험담을 방관한 자신인지. 갈 곳 잃은 울분이 가슴 안에 물처럼 채워졌다. 그것에 속이 꽉 막혔다.
“얼른 일어나십시오, 도장. 모두가 기다리지 않습니까.”

건드리면 부서져 버릴 것 같아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하고 말로만 재촉했다. 잘못한 게 없는데도 사죄하고 싶었다. 비난하지 않았어도, 세간의 평가에 휩쓸려 덩달아 흉을 보지 않았어도, 청명을 잊은 것 자체로 죄다. 임소병은 이를 악물었다.
“당신은 당한 걸 그냥 넘어가는 성격이 아니잖습니까. 죽더라도 우리에게 보복은 하고 가셔야죠.”

그는 기다렸다. 청명이 하루빨리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를. 일어나서 우리에게 벌을 내리기를. 어떤 형벌이어도 좋았다. 이 순간 바라는 건 딱 한 가지뿐이니.
당패와 당잔은 머리부터 박았다. 침대보다 낮은 자세에서 엎드려 절을 올렸다. 둘은 화산검협의 소문이 사실이 아님이 밝혀지자 화산보다 먼저 찾아가서 용서를 빌고 싶었다. 아니, 용서라는 말도 용납이 안 된다. 감히 화산검협에게 용서를 구할 순 없었다. 대신 둘은 간절히 바랐다.
“눈을 떠 주세요. 대답하기 힘드시면 손가락만이라도 까딱여 주세요.”
“저희가 어떻게 이대로 도장을 보냅니까. 염치가 있어야죠. 아니, 배신한 사람이 여기 와서 애걸하는 것도 염치없지만…… 나중에 한꺼번에 사죄할 테니까, 제발.”

두 사람은 하염없이 애원했다.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지만.
“청명 도장님…….”

설소백은 침대 옆에 엎어져서 훌쩍였다. 그는 남들보다 몇 배를 더 괴로워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때의 기억을 모조리 지워 버리고 싶었다. 수없이 원망했다느니, 어떻게 정파를 속일 수 있냐느니. 망발을 잘도 지껄였다. 그래 놓고 이제 와서 의심스럽다고? 웃기는 소리.
원망이란 원망은 다 해 놓고 뒤늦게 의심하면 뭐가 달라지는가. 청명이 옆에서 빠짐없이 들었는데. 그때 도장님은 내 얘기를 들으면서 어떤 심정이셨을까. 미아 같은 눈동자를 보면서 무슨 말을 하고 싶으셨을까.

아서라, 꼬맹아. 네가 머리를 굴려서 뭐 하게.

종이에 적힌 그 한마디.
그 대충 휘갈긴 듯한 한마디에 입안이 썼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어깨가 쉴 새 없이 들썩였다. 이불이 물기로 촉촉하게 젖었다. 용서받지 못할 죄 앞에서 설소백은 한없이 작고 나약했다. 그는 양손을 모았다. 제발, 청명 도장님이 무사히 정신을 차리셔서 우리를 볼 수 있기를.
“흠, 흠. 큼.”

맹소는 연신 헛기침만 반복했다. 무어라 입을 열어야 하는데,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침소에 들어와 놓고도 이불을 검지로 툭툭 두드리거나 제 머리를 긁적이는 등 애꿎은 데만 건드렸다.

“나는 고개를 숙이는 방법 같은 건 모른다네.”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역사에 회자될 만큼 대단한 일이 아니면 항상 등을 꼿꼿하게 세운다네. 그런데 지금 처음으로, 자네 앞에서 엎드려야 한다는 마음이 드는군.”

그는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허리를 직각으로 숙이며, 말을 맺었다.

“지금은 이걸로 봐주게. 나중에 자네가 하라는 것 다 들어 줄 테니까.”
남궁도위는 현실을 부정하는 눈이었다. 사람이 감정이 극에 달하면 사고 회로가 멈출 수도 있구나, 생각하며 청명을 보았다. 몇 번 눈을 깜박여도 광경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때 축제에서 마주친 정체불명의 괴인이 아니었다. 앞에 있는 건 슬픈 사람이었다. 평생의 속죄를 바쳐야 하는 사람.
말에 형태가 있었다면 청명은 치욕적인 소문이 나온 순간에 절명해 버렸을 것이다. 천하가 대수롭지 않게 내뱉은 말에 온몸이 찔려 죽었을 것이다. 거기에 자신에 비수가 포함되었다는 것도 알았다. 자신도 무의식적으로 그의 심장을 찔렀다. 그 결과가 이 꼴이다.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도장께서는 저와 남궁의 목숨을 구해 주셨지요. 그때부터 저희의 목숨은 도장께 달려 있었습니다. 훗날 저희의 목숨을 도장의 뜻대로 거둬 주십시오.”

맹세이자 바람이었다. 남궁도위는 해가 지고서도 청명의 곁을 죽 지켰다. 창밖 하늘은 그저 맑았다.
제일 늦게 침소를 방문한 이는 당군악이었다. 남들이 한 번씩 찾아뵈었을 때는 신경도 안 쓰다가, 천우맹 중진들 중에서 자신만 남자 축시가 다 돼 가는 시각에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남들은 각자 사죄의 말을 한마디씩 했을 것이다. 죄송하다, 잘못했다, 얼른 일어나라. 등등.
당군악은 자질구레한 통곡을 꺼내는 대신 곁을 지켜서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실로 새하얀 낯빛이었다. 희미한 숨소리가 아니면 주검이라는 인상이 들 정도로. 이불 밖으로 드러난 팔에 감긴 붕대가 약간 헐거웠다. 당군악은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인 새 붕대로 팔에 감긴 것을 갈아 주었다.
이어 흐트러진 옷깃을 정돈해 주고, 구겨진 이불을 반듯하게 펴서 덮어 주었다. 문득 이불 속에서 등허리를 말고 있는 하얀 족제비가 보였다. 족제비는 청명의 가슴 쪽 옷자락에 몸을 반쯤 묻은 채 자고 있었다. 여기 모인 이들 중에서 제일 오래 곁을 지키고 있었던 듯했다.
“자네는 내가 얼마나 숨을 조이고 있는지 모를 걸세.”

긴 침묵 끝에 겨우 나온 한마디였다. 그는 손으로 흰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었다. 단련된 손가락이 머리카락 사이를 가르고 지나갔다. 깨끗했다. 그래서 더 연약해 보였다.

“당가의 가주라는 지위만 아니었으면 체통 없이 오열했을 걸세.”
가주라는 지위가 그의 평정을 간신히 붙들고 있다. 덕분에 낯빛만은 누구보다 태연했지만 속은 누구보다 거친 파도가 일고 있다. 당군악은 그것을 억누르는 대신 날뛰도록 내버려 두었다. 억누르는 것조차 청명에게 간접적으로 범하는 죄다.

“여긴 너무 고독하군. 자네는 가만히 있는 걸 싫어하는데.”
당군악의 시선이 청명의 얼굴에 진득하게 머물렀다. 입보다 눈이 많은 말을 했다. 가슴에 응어리진 감정들이 기도를 타고 올라와 눈가를 적셨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그는 눈을 감지 않고 말했다.

“이런 거였군. 자네가 느꼈던 심정이. 그 깊이를 조금이나마 알겠네.”
그는 시선으로 청명의 얼굴을 덧그렸다.

“아직은 겨울이 끝나지 않았네. 공기는 변함없이 차갑지. 겨울이 다 지나면…… 자네도 깨어나겠지?”

조그맣게 벌어진 입술에서 조곤조곤한 숨이 새어 나왔다. 봄이 오면 깨어날 것이다. 긴 겨울을 버틴 매화는 화려하고 아름답게 피어나는 법이니.
어둡다. 사방이 온통 암흑이다. 존재하는 거라곤 없었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좋았다. 여기는 따듯하니까. 물속에 잠긴 것 마냥 평온했다. 이대로 평생 이곳에서 안식을 가질 수 있다면 뭐든 상관없었다. 청명은 눈을 감았다. 감각을 상실해서 정말 눈을 감았는지도 모르겠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머리를 움직이기에는 잠긴 물이 너무나 따듯했다. 전신의 힘을 빼고 주위 어둠에 맡겼다.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모르고 의식이 점점 더 아래,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한 줌 불씨 같은 의식이 완전히 꺼지기 전, 위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명…….
누구지? 호기심이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잠결에 듣는 것처럼 흐릿한 목소리가 연신 날아왔다.

━명아…… 청…….
━이 새끼야……
━소소…… 청명이 살…….
━맥…… 뛰고 있…….

청명? 내 이름인가? 의아함을 느낀 순간 더 많은 목소리들이 들렸다. 한 명이 아닌 모양이었다.
━정양에 집중…… 회복…….
━망할 놈…… 이게…….
━제발…… 일어나…….

드문드문 끊겨서 잘 들리지 않았다. 자세히 들으려고 위로 올라갔다.

━너는…… 내 사질…… 변하지…….
━망할 사형…….
━청명아……

마지막 속삭임에 정신이 움찔했다. 뭐지?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안식을 방해받은 것에 노기를 가지지 않고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정신을 그쪽으로 집중하니 듣기가 한층 선명해졌다.

━너에게 죄가 많다…… 무의식에 잠겨 있을…….
━얼른 일어나십시오…….
━사죄할 테니까…… 제발…….
━청명 도장님…….
━이걸로 봐주게…….
━도장의 뜻대로…….
━겨울이 다 지나면…… 자네도 깨어나겠지?

마지막 목소리까지 듣자 별안간 머리 한구석이 욱신거렸다. 한 줄기 번개가 뇌리를 파고드는 듯한 감각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통증은 약해지기는커녕 갈수록 강해졌다. 속삭이던 목소리들은 벌레가 귓가를 갉아먹는 느낌으로 변했다.
후회가 왔다. 괜히 들었다. 멍청한 호기심에 못 이겨 다가갔다가 봉변을 당했다. 저깟 목소리가 뭐라고 안식을 잠시 내려놓았는지. 흥미를 잃고 돌아서는데 잡음이 멈추지 않았다. 귀를 막아도 소용없었다. 평온에 금이 간 순간 잡음이 그 틈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저리 가. 날 괴롭히지 마.
저항과 별개로 의식은 천천히 수면을 향해 올라갔다. 주위 어둠이 옅어지고 머리 위로 빛이 쏟아졌다. 귓가를 갉아먹는 잡음이 사라지고 한 음성이 또렷하게 들렸다.

━청명아!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천장이었다. 사고가 잘 돌아가지 않아서 한참 동안 저것을 응시한 후에야 정신이 들었다. 눈을 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의약당 안인 듯했다. 왜 여기에 있지. 의문을 품기도 잠시, 온몸이 욱신거렸다. 수십 개의 바늘로 피부를 찌르는 통각이었다.
손가락이라도 까딱하려 했으나 전신의 근육이 쪼그라들기라도 했는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미동도 못 하고 통각이 사그라지기를 기다렸다.

툭. 가벼운 것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옆을 힐끔 보자 백천이 문간에 서서 입을 벙긋거렸다. 그의 발치에는 물에 적신 천이 떨어져 있다.
“처, 청명…….”

백천의 떨리는 눈과 청명의 공허한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백천은 냅다 달려와 청명의 곁에 바짝 붙었다.

“청명아! 괜찮으냐? 정신이 들어? 내가 누군지 알겠느냐?”

이마에 열이 있는지 짚어 보고, 맥은 잘 뛰는지 목덜미도 짚어 봤다. 체온이 정상으로 돌아왔는지도 확인했다.
“목소리는 잘 나와? 호흡은? 아니, 잠시만 기다려라. 내가 사람들을 부르마.”

백천은 자기 할 말만 하고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의약당 안까지 백천의 외침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장문인! 청명이가 깨어났습니다!”
“네? 사형 뭐라고요?”
“청명이가 깨어났다고요?”
정말이냐는 소리, 어디 확인해 보자는 소리가 복잡하게 섞여 들렸다. 곧 현종과 장로들, 오검이 의약당으로 들이닥쳤다. 현종이 절박한 얼굴로 침대에 달라붙었다.

“청명아! 깨어났느냐! 어디 불편한 곳은 없고?”

누가 보면 자식인 줄 알 정도로 부산스러운 움직임으로 청명의 이곳저곳을 살폈다.
차마 이불을 거두고 몸을 살필 수는 없어서 얼굴만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오검도 침대 여기저기에 들러붙었다. 사방에서 호들갑을 떨었다.

“청명아! 앞은 잘 보여? 귀도 멀쩡하고?”
“목마르진 않고? 조금이라도 불편한 데 있으면 말하고.”
“다들 비켜요! 내가 의원이야!”

당소소가 치고 나섰다.
그녀가 능숙하게 청명의 몸을 점검했다. 호흡, 맥박, 체온. 약간이라도 이상이 있는지 꼼꼼하게 살폈다. 오검은 물론 현종과 장로들까지 긴장하며 보는 가운데 그녀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호흡은 정상으로 돌아왔어요. 맥박도 안정적이고요.”
“그, 그럼 부작용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말이냐?”
윤종이 묻자 당소소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지켜봐야 알 거예요. 당장은 고비를 넘겨서 안심이지만 선천지기 후유증은 말처럼 쉽게 사라지는 게 아니라서요.”
“그렇구나. 그것만으로 어디야. 살았으니 되었다.”

윤종이 세상에서 제일 값진 보물을 받은 아이의 얼굴을 했다.
“청명아, 괜찮으냐? 말 좀 해 보거라.”

백천은 모두가 정신 사납게 구는 와중에도 청명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청명은 텅 빈 눈으로 백천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침묵하자 떠들썩한 분위기가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조걸이 말했다.

“호, 혹시 말을 못하게 된 거…….”
“아니.”
짤막하게 답한 청명이 느리게 상체를 일으켰다. 흰 머리카락이 사락거리며 내려왔다.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눈이 조걸을 향해 물었다.

“시간은 얼마나 흘렀어?”
“아, 그래! 시간! 야 새끼야, 네가 며칠 만에 깨어났는지 알아? 한 달이야, 한 달! 한 달 넘게 죽 자빠져 있었다고!”
조걸이 생각났다는 듯 소리를 빽 질렀다. 그의 낯은 동굴에서 청명을 막 발견했을 당시와 똑같았다. 그때 조걸은 자신이 고통을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 강제로 체험했다.

“너는 진짜, 의식을 차리고서도 우리한테…….”

말끝이 물기로 흐려졌다. 그가 소매로 눈가를 박박 문질렀다.
“우선 사형. 드세요. 오랫동안 의식을 잃고 있어서 속이 말이 아닐 텐데.”

당소소가 미리 준비한 미음을 꺼냈다. 유이설이 눈치채고 벽에 기대세워진 탁자를 가져와 청명 앞에 펼쳤다. 당소소가 탁자 위에 미음을 내려놓았다. 뿌연 김이 솟아오르는 미음에서 맛있는 냄새가 났다.
따끈따끈한 미음을 본 청명은 그제야 창자를 쥐어짜는 허기를 자각했다. 한 달이나 누워 있었다고 했으니, 배고플 만도 했다. 그는 당소소가 건네는 숟가락을 받아 들고 미음을 한입 떠먹었다. 속에 부담이 가지 않는 부드러운 식감이었다. 얌전히 오물거렸다.
“…….”
“…….”

그들은 청명이 미음을 먹는 것을 숨죽이고 지켜보았다. 어색했다. 청명은 이렇게 조용하게 먹는 녀석이 아니었다. 그릇을 들고 마시는 게 아니라 숟가락으로 떠서 먹는 게 지독하리만치 어색했다. 한동안 숟가락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잘 먹었어.”
그릇을 깨끗하게 비운 청명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들이 위화감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자 청명도 똑같이 바라봤다. 문제 있냐는 듯. 당소소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사형! 한번 일어나 보세요. 거동에 이상이 있는지 확인하려고요.”

청명은 이불을 옆으로 치우고 바닥에 맨발을 디뎠다.
윤종이 침대 아래에 챙겨 둔 청명의 신발을 꺼내 발치에 놓았고 백천이 그가 넘어질세라 어깨와 팔을 붙들어 부축해 주었다. 청명은 신발을 신고 백천의 부축을 받으며 한 발, 두 발 걸어 나갔다. 정상적인 걸음걸이. 그들은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조걸이 입을 뗐다.

“청명아, 그…….”
“청명아, 밖에 나가 보자꾸나. 사람들이 네가 무사히 깨어나기를 바라며 위로품을 잔뜩 보냈다.”

백천이 말을 끊었다. 그가 조걸에게 눈짓하자 조걸이 눈짓을 알아듣고 입을 다물었다. 백천은 청명의 어깨에 고급 가죽이 달린 옷을 둘러 주고 매듭을 단단히 묶었다. 그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연무장에 다섯 수레가 나란히 정렬되어 있다. 수레 위에는 온갖 선물들이 산더미만큼 쌓였다. 백천은 청명을 그 앞에 세우고 휘청댈까 한 손으로 어깨를 받친 채 다른 손으로 선물을 하나하나 골랐다.

“이건 무당에서 보낸 영약과 영단이고, 이건 약한 몸으로도 검을 빠르게 익힐 수 있는 비급…….”
부드러운 음성으로 차례로 선물들의 용도를 설명했다. 더미 위에 우뚝 세워진 새장을 끌어내려서 보여 주려다 새장 속의 새가 날개를 푸드덕거려서 백천이 움찔 놀랐다. 청명은 웃었다. 물에 파문이 일었다가 사라지는 것처럼 희미한 웃음이었으나 백천은 그 변화를 포착했다. 그의 안색이 밝아졌다.
“이 새는 천하에 한 마리밖에 없는 생물이다. 영물은 아니지만 영물 못지않은 지능을 지녔다고 하지. 네 애완동물로 키우면 좋을 거야.”

선물을 어느 정도 살펴본 후엔 영약과 영단을 제한 나머지를 창고에 보관했다. 그때까지 청명은 말이 없었다. 백천은 그 이유를 얼추 알았다.
누구의 눈에도 들키지 않고 숨어 지내느라 항시 기척을 죽여야 했고, 우리랑 대화할 때는 서면으로만 대답했다. 그걸 오래도록 지속한 나머지 습관으로 굳어진 것이다. 얌전히 미음을 먹은 것도 그래서겠지. 백천은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고는 사뭇 비장한 어투로 불렀다.

