ㄴㅊ Profile picture
Feb 23 68 tweets 12 min read
자발적 아싸 이쟤노의 요즘 하나뿐인 낙
사람들 발길 끊긴 폐건물에서 추위에 오들오들 떨고 있는 고양이 부둥부둥해주기 #젠런
같이 밥먹자고 엉겨붙는 동기들 뿌리치고 편의점 봉지 손목에 매달고 걸음 닿는대로 걷다가 우연히 가게 된 폐건물
한적한 공간이 꽤 마음에 들어서 칠 벗겨진 벤치에 눕듯이 앉아
따끈따끈한 봄햇살 맞으면서 편의점에서 사온 샌드위치 하나 뜯어서 우물우물
근데 어디선가 들리는 뽀시락소리
벤치에 기대고 있던 고개만 들어 소리가 들린 곳을 쳐다보면
유일하게 열려있는 창문 하나 그 창틀에 앉아 홀로 한겨울인듯 오들오들 떨고 있는 치즈고양이 한 마리
본가에 있는 제 고양이들 생각도 나고 떨고 있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해서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쟤노
얼마나 몸이 안 좋으면 사람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있다가 쟤노가 살짝 안아올리자 그제야 깜짝 놀란 듯 몸을 움츠려
한껏 견제하는지 까만 동공이 확장된 채로 올려다보면서도 여전히 오들오들 떨리는 작은 몸뚱이
노란 털이 가디건에 다 들러붙든 말든 좀더 품안에 보듬으며 목덜미 부근을 쓰담쓰담
그렇게 5분정도 흘렀나
잘게 떨리던 몸은 호흡에 맞춰 천천히 움직여
그제야 품에서 고양이를 놓아주며 여기저기 살펴보면
아픈 길냥이라고 하기엔 눈꼽도 없고 털도 윤기가 좌르륵
정상체온을 되찾으며 기력도 살았는지 금방 쟤노의 허벅지를 훌쩍 뛰어넘어 열린 창문 안으로 쏙 들어가버리는 고양이
폐건물에 세들어 살고 있나?
고개를 쭉 빼서 종종거리는 고양이의 뒷모습을 쫓다가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에야 늘어져있던 몸을 일으킨다
여전히 쟤노 손목에 달랑거리는 편의점 봉지
연어? 참치? 쟤는 무슨 맛을 좋아하려나
내일부터는 봉지가 좀 더 무거워질 예정
*
점심 공강에 맞춰 매일 폐건물로 향하는 쟤노
계절은 봄을 벗고 여름을 꿰입을 준비하는데
여전히 고양이는 같은 자리에서 추위에 오들오들 떨고 있지
그럼 쟤노는 어느덧 한달 점심시간을 함께 보내며 익숙해진 몸짓으로 고양이를 폭 안아줘
떨리던 몸이 차츰 안정되고 체온이 뜨끈히 회복될 때까지
떨림이 잦아들고 나면 고양이는 언제 얌전히 안겨있었냐는듯 금방 쟤노의 몸을 타넘어
폐건물 창틀에 앉아 까만 동공으로 쟤노를 가만히 쳐다봐
꼭 고맙다고 이야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눈을 천천히 깜빡여
우리집 고양이들도 안해주는 눈키스를 쟤가 해주네
쟤노도 따라서 눈을 한번 느릿하게 깜빡이고
살랑거리는 노란 꼬리를 눈으로 쫓다가 편의점 봉지에서 제 점심거리와 같이 사온 참치캔을 꺼내들면
아무런 미련없다는 듯 폐건물 안으로 쏙 들어가버리는 고양이
제가 사온 먹이를 단 한번도 먹어주지 않는 고양이가 얄미울 법도 한데
쟤노는 그저 아쉽다는 듯 웃고 말지
이것도 네 취향이 아냐? 그럼 어떤 걸 사와야 네가 좀 먹어줄까..
이런 생각이나 하면서
*
- 야 쟤노야 같이 나가자 어?
