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보지도 않고 신명나게 내 누드를 잘도 그리고 있는 지호성의 스케치북을 뺏으며 노려봤다.
- 눈꼽 꼈어.
힘껏 야리고 있는 내 기분 따윈 관심도 없이 대수롭지 않게 슥 눈꼽을 떼어주는 이 천진난한만 놈을 어떻게 해야 하지..?
- 눈꼽이고 뭐고 정리를 좀 해보자.
- 무슨 정리?
- 몰라서 묻냐?
고개를 갸우뚱하는 얼굴은 순도 백프로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하고 있다.
- 넌 사랑이 손바닥 뒤집듯 그렇게 쉽게 뒤집어지냐? 그게 그렇게 한 순간에 돌변할 수도 있는 거냐고.
- 그런 건 아닌데,
- 아닌데 뭐. 어제까지만 해도 나 좋다고 졸졸 쫓아다니면서 귀찮게 하더니. 거, 조금 아팠다고 순식간에 사랑이 아니었다? 너 그거 먹튀야, 나쁜새끼야.
- 조금 아팠던 거 아니고 많이 아팠는데..
...뭐, 어쨌든.
- 그래, 그럼 많이 아팠다 치자. 야, 원래 사랑이라는 게 아픔도 있고 슬픔도 있고 기쁨도 있고 서운함도 있고 그런 거 아냐?
- 그렇지.
- 그런 거 알면서 왜 사랑이 아니래.
- 오.. 너 오늘따라 말 되게 잘한다. 근데 어쨌든 사랑하니까 다 견뎌내는 거잖아. 근데 난 못 견디겠다니까?
슬슬 짜증난다는 듯 신경질적으로 입술을 씰룩거리는데 어이가 없어서 잠깐 말을 잃었다. 황당해서 어버버거리는 내게 지호성 결정타를 날렸다.
- 그렇게 억울하면 똘똘이 좀 작게 키우지 그랬어.
와씨, 그게 내 맘대로 되냐?! 내 소중이가 알아서 듬직하게 큰 걸 나보고 무슨 수로 줄이라는 건데!
자기 물건 크다고 구박받는 남자는 세상에 나밖에 없을 거다!
- 하.. 너처럼 이랬다저랬다 하는 놈을 누가 믿어주고 사랑해주겠냐?! 평생 제대로 된 사랑이나 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지호성. 애초에 내가 너랑 무슨 얘길 해. 됐다, 때려치우자.
짜증나서 방으로 들어가 쾅! 소리나게 방문을 닫고
침대에 풀썩 쓰러져 누웠다. 속에 천불이 나는 거 같아서 손에 잡히는 베개를 방문에 대고 냅다 던져버렸다. 가만히 누워있으니 생각할수록 열이 받는다. 누구는 시발 오전부터 지금까지 몇시간을 지 생각하면서 벽에 머리나 박고 니탓 내탓 다 하다가 그래도 그간의 모습을 생각해서 진심이겠거니싶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했는데 이제와서 뭐? 사랑이 아니야? 염병, 그동안 지고지순하지도 않은 사랑타령 한 번 징글맞게 했네 지호성.
- 됐다그래. 어차피 나도 귀찮았는데 속이 다 시원하네.
씩씩거리다 아직 풀리지 않은 빡침을 가라앉히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백번 양보해서
사랑이 아닐 수도 있다치자. 그래, 애초에 지호성이 얘기해왔던거처럼 워낙 가깝게 지내니까 헷갈렸을 수도 있다고. 그러면 내가 이해할 수 있도록 감정의 변화를 진지하게 얘기 했어야 하는거 아닌가? 납득할 수 있게끔 얘기를 해주면 알아들을텐데 난데없이 내 거시기가 커서 감당할 자신이 없으므로
사랑이 아니라니, 이걸 무슨 수로 납득하라는 거야?!
- 아아아, 그만 좀 생각하자..