“청명아.”
청명이 힐끔 보았다. 그 무심한 반응에 백천은 떨리는 기색을 애써 감췄다.

“너에게 할 말이 있다. 그러잖아도 다들 모여서 기다리고 있었어.”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전각에서 한 무리가 나왔다. 당군악과 맹소, 임소병, 설소백, 남궁도위. 그들이 연무장에 질서정연하게 도열했다.
당패와 당잔도 함께였다. 화산의 제자들과 현종, 장로들도 그들과 함께 섰다. 한가운데이자 맨 앞에 선 현종이 양손을 앞으로 모르고 허리를 깊이 숙였다.

“화산의 장문인이자 천우맹의 맹주인 나 현종은 화산의 이십삼대 제자 청명을 마교의 첩자로 오해하고 화산에서 파문했다.”
또렷하고 단단한 목소리가 널리 퍼졌다.

“이뿐 아니라 마교와 내통한다는 소문이 돈다는 이유로 증거도 찾아보지 않고 세간에 침묵했으며, 세인들의 험담을 들었음에도 만류는커녕 방관했다. 죽음으로도 갚을 수 없으며 죽어서도 결코 씻지 못할 죄다.”

한 박자 쉬고 말을 이었다.
“하여…… 나 현종은, 화산의 문도들과 천우맹의 중진들은. 죗값을 받기 위해 화산의 이십삼대 제자 청명에게 죄의 무게에 걸맞는 형벌을 내려 주길 바란다.”

현종을 따라 모두가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그들의 발치에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현종이 말했다.

“청명아, 정말 미안하다.”
“죄송합니다, 도장.”
“미안하네, 화산검협.”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청명 도장.”

각기 다른 목소리들이 똑같은 사죄를 건넸다. 화산의 제자들도 무거운 마음으로 사죄했다.

“미안해, 청명아. 정말 미안해.”
“너를 잊어버려서 미안해.”
“버려서 미안해. 진심으로…….”
“우리가 진짜 심한 짓을 저질렀어. 마교가 원인이라고 해도 잘못은 잘못이야. 우리가 대역죄인이야.”
“청명아, 우리에게 벌을 줘. 남은 시간 평생을 할애해서라도 너에게 용서를 빌며 살고 싶어.”

마지막으로 말한 것은 백천이었다. 말의 음절마다 진한 감정이 묻어났다.
청명은 미동도 않고 그들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파문당하고 화산을 나왔을 때, 이들이 언젠가 사과하리란 기대는 약간이나마 했었다. 그 기대는 세상의 비난을 정통으로 맞으면서 꺾이다 못해 부서져 버렸지만, 기대한 흔적은 분명 가슴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일까, 기분이 동한 것은.
“고마워요. 사과해 줘서.”

그는 무던하게 말했다. 사과를 받는 입장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덤덤했다. 그들은 그의 이어진 말을 듣고 놀랐다.

“그런데 사과받을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애초에 접었어요. 희망이 안 보였으니까.”

몇몇이 고개를 들었다. 청명은 계속해서 말했다.
“여러분이 기억이 돌아왔든 안 돌아왔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영영 떠날 생각이었어요.”
“뭐?”
“청명아, 뭐라고?”

조걸과 윤종이 언성을 높였다. 청명은 진정하라는 듯 손을 들었다.

“여러분이 나를 잊으면서 내 이름도 함께 버려졌는데, 중원에 계속 머물 이유가 없지 않겠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중원을 떠나겠다니!”
“말했잖아요, 내 이름은 진작 버려졌다고. 구구절절한 이유는 없어요. 그것뿐이에요.”

화산의 제자들은 그제야 알아차렸다. 저 텅 빈 눈에서는 살고자 하는 의지가 보이지 않았다. 단순히 습관이 굳어져서 저렇게 된 것이 아니었다.
“하나만 묻자.”

화산의 제자들의 시선이 백천에게 몰렸다. 그는 더없이 냉담한 얼굴로 청명을 응시했다.

“떠난다는 건, 두 번 다시 화산에 돌아오지 않겠다는 뜻이냐?”
“…….”

청명은 침묵했다. 그 반응에서 대답을 읽었다. 백천은 참지 못하고 아우성을 질렀다.
“왜? 네가 뭘 잘못했는데? 평생 속죄해야 하는 쪽이 누군데 왜 네가 떠나야 해?”

대답이 없었다. 그 침묵이 무서웠다. 우리의 사죄 따위는 필요도 없다는 듯이. 받을 가치도 없다는 듯이.

“말해 봐라. 다른 이유가 있을 거 아니냐. 이유가 그것뿐이라면 용납이 안 돼.”
“이게 전부야.”
“아니, 틀렸어. 너는 세상으로부터 네 이름을 빼앗겼다고 했지. 다르게 말하면 그들에게 상처를 받았다는 말 아니냐?”
“…….”
“네가 얘기한 건 겉에 불과하다. 진짜 속마음은 이거지. 세상에게 이름뿐만 아니라 사람으로서 가지고 있는 모든 감정을 잃었다고.”

백천이 이를 갈았다.
“지칠 대로 지쳐서, 더는 세상 눈에 띄고 싶지 않다고. 이걸 말하고 싶은 거잖아. 아니냐?”

청명은 입을 다물었다. 백천은 거친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양손으로 그의 어깨를 잡고 제 쪽으로 당겼다.

“그런 식으로 너 자신을 숨겨 버리면 너에겐 뭐가 남지? 아님 우릴 향한 복수인가?”
“아니야.”
“아니긴 뭘 아니야! 우리가 기억을 되찾고 나서 널 수색하러 다니는 동안에 우리가 매일 어떤 심정이었는지 알아?”

치솟는 분노를 필사적으로 억누르고는, 한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매 순간이 고문이었다. 네가 눈치채고 일부러 우리를 피해 다니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청명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백천은 긴 숨을 토했다.

“……청명아. 너 자신을 버리지 말아 다오. 우리에게 복수할 거라면 그 방법은 틀렸어. 우리가 옳은 선택지를 알려 주마.”
“……어떤 선택지?”
“우리가 항상 네 곁을 지키며, 너에게 실시간으로 속죄할 수 있는 기회를 줘.”
지척에 있는 백천의 얼굴은 울 듯이 일그러졌다. 제삼자가 봐도 동정이 일 만한 얼굴이었으나 청명은 그럼에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제가 겪은 고통에 비하면 새발의 피. 아니, 새가 날갯짓을 하다 흘린 깃털 속에 묻은 미세한 먼지만도 못하다.
백천의 말마따나 제가 세상에게 받은 상처는 깊이를 가늠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험담이 제 얼굴을 찌르고, 쑤시고, 파헤치고, 갈기갈기 찢겼다. 남겨진 것은 처참하게 망가져서 겨우 숨만 붙어 있을 뿐인 시체다. 그래도…… 조금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알았어. 줘 볼게. 나한테 속죄할 기회.”

혼잣말에 가까운, 실낱같은 대답에 백천의 낯빛이 눈에 띄게 환해졌다. 다른 이들의 표정도 밝아졌다. 청명은 죄수에게 형벌을 내리듯 고했다.

“어디 열심히 해 봐.”

백천은 청명의 어깨를 잡은 손을 놓고 그 자리에서 엎드렸다. 다른 이들도 엎드렸다.
“내 온몸을 갈아서 너에게 속죄하겠다. 용서하려고 하지 마. 용서는 됐어. 평생 너에게 죗값을 주는 삶을 살고 싶으니까.”

연무장 저 끝까지 절을 올린 사람으로 빽빽했다. 청명은 수십이 넘는 등들을 내려다보면서 속으로 중얼댔다.
걱정 안 해도 돼. 뼈를 깎는 노력을 했어도 용서할 가능성은 머리카락 한 올만큼도 없을 테니까. 이건 너희가 자초한 일이야.

나는 죗값을 받겠다고 한 적 없었어. 내 몸에 깃든 온기와 생기를 너희가 모조리 앗아 갔으면서 이제 와 양심을 베풀어 돌려준다고 해도, 동요할 가치가 없어.
고마워. 방금 말을 듣고 내 진심이 뭔지 알았어. 그러고 보니 동룡이한테는 아직 내 대답을 들려주지 않았네. 미안하지만 더 기다려 줘. 너희 하는 거 봐서 내 기분이 어느 방향으로 틀어질지 모르거든.

너희는 깨진 조각을 붙들고 제발 고쳐지라고 애원하는 꼴이나 마찬가지야.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시기상으로만 그렇다는 것이다. 날씨는 겨울 때와 변함없이 쌀쌀했다. 눈이 녹았어도 나무에 매화는 피지 않았다. 화산은 봄이 왔음에도 홀로 겨울 속에 멈춰 있는 것 마냥 차가웠다. 그 정경은 한 사람과 면경처럼 닮았다. 꽃이 피지 않는 나무는 그저 외로웠다.
“청명아, 점심 가져왔다. 같이 먹자.”
“청명아, 내가 장기를 하나 배웠는데 볼래?”
“청명아! 그 꼴로 어딜 가려고 그래! 이리 와, 옷 입혀 줄게.”
“우리 청명이 용돈 안 받은 지 한참 됐지? 내가 현영 장로님께 받아서 챙겼어. 자.”

제자들은 시도 때도 없이 청명이에게 달라붙으려고 안달이 났다.
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의복을 정제할 때도, 식사할 때도, 시간 때울 거리가 없어서 평상에 앉아 멍 때릴 때도, 심지어 잘 때도 방까지 한 명 이상 따라왔다. 혼자 있을 틈이 없었다. 혼자서 뭘 하려고 해도 굳이 옆에서 거들거나 멀리 떨어진 물건을 손수 가져와 건네주는 등 수발을 들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청명은 귀찮게 여기면서도 거부하지 않았다. 손해 볼 게 없고, 몸 상태가 의약당에서 깨어난 날부터 기하급수적으로 나빠졌기 때문이다. 그동안 몸뚱이를 제대로 안 돌보고 사방팔방 싸돌아다녔던 것이 현재 어마어마한 여파로 쏟아졌다. 부작용을 얕본 대가였다.
제자들 눈에는 두 달이나 실종돼 있었던 애가 돌아와서는 한 달 넘게 혼절해 있었으니 위태롭게 볼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당소소의 진단으로 호흡, 맥박은 정상이 되었어도 간신히 정상에 발만 걸쳤을 뿐 언제 변이 도질지 모른다고 했다. 몸도 마르고 창백해서 사람이 아니라 유령을 연상케 했다.
더구나 생기라고는 티끌만큼도 보이지 않는 눈동자에 무기력한 목소리, 기척 없는 행동거지가 제자들의 심장을 고통스럽게 찔렀다. 우리가 청명이를 이 지경으로 망가트렸다는 사실에 죽을 듯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너에게 웃음을 돌려줄 수 있을까. 평생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을 과오였다.
그날은 백천과 둘이서 화산 뒤편에 숨겨진 심산에 갔다. 지면이 거칠고 울퉁불퉁해서 백천이 청명을 안아 들고 산을 올랐다. 괜찮다고 해도 백천은 귓등으로도 안 듣고 조심해서 바위를 뛰어넘었다. 안전을 최우선으로 한 도약이라 청명에게는 미약한 진동조차 가지 않았다.
심산의 정상에 도달하자 백천이 청명을 정중하게 내려놓았다. 마른 땅에 발을 디딘 청명은 탁 트인 풍경을 둘러보았다. 산 아래로 구름이 강처럼 흐르고, 머리 위로는 시린 햇살이 빛났다. 절로 속 시원해지는 광경이었다. 청명의 등에 대고 백천이 말했다.
“수련하기 적합한 장소지만 화산 뒤편에 꼭꼭 숨어 있어서 찾는 이가 적지. 그래도 막상 찾아와서 둘러보면 경치가 이렇게 아름답다.”

그가 자연스럽게 청명의 곁에 서서 한 손으로 받쳤다. 비교적 안전한 부근에 내려섰지만 안전하다고 청명을 한순간이라도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
청명은 아랑곳 않고 팔에 백천의 손을 단 채 저벅저벅 걸었다. 디딘 땅의 내리막길을 지나서 골짜기에 다다랐다. 폭포수 쏟아지는 소리가 경쾌했다. 청명은 흐르는 계곡물 앞에 쪼그려 앉았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옷이 땅에 닿았다. 그가 수면에 비친 제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랜만이네.”
“뭐가?”
“이 정도로 깨끗한 물. 마지막으로 느낀 깨끗한 물이 내공을 정비하려고 강에서 운기를 했었던 때였거든.”
“그렇구…… 뭐라고?”

백천의 어조가 기괴하게 꺾였다. 그가 높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강에서 뭘 해? 아니, 그것보다 물을 본 게 아니라 ‘느꼈다’고?”

청명은 수면에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이 수면에 닿기 전 번개 같은 손길이 그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가 고개를 들자 백천이 험악하게 일그러진 낯으로 말했다.

“하지 마.”
“그냥 적시기만 하는 거야.”
“그래도 하지 마.”

청명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고는 쪼그린 몸을 일으켰다. 백천이 그의 손목을 꾹 잡은 채 물었다.
“강에서 운기는 왜 했는데? 땅에서 해도 됐잖아.”
“심신을 안정시킬 요소가 필요했거든. 그게 강이야.”
“그러다 저체온증 걸렸으면 어쩔 뻔했……!”

확 언성은 높인 백천은 돌연 입을 다물었다. 울분을 삼키는 듯 심호흡을 하고는, 차분해진 투로 물었다.

“강에서 운기를 한 건 그날 딱 한 번이야?”
“응.”
“그럼 됐어.”

손목을 잡은 손의 힘이 조금 느슨해졌다. 청명은 백천에게 잡힌 제 손을 보았다. 나뭇가지처럼 마른 손이었다. 그 손에 백천의 떨림이 전해졌다. 할 말은 많지만 애써 억제하는 느낌이었다. 나무라야 할 사람은 전데 오히려 백천이 입이 닳을 지경이었다.
청명은 백천이 왜 저러는지 알아서 딱히 면박을 줄 생각이 없었다. 언성을 높이는 것도, 제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도 다 저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청명은 백천의 안내를 따라 심산을 산책했다. 백천은 언제 화냈냐는 듯 웃는 얼굴로 이끌었다.
이 나무는 오십 년 넘게 살았으며, 이 바위는 과거 선조께서 명상을 하셨다는 명당으로 알려졌고, 이 돌멩이로 물수제비를 뜨면 잘 날아간다고. 백천은 심산에 여러 번 와 본 사람처럼 유창하게 주위 경치를 설명했다. 청명이 호기심에 툭 던졌다.

“여기 구조를 잘 아네?”
“네가 잠들어 있는 동안에 조사했다. 네가 깨어나면 데려가서 구경시켜 주려고.”
“그래? 저 나무는 뭔데?”

청명은 별생각 없이 골짜기 위에 자라난 나무들 중 유난히 큰 것을 가리켰다. 백천은 물 흐르듯 대답했다.

“산 지 팔십 년 된 고목이다. 나뭇가지가 튼튼해서 위에 올라가 잠을 잘 수 있지.”
조사했다는 게 빈말은 아니었다. 재미가 들려서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백천은 질문마다 친절하고 자세하게 답해 주었다. 조사에 몇 시진을 할애한 거야. 청명은 약간 질렸다.

해가 기울 즈음 둘은 화산으로 돌아왔다. 청명은 돌아올 때도 백천의 품에 안겨서 왔다.

“앗, 청명아!”
“잘 다녀왔어?”
연무장에서 수련 중이던 제자들이 두 사람의 기척을 느끼고 우르르 몰려왔다. 곽회가 뜨거운 물에 적신 천을 가져와 청명의 얼굴을 꼼꼼히 닦아 주었다.

“얼굴이 왜 이렇게 차. 얼른 들어가서 씻자. 체온 떨어질라.”

청명은 백천에게 안긴 채 제자들의 등쌀에 밀려 안으로 들어갔다.
원래 밖에서 씻지 않나. 생각한 청명은 백매관에 준비된 것을 보고 입을 벌렸다. 사람 두 명은 거뜬히 들어갈 만한 넓은 통이 준비되어 있다. 그 안에 채워진 물에서 뿌연 김이 솟아올랐다. 어떻게 봐도 용도가 명확한 통이었다. 청명이 물었다.

“……이게 뭐야?”
“뭐긴. 씻어야지!”
“여기서?”
파악이 안 돼서 제자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뿌듯한 낯으로 답했다.

“밖의 물은 추워서 안 돼. 따듯한 물로 씻어야지.”
“그러니까, 대체 왜?”

이해가 안 가서 되물은 게 아니었다. 몸을 씻기 위해서는 물살의 세기고 온도고 뭐고 상관없는데. 굳이 물을 데울 필요가 있나?
“됐으니까 들어가라. 넌 네 건강을 제대로 자각할 필요가 있어. 약한 몸을 찬물에 담갔다간 저체온증은 물론 감각에 손상이 갈 것이다.”

백천이 말했다. 아니, 진짜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는데. 그리 답하려던 청명은 입을 뻐끔대더니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하고 작게 답했다.
제자들이 구름처럼 백매관을 빠져나가고 청명과 백천 둘만 남았다. 청명은 옷을 한 겹씩 벗었다. 백천의 손을 잡고 조심조심 통 안에 들어왔다. 일렁이는 수면에 몸을 담그자 어깨가 뻐근할 정도의 노곤함이 밀려왔다. 놀라우리만치 따듯했다. 백천이 웃었다.

“따듯하지?”
“……응.”

안에서 씻자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어이가 없었는데, 막상 통에 몸을 담그니 머릿속에 떠도는 생각이 날아가고 나른해졌다. 어깨에 힘을 빼고 몸을 편하게 늘어트렸다. 다리를 쭉 뻗어도 통 벽면에 닿지 않았다. 청명이 허공에 시선을 둔 채 물었다.

“뭐 이렇게 큰 걸 가져왔어?”
“커야 몸을 담그기가 편하지.”
“너무 큰데.”
“녀석들이 잘했군.”