- 관심없다니까
- ...그럼 읹준이 못봤어?
- 황읹준?
- 어 점심시간마다 안 보이네 누구처럼
- 몰라 못봤어
- 아 너 아니면 읹준이라도 데리고 가야 하는데
과팅 같이 나가자고 들러붙는 동기 손 뿌리치고 오늘도 편의점 들러 폐건물로 향하는 길
평소와 다른 게 있다면 교수님과의 모임 때문에 1시간쯤 늦어버린 시간이랄까
1시간 내리 추위에 떨고 있진 않았을지 걱정되는 마음에 걸음을 재촉했는데...
- ...황읹준?
- ...이쟤노...
매번 저를 반기..진 않았지만 맞이해주던 고양이 대신 과동기 읹준이 쟤노가 항상 앉는 벤치에 널부러져 있잖아
자발적 아싸인 본인과 달리 자타공인 인싸인 읹준과 단둘이 있어본 적이 없는 쟤노
아씨 어색한데...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고양이는 보고 가야지 싶어 읹준에게 물어보지
- 저기
- 응...
- 너 혹시 여기서 고양이 못 봤어?
- ...고양이?
- 어 노란색이랑 하얀색 섞인 고양인데
- ...못봤는데..
- 아...
폐건물 내부를 기웃거리며 고양이를 찾다가 문득 동기가 읹준을 찾던 게 기억이 나지
영수가 너 찾던데, 라고 말하며 고개를 뒤로 돌려 읹준을 쳐다보는데
제대로 마주한 읹준의 모습이 심상치가 않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선 숨도 가쁘게 쉬어대고 있잖아
- 야 너 어디 아파?
단번에 벤치로 다가가 읹준의 안색을 살피면 꼭 열이 나는 사람처럼 쌕쌕
노란 염색머리 위로 손을 올려보면 이마에서 전해지는 열이 뜨끈뜨끈 땀이 삐질삐질
- 괜찮아? 너 열 나 지금
- 알아...
- 병원 가야지,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 쫌 있으면 괜찮아져...
보는 사람은 깜짝 놀라서 안절부절못하는데 열나는 당사자는 열에 취해 헤롱헤롱한 상태로 시간 지나면 괜찮아진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이상한 그림
근데 그 말이 사실이잖냐
5분 정도 지나니까 정말로 읹준이 언제 그랬냐는 듯 두 눈 말똥하게 뜨고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슥 닦아내잖냐
이게 무슨 상황이람
두 눈을 끔벅이면서도 읹준의 몸이 정말 괜찮아진 게 맞는지 슬쩍슬쩍 훑어보는 쟤노
그러다가 둘의 눈이 딱 마주치고
민망함에 눈을 확 피해버리기도 전에 읹준의 까만 눈동자가 쟤노의 눈을 옭아매듯 올곧게 쳐다보는데
...왜 갑자기 고양이가 생각났을까
걱정해줘서 고맙다며 살포시 접히는 눈매가 고양이의 눈키스를 닮아서인지
아니면 옅은 바람에 살랑거리는 노란 머리가 고양이의 꼬리를 닮아서인지
혼자만의 생각에 풍덩 빠져있느라 쟤노는 못 들었지
걱정해줘서 고맙다는 읹준의 말 끝에 조그맣게 따라붙은,
항상...
이라는 단어를 말이지
*
그날 이후 저도 모르게 읹준을 자꾸만 살피게 되는 쟤노
괜히 어디 아파보이진 않는지 보게 돼
근데 그런 모습 없이 항상 생글생글
자타공인 인싸답게 주변엔 사람들이 항상 드글드글
저런 애를 보면서 고양이를 떠올리다니 나도 참
저렇게 사람 어울리기 좋아하면 고양이보다는 강아지쪽 아닌가
발발거리고 쪼끄만...말티즈?
그러다가 혼자 흠칫 놀라지
다큰 성인 남자애한테 말티즈 같은 작은 동물 닮았다고 갖다붙이는 건 무슨 낯부끄러운 생각이냐며..