어차피 끝난 얘기 계속 생각해봐야 내 혈압만 올라가는데 내 뇌는 뭐한다고 자꾸만 생각이라는 걸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머릿속을 비우려 노력하며 좀 더 생산적인 생각을 하자 싶어 눈을 감고
다른 생각, 다른 생각, 속으로 중얼댔는데..
‘하아,아, 아흐윽 해성, 야, 주해성, 흐윽, 해성아, ’
시발. 눈을 번쩍 떴다. 제대로 미쳤구만? 어째서 눈을 감으니 어젯밤 내 밑에 깔려 바르작대던 지호성이 보이는 건데. 아니, 심지어 번쩍 뜬 눈 앞에서까지 아른거릴 정도로 뇌가 열일을 하신다.
..아, 괴롭다 진심. 왜냐고 왜. 왜 이렇게까지 지호성한테 꼴리는거냐고.
- 후우..
이불을 뒤집어써서 숨이 막히는 거 같기도 하고 노답 지호성 때문에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이리 누웠다 저리 누웠다 꼬물대고 있는데 벌컥 방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 해성아, 나 배고파.
- 뒤질래?
아니 상식적으로, 어떤 이유에서든 내가 지 때문에 승질을 내며 방문까지 쾅 닫고 들어왔으면 조금쯤 눈치를 보게 되는 게 사람이잖아. 근데 뭐냐고, 이 족보도 없는 뻔뻔함은.
- 안 뒤지고 야식 시킬 건데 먹고 싶은 거 없어?
뒤집어쓰고 있던 이불을 친히 휙 들춰가며 말똥말똥 날 쳐다보고 한다는
말이 고작 그따위라고? 이쯤되면 지호성이 날 물로 보고 있다는 거 맞지?
- 야.
지호성 멱살을 잡고 힘을 줘 내 앞으로 끌어당겼다. 어어?! 하며 놀란 듯 중심을 잃고 흐트러진 얼굴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당황했는지 침을 꼴깍 삼키며 동그란 눈으로 날 보는게 왜 이렇게 짜증이 나는지.
- 어떡할래?
이내 평소의 담담함을 되찾은 지호성은 평정심을 유지하며 "뭘?" 하고 물었다. 솔직하게 너 보면 존나 꼴린다고 얘기할까? 아니면 살살 꼬드겨볼까? 아니, 애초에 난 무슨 말을 하려고 지호성 멱살을 잡고 "어떡할래?" 라는 말부터 던진 거지?
- ...하고 싶은데, 어떡할 거냐고 지호성.
어쩌면 사랑이 아닌가봐- 말 하던 때부터 난 통제가 불가능한 상태였을지도 모르겠다. 방금 그 말은 내 의지로 한 말이라기 보단 본능적으로 튀어나온 말에 가까웠으니까.
- 도대체 뭘? 일단 이거 좀 놔 봐, 나 숨 막히는데.. 얼굴도 너무 가까이 있고..
그 말에 오히려 멱살 잡은 손에 힘을 더 세게 주었다. 빠져나가려 낑낑대는 지호성이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게.
- 뭘 하고 싶단 거야아..
바싹 붙어있는 얼굴이 부담스러웠는지 눈동자를 굴려대며 물어오는 지호성 말에 충동적으로 오동통한 입술에 짧게 내 입술을 스쳤다. 놀랐는지 버둥대는 지호성
얼굴은 여전히 1cm 정도의 거리로 가까이 있고, 난 잠깐 고민했다. 내게 그렇게나 섹스를 요구하던 지호성이 막상 하고 나니 아파서 싫다 했고 반대로 난 다시 한 번 하고 싶어졌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솔직하게 하고싶다 말해봐야 지호성에겐 절대 통하지 않을 게 분명했고, 내게 잡혀있는
이 몸을 다시 경험해 보려면 솔직함을 조금은 숨겨야 하지 않을까. 지호성은 사랑이 아닌 거 같다 말 했지만 그 이유는 분명 감정이랑은 상관이 없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난 감정을 건드려보기로 했다.