낮게 웃음을 흘린 백천이 청명의 뒤로 다가와 묶은 머리를 풀어 내렸다. 긴 머리카락을 손수 사락사락 빗어 주었다. 백색 머리카락이 백천의 눈에 담겼다. 기이할 정도로 깨끗한 색이었다. 한동안 정적이 이어졌다.
물에서 나는 김과 뿌연 수증기가 허공을 채웠다. 청명은 수증기로 흐릿한 천장을 가만 올려다보았다. 노곤하다. 쌀쌀한 바람 맞으면서 밖을 돌아다녔던 몸이 물속에서 부드럽게 녹아내렸다. 머리카락을 어루만져 주는 백천의 손길 덕에 졸음이 왔다. 눈이 반쯤 감기려는 찰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청명아. 궁금한 게 있는데.”

고개를 살짝 드는 것으로 반응을 대신했다. 백천은 제가 불렀음에도 눈치를 봤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간신히 꺼냈다.

“그 동굴에서 왜 쓰러져 있었어?”

그간 어떻게든 이 질문을 꺼내려고 청명의 시중을 들면서 기회를 엿봤다.
청명이 딱히 선 넘는 질문을 하지 말라고 경고한 것도 아닌 데다 분위기도 마찬가지여서 질문을 꺼낼 기회는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백천은 이 질문을 꺼내선 안 된다고 본능적으로 느꼈다. 들춰서는 안 될 금단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묻는 순간 저를 보는 청명의 시선이 어찌 바뀔지 알 수 없었다.
“아, 그때.”

청명은 기억을 더듬듯 눈을 굴리다가 아, 소리를 냈다. 그가 고개를 나른하게 기울이며 답했다.

“별거 없어. 선천지기 부작용이 몸 안에 지속적으로 쌓이다가 그날 펑 터진 거지. 내력으로 버티려고 했는데 무리였어.”

예상외로 선선한 답변이었다. 백천은 바보처럼 입을 벌렸다.
다른 건 다 괜찮지만 파고들어서는 안 될 영역이 있다며 냉담하게 일갈할 줄 알았다. 반응이 싸늘하지 않아서 안심이지만 차라리 싸늘했으면 좋겠을 정도로 청명의 답변은 무감정했다. 백천은 고개를 푹 숙였다. 바짝 졸린 음성이 새었다.

“……거기 널 혼자 둬서 미안해. 죽게 내버려 둬서 미안해.”
예고도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이 백천의 무릎 위에 올려놓은 청명의 머리카락에 떨어졌다. 그치려고 해도 잘 안 됐다. 백천은 고장 난 것 마냥 하염없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간신히 진정시켜 두었던 죄책감이 수면 위로 솟구쳤다.

“미안해. 미안해. 널 버려서 미안해. 널 혼자 둬서…….”
미안해.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을 수십 번 되뇌었다. 봇물처럼 터지는 울분을 어찌할 수가 없어서 백천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물기가 넘실대서 흐릿한 시야에 오롯이 선명하게 보인 것은 하얀 머리카락이었다. 떨어진 눈물방울이 머리카락에 닿았다가 스며들었다. 제 울음을 감춰 주려는 듯.
백천에게서 숨죽인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는 청명의 머리카락 끄트머리를 생명줄처럼 쥐고 울음을 참았다. 청명은 예의상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백매관의 벽과 천장을 쳐다보았다. 따듯한 색이고 공기는 더 따듯했지만 제 뒤의 양반에게는 지독하게 차가울 것이다.

청명은 눈을 감았다.
날카롭게 벼린 칼날 같은 공기가 차츰 누그러졌다. 땅을 뒤덮은 눈도 녹아서 없어졌다. 청명의 옷장도 날에 맞는 의복으로 가지런히 채워졌다. 제자들이 시전에 가서 사 온 옷들이었다. 옷장 안에는 진녹색과 붉은 장포도 있었는데, 오검이 챙겨 준 듯했다. 유실된 줄 알았는데.
청명은 당군악의 서찰을 받았다. 여유가 있으면 사천에서 한 번 보자는 얘기였다. 그리고 몇 시진도 안 되어 화산 산문 앞에 당군악이 떡하니 등장했다.

“사천에서 보자면서요. 찾아가려고 채비 마쳤는데.”
“내가 뭐라고 감히 누구를 오라 가라 하겠는가. 직접 데리러 와야지.”
당군악은 보는 사람이 흐뭇할 정도로 푸근하게 웃었다. 청명은 그의 뒤를 내다보았다. 대동한 식솔들이 꽤 많았다. 대동이라기보다는 따라왔다고 해야 하나. 청명은 한숨을 쉬었다.

“좋아요. 지금 바로 출발해요.”
“저희도 같이 갑시다.”

백천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산문으로 오검이 나왔다.
현종도 있었다. 그는 당군악을 마주하고 예를 차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당가주님.”
“맹주님을 뵙습니다. 잠시 화산검협을 데리고 사천에 가려고 합니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허락이랄 게 있겠습니까. 친구가 놀러 나간다는데 잘 다녀오라고 인사해야지요.”

현종이 부드럽게 웃었다.
당군악은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백천이 청명의 곁으로 와서 도톰한 옷을 둘러 준 다음 안아 들었다. 당군악은 신기한 눈으로 일별하고는 현종에게 말했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맹주님.”
“예. 잘 다녀오너라, 청명아.”

당군악이 까마득한 아래로 뛰어내렸다. 식솔들과 오검도 뛰어내렸다.
사천은 눈 깜짝할 사이 도착했다. 청명 딴으로 이동하는 중에 졸려서 잠깐 눈을 붙였더니 어느새 사천에 도착해 있었다. 당가의 식솔들은 화산의 제자들, 정확히는 청명을 성대하게 맞이했다. 잔치에 나온 음식들에서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절로 군침이 도는 진수성찬이었다.

“화려하네요.”
“귀한 친우는 극진히 대접해야 하는 법이지. 사양 말고 들게. 자네를 위해 준비했으니.”

당군악이 웃었다. 저를 위해 준비했다는 게 겉만 번지르르한 말이 아닌지, 제 앞에 준비된 만찬은 얼핏 기름져 보여도 향이 강한 음식이 없었다. 먹을 양도 고려해서 적당했다. 청명은 숟가락을 들었다.
“그럼 사양하지 않고 맛있게 먹…….”

손에서 숟가락이 사라졌다. 옆을 보니 백천이 제 숟가락을 들고 있다. 그가 말했다.

“가만히 있어도 된다, 청명아. 우리가 먹여 주마.”
“그래! 고작 밥 먹는 데 네가 손을 움직일 필요는 없지!”
“여기 고기 먹어라, 청명아.”

조걸과 윤종이 반찬을 챙겨 줬다.
유이설은 청명이 좋아하는 반찬을 한 접시에 담아 주었고 당소소는 닭고기를 먹기 좋게 뼈를 발랐다. 청명은 본의 아니게 양손을 꼼짝도 못하게 되어 입으로 들어오는 것들을 우물거렸다. 삼키고 나면 또 들어왔다.

“이것도 먹어라. 이것도.”
“아이고, 잘 먹는다. 여기 이것도.”
“…….”
말을 할 틈이 없었다. 삼키고 입을 벌렸다 하면 음식이 들어왔고, 또 삼키면 또 들어왔다. 속이 약해서 일정량 이상의 음식을 먹으면 안 된다는 진단을 받아서 다들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최근 속이 그럭저럭 좋아지면서 먹을 수 있는 양이 늘자 다들 이때다 싶어 눈을 빛냈다.
“그래, 몸은 좀 나아졌는가?”

당군악은 분위기를 살피다 청명이 방금 먹은 동파육을 삼키자 잽싸게 물었다. 청명은 시큰둥하게 답했다.

“보시다시피요. 주변에서 혼자 내버려 두지를 못해서 잘 지내고 있었어요.”
“다행이군.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의원에게 검사를 받도록 하게.”
“네.”

고맙다는 인사도 아니고 단출한 한마디였으나 당군악은 그것만으로도 기꺼워서 기분 좋게 웃었다. 그가 한결 가벼워진 투로 물었다.

“화산에서는 뭐 하면서 지냈는가?”
“평범했어요. 건강을 회복하는 데만 집중해서 놀 거리가 별로 없었거든요.”
“당연히 사형제들이 가만두지 않았겠지?”
“네.”
정양과 화산의 제자들을 상대하는 일을 동시에 했다. 그들이 제가 제일 눈에 띄겠다고 온갖 재롱을 부리면서 영양식과 따듯한 옷으로 청명의 건강도 회복시켜 주었으니까. 심신을 안정시키는 것도 회복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럿이 모여서 정신 사납지만, 쓸모가 있으니까요.”

그 말에 오검이 웃었다.
정신 사납다는 말보다 쓸모 있다는 말이 선명하게 와닿았다. 어떻게든 청명을 웃겨 주려고 갖은 노력을 다 한 게 보상을 받은 것이다. 저 무심한 한마디에 얼굴에서 빛이 날 것 같았다. 당군악은 그들의 면면들을 차례로 관찰하고는 다시 청명에게 시선이 돌아갔다.

“무사해서 안심이네.”
그의 의식은 가끔씩 혼절한 청명이 화산에 돌아와서도 의식을 차리지 못한 때로 날아가곤 한다. 눈앞의 청명을 보고 있음에도 그의 위로 시신 같은 낯이 겹쳐 보였다. 당군악은 무서웠다. 지금은 나아졌을지라도 언젠가 또 남들 모르게 피를 뿌리며 쓰러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다시는 그 새하얀 낯빛을 보고 싶지 않았다. 봐야 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가 그 참사를 막으리라. 속으로 결심한 당군악이 말했다.

“만찬이 끝나면 따로 둘만의 시간을 내주게. 할 말도 있고 겸해서.”

그의 소원은 딱 하나뿐이었다. 저 공허한 눈동자가 본래의 빛을 되찾는 것.
만찬이 끝나고 당군악과 청명은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난 산책로를 함께 걸었다. 여기는 나뭇잎이 제법 피었다. 공기도 화산과 달리 부드러웠다. 사천은 화산보다 먼저 봄을 맞이했다. 앞서 걷던 당군악이 운을 뗐다.

“화산에서 머물고 있었을 때, 가솔들에게 많이 꾸중을 들었네.”
“……?”
“온종일 자네 곁에 붙어서 떨어질 줄을 모르니 가솔들이 그러다 몸 축난다며 타박했었지. 본인들 딴에는 걱정스러워서 넌지시 건넨 한마디겠지만, 내게는 꾸중으로 들렸네.”

훈계하는 본인들도 한 번씩 왔다 갔으면서. 과거를 회상하며 짧게 웃은 당군악은 말을 이었다.
“자네가 잠들어 있는 동안에 화음에 새 객잔이 여럿 열렸더군. 잠시 살펴봤는데 못 본 술들을 나르고 있었다네. 지금쯤이면 공사가 끝났을 테니 짬을 내어 찾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청명이 반응하건 말건 그는 말을 계속했다. 책의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축제에 사용된 음식과 술들은 양민들에게 후한 평가를 받아서 음식을 만든 숙수들을 반씩 나눠 섬서와 사천으로 고용했네. 덕분에 매일 손님이 줄기차게 들어오고 있지.”

살랑, 나뭇잎 한 장이 날아왔다.

“봄에 막 접어들었을 무렵에는 폭설이 몰아쳤었네. 계절을 거스른 것처럼 사납게.”
“…….”
“이틀을 내리 몰아친 폭설은 사흘쯤 되자마자 거짓말같이 그쳤네. 눈이 허리 높이까지 올라와서 치우는 데 세 시진이 걸렸네.”

당군악은 한때 하얀 눈으로 뒤덮였었던 땅을 훑어보았다.

“요즘은 날이 풀려서 눈 내릴 걱정은 없지만 곳곳에서 겨울용 옷을 판다네. 섬서에도 팔고 있을 걸세.”
잠시 숨을 고른 그가 청명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중소 문파들이 화산을 찾아와서 후원금을 지원했다네. 자네 치료비에 쓰라면서. 양민들도 손수 캔 재료들을 꾸준히 화산으로 보냈다네. 건강하게 먹고 빨리 나으라면서.”
“…….”
“모두가 바라고 있네. 자네가 원래대로 돌아오기를.”
나뭇잎이 서너 장 더 날아왔다. 나뭇잎이 당군악의 얼굴 위에 드리웠다. 엷게 깔린 그림자 속 눈동자가 채 씻지 못한 괴로움으로 젖어 있다. 어쩌면 화산의 제자들과는 다른 의미로 무거운 죄책감이었다.

“과오니, 사죄니, 용서니 하는 구구절절한 말은 않겠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한마디 하는 데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지 몇 초 동안 뜸을 들였다.

“자네의 굳게 닫힌 마음 앞에 우리가 다가갈 수 있게, 조금이나마 고개를 돌아봐 주길 바라네. 아주 조금이라도.”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하나 당군악은 그 거리를 감히 침범할 수조차 없었다. 침범해서는 안 되었다.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이 산란하게 흔들리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당군악의 애가 타는 목소리도.

“주제넘는 말인 걸 알고 있네. 염치가 없는 것도 아네. 죽음으로 보상해도 모자랄 판에 우리가 무슨 주제가 된다고 이런 부탁을 하겠는가. 그래도 나는…… 자네를 놓을 수가 없네.”
청명의 눈앞을 머리카락이 가리며 당군악의 얼굴도 일부 가려졌다.

“이대로 자네를 놓아 버리면 자네는 영영 사라질 게 뻔하잖은가. 나는 그것이 두렵네. 상처란 상처는 다 줘 놓고 이제 와서 붙잡는 척한다는 소리를 듣는 한이 있어도 자네를 놓을 수가 없네. 자존심은 진작에 내다 버린 지 오래네.”
하늘은 푸르고 깨끗했다. 청명은 제 마음이 저 하늘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없으니까. 당군악이 절박하게 애원해도 하늘 같은 마음에는 일말의 동요도 일지 않았다. 화산의 제자들에게 치여 지내는 내내도 마음은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자신도 그것을 알았다. 알았어도 방법 따윈 없었다.
‘떠나면 되지, 왜 여기 머물러 있어?’

마음 깊은 곳에서 누군가가 물었다. 청명은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정말 떠날 마음이 있었다면 후유증이고 나발이고 검 한 자루만 들고 떠나면 됐을 것을. 무슨 미련이 남아서 이들과 붙어 다니는 건지. 새삼 제 정신이 이 정도로 심하게 무너졌음을 상기했다.
나는, 대체 뭐가 하고 싶은 걸까. 청명은 속으로 덧없이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하늘만이 제 기분을 아는 듯 깨끗하고 구름 한 점 없었다.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어.
거리에서 여는 공연까지 구경한 후에야 청명은 당가의 처소로 돌아왔다. 당군악이 손님용 전각 중 제일 좋은 건물을 통째로 내줘서 방이 장난 아니게 넓고 화려했다. 방에서 기다리던 오검은 청명이 들어오자 잽싸게 다가왔다.

“청명아! 잘 다녀왔어?”
“가주님이랑 뭐 하고 왔어?”
조걸과 윤종이 물었다. 청명은 그들을 지나쳐 방 한가운데 마련된 탁자에 앉았다. 탁자에 당과 바구니를 내려놓으며 그것들을 하나씩 쪼갰다. 품에서 꾸물거리며 백아가 나왔다. 백아가 청명이 쪼개 준 당과 조각을 먹었다. 시큰둥하게 말했다.

“거리에서 여는 공연 구경하고 왔어. 재미있더라.”
“그래? 지금도 해?”
“아니. 이미 끝났을걸.”

조걸이 눈을 빛내며 묻자 청명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시선도 주지 않고 전병을 톡톡 쪼개서 백아에게 먹였다. 백아도 제 얼굴만 한 당과를 집어서 청명의 어깨를 타고 올라 그에게 내밀었다. 그가 순순히 받아먹고는 오검을 흘깃 쳐다보았다.
“거기 서 있지 말고 이리 와서 먹지. 가주님께서 나눠 먹으라고 주신 건데.”
“어? 어, 응! 고마워!”
“잘 먹을게, 청명아!”

챙겨 준 건 당군악인데 청명이 베풀어 줬다는 듯이 고맙다고 인사한 그들이 탁자 주위에 둥글게 둘러앉았다. 그들이 어색하게 당과를 집어서 먹었다. 청명이 툭 뱉었다.
“어차피 양이 많아서 혼자 다 못 먹어. 나눠 먹으라는 것들을 나 혼자 어떻게 처리하라는 거야.”
“그야 넌…….”

배가 불러도 다 먹을 테니까. 조걸은 그리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가 말을 삼키는 바람에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어색해진 분위기는 청명이 다음에 던진 말로 풀렸다.
“화음에 새로운 객잔이 열렸다더라. 축제에 내놓은 음식을 만든 숙수들은 화산과 사천에 반씩 고용돼서 일하고 있고.”
“어? 응! 그 숙수분들 일하고 계시는 객잔 알아. 항상 인파가 붐벼서 들어갈 틈이 없어.”
“나중에 찾아가 보는 것도 괜찮겠지.”

청명이 무심하게 꺼낸 한마디에 방 안이 얼었다.
그는 신경도 안 쓰고 있다가 애들이 말이 없자 고개를 들었다.

“……왜?”
“방금 뭐라고?”
“나중에 찾아가 보는 것도 괜찮겠지.”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답하자 조걸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다른 이들도 비슷하게 경악한 표정이었다. 청명이 제 직접적인 의사 표현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여태까지 화산의 제자들이 돌봐 주거나 무언갈 하자고 할 때는 그러려니 하는 수동적인 태도만 보였었는데, 사천에 온 지금에서야 처음으로 제 생각을 내놓은 것이다. 속에서부터 감격이 치밀었다. 조걸이 기쁨과 울음이 뒤섞인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야, 이…… 그래, 같이 가자.”
“가서 배 터지게 먹고 오자.”
“자리 꽉 찼으면 네 이름을 대서 자리 마련해 놔요.”

윤종과 당소소도 볼썽사나운 표정이었다. 유이설은 탁자 아래 주먹을 쥐었고 백천은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얼굴이었다. 그가 무어라 말하려고 입을 연 순간,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십니까?”
“당패입니다. 화산검협께 용건이 있습니다. 잠시만 시간을 내주시겠습니까?”