생각 대신 머리카락이나 털어내며 왁자지껄한 읹준의 무리로부터 멀어지는 쟤노
- 야아 읹준아 오늘은 쫌 같이 먹자 점심!
- 안돼 나 약속 있어
- 그놈의 점심약속은 매일 있냐?
- 엉 매일 있어
뒤에서 들려오는 대화를 흘려보내며 오늘은 고양이한테 어떤 사료를 줘볼까 고민이나 하지
*
점심 때가 되어 본인 먹을 삼김, 고양이한테 줄 습식 파우치랑 생수 한병 담긴 편의점 봉지 손목에 달랑달랑 걸고 오늘도 폐건물로 향하는 쟤노
왠일인지 오늘은 편의점에 사람이 별로 없어 금방 계산을 마쳐서 평소보다 좀 일러
그래봤자 10분 안팎이지만서도
내리쬐는 햇빛이 뜨겁다 싶어
관리의 손길 닿지 않아 치렁치렁 우거진 나무의 그늘로만 걸음을 옮기다
문득 앞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어보면
앞서 걸어가고 있는 사람의 익숙한 뒷모습이 보여
종종 가벼운 발걸음, 걸음에 따라 퐁실퐁실 움직이는 노란 머리가 말이야
저번에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황읹준도 폐건물에서 종종 시간을 때우는 건가
별로 안 친한 동기와 점심시간을 보낼지, 아니면 추위에 떨고 있을 고양이를 오늘은 외면할지
고민하느라 쟤노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져
그와 반대로 앞서 걷고 있는 읹준의 발걸음은 갑자기 빨라져
뭔가 급한 일이라도 있는 듯 후다닥 폐건물쪽으로 달려가잖아
왜 저러지? 작아지는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다
혹시 며칠 전처럼 열나서 저러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되잖아
고민은 팔랑 날려버리고 급히 읹준을 따라가는 쟤노
읹준은 있는지도 미처 몰랐던 폐건물 뒷편의 쪽문 그 안으로 쏙 들어가버리고
들어가도 되는 거 맞나.. 주저하면서도 결국 읹준을 따라 건물 내부로 들어서는 쟤노
스산한 복도를 걸으며 이곳저곳을 살피다 저 앞에 문이 열려있는 강의실을 발견하지
황읹준은 저 강의실로 들어간 건가
조심스레 다가가 문 틈새로 강의실 내부를 들여다보면 역시나 읹준의 모습이 보여
어딘가 불편한지 몸을 웅크리고 있는 읹준에 역시 어디가 아픈가 싶어 다가서려는 쟤노
그러나 이어지는 장면에 쟤노의 몸은 굳어버리고, 쟤노의 눈은 점점, 이윽고 더할 나위 없이 커진다
왜냐면,
웅크린 읹준의 몸이 작아지고, 또 작아지다, 이내 쟤노가 알고 있는 이의 모습이 되어버렸거든
그래 그러니까 얘 말이야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뒷걸음질치다 편의점 봉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버리고
읹준... 아니 고양이... 아니 황읹준... 여튼 그 생명체가 번뜩 고개를 들고 소리난 쪽을 쳐다보고
그렇게 둘의 눈이 딱 마주쳐버리지
정-적...
