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일 도착한다더니?
- 실장이 날짜를 잘못 말해 줬더라고. 근데 너희 되게 친한가보다. 불금에도 만나?
- 아주 각별하지 우리는.
따끈한 피자를 한 조각씩 들며 대화하다 주해성에게 넌시지 물었다.
- 노아한테 말해도 되냐?
뭘? 하는 질문 대신 표정으로 묻는 주해성에게 눈짓으로, '너랑 나.' 했더니 피자를 베어 문다.
- 나한테 할 얘기 있어?
- 주해성이 괜찮다고 하면.
- 니가 언제부터 나한테 의견같은 걸 물었냐?
- 그럼 말 한다?
이제 주해성의 방식이랄지 성격이랄지,
어렴풋이 알게 된 나로썬 꽤나 만족스럽다. 예전 같았으면 우리가 사귄다는 얘길 노아에게 해도 되는 걸까 나름 생각도 해 보고 '주해성이 질색 하겠지?' 로 혼자 결론을 내렸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 나 주해성이랑 연애해.
- 컥, 뭐,뭘 한다고? What? 둘이 뭘 한다고?!
- 연애.
노아는 피자가 목에 걸렸는지 콜록대다 급하게 콜라를 몇 모금 하고선 천천히 주해성을 쳐다보며 이게 무슨 말이냐는 듯한 표정으로 충격에 빠졌다. 그럴 수 밖에. 아무리 노아가 침대에선 남녀 안따지는 놈이라지만 그건 잠자리 취향일 뿐 남자와 연애를 해본적은 없었을테니까.
- ..농담이지?
얼이빠져 멍하니 저를 보는 노아에게 주해성은 곁눈질로 한 번 쳐다만 보고선 다시 피자를 한 입 베어물며, "어쩌다보니." 대답한다. 에헤라디야, 풍악을 올려라. 주해성이 우리 사이를 부정하지 않을 때 마다 하늘을 붕붕 날 것 같다.
- ...연애라는 게 내가 모르는 사이 다른 뜻도 생긴거냐 혹시?
- 니가 아는 뜻 맞고. 내가 고백했더니 받아주더라고, 남 얘기인 양 피자만 쳐 먹고 있는 저 놈이.
노아는 주해성의 어깨에 손을 턱 올리며 진지한 얼굴로, 진짜라고? 물었다. 주해성은 고개만 대충 주억거리며 제 손에 들린 피자에 핫소스를 때려 붓고 피클을 집어 먹는다.
- 말이 돼..?
사실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긴 하다. 그동안 비서형과 주해성이 너무 편견없이 커밍아웃을 받아들였던 것 뿐이지.
- 니가 연애를 한다고? 주해성이?? 그게 가능한 거였다고?!
..아니 주해성이 연애를 한다는 것 보다 남자인 나와 사귄다는 게 더 놀라워야 하는 거 아니냐?
- 안 먹냐?
- 지금 피자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너 평생 연애 안 하고 비지니스상 결혼만 할거라며?
- 넌 세상 일이 다 생각처럼 흘러 가냐?
- 그건 아니지.
- 근데.
- 그러게.
- 먹어.
- 응.
뭔데. 그래서 남자끼리 사귀는 것에 대한 충격과 공포는 어디간건데.
- 뭐가 어떻게 된거든 축하한다.
아니 왜 다짜고짜 축하부터 하고 보냐고. 누가 주해성 친구 아니랄까봐 어쩜 이렇게 편견 없는 것까지 비슷하냐.. 비서형과 이 둘을 보면 게이가 별 다를 거 없는 존재처럼 느껴진다. 마치 모든 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여줄 거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세상은 절대 그렇지 않겠지만, 적어도 이들만큼이라도 내 성향에 편견을 가지지 않아줘서 다행이고 어쩌면 소수성향을 가진 사람들 입장에서 난 엄청난 축복을 받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괜히 마음이 일렁거린다.