백천이 묻자 정중한 대답이 돌아왔다. 백천이 청명을 보았다. 청명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을 털고 문으로 걸어갔다. 문을 여니 목소리보다 더 조심스러운 낯의 당패가 서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도장.”
“용건이 뭔데?”
“자리를 마련해 둔 곳이 있습니다. 그쪽으로…….”

말끝을 흐리며 당패가 뒤의 오검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의 눈치를 알아들은 청명은 백천에게 말했다.

“갔다 올게. 기다리고 있어.”
“하지만…….”
“얘기만 하다 오는 건데. 배에 칼 맞는 일이 벌어지기야 하겠어?”
미묘한 말에 당패의 어깨가 움찔했다. 백천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당패가 얼른 말했다.

“아닙니다! 절대 그런 게 아닙니다! 그냥 잠시만, 시간을 가지고 싶을 뿐입니다.”
“알았어.”
“……예?”
“대화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어디로 갈 건데? 안내해.”

그리 말하며 청명이 방을 나섰다.
당패는 그의 대답을 곱씹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앞장서 걸어갔다. 슬쩍 뒤를 돌아보고는 백천에게 고개를 꾸벅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조걸이 당소소에게 물었다.

“괜찮을까?”
“오라버니를 뭘로 보시는 거예요. 우리처럼 청명 사형이랑 대화할 시간이 필요할 텐데.”
“기다리자꾸나.”

백천이 말했다.
“어쩌면 당가주님께 다녀왔던 것처럼 소가주와 대화를 나눈 후 무언가 바뀌어 있을지도 모르지.”

그는 기대하고 바랐다. 당패가 청명에게 어떤 형태로든 좋으니 올바른 변화를 가져다주기를.
당패는 하늘에 닿을 듯 우뚝 선 전각들 뒤편에 자리한 터로 청명을 안내했다. 터는 조그만 연못 위에 지어진 정자로, 둘은 거기에 마주 앉았다. 당패가 잔에 술을 따르며 물었다.

“한잔하시겠습니까?”
“괜찮아.”
“예.”

당패는 무안해하지 않고 당과 바구니를 청명 쪽으로 밀어주었다.
청명은 바구니로 손을 뻗어 잡히는 대로 집어 들었다. 백아에게 쪼개 주었던 전병이었다. 느리게 우물거렸다. 당패는 그가 당과를 먹는 것을 지켜보다가 조용히 물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그 질문만 들은 게 수십 번이야. 보면 알 텐데.”

청명이 새 당과를 집으며 말했다.
“보시다시피. 혼자 있으려고 해도 주변에서 가만 놔두지를 않아서. 어딜 가도 꼭 한 명 이상 따라붙는다니까.”
“그렇습니까. 다행이군요.”
“네가 직접 겪어 봐. 거머리가 따로 없어.”

당패는 옅게 웃었다. 미소 지은 입매와 달리 그의 눈은 굳어 있었다.
청명의 말의 내용은 얼핏 너스레를 떠는 것처럼 들렸으나 음성은 기력 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높낮이가 일정하고 억양이 약했다. 눈동자의 빛도 옅었다. 당패는 최대한 침착하게 서두를 열었다.

“여기 사천 사람들은 매일 청명 도장 얘기를 합니다. 도장의 활약상과 거짓된 추문이 주지요.”
당가에서 한 발짝만 나가도 사람들이 떠드는 이야기가 입에서 입을 타고 오간다. 화산검협의 위용과 그를 마교의 첩자라고 몰아넣은 정파의 무도한 행위를 규탄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들은 사천 사람이니 당가에 대해서는 쉬쉬했으나 은연중에 당가를 비난하는 눈빛도 존재했다.
당패는 그 은근한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놓고 비난해 줬으면 좋겠다. 지금도 뒤에서 당가의 흉을 보고 있을 불특정한 누군가를 상상하면 구역질이 나왔다.

“가주님께서 요새 시름시름 앓으셨습니다.”

청명은 묵묵히 당과를 먹기만 했다. 당패는 그가 듣고 있음을 알고 말을 이었다.
“화산에서 돌아오셔서도 도통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시고 상념에 잠기시는 일이 많았습니다. 겨우 업무에 집중하셨다 싶으면 추후 서류를 확인했을 때 도장의 이름으로 도배되어 있었지요.”

화산에서 돌아온 당군악은 혼자 술을 마시는 빈도가 부쩍 늘었다.
주안상을 펼치고 맞은편에 누가 있기라도 한 듯 술잔도 둘 놓았다. 당패도 지나가다 그 풍경을 몇 번 엿보았는데, 당군악의 낯빛이 진심으로 괴로워 보여서 차마 말을 걸지 못했다.

“가솔들 앞에서는 태연하셨지만 혼자 계실 때는 작게 한탄을 죽이셨지요.”
“그걸 다 엿봤다는 거네.”
정곡을 찔리자 당패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손에 든 잔을 천천히 기울였다. 잔 안의 수면에 맑은 하늘이 비쳤다. 일렁이는 하늘을 내려다보며 어렵사리 말했다.

“그리고…… 그건 저도 마찬가집니다.”
“생색이라도 내려고?”
“아닙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결코 그런 뜻이 아닙니다!”
기겁하여 소리를 질렀다. 청명은 피식 웃었다. 처음으로 마주한 표정 변화는 묘하게 비틀린 웃음이었다. 그가 손사래를 쳤다.

“농담이야. 너한테 양심이 있다면 내가 진담으로 그런 말은 못 하지. 너는 네 동생이랑 내 흉을 봤었던 걸 사과하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예, 맞습…… 예?”
고개를 끄덕이던 당패의 어조가 꺾였다. 청명은 전병을 톡톡 쪼개어 품 안의 백아에게 먹여 주었다.

“너네 당가주님 뵈러 갔었을 때 들었어. 속 시원하게 까더라.”
“그, 그게 무슨 말씀…….”
“기억 안 나? 네 입으로 말했잖아. 기억 안 나면 내가 떠올려 줄게.”

청명은 짧게 헛기침을 했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화산검협이 마지막으로 남긴 자취가 그 별호뿐이잖아. 이거라도 기억해서 증거가 돼야지.”
“아…….”

당패의 낯빛에 설마, 하는 생각이 떠오르다가 귀신을 만난 듯 하얗게 질렸다. 그의 입술이 애처롭게 떨렸다. 청명은 당과를 쪼개면서 그를 흘겨보았다.
“표정 풀어. 말했지, 농담이라고. 네가 진짜 생색내려고 했으면 그렇게 미안한 얼굴을 하지 않았겠지.”

당패는 입술을 깨물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청명은 당과에서 손을 떼고 주변 풍경을 돌아보았다. 아름다운 정경이었다. 하나 그림 같은 정경 속에는 당가 식솔들의 죄책감이 숨어 있다.
“뭐라고 할 마음은 없어. 우리 애들 유치한 재롱에 장단 맞출 마음은 더더욱 없고. 그런데, 이 한마디는 꼭 해야겠다.”

자리에서 일어난 청명이 당패를 내려다보았다. 얼음같이 차가운 눈에 당패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죄책감 좀 무겁고 미안해한다고 해도 내가 동요할 거라 착각하지 마.”
당패는 손등에 핏줄이 서도록 주먹을 쥐었다. 청명은 그를 두고 정자에서 내려왔다. 터를 나오면서 내면 깊은 곳에 숨겨 두었던 환멸이 치솟았다. 사람을 거듭하면서 싹이 트고 뿌리를 내린 감정이었다.

‘먼저 버린 게 누군데 이제 와서 사과하고 챙겨 주는 척하면 좋아할 줄 알았나.’
챙겨 주려는 것에 대해서는 지적할 생각이 없지만 반대로 계속 챙겨 주려고 해서 환멸이 솟구쳤다. 죽 기억 없는 채로 남아 있었으면 이렇게 기분이 더럽지 않았을 것을.

키이이이이…….

품에서 백아가 조그맣게 으르렁거렸다. 백아도 저와 같은 마음이었다. 청명은 그게 귀여워서 웃었다.
당가에는 사흘간 머물다가 나흘째 되는 날 떠났다. 배웅을 나온 당군악이 가져가라고 큼직한 상자를 여덟 개 챙겨 줬다. 사천에서 구하기 힘들다는 보물들을 넣었다고. 오검은 한 명당 상자를 두 개씩 들었고 백천은 청명을 안아 올렸다.

“조심히 가게나, 화산검협.”
“네. 가 볼게요.”
청명의 태도가 당가에 왔었을 때보다 미묘하게 차가워져서 좋은 변화가 오기를 바라던 오검의 심정이 또다시 곤두박질쳤다. 백천은 반사적으로 당패를 떠올렸다.

화산에 도착하자마자 오검은 당군악이 챙겨 준 상자들을 풀었다. 영약, 책, 옷가지, 화첩. 종류가 다양했다.
오검은 선물의 대부분은 창고에 보관하고 일상에 쓸 만한 것들로 청명의 방을 장식했다. 공사라도 했는지 더 넓고 섬세하게 다듬어진 방이 장식품으로 꾸미자 화사해졌다.

녹색 꽃을 심은 화분. 책으로 빽빽하게 들어찬 책장. 사계절별 의복으로 채워진 옷장. 심심풀이로 가지고 노는 장난감.
그리고 화산으로 돌아온 지 닷새째 되는 날.

청명은 화산에서 소리 없이 사라졌다.
닷샛날 묘시. 여느 때와 똑같이 청명의 아침을 준비하러 간 백천은 방에 청명이는 없고 곽회만 있자 경황을 따질 겨를도 없이 비상에 걸렸다. 즉시 자고 있는 모두를 깨우고 긴급회의가 열렸다. 발이 빠른 몇몇 제자는 천우맹 중진들에게 연통을 넣으러 출발했다.
“말해 봐라. 왜 청명이는 없고 너만 있었던 거냐?”

백천이 묻자 제자들의 시선이 곽회에게 쏠렸다. 그는 덜덜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어젯밤 자시까지 청명이 옆에서 책 읽어 주다 같이 잠들었는데요. 자고 일어나 보니까 청명이가 없어졌어요.”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기척을 눈치챘어야지. 하다못해 보초를 부르든가.”
“죄송해요.”

곽회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제자들은 그를 타박하는 것보다 청명을 찾는 게 우선이었다. 또다. 이번에도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는 상황이다. 겨우 되찾은 평화를 또 잃게 생겼다.
누구도 모르는 곳에서 싸늘한 시신이 되어 식어 가고 있을 청명을 상상하니 호흡이 가빠졌다. 이번에 못 찾으면 진짜 죽을 수 있다. 몸도 성치 않은 애가 혼자의 몸으로 밖에 나섰다가 괜한 변을 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제자들이 수군거렸다.

“내 잘못이야. 나도 같이 보초를 섰어야 했는데.”
“아니야. 한 명만으로 충분하다는 청명이 말에 끝까지 고집피워서라도 나도 같이 들어갔어야 했는데.”
“됐어. 나도…….”
“자책은 나중에 해. 청명이를 찾는 게 우선이야.”

제자들의 시선이 현종에게 모였다. 고요한 호수처럼 심유한 눈빛의 그는 묵묵히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화산의 제자들에게 명한다. 지금부로 천우맹의 문도들과 힘을 합쳐 청명이를 찾는다. 수색대 지휘의 권한은 오롯이 백천에게 일임한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백천이 예를 갖췄다. 예를 갖추면서 입 안쪽 살을 깨물었다. 떠올리기 싫은 가정이 있다. 그 가정이 수면 위로 솟아올랐다.
청명아.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에, 정말 만약에 우리 몰래 스스로 목숨을 끊으러 간 거라면 우린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 평생 죄를 씻지 못한 채 살아가라고?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벌이라면 달게 받겠지만, 나는 네가 예고도 없이 사라지는 게 두렵다.

‘제발, 제발 이번에는…….’
제발, 이번에는 우리가 염려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제자들이 수색대를 꾸려 조를 나누고, 화산에서 출발할 때까지 백천의 떨림은 멎지 않았다.
시간을 거슬러 당가에서 머문 지 사흘째 되는 날. 당군악이 장로의 부름을 받아 잠시 자리를 뜬 동안 청명은 거리에서 익숙한 어린아이를 발견했다.

‘저 아이는…….’

아이는 혼자가 아니라 오라비와 함께였다. 아이와 오라비는 서로 혈연이 얽힌 듯 닮았는데, 청명은 기억 속의 말을 떠올렸다.
아이의 오라비는 중원의 무사라고, 어머니께서 가끔 중원의 이야기를 들려주신다고 했다. 그때는 제 소문으로 떠들썩해서 그 말을 까맣게 잊어버렸는데, 이 시점에서 다시 떠올릴 줄은 몰랐다.

청명은 남매에게 다가갔다. 아이의 손에 막 산 당과를 쥐여 준 청년은 낯선 이의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누구신지……?”
“어, 도사님!”

아이가 저를 알아보고 반색했다. 소녀가 보드라운 머리를 팔랑이며 제게 달려왔다. 청명은 자연스럽게 소녀를 품에 안았다.

“그동안 잘 지냈어?”
“네! 오라버니랑 같이 시전 구경하고 있었어요. 도사님이야말로 웬일이세요? 보고 싶었어요!”
소녀가 애교를 담아 품에 파고들었다. 청명은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청년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 예! 처음 뵙겠습니다. 그런데 누구신지……?”
“청명이라고 해요. 들어 보셨죠?”
“청명…… 그럼 소문의 화산검협이시란 말씀이십니까? 귀인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청년이 격하게 허리를 숙였다. 하나로 느슨하게 내려 묶은 갈색 머리가 흘러내렸다. 청명은 품에 소녀가 있어서 마주 허리를 숙이는 대신 고개만 살짝 까딱였다.

“동생한테 얘기 들었어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느 문파의 문도시죠?”
“예, 저는 황서파의 오운이라고 합니다.”

청년이 웃었다.
“저야말로 오령이한테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오령이가 화산검협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매일 무용담을 저희 문파 전각의 높이만큼 얘기한다니까요.”

오운이란 청년은 얌전한 외모와 달리 입담이 자유로운 편이었다. 오운이 순한 갈색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말했다.
“혹 실례가 되지 않으신다면 화산검협을 저희 집으로 모셔 오고 싶습니다. 최대한 성대하게 열어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안 되고, 며칠 뒤 시간이 비어요. 그때 만나요.”
“예! 그날 낮에 화산으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아뇨. 화산 말고 화음에서 기다리라고 해 주세요. 제가 거기로 갈게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틀 뒤 화음에서…….”
“참, 정정하는데.”

청명이 말을 끊자 오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낮 말고 새벽에 만날 수 있을까요. 되도록 일찍 만나고 싶어서요.”
“화산검협의 청인데 어려울 게 있겠습니까. 청대로 하겠습니다.”

오운은 흔쾌히 수락했다. 소녀가 재잘거렸다.
“도사님, 청명 도사님이라고 불러도 돼요? 저희 집에 오시면 엄청 좋아요! 이건 비밀인데, 저희는 집이 여러 채예요.”
“그래, 기대되네. 전에 이름 안 알려 주고 가 버려서 미안해.”
“아니에요! 저도 오령이라고 편하게 불러 주세요. 빨리 내일 모레가 왔으면 좋겠어요.”

소녀가 품에 얼굴을 비볐다.
청명은 소녀의 머리를 한번 더 쓰다듬어 주고 남매와 헤어졌다. 헤어지자마자 당군악이 돌아와서 그와 함께 시전의 다른 방향을 구경하러 나섰다.

며칠 뒤 오늘 새벽. 청명은 제 옆자리에 잠든 곽회가 깨지 않게 조용히 일어나 옷장에서 옷가지를 챙기고 방을 나왔다. 검은 무복에 검은 천.
축제에서 산 옷도 있지만 이 옷이 제일 익숙하고 편했다. 그건 겉치레고, 진짜 이유는 맨얼굴을 드러내고 다니는 게 아직 어색했다. 가면은 벗고 다닐 수 있으나 머리에 뭐라도 걸쳐야 안정이 됐다. 그는 옷을 갈아입고 머리에 천을 뒤집어쓴 뒤 백매관을 나왔다. 새벽이라 바람이 찼다.
바람이 차고 나발이고 그는 어이없는 눈으로 품 안의 하얀 덩어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래, 어쩐지 안 들어오나 했다.

“넌 또 왜.”
키이이이!
“됐다니까. 저기 가서 놀아.”
키이이이이이!

저기 가서 놀라는 말에 백아가 더 격렬하게 거부했다. 떼어 내도 쫓아올 것 같아서 그는 한숨을 쉬었다.
옷깃을 여미고 산문 대신 담벼락을 넘었다. 발치로 까마득한 낭떠러지가 내려다보였다. 산의 표면도 울퉁불퉁해서 발을 디딜 틈이 거의 없었다. 선천지기 후유증으로 본래 민첩함의 절반도 못 내지만, 절반이면 많이 회복됐다. 간단하게 몸을 푼 뒤,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천 자락이 길게 나부꼈다.
작살이 내리꽂히는 듯한 속도로 추락하다 절벽 표면에 튀어나온 암석들을 차례차례 디뎠다. 팔십 번째 암석을 건너뛰자 땅이 보였다. 공중에서 한 바퀴 돌아 사뿐히 착지했다. 날개처럼 펼쳐졌던 천 자락이 사락거리며 가라앉았다. 능숙하게 기척을 죽이고 화음으로 향했다.
진작부터 와 있었던 듯 무복을 정갈하게 차려입은 사내가 넷 보였다. 그들이 청명을 알아보고 정중하게 예를 갖췄다. 청명도 반듯하게 인사했다. 그들에게 가려져서 몰랐는데 그들의 뒤에 금과 은으로 장식한 탈것이 있었다.

