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각장에서 자주 마주치는 놈들과 대충 인사를 하고 담배를 입에 물었는데 전화가 왔다. 얘가 누구더라.. 약사 아들이었나..?
- 어, 왜?
- 전에 너한테 연락하려고 했는데 깜박하고 오늘 생각나서 전화했지. 방학때 너가 보내준 사진 있잖아.
- 사진?
- 응. 사진이랑 같은 인물 보게되면 조용히 연락 달라고 했었잖아. 혹시 그거 아직도 유효해?
방학 시작했을 때 주해성 사진을 뿌렸던 게 생각났다. 그 덕에 심심찮게 제보를 받아 곧잘 주해성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기도 했었는데, 그 후엔 함께 미국에 갔고, 또 그 후엔 연애를 시작하면서 제보는
일절 끊겼기에 나조차 잊고 있었다.
- 왜?
- 주말에 비슷한 사람을 봤거든. 여자친구랑 저녁 먹으러 레스토랑 갔다가 우연히 봤는데 낯이 익길래 니가 보내 준 사진 다시 봤더니 비슷하더라고. 근데 동일인이 맞는지는 모르겠어, 이미지가 너무 달라서.
내가 보내줬던 사진은 학교에서 동그리 안경을 쓰고 웃고있는 모범생 주해성을 도촬한 거였는데 약사 아들이 본 사람은 머리를 깐 세미정장 차림의 성숙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오히려 그 갭에서 난 확신할 수 있었다. 주해성이 분명하다는 것을.
- 맞는지 모르겠어서 일단 사진 찍고 너한테 보내려는데 여자친구가 딴짓한다고 자꾸 닦달해서 나중에 연락하려고 했거든. 근데 잊고 있다가 오늘 생각나서 전화해 봤지.
- 사진 보내봐.
전화를 끊고 담배를 태우며 필터를 잘근잘근 씹어댔다.
곧 폰에 도착한 사진은 빼박 주해성이었고 맞은편에는 여자가 앉아 있었으며 둘의 분위기는 좋다못해 폰을 집어던지고 싶을만큼 훈훈하기 짝이 없었다.
- 요즘 너무 바쁜거 아냐? 계속 주해성이랑만 붙어있잖아.
같이 담배를 태우던 놈들이 한마디씩 말을 거는데 내 시선은 폰에서 떨어지질 않는다.
분명 화가 나는데, 무엇에 대한 화인지 명확히 알 수가 없어서 그저 멍하게 사진만 보고 있을 수 밖에 없는 상태다.
- 아무리 재벌집 아들이라지만 뭐 그런 재미없는 샌님이랑 어울려, 너 답지 않게.
- 너한테 찍소리도 못하고 끌려 다닌다며? 쩔쩔매는 찐따라고 소문이 파다하던데.
앞에서 떠들어대는 놈들의 말들도 짜증나지만 일단 약사 아들에게 다시 전화했다.
- 이거 언제였냐?
- 저저번주 일요일일걸? 그날 나 100일이라서 정확히 기억나.
- 몇시쯤?
- 레스토랑 예약이 7시였으니까 그쯤이겠지?
전화를 끊고 담배를 빨아들이며 생각했다. 저저번주 일요일이면..
주해성이 가족들과 저녁식사를 했던 날이다. 원래 나도 전화를 자주 하는 편이 아니고 주해성은 내가 연락하지 않으면 먼저 연락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날은 나도 또렷이 기억난다. 8시쯤인가? 식사 끝났겠다 싶어 문득 전화를 해 봤는데 폰이 꺼져있었고 11시쯤에나, 왜? 하며 연락이 왔었으니까.
- 근데 넌 왜 걔랑 계속 같이 다녀? 미래를 위해?
- 관심이 지나치네 시발.
애들한테 괜한 짜증을 내곤 반으로 돌아갔는데 지금의 감정을 뭐라 정의할 수 없어서 머리가 복잡했다. 수업준비를 하는 주해성옆에 앉자마자 책상에 엎드려 생각을 정리했다. 자꾸만 여자와 함께 있는
주해성의 사진이 머릿속에 가득해지고 화는 점점 차오르는데 그 화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를 모르겠는거다. 단순히 주해성이 여자와 있었다는 사실 자체에 화가 나는게 아닌 거 같다. 그렇다면 주해성이 내게 가족식사가 있다고 거짓말을 해서인가?
