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이름은 황읹준. 바로 귀신이랍니다.
공포영화에 나오는 그런 무서운 애들 말고, 지극히 평범한, 그저 사람들 사이를 둥둥 떠다니는 그런 귀신이요.
그러니깐 무서워할 필요 없어요.
저는 제 자신에 대해서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저 눈을 뜨고 내려다봤을 때 보이던
교복차림과
명찰
그뿐이죠
이 동네 귀신들은 저를 아기귀신이라고 불러요. 아직 한 세기도 못 채운 핏덩이가 잘도 뽈뽈 돌아다닌다 혀를 끌끌 차죠.
전 어디든 자유롭게 갈 수 있어요
벽도 스르륵 아무 노력 없이 통과할 수도 있고
저 높은 빌딩 꼭대기까지 엘리베이터 없이 날아올라갈 수도 있죠
전 다른 영혼들 외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아요
바로 눈앞에서 춤을 춰도
죽는시늉을 해도
사람들은 아무것도 못 본 체 저를 통과해서 지나가요
이런 생활을 한지 얼마나 지났을까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 애를 좋아한 날들의 숫자는 정확히 기억해요
564일
전 그 애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가요
집은 물론이고
걔가 다니는 학교
강의실
단골 식당
심지어 목욕탕ㄷ-
아 이건 비밀인데
어딜 가도 한 발짝 뒤엔 제가 졸졸졸.
스토커 아니냐고요?
…맞아요. 뭐라고 반박할 말이 없네요.
그래도 둥둥 옆에서 떠다니며 얼굴을 바짝 붙이고 요리죠리 살펴도 그 애는 절대 몰라요
밥 먹는 애를 바라보다가 콧구멍에 슬며시 손가락을 집어넣어 봐도 그저 크흥 재채기만 하는 나의 왕자님.
고작 인간인 그 애가 뭐가 그렇게 좋냐고요?
우리 재노는요
잘생겼어요
진짜 잘생겼어요
수년간 지내온 방황의 삶동안 정말 많은 인간들을 봐왔지만
얘만큼 잘생긴 애는 지금까지 없었어요
속보인다고요?
말했잖아요 전 아무도 보질 못한다니까요?
그 외에도 재노는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고양이들을 좋아하고
추위를 잘 타고
돈가스를 좋아해요
고등학생땐 수학을 가장 좋아했고
공부도 열심히 했고
그 덕분에 지금은 멋진 대학생이 됐어요
주변에는 늘 친구도 많고
줄 사랑이 참 많은 애예요
주량은 소주잔 2.75잔.
재노는 취하면 귀가 먼저 빨개지고
누군가를 좋아하면 엄청 티를 내요
키스를 할 땐 왼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귀여운 습관이 있어요
가끔 새벽에 혼자 자전거 타기를 좋아하고
생각날 때마다 엄마한테 전화를 거는 착한 애.
제가 그런 애를 좋아해요.
가끔 그 애가
반짝거리는 사람들이랑 말을 나눌때면 마음이 아프긴 해요
언젠간 저 애 앞에 서서 당당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순간이 올거라고 쓸데없는 생각도 해보죠
그냥 늙은 노인의 모습이라도 잠깐 빙의할 수 있다면 걔가 좋아하는 따뜻한 군밤이라도 손에 몇 개 쥐어주고 올 텐데.
그래서 전 걔가 친구들이랑 신나게 대화할 동안 팔짱도 껴보고 손도 잡아보고 깍지도 껴보고
살랑살랑 벚꽃이 떨어지는 따뜻한 봄날엔 그 애 옆에서 위풍당당하게 걸으며 우리가 연인이라는 상상도 해봐요.
시험기간엔 그 애가 혼자 책상 앞에 앉아서 헤드폰을 끼고 공부하고 있으면 뒤에서 껴안고 넓은 등에 머리를 기대어봐요. 둥둥둥. 그 애의 규칙적인 심장소리가 들리면 마음이 편안해져요.
곧 심심해진 저는 그 애의 무릎위에 앉아서 어깨에 팔을 두르고 집중하느라 힘준 턱에 볼을 비비면서 물어봤어요.
난 널 정말 좋아해. 알아?
내가 몇십년을 계속 떠돌아다닌데도 네가 나 없이 쭈글쭈글 늙어도 난 너만을 좋아할 거야. 네 평생. 응? 난 네가 다른 애들한테 그만 잘해주면 좋겠어. 여자애들이 네 책상 앞에만 쪽지 두고 가는 거 진짜 지겨워 죽어, 나. 어? 네 세상에도 나만 가득했으면 좋겠어.
