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간에 울리는 전화의 발신자를 보아하니.. 또 술 마셨구만? 아니나 다를까. "나 좀 데리러 와." 분명 내가 술 취해서 전화하지 말라고, 앞으로는 데리러가지 않겠다고 몇번이나 말했는데 귓등으로도 안 듣지. 그래, 니가 무슨 죄가 있겠냐. 짝사랑하는 내가 죄지. 다~ 내 죄다 내 죄야.
- 어딘데.
[ 여기 우리 고딩때 자주가던 돈까스집. ]
- 하.. 가까우니까 데리러가긴 하는데 오늘이 진짜 마지막이다.
[ 히힛. 빨리와 강서준. ]
군대도 같이 가 준 나한테 (물론 내가 맞춰서 간 거지만) 이러면 안되는거 아닌가? 복학하고나서 무슨 약속이 그렇게 많은지 나랑은 잘 놀아주지도 않는게
딴사람들이랑은 잘도 마시고 놀다가 꼭 취하면 데리러 오라고 한다. 이젠 내가 한지우 친군지 한지우 전용 운전기산지 알 수가 없다.
- 얼마나 퍼마신거냐..
이 추운 날 입 돌아가고 싶은건지 불 꺼진 식당앞에 꼬깃꼬깃 몸을 접어 앉아 졸고있는 꼴을보니 내일 또 숙취로 헤롱거릴게 눈에 선하다.
- 일어나.
- 와써어?
술 취해도 한지우답게 말을 또박또박 잘하는 편인데 말꼬리 늘어지는거 보니 필름도 끊길게 분명하고.
- 무거우니까 힘 줘서 걸어 쫌.
- 힘이가 안 들어간다아..
키도 나보다 큰게 흐느적거리는 몸을 온전히 내게 맡긴채 매달려있어 코앞에 있는 차까지 데려가는것도 쉽지않다.
웬수도 이런 웬수가 없다.
- 벨트매고. 야, 벨트 매라고.
눈을 뜬건지 감은건지 모를만큼 풀려있는 놈한테 내가 뭘 바라냐.. 안전벨트를 채워주며, 내가 니 기사냐? 핀잔을 줬더니 취했어도 대답은 또 잘 해요.
- 차 있는 친구가 너밖에 없단 마리야..
집에 태워다주면 안 들어간다고 버틸거 뻔히 알기에 말하지 않아도 우리집으로 가고있는 내가 호구지 뭐. 차로 십분밖에 안 걸리는 내 자취방에는 이미 한지우 옷이며 칫솔이며 속옷까지 없는 게 없다. 학교 근처에 있는 제 자취방은 작은 원룸이라 아무리 깔끔하게 정리정돈 잘 하고 사는 한지우여도
좁은 방을 넓게 쓸 수 있는 방법따윈 없었다. 반면 정리정돈과 거리가 멀어 너저분하게 대충 살고있어서 좁아보일 뿐이지 실상 우리집은 혼자 살기엔 넉넉한 편이다. 그래서 한지우는 우리집에 올 때마다 볼멘소리를 하곤 했다.
- 이렇게 좋은데 살면 감사합니다 하고 좀 치우고 살아.
지가 같이 살아줄 것도 아니면서 잔소리는..
- 잠이나 자.
- 우리 딱 한잔만 더 하까?
- 아니. 너 이미 만취상태거든?
입으로는 반항해보지만 내 몸은 이미 냉장고를 뒤적이며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안줏거리를 스캔중이다. 아오 강서준 호구새끼..
황도 캔을 따서 가져가려다 잔소리 듣기 싫어 접시에 곱게 옮겨담고 소주와 맥주를 챙겨 거실테이블에 올려놓으니, 언제 게슴츠레 했냐는듯 반짝반짝 눈을 빛내는 한지우가 또 얼마나 술에 잡아먹힐지 심히 염려스럽다.
- 꼴 보니 내일 숙취로 하루를 통째로 날리시겠네.
- 나 아직 멀쩡해.
어디가 멀쩡한데. 정신머리는 이미 잠든 거 같은데.
- 분명히 말하는데 이제 다시는 뒤치닥거리 안 해준다. 취했으면 곱게 택시타고 알아서 집에 가. 말해봤자 내일이면 기억도 못할거 같지만.
- 이런 날 혼자 집에 있기 싫으니까 너 부른건데.
- 이런 날이 어떤 날인데.
- 속상한 날?
- 왜? 여친이랑 싸웠냐?
- 응.
갑자기 내가 술이 땡기네...? 허구헌날 싸우고 위장에 알콜을 퍼부을거면 왜 사귀냐고, 보는 사람 짜증나게.
- 왜 싸웠는데.
- 몰라, 그냥 매번 사소한걸로 싸우는거지 뭐.
한지우는 내가 황금비율로 말아놓은 소맥을 마시더니 황도를 우물우물 뇸뇸거리며 물었다.
- 넌 오늘 또 고백 받았다며? 필현이가 예쁘다고 난리치던 애라던데.
