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교길에 컵볶이 오물오물 먹으며 집으로 걸어가던 중딩 한지우가 놀이터 벤치에 앉아있는 강아지랑 눈이 마주쳐. 아, 다시 보니 강아지가 아니라 사람이네. 컵볶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얼굴이 꼭 맛있는거 앞에 두고 침 흘리는
강아지같아. 무릎을 감싸안고 불쌍한 포즈로 벤치에 앉아선 뚫어져라 쳐다보며 마른침을 꼴깍 삼키니까 차마 발을 못 떼겠어. 살랑살랑 흔들리는 꼬리도 보이는 착각이 들지만 분명한 사람이기에 인간의 언어로 말을 걸었지.
- 머,먹을래?
- 웅!
자세히보니 본인이랑 또래같은데, 하교할 시간에 교복도 아닌 일상복을 입은데다 뭔가 꾀죄죄한게 첨엔 가출청소년인가? 싶었는데 그러기엔 너무 티없이 해맑아보여. 먹던건데 줘도 되나싶고 포크대신 꽂혀있는 이쑤시개도 침이 묻었을텐데 찝찝하진 않을까 싶은 지우 생각과 달리 며칠 굶은 것처럼
맛있게 먹어치우는 강ㅇ..ㅏ..아니, 사람이 입술에 묻은 양념까지 혀로 훑어서 싹 먹어치우고 한 말이 지우에겐 좀 충격적이야.
- 나 이거 처음 먹어봐!
...떡볶이를?
- 먹어보고 싶었는데 엄청 맛있다🥲
표정만 보면 미슐랭쉐프가 한 요리라도 먹은것처럼 때아닌 감동한 얼굴에 지우는 자기도
모르게 옆에 앉아서 계속 대화를 이어나가.
- 근데 너.. 혹시 학교 안 다녀?
- 응. 다니고 싶은데 난 똑똑해서 학교 안 가도 된대.
...생긴건 멀쩡하다 못해 아이돌 뺨치게 잘 생겼는데, 좀 모자란가?
- 난 한지우라고 하는데, 넌 이름이 뭐야?
정신이 쵸큼 아픈가싶어 어린이한테 얘기하듯
정신이 쵸큼 아픈가싶어 어린이한테 얘기하듯 자연스럽게 상냥한 말투로 묻는 지우에게 "강서준"이라고 대답해. 이름도 얼굴만큼 잘 생겼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
- 몇살이야?
- 15살.
- 나랑 친구네?
- 우리 친구야?!😯 나랑 친구 해줄거야?!
- 응? 어어, 그래..
- 나 친구 없었는데 기뻐!!
따흑.. 불쌍해.. 입고있는 옷도 신발도 유행하는 브랜드 하나 없어. 나이는 동갑인데 학교도 못 가고 떡볶이도 못 먹어보고 꼬질꼬질 해가지고는, 얘는 대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거야.. 이런 애를 보니 부모님께 유행중인 가방 사달라고 졸랐던 자신을 반성하게 돼. 커서 효도할께요 엄아 아빠...
자기반성중인 지우 귀에 꼬르륵 소리가 들려.
- 배 고파?
- 응. 오늘 하루종일 굶었어.
방금 컵볶이를 호로록 먹었다지만 한참 성장기에 그정도 간식거리로 배를 채울 순 없겠지. 주머니를 탈탈 털어보니 김밥헤븐 정도는 데리고 갈 수 있을 거 같아.
- 밥 먹으러 갈래?
- 나 돈 없는데...
- 내가 살게. 비싼건 못 사주지만.
- 진짜? 나 먹어보고 싶은게 있는데.. 비싼거면 어떡하지?
- 뭔데?
- 라면.
- ?
- 비싸...?
울상이 된 잘생긴 얼굴을보니 마음이 아파. 라면도 못 먹어봤다고...? 얜 지금까지 뭘 먹고 산거야?
설마 티비에서나 보던 길거리 쓰레기 뒤적거리며 배를 채우고 사는 건 아니겠지?ㅠ
- 안 비싸. 내가 사 줄게. 가자.
몸은 다 자랐지만 아무래도 정신연령이 어린거 같으니 유치원생 대하듯 손을 내밀자 망설임없이 꼭 잡아오는 서준일 데리고 김밥헤븐으로 가. 김밥 두줄에 라면에 만두까지 시켜주자
감격하는 서준이 이내 걱정스레 지우를 쳐다봐.
- 이거 다 사 줄 돈 있어?
- 있으니까 시켰지. 얼른 먹어. 라면은 불기전에 먹어야돼.
- 와... 지우 부자구나...