내가 너를 좋아하는 것보다 네가 나를 더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
넌?
넌 어때?
역시나 대답은 없죠.
가끔은 속상한 마음에 조용한 독서실에서
책 베고 잠든 등짝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 질러본 적도 있죠
일부러 그 애의 신발끈을 잡아당겨 넘어뜨린 적도 있죠
하지만 아무 반응 없어요. 당연하죠. 그 애는 사람이니깐. 심장이 뛰고 온기가 가득한 사람.
---
요즘 제가 가장 좋아하는 취미는 자고 있는 애 괴롭히기.
곤히 자고 있는 모습 실컷 구경하다가
이불 밑에 꾸깃꾸깃 들어가 커다란 품에 안겨서 잠도 청해보고 (귀신은 잠을 못 자요)
단단한 팔 베고 코끝을 간지럽혀보고
기다락 속눈썹도 살살 만져보죠
그렇게 마주 보고 있으면 얼굴에 따뜻하게 불어오는 숨을 들이마쉬다가
도톰한 입술에 저의 창백하고 온기 없는 입술도 살며시 가져다 보면
- 깜짝이야.
커다란 동공이랑 눈이 마주쳐요.
깜빡깜빡. 어둠사이로 찌뿌려지다가 이내 감기는 눈.
전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가도 곧 아무렇지도 않죠. 왜냐하면 재노는 저를 볼 수 없으니까요.
저는 옅은 숨을 쉬는 얼굴에다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어요.
너랑 섹스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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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술자리가 있나 봐요
왁자지껄한 식당에서 그 애 옆자리에 바싹 붙어 앉아서 술을 홀짝이는 잘생긴 얼굴만 감상하는데
응?
아까부터 계속 신경 쓰이게 재노한테 치근덕거리는 애가 있네요
자기 술 마셔달라 오빠 이거 먹어봐라 졸지엔 은근슬쩍 기대오는 스킬에
짜증이 제대로 팍팍 나요
딱 보이거든요
저거 저거 내가 특허 낸 팔인데.
떨어지라는 의미로 여자애의 샛노란 머리카락을 당겼더니
아야! 하며 놀라는 소리에
재노가 고개를 돌려 노란색 머리통에 손을 올리고 걱정스레 물어요
괜찮아?
응… 잠깐 뭐에 걸렸나 봐...아 아파
씨이.
다정한 애를 좋아한다는 건 참 힘든 일이에요.
한동안 주변 사람들이랑 대화를 이어나가다가 결국 조금은 지쳤는지 잠깐 바람 쐬고 오겠다고 식당을 나가는 나의 재노. 후다닥 얼른 따라나갔죠.
아까와는 사뭇 다른 표정으로 담배 하나 꺼내서 불 붙이는 모습에
그 앞에 쪼그려 앉아서 돌멩이만 툭툭 쳤어요.
미워. 왜 나는 너를 만지지도 못해서.
저는 한숨을 폭폭 쉬었어요.
오늘따라 왜 이렇게 힘들까요. 늘 있던 일인데.
오늘따라 부기가 다 빠져서 유독 잘생긴 얼굴이 너무나도 얄미워요. 그래서 일부러 작은 돌멩이 하나 주워서 그 애의 발치로 던졌어요. 좀 세게. 그럼 흠칫 놀라지 뭐예요.
흥. 쌤통이다. 전 그대로 일어서서 앞으로 훌쩍 다가가 그 애의 명치를 꾹꾹 눌렀죠.
- 너. 함부로 눈 돌리지 마.
- …
- 지난 여친도 한번 봐줬더니. 끝이 없어, 진짜.
- ...
- 넌 내꺼야. 알았어?
- 아파.
- 뭐?
- 아프다고.
처음이에요. 그 애랑 두눈이 마주친 건.
- 그렇게 누르면 나 아파, 읹준아.
맙소사. 전 그대로 뒤로 발라당 넘어졌어요.
너, 너 지금
나보고 말한거야?
내 이름을,
- 야, 이재노! 너 뭐해?
그 순간 아까부터 재노한테 치근덕거리던 여자애가 식당에서 뛰쳐나와요
- 안 추워? 빨리 들어와, 애들이 다 너 기다려
- 어, 잠깐만.
