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가둥 Profile picture
Oct 1, 2021 487 tweets >60 min read Read on X
섫뽀엓루가 보고 싶어요 ImageImageImageImage
스물여덟 김혅정,
스물일곱 김지엱 추소졍,
그리고 스물셋 이륵다.
엓뽀는 소꿉친구고
섫뽀는 6년차 장수커플
엓루는 사귄지 이제 2년째
섫뽀엓은 같은 대학 다녀서
스무살 이후부터 다같이 친했고,
추랑 루는 엘레베이터에서 처음 만났음
같은 건물에 륵은 6층 토익학원,
추는 8층 회사였거든
처음에는 서로 존재도 몰랐음
추는 첫직장이라 적응하기도 바빴고,
륵은 학점따랴 토익 공부하랴
타인한테 신경쓸 시간이 전혀 없었음.
낮에는 학교 가야하니까
륵 수업이 항상 7시 이후였음.
그래서 추가 야근하는 날
저녁 사들고 들어올 즈음 학원에 오고,
추 퇴근할 즈음 학원이 끝났음.
일주일에 한두번 스쳐가던게
추가 프로젝트 들어가고
야근 밥먹듯이 하니까
거의 이틀에 한번 꼴로 마주쳤음.
먼저 상대의 존재를 인식한건 추.
뭔가 대단한 이유가 있는건 아니고
어느날 갑자기 눈에 들어왔음.
항상 등딱지같은 가방 등에 얹고,
세상에서 제일 무료한 표정으로
엘리베이터 타는 애.
근데 인식 하게 되면 눈이 가는 법이잖아. 스쳐갔던 시선이 멈추게 되고, 엘리베이터 타면 한번 힐끔거리게 됐음. 그렇다고 감정이 있는건 아니라서 눈길이 오래 머물진 않았지. 그냥 마주칠 때마다 정보가 한겹씩 쌓였을듯. 6층에서 내리네.
항상 이 시간에 타네.
토익학원 다니나.
학생이겠지.
어려 보이는데. 대학생? 고등학생?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던 추.
근데 어느날 륵이 친구랑
통화하면서 타더니 과제얘기,
교수 욕을 해서 대학생인거 알았음.

'조교수? 그 범죄자? 걔 왜 안죽지 ..'

앳된 얼굴에 나른한 목소리로
섬뜩한 말을 했던 륵.
덕분에 추만 눈 동그래져서
계기판 쳐다봤음. Image
6층 토익학원 다니는 대학생.
근데 보기와 다르게 강단있는 애.
추한테는 루가 그 정도로 기억됐음.
그리고 그 상태가 꽤 길게 이어졌을것 같지.
륵은 원래도 남한테 관심이 없어서
추 존재도 몰랐고,
추는 륵을 알았지만 거기서 딱 멈췄음.
자주 보이지만 안봐도 그만인 정도.
대학교 다닐 때야 다른과 친구들이랑도 덥석 잘 친해지고, 자주 마주치면 먼저 말도 걸고 그랬지만 추도 직장생활에 많이 지쳐있었음. 그리고 학교라는 울타리가 사라지니 굳이 그렇게 해야할 필요성도 못느꼈음. 타고난 성격상 타인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있지만 더이상 그게 깊어지지는 않았겠지.
그렇게 프로젝트 내내 마주치고, 마주치고.
모르는데 아는 사이로 지내기를 몇달.
둘의 관계가 형태가 달라지기 시작한건
추가 프로젝트 마무리 단계를 밟을 때였음.
여느날처럼 저녁으로 샌드위치 하나 사서 사무실로 돌아가던 추. 신호등 기다리는데 반대편 저 멀리서 륵이 걸어오는게 보였음.
몸만한 백팩.
동그란 안경.
돌돌말린 똥머리.
오늘도 왔네.
생각은 거기서 끝.
잠깐 머물던 시선 대수롭지 않게
거둬들이고 신호 건너는 추.
건물 들어가서 하품하며 엘베 기다림.
18층 주제에 엘리베이터가 두대라 한참 기다리다가 타는데 문득 생각이 나.
그 대학생. 아까 오고 있지 않았나.
거리상 가늠해보면 올때가 됐는데 안옴.
오늘은 학원 오는게 아니었나.
근데 복장은 학원 같았는데.
열림버튼 누른채로 잠깐 고민하는 추.
다른사람이 타서 쳐다보는게
느껴지는데 괜히 신경쓰여서 잡고있음.
여기 엘베 한번 놓치면 최악인거 아니까.
딱 5초만 기다려보자. 속으로 숫자를 세는 추.
5 , 4, 3, 2 ..
1을 세면서 손에서 힘 빼는데
그때 딱 닫히는 문 사이로 륵이 보였음.
걸어 오다가 엘베 문 닫히는거 보고
순식간에 짜증 차오르는 륵이.
본능적으로 거두던 손 뻗어서
열림버튼 누른 추. 다시 문 열리면서
앞에 서있는 륵이랑 정통으로 눈이 마주쳤음.
둘이 처음으로 제대로 마주친거.
륵은 그날 너무 지치는 날이었음.
과제는 산처럼 쌓여있고
교수는 지랄맞고
친구사이도 오해가 생기고
그 와중에 토익은 쨀 수도 없고
여러모로 최악이었음.
거기다 묘하게 신호나 버스도
다 놓쳐버려서 한계가 다가오던 시점이었지.
아니나 달라 엘베까지 눈앞에서 닫히는 바람에 욕을 뱉고 있었음.
근데 거의 닫혔던 문이 열리네.
그 사이로는 놀란 얼굴의 여자가 보여.
아까 문 닫힐때 언뜻 눈이
마주친것 같기도 해.
나 때문에 잡아준건가.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일단 엘베에
사람이 많아서 올라타는 륵.
그리고 눈 껌뻑이다가 추한테 짧게 목례함.

"감사합니다"

둘의 첫 대화였음.
추는 놀란 상태라 어정쩡하게 고개 숙여서 인사 받아줌. 괜히 민망하기도 해서 닫힘버튼 연타하고. 다시 정적인채로 올라가는데 륵이 좀 벙쪄서 6층 누르는걸 까먹어버림. 3층에서 누군가 내릴때까지도 6층 버튼에 불 안들어오는거 보고 또 의아하게 생각하는 추. 심지어 륵은 버튼 앞에 서있었는데.
추 한번 오지랖 부렸더니 다음은 너무 쉬었음. 사회생활에 지쳐서 경계선이 높아진거지 한번 넘으면 금세 또 본성격이 드러나는 추. 4층까지 가는데도 륵이 안누르니까 몸만 옆으로 빼서 직접 6층 눌러줌. 멍하게 있던 륵은 자기 시야에
가느다란 손이 들어와서 6층 누르는걸 가만히 보게 됐음.
아, 나 버튼도 안누르고 있었네.
저 사람도 6층 가는건가 봐.
추가 저를 알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하는 륵. 자기 위해서 그런건줄도 모르니 고맙다고도 안함. 올라갔다 내려올뻔 했는데 다행이다 생각 중. 추는 대답 기대한건 아니지만 미동도 없는 륵 뒤통수 내려보다가 머쓱하게 거울만 보겠지.
그리고 6층 도착해서 륵이 내리는데
뒤에서 따라나오는 발소리가 안들림.
분명히 6층은 저 사람이 눌렀는데.
원래라면 신경도 안썼겠지만
아까 문 열어줬던 추 생각나서
뒤돌아보는 륵.
근데 추가 내리기는 커녕 거울 보고
머리나 정리하고 있음. 그때 이제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겠지.
6층에서 내리는게 아닌가?
그럼 6층은 왜 눌렀지?
내가 6층에서 내리는걸 알았나?
우연인가?
저 사람 누군데?
나를 아나?
왜?

륵 진짜 사람한테 관심 없는데 궁금한거 생기면 절대 못참음. 무조건 풀어야 됨. 닫히는 엘리베이터 다시 열고서 추한테 물어보는 륵.

"안 내리세요?"
추는 그거 듣고 놀라서 주변 훑어봄. 설마 나한테 하는 말인가 싶어서. 근데 륵 눈이 너무 또렷하게 저를 향하고 있었음. 륵이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 추를 쳐다보고, 어어..., 하던 추는 당장 안내리면 여러가지로 눈치보일것 같아서 일단 내림. 어차피 2층인데 계단 올라가야겠다, 하면서.
일단 내리래서 내렸는데 할말은 없음. 묻고 싶은건 저인데 륵 표정이 더 황당하다는 표정이라 먼저 말 못꺼내는 추. 륵은 불러 세워놓고 어떻게 물어봐야 가장 짧은 질문으로 많은 해결을 얻을 수 있을까 생각하다 말함.

"혹시 저 아세요?"

순수한 물음이었음. 시비거는게 아니고. 정말 궁금해서.
추는 당황함. 애가 대뜸 싸우자는건가 싶은데 눈은 또 너무 초롱초롱해서. 추는 륵을 알고 있던 상태라 왜 이런걸 묻은지 이해가 안됨. 그리고 뭐라고 대답해야 될지도 모르겠음. 어느 쪽도 아닌것 같아. 안다고 하기엔 이름도 나이도 모르고, 아예 모른다고 하기엔 대학생에 토익공부 중인건 알아.
아예 모르는 사람이었으면 걸어오는게 눈에 보이지도 않았을거고, 엘베를 잡지도 않았을거고, 6층 누르든 말든 관심도 없었을거임. 그냥 륵보다 시야가 훨씬 넓은 추한테는 최소한의 관심과 배려 였던건데 관심 없는 부분에 시선 한번 두지 않는 륵은 그 일련의 과정이 이해가 안됐음.
모르는 사람과 6층 버튼 두글자가 둥둥 떠다녀서 이대로 수업 들어가면 집중도 안될것 같음. 륵은 그 두가지를 이어붙일 이유가 필요했고, 그 중에 제일 말이 될법한걸 꺼낸거였음. 그럴리 없지만 내가 기억 못하는 누군가일 확률. 나를 아는 친밀한 사람일 확률.
완전한 타인에게 받은 배려라기엔 과했거든. 기분 나쁜걸 떠나서 굳이? 나라면 절대 안그럴거니까. 륵이 이해가 안된다는 눈으로 멀뚱히 쳐다보니까 추는 난감한 얼굴로 있다가 갈수록 알아채기 시작함. 6층 버튼, 왜 안내리냐는 물음, 저를 아냐는 궁금증.

아, 얘 나 전혀 기억 못하는구나? Image
추는 적어도 륵이 제 존재 정도는 알거라고 생각했음. 몇달을 엘베에서 마주쳤고, 심지어 단둘이 탄 횟수도 꽤 됨. 기억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각인이 될 정도라 륵도 당연히 그럴 줄 알았음. 근데 얘 표정 보니까 오늘 나 처음 보는것 같지. 어쩐지 힘이 빠지기도 하는데 한편으로는 웃기기도 했음.
그래서 그랬구나. 그래서 이랬네. 저를 모른다는 바탕이 채워지니까 륵 행동이 이해갔음. 모르는 사람이 엘리베이터를 굳이 무리해서 열어주고, 6층을 대신 눌러주고. 당황스러울만 하네. 순수한 얼굴로 저 아세요? 그러던 륵이 떠올라서 작게 웃음 터트리는 추. 아. 나 혼자 완전 오지랖이었네.
민망할만도 한 상황인데 추는 마냥 웃기기만 했음. 모두가 저와 같은 사람이 아니니 시야가 다를 수도 있다는걸 곧장 이해하는 추. 륵 뒤편으로 학생들 우르르 들어가는게 곧 수업 시작하는것 같음. 근데 륵은 수업이고 나발이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전까지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임.
어떻게 얘기해야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고민을 해. 말 고르면서 생각하느라 끙.. 하던 추. 말 포장하거나 돌리는게 익숙하지 않아서 결국 자기 식대로 얘기함.

"조금 알아요"
"네?"
"저 혼자 알아요"
"...."
"저 여기 위에 8층 회사 다녀요. 우리 엘베에서 서른번은 넘게 마주쳤고요"
륵 그 말 듣고 바로 표정 구겨짐. 엘베에서 만난적 있다고? 우리가? 전혀 기억에 없음. 솔직한 반응 때문에 웃음 터져서 입가 가렸다가 다시 큼큼 하고 말 이어가는 추.

"6층에서 내리는거 자주 봐서 누른거에요"
"....."
"미안해요. 원래 오지랖이 심해서.."
"....."
"진짜 이상한 사람은 아니에요"
그렇게 말했는데도 륵 표정이 안풀리니까 지갑 뒤져서 명함 꺼내는 추. 륵 손목 잡아다가 손바닥 위에 명함 올려놓고 웃음.

"의심되면 전화해보세요"

명함에 적힌 반듯한 추소졍 세글자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륵. 이 사람 하는 말이 거짓말 같지는 않음. 8층 회사 상호 아는데 그 회사도 맞음.
우리가 엘베에서 자주 마주친거 알겠고, 그래서 나를 알고 있는것도 솔직히 이해는 안되지만 알겠어. 하지만 륵은 그럼에도 문제해결이 안됐음. 왜냐면 저는 안그랬을것 같거든. 기껏해야 얼굴 아는 사람한테 그 정도의 배려를 건네지 않을것 같음. 아니, 절대 안그럴것 같아. 안그래.
그리고 무슨 해명하면서 명함까지 줘. 나 같으면 기껏 도와줬는데 지랄한다고 생각할것 같은데. 명함 뒤집어서 회사 비전 읽어보다가 다시 추와 시선 맞추는 륵. 이번에도 말이 필터를 거치지 않고 나갔음.

"그래서 도와준거에요?"
"네?"
"그냥 얼굴 아는 사람이라서? 우리 모르는 사이잖아요"
분명 따지는것 같은 내용인데 륵 목소리나 얼굴이 너무 편안해서 기분이 상할 틈도 없는 추. 륵 질문에 악의가 없어서 더 그래. 그냥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 싶어서 신기함. 물어보니까 대답은 해줘야 될것 같아서 생각해보는데 명쾌한 답이 떠오르진 않았음. 왜 도와줬냐니. 그렇게 물어보면 뭐.
"신경쓰여서?"

이런 대답밖에 못해주는데. 추 무슨 생각이나 계획을 가지고 했던 행동이 아니라서 진짜 대답할 말이 없었음. 그나마 진실에 가까운 말을 해줬지만 륵은 그거 듣고 더 혼란스러워짐. 내가 신경쓰여? 왜지? 내 이름도 모르는데? 입력값이 오류난것 마냥 머리가 복잡해지는 륵. Image
추는 륵이 그런지도 모르고 상사한테 전화 온거 보자마자 사색이 돼서 비상구로 가버렸음.

"그럼 다음에 봐요-!"

추 그냥 습관처럼 인사하고 사라진건데 륵은 그거 듣고 경악함. 우리가 왜 다음에 봐? 저 사람 진짜 특이하다. 명함 다시 한번 쳐다보다가 고개 갸웃거리면서 학원 들어가는 륵.
추는 가자마자 다시 샌드위치 먹으면서 업무 하느라 바빠짐. 그래도 한번씩 기지개 켜면서 륵이 했던말 생각나면 웃음. 세상에는 별 사람이 다 있다니까. 딱 그 정도로 넘기고 다시 업무하는데 륵은 조금 달랐음. 강사말 들으면서 책 한구석에 끄적이고 난리났음.

추소졍. 모르는 사람. 신경. ?
그 네가지만 이렇게 써봤다가, 저렇게 써봤다가 하는데 도무지 이해가 안됨. 추는 이해못할 상황을 그렇구낭 하고 넘기는 타입이었지만 륵은 달랐음. 모든 행동은 이유가 필요했고, 명분이 있다고 생각함. 21년 살면서 항상 비슷한 사람들만 곁에 둬서 이런 상황이 너무 이상하고 답답한 륵.
결국 그날 수업 다 날려먹었음. 이런적 한번도 없었는데. 수업료 아까워. 속으로 자책하면서 백팩 끈 꼭 쥐는 륵. 사람 몰리는거 싫어서 일부러 마지막에 나와서 엘베 기다림. 오늘따라 왠지 눈이 위로 향했고, 8에 멈춰있는 숫자를 보게 된 륵.

설마?
아니겠지.
근데 아닐리가 있나. 엘베 문이 열리고, 그 안에 피곤한 표정으로 구석에 기대있는 추 보자마자 굳는 륵. 추는 눈이 무거워서 반쯤 감고 있다가 엘베 멈춘거 느끼고 살짝 떴음. 그대로 잠깐 눈 마주치고 있는 둘. 륵은 이 상황이 너무 이상한것 같은데 추는 익숙했음. 이렇게 두번 만난적도 많았거든.
륵은 오늘 처음 알게된 우연이었고, 추에게는 꽤나 익숙한 우연이었음. 덕분에 좀 더 여유로운건 추야. 벽에 기대있던 고개 까딱 들어올리더니 굳어있는 륵을 향해 말함.

"안 타요?"

륵은 그 말 듣고 아무말없이 엘베 타더니 문 앞에 바짝 서서 눈 부릅 뜨고 문만 노려봄. ..진짜 저 사람 뭐지?
건넨 말이 씹혔는데도 아무런 타격도 없는 추. 그냥 하품 쩍쩍 하면서 동그란 륵 뒷통수만 보고있음. 오늘 대화 한번 텄다고 혼자 내적친밀감 쌓인 추. 묵직한 륵 가방 쳐다보다가 또 말검.

"볼때마다 생각했던건데"
"....."
"가방 안무거워요?"

저 사람 미친거 아니야?
나 볼때마다 생각을 왜 해?
륵이 생각하느라 대답 안하는데 그냥 오늘 많이 피곤하구나, 말이 없는 타입인가 하는 추. 이런거 진짜 신경안씀. 그런 추 덕분에 륵만 머리가 터져나가고 있었음. 나름대로 사람을 분석하고 정의하는걸 좋아하는 륵. 근데 추는 제 바운더리 안에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이었음.
너무 훅 들어오고 예상이 안가니까 륵은 버퍼링이 걸렸음. 의중을 알고 싶은데 그걸 모르겠어서 자꾸 오류가 남. 그게 당연한게 추는 진짜 의중이 없었고, 그냥 이렇게 살아왔어서 어떤 논리로 움직이는게 아니었음. 모든게 형태가 명확해야 안정감 느끼는 륵에게 추는 흐물흐물한 낯선 사람이었지.
모르면 평생 몰랐을텐데 추가 아주 살짝 륵의 시야를 건드렸고, 륵은 한번 신경이 쓰이면 어떤 식으로든 형태를 만들어놔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음. 문에 붙을것처럼 있다가 1층 도착해서 문 열리기 직전에 갑자기 휙 돌아보는 륵. 추는 입 쩍 벌리고 있다가 놀라서 하압 하품 먹음.
한번 결정한 부분에선 필터가 없는 륵. 한걸음 다가오더니 가방 어깨에 바짝 당겨오면서 말함.

"저랑 얘기 좀 하실래요?"
"저..요?"
"네, 10분만요"

아까는 무시하더니 갑자기?
순간 그런 생각이 들긴 했지만 이내 한번 눈 굴리고 알았다고 끄덕이는 추. 10분 정도면 괜찮을것 같음.
결국 둘이 어정쩡하게 건물 뒤편 공원에 앉아서 얘기하게 됨. 추는 가방 옆에 두고 다리 꼬고 앉아서 노을 보고있고, 륵은 백팩 끌어안고 있다가 하나씩 정리해서 궁금한거 물어봄.

아까는 왜 말거신거에요?
저 볼때 어떤 생각을 해요?
원래 성격이 그런거에요?
명함은 왜 줬어요?

와다다.
추는 이 순간이 황당하기도 한데 처음 받아보는 질문이라 재밌기도 했음. 틈틈이 웃어가며 진심을 다해 대답해줌. 륵은 분명히 듣고있긴 한데 갈수록 추가 어려워지는 기분이었음.

혼자 좀 친해진것 같아서 말걸었어요,
그냥 많이 피곤해보인다 그런 생각?

대답이 근거보단 감정이 더 묻어 있어서. Image
륵은 항상 이성이 우선인 사람이라 추가 아무리 말해도 이해가 정확히 안됨. 그냥. 륵이 제일 싫어하는 단어인데 추는 그걸 습관처럼 썼음. 근데 이상하게 그 단어가 평소만큼 답답하거나 짜증나진 않았음. 궁금하고, 더 알고 싶어짐. 추의 흘러가는대로 사는 일상이 륵의 어떤 버튼을 눌러버렸음.
결국 10분의 대화로는 만족스러운 형태를 얻을 수 없구나 깨달은 륵. 먼저 벌떡 일어나더니 추 내려다보며 말함.

"모레도 출근하세요?"
"..오늘 들은 말 중에 제일 착잡하네"
"그때도 10분만 얘기해주세요"
"아직 부족해요?"
"네"
"그래요 그럼..아니면 그냥 오늘,"
"지하철 시간 3분 남았어요"
무슨 말을 못하겠네. 말문 막혔다가 그냥 같이 자리 털고 일어나는 추. 요즘 회사 사람만 만나고 살았는데 낯선 사람이랑 대화하니까 재밌고, 어리지만 할말 다 하는것 같은 륵이 귀엽기도 했음. 10분말고 30분도 괜찮은데. 그 말은 속으로 삼키는 추.
근데 둘이 10분 대화 잘해놓고 역 갈때는 또 따로 감. 정확히는 루가 앞서가고, 추는 굳이 옆으로 붙지않고 제 속도대로 천천히 감. 그렇게 각자 개찰구 찍고 내려가는데 또 하필 방향이 반대임. 사람 많아서 맨끝으로 갔다가 반대편에 서있는 륵 보고 놀라는 추. 여기서 만나는건 처음인것 같음.
멍하게 쳐다보다가 열차 들어오기 직전에 륵이 고개 들어서 둘이 눈마주침. 륵 놀라서 눈 커지는거 보다가 습관처럼 손 들어서 흔드는 추. 륵 머리에 물음표 수십개 뜨는거 보고 혼자 빵터짐.

쟤 진짜 귀엽고 웃기네.

그리고 륵은 지하철 타면서 또 생각함.

