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보고있는 애들은 없는지 슬며시 눈동자를 굴려보던 주해성이 인상을 살짝 쓰고선 날 쳐다본다. 표정 존나 박제해두고 싶게 좋네. 여튼 내가 원한것도 아니고 니가 멋대로 내 취향을 저격 한건데, 아무런 기대를 할 수 없는
내 감정에 대한 보상 정도는 받아야 하지 않겠냐?
- 나랑 자자. 그럼 하나 더 지워줄게.
주해성의 언짢은 인상이 풀리나 싶더니 물음표가 덕지덕지 붙는다. 오, 처음보는 표정. 사진만 찍어놓을 수 있다면 처음보는 표정마다 찍어서 도감 한 번 만들어 보고 싶다.
- 자자고?
- 어.
- 슬립?
- 아니, 섹스.
아무리 쉽게 평정심을 유지하는 주해성이라지만 이 정도면 동공지진 정도는 보여줘도 될텐데 되려 지겹다는 듯한 얼굴로, "하나 지우더니 약이 좀 올랐나보다? 나중에 얘기하자." 하는데 아니 이런 문제를 나중에 얘기하자는 것도 웃긴 거 아닌가?
왜 이렇게 차분해? 말이 돼? 알고보면 이 새끼 바이아냐?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남자가 남자한테 섹스를 하자는데도 충격 하나 안 받냐고.
- 이 시발 빨리 좀 챙겨.
정규 수업이 끝난 후 느릿느릿 가방을 챙기는 주해성을 재촉해 차에 타기 전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갔다.
- 아까 내가 뭐라고 한 건지 확실히 들은 거 맞아?
- 섹스하자며.
- 그게 그렇게 덤덤하게 말할 일은 아니지 않냐?
- 그럼 뭐, 놀라서 자빠지는 시늉이라도 해줘? 말 끌지말고 하고 싶은 말만해 새끼야.
-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 영상 지워 줄 생각 없어서.
- 존나 1차원적이네.
- 넌 왜 정도가 없냐? 적당히란 걸 몰라 새끼가. 니가 그 영상을 존나 지우고 싶지 않아 한다는 거 충분히 알아 쳐먹었으니까 헛소리 그만 지껄이고 가자.
귀찮다는 듯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허무함이 밀려온다. 이럴거면 첨부터 그렇게 말하던가.
괜히 바이인가 싶어서 종일 혼란스럽게 만들고 지랄.. 내 취향만 아니었어도 진작에 제대로 엿 먹였을텐데, 내가 어떻게든 너랑 한번은 뒹굴고 만다.
방학이 시작되자 대놓고 내 전화를 띄엄띄엄 받는 주해성을 보기가 어려워졌다. 오늘도 안 받는 전화에 빡쳐서 확 미행을 붙일까 잠시 고민도 했다.
미행은 왠지 눈치챌 거 같아서 패스. 어쩔 수 없이 학교에서 몰래 찍었던 주해성 얼빡사진 한 장과 함께 언제 어디서든 이 얼굴이 발견되면 연락달라고 금수저들에게 단톡을 뿌렸다. 제보자에겐 보상을 톡톡히 해 주겠다며 혹시 당사자와 알고 지내는 자제분이 계신다면 이 톡은 비밀에 부쳐달라는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고, 만에 하나 당사자 귀에 이 내용이 들어가는 순간 추적 들어갈테니 내가 누군가에게 해를 가하는 일이 없게 해달라는 경고의 말도 정성스럽게 썼다. 누구길래 이렇게 찾고 있냐는 연락이 많이 왔지만 주해성이 J그룹 아들이란 건 굳이 밝히지 않았다.
- 형, 수영하러 가자.
- 갑자기?
귀한 자제분들은 어딜가나 하나쯤 있다. 그런 금수저들이 가는 장소는 사실 비슷비슷하기 마련이라 오다가다 마주치기도 한다. 제보가 들어온 곳은 회원제로 운영되는 수영장. 여가생활을 즐기고 계시나본데 나도 그 여가생활 같이 좀 즐겨볼까?
