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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 15 60 tweets 9 min read
클리셰13 #해성석호

영상 때문에 처음 엮이게 됐을 땐 양석호를 쳐 죽이고 싶었다. 그 후에는 그냥저냥 이상한 놈이려니 했다. 크게 바라는 것도 없고, 딱히 위협적인 짓도 안 하고, 뭣보다 계속 보다보니 그냥 양석호라는 놈이 좀 익숙해졌다. 이제는 미친 소리를 해도,
미친짓을 해도 그러려니 하게 되고 보면 볼수록 희한한 놈이라 솔직히 심심하진 않았다. 그래서 까불어도 봐주고 기어올라도 봐주고 말 한마디에 혼자 실실 쪼갰다가 빡쳐 했다가 약 올라했다가 부들부들 하는 게 웃기기도 했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 매 초마다 오르락내리락 욹그락붉그락
파르르 변하는 감정의 변덕이었는데, 방학의 마지막 날이었던 어제도 그렇게 그냥 변덕을 부렸다.
내 침대에 누워 이제는 재미가 없다는 말을 툭 던지는 양석호에게 흘러가듯, 다행이네. 대답하며 게임을 하고 있었고, 이 짓도 그만해야겠다고 중얼대던 녀석은 집으로 돌아갔다.
하루 이틀도 아닌 변덕에 쫒아다니는 것도 재미없어졌겠거니 하며 별 생각 없었던 난 오랜만에 각 잡힌 교복을 단정히 입고 넥타이도 깔끔하게 메고선 등교를 했는데 어쩐 일로 양석호는 학교를 빠졌다.

- 형, 방학 보충수업도 양석호 때문에 못 했다며?
외톨이를 자처한 게 무색할 정도로 반 놈들이 하나 둘 말을 걸더니 어느순간 마치 양석호와 같이 다니기 전처럼 우르르 몰려들기 시작했다. 아, 새끼들 존나 귀찮게 들러붙네.. 그동안 양석호 때문에 편한 것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처럼 실실 쪼개면서 놈들을
상대하는 건 얼굴에 경련이 일어날 거 같고, 더군다나 어제까지 방학이었으니 이 짓 안한지도 좀 돼서 더더욱 죽을 맛이었다. 이 새끼는 왜 학교를 빠져선..

- 형도 몰라? 벌써 4일짼데 안 나오는 거 보면 사고 친 거 맞지?
- 야, 소문 못 들었어? 누구 하나 잘못 패서 합의 한다고 애먹고 있다더라.
- 에이, 걔네 집이 어떤 집안인데 그런걸로 애를 먹냐? 그게 아니라 나대다가 잘못걸려서 병원신세 지고 있다던데?
- 진짜? 하긴, 뭐가 됐든 언젠가는 그 자식 내가 제대로 낭패 볼 줄 알았다니까?

양석호가 결석하는 동안 반 놈들은 이때다 싶었는지 득달같이 뒷담화를 까기 바쁜데,
이게 한 4일쯤 이어지니까 나도 슬슬 귀찮음을 넘어서 짜증이 올라와 예민해져 있었다.

- 이왕 이렇게 된 거 자퇴했으면 좋겠다.
- 내 말이. 근데 이렇게까지 며칠 내내 안 나오는 거 보면 이미 자퇴도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닌가? 아까 교무실 갔다가 들었는데 쌤들도, 안 다닐건가 보지 뭐. 이러던데?
- 그러게 평소 행실 좀 똑바로 하지. 꼴좋다.

지치지도 않는 지 4일 내내 양석호를 씹어대며 별 소리를 다 하는데, 그놈의 양석호 양석호 시발, 지겨워 죽겠네.

- 개소리들 좀 작작해라, 앞에선 한 마디도 못 하는 것들이.

무심코 내뱉어진 말에 분위기가 싸해졌다.
하아.. 방학때 너무 내 성격대로 지내서인지 무의식적으로 곱게 나오지 않은 언행에 다들 놀라길래 이마를 긁적이며 수습을 해야했다.