- 뭉클한 새끼들, 많이 먹어라.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둘을 보니 나처럼 속 편한 게이가 또 있을까 싶어 안 먹어도 배가 부른 것만 같다.
- 그래서, 피자 먹고 어디 갈 건데?
- 딱히 생각해 둔 곳은 없는데.
야무지게 피자를 먹고 있는 주해성을 비장하게 쳐다봤다. 그래, 불금인 지금부터 주말까지. 이때가 기회다.
반드시 주해성 질투를 끌어내고 만다 내가.
- 이태원에 좀 막장인 술집이 하나 있긴한데, 거기 갈래?
- 왜 막장인데? 갈거면 좋은데 가자.
노아의 말에 게이바라고 얘기해줬더니 호기심 깃든 얼굴로, "오오 한번도 안 가봤어. 재밌겠다." 하길래 씨익 웃었다. 흥미가 가득한 노아와 어딜가든
상관없노라하는 주해성을 보며 다시금 다짐했다. 기회가 있을 땐 잡아야지. 부디 질투작전이 먹혀야할텐데..
소문으로는 사장이 짭새 간부들이랑 친분이 두터워서 단속을 잘 피한단다. 청소년도 자유롭게 사랑을 즐길 권리가 있다는 듯이 민증 검사조차 안 하는 곳이라 고딩들 입장에서도 진입장벽이
없고 그건 곧, 내가 아는 곳 중에 연령대가 가장 다양한 게이바라는 말이기도 하다. 혈기왕성한 놈들부터 아저씨들까지 워낙 나이 폭이 넓다 보니까 작업이 난무하고 성희롱도 비일비재하는, 약간 게이들의 무법지대라고도 볼 수 있는 곳인데 난 거기서 제법 유명했고 작업과 성희롱에 피곤함을 느껴
한참을 가지 않았었다. 비록 오붓한 데이트는 물건너갔지만 노아가 한국에 있는동안 주해성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잘만하면 나한테 득이 될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든다. 이태원으로 향하는 동안 노아는 들떠 보였다. 처음 경험하는 게이바에 대한 호기심 어린 기대가 가득한 반면,
주해성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창밖을 본다. 아직도 그곳에 죽치고있는 죽돌이들이 많이 있을지, 내가 알고 날 아는 놈들이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두고보라고. 내가 지금 너한테 목메고 있어서 그렇지 나도 꽤나 나한테 목메는 놈들 많은, 잘 나갔던 놈이라는 인식을 남기고만다.
아무리 덤덤한 주해성도 나 좋다는 놈들이 나타나면 질투를 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으며 갔다. 도착해서 자리에 앉은후 여기저기 눈길로 훑어보는 노아처럼 나 역시 테이블에 앉아 주위를 스캔했다. 여기 안 온지도 거의 반년은 된 거 같은데 예상대로 죽돌이들은 여전히 몇몇 눈에 띄었으며,
직접적으로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오다가다 본 낯익은 얼굴들도 좀 보인다. 하도 별 일이 다 생기는 곳이다보니 게이들 사이에서 사건사고가 많은 막장이라고 소문이 쫙 퍼진지 오래지만, 그 막장의 분위기를 즐기는 사람들과, 다른곳은 갈 수 없는 고딩들이 만남의 광장으로 이용하기도 하는 이 곳은
나도 옛날엔 꽤나 죽돌이었던 추억이 있다. 지금이야 대가리 좀 컸다고 돈 써가며 여기저기 게이바를 돌아다니지만 반년전까지만 해도 이 곳이 게이들의 천국인 줄로만 알았으니까.
- 맥주 마시려고? 이래봬도 나 입은 고급이다? 좋은 걸로 하나 마시자.
늘 맥주를 마셨던 우리를 보며 노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다. 그러고 보니 노아네 집안이 술로 유명하다고 했던 게 생각 나 오케이 싸인을 보냈다.
- 근데 둘이 사귄다면서 왜 같이 안 앉고 따로 앉아?