..저 사람 진짜 이상해. ImageImage
그 후로 둘은 륵이 학원오는 날마다 밤에 10분 정도 대화를 했음. 항상 같은 공원 벤치에서. 같은 자세를 하고. 2주차까지는 연락처 교환 안하고 구두약속만 했었는데, 한번은 륵이 보충수업이 있어서 평소보다 30분 늦게 끝나는 날이었음. 추랑 약속한 시간이 있어서 고민하다가 명함 보고 전화건 륵.
추는 어떤 미친놈이 업무 외 시간에 사무실로 전화하나 싶어서 빡친 상태로 전화 받았는데 륵인거 알고 놀람. 그래도 통성명까지는 한 상태로 이마 긁적이면서 물어봄.

'륵다?'
'저 오늘 보충이라 30분 더 할것 같아요'
'..아 그러면..'
'일 끝났으면 들어가도 돼요. 내일 모레 물어볼게요'
륵 항상 이틀동안 몇가지 질문을 가져와서 추한테 물어봤음. 밸런스 게임마냥 이럴때는 어떻게 할건지 묻기도 했고, 그냥 저번에는 왜그랬어요? 묻기도 했음. 추는 그 말 듣고 잠깐 고민함. 대화한건 2주 뿐이지만 륵이 이렇게 말하는건 진짜 편한대로 하라는 뜻 같았음. 일 거의 끝나긴 했는데.
눈썹 만지작대면서 책상 위에 가방 내려다보는 추. 5분 뒤엔 갈 생각으로 이미 짐을 다 싸놨었음.

'저 수업 시작해요'

전화기 너머로 전혀 급해보이지 않는 륵 목소리 들으니까 어쩐지 마음이 기울었음. 가방 다시 밑에 내려놓으면서 문서 펼치는 추.

'할일 남았어요. 30분 뒤에 로비에서 봐'
2주동안 겨우 이름이랑 나이만 알아서 륵은 꼬박꼬박 존대 했고, 추는 편하게 반존대 썼음. 추가 그렇게 말하니까 륵은 오늘 일이 좀 많았나보네 생각하며 끊음. 추도 금방 다시 집중해서 내일 브리핑할 자료 검토함. 서류 보다가 냅다 회사로 전화를 한 륵 떠오르면 풉 하고 웃기도 하면서.
우리 번호도 모르네. 그러니 사무실로 전화를 했겠지. 추는 2주동안 지켜보면서 륵이 마냥 귀여웠음. 저랑 다른걸 어떻게든 이해하려고 하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했고, 알게 모르게 당돌한 스물하나 대학생이 흥미로웠음. 주변에 비슷한 후배도 본적이 없어서 더 그렇지.
어떤 이성적 호감이라기보다 그냥 새로웠음. 한번씩 제가 한 말에 물음표 삼백개 뜨는게 재밌음. 그러면서 계속 만나자고 하는것도 웃겨. 혼자 피식하다가 30분 되자마자 가방 챙겨서 퇴근하는 추. 그날도 역시나 6층에서 륵이 탔고, 여기서 만날 때마다 흠칫 놀라는 륵 보고 또 몰래 웃음.
평소처럼 벤치에 앉아서 대화하고 륵이 먼저 시계보며 일어났음. 저렇게 정해진대로 사는것도 피곤하지 않나. 따라서 일어나던 추 눈에 륵이 한손에 꼭 쥐고있는 핸드폰 보였음. 추 그거 보고 잠깐 고민함. 분명 또 이해안된다는 표정 할것 같긴 한데. 문제는 추도 륵 못지않게 솔직한 타입이라는거.
"번호 알려줄래요?"
"네?"

얼굴에 써있어. 내 번호를 님한테 왜 알려줘요.

"오늘같은 상황 생길까봐요"

추 2주라는 시간동안 깨달은게 하나 있음. 륵은 모든 행동에 타당성을 부여한다는거.

"내가 급한일 생길 수도 있고"
"....."
"서로 헛걸음 하면 시간 아깝잖아요"
"....."
"비상벨 느낌으로" Image
륵 처음엔 이 언니가 또 이상한 말을 한다고 새로운 질문 생성 중이었는데 듣고보니 맞는말 같음. 저는 명함이라도 있어서 사무실로 전화했지 반대는 생각해본적 없었음. 로비에서 이유도 모르고 누군가를 기다리는거. 생각만해도 비효율적이야. 이해하고 나서는 행동에 거리낌이 없는 륵.
곧바로 핸드폰 내밀어서 추 번호 받더니 그쪽으로 전화 검. 추가 주머니에 있는 폰 꺼내는거 보다가 한마디 남기고 먼저 가버린리는 륵.

"급한일 생기면 연락하세요"

추는 빠르게 멀어지는 뒷모습 보다가 그 자리에 서서 낯선 번호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했음.

'이륵다'

쟤 은근 단순한것 같아. Image
그 이후로도 둘은 비슷하게 지냈음. 번호를 교환하긴 했지만 평소에는 일절 연락 안하고 가끔 급한일 생기면 카톡만 함. 그렇게 둘의 대화가 한달이 가까워질 무렵 추 프로젝트가 끝나서 더이상 야근을 많이 안하게 됨. 하루 이틀 정도는 만들어냈는데 계속 이렇게 지낼 수는 없어서 륵한테 얘기함.
"나 이제 야근 안해요"
"퇴사했어요?"
"원래 생각이 그렇게 극단적이야?"
"한달째 야근하길래 회사가 원래 그런줄 알았어요"
"그럼 이미 퇴사했지"
"돈이 걸려있는 문제니까"
"너 스물한살 아니죠?"
"그거 되게 실례에요"
"왜? 나는 성숙한 사람들 부러워서"

그래도 둘이 한달 됐다고 좀 편해졌음.
아무튼 이제 이 시간에 못만난다니까 륵 표정이 묘하게 구겨짐. 이제 제법 틀이 만들어지긴 했는데 이직은 부족했음. 그렇다고 추한테 야근을 강요할만큼 염치없지도 않음. 백팩 안고 끙끙대는 륵 보던 추는 까만 하늘 올려다보며 말함.

"저녁에 만날래요?"
"네?"
"나 퇴근하고, 너 학원가기 전에"
륵 또 경악할거 뻔해서 추 쳐다보지도 않음. 설득할 방법을 이제는 알았음.

"아직 물어볼거 많다면서요"
"그건 맞는데.."
"밤이면 내가 3시간 이상 써야하고"
"....."
"저녁이면 네가 1시간만 일찍 오면 되고"
"....."
"대신 저녁은 내가 사고요"

자본과 타당한 이유.
이게 통할걸 추는 확신했음.
륵도 생각해보니까 나쁘지 않은 제안같음. 자취하면서 챙겨먹는것도 일이고, 귀찮아서 거른적도 많았거든. 1시간 일찍 나와서 밥먹고 대화도 하면 1석 2조임. 곧장 고개 끄덕이려다가 의문이 스쳐가는 륵. 여전히 하늘만 올려다보는 추 콕콕 찌름.

"근데요"

고개만 옆으로 툭 떨궈서 바라보는 추.
"왜 그렇게까지 해줘요?"

생각해보니 그래. 처음에 궁금한게 있다고 붙잡은것도 나고, 이 사람은 그냥 자기 시간 써주는건데. 나는 얻어가는게 이만큼이지만 언니는 그런것도 없는것 같은데. 굳이 돈까지 써가면서 왜 맞춰주지. 그렇게 안해줘도 할말 없는데.

추는 그 말 듣고 3초 정도 고민함. Image
딱히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본적 없음. 륵과 달리 이유가 명확하지 않은 행동이 튀어나오고, 그런게 자연스러운 거라고 여기는 추였음. 그냥. 정말 그냥 그렇게 하고 싶어서 했음. 근데 이유를 말하지 않으면 륵이 계속 물음표 속에 갇혀있을걸 알아. 뚜렷한 륵 얼굴만 물끄러미 쳐다보는 추.
느리게 눈 깜빡이는데 생각해보니 항상 서로 먼곳만 보면서 얘기했지 제대로 마주본적이 없는것 같음. 얘가 이렇게 생겼었지. 맞아. 그러고보니 처음 봤을 때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것 같아. 눈 살짝 찡그리면서 고개 갸웃하는 추.

"귀엽게 생겨서..?"
"......"
"그리고 나도 너랑 얘기하는거 재밌어" Image
추 예전부터 좀 그랬음. 귀여운 후배들한테 유독 약했음. 륵이 그 애들처럼 애교부리고 그런 스타일은 전혀 아닌데 일단 얼굴이 너무 귀여웠고, 뻣뻣하게 구는것도 처음엔 이상했는데 알수록 웃기고 귀여움. 그리고 입사 후에 회사 외 사람들이랑 만날일이 거의 없었는데 륵의 존재가 반갑기도 했고.
그 사이에 친밀감도 쌓여서 륵이 귀여운 동생 같고 그럼. 언니로서 밥 한끼 챙겨주는게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음. 가벼운 의미라도 륵이 제 사람 바운더리에 들어온 이상 추는 시간이나 돈을 쓰는게 아깝지 않았음. 이걸 얘가 이해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생각했는데 륵 표정보니 역시나임.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는 표정이었음. 어떤 말도 통하지 않았구나 싶어서 헛웃음 터지는 추. 륵은 안그래도 이해 못할 사람이었는데
추가 더 어려워졌음.

귀여울 수 있음.
거울 봐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하니까.
재밌을 수 있음.
추가 대화할때 자주 웃으니까.

근데 왜 이렇게 이해가 안되지?
륵 이제 저도 이해가 안됨. 문장 하나씩 뜯어보면 말이 되는것 같은데 종합해보면 머리가 복잡함. 아. 머리 아파. 물음표 투성이인데 해결 못할것 같아서 벤치에서 먼저 일어나는 륵.

"아무튼 무리면 언제든지 말해요"

그러고 휙 가버리는데 륵 머리 위에 물음표가 떠다녀서 추 혼자 와하학 웃음.
밤에 만나던 약속이 저녁으로 바뀌고, 둘은 전만큼 자주는 아니라도 스케줄이 맞는날 저녁을 먹었음. 추가 칼퇴하는 날, 륵이 1시간 일찍 올 수 있는 날. 그리고 약속 형태가 바뀌면서 카톡하는 횟수도 늘었음.

-륵다
-륵다야
-여기 어때요?

추가 맛집 찾아서 보내면 륵이 좋다 싫다 하고 그런식.
처음엔 륵 카톡 잘못 보낸줄 알고 읽씹함. 근데 추가 'ㅜㅜ' 이러면서 다시 카톡와서 물음표 10개 보냄. 급한일 있으면 연락하라고 했는데. 급한거냐고 되물었는데 추가 사람한테 저녁식사가 얼마나 중요한줄 아냐고 연구 결과까지 찾아와서 수긍했음. 그때부터 륵도 맛있는거 찾으면 주소 공유함.
항상 다른 메뉴 먹으면서 나누는 대화도 조금은 달라짐. 예전엔 륵이 질문하면 추가 대답하는 형식이었는데, 추 이제 륵이 많이 편해져서 한번씩 궁금한거 생기면 물어봄. 근데 그게 륵이 느끼기엔 왜 궁금하나 싶은것들. 점심은 뭐 먹었어? 학교생활은 어때? 시험 언제 봐? 대체 이게 왜 궁금하지.
근데 륵이 그런걸로 의문스러운 표정 지을 때마다 추는 어깨 으쓱하면서 받아침.

"너도 궁금한거 물어보잖아요"

그럼 륵도 할말 없어서 그냥 대답해줌. 그리고 추가 꼭 물어본건 대답을 자기도 같이 함. 나는 버거 먹었어. 우리팀 진짜 거지같아. 륵 속으로는 TMI라고 생각하지만 군말않고 들음.
나누는 대화가 다양해질 수록 사이가 가까워지는건 당연했음. 추는 알면 알수록 륵이 귀엽고 좋았음. 설레고 그런건 아닌데 호기심 많은 고양이 같아서 재밌음. 괜히 장난치고 싶고, 건드리고 싶고. 륵은 추가 이끄는대로 끌려가다가 어느날 함바그 썰다가 갑자기 수저 탁 내려놓더니 말함.
"우리 뭐하는거에요?"

분명히 일주일에 1번이었던것 같은데 어느새 일주일에 2~3번씩 저녁을 먹고있었음. 질문과 답변 뿐이던 순간은 일상공유로 변질되어 있었고. 그게 너무 서서히 변해사서 몰랐는데 깨닫고나니 너무 당황스러운 륵. 그러든 말든 태연하게 먹고있는 추 테이블 툭툭 치면서 부름.
추는 륵 표정이 꽤나 진지하길래 입에 넣으려던 함바그 조각 내려놓고 덩달아 진지해져서 쳐다봄. 이런것도 솔직히 왜 물어보는지 모르겠음. 아는사이가 됐고, 같이 밥먹고, 번호 교환도 했는데.

"우리 친해지는 중"
"..제가 언니랑요?"
"..나랑 밥먹으면서 그렇게 묻는거야?"
추 이제 륵한테 거의 반말씀. 그리고 륵도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음. 우리 이 정도면 많이 친해진거 아닌가. 내려놨던 함바그 다시 먹으면서 고개 갸웃하는 추. 륵은 그 말이 뭐가 그렇게 놀랍다고 수저 내려놓은 상태로 굳어있음.

우리가 친해져?
왜?
나 이 언니랑 친해질 생각 없었는데?
항상 어떤 기준선을 정해놓고 그 안에 들어오는 사람한테만 곁을 주고 살던 륵이었음. 그 기준선의 이름은 비슷함이었고, 다른사람을 이해 못하는 상황이 피곤해서 일부러 같은 부류의 사람들만 끼고 살았음. 근데 추는 어떤것도 비슷한게 없는 사람이었고, 분명 제 곁에 남을 사람이 아니었음.
이런 경우가 없었어서 당황스러운 륵. 천천히 되짚어보니까 요즘 제일 자주 만나는 것도 추고, 연락 많이 하는 사람도 추임. 륵은 혼란에 빠짐. 그러든 말든 혼자 맛있게 먹는 추 보는데 머리카락 끝이 소스에 닿을듯 말듯함. 눈살 찌푸리다가 자연스럽게 묶고있던 머리끈 풀어서 추한테 건네는 륵.
"좀..묶어요"
"아 묻었어?"
"아니 묻지는 않았는데"
"고마워고마워"

민망하지도 않은지 호탕하게 웃고 머리 단정하게 묶고 다시 포크 집어드는 추. 륵은 이제 소스 근처에 아무것도 없는거 보고 안심하다가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져서 굳어버림.
나 방금 뭐한거지?
지금 내 머리끈 빌려준거야?

륵 진짜 가까운 사람 아니면 자기 물건 안빌려줌. 아주 사소한 것도 안그럼. 근데 방금 추한테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머리끈을 줬음. 심지어 제 머리에 있는걸 풀어서까지. 륵 이 변화가 너무 적응이 안돼서 마치 다른 시공간에 툭 떨어진것 같았음.
개학까지 잊고 살다가 전날에 밀려버린 숙제를 발견한 기분. 늦은것 같은 느낌.아무튼 왠지 망한것 같음. 늘 감정에 대한 객관화를 자신했는데 이렇게 생각지 못한 추가 튀어나오니 머리가 아픈 륵. 추는 그런 륵 힐끔 보다가 목소리 낮춰서 물어봄.

"륵다야 나 소스 좀만 주라"

..네, 많이 드세요. Image
추가 함바그 조각 륵 소스에 콕 찍어가는데 륵 또 5초 뒤에 놀라서 얼굴 감싸쥠.

이런것도 원래 안해.
음식공유 하는거 진짜 싫어하는데.
륵다야. 너 미쳤어?

추는 속으로 여기 맛집이라고 생각하면서 륵 쳐다보고 있음. 저렇게까지 혼란스러워할 일인가 싶어. 되게 간단한건데.
추가 지금 륵이 저러는거에 타격을 안받는 이유가 있었음. 륵 성격에 이 시간이 재밌지 않았으면, 싫었으면 애초에 나오지도 않았을걸 알아서. 추는 륵이 저와의 시간을 꽤 즐거워 할거라는 확신이 있었음. 그걸 깨닫고 말고는 쟤 문제고. 내 눈에는 보이니까. 굳이 콕 집어 말해본적도 없음.
근데 생각보다 더 충격받는걸 보니 진짜 아직도 남남이라고 생각했던것 같음. 추에게 륵은 좋은 동생이었고, 좀 더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었음. 이렇게 두면 안되겠다 싶은 마음에 휴지로 입가 닦아내면서 말을 고르는 추. 그러다가 말을 륵이 스스로 정답으로 갈 수 있는 문제 형태로 바꿔서 던짐.
"륵다야 나도 질문"
"저 지금 포화상태에요"
"오늘 나랑 저녁 왜 먹었어?"
"...그거는 질문을,"
"너 오늘 나한테 질문 하나도 안했어"
"....."
"이번주에 하나도 안했어"
"......"
"근데 너 나랑 여기있네?"
"......"
"이유 생각해보고 다음주에 알려줘"

무덤덤한 추 말에 륵 멘탈 바스라져버림. ImageImage
추도 그 질문이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줄은 몰랐음. 그냥 생각보다 더 갈피 못잡는것 같길래 노선만 정리해주려고 했음. 우리는 친해지고 있고, 너도 꽤 나를 좋은 언니로 생각하고 있는거라고. 딱 거기까지 하려고 했음. 추도 륵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좋은 동생. 귀여운 애. 맹랑한 스물하나.
너 싫으면 여기 없었을거잖아. 재밌으니까 나오는거 아니야?. 대놓고 말해줄 수도 있었지만 륵 성격상 그렇게 말하면 튕겨질것 같았음. 그게 오히려 마음을 죽여서 어색해질 수도 있고. 추는 그러기 싫었음. 정의 내리는게 습관인 륵이니까 그럴 수 있도록 유도만 했음. 우리 인연이 끊어지지 않게.
그 한마디가 륵의 사고회로를 전부 고장낸건 모르는 추. 시계 흘끔 보더니 륵 수업 시작 하겠다고 재촉함. 몇번 불러도 멍때리거 보다가 한손에 륵 가방, 한손에 륵 챙겨서 나오는 추. 익숙하게 계산까지 하고 신호등 앞에서 축 쳐진 륵한테 가방 메어주고 놀라지 않게 살짝 내려놓음.
오늘 일이 조금 많았어서 피곤한 추. 그래도 내일이면 주말이니 쉴 생각으로 하품 하면서 신호등 건너감. 옆에서 걷는 륵은 아직도 멘탈 복구가 안되고 있음. 이번주 질문을 하나도 안했다고? 그랬나? 그랬던것 같아. 근데 왜그랬지? 궁금한게 없었나? 그건 아닌데. 이미 옆에 추가 있다는것도 잊었음.
그렇게 건물 앞까지 도착해서 륵 어깨 두드려주는 추. 복잡해보이는 륵 내려보다가 손으로 정수리 꾹 누름.

"륵다야"
"..왜 여기 있어요?"
"..식당부터 같이 왔어"
"아.."
"너는 진짜 특이하다"

그래서 재밌는건 맞지만. 저보다 한뼘은 작은 애가 이리저리 튀는게 추 눈에는 귀엽기만 했음.
애가 정신 못차리는거 보니까 괜한 소리를 했나 싶기도 함. 근데 계속 이렇게 있으면 6개월 뒤에도 우리는 남남이잖아요 소리 할것 같으니까. 지금은 재밌지만 그때는 그 대답이 불편해질것 같았음. 그래도 이렇게 보내기엔 신경 쓰여. 계속 륵 정수리에 얹고있던 손에 힘줘서 제 쪽으로 돌려놓는 추.
"단순하게 생각해"
"....."
"꼬아서 보지 말고, 단순하게"

추도 이십대 초반까지는 그랬음. 생각도 많고, 걱정도 많고. 그러다보니 순전히 감정대로 행동하지 못했던 순간이 많았음. 그 결과로 인한 박탈을 겪고서 추도 변한거임. 타당성을 따지지말자. 감정이라는 이름의 이유가 있다는걸 인정하고. Image
그때부터 노력을 해서 단순하게 살았고, 그렇게 살다보니 후회가 덜어진다는걸 알았음. 그래서 륵이 더 신경 쓰였지. 조금 다르긴 해도 타이트하게 감정이나 행동반경을 좁히며 사는 륵에게서 제 과거가 얼핏 보이는것 같아서. 륵은 저처럼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알려주고 싶었음.
눈 맞추면서 얘기하다가 학생들 우르르 건물로 들어가는거 보고 먼저 간다고 뒤도는 추. 아휴 추워. 부르르 떨면서 역으로 걸어가는 추 바라보던 륵. 사람들한테 치이고서야 정신차리고 건물로 들어감. 근데 엘베 기다리는 와중에 또 한가지를 깨달아.

저 언니 언제부터 여기까지 데려다줬지?
분명 처음에는 왜 같이 가냐고 물은적이 있었고, 두세번 정도 추는 다른 이유를 댔음. 저기 댜이소 가려고, 회사에 뭐 두고와서, 오늘 버스 탈거라서. 그때마다 별 생각없이 넘겼는데 그 이후로도 추는 늘 데려다줬고, 륵도 더이상 그 이유를 묻지 않았음. 왜 그랬지? 이제는 진짜 모르겠음.
추도 그거 모름. 매일같이 륵을 데려다준다는 자각도 없음. 그냥 륵이 동생이라 챙겨줘야 한다는게 배어 있기도 하고, 타고나길 다정하기도 해서. 그 순간에도 추는 개찰구 들어가면서 아 지하철 놓쳤네, 이런 생각밖에 안함. 륵만 패닉상태에 빠져서 엘베에 실려가는 중.
륵 결국 그날 수업 하나도 못들었음. 교재 위가 글자로 새까매질 때까지 추가 한 질문에 대한 답만 생각했는데 안풀림. 전혀 떠오르지도 않음. 남들 감정이 어려운 경우는 있었어도 제 행동이 이해 안되는 경우는 없었음. 그래서 너무 당황스러움. 내가 내가 아닌것 같고,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음.
그 언니는 답을 알고 물어본건가? 확신에 차있던 추 표정 보니까 그런것 같음. 인생을 문제 풀듯이 살아가는 륵에게 풀리지 않는 문제가 떨어졌음. 그것도 생각회로가 저보다 곱절은 단순해보이는 사람에게서. 꼬아서 생각하지 말라는 말이 힌트라도 된것마냥 붙잡고 풀어보는데 어렵고 막막하기만 함.
근데 답을 물어보기는 자존심 상해. 집 가는 길에 추 카톡방 열었다가 닫는 륵. 마음을 비우고 생각해보자 하고 집에 감.

