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전까지 서준을 먼저 유혹해 안겨놓고선 가느다란 목소리로 끝을 선언한 지우를 이대로 보낼수가 없어 옷을 챙겨입고 가려는 앞을 막아선다. 그동안 끊임없이 '이래도 안 떠나? 이래도 날 안 놔? 이래도 버틴다고?' 마치 서준의 한계를 확인하려는 듯 상처를 주면서도
그만보자는 말은 했던적이 없었으니까.
- 갑자기 내가 싫어진 건 아닐거잖아..
- 그동안 나때문에 괴로워하는 네 모습을 속으론 즐겼어.
- 뭐..?
- 무섭지 않아? 네 고통이 날 웃게한다는거.
지우 손목을 잡고있던 손아귀에 절로 힘이 들어가는데 아프단 소리 한번을 하지 않는다. 늘 그랬다.
한지우 입에서 힘들다, 아프다, 괴롭다는 말은 허락되지 않은 금기어라도 되는 양 입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런 감각이 한지우를 살아가게 만드는 동력이었다. 완벽한 자기혐오에서 비롯된 비정상적인 정서.
- 그런 말 듣고싶어서 묻는 게 아니잖아..
- 무슨 말이 듣고 싶은건데? 다른 이유없어. 그냥, 그 사람이 원해. 너와 끝내길.
- 너도 그러고 싶어?
그 질문에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는 지우는 사실 잘 모르겠다. 그 사람이 원하는데 내가 원하고 안하고가 무슨 상관일까.
- 대답해봐. 그새끼가 원하는 거 말고 네 진심, 네 생각을 좀 말해보라고 제발!
- 소리 지르지마.
- 하.. 그래, 미안해. 미안한데, 너는 어떻냐니까?
- 그 사람이 원하는게 내가 원하는거기도 해.
그의 통제안에 있게된지 벌써 수년인 지우에겐 본인의 마음을 들여다볼 이유같은 건 필요치도 않았다.
한지우에겐 그 사람이 전부이지만 서준은 아니었다. 여유롭다 못해 넘치게 호화로운 집안과 항상 자신을 존중해주는 좋은 부모 밑에서 부족한 거 하나없이 사랑받으며 예쁜길만 걸었던 서준이 느낀 절망은, 한지우가 처음이라 대처할 방법을 몰랐다.
- 이제 결핍없는 사람 만나.
서준은 슬픈건지 화가 나는건지 답답함인지, 그것도 아니면 자신의 무력함을 느껴서인지 심장이 자꾸만 조여와 건들기만해도 넘실대는 눈물이 투둑 떨어질 듯 차오른다. 고운 손이 눈가를 어루만지며,
- 넌 다 가진 사람이니까, 나 하나 못 가지는 것 정도는 괜찮아.
서준을 달래는 말투와 그렇지못한 메시지의 언행이 고약하기 짝이 없었다. 지난 6개월간 몸을 섞었을뿐 특별한 사이가 아니었기에 지우의 일방적인 끝맺음에는 이별이란 단어조차도 갖다붙일 수 없었다. 그만큼 하찮은 관계였다. 홀로 아픈것은 서준의 몫으로, 그날 이후 지우는 서준의 사적인
대화시도나 연락을 철저히 차단했다. 표정을 잃은 채 며칠이나 지났을까. 다 죽어가던 서준의 눈동자에 다른 빛이 띄게 된 건 회사앞에서 지우를 기다리고 있는, 한지우의 모든것을 가진 그 사람을 본 후였다. 조금이라도 지우를 곁에서 보고싶은 마음에 발 맞춰 퇴근길을 나섰는데 기다리고 있는
그를 보자 서준의 심장이 날뛰었다. 초면이지만 서로가 누군지 알아본 건 직감이었을까.
회사까지 찾아와 기다린걸 보면 아주 중요한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지우를 데리러 온 게 아닌가싶은 서준의 생각이 기우이길 바랬건만,
- 이리와 지우야. 갈데가 있어서 데리러 왔어.
안 좋은 예감은 언제나 들어맞기 마련이다.
- 가지마.
본능적으로 손목을 붙잡았지만 지우는 가벼이 서준의 손을 떼어내고, 자신에게 다른 사람과의 하룻밤을 종용하는 정신나간 제 연인의 곁에 섰다.
- 그쪽 맞죠? 지우가 잠깐 만나준 회사사람. 그쪽이 좋아한다니까 거절도 못하고 좀 놀아줬나본데.. 우리 지우가 참, 정이 많아요.
예쁘고 값비싼 장난감이 내 것이라고 자랑하듯 베베꼬는 투로 의기양양하게 싱글싱글 웃는 면상에 주먹이 나가려던 찰나,
- 팀장님. 회사앞이에요. 보는 눈 많잖아요.