- 찾았다.
이 인간은 어떻게 숨 돌릴 틈만 있으면 여자랑 있냐.. 어떤 여자랑 붙어서 수영을 가르쳐주고 있는 듯한 주해성을 보니 고개가 절로 도리질 쳐 진다. 어쨌거나 타겟 발견. 퐁당 물 속으로 들어가 주해성과 여자가 있는 쪽으로 조금씩 이동하다 하얀 등짝에 머리를 갖다 박았다.
- 죄송합.. 주해성?
내 얼굴을 보고 할 말을 잃은 듯한 주해성의 침묵에는 ‘니가 왜 여기서 튀어나와.’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 너도 여기 다니냐?
날 무시하고 싶어 하는 거 같은데, 그렇다면 무시하지 못 하게 해 줘야지. 주해성 덕분에 있었던 적이 있긴 했는지 모를 열정이 매일 피어난다.
항상 다 가졌으니까 부족한 것도, 필요한 것도, 간절한 것도 없었다. 풍족한 삶이 보장되어 있지만 그만큼 내 삶엔 무료함도 뒤따랐다.
- 야. 나도 수영 가르쳐줘.
- 강사 초이스 해.
- 니가 있는데 뭐하러.
시큰둥한 주해성이지만 그 시큰둥함마저도 내 무료함을 앗아간다.
그냥 이 놈이랑 있으면 딱히 뭘 하지 않아도 즐거운데, 뭘 하기까지 하면 얼마나 더 즐겁겠냐고. 가령, 여자 허리를 잡아주며 수영을 가르쳐주는 사이로 끼어들고, 파고들고, 진상을 좀 부린다던가 하는? 덕분에 여자 표정은 점점 불쾌해지고 주해성 표정도 점점 썩어간다.
하고 싶은 거냐? 수영이 하고 싶은 거야, 그냥 날 귀찮게 하고 싶은 거야?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편한대로 생각해." 했더니 떨떠름한 표정의 여자는 없던 약속이 갑자기 생기기라도 한 듯 다음에 보자며 인사를 한다. 눈썹도, 눈도, 입술도 일자가 되어버린 주해성은 이내 피곤한 눈빛으로 묻는다.
- 넌 내가 행복하면 죽을병 걸리냐?
- 행복하기까지 했냐?
- 말이 그렇다고 씹새야. 넌 나 귀찮게 하는 거 말곤 할 일이 없지?
- 어. 없으니까 밥이나 좀 사줘. 배고프다.
- 니 돈으로 사 쳐 먹어 병신아.
꽤 잘 배운 티가 나는 수영실력을 보이며 내게서 멀어지는 주해성은 오늘도 잘생겼고,
물 밖으로 나간 후에야 제대로 보인 물기를 잔뜩 머금고 있는 촉촉한 몸은,
- 세상 혼자 사는 새끼..
얄쌍한데다 단단함만 뭉쳐놓은 듯 꽉꽉 자리잡힌 근육들이 나 좀 보소, 하고 내게 소리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피부가 뽀얀 사람은 몸이 좋아 보이기 힘들만도 한데
저 뽀얀 몸뚱이는 팔뚝이며 복근이며 알차게도 갈라져 손으로 누르면 다 튕겨낼 것만 같다. 어디서 저런 게 내 앞에 짠- 하고 나타났는지 모르겠다. 저 손으로 날 만지고, 저 몸으로 내 위에 올라타서, 저 얼굴로 날 내려다보면 과연 내 심장이 무사할 수 있을까?
주해성 몸이 눈앞에 잔상으로 남아있어 한참을 넋 놓고 있다가 딴 데로 새기 전에 잽싸게 샤워를 하고 나왔는데, 쓸데없이 개인 샤워실을 만들어놔선 아쉽게도 같이 씻을수는 없었지만 다행히 젖은 머리칼로 수영장을 나서는 놈을 근소한 차이로 따라 잡을 수 있었다.
- 무슨 운동을 하길래 몸이 이 지경이야?