-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개인적으로 뒤에서 이러는 거 너무 못난 거 같아서 보기 안 좋다는 거지. 확실하지 않은 가십거리 만드는 건 좀 아닌 거 같아서.
얼떨떨한 얼굴들로, 아 으응, 그래 뭐.. 형 말이 맞긴 하지.. 하며 말끝들을 흐리는데 머리가 지끈거리는 거 같다. 심지어 어제는 엄마가 요 며칠 석호는 왜 코빼기도 안 보이냐 물었는데, 끽해 봐야 며칠이나 안 보였다고 그 놈을 궁금해 하나 싶어 어이가 없었다. 집에서도 그러는데 학교에서도
하루종일 양석호 양석호, 망할놈의 양석호 이름을 내게 들이민다.

- 주해성군?

게다가 하굣길에서는 비서마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아, 두통..

-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게요. 혹시 석호랑 무슨일 있었습니까?
- 그쪽 도련님을 왜 나한테 물어?
- 이쪽 도련님이 폰도 꺼놓고 집에도 안 들어오니까요.
-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 상관없었으면 좋겠지만 아시잖아요. 요즘의 석호라면 해성군이랑 관련된 거 아니고선 이렇게 잠수 탈 이유가 없다는 거. 나한테는 비밀도 별로 없는 녀석인데 그런 애가 입을 닫고 사라졌어요, 내 예상이 맞다면 아마도 해성군때문에.
학교도 모자라 집에도 안 들어가? 갑자기 웬 질풍노도야 미친놈이. 무슨 얘기라도 들었으면 모를까, 그만해야겠단 말만하고 가더니 개학 첫날부터 학교를 안 나오는데 그게 왜 내 탓이며, 내 탓이라 한들 뭐 어쩌라는 거야.

- 내가 그 새끼 변덕까지 책임질 이유는?
- 이유야 어쨌든 미안하지만 수고 좀 해주셔야겠습니다. 오늘도 연락 안 되면 제 일자리가 간당간당해서요. 회장님이랑 사모님이 사랑해 마지않는 아들의 가출 사건을 알게 되면 아마 전국이 떠들썩해질 거거든요.
- 결론이 뭐야?
- 좀 찾아와주셔야 겠어요, 변덕심한 우리 도련님을.
- 그 새끼가 어디 있는지는 그쪽이 더 잘 알 거 아냐.

아마도 이태원에 있지 않을까 하는 짐작만 있을 뿐 양석호의 사생활을 지켜주는 편이라 어디에 있을지는 정확히 알 수도 없고, 다 뒤져서 찾는다 한들 얌전히 말 들을 도련님도 아니니까 제 심증으론 나 때문인거 같으니 고이 모셔오라는데
기가 막혀 욕도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된 게 양석호는 옆에 있으나 없으나 사람 귀찮게 하는 건 매한가진지 모르겠다. 며칠 내내 하루종일 양석호 양석호, 아주 그냥 내 인생에 지분을 가지셨네. 신경을 안 쓰고 싶어도 주위에서 자꾸만 신경쓰게끔 만드는 좆같은 상황이 너무 짜증난다.
두통을 달고 집에 가서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이태원으로 향했다. 그 놈이 있을만한 곳 중 내가 아는 곳이라곤 같이 가 본 세군데의 게이바 밖에 없어서 두 군데를 들러봤지만 없었다. 그래서 나머지 한 군데를 마지막으로 들어가 봤는데,

- 재워줄래, 말래?
30대 중후반쯤으로 보이는 남자를 꼬시고 있는 양석호가 보였다. 사람을 이렇게나 피곤하게 만드는 놈이 저는 속 편히 쳐 놀고 있는 모습에 기가 차서 뒷통수에 대고, 놀고 있네. 했더니 멍청한 표정으로 남자를 쳐다본다.

- 뭐하냐, 씹새야.