이내 쟤노보다 더 놀란 표정을 지은 채 굳어있던 고양이가 방금 전까지 읹준이 입고 있던, 그러나 지금은 주인을 잃은 옷가지들을 풀쩍 뛰어넘어 이 당혹스러운 상황에서 도망치려하다가 몇걸음 떼어내지 못하고 몸을 웅크려
그러고는 늘 그랬듯이 몸을 오들오들 떨기 시작해
그러면 쟤노는 습관처럼 다가가 고양이를 품에 꼭 안고 체온을 올릴 수 있게 도와주지
어벙벙한 머릿속을 정돈도 못한 채로, 늘 그랬듯이 목덜미를 연신 쓸어주면서
그렇게 5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떨림이 잦아들면
쟤노의 품에 안겨있던 고양이가 액체처럼 품안에서 흘러내려 바닥에 가볍게 착지해
그러곤 유일하게 열린 창문의 창틀에 식빵 굽는 자세로 앉아선 뭔가 단단히 뿔이난 것처럼 꼬리를 바닥에 탁탁 내려치다 이내 제 발 사이로 고개를 파묻어
꼭 쟤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그러면서도 쟤노에게서 완전히 관심을 끄진 못했는지 작은 기척에도 귀는 연신 쫑긋쫑긋
여전히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 못한 쟤노
어떻게 해야 하지 고민하다 이내 강의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혼자 생각해봤자 뭐가 해결이 되겠어
믿긴 어렵지만 저 고양이가 아무래도 황읹준...인 것 같은데, 어쨌든 다시 인간으로 돌아올 테니까, 그때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물어보면 되겠지
놀란탓에 벌렁벌렁 뛰어대는 심장을 쓸어내리며 편의점 봉지를 뒤적거려
제 몫의 삼김을 꺼내들다 멈칫
잠시의 망설임 끝에 습식 파우치를 꺼내들어 고양이에게로 조심히 다가가
일단 지금은 고양이니까... 오늘은 먹을지도 모르니까... 하는 생각으로 고양이 머리맡에 파우치를 내려놓으려는데
그 순간 번뜩 고개를 든 고양이가 쟤노의 손을 할퀴지
쟤노의 짧은 비명과 함께 다시 둘의 눈이 마주치고
새빨간 피가 맺혀 아픈 사람은 쟤노인데 왜 아프게 한 쪽이 더 깜짝 놀란 얼굴인지
아무래도 고의는 아니고 본능적이었던 것 같지
그래서 쟤노는 나무라는 대신 사과를 해
- 놀라게 해서 미안
그러고는 고양이에게서 좀더 떨어진 곳에 사료를 올려두곤 아까 앉아있던 자리로 되돌아가서 삼김을 우물우물 먹기 시작해
삼김을 먹는 내내 느껴지는 시선을 부러 못 본 척하면서
그러니 이번엔 고양이가 먼저 조심조심 다가와선 검붉은 피가 굳은 손가락 주변을 서성여
미안하다는 표시인가 싶어
괜찮다고, 본가 가면 내 얼굴 잊은 고양이들한테 이방인 취급 당하며 할큄 당하는 게 일상이라고, 티엠아이를 말하며 안심시켜주려는 찰나
- 할짝,
까끌한 혀가 쟤노의 상처를 핥아
그 순간 10년차 집사답지 않게 이질감이 확 든 이유는 왤까
머리털이 바짝 서고 아랫배에 힘이 꽉 들어간 이유는 왤까
기분이 이상해져 쟤노는 손을 얼른 거둬
- 괜찮아 안 아프니까 마음 안 써도 돼
겨우 짜낸 쟤노의 말에 고양이는 미련없이 다시금 창틀로 뛰어올라가
쟤노는 속으로 쟨 고양이다.. 지금은 고양이일 뿐이다.. 생각을 되뇌지
자꾸만 머릿속에 차오르는, 제 손가락을 핥는 읹준의 형상을 지우려는 듯
*
1시간 정도 지났나
얌전히 앉아 봄날의 햇빛에 노릇노릇 식빵 굽고 있던 고양이가 기지개를 쭉 키고는 쟤노를 보며 냐-옹 울어
- 응? 왜?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 것 같은데 고양이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리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으면 창틀에서 내려와 쟤노의 바짓단을 물고 늘어져
또 바닥에 꼬리를 탁탁
꼭 여기서 나가라는 뜻인 것 같달까
- 나 나가라고?
- 냐아
정답이었네
삼김 껍데기와 오늘도 입도 안 댄 사료를 편의점 봉지에 챙겨담은 쟤노가 강의실을 나와
세월의 흔적이 묻어난 벽에 기댄 채 혼란한 머리에 멍때리고 있으면
이내 강의실 안에서 읹준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 들어와도, 돼, 이쟤노...