팔뚝을 더듬으며 입맛을 다시는 날 쳐다보지도 않고, "손모가지 부러지고 싶으면 계속 해라." 하며 폰을 들여다보는 무신경함도 좋을 지경이다.
**
양석호 이 할 짓 없는 한량새끼는 왜 이렇게 열과 성을 다해서 날 귀찮게 구는지도 모르겠다만..
- 여봉봉, 여기서 뭐해?
내가 외출만 하면 어떻게 알고 행차하시는 건지는 더 모르겠다. 수영장이면 수영장, 골프장이면 골프장, 클럽이면 클럽, 안 나타나는 곳이 없다.
- 너 나 미행하냐?
- 우연히 왔지, 우연히.
- 우연이 지나치게 잦다?
- 닥치고. 혹시 우리 여봉봉 지금 여자랑 바람피우고 있는 거야?
바에서 아는 누나와 칵테일을 마시고 있는데 어김없이 나타나 내 옆에 털썩 앉는 양석호를 봐도 이젠 놀랍지가 않다.
예전에는 학교에서 맨날 엎어져 있다가 쉬는 시간 되면 담배나 피우고 들어오고, 가끔 내게 시비를 걸긴 했지만 그렇게 말이 많은 편도 아니었다. 오히려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세상만사 지루한 듯 권태로워 보이기까지 한 날이 더 많았던 거 같은데 내 약점을 잡고부턴 말이 많아지고 깐족거림이
늘더니 둘도 없는 부지런쟁이가 되어 날 귀찮게 군다. 오늘도 발 빠르게 나타난 양석호는 나와 누나 사이에 끼어 실실 쪼개며 헛소리를 갈겨댄다.
- 요즘 소홀하다 했더니 여자 만나고 있었구나~ 그랬구나~ 여봉봉 내가 바람피우다 걸리면 너 죽고 나 산다고 했던 거 같은데 버젓이 바에서 여자랑
칵테일이나 쳐 마시고 있었구나~ 응?
- 오늘은 게이버전이냐?
방학이 시작되자 하루가 멀다하고 다른 컨셉으로 나타나 귀찮게 구는 덕에 나와 함께 있던 여자들이 하나같이 당황스러움으로 질색이 된 표정을 짓는데, 그런 표정을 보는 것도 점점 익숙해질 지경이다.
- 친구가 장난이 짖꿏네..
- 장난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데? 그치, 여봉봉? 입이 있으면 뭐라고 말 좀 해봐. 아,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지 지금?
신나셨구만? 영혼이라곤 1도 없는 얼굴로 여봉봉 소리따윌 해대는 양석호를 보고 있자니 미국에서 사고 좀 적당히 치고 거기서 눌러 살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방해하는 방법이 점점 업그레이드 되고 있는 이 놈의 오늘 컨셉은 게이인가 본데 이러쿵저러쿵 설명하기도 귀찮고, 설명 해봐야 여자한테는 이상한 변명거리밖에 되지 않는데다, 이 새끼가 나타난 이상 절대 얌전히 혼자 꺼지진 않을 게 분명했기에 그냥 자포자기 했다.
- 너 설마 진짜 남자 만나?
- 그랬나보다 내가. 이 병신이 여봉봉이라고 부르는 거 보니.
만족스러운 표정의 양석호는 누님에게, "알았으면 이제 좀 일어나시지? 나한테 그 고운 머리칼 다 뜯기고 나서야 일어나실건가?" 하며 억척스런 애인행세를 한다. 황당해하며 자리를 뜬 여자가 특별히 아쉬운 여자는 아니라지만 그렇다고
내가 이 좋은 저녁시간을 이 새끼랑 보내야 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피곤한 얼굴로 의자에 푹 기대어 마른세수를 하다 녀석을 쳐다봤다. 내 시간을 방해하는 목표를 완료한 양석호는 언제 깐족거렸냐는 듯 칵테일을 한 모금 마시곤 지루하단 표정으로, "뭐 재밌는 일 없냐? 존나 심심해." 한다.
- 내가 데이트하는 꼴을 그렇게 못 봐주겠냐?