“타십시오.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감사해요.”
청명이 무복 자락을 한 손에 휘감아 들고 탈것에 올랐다. 내부는 제법 넓었다. 탁, 문이 닫히자마자 창밖으로 보이는 사내들이 아래에서 탈것을 들고 달리기 시작했다. 속도가 꽤 빠른데 내부는 흔들림이 거의 없었다. 승차감이 뛰어났다. 청명은 푹신한 의자에 편하게 기대었다.
도착한 곳은 사천에서 벗어난 외곽이었다. 아이네 가족이 돈을 잘 버는지 전각들이 화려하고 웅장했다. 사내들이 탈것을 들고 안으로 들어서자 미리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던 중년 부부가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화산검협을 배알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사내 중 하나가 탈것의 문을 열고 청명이 내려왔다. 구겨진 옷자락을 탁탁 편 그가 고개를 들었다. 중년 부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상에, 왜 이리 얇게 입고 오셨습니까? 봄이라 해도 아직 추운데!”
“안으로 드십시오! 따듯한 담요를 가져오너라! 어서!”

여인이 제 뒤의 시종에게 명했다.
시종이 잽싸게 어디론가 사라지다 담요를 가지고 돌아왔다. 여인이 담요를 받아 들어 청명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담요가 길어서 무릎 언저리까지 내려왔다.

“봄이어도 아직 날이 춥습니다. 드시지요. 몸부터 녹입시다.”

부부는 정중하게 청명을 안내했다. 청명은 부부를 힐끔 보았다.
오늘 처음 보는 자들인데 이상하리만치 잘 대해 준다. 사파로부터 딸아이를 구한 영웅이라서인가. 이유가 그거라면 납득이 됐다.

집 내부는 당가만큼은 아니나 상당히 넓고 정경이 괜찮았다. 오령이 집을 여러 채 보유하고 있다고 했는데, 여기가 그중 한 군데일까.

“정경이 좋죠?”
여인이 제 시선을 눈치채고 물었다. 청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멋지네요. 딸아이한테 들었어요. 집을 여러 채 보유하고 있다고.”
“들으셨군요. 네. 여기 사천 외곽을 비롯한 곤륜, 아미, 청성 쪽에도 전각을 지어서 재산을 보관하고 있답니다.”

중소 문파의 문도인 오운과 달리 엄청난 부잣집이다.
긴 복도를 지나 연회장에 도착했다. 청명은 상에 펼쳐진 음식들을 보고 경악했다. 새벽부터 숙수들을 갈아 넣은 티가 역력한 굉장한 윤기. 조각이 따로 없는 모양새. 사람을 유혹하는 맛있는 향. 상 한쪽에 앉아서 인사하는 남매까지. 청명은 저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이게 뭐예요?”
“화산검협께서 무얼 좋아하시는지 몰라 종류별로 준비해 봤습니다. 따로 원하는 음식이 있으시면 부담 갖지 마시고 말씀해 주십시오.”

여인의 남편이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부담을 안 가질 수가 없는데. 이걸 다 먹는 게 가능할까. 멍한 얼굴이 되었다.

“도사님! 이쪽으로 오세요! 여기요!”
소녀가 작은 손으로 제 옆자리를 두드렸다. 청명은 그리로 가 앉았다. 그가 앉자마자 남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소를 나누기 전에 인사부터 해야겠습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우리 오령이를 구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남편이 청명을 향해 고개를 깊이 숙였다. 청명의 눈이 동그래졌다.
“화산검협이 아니었다면 오령이는 거기에 죽 인질로 잡혀 있었을 겁니다. 이 만찬은 화산검협을 환영하기 위함도 맞지만 저희 딸을 구해 주신 은인께 돌려드리는 작은 은혜입니다. 부디 사양하지 마시고 받아 주십시오.”

남편이 정수리가 다 보이도록 고개를 숙였다. 왕에게나 보일 법한 극도의 공경.
청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역시 딸을 구해 준 은인에게 보답하는 것이라는 예상이 맞았다. 오운과 여인도 어느새 일어나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감사드립니다.”

이런 감사는 오랜만에 받아 본다.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저들은 영웅을 우러러보듯 본다.
이러면 받을 수밖에 없잖아. 부담스러운 호의를. 청명은 조그맣게 웃었다.

“……딱히 대단한 일도 아닌데요. 당연한 일을 한 것뿐이에요.”

짤막하지만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그가 젓가락을 들며 말했다. 그의 말에 분위기가 환해졌다.

“호의는 거절하면 무례가 되는 법이죠. 잘 먹겠습니다.”
만찬이 시작되었다. 연회장은 안락했고 음식은 맛있었으며 부부의 입담은 재미있었다. 오령은 면을 먹다가 돌연 말했다.

“나중에 화산의 도사님들도 한꺼번에 초대하면 좋겠어요. 청명 도사님만 부르니까 좀 죄송해지는 거 있죠.”

청명은 웃었다. 더없이 부드러운 미소였다.
“그럼 나는 빠져야겠네. 화산 사람끼리의 만남이니까.”
“네? 무슨 말씀이세요?”
“나만 초대한 거에 화산이 왜 나와. 말할 필요도 없는데.”

오령이 갸웃거리든 말든 제 할 말만 한 청명은 그저 웃었다. 이 집의 초대를 받았다는 건 화산에게 알리지 않았다. 알릴 이유가 없었다. 왜 알려야 하지?
한 번 파문은 영원한 파문이다. 자신은 이제 화산 사람이 아니니 제 개인 일을 화산에게 알릴 이유가 없었다. 그걸로 그들이 난리를 치든 발작을 하든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리고 나만 초대받은 일에 화산이 끼어들어서는 안 되지.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 오면 무례하잖아.”
말하다 보니 진정 제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대단히 굴욕적이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무너진 정신을 조금이라도 수복하려면 못할 게 없었다. 그때가 되면 이 빌어먹을 별호도 사라지겠지.

‘화산검협이 마지막으로 남긴 자취가 그 별호뿐이잖아. 이거라도 기억해서 증거가 돼야지.’
당패의 말이 세뇌처럼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긴 자취가 그 별호뿐. 그렇다면 그 별호마저 지워 버리면 될 터.

“얘기하고 싶은 건 뭐든 얘기하세요. 만찬이잖아요.”

청명은 그림자 짙은 속내와 달리 밝게 웃었다. 그 속에 얼마나 깊은 어둠이 잠들어 있는지 누구도 알지 못했다.
환히 웃으면서 그 녀석을 떠올렸다. 방금 그린 계획 못지않게 싫은 생각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계획이 성공하려면 녀석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해사하게 웃는 낯과 달리 그의 내면에서는 끈덕진 어둠이 끊임없이 넘실거렸다.
말의 내용은 단호했으나 낯빛은 화사해서 부부는 그가 진심으로 기뻐하는 줄 알고 따라 웃었다. 만찬은 언제 찬물을 끼얹었냐는 듯 분위기가 다시 밝아졌다. 오령은 조그만 머리를 움직이며 종알거렸다.

“그래서 축제 때 본 공연을 아직도 잊지 못해요. 엄청 멋졌거든요!”
“그래그래, 좋았겠네.”
다양한 이야기가 오갔다. 축제에서 본 공연. 시전에서 파는 장신구. 길을 잃은 어르신에게 방향을 일러 준 것. 오운은 음식의 풍미를 알게 하고 싶은 건지, 그냥 그에게 먹이고 싶은 건지 그릇을 계속 청명 쪽으로 밀었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시종 하나가 튀어나오기 전까지는.
“화산이 왔다고?”
“예! 그리고 천우맹의 문도들까지…… 손님이 먼저 와 계시니 돌려보낼까요?”

시종의 호들갑에 청명은 젓가락으로 회과육을 한입 집었다. 올 줄 알았다. 그 시기가 좀 늦었을 뿐. 여인이 답했다.

“아니. 그분들이 어떤 분들이신 줄 알고 돌려보낸단 말이더냐. 모셔 오너라.”
“예!”
시종이 연회장 밖으로 달려갔다. 얼마 되지 않아 한 무리의 무인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시종의 말대로 천우맹의 중진들이 다 모였다. 오검까지. 그들은 청명을 발견하자마자 잔뜩 굳었던 얼굴이 느슨하게 풀렸다. 조걸이 막 다가가려다 현종의 손짓에 멈췄다. 그가 공손하게 예를 갖췄다.
“화산의 장문인이자 천우맹의 맹주 현종이 인사 올립니다. 사전에 서찰도 없이 찾아뵈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귀하신 분께 어찌 서찰을 논합니까. 찾아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거기, 의자를 더 가져오너라. 천우맹의 문도들께서 앉으실 것이다.”

겸양을 떤 여인이 시종에게 명했다.
시종이 동료를 불러 그들이 앉을 의자를 가져왔다. 한번 더 부부에게 인사를 하고 그들은 자리에 착석했다. 청명의 양옆 자리에는 남매가 앉아 있어서 오검은 꾹 참고 청명의 맞은편에 앉았다. 탁자가 큼직하고 그 크기를 음식들이 빼곡하게 채우고 있어서 그들이 얹을 숟가락은 충분했다.
“화산검협!”

청명의 단기 실종을 알았는지 홍대광도 함께였다. 청명은 시선도 주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렸는데 현종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심유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청명을 응시했다.

“청명아.”
“네.”

운만 떼고 현종은 입속의 말을 정리하는 듯 침묵했다. 잠시 후, 그가 입을 열었다.
“무사해서 다행이구나.”

그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의외였다. 말도 없이 사라져서 걱정한 것에서 그치지 않고 벌을 내리거나 당장 끌고 화산으로 돌아갈 줄 알았다. 어느 쪽도 아니었다. 현종을 비롯한 모두가 그저 제가 무사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웃고 있었다. 홍대광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화산검협! 깨어났으면 깨어났다고 연락을 넣을 것이지! 진작 알았으면 내가 선물 바리바리 싸 들고 문병 갔을 텐데.”
“그러네요. 진작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요.”

순순한 사과가 돌아오자 홍대광은 어? 하는 소리를 냈다. 이 녀석이 이렇게 고분고분할 리가 없는데. 그가 염려를 담아 물었다.
“너 뭐 잘못 먹었냐?”
“여기 숙수들을 모욕하시는 거예요?”
“아니아니, 그게 아니고. 반응이 달라서 그렇지. 원래 안 이렇잖냐.”

홍대광은 허둥지둥 손사래를 쳤다. 청명은 그의 반응 따위 아랑곳 않고 회과육을 먹었다. 홍대광이 기이한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백천이 물었다.
“청명아, 이분들은 누구시냐?”
“여기, 황서파 오운 도장의 부모님. 만찬을 가지고 싶다고 날 부르셨어.”
“아, 그래……?”

백천이 청명의 곁에 앉은 오운을 쳐다보았다. 오운이 즉시 인사했다.

“황서파의 오운이라고 합니다! 화산검협은 제 동생을 구해 주신 은인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까.”

백천은 어색하게 답했다. 당군악, 맹소, 임소병은 청명에게 변이 생긴 줄 알고 한달음에 달려왔는데 예상했던 일이 아니자 긴 숨을 토했고 설소백, 남궁도위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남궁도위가 말했다.

“청명 도장이 동생분을 구해 주셨다고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저! 저! 제가 말할래요! 제가 말씀드리고 싶어요!”

오령이 손을 들었다. 소녀는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청명이 단신으로 사패련의 본거지에 들이닥쳐서 양민들을 빼돌리고 원래 사는 곳으로 돌려보내 주었다는 얘기. 개방이 전한 정보와 같았다.

“그래서 그때 도사님이…….”
다만 티 한 점 없이 순수한 아이고 제가 본 것을 날것 그대로 이야기해서 깔끔하게 정리된 개방의 정보와 결부터 달랐다. 청명을 향한 찬양도 과장되게 포함되었다. 화산과 천우맹의 문도들은 홀린 듯이 경청했다. 덕분에 개방의 정보에 없는 내용도 함께 들었다.
“마을에서 도사님을 뵌 게 처음인데, 왜 그때랑 지금이랑 달라지신 게 없으신…….”
“예?”
“어디서 처음 봤다고?”

오검이 반쯤 몸을 일으켰다. 오령은 순한 눈매를 깜박이더니 말했다.

“제가 지내는 마을에서 도사님을 처음 뵈었는데, 엄청 아파 보이셨어요.”

오검의 시선이 청명에게 향했다.
청명은 묵묵부답이었다. 오검이 다시 소녀를 쳐다보았다. 윤종이 물었다.

“아팠다면 구체적으로 어디가 어떻게 아팠었느냐?”
“의원 아저씨가 자주 진단을 해 주셔서 알아요. 항상 조심해 달라, 여기가 이 정도로 심각하다는 등 걱정을 많이 하셨더라고요.”

소녀가 손가락으로 턱을 톡톡 두드렸다.
“혼자 계실 때는 낯빛이 나빠 보이셨어요. 저랑 놀아 주실 때는 잘 웃으셨는데.”

그 외에도 소녀는 마을에서 지낸 저의 모습을 이것저것 얘기했다. 말라서 밥을 먹이느라 애먹은 아낙들, 아이들이 꽃으로 팔찌와 반지를 만들어 온 걸 보고 웃어 준 도사님, 간간이 멍 때리는 도사님.
멍 때리다가도 누가 다가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럽게 미소 짓는 도사님. 다시 혼자 남으면 세상과 동떨어진 것처럼 공허한 분위기의 도사님. 소녀는 이들이 모르는 청명의 면모를 하나부터 열까지 말해 주었다.

“분위기가 차가우셔서 그렇지 애들하고 얼마나 잘 놀아 주시는데요! 게다가…….”
소녀는 입을 다물었다. 장내가 이상했다. 아까까지 눈을 빛내며 경청하던 손님들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말실수를 했나? 소녀가 의아해하는 찰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곳에서의 청명이는 평온했겠구나.”

윤종이 뜻 모를 표정을 지었다. 그와 달리 조걸은 얼굴에 금이 갔다.
“왜 혼자 입 다물고 있었어?”

청명에게 직선으로 꽂히는 질문이었다. 그는 질문을 못 들은 건지 젓가락으로 면을 돌돌 말았다. 그 침묵에 조걸은 성을 냈다.

“그렇게 아팠던 걸 왜 우리한테 말 안 했어?”

놀랄 정도로 날카로운 목소리. 윤종은 웬일로 말리지 않았다. 본인도 내심 같은 마음이었다.
조걸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도 양심이 존재하니 아무리 우리가 용서가 안 돼도 네 안위까지 우리에게 말 안 할 수는 없다는 등의 소리를 지껄이지 않는다. 진정 화나는 건 저 침묵이었다. 우리에게 제 마음을 허락해 주지 않는 저 침묵의 벽이. 저 벽이 우리의 숨을 조여 온다.
“내가 왜?”

청명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가 젓가락을 조용히 내려놓고 조걸을 응시했다. 무감한 시선에 조걸의 어깨가 움찔했다.

“이미 지난 일인데 왜 말해야 해?”
“지난 일이어도 그렇지! 딱 한마디 하는 게 그 정도로 어려웠어?”
“이해를 못하겠는데. 사형들한테 알려야 할 이유가 있어?”
조걸은 말문이 막혔다. 청명은 정말로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나른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혼자 노숙 생활을 했을 때 수시로 저체온증에 걸려서 많이 앓았다, 밤에 잠이 안 와서 편히 숙면을 취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이런 것들을 말해 봤자 뭐 하게?”
“너…….”
“상관없는 일이야.”
그가 돌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가 그의 움직임에 주목하는 가운데 그가 어색한 표정을 짓는 부부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가능한 더 즐기고 싶었는데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그가 모두를 돌아보았다. 사람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심한 음성으로 말했다.
“가요. 나 데리러 왔잖아요.”

누구도 반응하지 못했다. 청명이 연회장을 나가려고 걸음을 떼자 그제야 전부 일어났다. 오검이 잽싸게 청명의 곁에 따라붙었다.

“청명아, 걷지 말고 나한테 업혀! 다리 아프게.”
“중간에 객잔 들를까? 네가 좋아하는 고기 잔뜩 사 먹자!”
“봄에 입을 옷도 새로 사자!”
현종과 천우맹의 중진들도 부부에게 인사하고 청명의 뒤를 따라나섰다. 눈 깜짝할 새 연회장에 부부와 남매만 남았다. 오령은 청명이 나간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운이 물었다.

“왜 그래?”
“울고 있었어요. 도사님.”
“응?”

오운도 청명이 나간 방향을 보았다. 울고 있었다니, 누가?
제 눈에는 시종일관 무표정이었는데. 오운은 동생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오라비와 달리 오령의 눈에는 다르게 보이는 듯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줄곧 울고 계셨어요.”

소녀는 청명이 아무리 부드러운 미소로 얼굴을 포장해도 그 내면이 처참하게 망가져 있다는 걸 알았다.
이름도 모르는 불특정한 누군가에게까지 짓밟히고 긁히고, 갈기갈기 찢겨져 너덜거리는 내면. 부서질 때까지 학대받아서 결국 본래 성격을 잃어버린 내면. 마을에서 소녀는 그가 주민들과 시간을 보내다 혼자가 되면 늘 짓는 표정을 어김없이 보았다. 그 표정의 원인은 그와 함께 나간 손님들일 터.
“이거 전에 마을에서 도사님께 한 번 말씀드렸던 건데요.”

오라비가 반응을 보이건 말건 소녀는 슬픈 눈으로 청명이 사라진 문을 바라보았다.

“대체 저 도사님이 뭘 잘못했는데요? 뭘 잘못했기에 사람들이 저분을 저토록 미워했던 거예요?”

대답은 장내에 떠도는 무거움뿐이었다.
진저리가 났다. 불면 날아갈까 건드리면 부서질까 과보호하는 그들의 태도가. 예전에는 그러려니 하고 별생각 없었는데 현재는 배려와 다정 앞에 환멸이 찼다. 요즘은 쳐 내고 싶어도 못해서 속으로만 삼키는 중이다.

‘하지만 그것도 내가 제대로 결정하지 못했을 때의 얘기지.’
웬만큼 움직여도 힘들지 않자 수련을 시작했다. 그동안 화산 제자들의 눈초리에 수련의 수 자도 못했으니 몸 상태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나아진 지금부터가 적기다. 제자들은 그의 수련이 못마땅했지만 그의 의사를 존중했다. 대신 수련이 끝나자마자 평소보다 배는 극진하게 보살폈다.
“왜 갑자기 수련을 시작한 거지?”
“냅둬. 저게 청명이잖냐. 이제야 평소로 돌아온 것 같아서 기쁘네.”