그제야 놀란 얼굴로 휙 돌아보며 날 확인하고선,
"와, 시발, 뭐냐? 존나 반갑네." 이지랄 하는데 어이가 있을 틈도 없다. 남자를 보낸 후 나와 실랑이 하며 안 일어날거라고 버티고 있는데 말을 안 들어 쳐먹으니 그냥 끌고나와 비서에게 전화 하라고 폰을 건냈다. 한 큐에 말을 들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지금 그게 문제냐고 여지없이 지랄을 하더니 이건 또 무슨 변덕인건지 한 번만 안아보자며 내가 뭐라 말도 하기 전 끌어안는다. ...안 그래도 더워 죽겠는데 뒤질래..?

- 나 방금 결심했다. 나랑 사귀자 주해성.

꽤나 잠잠하다 싶었더니 협박 같지도 않은 협박을 하며
연애따위를 하자는 양석호에게 내가 너랑 사귄다고 뭐가 달라질 거 같냐 물었다.

- 적어도 주해성 소유권은 정식으로 나한테 있을 거 아냐. 뭔 소린지 알겠냐? 나랑 연애하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넌 앞으로 3개월간 여자랑 손 한 번 못 잡게 될 거라는 소리라고, 새끼야.
또랑또랑한 눈빛으로 말 하는 양석호가 너무 같잖아서 헛웃음도 나오지 않는다.

- 퍼뜨려. 미국에서 말 했잖아. 원하는 만큼 뿌리고 대신 그만 귀찮게 하라고.

양석호는 내 말에 씨익 웃으며, "미국에서 클럽파티 할 때 대마초 피우는 애들 옆에 같이 있는거 봤다? 근데 그걸 내가 눈으로만 보고
있었을까?" 하며 꺼져있는 제 폰을 들어 보인다.

- 그래서?
- 그걸 주회장님이 아시면 어떻게 될까?

약은 걔들이 한 게 아니라 지금 니가 한 거 같은데.. 클럽파티 당시 구석에서 대마를 입을 댄 애들과 같이 있긴 했었다.

- 내가 한 것도 아닌데 왜?
- 그걸 믿어주실지 모르겠네. 회장님성격에 아직도 그런 애들이랑 어울리는거 알면 니가 힘들게 범생이 노릇하던거 싸악 물거품될텐데. 어때, 슬슬 나랑 연애가 하고 싶어졌을 텐데?

이딴걸로 위풍당당한 표정을 하고있는게 귀엽다 해야할지, 멍청하다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 딱 3개월이다.
그냥 넘어가줬다. 이런 이상한 놈이랑 하는 연애라는 건 어떨지가 조금 궁금해졌으니까. 양석호는 한결 산뜻해진 표정으로 제 비서에게 전화를 했고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얌전히 그쪽으로 가겠다고 했다. 가는동안 약으로인해 인생 종 친 인간들을 검색해 내 눈앞에 계속 들이밀며 쨍알쨍알.
- 난 안 한다고, 병신아.
- 진짜?
- 그 전에도 안 했고, 앞으로도 생각 없거든?
- 안 믿기지만 믿어줄게. 야, 근데 진짜 비서형 때문에 나 찾으러 온거냐? 아니지? 솔직히 말해봐. 미운정도 들었다며. 인간적으로 미운정까지 든 사람이 며칠내내 안 보이면 궁금해지기 마련 아니냐?
- 말 더럽게 많네, 진짜.

뭐가 그렇게 궁금한 게 많은지 쉴 새 없이 나불대는데, 나와 엮이기 전에 학교에서 봤었던 권태롭기 짝이 없던 모습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를 일이다.

- 넌 내가 궁금하지도 않았냐고.
- 심심하긴 하더라.

양석호는 내 대답에 잠시 멈춰 서더니 눈을 땡그랗게 뜨고선,
심심했다고? 하며 열심히 의미부여를 하기 바쁘다.

- 그럼 내 생각 했다는 거네. 허전하고 막, 어?