- 어. 그 꼴은 좆도 못 봐주겠는데?
- 근데 나도 니 꼴을 좆도 보고 싶지가 않거든? 그러니 좋은 말 할 때 사라져주지 않을래, 씹새야?
요즘은 이런 나날들의 반복이다. 그로부터 한 3일 지났나? 양석호가 어쩐일로 좀 잠잠하다.
내가 외출만 하면 득달같이 나타나서 내 시간을 방해하기 바쁜 놈이 코빼기도 안 보여서 오히려 의아한 생각이 들 정도면 그동안 양석호의 만행이 대단하긴 했나보다.
- 아까부터 왜 이렇게 입구를 쳐다봐?
- 아냐. 그래서 형이 어쨌다고?
나도 모르게 카페 출입문을 힐끔거리다 시선을 거뒀다.
나타날 때가 지났는데? 생각해보면 살면서 별의 별 놈 다 봤지만 양석호처럼 이상한 놈은 처음봤다. 처음엔 날 싫어해서 궁지에 몰아넣고 싶어 안달이 난 것 같았는데 지금보면 오히려 내가 약점을 잡혔다는 것도 잊고 지낼만큼 특별히 위협적인 짓을 하지도 않고 귀찮게 굴기는 하지만 그냥 심심해서
발광하는 것 같은 정도라고나 할까?
- 누나가 프로포즈 하겠다고?
- 응. 싫어하진 않겠지?
- 싫어하긴, 좋아서 입 찢어질걸? 형이 누나 좀 좋아해?
음료를 다 마신 후에도 누나와 조금 더 대화하다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쯤,
- 우연이네, 친구야?
큭, 그럼 그렇지. 어째 조용하다 했다.
- 와, 너 무슨 역마살 있냐? 뭘 이렇게 매일 싸돌아 다녀? 오늘도 역시 새로운 여자와 함께구만? 그쪽은 이 자식이 매일 다른 여자 만나는 거 알고 있어요?
누나한테 내가 만나는 여자만 한 백명은 될 거라며 종알종알 험담을 하고 있는 양석호는 어쩐일로
어릴때부터 알고 지내던 형과 내년이면 결혼 할 누나 앞에서 신나게 내 흉을 보다가 급 일어나는 양석호 뒷덜미를 잡아 앉혔다.
- 자꾸 나대라?
- ..미친놈이 형수면 형수다 진작 말을 했어야 할 거 아냐.
- 보자마자 깝친다고 바빠서 말 할 틈도 안 줘 놓고 지랄. 누나 먼저 가봐. 형이랑 데이트 잘 하고, 이것저것 다 사달라고해.
누나가 카페를 나가자 맞은편으로 자리를 옮긴 양석호는, "전화하면 재깍재깍 좀 받아라?" 한다.
- 안 받으면?
- 일단 학교 애들한테 영상 보여주고-
- 지랄. 그럴거였으면 진작 보여줬겠지.
- 안 믿네?
지난 날 동안 양석호는 말로만 조잘댔지 그 영상을 다른 이에게 보여주는 시늉조차 한 적이 없었다. 다만, 녀석의 똘끼를 아직 다 확인해 본 게 아니다보니 활활 잘 타오르는 성격에 불이
뭔 짓을 할지 몰라 굳이 불을 지펴보진 않았다.
- 뭐, 사실 퍼트리고 싶은 생각은 없어진지 오래긴 한데 니가 너무 긴장을 안 하니까 생각을 다시 좀 해보려고.
- 안 지겹냐?
- 지겨우면 나랑 자자니까? 하나 지워준다는데 왜 이렇게 질질 끌어.
- 내가 너한테 뒤 대 줄 바에야 평생 금욕 한다, 미친놈아.
**
주해성의 대답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진다.
- 그건 내 쪽에서 사양인데?
- 자자며. 그게 조건이라며.
- 그러니까, 그게 왜 내가 니 뒤를 뚫는다는 소리가 되냐고 답답한 놈아.
- 그럼 뭐 어쩐다고. 깔린다고, 니가?