담배 꽁초를 지져 끄더니 그대로 뒤로 넘어진 저를 두고 툭툭 엉덩이를 털며 일어나는 재노. 팔짱을 껴오는 여자애를 잠깐 내려다보다가 아무 미련없이 들어가네요.
큰일났다.
.
.
재노한테 제가 보이나봐요.
————
제 이름은 이재노.
전 귀신이 보입니다.
그것도 다 보이는 게 아니라,
딱 하나. 한 애만 보입니다.
처음엔 제 집까지 따라오는 낯선 남자애에 소름이 돋아 문을 재빠르게 닫았었죠.
하지만 그대로 문을 통과하고 들어오는 그림자를 보고 전 깨달았습니다.
넌 사람이 아니구나.
그 날 인터넷에 찾아봤더니 귀신이랑 눈 마주치면 집안이 3대는 망한다네요. 일단은 어떤 일이 있어도 모른 척을 하며 며칠 안에 사라질 거라 굳게 믿고 다녔지만
얜 도통 떨어지지를 않네요
하지만 밤마다 잠들기 전 제 책상에 앉아있는 애를 유심히 관찰해보면 그렇게 못된 귀신은 아닌 것 같아요.
황읹준은 보통 귀신같지가 않아요
(보통 귀신은 어떤지 잘 모르지만)
귀신이라고 하기엔 너무 해맑습니다
혼자 얘기하다가 농담하다가 크게 소리 내어 웃다가
갑자기 공중제비를 하다가 제 머리 위에 앉아 명상을 해요 (귀신은 보기보단 꽤 무겁습니다)
제가 공부할 땐 책상에 아빠다리를 하고 앉아 제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봅니다.
정말 부담스럽게.
가끔은 제 볼을 쿡쿡 찌르거나
귀에 후후 바람을 불어넣거나
어깨에 기대어 혼잣말을 하거나
제 무릎 위에 앉아 저를 껴안고 훌쩍여요.
귀신이 눈물을 쏟아낸 제 어깨는 마치 비를 맞고 온 듯 축축해져 있습니다.
전 이 귀신의 손길이 느껴져요. 사람과는 분명 다른 감촉이지만, 그래도 느껴집니다. 그리고 황읹준의 손은 따뜻해요. 제가 잠든 줄 알고 볼을 어루만져오는 손길은 마치 보드라운 솜털이불 같습니다.
그럼 왜 지금까지 말은 왜 안 걸어봤냐고요?
글쎄요.
제가 아는체을 하면 겁을 먹고 도망갈까봐요. 뭔 귀신이 겁을 먹냐고요? 황읹준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아요.
사실 저도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아요.
왜 계속 나만 졸졸 따라다니는지.
왜 밤마다 입술을 포개다가 인사도 없이 떠나는지.
혹시 나랑 눈을 마주치면 무슨 말을 할지.
왜 내가 여자애를 집으로 데리고 올 때마다 집이 떠나가라 찬바람을 불어대는지.
그리고 황읹준이란 귀신을 24시간 모른척한다는건 절대로 쉬운일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이런 순간. 자려고 누워있는데 갑자기 제 품에 안겨 혼자 실실 웃다가 샐쭉해졌다가 이내 제 귓가에 속삭이는 귀신이에요.
- 너랑 섹스해보고 싶다.
전 돌아누우며 생각했어요.
꿈도 크네. 귀신 주제에.
…
다음날 상상해봤어요. 귀신이랑 자면 어떤 기분일지.
…
…그다지 좋을 것 같진 않아요.
—
오늘도 귀신은 저를 괴롭히기 바쁩니다.
늘 같은 레파토리. 늘 똑같은 툴툴거림.
왜 나는 너를 만지지도 못해서.
툭 던지는 돌멩이에 발목이 맞아 좀 아파서 눈을 꾹 감았습니다. 끄응.
귀찮지는 않냐고요?
어…별로.
사실 재밌어요. 걔가 눈치 채지 못하게 관찰하는 게.
예를 들면,
황읹준은 생각에 잠길 때마다 입술을 씹는 버릇이 있어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화를 낼 때마다 말끝을 길게 늘어뜨리고
길을 걷다가 길고양이들을 쓰다듬지 않고는 못 지나쳐요.
저를 좋아하는 여자애들의 머리카락을 당겨대고
밤마다 저의 팔을 베고 코를 골면서 자는 척을 해요.
제가 그런 애를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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