- 좀 놓으라니까? 뭘 하고 싶단 거냐고.
- 사랑.
실은 섹스지만.
'사랑' 한마디에 지호성은 버둥대던 것도 멈추고 굴려대던 눈동자도 멈춘 채 날 빤히 쳐다보며 멍해졌다.
- 대책 없는 니 들이댐에 나만 코 꿰었다고.
- ...아니, 난...
- 어떻게 책임질래.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백프로 니 과실이잖아.
간만에 봤다. 지호성이 당황스러움에 어쩔 줄 몰라 난감해하는 것을.
- 내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도 넌 계속 사랑이 아니라고 말 할래?
- ..난 이미 결론을 내렸,
- 되지도 않는 결론 집어치우라고 했지?
멱살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조금 빼고 다른 손을 지호성의 왼쪽 가슴에 갖다 대었다.
어찌나 세차게 뛰고 있는 건지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심장박동에 솔직히 좀 놀랐다. ...혹시나 싶어 갖다 대 본건데, 아니 뭐 이렇게까지 뛰고 난리야, 부담스럽게..
- 이건 어떻게 설명할래? 비정상적으로 날뛰는, 이거.
- 그건.. 니가 갑자기 이러니까..
대차게 들이대던 것과는 달리 우물쭈물 하며 얼굴이 조금씩 빨개지는데, 나 너무 상황에 몰입했나..? 어쩐지 노답 지호성이 아주 조금 귀엽게 느껴져 손에 힘을 빼고 녀석을 놓아줬다. 스르륵 풀리는 멱살에 퍼뜩 제 몸을 일으켜 세우는 지호성을 쳐다보다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 내가 백날 떠들어봐야 넌 니 생각이 무조건 답인 놈이니까 더는 말 안 한다. 니가 아니라는데 내가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냐. 나도 미친 거 같긴 한데, 좀 지나면 너처럼 아무렇지도 않겠지. 그러니까 서로 건드리지 말자.
문소리가 들리지 않는 거 보니 예상대로 지호성은 건드려진 감정에 당황해서 우두커니 서 있는 거 같다. 이제 어떻게 구슬려볼까.. 음... 근데 내가 왜 이렇게 지호성을 꼬시고 있어야 하는 거야? 아마도 난 지금 새로운 경험에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 가까운 거 같다. 친구와 잤는데 하필 그게 너무
좋았어서 자꾸 생각나고 조금 더 느껴보고 싶고. 너무나도 익숙한 그 얼굴이 침대에선 생소하게 바뀌어서, 질리도록 익숙한 그 목소리가 침대에선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로 바뀌어서, 그래서 오히려 더 호기심이 발동한 거 같기도 하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의 알지 못 했던 은밀한 구석을 훔쳐보게 된 거
같은 기분이랄까.
지호성은 사랑이 아니라 말하지만 심장의 떨림을 확인해버린터라 나처럼 그냥 호기심이 아니라는 건 확실하다. 이상하긴 했지. 세상 어떤 인간이 감정을 확인해보기 위해 친구한테 자자고 덤비겠냐고. 막상 난 호기심이고 지호성은 진심이라 생각하니 친구관계를 깨는 것에 양심이
찔려 그냥 멈춰야하나 싶었는데..
- 그럼 우리 사귈래?
이불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날 난감하게 한다.
- 사실 나도 너랑 사랑은 하고 싶어.
아니, 난 솔직히 사랑이 아니라 섹스를 하고싶..
- 니 말대로 나때문이니까 책임질게.
미치겠네. 왜 갑자기 없던 책임감을 만들어내고 그러지?
- 그새 잠든 건 아닐텐데 왜 계속 이불 안에 숨어있어. 혹시 부끄러워서 그래?
야, 부끄러운게 아니라 혼란스러운,
- 다 큰 놈이 부끄러워하긴. 알았어 알았어, 니 맘 다 이해해.