아주 약간의 의심마저 사라지고 제 가설이 확신이 된 상황에 또다시 가슴이 벌렁벌렁
이거 실제 상황 맞지? 꿈 아니지? 몰카 아니지?
읹준에게 뭐부터 물어봐야 할지 생각하며 강의실 안으로 들어갔는데
아까 고양이로 변하기 전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는 읹준이 보이잖아
깜짝 놀라 단번에 다가가면 얼굴은 시뻘겋고 몸뚱이는 불덩이같아
그래 꼭 며칠 전처럼
- 읹준아
- 어..
- 오늘도 곧 괜찮아지는 거 맞아? 병원 안 가도 돼?
- 어.. 괜찮아..
소매 밖으로 팔도 제대로 꺼내지 못한 채 끙끙 앓고 있는 읹준이 걱정돼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고 손부채질 해주는 쟤노
5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니 읹준의 가쁜 숨이 안정되고 뜨겁던 몸도 미지근해져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짧고 강렬하게 앓은 읹준이 평소의 말똥한 눈동자로 돌아와 저를 거의 안다시피 품어주고 있던 쟤노를 올려다봐
- 나 이제 괜찮아 고마워
의식하고 보니 너무도 가까운 거리에 둘은 헛기침을 큼큼
얼른 사이를 벌려 떨어져 앉는 둘, 그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비집고 들어와
궁금한 게 정말이지 잔뜩인데, 그래도 잠자코 읹준을 기다려주는 쟤노
주인 잃은 강의실에 뽀얀 먼지와 함께 정적이 내려앉아있던 것도 잠시
읹준이 아주 조심스럽게, 비밀스런 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해
읹준의 말을 정리해보자면
읹준은 수인의 피를 물려받았다고
현대에 와서는 수인이 아주 드물어졌지만 예전에는 드문 것도 아니었다고
구미호나 인어 흡혈귀처럼 널리 알려진 수인들도 있고..
여튼 읹준은 고양이 수인 집안인데 현대에 들어서는 고양이의 습성은 거의 다 사라지고 인간에 가까워졌다고
다만 한가지 문제점이 있다면
하루에 딱 한번, 정오로부터 한 시간
속절없이 고양이의 몸이 되어버린다고
집안의 다른 어른들은 주로 밤에 모습이 변하는데 하필 읹준만 해가 중천에 떠있는 정오..
그래서 20년 살아오는 동안 꽤 불편한 삶을 살아왔다고
특히 중고등학생 땐 점심시간 내리 화장실에 처박혀 누군가에게 들킬새라 숨죽여야 하는 게 괴로웠다고
그래도 대학생 되고 나니까 한결 자유로운 분위기여서 좋다고
점심시간도 제각각, 점심 먹는 장소도 제각각이라 주의가 분산돼서 좋다고
좋았는데..
이렇게 누군가한테 금방 들키게 될 줄 몰랐다고
읹준이 쟤노에게 비밀을 털어놓은 이유는 결국 하나지
- ..이쟤노
- 응
- 비밀로 해줄 수 있어?
조심스레 올려다보는 읹준의 눈이 왠지 지쳐보여
의지를 벗어난 몸으로 평생 살아가야 하는 것도, 남들에게 말 못할 비밀을 가지고 있는 것도, 잘못한 것 하나 없는데 누군가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것도..
읹준을 향한 동정의 마음이 물밀듯 밀려와
그럼 쟤노는 떠밀리듯 고개를 끄덕이지
그제야 안도한듯 읹준은 긴 숨을 내쉬고
쟤노는 내리 궁금했던 걸 물어봐
- 근데 읹준아
- 응
- 너 왜 모습 바뀔 때 열나고 추워하고 그러는 거야?
- 아.. 너 혹시 고양이 정상체온이 어느정도 되는지 알아?