- 우리학교는 왜 이렇게 소문이 빠르냐.
대수롭지않게 말하며 술을 삼키는데 오늘따라 달지도 쓰지도 않아 밍밍한게 딱 좋지도 싫지도 않은 지금 내 기분같다.
- 넌 고백도 많이 받으면서 왜 연애를 안 해?
- 여친이랑 심심하면 싸우는 너 보니까 하기 싫어서.
- 와.. 내 탓 하기 있냐?
니 탓이 맞긴하니까 부정하진 않았다. 그저 밍밍하게 느껴지는 술만 꼴깍꼴깍 목으로 넘기고 잔을 내려놓는데 한지우가 덥썩 내 손을잡고서 검지 끝을 살핀다.
- 다쳤어?
- 살짝 베인거.
- 어쩌다가?
- 택배박스 뜯다가.
- 넌 왜 이렇게 부주의하냐?!
- 누가보면 내가 너 다치게 한 줄 알겠다. 내 부주의로 내 손가락 다친건데 니가 왜 급발진이야.
사심없는 터치가 얼마나 사람 돌게 하는지도 모르고 옆에 앉아 내 손을 쪼물딱대는 해로운 놈. 평소엔 내 체온이 더 높은데 술만 마시면 늘 서늘하던 한지우 손이 나보다
더 뜨거워진다. 만질거면 사심이라도 가지고 만지던가, 쓸데없이 쪼물대고 난리야. 덩달아 열이 오른 손을 거둬와 맥주잔에 가만히 대고 식혔다.
- 여친이랑 화해나 빨리해. 괜히 술마시고 나 귀찮게 하지말고.
- 아~ 싸우는것도 지겹다. 그냥 헤어질까..
- 그러던가.
꽁냥대고 있는 꼴은 보기 싫을거 같아서 일부러 같이 만날 일은 피해왔지만 헤어진다고 해서 한지우가 나한테 올 것도 아닌데 둘이 헤어지든 말든 나와 무슨 상관이 있으랴. 니가 남자를 좋아할 날은 오지 않을테고, 기적적으로 그런 날이 온다해도 절친인 날 좋아하게 될 일은 더더욱 없을텐데 난 왜
아직도 널 좋아하고 있는건지 스스로가 개탄스럽다.
- 나 사실 지금 취했거든?
- 뒷구르기 하면서 봐도 취한거 알아.
- 분명 필름끊겨서 내일 기억도 못 할 거야.
- 내가 더 잘 안다고. 그러니까 그만 마시고 자던가.
-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난 술만 취하면 니가 보고싶다?
아씨 황도 먹다가 기도막할 뻔. 사심없는 스킨십 뿐 아니라 사심없는 말도 얼마나 사람 미치게 하는지 모르는 놈. 그러다 벌 받아 한지우.
- 차 태워 줄 놈이 나밖에 없다며.
- 그건 핑계고.
술에 먹힌후의 한지우는 항상 날 힘들게 한다. 여친도 있는 놈이 자꾸 날 찾고, 사심없는 터치로
날 꼬시지만 다음날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기억도 못 하면서 헷갈리게 만든다.
- 가끔.. 네가 여자도 아닌데 손을 잡고 싶어져.
좋겠다. 넌 손만 잡고 싶어서.
- 취한김에 좀 더 심한 주정부려도 돼?
- 안돼.
- 진짜 안돼?
- ...돼.
늘 또박또박 말은 잘 하면서 풀린 눈을 한 채 흐느적거리는
몸을 내게 기대오는 취한 한지우는 오늘도 내 어깨에 머리를 잠시 묻었다 살짝 떼고선 따끈한 손을 내 목에 얹으며 입술을 맞댄다. 호구같은 난 거절하지 못하지만 내일이면 한지우는 분명 그럴것이다.
- 나 어제 실수한 거 없어?
있다고 하면, "무서우니까 안 들으래. 우리 사이에 주사정도는 눈 감아주라.. 넌 하나밖에 없는 내 절친이잖아." 하며 속 안 좋으니 해장하자고 찡얼대며 내 침대위에서 꼼지락대고 있겠지. 헷갈리는것도, 기대하는 것도, 나 혼자인 걸 안다. 우린 친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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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나길 머리가 좋았다. 학창시절 반장일을 도맡아했고 비상한 머리덕에 직업군의 선택지도 다양하다 못해 널려있었지만 좋은 직업을 선택하진 않았다. 착한척이라면 학생때 지겹도록 해왔으니 탁월한 재능으로 오히려 나쁜 직업을 선택했다. 그건 바로 누군가의 목숨을 앗는 일. 나는, 소시오패스다.
- 법조인이라..
어둠의 루트로 들어오는 청부의뢰를 받은지도 5년이 넘어가니 이제는 점점 재미가 떨어지던 참이다. 애초 살인에 흥미를 느꼈던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돈을 벌기위한 목적도 아니었다. 의뢰인들에겐 저마다의 사정이 있기 마련이다. 도덕심과 죄책감따위를 느낄수 없는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