이해하긴 뭘 이해해, 넌 지금 1도 이해 못 하고 있거든..? 이제와서 사실 난 너랑 한번 더 자보고 싶을 뿐이야,
하기엔 이미 조금전의 내 행동이 걸려서 말도 못 하겠고.. 아니지. 우리가 지금까지 지내온 시간이 얼만데. 사귄다고 해봐야 새삼스레 별 다를 것도 없을 테고 그냥저냥 친구처럼 지내면서 은근슬쩍 잘 수도 있는거고...
오랫동안 친구사이였으니 새삼스레 별 다른 거 없기는, 개풀! 은근슬쩍 잘 수 있기는, 염병!
- 먹어봐.
- ...먹으면 죽을 거 같은데?
지호성은 새삼스레 날 위한 정체모를 요리를 만들어 먹을 것을 강요하고, 그 끔찍이도 청초한 얼굴로 순진하게 "좋은 꿈 꿔." 하며 날 끌어안고 먼저 잠들어버린다. 한마디로 아주 가지가지 한다는 거다.
안 슬퍼. 하나도 안 슬퍼. 조금도 안 슬퍼. 모레 안 와도 돼! 지호성이 먹인 정체모를 음식은 늘 내 속을 탈나게 했고 난 살이 쭉쭉 빠지기 시작했다.
강제 다이어트의 영문을 1도 모르겠다는 듯 지호성은 날 걱정했다.
- 나한테 잘 보이려고 할 필요 없어. 운동을 너무 심하게 하니까 살이 쭉쭉 빠지지.
너한테 잘 보이려고 한 게 아니라 내 성욕을 감당 못 해서 운동으로 푸는거다 맹추야. 더불어 제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줘봐라 내가
살이 빠지나..
게다가 지호성은 내 감정을 자꾸만 제 감정과 동일시시키는데 만약 '난 그렇지 않아.' 하는 뉘앙스로 얘길하면 난리가 난다.
- 나 안 보고 싶었어?
- 어어. 뭐, 그렇지.
이런식의 대답을 했다가는 온종일 들들 볶인다.
- 무슨 반응이 그래. 보고 싶었지?
- 그래, 그래.
대충 대답을 하고 허리나 허벅지를 쪼물딱 쪼물딱거리면 눈이 가로로 타원형이 되어 날 째려보다, "성의 없어." 하고 쪼물딱거리는 내 손을 야무지게 때린다. 한 2주정도 겪어보니 이제 맞장구 쳐주는게 서로의 심신에 도움이 된다는 걸 학습했다.
- 나 보고 싶었지?
아니 일주일이 됐냐, 한 달이 됐냐. 고작 하루였는데 눈물이라도 흘리면서 절절한 고백이라도 하리?! 속으론 생각하지만 입으로 나와서는 안 된다. 근데 이게 참 어렵다. 지나치게 말을 하면 또 내가 바보 된다. 뭐냐면,
- 그래, 보고 싶어서 접시물에 코 박고 죽을까 싶었잖아. 아 진짜 존나 보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네 지호성. 하하하.
이렇게 말을 하면 되려 한심하단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는 거다.
- 뭐야. 미친거야?
라는 말과 함께.
- 오버 좀 하지마.
와 시발 어쩌라는 건데. 어느 장단에 맞춰야 돼.
스리슬쩍 넘어가면 성의 없다고 종일을 들볶고, 열심히 입술에 침 바르고 말을 하면 세상 한심한 놈이 되어버린다. 지호성이 사귈래? 하던 순간부터 내 인생을 휘어잡아버린 망할 내 부랄친구는 점점 날 잡혀 사는 남편마냥 작아지게 만들었다.
- 넌 언제 잘 거야?
- 곧.
- 알았어. 나 먼저 잘테니까 꿈 속에 찾아와야 돼?
내가 뭔 수로 니 꿈속까지 찾아가냐? ...가 아니라 네. 갈게요 시발.