- 떫냐?
- 니 성격에?
- 내 성격이 뭐, 새끼야.
아니, 난 게이라서 그렇다 치자. 보통 이런 대화는 적절히 당황해하거나 불쾌해 하거나 주먹이라도 휘둘러야 하는 거 아닌가? 이 새끼는 왜 내가 깔린다는 것에만 반응을 보이는거지? 주해성은 내 앞에서 자주 보이는 눈빛이 있다.
한심해하는 눈빛이거나, 하찮아하는 눈빛이거나, 심드렁한 눈빛이거나, 그보다 더한 무심함의 끝을 달리는 눈빛 등등, 아주 미개한 것을 쳐다 볼 때나 나올법한 눈빛을 주로 보이는데 지금의 눈빛은 뭔가 다르다.
- 그럼 또 얘기가 달라지지.
뭔가 호기심이 엿보이기도 하는 눈빛이 꽤나 인상적이다.
- 그딴 걸 요구랍시고 말 하면 내가 너한테 질질 끌려 다닐거라 생각 했나 본데-
- 넌 시발 눈치라는 걸 미국에 파묻어 두고 왔냐? 아무 의도도 없이 순수하게 내가 하고 싶어서 한 말이라면 어쩔 건데?
이제는 내 주둥이에서 무슨 말이
나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 약점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과 같은 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발, 이 좆같은 새끼가 너무 반응이 심심하니까 화르륵 타오르는 불같은 내 성격이 가만있어 주질 않잖아.
- 하고 싶어서라고?
이제야 정상인 같이, "왜?" 하는 의문을 던지는덕에 불씨가 더 타오른다.
어차피 말 꺼냈고, 언젠간 어떻게든 하고 싶었고, 나한텐 주해성 약점도 있고, 게이라는 내 약점을 까발리는 일이라 해도 따로 증거가 있는 게 아니니 쉽게 떠벌리고 다닐 수 있는 종류의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그 시건방진 표정과 눈빛이 시발 날 빡치게 한다고.
- 나 남자 좋아해. 남자 중에서도 니가 존나 말도 안 될 정도로 내 취향이고.
- ..방금은 좀 믿을 뻔 했다?
하여간 이 새끼는 내 말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귀에 딱지 앉을 만큼 쳐 말 해줘도 귓구녕이나 후비적거리며 한 귀로 듣고 흘릴 놈이다. 긴가민가한 듯 보이던 주해성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했다. 그러다, "너 게이냐?" 하기에 "어." 대답했더니 다시금 호기심이 깃든 눈빛이 되어 날 바라본다. 내 입으로 지인에게 성 정체성을 밝히게 된 건 비서형 이후 두 번째인데 왜 둘 다 이렇게 허무할 정도로 담담한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주변에 정상이라곤 나밖에 없는 거 같다.
- 뭘 믿고 내 앞에서 당당하게 커밍아웃일까?
- 내가 너 믿어서 말 하겠냐?
- 그럼 뭔데? 내가 떠들고 다니면 어쩌려고.
이판사판인 판국에 그런 말은 딱히 위협적이지도 않았다. 게다가 확신은 없지만 주해성은 아마도 내가 게이라는 것을 누구에게도 쉽게 말 하지 않을 것이다.
이유는, 지금껏 겪어 본 결과 주해성은 단 한 번도 야비한 짓을 한 적이 없었으니까. 학교에서 위선을 떠는 것과 야비한 것은 전혀 다른 장르다. 오히려 내가 야비하게 약점을 빌미로 사사건건 귀찮게 굴었음에도 뒤가 구린 수를 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물론 내 착각일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설령 주해성이 내 성향을 떠들고 다닌다 한들, 아마 난 앞으로도 주해성 앞에선 숨길 게 없을 것만 같다.
- 자신 있음 떠들고 다녀. 쌤쌤이잖아? 나도 니 영상 풀 테니까 같이 죽자. 둘 다 집에서 쫓겨나고 의지할 곳 없어서 서로한테 의지하고 사는 것도 괜찮겠네.