그리고 돌아온 주말. 륵은 원래도 밖에 나가는거 안좋아해서 집에 있었고, 추는 오랜만에 친구 만나기로 해서 약속 잡고 나가는 중. 가는 길에 심심해서 륵한테 톡도 보냄.
-륵다야 머행?

륵 침대에 누워있다가 그거 보고 익숙하게 키패드 두드림. 근데 '그냥 있어요' 다섯글자 쓰고 전송 누르기 직전에 갑자기 소름 돋아서 폰 던져버림.

나 지금 왜 답장하고 있지?

놀라서 다시 폰 들고와서 보는데 위에 톡 내용이 죄다 일상 얘기뿐임. 분명히 저녁 얘기만 했었는데.
추는 폰 들고 있어서 1 사라진거 봤는데 륵이 답장 없어서 바쁘구나 하고 인스타함. 륵은 어제 추 질문부터 둘 사이에 당연해진 것들에 대해 하나하나 깨닫는 중이었음. 보니까 조금씩이지만 매일 톡을 했음. 90% 이상은 추가 보낸거긴 하지만 어쨋든 제가 답장을 했고, 대화가 이어졌음.
륵은 이제 진짜 혼란스러움. 추한테 답장도 편하게 못하겠음. 폰 덮고 베개에 한참 얼굴 묻고있던 륵. 아무래도 이틀안에는 답이 안나오겠다는 결론이 나와서 추한테 톡 남김.

-언니 저 답 나올 때까지 만나지 마요
-정답 생각나면 연락할게요

추 그거보고 지하철에서 어엉? 소리내서 놀램.
아니 생각 해보랬지 누가 문제를 풀랬나. 여기 정답이 어디 있다고. 추 다음주에 륵이랑 가려고 했던 소바집 떠올라서 조금 시무룩해짐. 륵다가 좋아한다고 했는데. 아쉽다. 근데 륵이 저렇게까지 말한 이상 기다리는것 밖에 방법이 없었음.

-그래 알겠오ㅠㅠ

아쉬움 눌러 담아 답장하는 추.
륵은 벽보고 누워있다가 진동 듣고 휙 돌아봄. 미리보기로 톡 내용 확인한 륵. ㅠㅠ는 무슨 뜻이지? 왜 울지? 슬픈일 있나? 순식간에 물음표 불어나는거 느끼고 이불 뒤집어씀.

마음을 비우자. 단순하게. 꼬지말고. 그래, 그 언니처럼. 진짜 어떻게 그렇게 쉽지? 아, 언니 생각 그만하고. 자, 다시.
추는 잠깐 시무룩 하다가 친구 만나고 나서는 오랜만에 떠들고 노느라 신경안씀. 다음날도 습관처럼 톡 하려다가 아차차 하고 물러남. 스스로 정답이라고 여기는걸 알아내면 연락오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출근하는데 어쩐 일인지 한주동안 륵을 한번도 안마주침. 적어도 한번은 꼭 마주쳤었는데.
중간에 야근을 두번이나 했는데도 그래. 근데 그럴 수 밖에 없는게 륵이 피했음. 평소 패턴대로 지내면 마주칠것 같아서 한참 일찍 와서 자리에 앉아있고, 나갈때도 그냥 사람들 틈에 끼여서 우르르 나옴. 안그래도 복잡한데 추랑 마주치면 안될것 같아서 귀찮아도 그렇게 함.
피하기만 한거 아니고 생각도 했음. 내가 왜 이런 행동을 했을까, 왜 이런 말을 했을까. 경험치를 총동원해서 생각하는데 답이 안나옴. 이런 경우 처음이라 데이터 베이스가 없음. 그럼 새롭게 폴더를 만들어서 일련의 사건을 담아야 하는데 아직 그 폴더의 이름을 못찾아서. 매일 한숨만 늘어가는 륵.
추도 그게 일주일이 되니까 조금 걱정이 됨. 진짜 괜한 질문한거 같고. 같이 노는데 전혀 문제 없었던걸 들쑤셨나 싶고. 연락해볼까 싶은데 그러면 더 놀라서 도망갈까봐 못함. 무슨 이별통보 받은 사람도 아니고. 그 순간 어떤 괴리감이 느껴졌지만 기분탓이겠지 하고 넘기는 추.
그렇게 연락없는 일주일이 채워지고, 불금에 술마시기로 한 추. 근데 륵도 하필 그날 수업이 갑자기 캔슬 돼서 학원 근처사는 친구랑 한잔 하기로 했음. 각자 다른 곳에서 비슷한 시간에 술잔 기울이는 엓루. 추는 소주파고 륵은 가볍게 하이볼 한잔 함.
"추소졍 밑잔 뒤질래?"

추는 오랜만에 뽀를 만났음. 14년지기 소꿉친구 김지엱. 초등학교 4학년때 뽀가 서울로 전학온 이후로 스물다섯 지금까지 계속 친구였음. 고등학교만 찢어지고 초중대 다 같이 나옴. 그리고 그 옆에 앉아있는 한사람.

"..뭘 봐?"

뽀의 4년차 애인이자 추의 과선배 김혅정. ImageImage
저 언니는 부르지도 않았는데 나와놓고 지랄.., 눈 가늘게 뜨고 흘기는데 섫 타격도 없이 무시하고 술잔만 비움. 오랜만에 얼굴이나 볼까 하고 뽀 불렀는데 나와보니 섫이 있었음. 불편한건 아닌데 오면 꼭 저렇게 시비를 터니까 말이야. 그래도 좋아하는 과선배기도 해서 금방 잊고 술마시는 추.
대학 다닐때 셋이 죽어라고 붙어 다녔는데, 엓뽀가 졸업한 이후로는 분야가 다 찢어져서 자주 못봤음. 각자 사는 얘기도 하고, 섫뽀는 곧 둘이 동거 할거라는 얘기도 하고, 추는 그때 륵이 떠오르는데 굳이 말로 꺼내진 않음. 말하기엔 첫만남부터 너무 길기도 하고, 딱히 고민은 아닌것 같아서 안함.
그 이후로 몇번이고 술잔 넘기느라 살짝 알딸딸해지는 추. 그리고 같은 시각에 하이볼 세잔째 마시고 있는 륵. 일주일동안 스트레스가 쌓였는지 술이 술술 넘어감. 친구도 륵이 그렇게 술마시는거 처음봐서 무슨일 있는지 걱정함. 륵 원래 제 문제 남한테 전가하기 싫어서 고민 생겨도 말 잘안했거든.
근데 이번엔 도저히 안되겠음. 사람에 대한 고민이니 다른사람 의견을 들어봐야겠다 생각한 륵. 무거워지는 눈 부릅 뜨더니 친구한테 두서없이 얘기 시작함.

처음 만난 날,
제가 먼저 했던 제안,
그 약속이 변해가는 과정,
그리고 지금 이 혼란스러운 사태.

륵 말하면서도 답답해서 술 계속 마심.
친구는 처음엔 진지하게 들어주다가 약속이 변해가는 시점부터 표정이 묘해짐. 륵이 테이블 보고 줄줄 이상한점을 얘기하는데 그냥 어이가 없음. 아무리 제 친구지만 이렇게까지 뻣뻣한줄은 몰랐는데. 륵 성격 잘알아서 최대한 납득시킬 말을 찾는데 없음. 륵이 너무 무지해서 설명할 방법이 없음.
그러다가 친구가 결국 못참고 륵 어깨를 잡아챔. 너도 깨지고 부서지는걸 경험해볼 필요가 있지, 하고.

"야 이륵다"
"왜에"
"너 그 사람 좋아하는거야"
".....너 취했어?"
"취는 네가 했지. 진짜 모르는거야 부정하고 싶은거야?"

륵 경우의 수에도 수에도 없던 친구의 말에 완전 넋이 나가버림. Image
좋아해? 내가? 소졍언니를?

한번도 그런 감정 옆에 추 이름을 붙여본적 없었음. 첫사랑부터 돌이켜봐도 륵은 좋아하는 스타일이 확고했고, 좋아하면 나타나는 어떤 시그널이 있었음. 그리고 추는 정말 륵의 취향이 아니었음. 그 언니는 덤벙대고, 생각하는거 싫어하고, 말도 많은데. 진짜 아닌데.
륵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있는게 얼굴에 다 드러나니까 친구가 한숨 푹 쉬면서 말함.

"너 애인 만날때도 귀찮다고 연락 잘안해"
"..맞아"
"데이트도 일주일에 한번만 하고싶어해"
"...어"
"근데 너 그 언니랑 뭐했는데?"
"....."
"야 그리고 륵다야"
"....."
"너 계속 그 언니 얘기하면 웃어"
륵은 그 말에 제일 놀람. 제가 웃고있는 줄도 몰랐거든. 옆에 앉아있는 친구는 누구보다 저를 잘알았고, 놀리겠다고 말을 지어낼 사람이 아니었음. 그러면 이 말이 다 진짜라는 건데. 내가 지금 그렇게 보인다는거잖아. 스스로 모르는게 이상할 정도로 그 언니를 좋아하는것 같다는거잖아.
륵 그때부터 좀 심각해짐. 열 생각도 안했던 경우의 수를 열고나니 모든 제 행동이 그쪽에 가까운게 스스로도 느껴졌음. 근데 이전까지 좋아했던 타입이 전혀 아니고, 마음이 가는 과정이 달라서 계속 의구심이 들겠지. 좋아하는게 맞나. 이전까지 좋아함이랑은 너무 다른데. 다른 감정일 수도 있잖아.
혼자 생각해보다가 점점 주변이 시끄러워져서 집중이 안되는 륵. 너희 집으로 가자고 하면서 친구 끌고 나옴. 친구는 그거 따라가면서 한번 더 놀램. 웬만하면 취해도 집 들어가서 자던 륵이 이러는걸 보면 진짜 진지하구나 싶음. 버스 탈까 하다가 애매해서 택시 타기로 하고 큰길가로 나오는 둘.
택시가 안잡혀서 그 앞에 좀 서있는데 갑자기 저 멀리서 누가 허우적대는게 륵 시야에 걸렸음. 그거 보자마자 천천히 눈 커지는 륵. 4차선 도로 건너편, 신호등을 사이에 두고 크게 제 이름을 부르며 손을 붕붕 흔드는 사람.

"륵다야!!"

추소졍. 소졍언니. Image
륵 어이없게도 그 순간에 깨달았음. 길거리에서 불리어진 제 이름이 창피하기보다 반갑게 느껴져서, 헐랭하게 손흔드는 추를 보자마자 웃음이 번져서.
그리고 어느새 반쯤 올라가서 손을 같이 흔드는 저를 보고 완전히 인정했음. 인사만 하고 만족했는지 다시 갈길 가는 추 뒷모습만 눈에 담는 륵.
친구는 그 광경에 할말을 잃어서 고개를 저었음. 륵이 평소에 얼마나 저런 행동을 불편해하는지 뻔히 아니까. 그냥 할말도 없어서 얼른 택시나 잡음. 그리고 친구집으로 가는길에 륵이 어깨에 기대서 조용히 말함.

"..나 저 언니 좋아해"
"존나 알아"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어.
근데 나 저 언니 좋아. Image
륵이 제 마음을 깨달아가는 순간에 추는 2차를 가고 있었음. 1차에서 이미 술을 좀 먹은 상태였고, 가는길에 진짜 우연히 건너편에 륵을 발견했음. 술 안먹었으면 안그랬을텐데. 일주일만에 보는 얼굴이 갑자기 너무 반가워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큰소리를 내고, 길거리에서 난리를 쳤음.
딱히 바라고 한건 아니었는데. 그냥 무시할줄 알았던 륵이 손들어서 같이 인사해주는걸 보니 더 기분이 좋았음. 그 순간만큼은 정답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도 못했던 추. 결국 추의 그 망각이 륵을 정답으로 떠밀어 버렸지만. 아무튼. 쟤 돈거 아니냐고 도망가버린 섫뽀 쫒아가느라 한참 뛰어간 추.
2차 와서도 둘이 만행에 대해서 한참 얘기했음.

"언니 쟤 회사 많이 힘든가 봐"
"내가 다 쪽팔려.."
"그 사람 누군데? 언니는 알아?"
"알고 싶지도 않은것 같애"
"아 내 말 좀 들어봐"

추 얘기할 생각 없었는데 둘이 너무 뭐라고 하니까 말해줘야겠다 싶음. 어디부터 말할까 하다가 첫만남부터 해줌.
구구절절 언급하는데 한번씩 륵 생각나서 웃는 추. 륵과 다른게 있다면 추는 알고있음. 자기가 웃는거. 귀여워서 웃음이 나는것도 인지하고 있음. 다른건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래서 지금 일주일째 연락안해"
"....."
"아까도 일주일만에 본거야. 근데 인사 해주네"
"...."
"륵다도 참 특이해, 그치"
뽀는 어느순간 이야기에 스며들어서 경청하고, 섫은 말없이 자작하면서 뽀 입에 안주 넣어줌. 추가 륵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니까 뽀는 섫이 먹여주는거 받아 먹고 눈 굴리다가 말함.

"좋아하는거 아니야?"
"뭐래"
"아니야?"
"걔가 나를??"

추 진짜 몰랐다는 얼굴이라 뽀 할말잃음.
얘는 내 친구지만 참. 예전부터 눈치가 지지리도 없기는 했음. 학교 다닐때 무슨데이마다 사물함에 뭐가 있어도 과자 많다고 기뻐하던 추 생각하면 말이 되는것 같기도 함. 뽀가 당연한거 아니냐고 설명해주려는데 섫이 먼저 말을 뱉었음.

"너도 걔를"

그 말에 엓뽀 둘다 섫 쳐다봄. Image
"내가 걔를???"
"얘가 걔를???"

누가 친구 아니랄까 봐. 동시에 되묻는 둘 보면서 생각하는 섫. 뽀한테는 작게 쉿 하라고 손잡아주고 추한테는 닥치라고 함. 추 이정도 차별은 타격도 없고 지금 섫이 한 말만 반복재생 되고있음.

너도 걔를.
그러니까 나도 걔를.
그럼 륵다도 나를?
나도 륵다를? ImageImage
엓뽀 둘 다 벙쪄 있다가 뽀가 먼저 정신 차리고 물어봄.

"소졍이도 그 친구 좋아한다고?"
"응"
"언니가 어떻게 알아?"
"보이니까?"

뽀가 자세히 말해달라고 하는데 그냥 무표정하게 뽀 볼만 주물럭대는 섫. 아 하지마아. 그리고 곧바로 꽁냥대는데 추 지금 그게 눈에 안들어옴. 상황이 좀 심각함.
륵하고 있으면 편하고 재밌었음. 반응도 재밌고, 귀엽고. 회사생활에서 숨구멍처럼 느껴지는 순간도 있었음. 근데 나 륵다보고 설렌적 있었나. 심장이 뛰었나. 륵도 그랬지만 추도 해왔던 경험이 있었음. 추가 했던 연애나 사랑은 감정적으로 뜨거웠고, 저랑 비슷한 부분이 있는 사람들과 했었음.
보통 첫눈에 반해서 제가 먼저 다가갔고, 짝사랑을 제외하고는 썸이라고 부르는 알아가는 기간도 굉장히 짧았음. 근데 륵다랑은 이렇게 지낸지가 꽤 됐잖아. 내가 좋아하는거라고? 애초에 륵이 저를 좋아하는 것도 이해가 아직 안되는데. 정보가 과부하 되고 술기운까지 올라와서 머리가 아파오는 추.
섫은 추가 저럴거라고 예상했음. 딱 봐도 자기 마음 모르는게 눈에 보였거든. 남일에 관여하는거 딱 질색이지만 추는 친한 후배였고, 항상 마음의 짐처럼 걸리는게 있었음. 내려놔야 한다면 지금이라는 생각이 드는 섫. 어깨에 기대서 말해달라고 칭얼대는 뽀 토닥이면서 추 잔에 술 채워줌.
"야, 지금만 생각해. 비교하지 말고"

난 이걸로 마음의 짐 털거야.
나머지는 네 몫이고.

과거의 경험과 비교하고 있던 추는 섫의 일침에 정신이 팍 들었음. 지금까지 5년을 알고 지냈는데 섫이 저런말 한적 없었음. 제가 연애를 하든, 헤어지든 별 관심도 없던 사람이 저런 말을 했음. Image
그 말에 추는 파헤치고 있던 과거를 덮고 다시 생각하기 시작함. 근데 술을 너무 많이 먹어서 당장은 생각이 가다가 끊어지고, 제대로 돌아가질 않음. 그래도 흐려지지 않고 버티는게 있다면 륵의 존재. 술을 이렇게 마셨는데도 선명한거 보면 마냥 가볍게 느끼고 있지는 않았구나 어렴풋 깨닫는 추.
섫은 굳이 거기서 더 말을 얹지는 않고 술만 따라줌. 오늘 당장 결론 내릴 수 있을것 같지는 않아서. 그렇게 셋이 한참 더 술먹다가 흩어지고, 택시에 실려가면서 추는 륵이랑 했던 카톡을 돌아봤음. 나 대화 이어가려고 별말을 다 했네. 왜 이렇게 열심이야. 시야가 달라지니 느껴지는것도 달랐음.
근데 가는길에 더 취해서 집에 들어와서는 거의 정신이 없어지는 추. 뽀한테 잘 들어왔다고 톡 보내야 하는데 시야가 흐릿해서 보고있던 륵 톡방에 보내버림.

-ㅇ ㅑ 나 집도착함

그대로 뻗어서 잠들어버린 추. 다음날 눈 뜨자마자 폰 보는데 켜자마자 본 화면에는 륵 답장이 있었음.

-잘자요
추 그거 보자마자 벌떡 일어남. 숙취 때문에 머리 깨질것 같은거 부여잡고 그거 다시 읽어봄. 잘자요. 세글자가 맞는데. 륵 한번도 이런 말을 보낸적 없었음. 어쩌다 시간이 맞아서 제가 잘자~ 해도 그 톡을 마지막으로 만들고 읽씹했음. 놀란건지 뭔지 심장이 쿵쾅거려서 다시 침대에 엎어지는 추.
어제 건너편에서 마주쳤던 륵, 뽀가 했던 말, 그리고 섫이 했던 말. 그게 전부 합쳐저서 머리가 깨질것 같은 추. 평소 같으면 잘잤냐고 톡을 이어갔을텐데 한번 멈칫하니 모든게 어려워졌음. 좋아하냐고 하면 잘모르겠는데 안좋아하냐고 해도 대답 못하겠음. 내 행동에 감정이 없었다고 할 수 있나.
예쁜 동생으로 여긴다고 확신했는데 시야를 좀 넓혀보니 그건 아닌것 같음. 생각을 못했던거지 하기 시작하니까 절대 평범하지는 않음. 그게 좋아한다는 확실한 감정까지는 아니더라도 뭔가 있는건 맞는것 같음. 그리고 륵의 마음도 확실히는 모르겠음. 좋아하는것 치고는 너무 담담했던것 같아서.
일단 엓루의 애정표현 자체가 너무 달랐음. 쏟아붓는 추와 스며드는 륵이었기에 서로의 감정은 더욱 알기 힘들었지. 그래도 섫이나 뽀가 그냥 하는 말은 아닐테니 무작정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음. 아무래도 륵이랑 얘기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카톡방 다시 들어가는 추.
-잘잤어?

이건 너무 어색한가.

-어제는 갑자기 미안ㅋㅋ

이건 더 어색하잖아. 탈락.

-륵다야 잠깐 얘기 좀..

근데 지금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하지? 탈락.

그렇게 몇번이고 썼다 지웠다 하다가 속 안좋아져서 화장실로 뛰어가는 추. 결국 답장할 타이밍을 놓쳐버림.
그리고 그 답장을 기다리고 있는 륵. 친구 집에서 똥머리 하고 침대에 앉아서 폰만 뚫어져라 보고있음.

"폰 부서지겠다"
"답장이 안와"
"아직 자나보지"
"1 없어졌어"
"네가 할말없게 보낸거 아니야?"
"나 너무 티났나?"
"너 뭐 고백했어?"
"잘자라고 했어"
"...대체 어디가 티나는건데"
륵 혼란의 시간을 겪었지만 인정한 뒤로는 흔들림이 없었음. 감정을 아는데 오래 걸렸지만 한번 깨달은 이상 륵은 제 방식대로 표현을 해야했음. 숨길 생각은 애초에 없어. 언니 좋아하고, 좋아하니까 좀 더 잘해보고 싶음. 근데 추 마음을 모르니까 냅다 고백하기 보다 조금씩 가까워지려고 하겠지.
어제 갑자기 새벽에 연락이 온걸 보고 취해서 잘못 보낸건 알았음. 그래도 나쁘지는 않았지. 술 취해서도 제 존재가 있었다는거고, 그게 답장할 기회를 주기도 했으니까. 일부러 한번도 하지않던 잘자요 인사를 했는데 읽고 답이 없으니까 심란해지는 륵. 나 이거 좋아하는 사람들한테만 하는건데.
침대에 시무룩해있는 륵을 보니 친구도 마음이 안좋음. 잘자요 하나 보내놓고 저러는게 웃기기도 하고. 그래도 륵이 누구 좋아하면서 저런 고민하는것도 처음봐서 친구가 과제 하다가 말함.

"숙취해소제 같은거라도 줘봐"
"..좋아하려나"
"사귀고 싶다며"
"응"
"좋다며"
"응"
"그럼 표현해야지"
륵 그 말 듣고 생각하다가 다시 핸드폰 찾음. 선물하기에서 숙취해소제 후기랑 평점 다 따져서 제일 좋은걸로 추한테 보냄.

'숙취에 좋대요'

메시지도 간결하게 남김. 그리고 한바탕 화장실에 있다가 비틀대며 나온 추. 어지러운 머리 붙잡고 륵 카톡 보자마자 다리에 힘풀려서 주저 앉아버림.
뭔지 몰라도 어제 무슨일이 있었구나. 나 혹시 술쳐먹고 실수했나. 뽀한테 보낼거 잘못 보낸건 봤는데 그게 이유인것 같진 않고, 혹시 모르는 새에 통화를 했나 싶은데 기록에 없음. 잘자요도 충분히 이상했는데 숙취해소제까지 받고나니 추는 륵의 마음에 확신이 섰음.