미친짓하는 새끼 없으니까 좀 심심하긴 했다만.. 양석호가 내게 어떤 감정을 원하는 것인지 정확히는 몰라도 아마 그것과는 조금 다를 내 감정을 녀석은 확인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물론 처음과는 많이 달라지긴 했다. 이제 양석호는 내게 더럽게 성가시지만 크게 밉지는 않고, 피곤하긴 하지만 떼쓰는 어린 동생 같은 느낌이다.

- 넌 나 보면 무슨 생각 드냐?
- 병신 같다는 생각.
- 좀 긍정적인 대답을 해 보라고 새끼야. 나 이제 니 남자친구거든?
- 아 시발 뭐냐, 그 소름끼치는 단어선택.
- 존나 사랑스러운 단어선택이었는데?
- 두 번 사랑스럽다간 나한테 맞을 각오하고.
- 그니까 상전행세 그만하고 긍정적으로 대답 좀 해보라고.
- 가끔 귀엽긴 해.

또 우뚝 멈춰서더니 이번엔 내 팔까지 붙잡고 멈춰 세우며 흥분한다.
- 귀엽다고?! 너 딱 걸렸어. 노아가 전에 너 귀여운 거 좋아한다고 했었는데, 너 나 좋아하지? 생각해보니까 너 은근 내가 하자는데로 다 받아주고, 귀찮다면서도 신경써주고 막 그랬잖아. 오늘도 비서형 핑계대고 막 찾으러 다니고 그랬,
- 김칫국 그만 드링킹 하고 씹새야. 내가 좋아하는
귀여운 건 태생부터가 귀여운 거고, 넌 병신 같아서 귀여운 거고.
- 니가 몰라서 그렇지 나도 존나 태생부터 귀여운 구석이 있거든?
- 아무말이나 막 하는구만?

내 말은 들리지도 않는지 혼자 흥분해선, "아 미쳤어 진짜. 그런 줄 알았으면 내가 4일간 방황도 안 했지 새끼야. 아 이 싸가지 없고
스윗한 새끼. 좋으면 좋다고 말을 하지 존나 싫어하는 척은 있는대로 다 하더니." 이 쑈를 하길래, "너무 갔다, 새끼야." 했더니 안 들리는척, 기분이 하늘을 나는 듯 입이 어디까지 찢어져선 실실 쪼갠다. 하여간 착각이란 착각은 혼자 다 하고 사는 놈이다. 난 지금까지 귀찮아 한 적은 있어도
싫어하는 척 한 적은 없었는데 스스로 굳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미국에서도 혼자 착각해서 질질 짜고 염병을 떨더니 오늘은 또 반대로 착각해선 신나게 염병을 떠는데 감당이 안 된다.

- 안 그래도 머리 아픈데 보태지 말고 얌전히 좀 가자.
- 니가 아프기도 해?
- 난 사람 아니냐?
- 어떻게 아픈데? 얼마나 아픈데? 언제부터 아팠는데?
- 니가 입만 좀 닥치면 덜 아플 거 같은데.

비서가 기다리고 있는 곳까지가 왜 이렇게 멀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겨우 도로가에 도착하자 이 놈의 보모는 걱정이 됐는지 차 옆에 서서 두리번거리며 양석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 너 임마! 나 짤리는 꼴을 기어이 보고싶지?!
- 형, 보자마자 미안한데 두통약 좀 사다줘.
- 왜, 머리 아파?
- 아니. 주해성이 아프대.

비서는 원수 쳐다보듯 양석호를 째려보다 한숨을 쉬곤 약국을 찾으러 갔고 난 녀석과 차에 타선 에어컨 바람을 쐬며 더위를 식혔다.
- 여자 만나다 걸리면 죽어.
- 내가 니 손에 죽을 만큼,
- 너 말고, 미친놈아. 내가 널 어떻게 죽여, 3개월은 사귀고 봐야지. 대신 여자 머리털 다 뽑아 버릴 거.
- 와.. 어떻게 여자한테 그럴 생각을 할 수가 있냐?
- 질투에 눈 돌아가면 뭔들 못 해.
- 그럼 남자 만나야겠다.
- ...머리 아프다더니 미친거냐?
- 팔자에도 없는 남자랑 연애도 하게 생긴 판에, 왜?