그 거짓말이 여자를 만나기 위함이어서? 나와 연애를 시작하며 끌려다니느라 여자 만날 기회가 전에 비해 없을 뿐 애초에 주해성은 여자를 좋아하는 놈이다. 그래서 가끔 그런 생각도 했었다. 나 모르게 다른 여자와 데이트를 할 수도 있겠다고. 그렇다해도 걸리지만 않길 바라기도 했다. 어차피 내가
모르면 그만인 거니까. 그래서 화가 나는 건가?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사실을 알게 돼버려서?
- 일어나, 체육이야.
수업시간이 다 끝나도록 절절 끓는 화와 복잡한 머릿속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날 툭툭 치는 주해성에 의해 엎드린 몸은 일으켰지만 마음을 가라앉힐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손목을 붙잡으며 어디가냐고 어디 아프냐 묻는다. 아니라고 대답하며 잡은 손을 뿌리쳤는데 무슨 일 있었냐며 다시금 말을 건다. 아직 내 감정이 명확하지 않아서 무작정 주해성에게 화를 내고싶지는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말 할 기분 아니니까 건드리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조용해진 교실과 눈썹이 살짝 찌푸려진 주해성을 뒤로하고 문을 향해 걸어가는데 신경을 건드리는 말소리.
- 세상 참 편하게 산다, 쟤는.
순간 꼭지가 돌았다. 내 마음이 진정될때까지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으면 했고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서 나가려고 했는데 비꼬는 말투로 시비를 걸어오면 기분이 안 좋은 내가 씨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잖아.
- 세상 편하게 산다고 했던 놈 누구야, 나와.
한 놈 얼굴을 때리고나니 분명 주해성이 말릴 게 분명했기에 고개를 돌려 녀석을 쳐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다가오려는 게 보여 나설 생각 하지 말라는 경고와 함께 보이는 놈들 아무나 붙잡고 복잡한 기분을 날릴 수 없는 대신 주먹을 날리고 봤다.
- 세상 편하게 사는 놈이 왜 편하게 사는지 보여줄게, 시발. 억울하면 신고를 하든 고소를 하든 해봐, 피 말려 죽여 줄 테니까.
누구라도 지금 날 건드리면 진짜 죽일수도 있을것만 같은게, 원인을 정확히 짚어내지 못한 화는 점점 분노로 바뀌어 갔다.
- 머리 아프니까 그만 좀 해.
결국 두고보지 못 한 주해성이 날 끌어안아 애들과 거리를 두게 했고, 시근덕거리던 난 뒤에서 끌어안고 있는 주해성을 떨쳐내려 하다가
팔꿈치로 옆구리를 세게 쳐버렸다. 주춤하며 팔을 푼 녀석에게 눈길 한 번 주지않고 교실에서 나왔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면서 자꾸만 터질 거 같은 분노의 원인을 찾으려했다. 주해성이 여자를 만나고 그걸 내가 알게 되면 그 여자 머리털을 다 뽑아버리겠다 했었는데 막상 그런 상황이 오고나니
정작 상대 여자에 대한 생각은 나지도 않는다. 머릿속엔 오로지 주해성만이 가득했다. 어쨌거나 나와 사귀고 있는데다 가끔 날 좋아한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말과 행동을 해 놓고, 결국 가족식사라는 핑계의 거짓말을 하고 나 몰래 여자를 만난 주해성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있는 건가.
- 좆같아, 씨발..
하지만 배신감이었다면 당사자인 그 놈에게 지랄 발광을 하지 않았을까? 난 주해성에게 굳이 화를내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럼 이 좆같음은 도대체 뭐냐고. 아까 받은 사진을 다시 봤다.
- ..당연해서 좆같아.
조금 윤곽이 잡혀가는듯한 분노의 원인은, 아마도 스스로한테 있는거 같다. 주해성이 여자를 좋아하는 건 잘못이 아니다. 그래서 화를내고 싶지 않았던 거 같다. 내가 게이이기 때문에 남자를 좋아하는 것과 주해성이 이성애자이기 때문에 여자를 좋아하는 건 같은 이치다. 당연하게 우리는 그냥
날 때부터 그렇게 태어난 거다.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인데, 난 그 당연한 사실을 마치 몰랐던 사람인양 오늘에서야 느낀거 같다. 분명 알고있던 사실인데도 꼭 처음 안 사실처럼 말이다. 누가봐도 선남선녀인 두 남녀가 좆같이 잘 어울려서, 상대적 박탈감이 느껴진다.