얘 나 좋아하는구나.
그래서 나는? 나는 어떻지? 아직 제 마음에 대해선 확신이 없는 추. 일단 사귀어보고 아니면 말지! 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기는 싫었음. 륵이 아직 어리기도 했고, 제 마음도 그렇게 가벼운것 같지도 않아서. 폰 든채로 무릎 감싸안고 얼굴 파묻는 추.
그래도 선물까지 받은 마당에 무시할 수는 없어서 고맙다고, 잘먹겠다고 답장함. 그리고 곧바로 1 사라지는거 보고 놀라서 창 닫고 침대에 폰 던짐. 근데 또 1분도 안돼서 진동 울리는거 보고 다시 폰 확인함.

-속 괜찮아요?

..륵다가 생각보다 직진형인가.
아, 방이 왜 이렇게 더워.
하나에 빠지면 그것만 몰두한다던 륵 말이 떠오르고, 일주일 전에 제가 했던 질문까지 합쳐지니 대충 모양새가 짜맞춰졌음. 그에 대한 대답을 생각하다가 깨달았구나. 그래서 지금 나름대로 표현하는구나. 그런 륵이 귀엽기도 하고, 아직은 어색하기도 하고. 아무튼 싫지는 않았음. 확실히.
아 나 벌써 스며든건가? 이렇게?

추가 아무것도 모르고 건넨 백번의 손길이 둘을 가깝게 만들었고, 나머지 한걸음을 위해 이번엔 륵이 손을 뻗고 있었음. 나 이럴때는 어떻게 했더라. 또 과거의 경험을 꺼내며 감정을 비교하려다 섫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멈추는 추. 과거를 딛고 현실에 다시 섰음.
오로지 륵을 향한 감정이었음. 그러니 확실히 하려면 너를 통해 하는게 맞겠지. 아직은 잘 모르겠어. 지친 삶에 반가운 존재가 좋은거지, 아니면 그냥 네 자체가 좋은건지. 확인하고 싶어. 눈 깜빡 하다가 핸드폰 고쳐쥐고 답장하는 추.

-다음주 저녁은 언제 먹을까?

너 정답 나왔잖아. 그치.
륵이 마음을 드러내고 있는 이상 피하는건 예의도 아니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음. 우리의 결과가 좋지 않다고 해도 지금 당장 그러기 싫어. 손톱 뜯으면서 기다리는데 바로 1 사라졌던 카톡방에 이번엔 3분 텀으로 답장이 왔음.

-다음주 학원 화금만 가요
-근데 월요일에 먹고 싶어요

아, 얘 진짜.
친하지 않다고, 남이라는 생각에 쳐놓았던 바리게이트가 사라지니 말랑한 구석이 드러나는 륵. 일부러 매력어필 하는것도 아니고, 그냥 원래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이럼. 그리고 그게 제대로 추 마음에 먹혀 들어가겠지. 귀엽다고 생각했던 애가 제대로 귀엽게 구니까 추 머리가 아른해지는것 같음.
얘 이러다 월요일에 고백하는거 아니야? 근데 그 생각하는 와중에도 입꼬리가 올라가는게 아무래도 저도 좀 망한것 같은 추. 너털웃음 짓다가 그럼 월요일에 보자고 했더니 륵이 이번엔 한번도 보낸적 없던 이모티콘을 보내왔음. 하트 잡고 춤추는 임티.

륵이 좋아하는 사람한테만 쓰는거.
륵의 태세전환이 갑작스러울법도 한데 애초에 추는 륵이 저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었고, 그 위로 좋아한다는 감정이 얹어진거라 거부감이 있지는 않았음. 그래도 큰일은 났어. 저러는게 귀여워보여서 망한것 같아. 똑같이 신나하는 임티 보내주고 일단 톡방 닫고 침대에 머리만 툭 기대는 추.
조용한 방에 시계 초침이 지나가고. 그 다음으로 느껴지는건 작게 쿵쿵거리는 심장소리였음. 전에 느꼈던 박동과 완전히 같다고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오늘을 보면. 지금을 보면. 심장이 뛰고 있네. 평소보다 좀 더 빨리. 딱 기분 좋을만큼만. 그걸 깨닫고나니 괜히 민망해져서 손으로 눈가 덮는 추.
아니라고 못하겠네. 이제 그건 진짜 못하겠어. 그렇게 주말의 시작을 작은 깨달음으로 시작한 추는 주말 내내 륵 생각을 했음. 먼저 이유없이 톡을 보내는게 귀여웠고, 생전 안하던 자기 일상을 세세하게 공유해주는게 귀여웠음. 귀엽단 생각은 전부터 했지만 작정하고 이러니까 더 귀여워.
륵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 했음. 추 반응이 나쁘지 않아서 너무 적나라한 감정 빼고는 하고 싶은말 다 함. 좋아하는 사람이 되고나니 톡이 평소보다 재밌어서 륵은 시간 가는줄 모르고 주말내내 톡함. 그래도 일요일 밤에는 과제 해야 된다고 칼같이 4시간동안 사라져버림. 추는 그것마저도 웃겼고.
그렇게 서로만을 온전히 담은 주말이 지나고, 륵은 그동안 더욱 마음을 확신했음. 그리고 추는 출근길에 륵에게 온 톡을 보고 얕은 생각을 찍었음.

-출근 잘해요

오늘은 평소보다 덜 힘든 월요일이 될것 같다고,

-근데 아침부터 배고파요
-빨리 저녁먹고 싶어요

나도 그렇다고,
그런것 같다고. ImageImage
추 원래 월요일을 극혐했음. 출근부터 퇴근까지 체력이 30 정도로 일하는 기분이라 월요일은 늘 텐션이 낮았는데 오늘은 달랐음. 상사가 꼬라지 부려도 화도 별로 안나고, 일하다가 전산이 에러나도 땅 꺼져라 한숨도 안쉼. 짜증이 팍 나긴 하는데 그때마다 륵 카톡 온거 보면 잠잠해졌음.
오늘따라 추한테 업무가 몰려서 같은 팀원들은 소졍씨 괜찮나 걱정하는데 정작 추는 무덤덤함. 점심 먹으러 나가서도 사람들이 괜찮냐고, 일 많으면 넘기라고 하는데 호탕하게 웃으며 코잡는 추. 혼자 할 수 있다고 손사래 치는데 동료들은 의아함. 밝은 사람이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던것 같은데.
"소졍씨 뭐 좋은일 있어요?"
"아뇨 무슨-"
"수상한데?"

와중에 촉 좋은 대리가 쿡쿡 찌르는데 추 절대 말안함. 연애해도 숨길 판에 아직 제대로 정리되지도 않은 륵을 드러낼 생각 없음. 그냥 대충 얼버무려.

"저녁에 맛있는거 먹기로 해서요"

아마도 좋은 사람이랑요.
그 문장은 괄호에 숨기고.
점심 먹고, 카페도 다녀오니까 벌써 오후시간. 팀회의까지 끝내고 와보니 톡방에 륵이 보낸 시리얼 사진이 있었음. 륵 원래 자취한다고 밥 잘 안챙겨 먹었고, 예전에도 추가 그게 걱정돼서 한소리 하면 괜찮다고 선 을 그었음. 근데 추가 아까 점심 먹기 전에 너도 챙겨 먹으라고 흘려 말했거든.
사진이 두개 왔는데 하나는 시리얼 담은거, 하나는 빈그릇. 보고라도 하는것처럼 사진만 덜렁 두장온거 보고 남들 모르게 입 가리는 추. 얘 뭐지. 이런게 연하인가. 왜 이렇게 귀엽지. 륵은 그 시간에 침대에 누워서 폰 보고 있음. 톡 읽었네. 왜 답장이 없지. 시리얼도 다 먹었는데. 조금 시무룩.
륵 오늘 하루 플랜에 점심식사는 없었음. 근데 추가 챙겨 먹으라고 해서 바꿨음. 계획을 수정하는것 자체가 륵한테는 대단히 큰일이었고, 애정이었음. 워낙 성향이 다른 추라 깊이까지는 파악 못하는데 귀엽기는 해. 마음을 전부 다 읽어내진 못해도 이러는게 예쁘잖아. 나 좋아서 이러는거잖아.
추 답장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팀장이 불러서 급하게 핸드폰 덮고 튀어나감. 덕분에 사진 두장과 함께 남겨진 륵. 목끝까지 이불 덮고 핸드폰이랑 눈싸움함. 추는 팀장 얘기 들으면서도 눈은 자리에 있는 핸드폰으로 가는 중.

-잘했네ㅋㅋ맛있게 먹었어?

다 쳐놓고 전송못한 문장이 신경쓰여.
근데 곧바로 본부장실까지 다녀오라는 말에 울며 겨자먹기로 다녀오는 추. 거의 1시간 가까이 지나서야 자리 돌아옴. 앉자마자 폰부터 확인하는데 톡방에는 새로운 메시지가 와있지.

-??

솔직한 물음표 두개.
진짜 이륵다 같아.

그리고 또 20분 뒤에 붙은 빼꼼 이모티콘.
...진짜 이륵다 같아.
그게 너무 귀여워서 추 썼던말 다 지우고 새롭게 써서 답장함.

-륵다얔ㅋㅋㅋ너무 귀엽다 너..

추 이렇게 말하는거 처음은 아님. 몇주 전부터 륵이 귀여워보이면 톡으로든 말로든 했음. 달라진건 추가 그 말에 무게를 잔뜩 실었다는 거,

"이 언니 이상해.."

륵이 그 말에 부끄러워졌다는거.
귀엽다는 소리 많이 듣고 살아서 익숙한줄 알았는데 추가 저를 귀여워하는 포인트는 알 수가 없었음. 대체적으로 귀여워했지만 한번씩 빵 터질 때가 있는데 그건 륵이 전혀 의도하지 않았을 때였음. 그래서 더 적응이 안되는 륵. 좋아한다는 자각 없을땐 그냥 이상한 사람이었는데 이제 그게 안됨.
말로는 이상하다고 하지만 기분이 좋은건 감추지 못하는 륵. 누가 귀여워해줘도 뻔뻔하게 응수할 수 있었는데 추한테는 그게 잘 안됐음. 첫만남부터 모든게 예외로 다가왔던 추는 륵의 세상에서 항상 생각지 못한 곳에서 튀어나왔고, 말을 걸었고, 그게 모여서 설렘이 됐음.
익숙한 사람에게서만 느끼는게 애정이고,
비슷한 사람을 이해하며 하는게 연애라고 여겨왔던 륵. 근데 다른 사람에게 생기는 호기심이 애정이 될 수 있다는걸 추를 통해 알았고, 낯선 사람과 이해하지 못할 감정을 주고받는 연애를 하고 싶어졌음. 륵에게 추는 처음으로 벽을 깨트린 사람이었음.
지금도 쉬지않고 물음표가 생겨나.
방금 뭐가 귀여웠던거지?
왜 뭘해도 귀엽다고만 하지?
좋아해서 그러는건가?
예전 같았으면 생각이 많아지는
상황이 딱 질색이었음. 그래서 썸이라고 부르는 기간도 짧고, 완벽히 정리된 관계가 좋았음.

근데 언니는 하나도 안싫어.
더 궁금해. 더 알고싶어. Image
톡 좀 하다가 업무하러 간다고, 출발할때 연락하라고 사라진 추. 륵도 슬슬 준비하자 싶어서 화이팅 이모티콘 보내주고 침대에서 일어남. 씻고 나와서 머리도 말리고, 결연한 표정으로 옷장 여는 륵. 친구한테 전화해서 대뜸 말함.

'나 오늘 뭐입지'
'..뭐래 나 자다 일어났,'
'원피스 입을까?'
항상 추랑 만나는건 학원 가는 날이었어서 복장이 편했음. 추는 회사 다니니까 늘 깔끔했는데 저는 맨날 후드에 가끔은 슬리퍼도 질질 끌고 다녔음. 그때는 가능했을지도 몰라도 이제 안돼. 일단 늘 묶던 머리부터 정돈하는 륵.

'그 언니 만나?'
'응, 저녁에'
'데이트야?'
'데이트로 만들고 싶어'
아직 데이트는 아니지.
나도 고백 안했고,
그 언니 마음도 모르니까.
근데 그렇게 만들고 싶어.

'좋아하게 만들고 싶어'

가능하면 하루라도 빨리.

'...너 진짜 좋아하는구나'
'응. 그니까 빨리 같이 고민해줘'
'근데 너 어차피 골라줘도 안입을거잖아'
'그건 맞아. 그래도 참고는 할게'
그렇게 륵의 오후가 지나가고, 추는 오늘만큼은 절대 야근하기 싫어서 밀린 업무 다 처리함. 그리고 5시 50분부터 집에 갈거라는 분위기 팍팍 풍김. 할말은 없는게 맡은거 다 했고, 평소에 이럴 사람이 아니라서 팀장도 보고서 하나 주려다가 거둠. 정확히 앉아있다가 6시 땡 하자마자 일어나는 추.
팀장한테 가서 인사도 꾸벅하고 제일 먼저 퇴근함. 17층에 멈춘 엘베 보고 구두굽 달달 떨다가 카톡만 남기는 추.

-퇴근함!

로비에서 만나기로 해서 뒷말은 굳이 안하는데 1이 곧바로 사라지더니 륵한테 답장이 왔음.

-어디에요?
-나 엘베 내려오는거 기다리는 중ㅜ
-도착했으니까 천천히 와요
벌써 왔구나 싶어서 마음만 급해지는 추. 사람 없는 엘베 확인하고 1층까지 멈추지 않길 기도함. 근데 얼마안가 다시 엘베가 멈추고, 문이 열려. 퇴근시간이라 어쩔 수 없나 하고 한숨 푹 쉬던 찰나.

"왜 한숨을 쉬고 그래요?"

6층에 멈춘 숫자.
엘리베이터 앞에 서있는 사람.
웃고있는 이륵다. Image
얘가 왜 여기있지?
로비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아니 그건 그렇고,

생각 하다 멈추고 옆에 서는 륵 바라보는 추. 늘 메고 다니던 백팩도 없고, 동그란 안경도 없고, 딱 제 나이에 맞는 예쁜 옷차림. 다시 이어지는 생각들.

왜 이렇게 예쁘게 하고왔어.
진짜 작정했나 봐.

괜히 헛기침만 하는 추. Image
내려가는 중에는 걸리는 층이 없었고, 정적이 괜시리 어색해서 추가 말을 먼저 꺼냄.

"학원 들렸어?"
"쉬는날 학원을 왜 가요"
"아 너 6층에서 타길래.."
"그러게요, 왜 그랬지?"
"..어?"
"너무 비효율적인데"

륵 스스로도 잘 모르겠음.
왠지 그렇게 하고 싶었음.
6층에서 추를 기다리고 싶었음.
추한테 심어진 이미지를 지우고 싶었나
그 정의를 부수고 새로 심고 싶었나.
누군가를 좋아하는 내 모습은 이렇다고,
언니를 좋아하는 나는 이렇다고.
그 각인을 새겨주고 싶었나 봐.

륵 이제 제 행동의 이유를 만드는건 그만뒀음. 추와의 관계만큼은 어차피 이해되는 일이 없었기에.
그냥 숫자가 3에서 2로 바뀌는거 보면서 추한테 고개 돌리는 륵. 그리고 지금까지 보여준적 없던 해맑은 얼굴로 웃음.

"모르겠어요"

모르는게 없어야 했던 륵에게서
그 말이 아무런 걸림돌 없이 튀어나왔고,

"비효율적이고 싶었나"

그 순간이 추한테는 어떤 사고가 됐음.
피할 틈도 없이 쾅. Image
언젠가 부딪힐건 알았는데 이정도였나.
분명 저 멀리서 오고 있었잖아
갑자기 속력을 높이면 어떡해.
형태는 알아볼 수 있게 해줘야지.

륵이 살아왔던 가치관이 부서질걸 감수하며 엑셀을 밟았고, 덕분에 추는 핸들을 돌릴 틈 없이 부딪혀버렸음.

좀 더 지켜봐야지.
그 생각이 전부 부서져버려.
너무나 달랐던 두사람이기에 서로의 모습을 온전히 가지고는 완벽한 합이 될 수 없었음. 륵이 먼저 어느 부분을 내어줬고, 이번엔 추가 선택할 차례. 엘베에서 먼저 내려서 그 앞에 서는 륵. 열림버튼 누르고서 말해.

"안내리세요?"

그때 6층에서 시작된 우리.
지금 내리면 다른 우리가 될것 같아.
추는 그 짧은틈 사이에 언젠가의 저녁을 떠올려냈음.

'륵다야 넌 원래 카톡 잘 안해?'
'필요할 때는 하죠'
'너 내 톡은 잘 씹던데'
'비효율적인 대화니까요'
'..넌 그렇게 효율 따져서 연애는,'
'좋아하면 안따져요'
'.....'
'연애 자체가 비효율적인데'

륵다야,
너 지금 나랑 연애하고 싶다는거지.
추 그것까지 깨닫고 마음 재보던걸 완전히 그만둠. 혅정언니 말이 맞아. 과거의 내가 어땠고, 지금까지 내 연애가 어떻고, 사랑을 규정하는 여러 가지 잣대가 어쩌고. 그거 다 의미없는것 같아.

"응, 지금 내려"

의미는 너 하나면 됐어.
네가 예뻐.
설레고 좋아.
너랑 연애, 하고싶어. Image
둘이 그날 사귀지는 않았음. 진짜 데이트 같이 저녁 먹고, 대화도 했지만 사귀자고는 둘 다 안함. 그래도 그날이 서로 확신을 갖는 계기가 됐겠지. 언니가 나 좋아하는구나. 륵다가 나 좋아하는구나. 대놓고 말은 안했지만 서로 마음만 확인했음. 그러다가 진짜 사귀게 된건 또 일주일 남짓 지났을 때.
추는 평일이었고, 륵은 토익 안가는 날.
륵이 저녁에 약속 있다고 해서 일주일동안 거의 매일 같이 먹던 저녁을 못먹게 됐던 날.
륵이 아무리 추를 알게 되고 성격이 조금 달라졌대도 본성까지 바꿀 수는 없었음. 슬슬 이 정도 됐으면 도장을 찍고 싶었음. 사귄다고. 우리 손까지 잡았는데.
손 잡은건 추가 먼저였음. 지하철역 내려가는 길에 누가 뛰어 올라오는거 피하다가 추가 륵 손을 잡았음. 그리고 둘 다 잡은손 뺄 생각을 못해서 개찰구 앞까지 와놓고 삐걱댐.

'아, 나 편의점 가야 하는데..'

추가 어색하게 거짓말을 했고,

'그럼 같이 가요'

륵도 모른척 넘어갔음.
그 날 둘이 편의점도 가고, 그 다음에는 륵이 다이소 간대서 거기도 감. 그냥 좀 더 같이 있자는 말을 둘 다 못해서 그렇게 한참 걸었음. 그래도 둘 다 만족했을것 같지. 륵은 세상에서 비효율적인 시간을 보내며 설렜고, 추는 제 수면시간이 깎여 나감에도 즐거웠음. 그 후로는 약속한것처럼 손 잡음.
거기까지는 좋아. 만나서 밥먹고, 손도 잡고, 이모티콘에 하트도 붙었어. 그럼 진짜 사귀는건데. 륵 잠재웠던 정리본능이 속에서 꿈틀대고 있었음. 추는 또 타이밍을 보는 중이었지. 워낙 감성적이라 첫 시작을 로맨틱하게 만들고 싶어서. 어느날, 어디서, 어떤 시간에 고백할지 고민하고 있었음.
륵은 사실이 가장 필요했고, 추는 사실이 만들어지기까지 과정이 필요했음. 달라서 서로를 좋아하게 된 둘이지만 또 너무 다르니까. 추는 며칠동안 고민하다가 주말에 고백하려고 레스토랑 예약해놨지만, 륵은 그거 다 모르겠고 빨리 사귄다고 정리를 하고 싶었음. 왜 륵이 이렇게까지 급하게 구느냐.
륵 원래 사귀기 전에 스킨십 절대 안함.
감히? 상상할 수 없었음.
그렇다고 손잡은게 싫었던건 아니야.
언니 손은 성격 만큼이나 따뜻해서
좋았고, 그걸 후회하지 않았음.
근데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거지.
사귈거라는 믿음 만으로는
다음을 그릴 수 없는 륵.

그러니까.
륵은 그 이상을 밟고 싶었음.
좋아하는 사람 옆에 있으니까 뽀뽀도 하고 싶고, 안기도 싶었음. 원래같으면 그냥 제가 고백해서 사귀고 말겠지만 륵이 그러지 못하는건 추가 했던 말이 있어서였음.

'나는 내가 고백하는게 좋더라'

부끄럽다는 얼굴로 그렇게 말하던게 떠올라서. 참으려고 했는데 슬슬 한계가 온거지.
결국 그날 친구 만나서 답답함에 술을 오버해서 마신 륵. 추는 륵이 회사 근처에서 술 마신다길래 섫 야근 잡혀서 데이트 취소됐다는 뽀 불러다가 저녁 먹는 중이었음. 이따 집에 갈때 같이 갈 수 있을까 해서. 륵 얘기 한번 꺼냈다가 뽀가 더 흥분해서 질문공세 하는거 간신히 받아주고 있던 추.
진동 울리길래 바로 폰꺼내서 확인함. 마음 확인한 이후로 륵만 진동 모드 바꿔놔서 바로 륵인거 알았음. 잘 먹고 있나 하고 흐뭇하게 톡방 켰던 추. 내용 확인 하고는 입꼬리가 서서히 내려감.

-언니
-왜 고백 안해요?

머리카락이 쭈뼛대는 느낌에 같이 보자고 얼굴 들이미는 뽀 막아내는 추.
륵은 취했음. 필름 끊긴건 아닌데 말을 참을 수 있는 자제력이 없었음. 진짜 보냈냐고, 제발 맨정신에 얘기하라는 친구 피해서 가게 바깥으로 나온 륵. 골목 안쪽 벽에 쪼그려 앉아서 코 훌쩍하고 또 톡 보냄.

-저 취해써요
-...근데 진짜 고백 안해요?

이어지는 톡에 추는 실시간으로 눈 커지는중.
이거 긴급상황 같아서 아 좀 같이 보자! 하는 뽀 이마 콱 밀어버리고 밖으로 나감. 머리 쓸어 올리면서 얘가 이 말을 무슨 의미로 하는건가 한참 고민하는 추. 누군가에게 애정이 생기니 예전 그 걱정많던 모습이 튀어나오겠지. 나 뭐 실수했나. 너무 질질 끌었나. 륵다가 화났나. 그런 걱정이 뚝뚝.
하지만 륵은 적어도 감정의 혼란을 주는 사람은 아니었음. 술기운에 뱉긴 했지만 또 거짓말은 안해. 답장없는 추에게 쐐기를 박는 륵.