피자집에서처럼 주해성과 노아는 나란히 앉아있고 난 혼자 맞은편에 앉아있는데, 나도 요즘 이 문제 때문에 속이 터진다.
- 내 말이 그 말이다. 지금 사귄지 한 달 반이 됐는데 뽀뽀 한 번, 키스 한 번이 끝. 그것도 둘 다 내가 한 거.
- 와우.
주해성은 내게 일절 스킨십을 하지 않는다. 그렇게나 여자를 밝힐땐 스킨십이 자연스럽더니 나와 만나면서는 남자끼리여서인지 도통 손을 대지 않는데 난 늘 피가 끓는다.
최근에 머리를 평소보다 짧게 잘라 종종 반깐 헤어를 하고 가끔 반테 안경을 쓰는데 그 반깐 반테 비주얼이 꽤나 치명적이어서 요즘들어 더 미칠 거 같다. 어차피 눈앞에 쓰는 건 똑같은 건데 예전에 학교에서 동그리 쓰고 다닐 땐 그렇게나 찐따같고 순수해보이더니 머리 좀 자르고 반테 쓰니까
왜 이렇게 남자남자하고 섹시하고 무게감있어 보이는 지 모를 일이다.
- 석호는 할 생각있는데 너가 꼼짝도 안 하는 거? 진짜 사귄지 한 달 반인데 진도가 키스가 끝이라고? 왜?? 남자랑 안 해봐서 그런가?
주해성을 쳐다보며 의아한 듯 물어보는 노아에게 대신 대답했다.
- 하긴 했지. 사귀기 전에.
- 근데 사귀고 나선 왜 안 해?
그러더니 슬쩍 날 위아래로 훑어보며 "별로였나..?" 중얼거리는데 정노아 좀 맞을까..?
- 하고나니까 한 며칠 죽으려 하더라고. 사람들 있을 땐 티 안 내는데 아무도 없으면 엉거주춤 걷고 허리 두드리고 난리던데.
응?
- 그 후로 계속 쫄아있길래.
으응?!
- 한동안 가까이만 가도 흠칫 거리잖아. 그런 놈 데리고 내가 뭘 하냐.
뭐라고?! 아니, 내가 며칠 힘들어했던 건 사실이지만 흠칫 거린 건 혹시나 만져줄까, 안아줄까 싶어서 기대감과 긴장감에 그랬던건데..? 그럼 놈 데리고 뭘
하냐니 미친놈아, 이런 짓 저런 짓 할 수 있는 짓은 다 해줬어야지! 이새끼 왜 안 어울리게 쓸데라곤 하나없는 배려따위를 하고 지랄이야.
- 석호 표정 보니까 금시초문인데..?
노아 말에 주해성도 왜 그런 표정이냐는 듯 날 쳐다보는데 어이가 없다. 그러고보니 그럼 이새끼 그동안 어떻게 푼 거지?
얼마 전 싸울 때 보니 따로 여자를 만난 거 같진 않고, 한달반을 혼자 풀만한 놈도 아닌 거 같은데..
- 너 어떻게 풀고 있었냐? 고자라도 된 건 아니지?
주해성은 오히려 무슨 질문이 그렇냐는 듯, 혼자 풀었지 뭘 어떻게 풀어. 한다. 헐.. 여자밝힘증 환자 주해성이 한달반을 그냥 혼자 해결했다고?
멀쩡한 날 옆에 두고 뭐하는 짓이냐고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지만 일단 딴 년을 만난 건 아니니까 참아보기로 했다.
- 혼자 풀었다고? 너 왜 이렇게 됐.. 아니, 그것보다 언제부터 상대에 대한 배려심이 그렇게.. 아니, 아는 여자들도 많았을 텐데 왜.. 아니, 혼자 푼다고 시원하게 해소가 되진
않을건.. 아니, 어쨌든 충격이네..