수업이 끝난 시간 비서형에게 전화가 왔고 어디냐는 질문에 집이라는 대답만 하고 끊었다. 그렇게 여자를 밝히던 놈이 딴 짓을 안 하는 게 이상한거지 싶기도 했고, 주해성이 이성애자인 건 어쩔 수 없는 거니까 그 자체를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화를 내면 뭐 하나 싶기도 했고,
그래도 사귀는 사인데 이건 아니지 않나 싶어서 괘씸하기도 했고, 어차피 두달후면 연인관계도 끝인데 일일이 분노해서 기운빼지 말자 싶다가도, 가끔 날 설레게 했던 행동들이 생각 나 다시 화가 나기도 했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별 지랄을 다 한다 시발.
- 형 나 지금 혼자 있고 싶..
도어락 누르는 소리가 들리고선 철컥 현관문이 열리길래 당연히 비서형인 줄 알고 돌려보내려 현관으로 나갔는데 의외의 인물이 우두커니 서 있다.
- 그 지랄을 떨어놓고 혼자 있고 싶다?
비서형은 뒤에서 눈치를 보며 "먼저 간다." 하더니 후다닥 사라지고 주해성은 문을 확 열며 성큼 들어온다.
- 안 하던 짓 하지 말고 가라. 지금은 니 얼굴 별로 안 반가우니까.
얼굴을보자 그나마 좀 가라앉았던 마음이 다시 일렁거리며 속에서 뭔가가 터질것처럼 넘실거리는 거 같다.
- 혼자만 심각한 척 하지말고 무슨 일인지 말을 해, 씹새야.
처음 방문한 우리 집에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오더니
거실을 둘러보다 다시 날 돌아보며, "말을 하라고." 하는데 감정의 끈이 너무 팽팽해져 있어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만 같다.
- 꼴 보기 싫으니까 가라. 너한테 화내고 싶지는 않은데 지금 금방이라도 터질 거 같으니까 돋구지 말고 꺼져.
- 뭐가 그렇게 꼬인건데?
애써 진정하려 했는데 피곤하게 굴지말라는 듯한 말투에 순간 머릿속에 번쩍 번개가 치는 것 같더니 결국 터져버려 테이블 위에 있던 폰을 집어 다짜고짜 주해성에게 힘껏 집어던지며, "좀 꺼지라고!" 소리를 질렀다. 늘 굼뜨다 싶을만큼 느릿한 주해성이지만 순발력 하나는 빨라서 제게 날아오는 폰을
한 손으로 탁 받아내더니 다시 내 쪽으로 가볍게 톡 던진다.
- 성격 고쳐라. 뭐 하나 마음에 안들때마다 손에 닿는 거 집어던지고 소리 지르고 깽판 치는 거, 피곤하지도 않냐?
화가나는 와중에도 제게 뭘 던지면 가볍게 받아낼 놈이라는 게 얄미운데도 좀 다행이다 생각하는 내가 병신같다.
방금 주해성이 폰을 못 받았으면 얼굴을 제대로 강타했을 테니까.
- 분조장이냐? 감정적으로 굴지말고 말을 하라고 미친놈아.
- 내가 이렇게 된 게 뭐 때문인데. 뭐? 분조장? 나라고 너때문에 내 기분이 오락가락 하는 게 좋겠냐?!
- 너 혼자 이 지랄을 떠니까 문제잖아. 니 기분이 오락가락 하는게 나 때문이라 쳐도, 니가 이 지랄 떠는 건 내 잘못이 아니라 니 성격 문제잖아.
그 말에 제대로 핀트가 나가서 끓어오르는 화에 못 이겨 눈물이 차오르고 스스로에게 향했던 분노가 그냥 주해성에게 쏟아져버렸다.