- 그래, 꿈에서 꼭 보자.
어금니를 꽉 깨물고 말을 하면 지호성은 만족스럽다는 듯, 잘 자~ 하고 나긋나긋하게 인사 한 후 전화를 끊는다.
- ...운동. 운동을 해야 돼.
늘상 잠들기 전, 애초에 내가 무슨 생각으로 지호성 멱살을 잡고 사랑하고 싶다는 말을 씨부린건지 백번을 더 후회하며 운동을 한다. 하고싶다는 일념 하나가 날 이렇게 피폐해지게 만들었는데도 내 소중이는 아직 지호성만 보면 자꾸 발딱발딱 선다.
시발, 왜인진 몰라도 개억울해.
- 잘 잤어?
어젯밤 통화했던 건 싸그리 잊고 있는 내게 지호성은 오늘도 정체모를 음식을 내 입에 우겨넣으며 물어왔다. 이제는 미각을 잃을 법도 한데 오늘도 지호성의 요리가 쉣인 게 분명한 거 보면 내 혀는 아직 감각이 살아있나 보다.
- 응.
- 잘 잤다고? 근데 왜 내 꿈에 안 나왔어?
네 저도 참 가고 싶었고 가려고 노력했는데 길을 잃었나 봐요 시발.
- 니가 너무 곤히 자고 있길래 먼 발치에서 보고만 있었지.
- 진짜? 낭만적이네.
생글생글 웃으며 내 입에 음식물을 집어넣던 지호성은,
- 니가 그렇게 낭만적인 줄도 모르고,
한껏 감정실린 주먹으로 날 퍽퍽 때리며,
- 꿈에서 이사했는데 너 안 와서 나 혼자 힘들어 죽을뻔 했잖아. 자기도 참~
맑게도 말해왔다. 이건 아마, 한번만 더 그딴 변명 지껄이면 꿈에서 내가 널 찾아가 죽일지도 몰라요. 하는 말과도 같은것일 테다. 아 엄마 얘 좀 어떻게해봐, 존나 무서워 시발..
그렇다고 내가 맨날 지호성 똘끼에 당하고 사는 것만은 아니다.
- 그만 좀 만져. 니가 맨날 쪼물쪼물 해서 집에 가면 온 몸이 빨개.
이럴땐 내 본능이 날 강하게 만들어 세게 나가게 된다.
- 그럼 오늘은 들어가지 말던가.
끈적한 눈빛으로 지호성을 훑어버리면 흐물흐물해진 채 내게 기대어 얕은
숨을 색색 쉬어대는데, 그럴때마다 어김없이 내 소중이는 오늘이 기회야! 하고 발딱 서 버린다.
- 키스해줘 해성아.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입술을 맞대고 정성껏 지호성 몸을 더듬고, 은근슬쩍 아랫도리를 살살 어루만지는데 그럴 땐 장사 없는거다. 이 놈도 남자니까.
- 우응, 안돼애..
- 안되긴 뭐가 안돼. 돼, 존나 돼.
분위기를 좀 잡아가며 지호성을 눕히는데, 항상 여기까진 성공적이다. 하지만 애써 애무하고 만져주고 키스해가며 옷을 벗길라 치면 단호박을 쳐먹고선,
- 싫어.
똑부러지게 말 하는데 조금씩 인내심이 한계를 드러내던터라 머리를 쓸어올리며
짜증스레 말 했다.
- 야, 섹스없는 사랑이 어딨냐? 난 솔직히 너랑 있으면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싫어도 자연스레 하게 된다고.
- 안 자면 사랑도 아니라는 거야?!
지호성은 마치 배신감에 찬 듯한 얼굴을 하고선 눈물까지 글썽이는데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 그래, 솔직히 난 사랑 그런 거 잘 모르겠고 너 보니까 자꾸 꼴려서 어떻게 한 번 꼬셔가지고 잘 생각이었다, 왜? 그게 꼭 내 탓만은 아니지 않냐? 이렇게 된 게 누구 때문인데?