지우 얼굴에서 읽은, '이사람 건드리면 두 번 다신 너 안봐.' 지우 얼굴에서 읽은 말에 이를 악물고 참아낸다.
- 애인있는 사람 그만 건드리시죠? 하긴, 계속 건드리고 싶을만큼 우리지우가 좀.. 잘하죠? 침대에서.
연인이라는 새끼가 이딴말을 지껄이는데도, 자신을 이딴식으로 취급하는데도
말 한마디 보태지않고 아무렇지 않아하는 지우 모습이 서준의 화를 더 부추기고, 여지껏 한지우앞에선 한없이 유약해보이던 서준의 얼굴에 매서우리만치 서늘함이 들어선건 당연한 변화일지도 모르겠다.
- 더는 날 화나게하지 않는 게 좋을겁니다.
- 화나게 하면 뭘 어쩌시려고?
- ...나 지금까지는 그 어떤 경우에도 참아왔어 지우야. 근데 이젠 안되겠다.
연인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때도, 비정상적인 두사람 관계를 들었을때도, 절대 서준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을때에도, 어여쁜 몸에 누군지도 모를 새끼들이 남긴 상처와 흔적을 봤을때도, 제 연인이 죽으면 따라 죽을거라고
했을때에도, 그만보자고 선을 긋고 끝을 말했을때도, 서준은 꾸역꾸역 참기만 해왔다. 둘 사이를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가 갈라놓으려 애쓰지 않았던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한지우가 원하지 않으니까. 제가 끼어들어 괜히 지우가 다치는 게 더 끔찍했으니까.
- 상식적이지 않은 니들 사이에 좀 껴볼까하는데, 괜찮죠? 나같은 훼방꾼 하나쯤 끼어든다고 그 위대한 두사람 사랑이 꿈쩍이나 하겠습니까?
수동적이기만 했던 마음을 고쳐먹었다. 사방이 닫혀있는 네 세상에서 널 꺼내올 수 없다면, 정 네가 나오기 싫다면 기꺼이 내가 그 세상으로 들어가겠다고.
거기가 진창이라면, 그게 두사람의 살아가는 방식이라면 나 역시 비정상적이고 진창인 너희들 방식을 따라주겠다고.
- 오늘은 물러나죠. 조만간 또 보게 될테니까.
니까짓게 견고한 우리사이에 껴들 수 있을거 같냐는 표정으로, "기대되네요." 말하는 남자의 목을 당장이라도
비틀어버리고 싶었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부서사람들의 속닥거림이 여기저기 지우 귀에 들려오곤 했다. 한동안 근심거리는 혼자 다 짊어진 사람처럼 보이더니 하루아침에 강팀장이 예전의 그 사내 햇살담당으로 돌아 온 것에 대한 수근거림이었다.
어제와는 사뭇 다른 표정과 밝은 목소리에 지우 역시 조금은 의아해했다. 달라진 것이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사람들 모르게 따라붙던 시선이 사라졌고, 틈이 보이면 다가와 조용히 말을 걸던 목소리가 사라졌고, 기침만 살짝 해도 사탕과 함께 건네던 걱정이 사라졌고, 우연히 눈이라도 마주치면
사르르 웃어주던 미소가 사라졌고, 모르는 이와 하룻밤을 보낸 다음날엔 말을 하지않아도 알아채던 세심함이 사라졌다. 지우만이 느낄 수 있는, 이 회사에서 지우만이 받아 온 서준의 태도가 달라졌음을 느낄 수 있는 사람 역시 한지우 한명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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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도련님 친구가 자꾸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는데 표정이 삐뚜름한게 영 곱지가 않았어. 그래도 도련님한테 해가 되는것도 아니니까 처음엔 신경을 안 썼지. 근데 하루는 도련님 하교를 기다리고 있는데 불쑥 다가오더니 번호를 달래.
내 번호가 왜 필요하냐 물었더니 ㅌㅐ용이가 어쩌고 저쩌고 하며 어설픈 핑계를 갖다붙여. 이 꼬맹이가 왜 이러나 싶었지.
번호를 주지 말았어야 했는데. 매사에 불만인 표정으로 자신을 힐끗거리던 꼬맹이한테 폭풍톡이 오기 시작하는거야. 시시콜콜한 얘기들도 있었고 뭐하냐는 안부연락도 있었고
답이 없음에 불만가득한 짜증도 섞여있었어. 근데 오늘은 좀 심각한 톡이 온거야.
[아저씨 나 아빠한테 맞아죽을까봐 도망나왔는데 갈데가 없어..]
하... 전에 부친한테 골프채로 맞아 멍이 든 걸 본적이 있던터라 신경이 쓰여. 아직 보호가 필요한 나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