내게 버젓이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집에서 쫓겨나도 너랑은 안 붙어먹지 씹새야." 하는 얄밉고 섹시한 이 놈은 내 입에서 나온 고백 같은 건 완전히 관심 밖이라는 듯 쓸데없는 질문이나 해댄다.
- 같은 거 달린 놈 좋아하는 기분은 어떤 느낌이야?
- 뭐 그딴 수준 낮은 질문이 다 있어? 게이라고 뭐 다를 거 같냐? 그 사람 말 한 마디에도, 행동 하나에도 기분이 롤러코스터를 타고, 콩깍지인지 뭔지 취향이 아닌 모습 봐도 귀여워서 심쿵하고-
- 혹시 니 얘기냐?
- 그래, 짜증나게도 내가 요즘 딱 그딴 상태인 거 같다, 왜, 뭐, 왜?
- 난 또 게이들은 섹스생각밖에 안 하는 줄 알았지. 이제 할 말 끝났으면 가자.
- 야, 그냥 이렇게 간다고? 내가 너 좋아한다니까?
- 그래서?
- 아무렇지도 않냐?
- 니가 나 좋다는 거지 내가 너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내가 뭐 심각하게 고뇌라도 해야 되냐?
..그건 그렇네?
- 안 이상해?
- 미국 친구들중에 레즈 몇 명 있어서.
불타올라 고백까지 했는데 뭔가 허무해진다. 주해성은 '니가 게이든 아니든 나랑 상관없음.' 딱 이 정도 수준의 사고를 가지고 고백전과 똑같이 날 대했다. 이젠 이런 반응이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어쩐 건지도 잘 모르겠다.
- 거부감 안 드냐?
- 별로.
- 나 니 생각하면서 자위도 하는데.
- 그건 좀 쉣이네.
이래도 저래도 저와 상관없다는 듯 무심하고 건방진 말투의, 아.. 진짜 세상 어디에도 없는 내꺼하고 싶은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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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준이형 백수야?
- 뭐?
- 올 때마다 시간대가 다 다르길래. 회사원은 절대 아니고 그렇다고 사업하는 사람같지도 않고. 걸치고 다니는 거 보면 돈은 또 많아보이고. 부모님이 재벌이신가?
- 백수는 아니고.. 프리랜서.
- 일을 하긴 하는구나. 것보다, 너 그 형 좋아하지?
훅 들어온 질문에 그릇을 정리하던 손이 멈췄다.
- 무슨 소리야, 갑자기.
- 첨엔 형한테 유독 까칠하길래 형이 뭐 잘못해서 사이가 틀어진건가 싶었는데, 뭔가 달라.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이며 그릇을 정리하다 이를 꽉 깨물었다. 내가 미쳤다고 강서준을..
솔직히 다시 만난후로 자꾸 내 앞에 알짱거리는 낯짝이 신경쓰이는 건 사실이다.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겠냐고, 4년 사귄 첫사랑을 5년만에 옆집 이웃사촌으로 만났는데. 불편하고 또 불편한 이 마음이 김형기 눈에는 전혀 다르게 보였나보다.
- 니가 하도 범생이라길래 그런줄로만 알았더니 미국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사고쳐서 불려온거라던데?
- 역시, 그럴 줄 알았다니까.
- 주회장이 참다 참다 한국으로 소환했다나봐. 어린게 맨날 쌈박질에 무면허 운전에 여자 문제에 도박까지 안 하는 게 없었다더라.
- 바쁘게도 노셨네.
- 주회장이 아무것도 안 물려주겠다고 선포했대. 흠 하나 없이 졸업해야 되나봐. 쌤들한테 학교생활 하루하루 보고 받는 거 같더라고.
교우관계며 행실이며 리더십이며 영향력이며 학업기여도까지.
- 피곤하게 사는구만?
- 야자 빠지는 것도 너랑 같이 다니는거라서 봐주는 건가봐. 아무래도 너희가 친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형 말을 종합해보면 내 폰에 있는 이 영상이 절대적으로 학교에 알려져선 안 된다는거네? 흐음, 좋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