- 어 38도 이상이 정상 아닌가?
- 맞아 그래서 고양이로 막 변했을 때는 사람의 체온이 너무 낮아서 춥고 반대의 경우에는 더워
- 아.. 그래서..
- 근데 5분 정도 지나면 금방 적응돼서 괜찮아
그렇게 쟤노가 갖고 있던 궁금증들을 해소시켜준 읹준이 엉덩이를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 나 강의 있어서 이제 가봐야겠다, 넌?
- 아 난 조금만 더 있다가 가려고
- 그래
읹준은 먼지가 군데군데 들러붙은 가방을 탁탁 털어내곤 걸음을 옮기다 말고 쟤노를 다시 한번 돌아봐
- 이쟤노
- 응
- ..나 너 믿을게
...물론, 비밀을 들켜 불안해하는 거 이해하지
그럼에도 왠지 모르게 쟤노는 읹준의 불안감이 속상해
나는 진짜 아무한테도 말할 마음이 없는데
그 누구보다 비밀을 잘 지켜줄 수 있는데, 하면서..
그렇다고 서운함을 입밖으로 꺼낼 수 있을리도 없지
나도 내가 왜 서운한 줄 모르겠는데, 친하지도 않은 동기가 대뜸 서운하다고 하면 쟤가 얼마나 당혹스럽겠어
결국 고개만 끄덕이지
- 고마워
- 뭘
- 나 먼저 갈게
그렇게 강의실을 벗어나려는 모습을 쳐다보던 쟤노가 읹준을 불러세워
왜 부르냐는 눈길이 쟤노에게 닿고
쟤노는 저도 모르게 말을 해
- ..내일도 보러 와도 돼?
- ..왜?
읹준의 눈빛이 불안감으로 날카로워지는 게 보여서 쟤노는 얼른 말을 덧붙여
- 나, 집사 10년차야
- …
- 나 고양이 좋아해
- …
- 너 고양이일 때 귀여워서 또 보고싶어
- ...
사실을 말하는 것뿐인데 왜 괜히 부끄러운지, 목소리는 왜 점점 기어들어가는지 몰라..
잠시 침묵이 떠도는가 싶더니 읹준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와
- 응 너 고양이 좋아하는 것 같긴 했어
- 그치?
- 그리고
- 응
- 나도 나 귀여운 거 알아
- …
- ..그럼 내일 봐
종종거리는 걸음으로 강의실을 나선 읹준의 모습이 창밖으로 비쳐지다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쟤노의 눈동자는 읹준을 따랐지
읹준에 대한 동정인지,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대한 놀라움인지
여전히 불편하게 쿵쿵 뛰어대는 심장을 연신 쓸어내리면서 말이야
*
그뒤로도 쟤노의 점심시간이 크게 달라질 건 없었지
편의점에 들러 점심거리를 사고
폐건물에 도착해선 고양이로 변해 추위에 떨고 있는 읹준의 작은 몸을 안아주고
읹준이 안정 찾으면 요깃거리로 배를 채우고
읹준이 꼬리를 탁탁 치면 자리를 피했다가
인간으로 돌아온 읹준의 옆을 지켜주는 거
그치만 세세하게 달라진 건 꽤 있지
고양이 사료는 태어나서 한번도 먹어본 적 없다는 읹준을 위해 이젠 사료를 안 사
대신 읹준이 인간으로 돌아오고 난 뒤에 간단히 먹을 수 있을 우유 같은 걸 사지
가방엔 전공서적이나 필통 말고도 식구가 늘었어
담요랑 쿨패치, 손선풍기 같은 것 말이야
읹준이 고양이로 변해 추워하면 담요로 감싸 꼭 보듬고
읹준이 사람으로 변해 더워하면 이마에 쿨패치 붙여주고 선풍기 바람 쐬어주고