믿기지 않는다는 듯 횡설수설 하는 노아의 말에 백퍼 공감을 하며 우린 주해성을 뚫어져라 쳐다봤고, 정작 뜨거운 시선을 받고 있는 녀석은, "뭐." 하며 나와 노아를 무신경한 시선으로 번갈아 쳐다본다. 와.. 진짜 보면 볼수록 이상한 놈이네..
- 과일은 서비스입니다~
상큼하게 다가 온 알바생은 세팅을 하며 우리를 은근슬쩍 한 번씩 쳐다보면서, "멋있는 사람들끼리 앉아있으니 오늘 다른 테이블 난리나겠네요." 하며 웃는데, 안 그래도 아까부터 시선이 많이 느껴지긴 했다.
이목이 집중된 듯 여기저기서 우리를 눈 여겨 보고 저들끼리 쑥덕대며 웃는데 그건 뭐, 예전에 혼자 다닐때도 자주 있던 일이라 신경 쓰지 않았었다. 오히려 일부러 날 건드리지 않았다는 듯 말하던 주해성의 필요없는 배려심과, 다른데서 풀지않고 혼자 풀었다는 예의넘치는 언행에 아까부터 아랫배가
간질거리고 밑으로 피가 쏠릴 거 같은 느낌에만 온 신경이 쓰일 뿐이다. 아 시발, 뭔데 설 거 같냐..
- 화장실 다녀올게.
계속 앉아있다간 내 아들래미가 눈에띄게 기립할거 같아 진정을 좀 하려 화장실 거울에 비친 모습을보며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후우- 길게 심호흡했다. 그러니까, 주해성 말은..
- 나만 괜찮으면 언제든 할 수 있다..?
혹시 내가 착각한 부분은 없을까 다시금 방금 전 대화를 되짚어봤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런 놈 데리고 뭘 하냐.' 그 말이 모든 걸 설명해 주는 것만 같아,
- 아, 좀.. 가라앉아라, 제발..
그 몇마디가 뭐라고 자꾸 흥분이 되는지 모르겠다.
의미없는 애국가를 중얼거리며 몸을 좀 진정시킨 후에야 화장실을 다시 나섰는데, 노아와 술을 마시고 있는 주해성이 저 멀리 보여 새삼 두근거림에 심장이 머리에서 뛰는것만 같다.
- 뭐냐..?
그런 내 기분을 잡친 건 지나가다 붙잡힌 모르는 사람의 손길이었다. 엉덩이를 터치하던 타인의 손에
우뚝 멈춰서 네명이 앉아있는 남자들을 훑어보며 날 터치한 남자에게 시선을 꽂았다. 조금은 술이 오른 듯 보이는 남자가 손목을 잡더니, 같이 한잔 어때? 묻는데 발딱 서던것도 가라앉는 거 같다. 왼손으론 내 손목을 붙잡고 오른손으로 은근히 내 허벅지를 만지는 취한 남자에게,
"손 떼지? 나 한 성격하는데 감당 되겠어?" 물었다. 뭐가 좋다고 히죽대는 건지 실실 쪼개며 좀 더 노골적으로 엉덩이로 손을 옮기는데, 테이블을 보니 누구 생일이었는지 케잌이 가운데 자리해 있었고 나머지 세명은 동물원 원숭이 쳐다보듯 날 보며 낄낄댄다. 이 좋은날 빡치게하네..?
- 내가... 분명 손 떼라고 했잖아, 이 씨발.
가운데 자리 잡고 있던 케잌을 들어 날 주무르는 남자의 얼굴에 쳐박았다.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아무 대처도 못 한 네 명은 웃음을 잃었고, 얼굴로 케잌을 먹게 된 남자는 내 손목을 놓고 욕을 지껄이며 잔뜩 들러붙은 생크림을 닦아낸다.
- 취하려면 곱게 취하던가 사람 봐가면서 들이대야지. 내가 친절하게 경고도 해줬는데 어디서 들이대 씨발놈이.