욱해서 말부터 내지른 후 아차 싶어 조금 후회가 되기는 했다. 혹시 상처받았나 싶어 살짝 눈치를 봤지만,
- 그럼 넌 처음부터 사랑이 아니었단 거네?
지호성이 누구던가. 상처? 그게 뭐죠? 하는 인간이다. 덤덤하게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날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 얘기해줘서 고마워. 나도 어정쩡한 너 보면서 항상 이게 맞는건가 싶었는데 오히려 속 시원한 거 같아. 2주밖에 안 됐지만 나름 즐거웠으니까 별로 후회되지도 않고. 솔직히 오래 된 친구를 잃은 거 같기도 해서 좀 찜찜했거든.
야무지게 제 할 말을 하고선 벙쪄있는 내게, 개학하면 봐. 하고 싱긋 웃기까지 한다. 와.. 이건 또 무슨 감정이지?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감정을 파악하지 못 하고 우리집을 나선 지호성 뒷모습에 주저앉았다.
저게 지금 뭐라고 한거야..?
그 날 이후 난 살이 더 빠지기 시작했다. 운동도 귀찮아서 하지않고 친구들 만나러 나가는것도 귀찮아서 집에만 쳐박혀 있었다. 잘 울리지 않는 카톡소리가 들리면 나도 모르게 다급히 확인해보곤 했는데 쓸모없는 광고톡에 폰을 휙 집어던져두곤 했다. 간간히 지호성 프로필 사진이 바뀌는 걸 보면서,
"잘도 지내네." 혼자 투덜거리기도 하는데 어느 날은,
- 뭐야..?
지호성 프사가 웬 여자와 다정하게 찍은 셀카였고, 상메는 '사랑해.' 라 돼있었다. 이게 뭔가 싶어 당장에 전화를 걸려다가 문득, 내가 왜? 하는 생각에 접었다. 어차피 난 지호성이 내게 진심인 것에 부담을 느꼈었고 생각보다
냉정하게 나와 끝낸것에 열이 좀 받긴 했지만 그만큼 지호성 감정은 쉽게 생겼다가 쉽게 사라지는, 얄팍하기 짝이 없는 허술한 마음이라 생각했었다. 그 얄팍하고 허술한 마음이 이제 다른 여자를 향한 것일 뿐인데 내가 왜 배신감을 느끼고 흥분을 하고 열이 받아 당장 찾아가고 싶은 건지.
- 야, 너 뭐냐?
는 무슨, 이미 찾아갔다 시발. 내 발은 무슨 망설임이라는 게 없냐고, 아오 미친.
- 뭐가 뭐야?
난데없이 찾아온 날 보고도 놀라지 않는 지호성은 그 며칠새 담담한 스킬이 더 늘었나보다. 조금쯤은 놀라줘도 되잖아 이 냉정한 새끼야.
- 카톡 프사 뭐냐고.
- 뭔데?
지가 해놓고도 뭐더라? 하며 카톡을 들어가보는 아방한 모습의 지호성은 곧, "아아. 이게 왜?" 하고 물었다.
- 왜는 무슨 왜야, 그 사진 뭐냐고. 그새 여친 생겼냐?
- 사촌동생인데?
- ..뭐?
- 사촌동생. 자꾸 귀찮게 하는 남자 있다면서 사귀는 척 해 달라길래 증거물로 남겨준 거.
- 야 시발, 그걸 왜 이제 말해?!
- 이제 물어봤잖아.
- 아 어쨌든 존나 짜증난다고 지호성.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던져주며 짜증을 냈다. 끝끝내 담담히 내게 엿을 먹이는 것만 같은 지호성에 대한 마음은
참 좆같게도,
- 이게 뭐야?
사랑일지도 모르겠다.
- 보면 모르냐? 인형이잖아.
- 그러니까 이걸 왜 주냐고.