인상을 있는데로 쓰면서 진짜 살인날 줄 알라며 욕을 하다 운전석 의자를 퍽퍽 발로 차더니, "우리 같이살래?" 한다. 도대체 어떤 알고리즘을 거쳐야 여자 문제에서 우리의 동거 문제가 도출될 수 있는건지 모를
양석호의 의식의 흐름에 할 말을 잃었다.

- 오늘 실례 많았어요. 갑자기 찾아가서 무례하게 말 한 건 미안해요.

비서는 사 온 약과 생수를 내게 주며 사과의 말도 함께 전했다. 오늘 일은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개인적으로 싫은 사람은 아니었던 터라 그냥 털기로 했다.

- 형. 나 애인 생겼어.
운전석에서 뒤를 돌아 애인? 묻는 비서에게 양석호는 끄덕이며 손가락으로 날 가리켰다. 잠시 침묵이 생긴 차 안은 고요했고, 비서는 이내 나와 양석호를 천천히 번갈아 쳐다보더니 중얼거린다.

- 이상한 놈들끼리 어울리면 별 미친 일이 다 생기는 거구나..
***
- 혼잣말이 너무 큰 거 같다 형.
- 미안. 속으로 생각한다는 게 그만.

너스레를 떨고 차를 출발하는데 이상한 건 비서형이 아니라 주해성이었다. 빤히 쳐다보는 내게, '뭘 봐 새끼야.' 하는듯한 무심한 표정의 주해성이 머릿속에서 물음표를 만들어낸다. 이 싸가지가 오늘 왜 이러지?
- 내가 석호 찾아오라고 할 때 되게 짜증내더니, 어떻게 몇시간만에 애인사이로 돌아와요?
- 어쩌다보니.

봐, 이상하잖아 이 새끼. 형한테 사귄다는 말을 했을 때 싫은 티 팍팍 내면서 어쩔 수 없었다던가, 원해서 그런게 아니라던가 하는 변명 같은 말을 한마디쯤은 할 줄
알았는데 일절 그런 말도 없고 형의 질문에 짤막하게나마 대답도 잘 던져준다.

- 해성군도 혹시 게이였어요?
- 그건 아니고.
- 근데 석호랑 사귄다고?
- 박력터지게 고백하길래.

그래서 난 지금 매우, 아주, 의아하다. 왜 이렇게 심심하게 말 하지?
마치 합의하게 사귀는 것처럼 보일만큼, 평범한 연인들처럼 그저 내 고백에 사귀기로 했다는 듯이.

- 고백한다고 다 받아줘?
- 아니.
- 근데 석호는 왜 받아줬어요?
- 귀엽잖아.

순간 차를 세울뻔한 형은 식겁을해선, 올해 들은 말 중에 가장 소름돋는 말이라며 룸미러로 우리를 힐끗힐끗 쳐다본다.
귀엽다는 말이 생각보다 존나 좋은거구나..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 나올 거 같아 손으로 부여잡고 창 밖을 보고 있는 주해성을 멍하게 감상하며 진정하자는 말을 속으로 한 백번은 한 거 같다. 와, 시발 귀엽다는 말 진심이었나봐, 존나 좋아...
다음날 5일만에 등교한 나를 향한 수군거림이 많았지만 1도 개의치 않았다.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고 주해성은 더 아름다워 보이는데 다른 게 뭐가 중요하겠냐고.

- 얼굴 뚫어진다.
- 내가 계속 보고있어봐서 아는데 안 뚫어지더라고. 날도 더운데 마치고 카페 가서 시원한 거 마시자.
오전 내내 아예 몸을 틀어 주해성을 보고 있는 내게 조용히, "차라리 자 병신아." 하는데 미쳐버릴거 같다. 왜 이렇게 좋지? 주해성이 숨만 쉬고있어도 설렌다.