취한 남자는 화가 났는지 씩씩거리며 일어나 다소 거칠게 내 손목을 잡고 때리기라도 할 듯 손을 올리는데 같잖아서 웃음도 안 나온다.
- 석호야!
..이건 또 뭐야.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남자와 내 사이를 가로막는 또 다른 남자가 케잌남의 올라 간 손을 붙잡으며 고개를 뒤로 돌려 날 쳐다본다. 괜찮아? 하는 쓸데없는 걱정과 함께.
- 오버하고 있네. 나 혼자서도 충분하거든?
예전에 잠깐, 한달정도? 만났던 놈이다. 나랑 동갑이었던가?
아닌가? 두살 많았었나? 사실 인적사항 같은 건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그저 내게 집착이 쩔었다는것만 생각나는.. 귀찮게 굴지 말고 꺼지라며 놈을 내 앞에서 밀어내고 케잌남에게 다시 말했다.
- 아니 만지라는 새끼는 안 만지고, 니가 뭔데 날 만져 존나 빡치게 시발.
이 난장판인 와중에 뒤에서 누군가 또 내 엉덩이를 가볍게 톡치는데, 오늘 무슨날이냐..? 개판이네 씨발.
- 뭐냐 또, ..주해성?
깜짝아. 뭔데. 방금 이 개판에 나타나서 내 엉덩이를 건드린게 주해성이라고? 이새끼 둘이 있을때나 좀 만져주지.
- 만지라는 놈은 안 만지고-에서 만지라는 놈이 나냐?
- 어? 어어, 그렇긴한데..
- 니가 무슨 쌈닭이냐? 왜 맨날 여기저기서 싸우고 지랄이야.
- 지나가는데 이 새끼가 추행하잖아.
주해성은 케잌으로 얼굴이 엉망이 된 남자의 어깨를 툭 쳐서 다시 의자에 앉히더니, 조용히 넘어갑시다. 했고, 구남친을 보며 내게 물었다.
- 이 사람은 뭔데?
- 어? 얘는 그냥 막아준..
- 석호야, 잠깐 얘기 좀 하자. 너 번호도 바꾸고 여기도 안 와서 그동안,
- 니가 이러니까 내가 피한 거 아냐 시발, 귀찮게 하지 말라고 좀.
- 맘에 안 드는 거 있으면 내가 다 고친다고 했잖아. 난 아직도 매일 니 생각나고,
- 하지마, 좀. 내 생각도 하지 말고 찾지도 말고 니 인생 살아 제발. 누가보면 존나 오래 만난줄 알겠네.
잠시 우리를 보고 있던 주해성은 손목을 잡더니 제 뒤로 날 보내며, "노아 심심하겠다. 가서 놀아줘." 하더니 구남친에게 나와 무슨 사이냐 물었다.
어정쩡하게 주해성 뒤에서 노아 혼자 있는 우리 테이블을 한 번, 주해성을 한 번, 앉아있는 네 명의 남자들도 한 번, 구남친도 한 번 쳐다보며 오도가도 못 하고 바쁘게 시선만 왔다갔다 움직였다.
- 석호랑 만났던 사람인데..
- 아, 근데 아직 못 잊어서 껄떡대고 있는거고?
- 그쪽은 누구..?
어정쩡하게 서 있던 날 돌아보던 주해성은 마치 제 옆에 내 공간을 만들어주듯 한쪽 팔을 벌리고선, "안겨." 했고 얼떨결에, "응? 아, 응." 하며 찰싹 들러붙었더니 공간을 내어준 팔로 내 허리를 감으며 말했다.
- 보다시피, 그쪽이 못 잊고 있는 양석호가 좋아죽는 현재 남자친구.
..주해성 지금, 방금 한 자기소개 실화냐..?
- 설명 됐으면 조용히들 넘어갑시다?
머릿속이 백짓장이 됐다. 나 방금 무슨 소리 들은 거? '남자친구'라는 단어의 어감이 썩 기분 나쁘다며 치를 떨던 주해성이 제 입으로 그 말을 한다고?!