-안사귀는 사람하고 뽀뽀안해요
-..그니까 고백 좀 해요
-..뽀뽀하고 싶어..ㅠ

그 말은 추의 걱정을 지웠고,
어떤 이성을 망가트렸음.
주말에 잡은 레스토랑,
미리 짜놨던 멘트,
예상했던 분위기.
이제 추는 그런게 전혀 상관없었음.
지금 당장 륵을 봐야했음.
그거 보자마자 답장은 안하고 전화하는 추.
륵 핸드폰 쥐고 있어서 바로 받음.

'륵다야 어디야'
'..언니 왜 고백,'
'어디야. 빨리.'
'이자카야 우주요'
'거기 있어'
그 말만 하고 가게 들어가더니 가방 챙기는 추. 뽀는 섫이랑 전화하다가 추가 들어와서 가려고 하니까 놀래서 손목 잡음.

"야 뭐해??"
"나 륵다한테"
"갑자기?"
"계산은 내가 할게. 김지엱 너는..어.."

누가봐도 급한 얼굴로 횡설수설하는 추. 뽀는 물음표 가득인데 전화기 너머로 듣던 섫이 말함.
'가라고 해'
'어? 아니 언니 추소졍이,'
'가라고 해 지엱아'

언니가 일단 말하니까 잡고있던 손목 스르륵 놔준 뽀. 추는 한번 더 돌아보더니 미안하다고, 연락한다고 하고 바로 나가버림. 졸지에 혼자 남겨진 뽀는 핸드폰만 붙잡고 어버버.

'너 어디있어? 언니가 갈게'
'응? 언니 끝났어?'
안그래도 업무 마무리하고 정리 중이었던 섫. 잠깐만- 하고 음소거 하더니 가방 챙겨서 퇴근함. 다시 소리 켜고, 어둑해진 로비 창가에 서서 통화 이어가는 섫.

'퇴근했어. 주소 찍어주면 갈게'
'진짜로?'
'응, 언니랑 술마셔'
'아 완전 좋지! 주소 톡으로 보낼게!'

그래, 지엱아.
넌 나랑 마셔. Image
섫은 뽀에게 가고, 추는 륵을 향해 달렸음. 회사 다니느라 먹자골목 지리는 다 외워놔서 어렵지 않게 식당을 찾았음. 숨 몰아쉬면서 가게 들어가려는데 언뜻 보이는 골목이 묘하게 신경쓰이는 추. 아까 밖에 있었던것 같은데. 혹시 몰라서 잡았던 문고리 놓고 골목으로 들어가는데 거기 륵이 있었음.
안움직이고 벽에 기대 쪼그려 앉아있는 륵. 익숙한 또각거리는 소리 듣고서야 고개 들어올림. 눈앞에는 어느새 숨 몰아쉬는 추가 있고. 천천히 그 앞에 무릎 굽혀 앉은 추는 까무룩 술에 젖은 륵과 눈을 맞췄음.

후미진 골목,
서로 술냄새 폴폴 풍기며.
원하던 분위기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1초라도 못참겠어.
과정 그런게 무슨 상관이야.
나 그게 누구보다 중요했는데.
그것 때문에 놓친것들이 많았는데.

"륵다야"
"...네"
"나랑 사귈래?"

너는 그러기 싫어.
너를 결과로 붙잡고 싶어졌어.
연애하자. 사랑하자.
지금 말안하면 후회할것 같아. Image
그 말에 륵은 술기운이 겹쳐서 감정이 울컥했음. 눈앞에 간절한듯 구겨진 언니 얼굴을 보니까 가슴이 뜨거워졌음. 잔잔한게 사랑이라 믿었었는데. 추는 너무나 낯선 온도로, 누구보다 설레는 시작을 선물했음. 벅차서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륵에 급한건 추였지. 대답은 어차피 알고있어. 근데.
나 지금 급해서. 빨리 대답해줬으면 좋겠어.

"나도 안사귀는 사람이랑 키스안해"
"....."
"그러니까 륵다야..대답 좀 해줘"
"....."
"키스하고 싶어"

그 말을 하는 추도, 듣는 륵도 심장이 터질것 같았음. 륵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추가 얼굴을 감싸며 입을 맞췄고, 그렇게 둘은 연애를 시작함. ImageImage
여느 커플들처럼 싸우기도 하고, 그럼에도 금세 다시 좋다고 붙어먹는 연애를 하는 둘. 그렇게 연애한지 반년 정도 됐을 때 제발 자리 만들라는 뽀 독촉에 못이겨서 섫뽀엓루가 같이 만나는 자리가 만들어짐. 추 전애인들을 뽀는 거의 봤고, 그럴 때마다 귀찮다고 안나오던 섫도 이번엔 나왔음.
섫은 나와서도 말을 많이 하지는 않음. 애초에 말수가 적기도 했고. 대부분 뽀랑 둘이 얘기하거나, 엓뽀가 시끌벅적하면 륵한테 한번씩 말거는 정도. 륵은 추가 제일 친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편하게 대해줘서 금방 적응했음. 애인 친구 이렇게 만나는것도 추 만나고 처음 해봤음.
추도 륵이 데이트하면 보통 조용한 곳을 선호하고, 친구들도 좁고 깊게 사귀는걸 알아서 이런 자리 강요하고 싶지 않았음. 반년동안 뽀가 독촉하는거 무시한 이유도 그거고. 근데 감정이 점점 커지고 안정되어가니까 한번쯤 소개해주고 싶어졌음. 제일 소중한 인연들에게, 사랑하는 제 사람을.
그래도 륵이 불편해할까봐 부담 안주려고 했음. 무리면 거절해도 된다고 네번이나 반복해서 말했는데 륵은 생각하다가 대수롭지 않게 오케이 했음. 이유는 륵도 모름. 모르는데 그냥 오케이가 나왔음. 근데 그 이유를 따지고 들어갈 생각이 이제 정말 없어서 그냥 침대에 걸터앉은 추 손목 당기고 끝.
그렇게 만들어진 자리였고, 륵이 애초에 타인이 아니라 나름 애인의 친구들이라는 타이틀을 세워놓고 만나서 추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벽을 세우지도 않았음. 넷 다 성격이 무난하다보니 분위기 좋게 술잔이 오고가고, 섫뽀는 륵을 귀여워함. 륵은 처음 봤을 때부터 섫뽀가 잘어울린다고 생각함.
중간에 담배 피우러 나가는 섫을 뽀가 쫄래쫄래 따라가고, 둘이 남겨진 엓루. 륵 앞접시에 국물 떠준 추는 익숙하게 손을 잡아 쥐었고, 륵도 어깨에 기대서 도란도란 얘기함.

"둘이 얼마나 만났다고요?"
"5년 됐을걸"
"잘 어울리는것 같아"
"학교에서도 유명했어"
"하긴 둘 다 예쁘니까.."
진짜 예쁘신것 같다고 조금 취해서 중얼거리는 륵 힐끔 내려다본 추. 혼자 륵 잔에 짠하고 술 비우더니 손 꽉 잡으면서 말함.

"너도 예뻐"

감성적인 고백을 자주 하는 추,

"..그건 맞죠"

이성적인 대답을 자주 하는 륵.
근데 사랑이 뭐라고 추는 그런 륵이 귀여웠고, 륵은 다정한 추가 좋았음.
다른사람들이 하는 연애. 그래서 재밌는 연애. 엓루가 하는 사랑은 그랬음. 섫뽀가 술자리로 돌아오고, 뽀 입술 살짝 번져있는거 보고 기겁을 하는 추. 륵이 보기전에 발 툭툭 쳐서 눈짓으로 얘기함. 그럼 뽀는 금방 알아듣고 조용히 티슈 들어서 슥슥 지움. 옆을 보니 섫은 태연하게 륵이랑 얘기 중.
5년이나 됐는데 징하다 징해. 고개 설설 저으면서 음식 먹다가 또 쏟는 추. 그럼 륵은 자연스럽게 그거 정리하고 새로 접에 담아줌.
그거 번갈아 보면서 피식 웃는 섫. 뽀가 귀 쫑긋해서 돌아보면 고개젓고 안주만 입에 넣어줌.

그렇게 술자리가 무르익고, 술 많이 마신 넷. 특히 뽀륵이 취해버렸네.
섫은 대학 졸업하고 술 많이 안먹고, 추도 오늘은 륵 신경쓰느라 자제했음. 덕분에 뽀륵이 취했는데 취한 텐션이 비슷해서 짝짜쿵 잘 놈. 그러다가 갑자기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고 일어나는 뽀. 애 넘어질까봐 긴장하고 있던 섫은 같이 갈까 물어보는데 갑자기 자기가 같이 간다고 륵이 벌떡 일어남.
추도 놀라서 쳐다보는데 둘은 이미 언니동생~ 하면서 어깨동무 해서 나가는중. 추가 걱정돼서 눈을 못떼니까 섫이 먼저 테이블 두드리고 말함.

"지엱이 저정도면 멀쩡한거야"
"그건 알지"
"네 애인 잘 모셔올거니까 술이나 먹어"

추 빈잔에 술 가득 따라주는 섫.
둘이 이런저런 얘기 나누겠지.
각자 사는얘기, 연애얘기. 대부분 각자 애인 얘기만 하고 상대방 말은 대충 들음. 근데 워낙 오래 봤고 친하니까 그게 익숙함. 얘기하면서 한잔씩 술잔 기울이다보니 추도 좀 취하기 시작하고, 앞에 무심한 섫을 보니 몇달전 그 날이 떠올랐음.

'너도 걔를'

저도 몰랐던 감정을 섫이 짚어준 날.
그게 어떤 시작이 된거거든. 감정을 알고 나서는 어려운게 없었으니까. 그날 제대로 깨닫지 못했으면 삽질하는 기간이 길어졌을텐데. 생각해보니 고맙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음. 표정에서 다 읽힐만큼 티가 났나 싶고. 김지엱도 모르던걸 이 언니는 어떻게 알았을까 싶고. 여러 말을 담아 묻는 추.
"근데 언니는 어떻게 알았어?"
"뭐가"
"내가 륵다 좋아하는거"

섫은 그 말 듣고도 별 반응 안함. 그냥 눈썹 한번 꿈틀 하더니 안주만 뒤적거림. 또 모른다고 하려나. 저 언니는 할말 없으면 모른다고 하는데. 미친듯이 궁금한건 아니라서 추도 재촉 안하고 기다림. 한참 젓가락만 움직이던 섫.
어느순간 젓가락 내려놓더니 볼캡 한번 고쳐쓰고 추 쳐다봄. 이제는 말해도 되겠지. 그 언젠가가 지금인것 같아서.

"표정이 똑같아서"
"어?"
"네가 예전에 지엱이 얘기할 때 표정이랑 똑같아서"
"....."
"그래서 알았어"

이제는 정말 과거가 됐잖아.
그때의 나, 그때의 너.
그리고 지엱이. Image
#Flashback

"안녕 내 이름은 김지엱이야"

고작 초등학교 4학년, 11살.
추는 아직도 그 날이 생생했음.
늦여름이었고,
창밖엔 아직도 매미가 울었으며,
2학기가 처음 시작하던 날.
작은 체구지만 당찬 목소리로
자기소개를 하던 그 애,
대구에서 전학왔다던 그 애,
억양이 조금 특이한 애.
김지엱.
하필 추는 그 때 4학년 3반의 반장이었고, 선생님은 뽀를 추의 옆자리에 앉혔음. 그리고 조례가 끝나고 잠깐 추를 불러서 소졍이가 반장이니까 소개도 해주고, 밥도 같이 먹어주라고 얘기함. 추는 단번에 고개를 끄덕였음. 반장의 책임감도 있지만 추는 뽀와 친해지고 싶었음. 하얗고 작은 김지엱과.
추는 초등학교 때부터 이미 키가 커서 저와 달리 아담한 뽀가 신기했음. 말투도 달라서 재밌고, 눈치를 보는지 긴장해서 꼿꼿하게 앉아있는게 신경 쓰였음. 예전부터 워낙 친구들 중심에 있던 추지만 그날은 같이 공기놀이 하자는것도 마다하고 뽀 옆자리를 지키고 앉아있었음. 슬쩍 눈치도 보고.
뽀는 갑자기 사는지역이 바뀐거라 모든게 어색해서 굳어 있었음. 대구 친구들이 보고싶고. 여기서 잘 지낼 수 있을까 싶고. 연갈색 책상만 바라보고 있는데, 그때 옆에 있던 추가 말을 걸었음.

"나는 추소졍이야"

조금은 까만 얼굴, 어색해보여도 웃는 표정.
뽀는 아직 경계 중이라 고개만 끄덕임.
추는 뽀가 어색해하는게 보여서 민망하긴 하지만 워낙 성격이 활발한 편이라. 한번 친해지고 싶으면 직진하는 스타일이기도 했고. 고개만 끄덕이고 다시 책상으로 시선 돌리는 뽀한테 굴하지 않고 말을 걸었음.

"우리학교 급식 되게 맛있다?"
"..응"
"오늘은 수요일이라 스파게티 나와. 이거 봐"
추가 책상서랍에 감춰둔 급식표를 뽀랑 제 책상 반틈에 걸치게 놔줬음. 좋아하는 메뉴에 형광펜이 죽죽 그어진 급식표. 뽀는 대구에서는 개별 급식표 없이 알림판 처럼 반에 붙어 있어서 이런거 처음 봤음. 뽀가 조금 흥미있는 얼굴로 고개 기울이니까 괜히 뿌듯하고 신나서 얘기 시작하는 추.
뽀는 거의 듣기만 하는데 추가 자기는 뭘 좋아하고, 보통 맛있는거 나오는 요일이 언제인지 알려줌.

"내일은 별로 맛없네..코다리 강정이야"
"..이거 어디서 받을 수 있어?"
"어..한달에 한번 주는건데.."
"그렇구나"
"내가 선생님한테 달라고 할게!!"
"...진짜?"
"아 나 반장이잖아!"
추가 오버해서 큰소리 내니까 뽀가 더 놀래서 주변 쳐다봄. 근데 반 애들은 이미 추가 그러는거 익숙해서 반응도 안함. 그 상황이 조금 웃겨서 처음으로 입꼬리 올려서 웃는 뽀.

"너 목소리 되게 크다.."
"아 미안, 시끄러웠지"

추가 으으 하면서 또 몸까지 수그리는거 보니까 뽀 긴장이 확 풀렸음.
그날 말문을 튼걸 시작으로 추가 점심도 뽀 데리고 같이 먹어주고, 점심시간에 둘이 학교 투어도 하고 교무실가서 급식표도 하나 가져옴. 조용히 들뜬 얼굴로 급식표 보면서 걷는 뽀 보고 추는 혼자 뿌듯하게 웃음. 그리고 6교시 시작 전에 뽀가 집중해서 급식표에 형광펜 치는거 구경함.
"헐 왜 감자튀김에 안칠해??"
"..나 튀김 안좋아해"
"그럼 내가 먹어도 돼?"

옆에서 보는줄도 몰랐는데 불쑥 머리 들이밀더니 아무렇지 않게 자기 달라는 추가 너무 웃긴 뽀. 표정 구기다가 다시 급식표 보면서 중얼거림.

"그러든가.."
"아싸, 감자튀김 하나 더 적어놔야지"

..얘 진짜 웃긴 애다.
뽀가 워낙 낯을 가려서 친해지는데 오래 걸리긴 했지만, 추가 계속 챙기려고 한 덕분에 둘은 어느새 단짝이 됐음. 반장과 전학생 타이틀을 벗고 진짜 친구가 된거지. 4학년 2학기 내내 가까워지고, 5학년때 또 운좋게 같은 반이 돼서 둘이 잘 놀았음. 그때부터는 등하교도 같이 하게 됨.
1년 내내 또 붙어 다니면서 유치하게 싸우기도 하고, 처음 친해질 때 분위기는 다 사라지고 편해져서 갈구기도 하고. 정말 편한 친구 사이가 된 엓뽀.

"아 추소졍 선 넘지 말랬지"
"야 너도 3교시에 넘었거든?!"
"시끄러워 좀!"
"선생님 얘네 또 싸워요-!"

같은반에서도 유명한 앙숙 겸 단짝.
6학년때는 옆반이긴 했는데 점심시간마다 추가 뒷문 닳도록 찾아왔음.

"야 김지엱! 밥 먹자!"

그러면 뽀는 제발 조용히 좀 부르라고 질색했지만 추가 또 늦으면 먼저 앞문 빼꼼 열고 나타남.

"추소졍 밥 안먹냐?"

그럼 추가 넌 나 없으면 밥도 못먹냐고 으스대면서도 당장 하던거 접고 나왔음.
6학년도 그렇게 무난하게 지나가고. 집이 가까웠던 둘이라 중학교는 같은곳 지원해서 붙었음. 중학교에 갔지만 달라진건 그닥 없었음. 옷이 교복으로 바뀐거 빼면. 1학년 때는 또 운좋게 7반 중에 같은 반이 됐음. 투닥투닥. 시끌시끌. 여전히 둘은 서로에게 가장 가까운 친구였음.
애초에 서울로 전학 온 이유가 학업 때문이었던 뽀. 중학교 와서는 공부 열심히 함. 추는 사실 적당히 하고 싶었는데 뽀가 같이 학원 등록 하자고 해서 하고, 주말에 도서관 가자고 해서 따라감. 물론 가서 졸다가 뽀한테 손등 꼬집히는게 일상이긴 했음.
그리고 2학년. 처음으로 둘이 층이 나눠짐. 1~4반까지는 2층, 5~7반까지는 3층이었는데 뽀가 2반, 추가 6반이 됨.
층이 달라지니 전만큼 자주는 못보고,
같은 반에 친구들이 생겨서 점심도 따로 먹는데 일주일에 한번은 같이 먹음. 수요일. 맛있는거 나오던 그 날. 둘다 자연스럽게 그러기로 했음.
친구들이 왜 수요일마다 빠지냐고 서운해하면 둘 다 아무렇지 않게 말했음.

"오늘 추소졍이랑 먹어야돼"
"지엱이랑 먹기로 해서"

그만큼 둘이 친한건 둘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당연했음. 서로밖에 없다가 각자 친구들이 생겼을 때 의미모를 시기질투를 하기도 하고, 그걸로 투닥대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그 예민한 시기도 잘 이겨냈고, 사춘기도 비슷한 시기에 와서 중학교 2학년 때 부모님 속도 조금 썩였음. 같이 세상에 반항 하겠다며 가출했다가 뒤지게 혼나기도 하고, 호기심에 담배 입에 댔다가 추가 엄마한테 실수로 말하는 바람에 부모님끼리 연락해서 둘 다 털리기도 함.
그날 저녁에 놀이터에서 만나자마자 추 등짝 스매싱한 뽀.

"너 진짜 미쳤냐??"
"아! 그냥 말이 나온걸 어떡해"
"잘했다 아주?"
"미안하다니까아. 그래서 떡볶이 사주러 나왔잖아"
"튀김도 사"
"너 튀김 안먹잖아"
"네가 먹든가"
"하??"
"뭐!!"

그렇게 2학년은 마무리.
이제는 3학년. 둘이 같은반은 또 안됐지만 이번엔 그래도 같은 층을 쓰게 됐음. 고등학교가 비평준화라서 3학년 부터는 진짜 각잡고 공부하는 뽀. 그래도 친한 추랑 같이 가고 싶어서 옆에 데리고 다니고, 공부도 가르쳐주고 하는데 추는 공부에 큰 흥미가 없었음. 적당히는 하는데 열심히는 안해.
추도 생각이 없는건 아님. 뽀가 가고 싶어 하는 고등학교 작년 내신컷수를 추도 알아봤고, 딱 거기 맞춰서 준비를 함. 추가 지금 성적이면 충분하다 했지만 뽀는 불안했지. 작년이랑 다를 수도 있다, 평균 내신 점점 올라간다, 조금만 더 해놓자. 그렇게 재촉하는데 추는 괜찮다고 손사래를 쳤음.
근데 괜찮을리가 있나. 뽀가 맞았음.
둘 다 1순위로 그 고등학교를 썼지만
뽀는 붙었고, 추는 떨어졌지.
추는 한정거장 옆에 있는 다른 학교에
붙었음. 1순위 그 학교가 그 지역에서 유명해지고 있던 곳이라 뽀도 상위권으로 들어가지 못했음. 같이 결과 확인한 둘은 한동안 아무말도 못하겠지.
놀이터 벤치에 앉아서 멍하니 바닥만 보고있는 추를 보니까 뽀는 덜컥 화가 났음. 내신 컷을 보니 추가 조금만 더 했으면 문 닫고 들어올 수 있었거든. 내가 10페이지 더 하자고 했을때 더 했으면. 내가 주말에 도서관 가자고 했을때 갔으면. 추가 안일하게 내버렸던 순간들이 뽀를 버겁게 짓눌렀음.
별 생각이 다 들어. 나만 얘랑 같은 고등학교 가고 싶었나. 너도 그렇다고 했잖아. 같이 좋은 고등학교 가서, 대학도 같이 가자고 했잖아. 11살부터 5년을 옆에 붙어있던 추를 더이상 옆에 둘 수 없다는 불안감, 안일했던 추를 향한 서운함. 그런게 엉겨 붙어서 결국 벤치에서 벌떡 일어나는 뽀.
"괜찮을거라며"
"....."
"추소졍, 네가 충분할거라며"
"....."
"내가 조금만 더 하자고 했지!!"

뽀한테 추는 서울에 올라와 처음 사귄 친구였고, 누구보다 의지하는 사람이었음. 근데 고등학교 달라지면 더 못볼거고, 등하교도 같이 못하니까. 견고하던 친구관계가 흔들릴거라고 생각하니 괴로웠음.
추는 또 뽀가 내지른 말을 듣고 울컥해. 누구는 안힘든줄 아나. 떨어진거 내가 제일 속상한데. 위로가 먼저 나와야 하는거 아니야?. 서운함이 욱욱거리며 올라오는데 제가 안일했던게 맞아서 뽀가 울먹이는게 아프기도 했음. 복잡한 감정. 어지러운 생각. 그걸 견디기엔 추도 고작 열여섯이었음.
결국 못참고 같이 일어나서 뽀와 마주보는 추. 중학교 3년동안 뽀가 10cm가 컸는데 추도 그만큼 커서 여전히 추가 위, 뽀가 아래. 이것마저도 그때랑 똑같은데. 왜 이렇게 다른 눈으로 서로를 노려보게 됐는지. 뽀 마음 이해 못하는건 아닌데 추도 이 상황이 싫었음. 김지엱과 떨어진다는게.
"누가 이럴줄 알았냐?"
"내가 얘기했지. 분명히 컷 오를거라고"
"너는 지금 그걸 꼭 따져야 겠어? 나 위로할 생각은 없고?"
"너야말로 그냥 네 말 들을걸 그랬다 한마디 하면 안돼?"
"너는 결국 붙었잖아. 떨어진건 난데 왜 네가 유난이야?"
"뭐? 유난?"
"왜 그렇게 화가 난건데??"
"그거야..!"