- 하.. 나와봐.

결국 보다못한 녀석이 날 베란다로 불러내 지적질을 한다.
- 뭐하냐 하루종일? 니가 게이라는거 동네방네 소문 다 낼 생각이냐?
- 너 그렇게 인상 쓰고 말하면 존나 예민보스 같아서 설레는 거 모르지?
- 헛소리 작작하고, 쳐다보는 것도 작작 좀 쳐 하고, 카페도 갈 테니까 실실 쪼개는 것도 좀 적당히 해라.
- 사랑에 빠지면 원래 이런거지, 연애고자 새끼야.
사실 우리 사이에 연애라고 해 봐야 달라질 건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사람 기분이라는 게 있는 거다. 다른 커플들처럼 꽁냥대거나 설레거나 그런 건 없다 해도, 어쨌거나 주해성이 지금 내꺼라는 게 중요한 거고 그 사실이 날 들뜨게 한다.
- 야, 일어나.

사귀기로 한게 꿈인가 생신가 싶어 어제 잠을 설쳤더니 오후에는 툭하면 엎어져 잠들었는데 잠결에 내 이름이 들렸고, 그 목소리는 꽤나 다정했다.

- 석호야.

눈이 번쩍 떠지는 주해성 목소리에 일어나 쳐다봤더니, "수업 끝났다고." 하는데 학교라서 다정했던 거구나 싶어
아쉽다가도, 근데 방금 뭐라고 부른거지? 석호야? 석호야아?!

- 너 방금 뭐라고 불렀냐?
- 양석호.
- 아닌데, 너 석호야~ 이랬는데?

주해성은 날 이상하게 쳐다보며 "잠결이라 그런거냐, 가는 귀가 먹은거냐" 조용히 말해왔다.
내가 잘못 들은 건지, 주해성이 거짓말을 하는건진 몰라도 와 시발 뭔데 좋지?

- 야야, 나 계속 그렇게 다정하게 불러줘.

주해성은 책상을 정리하며 귓가에 속닥거렸다. 헛소리 그만하고 가방이나 챙겨, 씹새야.

- ..달달함이라곤 1도 없는 새끼.
차를 타고 이동한 후 트렁크에 있는 쇼핑백들을 뒤적이며 아직 한 번도 입지 않았던 옷들을 대충 꺼내 근처 화장실에서 갈아입었다. 교복은 담배 피우기가 영 까다로워지니까 주해성에게도 갈아입으라며 아무거나 던져줬더니 귀찮아하면서도 결국 갈아입고 나온다.

- 뭐 마실건데?
- 아이스 초코.
너무 고민없이 말하길래 그냥 같은걸로 두 개를 시켰다. 미국에서 초코라떼를 만들어먹던 주해성을 보며 나도 맛을 좀 볼까 해봤지만 맨날 지꺼만 내려 마시길래 자연스레 난 아메나 마셨다.

- 나 이거 첨 마셔봐.
더웠는지 시원하게 두 번정도 빨대를 쪽쪽 빨고있는 주해성을 따라 한모금 입에 넣었지만, 그대로 주르륵 다시 컵에 뱉어냈다.

- ..더럽게 뭐 하는 짓이야.
- 존나 달아.. 이걸 어떻게 쳐마시냐..?

주해성은 한심함을 가득 담은 눈빛으로 날 훑어보며 말한다.
- 옷은 무슨 애새끼처럼 병아리같은 걸 입어가지고 단 건 싫냐?
- 병아리?