- 노아랑 놀아주고 있으랬더니 왜 안 가고 서 있어 병신아.
입을 틀어막고 제게 들러붙어 있는 내 이마를 꽁 때리는데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도 모르겠다. 와중에 케잌남은 쌍으로 기분 잡치게 한다며 다시 일어나 날 쳐다보며, 씨발년이 어디서- 라고 말 하는 순간 주해성이 케잌남의 얼굴에 주먹을
내다꽂았고, 그 한 대 때리는 소리가 심상치 않아 한번 더 입틀막을 했는데 어떻게 맞은건지 바닥에 꼬꾸라져서 입에선 피가 줄줄 흘러내리걸 보니 이건 그냥 피부가 터진 게 아니라 이가 나간 게 분명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어쩌면 턱 뼈에 금이 갔을지 모르겠다.
앞으로 이 새끼한테 까불면 안되겠는데..? 공수도 괜히 하는게 아니구나...?
- 분위기 파악 못 하고 더 맞을래, 깽값 받고 닥칠래?
하는짓은 과격하지만 흥분하지 않고 평소의 그 차분한 목소리의 주해성에게 대답도 못 하고 바닥에 쳐박혀 걸쭉한 피만 하염없이 쏟아지는 입을 틀어막고 끙끙대는
남자에게 때 아닌 애도를 표하며 주해성 팔을 붙잡고, 가자. 했다. 주해성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수표 몇장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 너도 저렇게 되고 싶으면 계속 양석호 귀찮게 하던가.
구남친에게도 경고를 하고서야 발길을 돌리는 주해성을 보니 힘이 다 빠져 그대로 주저앉고 싶을 정도로
심장이 세차게 뛰어 어쩔줄을 모르겠다. 결국 몇걸음 가다 멈춰서서 주저앉고 말았다.
- 오늘 왜 자꾸 심장폭격해 미친놈아.. 다리에 힘 풀리잖아..
- ..야. 니 말이 맞다는 거 확인했다, 방금.
- 무슨 말?
- 내 감정이 애정이라는 거.
갑자기? 너무 간절히 바라면 헛소리가 들리는 건가? 아무리 주해성이 쿨하다지만 이렇게 쉽게 인정한다고?
- 너 좋아하는 거 맞나보다.
..미친. 진짜 인정했어. 날, 좋아한다고. 우정이 아니라 애정으로.
- 어어, 그러니까, 방금 뭐라고.. 뭘 한다고..? 날 어쩐다고?
- 어디서 귀 먹은 척이야, 씹새야. 너 좋아한다고.
날 좋아하고 있다는 확신을 하고는 있었지만 본인 입으로 인정하는 것은 또 다른 거였다. 아 진짜 너무 좋아서 심장마비로 죽을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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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도련님 친구가 자꾸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는데 표정이 삐뚜름한게 영 곱지가 않았어. 그래도 도련님한테 해가 되는것도 아니니까 처음엔 신경을 안 썼지. 근데 하루는 도련님 하교를 기다리고 있는데 불쑥 다가오더니 번호를 달래.
내 번호가 왜 필요하냐 물었더니 ㅌㅐ용이가 어쩌고 저쩌고 하며 어설픈 핑계를 갖다붙여. 이 꼬맹이가 왜 이러나 싶었지.
번호를 주지 말았어야 했는데. 매사에 불만인 표정으로 자신을 힐끗거리던 꼬맹이한테 폭풍톡이 오기 시작하는거야. 시시콜콜한 얘기들도 있었고 뭐하냐는 안부연락도 있었고
답이 없음에 불만가득한 짜증도 섞여있었어. 근데 오늘은 좀 심각한 톡이 온거야.
[아저씨 나 아빠한테 맞아죽을까봐 도망나왔는데 갈데가 없어..]
하... 전에 부친한테 골프채로 맞아 멍이 든 걸 본적이 있던터라 신경이 쓰여. 아직 보호가 필요한 나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