한 달이 더 지나고 드디어 화산에 매화가 피었다. 일반 매화보다 색이 붉은 듯했지만 틀림없이 매화다. 화산에 진정한 봄이 왔다는 증거다. 그리고 청명은 이날을 위해 한 가지를 준비했다.
“어디 좀 다녀오겠다고?”
“네.”

장문인의 처소에서 현종은 청명의 얘기를 듣고 놀랐다. 정확한 위치를 말하지 않고, 그것도 혼자라니.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청명은 그의 걱정을 눈치채고 말을 이었다.

“요새도 화산에만 틀어박혀 있었으니 기분 전환 겸 놀러 가려고요. 그리고…….”
사형들이 하도 안 떨어져서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해요. 혼잣말처럼 조용한 뒷말을 들은 현종은 푸슬 웃었다. 놀러 간다니 제자를 붙이고 싶었지만 혼자를 원하는 이 아이에게 그럴 수 없다. 존중해야지.

“알겠다. 대신 너무 멀리까지 가지는 말아라. 어두운 곳은 피해 다니고, 식사도 꼬박꼬박…….”
어두운 곳 피해 다녀라, 식사 꼬박꼬박 챙겨라, 영약 챙겨 줄 테니 조금이라도 몸이 안 좋으면 주저 없이 먹어라, 추위 타면 안 되니 겉옷을 여러 겹 입어라. 염려 섞인 당부가 속사포처럼 쏟아졌다. 마지막으로 들은 게 언제인지 모를 장문인의 신신당부에 청명은 귀를 슬쩍 막았다.

“걱정 마세요.”
말씀 꼭 지킬 테니 걱정 마시라는 말만 반복하고 청명은 제자들에게도 알렸다. 아니나 다를까, 격렬한 반응이 터져 나왔다.

“왜? 왜 혼자 가? 우리도 데려가!”
“앓고 있는 애가 어디서!”
“절대 안 돼!”

청명은 눈을 감았다. 약간의 정적 후, 눈을 뜬 그가 서늘하게 제자들을 응시했다.
“나를 자기들 뜻대로 강제하겠다는 거야?”

불길이 일 것처럼 격렬하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차게 식었다. 청명은 냉엄한 눈으로 제자들을 하나하나 훑었다.

“수련할 때는 내가 사형들 눈에 보였으니까 방해하지 않았지. 그런데 내가 사형들 눈에서 사라지려고 하니까 묶어 두려는 거지. 그렇지?”
“…….”
“진정으로 날 존중한다면 날 강제하려고 하지 마. 위험하다고 내 생각에 반대하면 그거야말로 날 존중하지 않는 거니까.”
“청명아.”

백천이 불렀다. 청명은 말해 보라는 듯 끄덕였다.

“우리도 너를 강제할 생각은 없다. 하나 이건 꼭 대답을 들어야겠다.”

백천은 진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네가 밖에 나가 있는 동안 화산에서 너를 기다릴 우리는, 네가 변이라도 당할까 봐 걱정할 필요가 없는 거냐?”
“없어.”

단칼에 자르는 대답. 청명은 대답만큼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그럴 일은 없어. 걱정 마. 몸 멀쩡하게 돌아올 거야.”
“…….”
“믿어. 진짜야.”
재차 말하자 백천은 구기고 있던 미간을 풀었다. 그가 청명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한 자 한 자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약속한 거다. 꼭, 멀쩡하게 살아서 돌아와 다오.”
“누가 보면 전쟁터 출전하는 줄 알겠네. 유난 떨지 말고 얌전히 기다려.”

백천은 여전히 못 믿는 눈치였으나 입을 다물었다.
청명의 반응이 이전보다는 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그 생기 있는 반응이 백천에게 신뢰를 가져다주었다. 약속했으니 저번 따위의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 잘 다녀와라.”

백천이 허락하니 제자들도 더는 항변하지 못했다. 그들도 믿기로 했다. 청명이 본인 입으로 약속했으니까.
“자, 짐 챙기자!”
“꼼꼼하게 싸야 돼!”

결정에 동의했으니 다음은 정해졌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청명이 여행 동안 필요한 물품들을 챙겼다. 돈을 두둑하게 담은 주머니. 도톰한 옷. 여벌옷. 가는 길에 먹을 간단한 식량. 짐도 짐이지만 가장 중요한 건 역시 당부였다.

“꼭 숙소를 잡아서 자야 돼!”
“이건 비상약. 이건 비상약을 다 썼을 경우의 비상약.”
“거기 여벌옷 더 가져와!”

청명은 어이없는 얼굴로 그들의 행태를 지켜보았다. 곧 피식 웃었다. 이 녀석들의 배려가 환멸 난다고 한 나 자신이 신기했다.

“자, 청명아. 여기 다 정리했다.”

백천이 커다란 보따리를 내밀었다.
이걸 나더러 가져가라고? 청명은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려는 물음을 삼키고 보따리를 받아 들었다. 뭘 잔뜩 넣었는데 의외로 가벼웠다. 여행이 목적이라 무게도 고려한 모양이었다.

“기분 전환 확실하게 하고 오너라. 청명아.”
“어디 가서 다치면 안 돼!”
“돈 아끼지 말고!”
“영약도 아끼지 마!”
산문을 나서는 청명의 등을 화산의 제자들이 밀어주었다. 진짜 전쟁터에 참전하는 분위기 같다. 청명은 작게 웃었다. 그는 언제 품에 쏙 들어왔는지 모를 백아에게 속삭였다.

“가자. 오늘은 기분이 좋은 날이야.”
키이이이이!

거짓은 아닌 듯 정말로 기분 좋은 얼굴이었다.
‘내 계획을 이루면, 진심으로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볼 수 있을 거야.’

아직은 그들에게 건네지 못하는 말을 속으로 곱씹으며 화창한 하늘을 온몸으로 맞이했다.
청명은 제자들이 짐을 꾸리고 있던 사이 새카만 천을 품속에 넣어 가지고 왔다. 화산을 완전히 벗어나자 천을 꺼내 들어 머리에 썼다. 반투명한 천이 차양처럼 등 뒤로 길게 나부꼈다. 이것보다 훨씬 좋은 장신구들이 있지만 청명은 이 칙칙하기 그지없는 천이 제일 편했다. 그는 서둘러 이동했다.
가슴팍 속의 백아가 이상하게 볼 정도로 목적지가 확실한 이동이었다. 익숙한 장소와 낯선 장소들을 지나 놈이 기거하고 있을 곳에 도착했다. 입구에 다다르자마자 주위 병사들이 창을 겨눴다.

“멈춰라! 무슨 용건이냐!”
“네놈은……!”

개중이 저를 알아보고 전투태세를 갖췄다.
청명이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그들이 창으로 입구를 막았다. 뒤에서 스릉, 검 뽑는 소리가 들리더니 서늘한 감각이 청명의 목덜미에 닿았다.

“삼 초의 여유를 주겠다. 용건을 밝혀라.”

청명은 대답 대신 입구를 뚫어져라 주시했다. 시선을 느꼈는지 안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이런, 이런. 이번에는 또 누구니.”
“련주님! 그게……!”

병사가 허둥댔다. 그 반응을 닫혀 있는 문 너머로 읽은 목소리가 물었다.

“화산검협이니?”
“…….”
“들여보내 주어라.”

병사는 이를 악물더니, 큰 망설임을 이기고 문을 열어 주었다. 청명이 들어가자 병사가 짓씹듯 내뱉었다.
“조금이라도 련주님께 해를 보이면 그 목숨으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그래.”

짧게 답한 청명은 드넓은 천장과 그 아래 옥좌에 앉은 사내를 주시했다. 백금으로 치장한 장포를 두른 사내는 둥글게 휜 눈으로 청명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준비한 선물에 보답하려고 왔나, 화산검협?”
“닥쳐. 쓸데없는 짓이었어.”
“그래도 검을 뽑지는 않는군. 내심 고마웠던 걸까.”
“진짜 고마운 게 뭔지 알고 싶은 거라면 더 지껄여 봐.”

청명이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 한결같은 태도에 장일소는 푸훗 웃음을 터트렸다. 저래서 화산검협이 좋은 것이다. 매번 다양한 반응이 나오니까.
“그래서, 이번엔 무슨 용건으로? 연막탄이 더 필요한 건가?”
“필요 없어. 원하는 건 하나다. 비급.”
“……비급?”

장일소가 의아해하자 청명이 그를 노려보았다.

“전에 네놈이 그랬지. 마교가 가지고 있었던 비급을 채집해서 연막탄을 제조했다고. 연막탄은 사라졌어도 그 비급은 남아 있을 텐데.”
“아아. 연막탄은 됐으니 가지고 있는 비급을 모조리 너에게 넘겨라?”
“맞아.”
“흐음. 내가 준 선물로는 모자랐나? 비급은 너한테 쓸모가 없을 텐데. 그리고 중요한 게 있잖니, 화산검협.”

장일소가 장포 속에 감춰진 다리를 꼬고 팔짱을 꼈다.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상냥하게 말했다.
“내가 왜 네 말에 응해야 하지? 연막탄은 선물이었지만 이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줘야 하잖니.”
“대가는 있어.”

장일소의 눈이 가늘어졌다. 떠보려고 던진 말이었는데 진짜 대가를 준비해 왔다니. 관찰하는 그에게 청명은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그걸 이해 못 한 장일소가 말이 없자 청명은 웃었다.
“나.”
“……너?”
“이해가 딸리나. 다시 말해 줘야 해?”

웃음이 짙어진 청명은 생각했다. 여기까지 오면서 한 번 더 계획을 상기했다. 정말, 진심으로 굴욕적이지만 계획이 성공하려면 놈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짚어 보면 굴욕이랄 것도 없었다. 가진 것을 전부 빼앗겼으니 자존심이라고 남아 있을까.
“비급이 필요한 일이 있어. 보관 중인 비급을 넘겨주면 네가 그토록 바라 마지않는 대가를 주지.”

장일소의 눈이 더더욱 가늘어졌다. 흥미로 역력한 눈. 청명은 입속으로 혀를 굴리고, 말했다.

“나에게 비급을 주고, 그걸 토대로 내가 계획한 일을 성공적으로 마치면…….”
섬뜩한 목소리가 알현실에 퍼져 나갔다.

“나를 죽여도 좋아.”
시종일관 흥미롭기만 하던 장일소의 얼굴에 처음으로 놀람이 번졌다. 그가 긴 손가락으로 입가를 가리고 흐음, 침음을 흘렸다. 맞물리는 시선 속에서 공기가 예민하게 조여들었다. 장일소의 물음이 침묵을 깼다.

“그 말을 믿어도 되나?”
“대답이나 해. 받을 거야, 안 받을 거야?”
“좋지. 좋은데.”
그가 손을 내저으며 서릿발 같은 눈으로 청명을 내려다보았다.

“복종하려고 찾아온 이름 없는 누군가라면 두 손 들고 환영하지. 화산검협, 네 말이라서 못 믿는 거란다. 내가 그 말을 믿어도 될까?”
“믿어. 진짜야.”
“진심이 아니라 진짜라고 하는구나. 흐음, 제안은 솔깃한데…… 이걸 어쩔까.”
혹할 만한 제안임에도 장일소는 덥석 물지 않고 고민했다. 그 눈에 흥미와 불신이 공존했다. 그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다.

“이해가 안 가는군. 선물을 받았으면 그대로 화산과 천우맹의 조아린 머리를 평생 감상할 수 있을 텐데. 왜 그걸 스스로 버리는 거지?”
“웃기는 소리.”

청명이 비웃었다.
“나는 그 무엇도 되찾지 못했어. 더 이상은 잃을 게 없는 몸이거든.”

이젠 지쳤다. 화산 제자들의 죄책감에 정신을 파는 것도, 천우맹의 사과를 일일이 받아 주는 것도, 거기에 꼼짝 못하는 나 자신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꼬여 버린 이 상황을 끊어 낼 방법은 하나뿐이다.
“내 목을 줄 테니 네가 가지고 있는 비급을 모조리 나한테 넘겨.”

쾅, 굉음이 터졌다. 사람의 그림자가 공기를 가르고 날아와 벽에 꽂혔다. 벽이 파이며 돌무더기가 우수수 떨어졌다. 소리 없이 옥좌에서 일어난 장일소가 청명의 목을 틀어쥐어 벽에 몰아세웠다. 장포가 속도에 못 이겨 펄럭였다.
“…….”

청명은 반항하지 않았다. 목을 조이는 힘이 강한데도 신음조차 내지 않고 눈앞의 장일소를 응시했다. 공중에 뜬 다리가 맥없이 흔들렸다. 장일소는 반항이 없자 눈에 이채를 띠었다. 손에 힘을 바짝 주어도 입만 살짝 벌어질 뿐 미약한 신음도 내지 않았다. 그 상태로 정적이 흘렀다.
“거짓은 아니군.”

기어코 청명의 입가에 핏줄기가 맺히자 장일소가 손을 놓았다. 바닥에 내려온 청명은 쿨럭 기침을 했다. 입술 새로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그가 고개를 들자 장일소는 화려한 장포를 펄럭이며 멀어지고 있었다.

“따라와. 이쪽이다.”
청명은 입가의 피를 대충 닦고 뒤를 따랐다. 장일소는 거침없는 걸음으로 어디론가 걸어갔다. 얄현실 뒤쪽에 뚫린 통로로 들어서자 눈부신 등을 주렁주렁 단 복도가 드러났다. 그는 복도 끝의 문을 열었다. 문 너머의 방은 서재였는데, 일자로 나란히 늘어선 책장에 책이 빽빽하게 들어찼다.
“비급은 총 세 권이다. 사람의 기억을 되돌리는 연막탄과 본질은 같아서 이해하기 쉬울 거란다.”

장일소가 첫 번째 책장으로 갔다. 위에서 여덟 번째 칸에서 책 세 권을 꺼냈다. 그것을 청명에게 건넸다. 그가 책을 받아 들고 종이를 팔락 넘겼다. 종이는 사람의 손길을 많이 탔으나 깨끗했다.
“진짜 부탁은 그 비급에 있겠지. 부담 갖지 말고 말해 보렴.”

장일소가 친절하게 물었다. 그 친절함이 무엇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아는 청명은 비급에 기록된 내용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혼자서는 오래 걸려. 연구하는 걸 도와.”
“하여간 다정하게 말해 줘도…… 좋아. 들어드려야지.”
투덜대면서도 장일소는 유쾌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해 가느다란 웃음을 흘렸다. 청명이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자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고는 따라오라는 듯 턱짓하며 서재를 나섰다. 다음으로 그가 안내한 곳은 무슨 용도로 쓰이는 방인지 알현실보다 배는 화려하게 꾸민 방이었다.
청명이 대놓고 싫다는 티를 내자 장일소가 시원스럽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검은색에 금박을 새긴 탁자 위의 물건들을 치우고 앉았다. 청명은 내키지 않아도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자, 최대한 알기 쉽게 설명해 줄 테니 집중하고 들어 주렴.”
“시작하기나 하지.”
“물론이지요.”
한번 더 웃은 그가 비급 한 권을 펼쳤다. 반지 낀 손가락으로 종이를 팔락팔락 넘기며 그가 말했다.

“간단한 이론부터 알려 주지. 여기는…….”

고요한 방 안을 나긋한 목소리가 채웠다. 화려하다 못해 정신 사납기까지 한 방과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였다. 청명은 설명을 경청하면서 생각했다.
이놈과 얼굴 맞대고 앉아 있는 이 상황이 혐오스럽도록 싫지만 이놈을 찾아온 건 현명한 선택이었다. 설명이 귀에 쏙쏙 들어왔다. 사술의 이론, 원리, 발동 방법, 부작용. 마지막으로 부작용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장일소의 목소리가 살짝 가라앉았다.
“부작용이 제일 중요해. 나는 괜찮았지만 너는 몸에 지닌 내력이 도가 계열이잖니. 마공과 최악의 상성이야.”
“그게 뭔 상관인데? 마공은 나한테 안 통해.”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 이 사술에 담긴 마공은 본질이 특이해서 대상자의 체내에 기생충처럼 깃든다.”

장일소가 제 심장을 어루만졌다.
“처음에는 사지 끝을, 두 번째는 팔과 다리를, 세 번째는 어깨와 허벅지. 마공이 전신을 끄트머리부터 야금야금 잡아먹을 거야. 종국에는 심장까지 도달해 마공에 몸이 완전히 먹혀 버릴걸.”
“…….”
“너는 극상성 내력이기에 더욱 고통스러울 거야. 무슨 뜻인지 아니?”
장일소가 제 가슴을 쥐어뜯듯 움켜쥐었다.

“마공이 몸을 먹겠답시고 난폭하게 뚫고 들어올 거야. 그걸 막기 위해 네 내력이 휘몰아치고. 양쪽에서 서로 다른 두 힘이 충돌해서 미칠 듯이 힘겨울 거란다. 자칫하다 네가 죽을 수 있어.”

청명은 침묵했다. 장일소가 흥미롭게 말했다.
“뭐, 내가 받을 건 목숨 값뿐이지만 그 값이 뜬금없이 죽어 버리면 나름 억울하거든. 이참에 묻지. 네가 얘기한 계획이란 데 비급이 어떤 쓸모가 있는 거지?”

청명은 대답 대신 침묵만 지켰다. 정적이 무거워졌다. 그의 입에서 나직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지워 버린다.”
“지운다고?”
“나를 아는 사람, 나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의 기억을 모조리. 깨끗하게.”

장일소의 표정이 무너졌다. 그는 진심으로 미친놈을 보듯 청명을 보았다. 이 녀석은 제정신이 아니다. 제정신이 아니라면 이런 생각을 할 리 없다. 왜 스스로 파국을 향해 걸어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제정신이냐?”
“너보다 훨씬 제정신이지.”
“그게 아니잖아. 어째서 기껏 원래대로 돌아온 판을 뒤집으려고 하지?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하는 판단인가?”
“알아.”

안다는 대답이 소름 끼치도록 담담했다. 장일소의 표정이 더욱 기괴해졌다. 청명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최고의 선택은 이 길밖에 없으니까. 나 자신이 용서가 안 되거든.”