욱해서 말하다가 멈추는 뽀. 잘 짓지도 않던 싸한 표정 보여주는 추를 보니까 할 말이 그대로 먹혀 들어갔음. 너랑 같은 고등학교 가고 싶었으니까. 그 말을 하면 진짜 울것 같아서. 말하려다가 삼키는 뽀를 보는 추도 마음이 엉망이었음. 사실 같이 가고 싶었다는 말이 듣고 싶었는데.
어렴풋 뽀가 왜 화났는지 이해는 했지만 그걸 뽀한테 직접 들으면 이 박탈감이 조금은 나아질것 같았음. 지금 말을 뾰족하게 뱉는게, 위로보다 비난을 하는게, 그 안에 함께 하고 싶다는 불안이 있는거라면 뭉특하게 느낄 수 있으니까. 제가 그러했듯이. 뽀에게 서운해하면서도 불안했듯이.
둘다 속마음이 같았고, 서로에게 듣고 싶은 말도 같았음. 하지만 너무 어렸던 둘은 누구 하나도 먼저라는 단어를 집어 들지 못했음. 고작 열여섯, 모든 감정이 어수선한 시기. 결국 서로 눈 시뻘개진채로 노려만 보다가 뽀가 먼저 등을 돌렸고, 추도 뽀 뒷모습만 쳐다보다가 집으로 돌아감.
그리고 집에 가서 움. 뽀는 엄마가 학교 어떻게 됐냐는 물음에 말해주다가 울고, 추는 엄마한테 2순위 붙었다고 말만 해주고 방에 들어가서 움. 자주 티격태격했지만 한번도 크게 싸워본적 없던 둘은 그렇게 열여섯의 끝, 열일곱의 시작에서 대판 싸워서 관계가 틀어졌음.
연락 한번도 안하다보니 금세 졸업식이고, 그래도 졸업식 때는 서로 얼굴이라도 보겠지 했는데 타이밍이 너무 안맞았음. 부모님들끼리 아는 사이라서 그걸 핑계삼아 만날 수도 있었지만 하필 그날 뽀네 부모님이 바빴고, 졸업식 끝나자마자 사진만 찍고 급히 출국하는 바람에 그것도 어려워졌음.
그렇게 서로 생각만 하고 먼발치서 존재만 확인한채 졸업식이 지나갔음. 중학교까지는 투닥거려도 다음날 등하교 하면서 풀었고, 점심 같이 먹어야 한다는 이유로 어영부영 화해를 했었음. 근데 고등학교가 달라지니 둘이 접점이 전혀 없게 됨. 누가 먼저 연락을 해야 했는데 둘 다 그러지를 못해서.
그렇게 고등학교 1학년. 몇달이 지나니까 이제 밉고 서운한 감정은 흐려졌는데 이렇게 우연조차 없는 경우가 처음이라 선뜻 연락을 할 수 없었음. 분명 365일 중에 320일을 서로 붙어 다녔는데 갑자기 통째로 사라져버린게 어색하기도 했지. 등하교길에, 점심시간에, 네가 없다는 사실이.
화해도 타이밍이라는게 있었고, 그 타이밍이 지나버리면 다시 이어질 확률은 갈수록 희박해지는 법이었음. 둘한테도 그 공식이 그대로 적용됐음. 하루가 지날 수록 서러운 감정이 사라지는 만큼 연락을 하는게 어려워졌고, 일상에서 서로가 떠올라도 멈춘 문자를 다시 시작하는게 두려워졌음.
생각이 안날 수는 없어. 서로의 의미가 너무 컸으니까. 가장 친한 친구를 잃었다는 상실감이 둘을 덮쳤고, 그 상실을 대하는 태도가 둘은 극명하게 달랐음. 뽀는 문득 추가 잘지내나 궁금하고, 잘 챙겨주던 추가 없는게 힘들어도 똑같이 지내려고 함. 오히려 일부러 더 공부에 매진하기도 해.
친구들이랑 놀다보면 추 생각이 나서 그 시간도 줄이고, 지역이 그대로라 도서관을 가면 추가 떠올라서 독서실로 바꿈. 매일 목표치를 정해놓고 살면서 잡생각이 들어올 틈을 주지 않았음. 반대로 추는 뽀가 없이 혼자 고등학교에 와서 조금씩 엇나가기 시작함. 반항일지. 불안일지.
중학교 때까지는 뽀가 도서관 데리고 다니며 잡아줬는데 그런 사람이 사라지니 공부도 더 재미없어지고, 모든것에 흥미가 사라짐. 학교를 다녀야 되는 이유도 잘 모르겠음. 친구들이랑 노는것도 재미 없고. 책상에 앉으면 짝꿍이던 김지엱이, 밥을 먹으면 튀김 얹어주던 김지엱이 생각나서 힘들었음.
상대방을 잃은 상실감을 뽀보다 훨씬 크게, 거칠게 느끼는 추. 뽀가 제 세상이었던 것도 아닌데 무슨 일상 자체가 바뀌어버림. 본래 성격이 순해서 누굴 괴롭히거나, 나쁜 쪽으로 빠지지는 않았지만 수업시간에는 자거나 딴짓하고. 수업 빼먹을 때도 있고. 친구들도 깊게 사귀지 않고 무료하게 지냄.
그렇게 살다보니 성적은 중학교 때보다 뚝 떨어짐. 부모님이 성적표 보자마자 기겁을 해서 학원 알아보러 다니는데 추는 등록 하고도 열심히 안함. 그냥 할 이유가 없어졌음. 중학교 때 한것도 뽀 때문에 했던건데. 걔랑 같은 고등학교 가려고. 그 생각이 드는 날이면 추 한참을 방에서 안나옴.
그렇게 같은 상실감을 다르게 겪은 1년.
뽀는 그 고등학교에서도 좋은 성적을 유지했고, 추는 하위권에서 머물렀음.
추의 행동이 1년을 반복되니 부모님도 어느 순간에는 포기하셨음. 딸이 걱정되긴 하는데 아예 들을 생각을 안하니까. 이유를 정확히 알아보려고 해도 추가 아예 말을 안하려고 했음.
'소졍아 너 요즘 지엱이는 잘 지낸대?'
'..잘 지내겠지'
'연락안해?'
'안해. 걔 얘기 물어보지마'

추의 날선 반응을 보고 대충 뽀랑 무슨 일이 있었구나 추측만 했음. 그래도 애들 사이에 부모가 관여하는거 아니라는 생각에 계속 참다가 엓뽀가 2학년이 된 봄. 부모님들끼리 만나는 자리가 생겼음.
중학교때까지는 왕래가 잦다가 각자 사회생활 하느라 못본지 1년 남짓. 뽀 어머니가 먼저 연락와서 같이 저녁을 먹게 됐음. 엓뽀가 서로를 의지했던만큼 가족끼리도 유대감이 있었거든. 근데 뽀 어머니도 먼저 연락한 이유가 있었을것 같지.
'아 소졍이 좀 오랜만에 오라고 그래. 엄마가 줄거 있어'
'..바쁠걸'
'응?'
'몰라. 바쁘겠지'

뽀가 얼마전에 추 얘기를 하는데 표정이 어두워져서.비슷한 마음을 품고 만나서 근황 얘기 하다가, 엓뽀 얘기도 자연스럽게 하게 됐음.

소졍이가 다시 사춘기 같다.
지엱이가 좀 쉬면서 했으면 좋겠다.
서로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둘이 어떤 시기에 무슨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음. 그리고 각자의 방식대로 그걸 엓뽀한테 전해줌.

'요즘 지엱이가 공부하느라 많이 힘들다고 하네?'

추는 멈칫하다가 방으로 들어갔고,

'소졍이가 고등학교에서 적응을 잘 못하나봐'

뽀는 샤프를 꼭 쥐었음.
그거 듣고 서로 걱정을 함. 걔는 몸도 약한 애가 왜 그렇게 무리를 해. 그 성격에 왜 적응을 못하고 그래. 그런 걱정이 들지만 1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탓에 연락할 생각은 못함. 대신 추는 그 얘기 들은 이후로 뽀 생각하는 날이 더 많아졌음. 5년을 붙어있던 김지엱. 단짝이었던 김지엱. 김지엱.
그냥 생각이 나던 전과 달리 이제 떠오르면 가슴이 묵직해지기도 했음. 누가 돌덩이를 얹은것마냥 막막하고. 답답하고. 그게 싫어서 생각을 안하려고 해도 또 창밖만 보면 김지엱. 김지엱. 그게 계속 지속되니까 추는 더 예민해졌고, 학교생활에 더 집중을 하지 못했음.
이유 모를 답답함에 잠식된채 지나간 봄.
슬슬 더위가 찾아오던 어느날 저녁.
추는 결국 복잡함을 참다 못해서
담배를 샀음. 후드를 눌러 쓰고. 몰래.
이게 안좋은걸 아는데 이렇게라도
안하면, 뭐라도 안하면 미치겠어서.
아파트 뒤쪽 샛길에서 중학교 이후로
처음으로 담배에 불을 붙이던 추. Image
한모금을 마시고.

중학교 때 김지엱이랑 놀이터 구석에 모여서
피워봤던 그 날이 떠올라.

한모금을 뱉고.

어른들은 이런걸 왜 하냐고 켁켁대던 김지엱의 목소리가 떠올라.

두번째 들이마시고.

오늘 한번으로 끝내자고 신신당부하던 김지엱 얼굴이 떠올라.

눈물을 뱉고.

김지엱이 생각 나.
왜 우는지도 모르겠는데 눈물이 났음. 목으로 넘어가는 담배 연기도 싫고, 이걸 왜 하는지도 모르겠고,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나 싶어. 나 진짜 뭐하는거지. 고작 두번 들이킨 담배를 어쩌지도 못하고 그대로 서서 우는 추. 고등학교 들어와서 처음으로 엉엉 울어봤음.
무너진 둑에서 물이 쏟아지듯이 감정이 터져나오는 추. 그 안에 가둬놨던 생각들이 같이 쏟아져 나와.

김지엱 말 들을걸.
도서관 가자고 할때 같이 갈걸.
공부 알려준다는거 귀찮아 하지말걸.
서운해서 소리 지르는 너한테 화내지 말걸.
돌아서 가는거 잡을걸.
연락 먼저 해볼걸.
그럴걸.
그래볼걸.
뽀가 없다는 이유로 제 생활이 무너졌다는걸 인정하기 싫어서 계속 외면해왔던 추. 근데 더이상 도망칠 구석이 없었음. 늘상 옆에 있던 뽀가 없으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손에 잡히질 않았음. 연락하고 싶었는데 이미 기분이 상했을까 그러지를 못했음. 이제 그 곁을 내어주지 않을까 두려워서.
어린 나이의 치기와 자존심이 물러난 자리에 있는 감정. 어느 순간부터 있었는지도 모를 마음. 그 이름을 정면으로 확인한 추가 한번 더 바닥으로 무너질 찰나였음.

"야 너 미쳤어?!"

갑자기 김지엱이 나타났고,

"한번으로 끝내기로 했지!"

담배꽁초를 빼앗아 바닥으로 던졌음. Image
뽀는 밤늦게까지 독서실에 있다가 오는 길이었음. 빨리 쉬고 싶은 마음에 정문이 아니라 빠른 샛길을 따라 걷고 있었음. 이 공간도 몇년전에 추가 발견하고 알려준 장소라 고개를 저으며 가고 있었는데.

"아 무슨 담배를.."

분명 금연구역인데 떡하니 담배피는 사람을 보고 눈을 찌푸렸던 뽀.
그냥 빨리 지나가자 싶어서 걸음 빨리 하려는데 가까워질수록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이야. 저 키나 분위기는 분명히. 후드 뒤집어 썼는데도 명확한 느낌에 설마 했는데, 가로등 빛에 얼핏 보이는 추 얼굴에 뽀 그대로 이성이 뚝 끊겼음. 이제 하다하다 담배까지 펴? 그 생각에 저절로 몸이 움직였음.
몸이 이끄는 대로 담배 빼앗아 던졌고, 그 불을 짓이기면서 고개 들었던 뽀. 눈앞에 추가 멍한 얼굴로 울고 있는거 보고 놀람. 친하게 지낼 때도 워낙 잘울던 추지만 이런 얼굴은 처음이었음. 다 무너진 얼굴인 추 덕분에 차오른 말이 싹 사라지는 뽀. 아무말 못하고 추 올려다 보고만 있음.
그리고 추는 믿기지 않아서 상황을 정리 중이었음. 근데 다 정리 되기도 전에 마음이 먼저 앞서버렸음. 왜 하필 지금 나타나. 왜 지금이야. 너는 왜. 또 다시 터지는 눈물 그대로 흘리면서 뽀 팔 붙잡은 추. 그대로 뽀 어깨에 얼굴 기대고 펑펑 울어버림.

'좋아해'

한마디를 울음 속에 감추면서. Image
열여덟에 깨달은 마음.
언제부터 시작된지도 모를 감정.
모르는 새 자라나고 있던 첫사랑을
쏟아내며 추는 목놓아서 울었음.
그리고 뽀는 갑자기 1년만에 마주쳐서
오열하는 추가 당황스러웠지만
익숙하게, 늘 해줬던 대로 등을 토닥였음.

"..야, 울지마"

그 어색한 위로도 여전히. 그대로.
그날 둘은 어색하게 그때 그 놀이터 벤치에 앉아서 많은 얘기를 했음. 1년동안 뭐했는지, 왜 연락 안했는지. 대부분 자존심이고 뭐고 다 눈물로 씻어낸 추가 얘기하면 뽀도 맞춰서 대답을 했음. 추도 마음을 인지했지만 같이 지낸 세월이 너무 길어서 같이 있는게 갑자기 어색하거나 그러진 않았음.
근황얘기 하다가 정적이 찾아오면 그런거 더 못견디는 뽀가 일부러 툭툭 장난을 걸었음.

"야 너 이모한테 다 들었어. 나 없으니까 학교생활 힘들지?"

그게 뽀만의 표현방식인걸 잘 아는 추. 같이 받아 치려다가 또 울렁이는 감정에 힘없이 웃으면서 말함.

"응, 힘들더라"

진짜 힘들었어. 너무. Image
뽀는 그거 듣고 당황해서 그렇게 받아치면 어떡하냐고 어깨 때리고, 추는 그게 너무 예전의 뽀 같아서 웃음. 그렇게 좀 더 이야기 나누다가 헤어지고, 그 날을 기점으로 둘은 다시 친하게 지낼것 같지. 1년의 텀이 무색하게도 워낙 서로를 잘 알아서 어색함은 금방 털어내고 잘 지냄.
추도 뽀랑 다시 잘지내니까 마음 고쳐먹고 학교생활 열심히 함. 한번 인지한 마음이 계속 커지긴 하는데 꾹꾹 참음.

"너 대학 어디 갈건데?"
"나는 우주대지"
"...갈 수 있을까"
"나?"
"나"
"너도 거기 쓰게?"
"..정시 밖에 안될것 같은데"

대신 목표를 세워.
같은 대학 붙으면 고백 하겠다고.
당장은 뽀도 입시 중이라 혼란주기 싫었고, 스스로도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해서 고백을 저 너머로 미뤄둔채 현실에 집중함. 뽀가 가고싶은 곳은 이름있는 대학이었고, 추 1년 내내 말아먹은 내신으로는 택도 없어서 정시 준비에 매진함.
학교가 달라서 평일 밤이나 주말에 보는데 거의 공부만 함. 그래도 좋았음. 뽀는 제가 힘들 때 이러다 죽겠다고 편의점 데려가주는 추가 있어서 든든했고, 추는 그냥 매순간이 설렘. 공부하다가 맞닿는 팔꿈치, 귓속말 한다고 가까이 다가오는 얼굴. 그런것 때문에 한번씩 철렁했지만 그래도 좋았음.
뽀는 추를 버팀목 삼아, 추는 뽀를 이유로 삼아 1년반동안 정말 열심히 했음. 대망의 입시시즌. 최저없는 수시로 뽀가 먼저 합격을 했고, 추 수능날에 와서 잘보라고 등짝도 때려줌. 추는 그 손길 하나에 누구보다 큰 안정을 느끼고 고개 끄덕이며 수능장 들어감.
19년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했음.
그리고 합격자 발표날. 추 옆에는 역시나 뽀가 있었음. 떨려서 못보겠다는 추 대신에 먼저 들어가서 확인한 뽀. 노트북 너머에서 덜덜 뜨는 추 보면서 입술 꽉 깨뭄.

"소졍아..."

그 표정에서 불합을 읽은 추.
애써 마음 진정하려고 괜찮다고 함.
최선을 다 했으니까 괜찮아.
근데 표정은 숨길 수 없어서 절망하는 추 바라보던 추. 갑자기 테이블 탁 치고 일어나더니 소리지름.

"축하해!!!!!"

동시에 노트북 돌려서 합격화면 보여주는 뽀. 추는 마음 와르르 무너져서 또 엉엉 울고, 뽀는 또 우냐면서 추 눈에 휴지 붙여주고 달램.
과는 달랐지만 결국 같은 대학을 가게 된 엓뽀. 추네 집에서 한바탕 울고 불고 하고나니 둘 다 힘빠져서 쇼파에 널브러져 있었음. 뽀는 밥 시켜 먹을까 하고 전단지 보고 있었고, 추는 천장 보면서 미뤄왔던 고백을 생각하고 있었음.

같은 대학 붙으면 고백하기로 했는데.
지금이 타이밍인가?
힐끔 보는데 뽀가 너무 진지하게 메뉴를 고르고 있음. 제 꼴을 내려다보는데 너무 편한 차림임. 장소도 우리 집이고. 고백 하기엔 지금이 안맞는것 같음. 추 성격도 그렇지만 뽀가 정말 처음이었으니까. 이 마음도, 고백도. 추는 그 처음을 누구보다 예쁘고 완벽하게 하고싶었음. 너무 소중해서.
꽃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날씨가 좋을 때가 좋지 않을까.
저녁이 좋을것 같아.

제가 생각하는 완벽한 순간에 뽀에게 감정을 전하고 싶었음. 예쁘고 순수한 사랑을, 예쁜 포장지에 담고 싶은 그런 마음.

"추소졍 피자 어때?"
"치킨"
"아 제발"
"나 합격했잖아"
"에이씨.."

결국 추는 고백을 미룸. ImageImage
안일했던것도 맞지. 고백 조금 미룬다고 달라질게 없다고 믿었음. 11살부터 19살까지 꼬박 제가 우선 순위던 김지연이니까. 그게 흔들린 적은 없으니까. 특히나 김지엱은 공부하느라 연애에 관심을 두지 않았었기에. 대학에 와서도 그건 변하지 않을거라 생각했음.

아니, 착각을 했음.
그 과정을 제대로 밟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대학 입학하고도 고백을 미루고, 또 미루던 추였음. 오늘은 날이 흐려서, 오늘은 김지엱 기분이 별로인것 같아서, 그래서, 이래서. 완벽함에 흠을 내는 이유들. 그렇게 몇달을 또 보내며, 뽀가 소개팅 자리 다 거절하는거 보면서 추는 안심을 했음.
여전히 뽀는 다른과임에도 불구하고 일주일에 몇번씩 저를 만났고, 술이 고프다고 하면 나와줬고, 뽀가 술 먹으면 부르는 사람은 저였음. 이미 1순위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어서 그 이상을 바라는게 흐려지기도 했음.

그러다 늦은 봄,
첫방학이 오기 일주일 전.
추의 안일함이 무너지기 시작하겠지.
추는 컴공과, 뽀는 경영과.
신입생으로 입학하고서 추는 동기들도, 선배들도 두루두루 친하게 지냈음. 고등학교때 잠깐 엇나갔다 뿐이지 태생이 밝은 편이라. 그 중에서도 제일 친해진 사람은 동기도 아니고, 한살 위 선배인 섫이었음. 아무래도 여자 비율이 적은 편이라 선택지가 별로 없기도 했음. Image
둘은 팀플에서 처음 만났고, 그때 그 팀원이 둘 빼고 다 극악스러워서 자연스럽게 가까워졌음. 추는 말은 없어도 대화가 잘 통하는 섫이 편했고, 섫은 바운더리가 좁은 와중에 추가 이런저런 과 얘기 들려주는게 재밌었음. 죽고 못사는 사이 그런건 절대 아니고. 과에서 제일 친한 언니동생.
추는 여전히 많은 시간을 뽀와 보냈지만 과에서는 대부분 섫과 있었음. 공강 잠깐 있는 틈까지 뽀를 만날 수는 없었으니까. 섫뽀도 서로의 존재를 알았음. 소졍이 친한 언니, 소졍이 제일 친한 친구. 추 프사에 보여서 얼굴은 알지만 실제로는 본적 없는 사이. 쉽게 말해 남남.
추가 일부러 둘을 소개 안해준건 아니고, 굳이 그럴 필요성을 못느꼈음. 추한테 둘은 아예 카테고리가 달랐으니까. 성격도 느낌도 감정도 다 달라서 추에게 둘은 약간 물과 기름 같았음. 모아놓으면 괜히 이질적인 느낌. 안섞일것 같은 조합. 추가 멋대로 내렸던 그 정의가 문제의 시작이었지.
평소와 다름 없던 날. 섫이 오랜만에 저녁이나 먹자고 해서 같이 먹고있던 추. 뽀한테 카톡이 와서 보니까 혹시 자기 이어폰 갖고 있냐는 말이었음. 얘가 뭔 소리인가 했는데 어제 너랑 술먹은 이후로 없어졌대. 추 미간 찌푸리다가 혹시나 하고 제 가방 뒤져보니까 못보던 이어폰이 딸려 나왔음.
그거 보자마자 한숨쉰 추. 사진 찍어 보내고 이거냐니까 맞대. 그럼 이따 집앞으로 간다니까 지금 당장 필요하다는 뽀. 다녀와야 하나 하고 어묵 집어먹는 섫 눈치 보는 추.