- ...너 꼬시려고.
병신처럼 전에 내게 커다란 인형을 안겨주며 날 꼬시려 했던 지호성이 생각나 작은 인형까지 사들고 와서 별 같잖은 짓까지 해봤는데 지호성은 인형을 물끄러미
보더니 다시금 날 향한 눈빛으로 말해왔다. '누가 이딴 걸 받고 넘어가냐, 친구야..' 하고 말이다. 내게 인형을 안겨주던 날 내가 제게 보냈던 눈빛과 꼭 같은 눈빛이다. 차라리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어지는 어색함에 몸서리 칠 뻔 하고 있었는데, 지호성이 웃었다. 보조개.. 존나 예쁘네 시발...
- 나 꼬셔서 뭐하게?
- 섹스.
- 뭘 또 그렇게까지 솔직해.
그리하여 지호성과의 연애를 빙자한 노예생활이 다시금 시작되었다. 지호성은 제멋대로 날 부려먹었다. 힘쓰는 일이며, 새로운 꿈이라는 요리사 보조역할이며, 잔심부름이며, 하다하다 손이 없는지 밥까지 떠먹여주는, 그런 생활의 나날.
- 보고싶은 영화 생겼어.
- 니가 보고 싶어하는 영화가 한둘이냐? 이번엔 또 뭐.
개봉하는 족족 다 보고 싶어 하는 지호성은 장르에 상관없이 문화생활을 즐겨야 한다며 자주 영화를 보러다녔고, 그나마 한번씩 영화관 맨 뒷자리에서 키스하는 것을 허락해주는 황송함에 난 끌려다닐 수 밖에 없었다.
개같은 생활이 따로 없다. 오라면 와야 하고 가라면 꺼져야 한다. 이유는 명백했다. 내겐 목적이 있으니까.
- 야, 시발 이만큼 해줬으면 너도 몸 정도는 줘야 하는 거 아니냐?
- 또 그 소리야?
- 아 그러니까 한번만 하자고.
- 나중에.
- 나중에 언제. 다 늙어서 힘 다 빠졌을 때?!
- 해성아 너 그거 알어?
- 뭐 새끼야, 몰라, 아무것도 모르니까 한번만 하자!
- 너 이렇게 씩씩댈 때 되게 귀여워.
살풋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는 지호성을 보면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다가도 이상하게 꼬리를 내리게 된다. 아 주해성 진짜..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된 건지..
- 넣고만 있을게.
- 넣는 과정이 아프다니까.
- 그럼 손가락만. 진짜 손가락만 넣을게. 한번만 하자. 어? 어어?!
여유롭게 살살 웃으며 요리조리 피하는 지호성과 하루에 열두번도 넘게 한번만 하자고 졸라대며 따라다니는 난 주인과 개새끼가 따로 없다.
- 아 그래서 나중에 언제! 그 나중에가 언제냐고 지호성! 거기 딱 서라, 오늘은 절대 그냥 못 넘어가. 한번만 하자!
내가 이렇게 빌게. 한번만 하자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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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때문에 처음 엮이게 됐을 땐 양석호를 쳐 죽이고 싶었다. 그 후에는 그냥저냥 이상한 놈이려니 했다. 크게 바라는 것도 없고, 딱히 위협적인 짓도 안 하고, 뭣보다 계속 보다보니 그냥 양석호라는 놈이 좀 익숙해졌다. 이제는 미친 소리를 해도,
미친짓을 해도 그러려니 하게 되고 보면 볼수록 희한한 놈이라 솔직히 심심하진 않았다. 그래서 까불어도 봐주고 기어올라도 봐주고 말 한마디에 혼자 실실 쪼갰다가 빡쳐 했다가 약 올라했다가 부들부들 하는 게 웃기기도 했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 매 초마다 오르락내리락 욹그락붉그락
파르르 변하는 감정의 변덕이었는데, 방학의 마지막 날이었던 어제도 그렇게 그냥 변덕을 부렸다.