장일소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이해하라고 한 말이 아니니 상관없다. 청명은 아까부터 속에서 들끓는 용암을 느꼈다. 용암은 의지와 별개로 걷잡을 수 없이 치솟아 가슴을 뜨겁게 지배했다. 일순 머리가 혼미했다.
‘용서 못 해.’

지옥에서 기어올라온 붉은 악귀가 속삭였다. 화산에서 다시 지내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어렴풋이 들린 속삭임이었다. 그때는 미약해서 몰랐는데 요즘 갈수록 속삭임이 선명하고 자주 들렸다. 사흘 전부터는 속삭임이 최면처럼 머릿속을 점령해서 편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이제는 그 악몽에서 벗어나고 싶거든. 서로 편하고 좋잖아?”

장일소에게 하는 말인지 나 자신에게 건네는 말인지 구분이 안 갔다. 확실하게 아는 한 가지, 이 감정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오직 나뿐이다. 미쳤다고 욕해도 된다. 장일소를 똑바로 응시하며,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읊조렸다.
“나에 대한 세상의 기억을 모조리 지울 거야. 한 사람도 남김없이 깨끗하게.”

장일소는 그제야 청명의 눈동자에 불길처럼 치솟는 분노를 포착했다. 생기 없이 죽은 눈임에도 타오르는 불길만은 똑똑히 보였다. 공허함 뒤에 감춰진 분노였다. 붉게 타는 눈을 보며 장일소는 한 단어를 연상했다.

악마.
청명은 비급과 장일소의 가르침을 토대로 사술을 익혔다. 마공이 전신을 갉아먹을 거라는 언질은 농담이 아니었다. 빈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고통스러웠다. 머릿속에 수백 마리의 벌레가 집을 짓는 것 같고 체내는 불로 지지는 것처럼 뜨거웠다. 아직 손끝, 발끝이 오염되지 않았는데 이 정도다.
일반 내력이라면 고통 없이 잡아먹혔을 텐데 저는 청정한 도가 내력이라 엄청난 격통이 밀려왔다. 깨끗한 내력이 더러운 마공이 침범하지 못하게 양쪽에서 힘이 충돌하는 것이다. 그 여파는 뻔했다.

키이이이이이이!

흘깃 뒤를 보자 목에 사슬이 채워진 백아가 울부짖었다.
련도들이 채운 게 아니다. 제가 채웠다. 백아라면 틀림없이 만류할 테니까. 고개를 돌리고 연습에 집중하자 백아가 더 크게 울부짖었다. 청명은 검에 일렁이는 기운을 보며 물었다.

“왜.”
키이이이! 키이이이이!
“나도 알아. 미친 짓이란 거.”
키이이이이이이이이!

아는데 왜 그러냐고 묻는 투였다.
“이게 최선이니까.”
키이이이이이!
“생각할 것도 없잖아. 이게 제일 편하지.”
키이이이이이이!
“시끄러워. 그리고 말 안 했는데.”

청명이 다시 백아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백아는 느꼈다. 제 주인은 단 한 번도 자신을 저런 눈으로 바라본 적이 없었다.

“내 계획에 너도 예외는 아니야.”
백아는 절규하는 걸 멈췄다. 청명은 다른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낯선 얼굴로 말했다.

“사술이 완성되면 네 기억도 지울 거야. 화산으로 돌아가.”
키, 키이…….

백아의 털이 경련하듯 떨렸다. 청명의 낯선 눈에 담긴, 벌건 증오를 확인하자 깨달았다. 제 주인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저건 제 주인이 아니다. 떠돌이 생활을 했을 때 외로워했지만 자신에게만은 상냥하게 대해 주었던 주인이 아니다. 천하에게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기본적인 생기를 빼앗기고 그로도 모자라 늘 주인다웠던 활력도 빼앗기고, 주인의 마음을 채우고 있는 것을 한 조각도 남김없이 앗아 갔다.
이 자리에 남은 건 새빨갛게 타오르는 분노와 벌건 증오로 몸을 움직이는 악귀뿐이다. 백아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청명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가까이 있으면 전염되니까 물러나 있어. 멋모르고 구경했다가 다치지 말고.”

눈빛은 섬뜩하리만치 냉혹한데 음성은 한없이 다정했다.
청명은 침식도 잊고 수련에 박차를 가했다. 몸은 꾸준하게 버텼으나 그만큼 격통이 몰아친다는 의미여서 두 시진에 서너 번 꼴로 검을 놓쳤다. 백아가 절규하고 난리도 아니었지만 청명은 수도 없이 검을 들었다. 연습을 거듭할수록 그는 제 안에서 무언가가 하나씩 사라져 가는 것을 느꼈다.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해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조급함이 제 검에 속도를 실어 주었고 마음은 절박해졌다. 불현듯 한 가지 사실을 알았는데, 아주 재미있는 사실이었다.

━죽어라! 배교자 놈들!
━아아아악! 살려 주세요!
━제발…… 아아악!
━마교를 무찔러라!
━천마재림 만마앙복!
미칠 듯한 격통에 잠시 정신을 놓으면 환상이 보였다. 피와 살로 점철된 전쟁터에서 사신 같은 마교들이 양민과 무인을 가리지 않고 그들을 고혼으로 태워 버리는 광경이. 단순한 꿈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환상 속 광경이 실제로 느끼는 것처럼 생생했다. 어떤 환상에서는 제가 마교의 손에 죽었다.
무의식에서 깨고 나면 어김없이 가슴에 손을 올렸다. 박동이 멀쩡한 것을 열 번 넘게 확인하고 검을 드는 날이 반복되었다. 백아의 절규도 심해지는 건 덤이었다. 어느 날은 만인방의 방도 중 하나가 직접 다가와 말을 걸었다. 어투가 조심스러웠다.

“조금은 쉬면서 해라. 화산검협.”
원수에 가까운 적이라지만 식사를 거의 매일 거르고 잠도 안 자는 모습이 내심 안쓰러웠다. 수련에만 집중하는 것도 귀신 같아서 무서웠다. 방도는 용기를 내어 화산검협에게 다가갔다. 청명은 그의 말을 못 들었는지 묵묵히 검을 휘둘렀다. 방도가 한번 더 화산검협, 하고 부르자 고개를 들었다.
“화산검협? 못 들었나?”
“…….”

청명은 대답이 없었다. 그는 멍한 눈으로 방도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화산검협? 그게 누군데?”

방도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는 제 귀를 의심했다. 제가 잘못 들은 건가? 그가 놀라는 가운데 청명은 빤히 쳐다보다가 아, 하는 얼굴을 했다.
“미안. 나 부른 거였구나. 됐어. 감각 끊기면 안 되니까 저리 가.”

청명이 손사래를 쳤다. 방도는 홀린 듯이 물러났다. 그는 다시 수련을 진행하는 화산검협을 보았다. 방금 들은 말은 착각이 아니다. 순간 마주쳤던 눈도 화산검협이 아니었다. 무지한 다른 사람의 눈이었다. 누굴 불렀는지 모른다는.
오싹한 한기가 돌았다. 방도는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언제부터인가 시간 세는 법을 잊어버렸다. 아침에 빚이 들면 일어나고, 새벽녘이 오면 쪽잠을 취했다가 태양이 뜨면 일어나 검을 잡았다. 장일소의 시비들이 챙겨 주는 식사도 매일 거르다시피 했다. 먹지 않아도 몸은 잘만 움직였다.
가끔은 나를 잊었다. 주변에서 나를 화산검협이라고 부르는데, 두세 번을 더 불린 뒤에야 나를 뜻하는 별호임을 알았다. 예고 없이 생긴 공백은 또 예고 없이 원래대로 돌아와서 기억이 들쭉날쭉하지는 않았다. 제일 중요한 일이 있어서 기억의 공백에 딱히 심각함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키이이이이이!

기어코 사슬을 부수고 달려든 백아가 청명의 품에 안겼다. 도가 내력과 마공이 서로 충돌하는 몸에 작고 보드라운 온기가 파고들었다. 청명은 검은 액체를 흘리는 눈으로 백아를 내려다보았다. 백아는 목덜미에 달라붙어서 꼼짝도 안 했다. 청명은 나직이 명했다.

“비켜.”
키이이이이!
비키라고 해도 더욱 찰싹 붙었다. 청명은 잡아서 떼어 내려고 손을 들어 올리다 멈칫했다. 피부에 마공의 표식이 새겨진 손이었다. 그는 백아를 잡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굳었다. 문득 이 상황을 예전에도 겪었던 것 같다. 그때도 지금처럼 백아가 품에 달라붙어서 저 대신 울었었는데.
그때, 내가 무슨 말을 했더라.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해 줄 수 있는 건 마공의 표식이 묻지 않은 손으로 품의 보드라운 털을 쓰다듬는 것뿐이었다.

키이이이! 키이이!

청명은 서럽게 우는 백아의 등허리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어렴풋한 옛일을 더듬으며 혼잣말하듯 속삭였다.

“괜찮야.”
실낱같은 속삭임에 백아가 더 서럽게 울었다. 청명은 가만가만 토닥여 주며 몇 번이고 읊조렸다.

“괜찮아.”

어차피 다 잊을 테니까.

“괜찮아.”

내가 너희의 죄책감을 지워 줄 테니까.

“괜찮아.”

내가 영영 사라지면 되니까. 그러니까…….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았던 고통은 한 달이 지나자 겨우 가라앉았다. 대신 오싹한 한기를 자주 느꼈다. 단순한 추위가 아니라 몸속에 한기가 퍼져 나갔다. 양쪽에서 두 힘이 오랫동안 충돌하니 고통이 다른 형태로 찾아온 모양이었다. 덕분에 따듯한 봄 날씨임에도 제게는 쌀쌀했다.
미리 수련으로 몸을 단련해 두길 잘했다. 빈약한 몸뚱아리로 연습을 시작했으면 검을 들기 전에 마공에게 잡아먹혔을 게 뻔하니까.

“꼴이 말이 아니군.”

장일소가 다가왔다. 그는 생경한 표정으로 청명을 훑었다. 한기로 창백해진 피부. 피부 곳곳에 마화처럼 새겨진 검은 문양. 검붉게 변색된 눈.
원래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거래는 후불로 확실히 했으니 연습하도록 두었지만 막상 연습의 여파를 정면으로 받은 모습을 보니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다 익혔나?”
“어.”
“그 꼴 좀 어떻게 하면 안 되겠니?”

장일소가 못마땅한 눈으로 청명을 훑었다. 청명은 피식 웃었다.
“놈들의 사술에 이런 것도 있더군.”

손가락을 튕기자 검은 연기가 뭉클거리며 올라와 전신을 휩쓸고 지나갔다. 연기가 지나가자 거짓말같이 깨끗해졌다. 문양도 사라지고 피부와 눈동자도 제 색으로 돌아왔다. 장일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말했다.

“값은 확실하게 치러야 한단다. 알지?”
“그래. 그런데 너도 알아야 할 게 있어. 너도 네 기억에서 나를 지운다. 죽이는 건 다음에 해.”

장일소는 입을 다물었다. 그가 어떤 눈으로 저를 보는지 모르고 청명은 물었다.

“검에 깃든 마공을 뿌리기만 하면 되는 건가?”
“……맞아. 너는 상성이 안 맞아서 효과가 발동되는 데 제법 걸릴 거야.”
“오래 뿌리면 돼. 그걸로 충분해.”

그만큼 몸에 부담이 가겠지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뒷말을 삼켰다. 백천의 당부가 생각났다. 멀쩡하게 살아서 돌아와 다오. 당부는 지킬 것이다. 제 모습은 겉만 봐도 멀쩡해 보이니까.

‘거짓말은 안 했어.’

겉만 멀쩡해도 약속은 지킨 것이나 다름없었다.
방으로 돌아가서 땀에 젖은 옷을 벗고 검은 무복으로 갈아입었다. 머리에 반투명한 천을 뒤집어쓰려다 말았다. 모두에게 각인시켜 줄 필요가 있었다. 또 마교의 첩자라는 오해를 사도 좋다. 이번에는 진짜로 첩자다운 일을 벌일 거니까. 그리고 오해가 뭔 상관인가. 다 잊을 텐데.
“뭐야?”
“뭐가?”

청명은 방으로 따라온 장일소를 흘깃 쳐다보았다. 장일소는 어울리지 않게 순진한 표정이었다. 그 낯짝에 검을 꽂아 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청명은 말했다.

“확실하게 해.”

“물론이지. 누구 말이라고 내가 거절하겠니. 너야말로 힘들면 바로 그만둬도 된단다.”
청명은 무시하고 계획을 점검했다. 대상은 전 중원. 저와 사패련이 천하에 흩어져 사람들의 기억을 지울 것이다. 련도들이라고 망각 효과가 바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었다. 저번 연막탄을 제조할 때 재료를 거의 다 써서 본래 효과를 보긴 어렵다고 했다. 상관없었다. 확실하게 지우기만 하면 됐다.
방을 나오자 장일소의 명을 따라 반듯하게 도열한 련도들이 보였다. 그들은 장일소의 명을 받들어 청명을 지원하러 왔다. 지원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청명은 그들을 왼쪽부터 오른쪽까지 차례로 훑었다. 서늘한 칼날이 목덜미 아래를 지나가는 시선이었다.
“출발하지.”

전쟁을 나서는 장군처럼 명했다. 청명의 안에서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내가 나로서 있을 수 있는 마지막 이성이었다.
화산은 평화로웠다. 한 사람이 빠져서 시종일관 노심초사하고 불안에 시달려야 하나 제자들은 나름 평정을 유지하고 다녔다. 무사히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받았으니 반드시 지킬 것이다. 돌아오면 조금이라도 다친 곳이 있는지 확인하고, 따듯한 물에 녹이고, 성대한 상을 차려야지.
“화, 화산검협! 화산검협!”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밖에서 산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백천이 문을 열어 주었다. 홍대광이 땀으로 범벅인 몰골로 숨을 몰아쉬고 있다. 백천이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청명이는 여기 없…….”
“화산정검! 크, 큰일이 났네! 그게, 우선 장문인을…….”
말을 채 맺기도 전에 현종이 나타났다. 홍대광은 숨을 고르면서 예를 갖췄다. 현종도 마주 예를 취하고 말했다.

“안으로 드시지요. 호흡이 급해 보이십니다.”
“감사합니다. 쿨럭!”

바로 장문인의 처소로 안내되었다. 홍대광은 현종이 따라 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숨을 들이켰다.
“말씀해 보십시오. 어떤 사건이 터졌기에 이리 급하게 뛰어오신 겁니까?”

그의 안색이 진정되자 현종이 물었다. 홍대광은 진정되고도 말을 정리하지 못해서 몇 번 숨을 고른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고 제자들이 경악했다.

“사패련이 구파일방을 휩쓸고 있습니다.”
“네?”
“뭐라고요?”

장로들마저도 놀랐다. 장내가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제자들이 앞다투어 물었다.

“사패련이 뭐요?”
“왜 구파일방을?”
“저번처럼 뭘 뿌리고 사라지는 거 아닌가요?”
“자, 잠시만. 진정하게.”

홍대광이 몸을 뒤로 빼며 양손을 휘저었다. 그는 한번 더 숨을 고르고 말했다.
“나도 아래에서 전해 준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온 참이네. 그런데 애매하다. 분명 놈들이 난리를 피우고 있긴 한데, 사상자가 한 명도 보고되지 않아서…….”

침묵이 내려앉았다. 제자들은 혼란스러움에 말을 꺼내지 못했다. 저 일에서 기시감이 느껴졌다. 예전에도 그랬었다.
예전에도 사패련도들이 공격은 안 하고 연막탄만 뿌리고 사라졌었다. 이번 일은 그 사건의 연장선일까. 혼란이 채 그치기도 잠시, 조걸이 물었다.

“그럼 청명이는? 청명이는 어디에 있는데요?”

제자들의 시선이 다시 홍대광에게 모였다. 그가 눈만 크게 뜨자 조걸이 재차 물었다.

“청명이는요!”
“이건 확실하지 않아서 말을 안 하려고 했네만.”

홍대광이 뜸을 들이며 제자들의 눈치를 살폈다. 뭘 말하려고 저리 망설이는 건지. 조걸이 답답해하려는 찰나 대답이 귀를 파고들었다.

“사패련도들 사이에서 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누군가가 사라졌다네. 워낙 순식간이어서 자세히는…….”
“하얀 머리카락이요?”
“누구라고요?”

쾅, 자리를 박찬 몇몇 제자들이 홍대광의 지척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흥분에 찬 목소리들이 홍대광에게 쏟아졌다.

“그게 정말이에요? 청명이를 봤다고요?”
“멍 때리지 말고 대답해 보세요!”
“이 녀석들아, 진정 좀 해라!”

현상이 일갈하자 조용해졌다.
홍대광이 어색하게 기침하며 말했다.

“큼, 그래서 사패련을 쫓아낼 겸 그 하얀 머리카락의 주인을 찾기 위해 화산에 정식으로 도움을 요청하러 왔습니다. 승낙해 주십시오, 장문인.”

그가 현종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현종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심유한 눈빛으로 생각에 잠겼다.
홍대광이 한번 더 현종을 부르려는데 현종이 입을 열었다. 그의 말을 듣고 홍대광은 고개를 살짝 들었다.

“사실 구파일방과 사패련이 어떤 일을 벌이든 관여할 생각이 거의 없습니다. 예, 이기적인 마음이지요.”
“장문인…….”
“하지만 거기에 제 아이가 끼어 있다면 얘기가 달라지지요.”
현종이 온화하면서 단단한 얼굴로 말했다.

“화산은 그 아이를 찾으러 가겠습니다. 개방도 함께해 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장문인!”

홍대광이 즉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현종은 제자들을 돌아보았다.

“제자들은 들어라. 우리가 할 일은 정해져 있다. 청명이를 찾으러 갈 것이다.”
“예!”
청명아.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에, 네가 구파일방과 사패련의 일에 휩쓸리기라도 했으면 화산이 정면에 나서서 섬멸할 것이다. 부디 우리의 예상이 틀렸기를 바라마.

만일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여행 가려는 청명에게 제발 가지 말라고 애원했을 것이었다. 시간은 늘 야속했다.
화산은 대단한 강행군으로 개방의 정보를 따라 하얀 머리카락이 발견되었다는 현장으로 향했다. 도착했으나 머리카락은커녕 흩날리는 녹색 수실도 보이지 않았다. 제자들이 수군거렸다.