-너 어딘뎅
-나 이제 정문
-ㄱㄷ 지금 감
-너 술먹고 있다매. 내가 감. 주소ㄱㄱ

추는 잘됐다 싶어서 주소를 찍어남김.
잠깐 친구가 물건 가지러 온다니까 섫은 고개만 끄덕끄덕. 이 언니는 맨날 저 표정이라니까. 관심있는게 컴퓨터 말고 있긴 한가. 그런 시덥잖은 생각 하면서 술잔 몇번 부딪히니까 뽀가 시끄러운 소음을 뚫고 나타났음.

"왜이렇게 구석에 있어?"
"넌 꼭 이렇게 하나씩 빼먹더라"
"땡큐땡큐"
뽀가 웃으면서 이어폰 받아들고, 뒤늦게 섫 발견하더니 어색하게 목례함. 예전보다 나아졌지만 여전히 낯을 가리는 뽀라서. 섫 보자마자 굳어서 인사하는 뽀를 속으로만 귀여워하는 추. 섫은 젓가락 든채로 멍하게 뽀만 보고있음.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그게 섫뽀의 첫만남이었음. ImageImage
그날은 뽀가 버스 시간 때문에 급하게 나가서 인사만 하고 헤어졌음. 추 굳이 섫뽀한테 서로에 대한 이야기 안해서 아는게 얼굴이랑 나이밖에 없었음. 추는 뽀 봐서 기분 좋아지고, 섫은 가만히 술 마시다가 20분이나 지났을 때 말을 꺼냄.

"쟤가 걔야?"
"누구?"
"아까 온 애"
"김지엱?"
"..맞구나"
이걸 왜 물어보나 싶어서 왜? 그러니까 그냥 고개 젓고 마는 섫. 또 다른 주제로 얘기 꺼내길래 추도 대수롭지 않게 넘김. 그리고 그 날 이후로 추를 사이에 두고 섫뽀는 몇번 우연히 마주쳤고, 그때마다 섫은 물어보곤 했음.

'고등학교 친구?'
'무슨 과?'

정말 과하지 않게. 하나씩. 천천히.
그게 추가 느끼기엔 특별하지 않았음. 자주 마주치니까 궁금할 수도 있지. 얘기 안해서 모르는게 많으니까. 질문공세를 하는것도 아니고, 어쩌다 한번씩 물어보는거라 추는 딱히 신경안씀.

근데 추소졍이 간과한게 있었지.
김혅정은 타인에게 극도로
관심없는 사람이며,
이러는 경우가 처음이라는걸. Image
사람마다 관심을 표현하는 방법과 정도가 달랐는데 추는 제 기준으로 생각했고, 섫의 감정은 들여다보지 않았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첫사랑이라 그런걸 티낼 생각도 못했음. 그저 완벽한 날을 기다리며, 하루종일 뽀를 떠올리며. 앞만 보고 달린 추. 옆을 스쳐가는 섫을 발견하지 못했지.
섫은 처음 술집에서 뽀를 만난날 이미 관심이 생겼음. 그 전까지는 그냥 추의 친구 뿐이었는데, 그 날 멀리서 걸어오는 순간부터 눈이 떠나질 않았음. 오자마자 어깨를 툭 때리는 작은 손, 웃는 얼굴, 저를 보자마자 어색하게 내려가는 입꼬리. 그 장면이 조각조각 나서 마음 한복판에 박혀버렸음.
첫눈에 반한건가? 연애에 관심이 없던 섫이라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음. 주도적인 노력을 한건 아니지만 그 이후로 뽀를 만날 때마다 추한테 하나씩 물었음. 학과, 고등학교 시절 짧은 이야기, 성격. 추도 기억하는 질문들.

'애인은?'
'쟤 소개팅도 다 거절해'

추가 취해서 기억하지 못하는 질문까지. Image
섫이 느리게 감정을 채워갈 때까지도 추는 전혀 눈치 못챘음. 의도적으로 뽀 얘기를 남들 앞에서 꺼내지 않으니 추의 감정을 섫도 몰랐음. 추는 너무 안일했고, 지나치게 잘 숨겼음. 그렇게 섫뽀가 오다가다 마주치며 나누는 인사가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러워졌을 때,
섫엓 둘이 저녁 먹으러 가는 길에 집 가는 뽀와 마주치게 됨. 그러다 정문까지 같이 가게 됐고, 섫은 먼저 가라며 뽀를 보내주려고 했음. 뽀도 손만 흔들고 가려고 했지. 근데 먼산만 보던 섫이 몸을 앞으로 빼고 말함.

"저녁 같이 먹어요"

추는 섫을 봤고,
뽀는 추를 봤고,
섫은 계속 뽀만 봤음. Image
추는 처음엔 당황스러웠음. 먼저 이런 얘기 하는 언니가 아닌데. 뽀도 당황스러워 하는게 눈에 보였음. 태평한건 섫 혼자였지. 뽀는 난감함에 추를 봤고, 추는 생각을 했음. 둘이 같이 먹으면 어떠려나. 되게 안맞을것 같은데. 친해질 수 있으려나. 이미 추 머리속에 두사람은 안맞는 사람들이었음.
제 주변사람이 뽀한테 친해지자는 손을 뻗은게 처음이었고, 추는 섫을 아끼는 마음이 있었음. 그 내성적인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거면 생각 많이 한걸텐데. 거절 당하면 상처 받을것 같아. 그래. 둘이 뭐 될것도 아니고. 친구인데 신경 쓸 필요 없겠지.

"갈래?"

추의 안일함이 또 한번 틈을 내줬음.
뽀도 놀란거지 싫었던건 아니라서 추까지 그렇게 얘기하니까 고개 끄덕임. 섫은 그걸 보고서야 시선을 뗐고. 그 날 처음으로 셋이 같이 밥을 먹었음. 처음이 어렵지 그 다음은 쉽다고. 추가 무의식에 품고있던 경계가 섫한테는 해당되지 않았고, 덕분에 셋은 단톡방도 만들고 자주 만나서 놀게 됐음.
그때까지도 추는 몰랐음. 섫의 시선이 뽀한테 자주 머무는 것도, 섫이 알게 모르게 뽀를 챙기는 것도. 눈앞에 뽀가 있을 때는 그쪽에 집중하느라 시야가 좁아져버려서. 그 밖에서 어떤 감정이 둥둥 떠다니는지 보지 못했음. 그렇게 방학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어느날. 셋이서 술을 마시던 중이었음.
추가 기분 좋다고 술을 평소보다 많이 마셨음. 마음도 풀어지고, 항상 조이고 살던 나사가 조금 풀어졌을 때. 중간에 뽀가 친구 잠깐 얼굴 본다고 자리 비운 사이. 섫은 덤덤하게 얘기를 먼저 꺼냈음.

"지엱이는 항상 밝네"

평소 같으면 장난으로 넘겨야 했음.
너무 밝지 너무- 하고 말해야 했음.
술을 마셔서 그런가. 섫이 편해져서 인가. 뽀가 눈앞에 없어서 그런가. 2년동안 잠궈놨던 수도가 조금 헐거워졌고, 그 사이에서 물이 뚝 흘렀음.

"..응, 지엱이 밝지"

많은 말을 한게 아닌데. 고작 한마디였는데. 첫사랑을 한방울 담아낸 추 표정을 보자마자 섫은 알았음.

너 지엱이 좋아하는구나. ImageImage
같은 사람에게 같은 마음을 품고있는 섫에게는 너무 잘보였음. 추가 갖고있는 사랑이. 그 형태가. 그 전까지는 추가 뽀한테 들킬까봐 전혀 티를 안내서 전혀 몰랐음. 그날 섫은 한참을 안주만 뒤적거리더니 결국 자리 마무리 되기 전에 혼자 집으로 왔음. 오자마자 가방을 내려놓고, 한숨을 뿌리고.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라 섫도 당황했음. 추가 그런줄 알았으면 애초에 마음을 키우지 않고 잘랐을텐데. 추가 안일함에 벌려놓은 틈으로 섫의 감정도 이미 크게 자라있었음. 포기하기엔 쌓인 시간과 감정이 너무 많았음. 접어야 하나? 그 생각이 스쳤지만 섫은 금방 고개를 저음.

아니.
포기 안할래. Image
적어도 둘은 사귀는 사이는 아니었고, 뽀의 마음은 아직 몰랐음. 추가 알려주지 않았던 감정으로 포기하고 싶지 않았음. 알았다면 시작하지 않았겠지만, 모르게 만든건 추였으니까.

선택권은 지엱이가 쥐는게 맞아.
너는 앞선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으니까.
뒤따른 나한테도 기회는 있는거잖아.
추는 사랑 앞에서 생각이 많았고, 섫은 생각이 덜어졌음. 그 간극이 주는 거리는 점점 벌어질것 같지. 섫은 추 마음 알았지만 그 후로도 일절 티 안냄. 뽀가 추랑 함께하는 시간을 뺏으려고 하지도 않음. 둘한테는 세월이 있었고, 섫도 그걸 알아서 추가 챙기지 못하는 부분들만 주워다 뽀를 챙겼음.
여전히 뽀의 중심에는 추가 있었지만 섫은 그 테두리를 채워갔음. 추가 놓치는 틈을 메꾸고, 빈자리를 만들지 않고. 그렇게 천천히 뽀의 일상에 스며 들어감. 그게 너무 사소하고 자연스러워서 뽀조차도 크게 느끼질 못했음.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추에게도 보일리가 없었고.
그렇게 방학을 하고도 셋은 가끔 만났고, 추는 뽀를 자주 만났음. 바뀐게 없다고 생각했음. 뽀는 제 옆에 있었고, 셋이 있는 자리에서 저를 더 의지했고, 모든 연락을 저한테 먼저 했으니까. 가끔 뽀가 어제 혅정언니 만났다고 해도 크게 신경안썼음. 저랑은 어제도, 오늘도 만났다는 이유 하나로.
그렇게 방학이 또 다 지나갈 무렵. 밤 11시가 다 돼서 갑자기 섫한테 연락이 왔음. 잠깐 산책하자고. 딱히 할일이 없어서 나갔고, 둘은 한강공원을 걸었음. 술을 좀 마시고 왔는지 빨개진 섫 얼굴이 신경쓰이는 추. 무슨일 있냐고 물어보는데 대답도 안해. 그렇게 10분, 20분.
한참 걷다가 큰 다리 밑에서 멈추는 섫.
옷매무새를 만지다가 추를 바라보고, 무덤덤한 목소리로 얘기함.

"나 지엱이 좋아해"

그 말 듣자마자 심장이 떨어지는 추. 놀라서 굳어버리는데 섫은 곧바로 말을 이었음.

"많이 좋아해"
"....."
"너한테는 말해야 할것 같아서"

그래야 공평해지니까.
섫은 그랬어. 저는 마음을 알고 있었지만 추는 전혀 모르는것 같아서. 계속 모르게 두고 있다가 뒤통수 치듯 뽀를 만나고 싶지 않았음. 추도 알아야 했음.

너도 이제 알았지.
그니까 최선을 다해.
나도 최선을 다하고 있어.

섫은 뽀를 좋아했지만 아끼는 동생인 추의 마음을 짓밟고 싶지는 않았음.
지엱이가 끝에 널 선택해도 이해해.
근데 나는 그러지 않도록 노력할거야.

섫은 그런 말을 눈에 담아 전하고,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발걸음을 뗐음. 추는 상황이 당황스럽기만 해서 걸으면서도 속이 말이 아니었음. 갑자기? 언니가 언제부터? 지엱이를? 섫도 복잡할거 알아서 말 안걸고 내버려둠.
생각보다 더 충격받은거 보니 전혀 몰랐구나 싶은 섫. 근데 어쩔 수 없다고 생각을 해. 저는 숨긴적이 없었거든. 모든 부분에서 뽀가 우선이었고, 조금만 의심해서 들여다보면 행동 하나하나에 감정이 묻어 있었음.

지엱이는 모를 수 있는데, 너는 모를 수 없어. 그건 네가 안본거야. 못본게 아니라.
섫은 지금 셋의 상황을 누구보다 가장 잘 파악하고 있었음. 이기적으로 굴면 끝까지 그렇게 할 수 있었지만 섫은 그러지 않았음. 추에게도 긴장을 줬고, 뽀가 추를 얘기하며 웃을 때도 그러려니 하고 넘겼음. 결국 중간에 추한테 먼저 간다고 가버리는 섫.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해보였음.
추는 섫 가자마자 근처 벤치에 주저 앉았음. 처음엔 섫 마음이 갑작스러웠는데 하나씩 되짚다보니 그게 아니라는걸 알았음.

첫만남에 찍었던 물음표.
주기적으로 묻던 질문.
같이 저녁 먹자던 그 날.
뽀를 바라보던 섫의 시선.
은근히 뽀를 챙기던 섫.

모든 것이 말해주고 있었음.
섫의 사랑을.
제가 안일하게 생각했다는걸 깨닫고 나니 엄청난 후폭풍이 찾아왔음. 당장 엊그제 뽀가 언니랑 영화 봤다는 말부터 한달전 작은 대화까지. 그게 전부 파나로마처럼 지나가는 추. 몇년을 짝사랑한 사람인데. 그 사람 옆에 자라나는 또 다른 사랑을 모르고. 끓는 자괴감에 속이 울렁거리며 무너지는 추.
한번도 생각해본적 없었음. 제 사랑을 전할 타이밍만 찾느라 뽀가 다른사람에게 갈 수 있다는걸 잊고 있었음. 뽀 옆에 서있는 섫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는 추. 근데 상대가 섫이라 마음껏 싫어하지도 못해. 그저 자책.
왜 몰랐을까.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아, 진작 얘기할걸.
지엱이 좋아한다고.
섫이 뽀를 좋아할거라는 경우의 수를 전혀 두지 않았던 스스로가 원망스러운 추. 섫을 탓할 수도 없지. 제 마음을 얼마나 감추고 있었는지 아니까. 사실 당연한걸지도 몰라. 옆에 있으면서 저도 사랑하게 된 사람인데. 다른사람 눈에도 그럴 수 있는건데. 그 당연한 사실을 놓쳐버렸음.
결국 길가의 벤치에서 서럽게 울어버리는 추. 갈곳없는 원망으로 제 마음만 난도질해가며 울었음. 그 후로 하루이틀은 산송장처럼 보내는데 와중에 뽀는 꾸준히 연락이 왔고, 또 제가 이러고 있는 사이에 둘이 계속 만날거라 생각하니 억지로라도 몸이 일으켜졌음. 뭐라도 해야했음. 정말 뭐라도.
2년째 고백 앞에서 멈춰있던 발걸음을 움직여야 했음. 더이상은 미룰 수가 없었음. 근데 추는 그 와중에도 바로 움직이지는 못할것 같지. 갑자기 불안함에 달려가서 얘기하면 뽀가 놀랄까 봐.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 고백했다가 부정적인 결과가 나올까봐. 조급한 마음에도 추는 어떤 순간을 기다렸음.
하지만 또 안일했지. 사랑은 기다린다고 잡을 수 있는게 아니었는데. 무의미하게 2주가 흘렀음. 그러다 추가 제대로 마음 먹은 날. 뽀가 좋아하는 순간인 노을이 질 때. 아침부터 뽀가 좋아하는 꽃을 사고, 작은 쪽지를 쓰고, 2년동안 몇백번 생각했던 멘트를 되새기며 뽀의 집앞으로 찾아간 추.
떨리는 마음 다잡으며 뽀한테 전화를 걸어.
방해금지모드가 필수인 김지엱의 삶에서 유일하게 아니었던 추소졍. 역시나 두번이 가기전에 전화를 받아. 평소랑 똑같이.

'여보세요?'
'김지엱 어디야?'

근데 이상해.
분명 30분 전에 집이라고 했는데.
그래서 온건데.
왜 이렇게 전화기 너머가 시끄럽지.
아니겠지. 설마. 그 언니 집이 여기서 얼마나 먼데. 꽃다발 고쳐 잡으며 애써 마음 다스리는 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서 편지지 끝이 작게 구겨졌음.

'..밖이야?'
'아 나 혅정언니가 심심하면 술먹자길래 방금 나왔어!'

왜?
왜 하필 오늘?
오늘이 완벽한 날이었는데.
왜. 왜. 왜.
뽀 입에서 그 언니 이름이 나오자마자 울음이 차올랐음. 눈물이 타고 흐르는데 소리는 못내고 입술만 깨무는 추. 그 와중에 해맑은 뽀의 목소리가 들려.

'야! 너도 와라'
'.....'
'얼굴 좀 보자!'

아무렇지 않은 뽀의 말에 추는 울음을 삼켰고, 앞에 앉은 섫은 들고있던 편지를 다시 가방에 넣었음. Image
섫도 오늘 고백을 하려고 했음. 추와 다른점은 오늘을 기다린게 아니라, 아침에 눈을 떠보니 문득 지엱이가 더 많이 좋아져서. 그리고 소졍이한테도 이 정도면 충분히 시간 준것 같아서. 느즈막히 일어나 짧막한 편지를 썼고, 상황이 안맞으면 다음에 해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뽀를 불렀음.
근데 오늘 보니 그렇네. 저랑 있다가 전화 받고서 아무렇지 않게 추를 부르는거 보면. 아직은 조금 급했나 봐. 그 사실이 무겁지는 않았고, 오히려 섫은 다행이라고 생각했음. 오늘 고백했으면 차였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 생각하면 추한테 고맙기까지 해. 고백은 언제든지 할 수 있는거니까.
"소졍이 온대?"
"아니 피곤하대. 누구는 뭐 안피곤한가? 얘도 가만보면 참,"
"지엱아"
"응?"
"점심 먹었어?"
"갑자기?"
"응"
"당연히 먹었지. 지금 저녁 먹으러 와놓고 뭘 점심을 물어 봐?"

그래도 오늘은 좀만 더 욕심낼게.
네 얘기하자.내 얘기하자.
우리 얘기하자, 오늘은.
고백은 안할게. Image
그렇게 둘의 고백이 한번에 무산된 날.
섫은 그걸 쉼표로 받아들였고,
추는 그걸 끝이라고 받아들였음.
그럴 수 밖에 없었지.
추는 잃을게 너무 많았고,
섫은 전혀 없었으니까.
섫이 덤덤하게 뽀의 이야기를 듣는동안
추는 혼자 아파트 단지에서 꽃다발을 들고 울었음.
섫의 편지는 가방 안에 있었고, 추의 편지는 울다가 지친 추의 손끝에서 바닥으로 떨어졌음. 작은 편지지가 바닥에 덩그러니.

지엱아 갑작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시작되는 편지가 비참하게.

정말 많이 좋아해. 오래 좋아했어.

제 첫사랑이 초라하게. 그렇게. Image
그 날을 기점으로 셋의 관계는 더더욱 달라지기 시작했음. 한번 고백이 무산된 후로 추는 한동안 갈피를 잡지 못했고, 섫은 계속 그래왔듯 뽀의 자투리 시간들을 점령해감. 섫과 추는 서로의 감정을 알면서 또 아무렇지 않게 지냄. 방학이 지나고, 2학기가 시작되고. 그때도 뽀의 1순위는 추였음.
추도 그걸 옆에서 계속 느끼니까 무너졌던 마음을 서서히 일으키겠지. 섫은 뽀의 1순위가 흐려지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고. 추는 가을이 지나갈 무렵에 다시 한번 다짐을 해. 고백을 해보자고. 그때 바닥에 떨어진 편지 대신 새로운 편지를 쓰고, 미리 뽀와 약속을 잡아. 아무도 방해할 수 없게.
토요일에 잡은 약속. 3일이 붕 떴지만 추가 그렇게 잡을 수 있었던건 섫이 연수 중이었으니까. 그게 일요일에 끝나는걸 알아서 일부러 토요일에 잡았음. 뽀는 흔쾌하게 수락했고, 토요일을 고대하고 있던 금요일. 약속의 전날. 아침부터 뽀가 연락이 안됐음.
전날 밤까지 토요일에 뭐 먹을까 대화하다가 연락이 끊겼는데 하루종일 알바 대타 뛰느라 정신이 없던 추. 톡만 몇개 남겨놓고 끝나면 전화해봐야겠다 하고 일함. 근데 중간에 진동이 울려. 카운터 보고 있느라 못받는 추. 하필 주문이 밀려서 20분이 지나서 구석가서 확인하는데,

김지엱이였어.
전화가 세통이나 왔는데 못받았어. 머리가 새하얘지는 추. 심장이 벌렁거려서 바로 다시 전화거는데 일단 끊어지는 컬러링. 그리고 이어지는 말.

'..어, 소졍아'

목소리에 힘이 없어. 애가 거의 아파서 죽어가는 목소리야. 손바닥에 땀이 차고 입술이 말라가는 추.
떨리는 목소리로 알바 중이었다고, 무슨 일이냐고 하는데 아프대. 몸살감기래. 다 쉰 목소리로 말하다가 끝에는 울먹이기까지 해. 추 그거 듣자마자 바로 간다고 끊음. 친구 대타긴 하지만 그럴 정신이 없었음. 사장님한테 전화해서 사정 설명하고, 당황스러워하는 목소리 뒤로 하고 달리는 추.
부모님은 출장 중이었고, 섫은 근처여도 연수 중이라 나올 수가 없었음. 나 하나 밖에 없었는데. 진짜 나 밖에 없었을텐데. 무슨 알바를 하겠다고 전화를 못받았을까 후회하는 추. 하필 집에서 좀 먼 카페라 당장 택시 잡아타고 가는데 아픈 김지엱만 떠올리면 눈물부터 남.
신호 하나 걸릴 때마다 심장이 무너지고, 마지막 사거리 신호 걸리자마자 내릴 준비하는 추. 계산도 돈 얹어서 미리하고, 좌회전 신호 뜨기를 기다림. 무릎만 달달 떨면서 뽀네 집만 쳐다보고 있는데 좌회전 보다 한번 앞에 켜지는 왼쪽 보행신호.
초록불.
그 찰나.
신호가 바뀌자마자 미친듯이 달리는 사람.
멀리서 봐도 안색이 새하얘져서
이를 악 물고 뛰어가는 사람.
땀에 젖은 얼굴로 간절하게 뛰는 사람.
익숙한 얼굴. 여기 있을 수 없는 존재.

