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의 원형들을 찾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이미 익숙한 이야기들이 많을 거예요. 복습한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씨가 자기 좀 그만 팔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지만 애써 무시해봅니다.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는 두 가지 이야기를 원형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오디세이아>입니다. 칼립소에게 7년간 붙들려 있던 오디세우스는 아테네 여신의 도움을 받아 섬을 빠져나가지만 그 와중에 포세이돈의 분노를 사 또 해일을 만나 표류하게 됩니다.
오디세우스는 파이아케스족이 사는 스케리아 섬에서 알몸이 된 채 눈을 뜹니다. 해변가에서 놀고 있던 젊은 여성들은 낯선 남자가 알몸으로 있는 걸 보고 모두 도망치지만 나우시카만이 초연하게 오디세우스를 대면하여 이야기를 듣고 옷과 음식을 주며 환대합니다.
나우시카의 원형이 된 또 다른 작품은 일본 최초의 단편소설집 <쓰쓰미추나곤 이야기>에 수록된 설화 소설 <벌레를 사랑한 아씨>입니다. 헤이안 시대, 혼기가 찼지만 벌레에만 관심을 가진 채 위에 벌레를 올리고 관찰하기도 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혼기가 찼지만 결혼 생각은 없이 들판을 뛰어다니고, 치장을 거부하며 눈썹을 밀거나 이빨을 검게 물들이기도 합니다. 가부장제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인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나우시카의 직접적인 원형은 이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천공의 성 라퓨타>의 원형으로 여겨지는 작품은 아무래도 (훗날 '스팀펑크'로 재해석되는) 벨 에포크 시대의 SF를 대표하는 쥘 베른의 소설들이 아닐까 합니다, 특히 <해저2만리>. 라퓨타의 기획에서 갈라져 나온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에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차용됐지요.
또 다른 원형은 <걸리버 여행기>인데 '하늘에 떠있는 신비로운 섬'이라는 이미지는 여기서 따온 것입니다. 문제가 있다면 <걸리버 여행기>의 실체가 부조리한 현실 정치를 비판하는 풍자 소설이었다는 건데요,
'라퓨타'라는 단어는 스페인어로 매춘부를 뜻하기 때문에 해외 배급시 그대로 쓰일 수 없어 영화의 제목은 '천공의 성'을 뜻하는 <Castle in the Sky>가 되었고 라퓨타도 라푼투(La Puntu)로 개명됐습니다.
<마녀 배달부 키키>는 원작이 있는 작품이기 때문에 따로 원형을 찾을 필요가 없죠. 다만 극중에 등장해 키키가 슬럼프를 극복하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화가 '우르슬라'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존경한다 밝힌 소설가 '어슐러 르 귄'에게서 따온 것입니다.
<이웃집 토토로>는 전체적인 영화의 원형을 찾기가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몇몇 장면의 원형은 뚜렷합니다. 개중에 '고양이 버스'는 노골적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오마쥬로, 루이스 캐럴에게 보내는 헌사라고 합니다.
<붉은 돼지>는 <미녀와 야수> 그리고 <개구리 왕자>.
유명한 작품들이니 따로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모노노케 히메>의 경우 - 일본의 소수민족, 아이누족은 '유카라' 혹은 '유카르'라고 하는 독특한 운문 서사시의 형식을 만들어냈습니다. 유카라는 문자로 기록되지 않고 귀에서 귀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는데 <모노노케 히메>는 '유카라'를 의식하고 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본래 <모노노케 히메>라는 제목 대신 <아시타카의 구전>이라는 제목을 쓰려 했습니다. 귀에서 귀로 전해진 이야기라는 걸 강조하고 싶어했죠. 모노노케 히메가 유카라를 의식하고 있다는 근거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유카라의 가장 독특한 점은 인간 세상의 이야기를 동물의 관점에서 노래하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모노노케 히메> 또한 '동물의 관점'이 중요하게 제시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가장 결정적인 근거라면 역시나 기본적인 줄거리에 있습니다. 한국에 단군 설화가 있는 것처럼, 아이누족에게도 민족 탄생 설화가 있는데 하얀 들개(늑대)가 먼 곳에서 온 왕자에게 시집을 와서 아이누족이 탄생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미야자키 하야오는 <모노노케 히메>를 통해 유카라를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아시타카의 구전>이라는 제목을 위해 '귀에서 귀로 전해지다'라는 의미를 가진 새로운 한자를 만들려 하기도 했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오디세이아>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은하철도의 밤> 세 작품에서 원형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디세이아> 10권에서 오디세우스는 배를 타고 가다가 매력적인 님프족, 키르케가 사는 섬에 도착합니다. 오디세우스는 부하 절반을 탐색조로 보냅니다.
탐색조를 만난 키르케는 그들을 식사 자리에 초대해 마법 가루를 뿌린 음식을 접대합니다. 부하들은 마법 가루의 영향으로 돼지가 되어버립니다. 간신히 도망친 부하에게 이 사실을 전해들은 오디세우스는 칼을 뽑아들고 키르케를 찾아 떠납니다.
하지만 키르케를 만나러 가는 길에 헤르메스가 오디세우스를 가로막고 마법 중화제를 선물합니다. 오디세우스를 만난 키르케는 오디세우스에게도 마법 가루를 뿌린 음식을 접대하지만, 오디세우스는 마법 중화제가 있었기 때문에 돼지가 되지 않습니다.
오디세우스가 신의 은총을 받는 인물이라는 걸 알게 된 키르케는 오디세우스에게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사랑이란 게 원래 조건 따라 생겨나기도 하는 거니까요, 아니 이게 이런 이야기는 아니었던 것 같긴 한데...
재미난 사실은 키르케가 오디세우스에게 망자들의 세계로 갔다가 돌아오는 방법을 알려주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신들의 세계로 떠났다가 돌아오는 이야기라는 걸 생각하면 어디까지 영향을 받은 걸까 궁금해지긴 하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오디세이아>에 대입해 생각해보면 하쿠는 헤르메스 신이 되겠네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영향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니 생략합니다. <은하철도의 밤>의 경우에는 이전에 설명한 적 있죠. 하쿠라는 캐릭터는 <은하철도의 밤> 속 캄파넬라의 미야자키 하야오식 재해석이라고 말이에요.
<벼랑 위의 포뇨>는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 이시이 모모코의 동화 <논짱, 구름에 타다>, 그리고 나카가와 리에코의 동화 <싫어싫어 유치원> 세 작품에서 원형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원형을 찾으라면 한 작품이 더 있는데,
한국에서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로 유명한 소설가 나츠메 소세키의 소설 <문>입니다. 이 소설에는 '벼랑 밑 집에 살고 있는 노나카 소스케'라는 대목에서 영감을 받아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 오늘의 타래 끝
이 다음 트윗이 누락됐네요.
"<오디세이아>에서 묘사되는 나우시카는 지혜롭고, 적극적이며, 타인의 이야기를 경청할 줄 아는 여성입니다.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속 나우시카의 이름은 이 인물에게서 따온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