읹준은 이 더위와 추위가 익숙하다고 했지만, 익숙하다고 해서 괜찮은 건 아닌 거니까
잠깐의 시간만 버티면 되는데 뭘 이렇게까지 유난을 떠느냐며 민망해하던 읹준
이젠 군말없이, 익숙하게도 쟤노의 손을 타
이 익숙함은 너에게 괜찮은 걸까
아마 그런 것 같지
고양이로 변한 네가 이젠 창틀이 아닌 바로 옆에서 작은 몸을 동글게 말고 식빵을 굽곤 하니까
쟤노는 민들레 홀씨 같은 읹준의 털을 살살 쓸며 읹준 몰래 웃지
폐건물에서의 밀회는 둘만의 비밀
남들이 보기엔 여전히 접점 없는 자발적 아싸와 자타공인 인싸
근데 어쩔 수 없이 쟤노의 눈은 폐건물이 아닌 곳에서도 종종 읹준을 찾아
때때로, 아니 번번이 둘의 눈이 허공에서 맞닿아
그게 왠지 기분이 좋아
읹준도 자신을 보고 있었다는 거니까
그렇다고 또 둘 사이가 엄청 가까워졌다던가 그런 건 아니야
단둘이 보내는 시간의 대부분 읹준은 고양이 모습이니까
뭔 대화를 나눌래야 나눌 수가 없지
읹준이 인간으로 돌아오고 난 뒤엔 오후 강의 시간이 가까워서 말야
..중요한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 사이인데 우리 좀 더 친해져도 되지 않나?
나른한 고양이의 모습으로 꼬리를 살랑이며 속편하게 졸고있는 읹준을 쳐다보다 문득 피어오른 불만에 혼자 깜짝 놀라는 쟤노
언제부터 친구 같은 거 만드는데 열 올렸다고 이러냐
일시적인 엉뚱한 생각이겠거니 생각을 털어내지
근데 둘이 한껏 가까워질 계기가 만들어져
그 계기라 함은 바로 엠티
하루는 인간으로 돌아온 읹준이 쟤노가 사온 바나나 우유를 쪽쪽 마시며 사담을 꺼내더라고
- 쟤노야
- 응
- 너 엠티 가?
- 귀찮아서 안 갈 것 같은데
- 아..
- 넌?
- 난 못 가지
말하고 나니 실수한 걸 알아채고 입술을 말아무는 쟤노
쟤노의 생각이 표정에 여실히 드러나 읹준은 그저 웃곤 말을 이어
- 수련회나 수학여행 같은 것도 가본 적 없어
- ..미안
- 괜찮아 익숙한 걸
얘는 왜 자꾸 익숙한 것과 괜찮은 걸 동일선상에 두는 걸까
마음이 불편하게 쿵쿵 뛰어대서 숨을 후우 길게 내쉰 쟤노는 제 계획에는 전혀 없던 말을 충동적으로 뱉고 말지
- 읹준아
- 어?
- 엠티, 같이 갈래?
- ..어?
- 곤란한 상황 안 생기게 내가 같이 있으면 되잖아
- …
- 같이 갈래? 아니 같이 가자
고민하는듯 잠시 말이 없는 읹준에 빈 강의실에 정적이 스며
그제야 쟤노는 아차 싶지
내가 무슨 정신으로 그 귀찮은 엠티를 자진해서 가겠다고 한 건지
나는 얘를 얼마나 동정하기에 이리 충동적인 건지
- 미안한데 고민할 시간 좀 주라
더듬대며 말하고는 가방을 챙겨 일어나는 읹준의 뒷모습을 보니 후회가 더 커져
그치만 그날 밤 도착한, 처음으로 온 읹준의 카톡 메시지
<쟤노야 고마워>
<잘 부탁드립니다>
두 개의 말풍선 밑으론 꼭 읹준을 닮은 고양이 이모티콘이 하트 모양 총알을 쏘아대고 있어
그럼 후회는 금방 날아가고, 출처 모를 설렘이 피어남을 느끼며 쟤노는 토독토독 화면을 두드리지
<나만 믿어>
<편안히 모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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