이 불쌍한 애를 어쩌면 좋아... 와구와구 먹어대는 서준일 그저 짠하게 보고만 있자, 넌 왜 안 먹어? 묻는데 마치
'엄만 배 불러. 우리 아들 많이 먹어. 알았지?' 하는 생각이 드는거야.
- 서준아. 어디 살아?
우리 동넨가싶어 물어봤는데 동공이 하염없이 흔들려. 여지껏 쉬지않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우물쭈물 하는 거 보니, 하...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집도 없는거야?!
- 근처 살면 가끔 같이 밥 먹자고 하려던 거였는데 내가 괜한거 물었나보다. 얼른 마저 먹어.
안타까운 마음에 종종 챙겨주려 했는데 아무래도 서준에게 상처만 준 오지랖이었던거 같아 미안해져. 시무룩해진 거 같지만 다독여가며 입 앞에 김밥을 갖다대고 "아~" 하니까 그건 또 받아먹어.
진짜 강아지 같네.. 실컷 배불리 먹이고 나왔더니 이제 진짜 막막한 기분이야. 집도 절도 돈도 없는 애한테 '잘가' 라고 하기도 좀 그렇고, 어디서 지내는지도 모르는데 '다음에 봐.' 하기도 좀 그렇고, 집에 데려가자니 부모님도 놀랄거고 계속 재워줄 수 있는것도 아닌데...
- 어..? 지우야 뛰자!
고민을 거듭하고 있던 지우 손목을 붙잡고 달리는 서준에게 왜그러냐 물어볼새도 없이 뛰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정장입은 남자들이 쫒아와. 우왘 뭐야 저 사람들은! 잡히면 장기 다 뜯길거같은 덩치들을 보며 전속력으로 달리다 한적하고 좁은 골목에 도착해 숨을돌리고 물어봐.
- 저 사람들 뭐야?!
- 부모님이..
- 됐어. 말하지마. 안해도 돼..
서준이 부모님이 엄청난 빚을 진 게 분명해. 그러니 정신도 온전치 않은 아들이 집도 없이 길거리를 헤매게 두는거겠지. 이미 해는 저물고 있는데 아무래도 오늘만큼이라도 지우는 자신이 이 아이를 돌봐줘야 겠다는 사명감마저 들어.
부모님한테는 잘 설명해드려야겠다 생각하며 "우리 집으로 가자." 말했는데,
- 여어~ 이게 누구야? 한지우가 왜 이런 위험한 골목에 다 있지?
오늘 무슨 날인가봐. 튀지않고 조용히 학교생활을 하는 지우와 같은 반인 일진패거리야. 딱봐도 삥 뜯으려는 분위기에 조때따 싶은 지우는 주머니에
얼마나 남았더라 생각해보지만 김밥헤븐에서 밥값내고 남은 거라곤 동전 몇개밖에 없어. 점점 다가오는 무리의 위압감이 느껴지지만 자고로 어린이(서준이)는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에 땀이 뽀짝뽀짝 나는 손으로 주먹을 꽉 쥐며 어리둥절해 있는 강서준 앞에 서서 일진애들을 정면으로 마주했어.
- 그 다부진 표정은 뭐야? 설마 우리랑 싸우기라도 하게?
- 그,그게 아니라 난 그냥 집에 좀 가려고...
막상 마주서니 오금이 저릴거 같아 골목을 나가고싶지만 가능할리가.
- 누구 맘대로 가, 확!
맞겠다 싶어 눈을 질끈 감은 지우 귀에 빡! 소리가 들려.
슬쩍 눈을 떠보니 낄낄대며 위협적으로 주먹쥔 손을 지우 얼굴위로 들어 올리던 놈이 바닥에 꼬꾸라져 있고 지우 눈 앞엔 꾀죄죄한 서준의 등이 보여. 무슨일이 일어나는 건가 혼란스러울 정도로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 방금전까지만 해도 지우가 지켜줘야 할 거 같았던
강아지..가 아니라, 어린이..가 아니라, 강서준이 1대 다수로 싸우고있어. 움직임이 크지도 않고 너무 여유롭게 슉슉 피하고 톡톡 치는거 같은데 그 톡톡에 다들 쓰러져. 컵볶이 보면서 침흘릴 거 같던 강아지 어디갔지...? 일진애들이 다 널부러진 충격적인 현장에 얼이 빠져있는데 서준이 뒤돌아
보며 해맑게 웃어.
- 나 오늘 지우 집 가는거야?
- 네...가 아니라, 너 뭐야?!
- 웅?