생각 없이 내 옷을 내려다보니 노랑 옷이긴 하다만.. 많고 많은 노란색 중에 왜 병아리야?! 바나나도 있고, 어? 레몬도 있고! 해바라기도 있고! 또 뭐 있냐, 어쨌든!
- 야, 또 딱 걸렸어. 너 병아리 좋아한다고 노아가 그랬다고. 이 정도면 나 좋아하는 거 맞잖아, 와 시발 소오름.
- 소오름은 음료 뱉어내던 니 모습이 소오름이다 새끼야. 그 자식은 대체 뭔 소릴 했길래 어제부터 자꾸 노아, 노아하면서 호들갑이야.
소름이라며 양쪽팔을 문질러 대고 있는 날 타박하다 일어난 주해성은 곧 카운터에서 아아를 하나 시킨다. 엄마, 주해성이 죽을때가 됐나봐요. 나 마시라고 무려 직접 아아를 시키고 있잖아 지금.

- 못 먹겠다 그래서 나 마시라고 시킨 거지? 이것 봐, 너 나 좋아한다니까?
속으로 엄마를 찾다가 자리에 앉는 주해성을 보며 정신 차리고 말했더니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나 마시려고 시킨건데? 한다. ..뭔데. 내꺼 아니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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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 17
한번만#7 해성호성

- 야. 그림 집어치우고 좀.

날 보지도 않고 신명나게 내 누드를 잘도 그리고 있는 지호성의 스케치북을 뺏으며 노려봤다.

- 눈꼽 꼈어.

힘껏 야리고 있는 내 기분 따윈 관심도 없이 대수롭지 않게 슥 눈꼽을 떼어주는 이 천진난한만 놈을 어떻게 해야 하지..?
- 눈꼽이고 뭐고 정리를 좀 해보자.
- 무슨 정리?
- 몰라서 묻냐?

고개를 갸우뚱하는 얼굴은 순도 백프로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하고 있다.

- 넌 사랑이 손바닥 뒤집듯 그렇게 쉽게 뒤집어지냐? 그게 그렇게 한 순간에 돌변할 수도 있는 거냐고.
- 그런 건 아닌데,
- 아닌데 뭐. 어제까지만 해도 나 좋다고 졸졸 쫓아다니면서 귀찮게 하더니. 거, 조금 아팠다고 순식간에 사랑이 아니었다? 너 그거 먹튀야, 나쁜새끼야.
- 조금 아팠던 거 아니고 많이 아팠는데..

...뭐, 어쨌든.
Read 32 tweets
Dec 13
한번만6 #해성호성

- 허.. 잘도 자네.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내 침대에, 그것도 내 품안에 파고들어서, 천사라도 강림한 것 같은 얼굴로 온화하게 잠들어 있는 지호성을 보며 난 거의 밤을 지새웠다. 중간에 잠깐씩 졸긴 했지만 깊게 잠들지는 못 했다.
- 우웅, 해성아..

...잠꼬대로 내 이름 부르지마 이 새끼야, 새삼 기분 이상하니까. 어제 섹스 후 지호성은 의식을 잃은 것처럼 잠들었고 나도 힘이 빠져 잠시 누워 있다가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들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냥 잠들 수가 없었다.
막말로 자위를 해도 뒤처리는 깔끔하게 해야 하는 법인데 지꺼 내꺼 할 것 없이 뒤엉켜있는 단백질 덩어리들을 그냥 두기엔 찝찝하기 짝이 없었다. 물 티슈로 대충 닦긴 했지만 이미 침대시트에 말라붙어 있는 건 어쩔 수가 없었고 지호성 몸도 대강 물 티슈로 닦아주다 적나라하게 흘러내려 말라버린
Read 43 tweets
Dec 12
불완전1 #서준지우

- 지우씨. 일 조금만 도와줄래요?
- 네.
- 다른 분들은 퇴근해보세요. 오늘 하루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강서준팀장은 사람 좋기로 유명했다. 실제로 좋은 사람인것도 맞다. 하지만 6개월전쯤부턴가 조금씩,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대놓고 강팀장에게 티를 내진 않았지만 부서 사람들은 "요즘 팀장님 너무 어두워지지 않았어요?" 소근소근 걱정할 정도.