내 침대에 누워 이제는 재미가 없다는 말을 툭 던지는 양석호에게 흘러가듯, 다행이네. 대답하며 게임을 하고 있었고, 이 짓도 그만해야겠다고 중얼대던 녀석은 집으로 돌아갔다.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내 침대에, 그것도 내 품안에 파고들어서, 천사라도 강림한 것 같은 얼굴로 온화하게 잠들어 있는 지호성을 보며 난 거의 밤을 지새웠다. 중간에 잠깐씩 졸긴 했지만 깊게 잠들지는 못 했다.
- 우웅, 해성아..
...잠꼬대로 내 이름 부르지마 이 새끼야, 새삼 기분 이상하니까. 어제 섹스 후 지호성은 의식을 잃은 것처럼 잠들었고 나도 힘이 빠져 잠시 누워 있다가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들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냥 잠들 수가 없었다.
막말로 자위를 해도 뒤처리는 깔끔하게 해야 하는 법인데 지꺼 내꺼 할 것 없이 뒤엉켜있는 단백질 덩어리들을 그냥 두기엔 찝찝하기 짝이 없었다. 물 티슈로 대충 닦긴 했지만 이미 침대시트에 말라붙어 있는 건 어쩔 수가 없었고 지호성 몸도 대강 물 티슈로 닦아주다 적나라하게 흘러내려 말라버린
내게 일을 도와달라고 하는건 대부분 핑계다. 다른 이들이 퇴근을 하면 우리도 곧장 일어나니까. 지하주차장에 내려가 자연스럽게 강팀장 차에 올라타 앉았다. 뭐가 그리도 심란한지 핸들에 팔을 얹고 이마를 댄 채 한숨을 쉬던 강팀장, 아니 강서준은 그자세 그대로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본다.
딱히 갈 곳이 있는 건 아니라 만화카페에 들어가 만화책이나 보면서 시간을 떼웠다. 수업은 시작했을 테고 주해성은 3주만에 단정한 모범생의 신분으로 돌아가 반듯하게 앉아 열심히 학교생활을 할 시간이었다.
- 아, 배고파..
라면을 시켜놓고 다음권을 보기 위해 만화책을 들었다가 무심코 폰을 먼저 들여다봤다. 앨범에 들어가 유일하게 하나 있는, 몰래 찍은 주해성 사진을 들여다보며, "폰에서 좀 나와봐 새끼야." 중얼거리다, "안 나올거면 됐다." 하고 그냥 사진을 삭제했다. 배터리도 별로 없네..
깜박하고 충전을 안 했더니 20%정도밖에 남아있지 않은 배터리를 충전시킬까 하다가 귀찮아 그냥 내버려뒀다. 오랜만에 일탈이 하고 싶어지는 날이라 저녁엔 게이바 가서 실컷 놀아야겠다 생각하며 만화책을 들었다. 그렇게 시간을 죽이다 오후엔 갈아입을 옷을 사기위해 쇼핑을 했고, 저녁이 됐을 땐,
맞아, 사실 부탁이 아니라 그냥 명령이야. 시키기만 하면 다행이지 돈도 안주고 사오래 나쁜놈들이.
일명 셔틀이라고 불리는 직함을 가지게 된 것도 벌써 반년째야.
- 서준아 초코빵?
지우는 한번도 셔틀이 될거라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이 지경까지 오게 만든 사람 또한 상상으로도 해 본 적 없었어. 항상 그 중심에 있는 강서준.
초딩때부터 단짝이었고 무사히 중학교도 졸업했는데 고등학교 입학하면서부터 둘 사이가 멀어지기 시작했어. 아니 그건 그냥 서준의 일방적인 멀어짐이었지. 평범하게만 살아 온 단짝친구는 점점 일진들과 어울리기 시작했고 탈선이란 이런것이다 보여주려는 듯 나쁜짓은 빠지지않고 앞장섰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