고개를 갸웃하더니 지우 손을 덥썩 잡고선 "가자!" 골목을 빠져나가며 헤헤거리는 서준이 기묘하다 못해 기괴해. 여기까지만 해도 꿈인가 싶은데 골목을 나오자마자 아까 둘을 쫒아오던 험상궂은 정장남들한테
붙잡혀서 뭘 해볼 겨를도 없이 서준이 팔다리를 네 명의 남자가 한쪽씩 붙잡고 번쩍 든 채 어디론가 척척 걸어가. 놓으라며 바둥거리는 서준이가 저들에게 끌려가서 장기적출당할까 무서워진 지우는 어쩔줄 모른채 주저앉아 덜덜 떨리는 손으로 신고를 하기위해 폰을 꺼내는데,
- 넌 아무것도 못 본거다.
언제부터 옆에 있던건지 정장남 하나가 경고를 해. 신고해도 소용없으니 불똥튀지 않으려면 얌전히 집에나 가라고. 그날 밤 지우는 한숨도 못 잤어. 초롱초롱 컵볶이를 보며 침을 꼴깍 삼키던 어린아이같은 서준이 자꾸 생각나서 괴로워. 반대로 싸움은 어디서 배웠는지
일진들을 가볍게 제끼는 여유만만한 태도도 생각나서 부디 그 아이가 정장남들이 한눈 파는 동안 멀리 도망쳤기를 기도하기도 했지. 다시 볼 수 있다면 꼭 맛있는 밥을 사주고 하루라도 집에서 따뜻하게 재워줄 수 있길 바랬어. 일주일만에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다시 보게 될 줄도 모르고 말이야.
- 안녕. 난 한지우 친구 강서준이야. 다들 반가워.
급하게 등교하게 되서 교복을 다음주부터 입을 수 있을 거 같다는 서준의 사복은 학생이 입고다닐 수 있을법한 브랜드따위가 아니라 장인이 한땀한땀 만든 명품중의 명품이란 것은 나중에서야 알게됐어. 생각해보니 첨 만났을때 집도 돈도 없는거
같고 꼬질꼬질해 보이긴했지만 냄새가 난다던가 머리가 떡졌다던가 하진 않았단 걸 왜 몰랐을까.
- ..부담스러우니까 친한 척 하지 말아줄래?
- 나랑 친구 해준다고 했으면서...
울망거리는 얼굴만 보면 마음이 약해지지만, 등하교때마다 정장남들이 "도련님!"하며 학교앞에 진을 치고 있는걸보고
누가 가까워지고 싶을까. 분식을 못 먹어본 것도, 화폐가치를 모르는 듯 비싸지 않냐며 묻던 것도, 학교를 안 다니는 것도, 전부 지우가 생각했던 측은함과 거리가 멀었어. 알아주는 조폭 우두머리의 귀한 늦둥이 아들이 그동안 너무 과보호속에 자랐을 뿐, 강서준은 정신이 아픈것도 아니었고
정신연령이 어린것도 아니었던거야. 학교생활을 해보고싶어 집에서 땡깡을 부리다, "내 새끼 학교에서 누가 괴롭히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안돼." 하는 단호한 부모때문에 충동적으로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채 가출한답시고 급히 집을 뛰쳐 나갔던 것일 뿐, 따지고보면 세상물정 모르는 온실속의
화초같은 도련님이었지. 집에서 배운거라곤 주먹질과 연장질밖에 없는 화초가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지우는 평범한 일상을 잃어가고 있어.
이 시간에 울리는 전화의 발신자를 보아하니.. 또 술 마셨구만? 아니나 다를까. "나 좀 데리러 와." 분명 내가 술 취해서 전화하지 말라고, 앞으로는 데리러가지 않겠다고 몇번이나 말했는데 귓등으로도 안 듣지. 그래, 니가 무슨 죄가 있겠냐. 짝사랑하는 내가 죄지. 다~ 내 죄다 내 죄야.
- 어딘데.
[ 여기 우리 고딩때 자주가던 돈까스집. ]
- 하.. 가까우니까 데리러가긴 하는데 오늘이 진짜 마지막이다.
[ 히힛. 빨리와 강서준. ]
군대도 같이 가 준 나한테 (물론 내가 맞춰서 간 거지만) 이러면 안되는거 아닌가? 복학하고나서 무슨 약속이 그렇게 많은지 나랑은 잘 놀아주지도 않는게
딴사람들이랑은 잘도 마시고 놀다가 꼭 취하면 데리러 오라고 한다. 이젠 내가 한지우 친군지 한지우 전용 운전기산지 알 수가 없다.
- 얼마나 퍼마신거냐..
이 추운 날 입 돌아가고 싶은건지 불 꺼진 식당앞에 꼬깃꼬깃 몸을 접어 앉아 졸고있는 꼴을보니 내일 또 숙취로 헤롱거릴게 눈에 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