- ...지우야.
- 네, 팀장님.
- 둘만 있을때 그렇게 부르지마..
- 회사잖아요.
- 하아.. 그래. 그럼 나가자.
내게 일을 도와달라고 하는건 대부분 핑계다. 다른 이들이 퇴근을 하면 우리도 곧장 일어나니까. 지하주차장에 내려가 자연스럽게 강팀장 차에 올라타 앉았다. 뭐가 그리도 심란한지 핸들에 팔을 얹고 이마를 댄 채 한숨을 쉬던 강팀장, 아니 강서준은 그자세 그대로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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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 12
클리셰12 #해성석호

딱히 갈 곳이 있는 건 아니라 만화카페에 들어가 만화책이나 보면서 시간을 떼웠다. 수업은 시작했을 테고 주해성은 3주만에 단정한 모범생의 신분으로 돌아가 반듯하게 앉아 열심히 학교생활을 할 시간이었다.

- 아, 배고파..
라면을 시켜놓고 다음권을 보기 위해 만화책을 들었다가 무심코 폰을 먼저 들여다봤다. 앨범에 들어가 유일하게 하나 있는, 몰래 찍은 주해성 사진을 들여다보며, "폰에서 좀 나와봐 새끼야." 중얼거리다, "안 나올거면 됐다." 하고 그냥 사진을 삭제했다. 배터리도 별로 없네..
깜박하고 충전을 안 했더니 20%정도밖에 남아있지 않은 배터리를 충전시킬까 하다가 귀찮아 그냥 내버려뒀다. 오랜만에 일탈이 하고 싶어지는 날이라 저녁엔 게이바 가서 실컷 놀아야겠다 생각하며 만화책을 들었다. 그렇게 시간을 죽이다 오후엔 갈아입을 옷을 사기위해 쇼핑을 했고, 저녁이 됐을 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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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 11
셔틀 #서준지우
(유치+오글 주의)

지우는 오늘도 고단한 하루가 시작되고 있어. 학교 친구들이 부탁을 했거든.

- 피자빵이랑 콜라랑, 또..

맞아, 사실 부탁이 아니라 그냥 명령이야. 시키기만 하면 다행이지 돈도 안주고 사오래 나쁜놈들이.
일명 셔틀이라고 불리는 직함을 가지게 된 것도 벌써 반년째야.

- 서준아 초코빵?

지우는 한번도 셔틀이 될거라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이 지경까지 오게 만든 사람 또한 상상으로도 해 본 적 없었어. 항상 그 중심에 있는 강서준.
초딩때부터 단짝이었고 무사히 중학교도 졸업했는데 고등학교 입학하면서부터 둘 사이가 멀어지기 시작했어. 아니 그건 그냥 서준의 일방적인 멀어짐이었지. 평범하게만 살아 온 단짝친구는 점점 일진들과 어울리기 시작했고 탈선이란 이런것이다 보여주려는 듯 나쁜짓은 빠지지않고 앞장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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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 11
첫사랑 (완) #서준지우

잠에서 깨 눈을 떴지만 방의 창문을 덮고있는 암막커튼 덕에 고요하고 어둡다. 머리맡에 둔 폰을 확인해보니 오전 10시. 어젯밤 제딴엔 용을 썼는지 아직 곤히 잠들어있는 얼굴을 보며 비실비실 웃다가 문득 지우 몸이 걱정됐다.
오랜만이었는데다 무리했을텐데 몸살이라도 나면 어떡하나 싶어 약이라도 사와야겠다 생각하고 조심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깨기라도 할까봐 조용조용 옷을 걸치고 나왔다. 이상하게 얼굴에 자꾸 웃음이 걸쳐진다.
기분이 좋은것과 행복한 것은 다르구나 하는 생각. 휘파람이나 콧노래가 나오고 웃음도 새어나오는데 그저 기분이 좋아서라기보다는 나 지금 행복한거구나 느껴진다.

- 몸살 약 같은 것도 하나 주세요.
- 감기몸살 약 드리면 돼요?
- 감기는 아니고 운동을 좀 격하게 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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