“……이미 이동했나?”
“이 거리를 단숨에 주파했다고?”
“찾아봐. 근처에 남아 있을 거야!”
백천도 찾아보려고 주위를 살피는 차였다. 막 발을 떼기 전 정수리에 서늘한 감각이 스쳤다. 익숙한 감각이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위를 향해 휘둘렀다. 챙, 칼날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의 머리 위에서 새카만 인영이 공격한 것이다. 백천은 상대를 보고 눈이 휘둥그렇게 뜨였다.
꼬리처럼 길게 흩날리는 하얀 머리카락. 그 머리를 묶은 녹색 수실. 창백한 안색과 대비되는 흑색 무복. 손에 쥔 암향매화검. 백천의 동공이 미친 듯이 떨렸다.

“처, 청명…….”

제 입에서 나온 이름이 믿기지 않았다. 이 녀석이 여기 있을 리가 없는데?
증거라면 딱 하나. 제게 고정된 붉은 눈. 어째선지 저 눈을 보자 매화가 아니라 피가 연상됐다. 왜? 혼란을 느낄 새도 없었다. 백천은 암향매화검을 옆으로 흘리며 눈앞의 상대를 확인했다. 역시 이 녀석이었다. 반가움도 잠시, 백천은 혼란스러운 낯으로 물었다.

“청명아…… 왜?”
제자들도 상황을 눈치채고 모였다. 그들도 저자를 확인하고 경악했다. 사이로 혼란의 정적이 내려앉았다. 검은 무복에서 튀어나온 조그만 섬전이 정적을 깼다. 백아가 백천의 멱살에 달라붙어 그의 옷깃을 잡고 흔들었다.

키이이이이! 키이이!
“백아? 너도 여기엔 왜…….”
키이이이이이이!
어서 제 주인을 말려 보라는 듯 절박한 울음이었다. 자세히 보니 백아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백천은 다시 앞을 보았다. 그 순간 청명이 인사했다. 묘하게 다정한 목소리.

“안녕, 사숙.”
“…….”
“잘 지낸 것 같아서 좋네. 항상 잘 지냈지, 사숙은.”

백천은 참지 못하고 외쳤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다친 덴 없고?”

추궁하는 와중에도 걱정이 튀어나왔다. 청명은 피식 웃었다. 웃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저 당혹스러운 낯을 보고 있으면 즐거워서 광대가 아팠다. 애써 웃음을 누르고 물었다.

“사숙. 사숙은 내가 가장 많이 느끼는 기분이 뭔지 생각해 봤어?”
“뭔…….”
“수없이 생각했겠지. 자는 시간을 지새우고 눈에 핏발이 서도록 후회도 해 봤을 거야. 나에게 미안해하는 그 감정은 이해해.”

청명은 오검과 그 뒤의 제자들을 둘러보았다.

“사형들도 고마워. 항상 신경 써 줘서. 내가 됐다는데도 귓등으로도 안 듣고 보살펴 줘서.”
암향매화검에 검은 불길이 타올랐다. 검이 반원의 궤적을 그리며 솟구쳐 백천을 겨눴다.

“사숙이랑 사형들이 사과했으니까, 나는 응당 그 사과를 받아야지. 잘못을 알잖아. 그런데…… 나는 성자가 아닌가 보다.”

검이 키잉, 하고 울었다. 청명은 서글프게 웃었다.

“도무지 용서가 안 돼.”
이제는 아득하기만 한 축제에서, 백천과 맺은 약속만 생생하게 떠올랐다. 기억이 돌아오면 사숙이 제게 뭐라고 한마디를 건넬 테니, 한마디를 건네면 제 대답을 들려주겠다는 약속. 긴 시간을 지나 드디어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가.

“이제 약속을 지킬게.”
청명의 발치에서부터 가공할 기운이 폭발적으로 퍼져 나왔다. 그 여파에 제자들이 뒤로 밀렸다. 용케 꿋꿋하게 버틴 백천은 경악하는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청명에게서 솟구치는 기운이 이질적이었다. 깨끗하고 정순해서 심산유곡에 흐르는 물처럼 맑은 기운 한편에 음습한 기운이 존재했다.
서로 다른 두 기운이 공존하지 못하고 청명의 몸 주위를 맴돌았다. 그것만으로 여파가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백천은 몰랐다. 백아가 더 격렬하게 울부짖었다. 백천은 정신을 차리고 다가갔다. 그가 몇 걸음 떼기도 전 암향매화검이 백천의 머리를 겨누었다. 청명은 싸늘해서 사신 같은 얼굴로 말했다.
“화산이 기억하는 나는 오늘부로 없어. 내가 기억하는 화산도, 천우맹도 없어.”

죄를 알았음에도 사죄하지 않는 짓이야말로 진정 죽어 버리는 거니까. 백천은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알고도 외면하는 게 죽어 버리는 거라면, 처음부터 없었던 일로 하면 된다. 제게는 이 관계를 끊어 낼 힘이 있다.
“오랫동안 죄책감에 고통받게 해서 미안해. 내가 아는 사숙이랑 사형들은 보기 흉하게 질질 짜는 애들이 아닌데. 걱정 마, 내가 원래대로 돌려놓을게.”

훅 짧은 바람을 일으키며 청명의 모습이 사라졌다. 눈 깜짝할 새 백천의 코앞에 나타난 그가 암향매화검을 가로로 길게 휘둘렀다.
“나를 잊고 모두와 함께 살아가. 너희는 나를 기억할 가치조차 없어.”

과거의 약속을 확실하게, 변명의 여지없이 지켰다. 이 순간을 위해 그토록 긴 시간을 소모했다. 환희가 차올랐다.

나한테 얼마나 미안한 감정을 품고 있는지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눈빛만 봐도 알아.
내가 죗값으로 목숨을 내놓으라고 하면 바로 그 자리에서 본인 가슴에 검을 꽂아 버릴걸. 죄책감을 견디지 못해서 저승으로 도망간다는 변명을 잘도 포장하는군.

그래서 내 마음대로 하려고. 너희가 자결하느니 내가 스스로 그 목숨을 끊어 줄게. 진정으로 날 위한다면 내 명을 들어.
전쟁도 끝났잖아. 화산과 함께 느긋하게 생을 보내. 어쭙잖은 죄책감으로 정신 소비하지 말고. 이런 식이면 몸보다 마음이 먼저 늙어 버린다.

정말 미안해. 수 차례 생각해 봐도 용서가 안 돼. 내가 줄 수 있는 형벌이 이것뿐이라 미안해. 날 잊어.

제발.
백천은 잽싸게 암향매화검을 막았다. 충돌한 칼날에서 막대한 내력이 터졌다. 그 서슬에 일어난 폭풍이 일대를 휩쓸었다. 제자들의 비명이 들렸다. 백천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엄청난 힘이다. 그는 다급하게 외쳤다.

“청명아! 잠깐만! 진정해라!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말로 설명하자!”
청명은 막힌 암향매화검을 부드럽게 흘려 반동으로 한 바퀴 돌아 다시 내리쳤다. 아까보다 더한 충격이 백천의 검에 쏟아졌다. 카각. 검끼리 마찰을 일으켰다. 백천은 재차 외쳤다.

“청명아! 제발! 말로 하자고! 도대체 무슨 일인데!”

둘 사이로 유려한 검이 끼어들었다. 막으려는 의지가 다분했다.
청명은 가볍게 뒤로 물러났다. 사이로 난입한 유이설이 청명을 바라보았다. 그녀답지 않은 표정에 청명은 또 웃고 말았다. 그녀가 말했다.

“청명. 진정. 말로 해. 말로.”
“말로? 난 항상 말로 했어. 눈치 못 챘나 봐.”

말로 얘기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죽을 것 같아도 말로 풀어서 들려줬다.
몰래 산에서 만났을 때도, 양민들을 구하기 위해 우연찮게 만났을 때도, 축제에서도, 다시 화산으로 돌아왔을 때도. 난 늘 말로 설명했어.”

가슴을 쑤시는 칼날을 무시하고 평이한 태도만 보여 줬었다. 나는 나대로, 그들은 그들대로 신경 써야 할 게 있으니 내 나름의 배려라고 할 수 있다.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이성이 끊기는 순간, 더는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그래도 딱 한번이라면, 마지막으로 한번 더 그들에게 자비를 주겠다.

“사숙, 나한테 이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 딱 한마디만 해 줄게. 귀 열고 똑똑히 들어.”
“…….”
“내가,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
청명의 눈이 검붉게 물들었다. 목소리도 분노로 차츰 떨렸다.

“왜? 왜 내가 너희의 곁에 있어 줘야 해? 어째서 너희의 그 어쭙잖은 죄책감 때문에 어디 가지도 못하고 화산에 묶여 있어야 해?”

말하고 싶어도 말하지 못했던 심정이다. 이성이 불에 타 사라진 이 순간 거침없는 진심이 쏟아졌다.
마주칠 때마다 미치는 줄 알았어. 입안에 뜨거운 쇳물을 머금고 있는 기분이었지. 사숙은, 사고는, 사형들은, 너무 고통스러워서 뱉어 내고 싶은 심정이 있는데 너희의 같잖은 죄책감 앞에 가로막히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알아?”

뺨을 타고 검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청명은 웃었다.
“천우맹이랑 같이 나한테 사과했었을 때 내가 말했지. 너희가 나를 잊으면서 내 이름도 함께 버려졌는데, 더는 중원에 머물 이유가 없지 않겠어?”

교묘한 단어 선택이다. ‘천우맹’과 ‘나’로 분리해서 둘 사이를 자연스럽게 갈라 놓았다. 제자들도 그걸 눈치챘다. 청명은 백천을 쳐다보았다.
“특히 사숙. 사숙이 한 말 똑똑히 기억해. 날 수색하는 매 순간이 고문이었다고. 무슨 자격으로 고문을 운운해? 진짜 고문의 늪에 빠진 사람을 앞에 두고, 뭐? 고문?”

뒤로 갈수록 어조가 날카로워졌다.

“용서 따위 바라지 않았던 주제에 지극한 정성으로 돌보면 조금이라도 동요해 줄 것 같았어?”
암향매화검이 폭발하는 분노를 받아 사납게 타올랐다.

“오해하지 마. 사숙의 말을 기만하는 게 아니야. 사숙이랑 사형들은 나한테 용서 따위 바란 적이 없었으니까. 그게 더 문제지. 바란 적은 한순간도 없었으면서 내가 티끌만큼이라도 동하길 원했잖아. 안 그래?”
“처, 청명아…….”
“동요해야 돌아봐 주고, 돌아봐 주면 사과의 말에 좀 더 귀를 기울이고, 귀를 기울이면 죄책감을 씻을 조짐이 보이고. 편해서 좋겠다? 과정이 이토록 간단하잖아.”
“아, 아니야! 뭔 소리야! 그게 왜 간단해! 우리가 얼마나…….”
“우리가 얼마나 미안해했는데. 알아.”

청명이 조걸의 말을 가로챘다.
“그래서 뭐. 우리가 죽도록 미안해하고 있으니까 우리의 진심을 알고 함께해 달라고? 같잖은 생각 그만해. 그런 걸로 용서가 됐으면 내가 정신을 차리고 깨어났을 때 진작 용서했어.”

납으로 짓누른 것처럼 분위기가 무거웠다.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저 말이 구구절절 옳아서? 아니다.
청명이 저 지경으로 심하게 망가지게 한 자신들에게 화가 난 것이다. 백천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사과한다고 용서받을 수 있는 죄가 아니라는 건 매 순간 사무치게 알았다. 그래도 곁에서 꾸준히 죄를 씻을 기회가 주어지면 말마따나 청명도 조금은 돌아봐 줄 거라고 여겼다. 같잖은 죄책감 때문에.
분노에 찬 일갈을 듣고 백천은 깨달았다. 우리가 무얼 해도 저 분노는 사라지지 않는다. 까맣게 더러워진 손을 박박 씻어 봐도 먹은 지워지지 않는다. 돌이킬 수 없다. 생각이 거기까지 치달은 순간 백천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어쨌다는 건가?’

용서받을 수 있는 죄가 아니라는 게 어쨌다는 건가?
죄의 깊이와 별개로 그는 청명을 혼자 둘 마음이 없었다. 딱 한 번이라도 놈에게 뻗은 손을 거두는 순간, 놈은 우리 앞에서 영영 사라져 버릴 게 뻔했다. 필사적으로 손을 내밀고 외쳐야 했다. 그곳은 지옥이나 다름없다고.

“청명아. 네 말은 충분히 알았다. 다만…… 묻자.”

백천은 숨을 골랐다.
“네가 한 말의 의미는, 네 존재를 이 세상에서 영영 지워 버리겠다는 뜻이냐?”

청명은 웃기만 했다.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그 반응을 읽은 백천의 얼굴이 참을 수 없이 일그러졌다.

“왜? 네가 왜 그래야 하느냐? 왜 우리가 간신히 되찾은 기억을 빼앗아 가는데? 왜 항상 너 혼자만……!”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결정을 내릴 리 없었다. 정신이 혼미했다. 왜라는 물음만 솟구쳤다. 예전에 토했었던 절규가 떠올랐다.

‘그런 식으로 너 자신을 숨겨 버리면 너에겐 뭐가 남지?’

그 절규대로 묻고 싶었다. 정말 미친 거냐고. 너 자신을 지워 버리는 게 어떻게 우리가 받을 벌이 될 수 있냐고.
“청명아! 말했잖느냐. 너 자신을 버리지 말라고! 진정 정신이 나가 버리기라도 한 것이냐? 우리에게 벌을 줄 거라면 다른…….”
“이게 벌이야. 기억에서 나를 깔끔하게 지워 버리는 거.”

청명이 말을 끊었다.

“죄를 아는데도 사과하지 않는 거야말로 진정 죽어 버리는 거라고, 사숙이 말했잖아.”
“…….”
“그럼 죽어. 잘못을 아는 죄인에게 가장 가혹한 형벌이 그거야. 왜 몰라? 사숙이라면 죄인이 제일 가치 있게 치를 수 있는 죗값이 뭔지 알 거라고 믿었는데.”

청명이 실망이라는 듯 눈썹을 늘어트리면서 매몰차게 웃었다.

“설마 아니었어? 실망이네. 명색이 죄인인데 그렇게 무지해도 되나.”
그는 검게 타오르는 암향매화검을 한 손에 쥐며 다가왔다. 주변의 색이 살짝 검게 물들었다.

“이리 와. 효과가 발동되려면 최소 오십 번은 넘게 휘둘러야 해.”

제자들은 본능적인 두려움에 주춤 물러섰다. 짙고 음습한 기운에 사고 회로가 먹혀 버렸는지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그들의 당혹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청명은 무자비하게 일대를 휩쓸었다. 휘두르는 궤적에 살초가 잔뜩 묻어났으나 진짜 죽일 마음은 없었다. 진심을 담아 휘둘러야 효과가 더 빨리 빛을 발한다.

“청명아! 제발! 이러지 마!”
“제발, 제발…… 야 이 새끼야! 아아악!”
“오지 마! 오지 말라고!”
절규하는 소리가 감미롭다. 피처럼 흩날리는 옷자락도 시선을 빼앗겼다. 눈물을 뿌리는 눈들도, 차마 검을 뽑지 못하고 달아나기만 하는 발놀림들도.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다. 청명은 웃었다. 여태 지었던 미소 중에서 가장 밝은 미소였다. 진심으로 행복했다.

‘진짜 죽이지 못하는 게 아쉽지만.’
살초를 씀에도 죽이지 못하는 건 이성이 분노에 불타 사라진 와중에도 마지막까지 버티고 있는 양심 때문이었다. 죽이면 안 된다. 죽이면 모든 게 끝난다. 숨을 끊는 건 기억을 지우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찰나 솟았던 살의가 솟은 속도보다 빠르게 사그라졌다.

“청명아! 제발! 이러지 마!”
같은 말만 반복하는 백천의 표정이 제일 재미있었다. 절망에 차서 어쩔 줄 모르는 얼굴. 저 얼굴이 제가 꿈에 그리던 얼굴이었다. 꿈에서도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실제로 보니 꿈보다 더했다. 좋은 낯을 보여 줬으니 나도 보여 줘야지. 청명은 백천을 똑바로 바라보며 마주 웃었다.
생글생글 웃으면서 암향매화검을 백천에게 겨누었다. 제자들의 찢긴 옷자락이 엉겨 붙은 칼날이 백천의 목덜미를 향해 쇄도했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 마냥 검이 날아오는데도 더없디 느리게 보였다.

“청명…….”

비릿한 액체가 후두둑 뿌려졌다. 백천은 눈을 홉떴다. 곧 천천히 감겼다.
‘아무것도 모르고 원망했을 때가 좋았지. 그렇지?’

의식이 수면 아래에 가라앉기 전, 청명의 속삭임이 무의식에서 날아왔다. 백천은 마지막까지 그 말에 동하지 않았다. 몇 번을 말해, 새끼야. 내가 그 시간을 얼마나 혐오하는지 알면서. 너야말로 우리 심정은 모르면서 함부로 말하지 마.
전하고 싶은 말은 많았으나 의식이 흐려졌다. 필사적으로 눈을 뜨려고 했으나 이미 몸을 돌린 청명의 뒷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백천은 마지막 본능으로 손을 뻗었다. 만약, 지금 당장 청명에게 보낼 말이 있다면…….

“미안해.”

이 한마디밖에 없다. 백천은 소리 없이 울음을 터트렸다.
“널 잊어서 미안해. 혼자 둬서 미안해. 그 추운 겨울 속에, 너 혼자…….”

죄책감의 근본이자 날것 그대로의 감정을 담은 심정을 토로했다. 그는 울면서 애원했다. 제발, 불가능한 일이란 건 아는데.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때 화산을 나서는 청명을 붙잡을 것을.

“미안해. 미안해.”
종국에는 누구에게 사과하는지도 모르고 연신 같은 말을 반복했다. 시야에서 검고 하얀 물결이 사라질 때까지. 눈꺼풀이 무거워져서 천천히 눈이 감겼다. 입술이 애처롭게 떨렸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

그리고 기억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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