- 넌 이해가 안 되겠지. 넌 내가 그냥 귀찮고 피곤할지 몰라도 난 미쳤나 싶을만큼 니가 좋아서 진짜 돌아버리겠는데! 붕붕 떠다니던 기분이 바닥으로 곤두박칠 치는 그 느낌이 얼마나 좆같은 지 아냐?! 내가 제멋대로긴 해도 이렇게 미친놈처럼 오락가락하진 않았다고!
- 하아.. 짜증나니까 쳐 울지 말고 차분하게 말해.
- 넌 매사에 이성적이라 좋겠다 씨발, 아무리 계약 같은 거라지만 딴 년 만날거면 나한테 걸리지나 말던가! 짜증나니까 쳐 울지 말라고? 난 하루종일 화를 어쩔 줄 몰라서 방금까진 오히려 울지도 못 했어, 개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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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도련님 친구가 자꾸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는데 표정이 삐뚜름한게 영 곱지가 않았어. 그래도 도련님한테 해가 되는것도 아니니까 처음엔 신경을 안 썼지. 근데 하루는 도련님 하교를 기다리고 있는데 불쑥 다가오더니 번호를 달래.
내 번호가 왜 필요하냐 물었더니 ㅌㅐ용이가 어쩌고 저쩌고 하며 어설픈 핑계를 갖다붙여. 이 꼬맹이가 왜 이러나 싶었지.
번호를 주지 말았어야 했는데. 매사에 불만인 표정으로 자신을 힐끗거리던 꼬맹이한테 폭풍톡이 오기 시작하는거야. 시시콜콜한 얘기들도 있었고 뭐하냐는 안부연락도 있었고
답이 없음에 불만가득한 짜증도 섞여있었어. 근데 오늘은 좀 심각한 톡이 온거야.
[아저씨 나 아빠한테 맞아죽을까봐 도망나왔는데 갈데가 없어..]
하... 전에 부친한테 골프채로 맞아 멍이 든 걸 본적이 있던터라 신경이 쓰여. 아직 보호가 필요한 나이잖아.
영상 때문에 처음 엮이게 됐을 땐 양석호를 쳐 죽이고 싶었다. 그 후에는 그냥저냥 이상한 놈이려니 했다. 크게 바라는 것도 없고, 딱히 위협적인 짓도 안 하고, 뭣보다 계속 보다보니 그냥 양석호라는 놈이 좀 익숙해졌다. 이제는 미친 소리를 해도,
미친짓을 해도 그러려니 하게 되고 보면 볼수록 희한한 놈이라 솔직히 심심하진 않았다. 그래서 까불어도 봐주고 기어올라도 봐주고 말 한마디에 혼자 실실 쪼갰다가 빡쳐 했다가 약 올라했다가 부들부들 하는 게 웃기기도 했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 매 초마다 오르락내리락 욹그락붉그락
파르르 변하는 감정의 변덕이었는데, 방학의 마지막 날이었던 어제도 그렇게 그냥 변덕을 부렸다.
내 침대에 누워 이제는 재미가 없다는 말을 툭 던지는 양석호에게 흘러가듯, 다행이네. 대답하며 게임을 하고 있었고, 이 짓도 그만해야겠다고 중얼대던 녀석은 집으로 돌아갔다.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내 침대에, 그것도 내 품안에 파고들어서, 천사라도 강림한 것 같은 얼굴로 온화하게 잠들어 있는 지호성을 보며 난 거의 밤을 지새웠다. 중간에 잠깐씩 졸긴 했지만 깊게 잠들지는 못 했다.
- 우웅, 해성아..
...잠꼬대로 내 이름 부르지마 이 새끼야, 새삼 기분 이상하니까. 어제 섹스 후 지호성은 의식을 잃은 것처럼 잠들었고 나도 힘이 빠져 잠시 누워 있다가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들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냥 잠들 수가 없었다.
막말로 자위를 해도 뒤처리는 깔끔하게 해야 하는 법인데 지꺼 내꺼 할 것 없이 뒤엉켜있는 단백질 덩어리들을 그냥 두기엔 찝찝하기 짝이 없었다. 물 티슈로 대충 닦긴 했지만 이미 침대시트에 말라붙어 있는 건 어쩔 수가 없었고 지호성 몸도 대강 물 티슈로 닦아주다 적나라하게 흘러내려 말라버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