김혅정.
약봉지를 손에 쥔
김혅정이 달려가고 있었음.
김지엱을 향해서. Image
헛것을 본것처럼 멍해지는 추. 보행신호가 꺼지면서 좌회전 신호가 나고, 벙쪄있다가 기사님이 내리라는 소리에 힘없이 보도를 밟는 추. 이미 골목 어귀에서 섫은 보이지 않았고, 때마침 핸드폰이 계속 울려서 보니까 과 단톡방이야. 떨리는 손으로 눌러보니까 난리가 난 톡방. 이유는 김혅정.
-혅정선배 진짜 미친거 아니야?
-무슨일이야 이게ㅠㅠ
-왜왜 갑자기?

그 세문장을 보고 더이상 손을 움직이지 못하는 추. 세번이나 울렸던 전화. 섫에게는 울리지 않았을 수도 있던 전화. 힘없이 툭 떨어지는 추 손가락에 밀려 톡이 내려가고, 그 내용을 보자마자 자리에 주저앉는 추.
-연수 중에 무단이탈했대
-미친? 그 교수님 성깔 미쳤자나
-야 좀 말리지;
-ㅠㅠ전화 잠깐 받는다고 나가더니 그냥 사라진걸 어쩌라고
-무슨일 난거 아니야??

어쩌면 그랬을지도.
추소졍은 잃고 싶지 않은게 많았고,
김혅정은 잃을 수 있는게 많았는지도.
사랑의 간절함은 세월에 비례하지 않았다. ImageImageImage
추는 그날 결국 뽀의 집으로 가지 못하고 발을 돌렸음. 그냥 하염없이 주변을 서성이고, 또 서성이고. 시끄러운 단톡방은 무시해가며. 섫이 뛰어왔을 거리를 가늠하며, 깨닫고, 후회했음. 전화를 받았더라면. 10분이라도 일찍 봤다면. 사장님한테 전화만 안했더라면. 그랬다면 달라졌을지 모를 오늘.
그리고 한참 그 주변을 빙빙 돌던 때. 섫이 달려가고 30분쯤. 짧은 진동이 울려서 확인해보니까 김지엱이야.

-소졍아 바쁘면 안와두 대ㅠㅠ
-혅정언니 와써

그거 보자마자 눈앞이 흐려져.
참으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돼.
미안하고 아쉽고 원망스럽고.
결국 길거리 한복판에 주저 앉아버리는 추.
지금까지 늘 뽀가 아플때 챙겨주는건 저였음. 그게 당연했고, 당연할줄 알았음. 하지만 수년간 이어진 독점은 추를 알게 모르게 안일하게 만들었고, 진심으로 달리는 섫에게 결국 제가 갖고있던 일부를 내어줘버렸음. 그날 길거리에 앉아서 찬바닥에 후회를 쏟아낸 추.어떤 각성을 하게 될것 같지.
섫이 그저 마음을 알려준것과, 눈앞에서 어떤 권리를 뺏긴건 차원이 달랐음. 제가 아직까지도 안일했다는걸 깨달은 추. 그때부터는 필사적으로 뽀를 지키려고 함. 마음이 급해져서 뽀와 지내는 시간을 더 늘리고, 여유가 없으니 가끔은 섫을 향해서 의미없이 작은 날을 세우기도 했음.
근데 그러면 안된다는걸 알아. 섫이 잘못한게 아니라는걸 알아. 그래서 말을 퉁명스럽게 해놓고 곧바로 무너진 얼굴을 하는것도 추였음. 제 마음을 누구에게도 제대로 얘기하지 못하면서 질투와 불안에 찌질하게 구는 제가 싫었음. 섫은 그게 눈에 보여서 그럴 때마다 그냥 모른척함.
섫도 마음이 아주 가벼웠던건 아니거든. 포기할 생각도 없었지만 추가 점점 조급해하는게 눈에 보이니까 마음이 편하지가 않았음. 그리고 한편으로는 답답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해. 그렇게 나한테 날을 세울거면 제대로 앞에 서서 지켜야지. 지엱이 뒤에서 지키려고 할게 아니라.
그래도 추도 너무 잘지내왔고, 본성이 어떤 사람인지 아니까 섫은 그냥 가만히 있음. 한강에서 말한 이후로 따로 그 얘기를 추와 나누지도 않았음. 그저 해왔던대로 뽀를 챙겼고, 남은시간에 자리했고, 하염없이 기다렸음. 그럼에도 좋았음. 저한테 웃어주는 뽀만 보면 생각이 다 비워져 버릴만큼. Image
섫도 정말 뽀가 간절했거든.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음. 연애도 항상 무미건조하게 했고, 그게 성향인줄 알았던 섫. 타인을 위해 일부를 내어주는걸 이해할 수 없었음.

근데 뽀는 달랐지.
아프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이성을, 현실을, 미래를 내어줬음.
그 순간에 잠깐의 고민도 들지 않았음.
그날 뽀네 집 앞에서 피맛 나는 숨을 토해내면서. 섫은 생각보다 제가 더 뽀를 좋아하고 있구나 깨달았음. 뒤늦게 연수라는 현실이 몰려오긴 했지만어색하게 고맙다며 웃어주는 뽀를 보니까 정말 다 괜찮은것 같았음. 손등에 닿는 네 손가락의 온도가 조금은 내려가서 다행이란 생각만 들었음.
그날 섫도 어떤 각성을 했지만 행동의 큰 변화가 있지는 않았지. 조금은 작정한듯 구는 추 때문에 그런것도 있었지만. 그도 그럴게 눈에 띄게 그날 이후로 엓뽀 둘이 만나는 횟수가 늘어났음. 뽀는 또 추랑 자주 볼때는 7일 중에 5일 볼 때도 있어서 별 생각없이 잘 놀았고.
근데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가고, 셋이 오랜만에 점심을 먹기로 한날. 각자 파스타 시켜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의자에 늘어져있던 섫이 전화 한통 받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음. 옆에 앉아있던 추는 그 화면에서 그때 그 연수 담당 교수 이름을 봤고, 다시 마주앉은 뽀를 한번 쳐다봤음.
"나 교수님 호출"
"에? 밥 안먹구?"
"최대한 빨리 올게. 혹시 늦으면 기다리지 말고 먼저 먹어"

그 말만 마치고 섫은 힙색 메고 밖으로 나갔음. 나가자마자 머리 쓸어올리면서 건물로 걸어 가는데 뒷모습 보는 추는 또 생각이 많아짐.

저 언니 걷잖아.
그 교수한테 호출 당해놓고도.
걷잖아. 천천히.
그러고보니 뛰는걸 본적이 별로 없음. 뭘해도 느긋한 성격이고 땀나는걸 극도로 꺼려해서. 당장 학점이 망할 수 있는 상황에도 저렇게 걷는 섫 위로 이악물고 뛰어가던 모습이 겹쳐지고, 추는 바로 눈을 돌려버렸음.

대체 언니한테 지엱이는 뭐야?
나한테 지엱이는 뭐지.
우리한테 지엱이는 뭘까.
테이블에 머무르던 눈을 다시 들어올린 추. 생각해봤자 뭐하나 싶어서 다른 주제로 말 꺼내려다가 멈춰버림. 저 멀리 사라지는 섫을 바라보고 있는 뽀 때문에. 제 앞에서 이제는 손가락보다 작아진 김혅정을 보는 김지엱 때문에.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떨어졌음. 박탈. 질투. 그 이름들이 우수수. Image
아무렇지 않다고 넘기기엔 추가 뽀에 대해 아는게 너무 많았음. 그 시선 끝에 울렁이는 걱정. 애정. 분명 지금까지 저에게만 보여주던 그 감정이 희미하지만 섫을 보는 뽀의 얼굴에 묻어 있었음. 숨이 꽉 막혀서 찬물만 들이키는 추. 사레 들려서 기침하니까 그제야 뽀 시선이 돌아와.
아닌데. 항상 그 시선은 여기 있었는데. 내가 답답해 할때마다 너는 혀를 차면서도 서툰 애정이 담긴 찬물을 건네 줬는데. 기침하는걸 보고 놀라서 등을 두드려주는 뽀에게 여전히 저를 향한 애정이 읽혀서 더 서러워지는 추. 손 들어서 간신히 말리고 툭 터질것 같은 울음만 다스리겠지.
뽀는 몇번이고 괜찮냐고 물어보고, 추는 괜찮다고 말하면서 전혀 괜찮지 않은 마음을 추스림. 그래. 둘이 친해진지도 꽤 됐으니까. 언니가 잘해주기도 하고. 당연한 걸수도 있지. 그렇게 다잡는 동안 식사가 나오고, 때마침 섫이 단톡에 톡을 보냄.
-너ㄴ머거나못갈듯

그렇게 급하면 톡을 하지 말지.
쓸데없이 언니는 왜 이렇게 착해.
차라리 나빴으면 좋았을텐데.
추는 뽀를 잃는게 두렵기도 했지만
그만큼 힘든 이유는 섫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서였음. 제 마음만 아니었다면 둘이 잘되길 누구보다 응원했을것 같아서. 그래서.
입술만 씹다가 뽀가 핸드폰 안보길래 슬쩍 보여주는 추. 뽀는 그거 확인하고 좀 삐죽하더니 먼저 포크 들면서 말함.

"언니 무슨일 있나"
"..교수가 가만두겠냐"
"교수 누군데?"
"내가 말했던 우리과 또라이"
"아 그 미친개?"
"괜찮으려나 모르겠다"
"언니 뭐 잘못했어?"

..설마 얘 모르나?
과 안에서 난리가 났던 일이었음. 알음알음 다른과까지 퍼지기도 했고, 섫이 당연히 어느정도는 설명 한줄 알았음. 근데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뽀 얼굴 보니까 맥이 탁 풀어지는 추. 말해줄 수 있었음. 섫이 딱히 입단속한게 아니니까, 그냥 너스레를 떨며 얘기할 수 있었음. 뽀가 그냥 친구였다면.
"잘못은 무슨"
"그치?"
"원래 아무나 잡아서 잘 갈궈"

근데 안되겠어.
내가 너 좋아해서 말 못하겠어.
너 그거 알면 신경쓰여 할거잖아.
미안해서, 고마워서.
어떤 이유든 그 언니 볼거잖아.
그러니까 말 안할래.
다른 얘기하자.
나 봐줘. 네 얘기해줘.
우리 얘기해자. Image
사랑은 사람을 이기적으로 만들었고, 비겁함을 삼키게 했음. 추는 뽀 눈에서 걱정을 지우기 위해 영화나 보자고 말을 돌렸고, 뽀는 얘기를 하면서도 옆에서 식어가는 섫의 파스타를 확인했음. 추는 또 모른척 그때마다 다시 시선을 잡아 끌었고. 그럴수록 일부러 다음에, 그때 하며 미래를 약속했음.
추가 계산을 하려고 카운터에 있는동안, 테이블에 남아서 식은 파스타와 식전빵을 보던 뽀는 지나가는 직원을 불러세웠음.

"저기 혹시 빵은 포장해주실 수 있나요?"

그리고 계산하고 오는 길에 그걸 발견한 추. 단번에 알았음. 섫한테 주려고 포장 한다는걸. 섫이 이 가게 빵을 좋아라 했으니까.
뽀가 한번씩 저한테도 해주던 일이었음. 음식을 포장해주거나, 사다주던거. 근데 정말 9년간 저한테만 해주던 행동이었음. 다른 친구들한테 그런걸 한번도 본적 없었음. 빵 포장된걸 받아들고 사진 찍는 뽀를 뒤에서 바라보는 추. 얼마안가 단톡이 울려.

-(사진)
-언니 빵 챙김ㅋㅋ

마음이 울려. Image
추는 그런 생각을 해. 사진 찍기 전에 내가 가서 그거 좋아한다고, 달라고 했으면? 그럼 너는 나한테 그걸 줬을까? 언니꺼라고 거절을 했을까? 분명 몇달전, 아니 몇주전만 해도 제게 줬을거란 확신이 있었는데 지금은 답이 안나왔음. 이젠 모르겠음.

너는 나한테 줄거니. 그게 뭐든.
생각해보니 고백 타이밍만 고민했지 대답이 불안했던적이 없었음. 뽀에게서 어떤 표현을 받지 못했음에도. 아무 증거도 없었지만 받아주지 않을거라는 경우의 수를 깊게 생각해본적 없었음. 근데 지금은 생각이 들어. 불안이 차.

내가 너 좋아하니까 널 달라고 하면,
네가 언니꺼라고 대답할까 봐.
한번도 그런 네가 그려진적 없었는데.
네 옆을 떠올리면 나만 떠올랐는데.
이제 그게 아니라는게.

분명 일주일동안 5일을 만났고, 하루도 빠짐없이 톡을 주고 받으면서도 하나의 장면으로 추는 또 한번 무너졌음. 아니라고 믿고 싶었지만 그 신호등을 기점으로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음.
아무리 크고 단단한 벽도 작은 균열이 나면 돌이킬 수가 없었음. 테두리부터 조금씩, 천천히. 섫은 맨몸으로 추가 뽀 주위에 9년동안 쌓아올린 벽을 향해 달려들었고, 상처와 먼지투성이가 됐지만 기어코 그 벽에 틈을 만들어냈음. 추는 벽 너머에서 그걸 보면서도 자만했던거지.

절대 안깨질거라고.
그러나 그 벽은 추의 안일한 믿음과 함께 깨졌고, 추는 섫에 비해 멀쩡한 몸으로도 그 벽이 깨졌다는 현실에 놀라서 멈춰버렸음. 그런 저를 지나쳐 이곳저곳 다친 섫이 지나갈 때까지. 앞서 갈 때까지. 무슨 생각으로 식당을 나왔는지도 모르겠는 추. 뽀가 말하는 것도 못듣고 어어 대답만 간신히 해.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리는데 옆에 뽀가 있으니까 안받아. 근데 그 진동이 끊기자마자 옆에 서있는 뽀한테 진동이 옮아. 혅정언니. 울리는 진동. 유일했던 방해금지모드 제외. 이제는 유일이 아닌. 급하게 주머니 들어서 섫한테서 찍힌 부재중을 확인한 추는 입안에 살을 꽉 깨뭄. 내가 받을걸.
마음이 급해질 수록 시야는 좁아졌고, 추는 계속 섫에게 기회를 줬음. 뽀가 섫이랑 통화하는데 그 표정을 보기 싫어서 먼곳으로 시선을 돌리는 추. 오후는 셋 다 수업이 없는데. 왜 전화했지. 빵 받으러 오나. 그런 생각만 하고 있는데 뽀가 추 팔을 잡아.

"어, 언니 잠깐만..소졍아 술 먹을래?"
애초에 나한테 전화한거면 셋이 먹을 생각이었겠지. 하지만 내가 빠지면 더 좋을거고. 친구라면 그렇게 해줬겠지.

"응, 먹어"

근데 내가 안되겠어. 안가서 괴로울 바에는 가서 괴로운게 나아. 추까지 오케이를 하고, 셋은 낮부터 학교 근처에서 술을 마시게 됨.
섫은 말도 안되게 깨졌지만 다행히 학점 나락까지는 피했고, 평생 꼬리표를 살게 됐음. 저 새끼 내 취업 뭉개면 어쩌지. 그런 걱정에 다운된 상태로 나왔는데 뽀 카톡 보고 바로 입꼬리가 올라갔음.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 그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음. 술집에서 당당하게 빵을 건네는게 귀여웠고.
그걸 소중하게 가방에 넣어놓은 섫. 추가 오늘따라 쉬지 않고 술잔을 넘기는게 신경 쓰였지만 모르는척 페이스대로 달림. 뽀는 그거 맞춰 준다고 오버하다가 결국 제일 먼저 취해버렸음. 얼굴에 홍조 올라와서 눈만 껌뻑거리는 뽀에 추는 웃음을 참았고, 섫은 턱을 괴고 웃었음.
중간에 섫이 화장실 간다고 나가고, 추는 취한 뽀 앞에 새로 채운 물잔을 밀어줌. 그거 손에 쥐고 마시더니 크으- 하는 뽀에 결국 웃음 터지는 추. 뽀가 왜 웃냐고 발 툭툭 차는데 추는 됐다고 하면서 바닥으로 시선 떨구고 더 웃음. 왜 귀엽지. 오늘 진짜 짜증나는데. 여러 감정이 스쳐가는 추.
근데 찬물을 두어잔 마셔도 헤롱거리는 뽀. 음료라도 시켜줘야하나 메뉴판을 보고 있을 때였음. 작은 종소리와 함께 가게 문이 열리고, 화장실이 아닌 밖에서 섫이 들어왔음. 모자 밑으로 숨을 몰아쉬면서. 방금 전까지 뛴 사람처럼.

"아이스크림"

김지엱이 술먹을 때마다 찾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뽀는 제 앞에 놓인 아이스크림을 보다가 웃었음. 정말 눈이 휘어지게 웃었음.

"고마워!"

큰소리로 말하면서. 추는 그 순간 속이고 세상이 다 뒤집혔음. 뽀 앞에 덩그러니 놓인 물잔도, 제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까지 골라 사온 김혅정도. 어떤 것도 견딜 수가 없었음. ImageImage
술도 마신 상태라 제어가 안되는 추. 결국 섫이 내민 아이스크림을 외면하고 날카롭게 깎은 말을 던져.

"언니 얘 취했어. 숙취해소제를 사오지?"

그 말에 아이스크림 껍질 뜯던 뽀도 멈추고, 아이스크림 건네며 자리에 앉던 섫도 멈췄음. 3초의 정적.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나오는 대답.
"지엱이 숙취해소제 효과없어"
"....."
"아이스크림이 그나마 낫고"

섫은 그 말만 남기고 아이스크림을 앞에 놔줬음. 추는 놀라서 앞을 보는데 뽀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어. 저는 항상 물잔을 채우거나, 숙취해소제를 사다준 적도 있었음.

"얘기 했었는데?"

근데 이어지는 뽀 말이 쐐기를 박아.
그걸 들으니까 어렴풋 기억이 나.

'이거 효과 없던데'

흘리듯 말하던 뽀의 목소리.

'아이스크림!'
'아 왜 술만 먹으면 아이스크림 타령이야!'
'그거 먹어야 좀 깨-'
'구라친다 또'

흘려버렸던 우리의 대화.

터질듯 차오르던 못된 감정이 구멍난 곳으로 전부 빠져나가 버렸음.
나 한번이라도 먼저 아이스크림을 쥐여준적이 있었나. 다음날 숙취해소제를 사다주면서 속으로 나밖에 없다며 자만했던거 아닐까. 추는 제가 누구보다 뽀를 잘 알았고, 뽀에게 잘해준다고 생각했음. 제가 하는 모든게 뽀에게 맞춤이라고 여겼음.

근데 어쩌면,
맞춘건 내가 아니라 너였을지도.
추한테는 그 순간이 가장 큰 충격이었을것 같지. 섫의 마음을 알았을 때보다, 섫이 저를 앞서 뛰어갔을 때보다. 뽀의 입에서 네가 아는게 틀렸어, 라는 소리를 듣고 나니 외면했던 모든걸 마주해야 했고, 그때 처음으로 추는 인정을 했음.

타이밍을, 우연을 탓해봐도.
결국 더 간절한건 섫이었다는걸.
이 세상에서 저보다 뽀를 사랑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음. 근데 그 확신이 부서지기 시작했고, 셋의 관계 변화는 그 술자리를 이후로 더 급격해짐. 섫은 계속 뽀에게 닿으려고 노력했고, 뽀는 갈수록 그 노력에 반응하는 횟수가 늘었음. 추는 조급한 마음에 크고 작은 실수를 반복해서 틈을 더 벌렸고.
둘이었던 봄에서 셋이 된 여름을 지나, 둘이 되어가던 가을.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겨울.
방학을 시작한 날. 추와 함께 건물을 빠져나와 정문을 향해 걷던 섫이 말함.

"나 고백했어"
"뭐??"
"어제 밤에"

사물함에서 들고나온 책을 그대로 쏟을뻔한 추. 손이 떨리고 다리가 후들거렸음.
어쩐지 어제 밤부터 단톡이 조용하다 했더니. 김지엱은 밥먹자니까 바로 대구 간다더니. 어떻게 됐는지 묻고 싶은데 도저히 입이 안 떨어졌음. 어떤 대답도 혼란스러울것 같아서. 근데 사색이 된 추를 힐끔 보던 섫이 직접 이야기를 이어갔음.

"잘 모르겠대"
"...아"
"많이 놀란것 같더라고"
"생각해보고 말해주기로 했어"

섫은 생각보다 무덤덤 했음. 요즘 자주 만나긴 했지만 뽀는 제 감정을 모르는듯 했고, 저도 뽀 마음에 확신이 없었으니까. 근데 그냥 했음. 어쩌다가 나와버렸어. 방학하면 대구 잠깐 다녀 온다는 말에, 그 짧은 순간이 생각만 해도 사무치는 바람에.
'...보고싶겠다'
'언니 무슨 낯간지럽게,'
'좋아해'
'.....'
'나 너 좋아해, 지엱아'
'.....'
'그래서 사실은 매일이 그래'
'.....'
'항상 보고싶어해'

고백을 했고, 후회는 없음. Image
뽀가 거절하지 않고 대답을 미룬것 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했음. 되짚어볼 감정까지는 된다는거니까. 그렇게 추가 9년을 망설인 고백을, 섫은 반년만에 해냈음. 추한테 말한 이유는 단톡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을것 같아서. 그리고 알려줘야할것 같아서. 그 말만 남기고 섫은 택시를 잡아타고 갔음.
추는 정문 앞에 남겨져서 많은 생각을 해. 고백을 했구나. 결국. 요즘 둘이 부쩍 더 가까워졌다고 생각은 했는데. 결국. 내가 먼저 좋아해도 고백은 먼저가 아니구나. 결국. 뽀가 돌아오는건 이번주 주말인 12월 31일이었음. 그 이유는 매년 마지막날을 저와 둘이 보내는게 익숙해져서. 올해도.
15살 12월 31일에는 잠옷파티를 했고,
19살 12월 31일에는 첫술을 함께했음.
그만큼 특별한 일이 아니면 둘은 마지막
날을 함께했고, 올해도 추네 집에서 함께
하기로 약속한 상태였음. 마지막 날이라는
의미, 섫이 해버린 고백. 추는 여러모로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었음. 마지막 기회인것 같다고.
모든걸 내려놓지 못해서 할 수 없었던 고백. 이번엔 무조건 질러야 겠다는 다짐을 하는 추. 단톡방은 일주일 내내 조용했고, 폭풍전야처럼 셋은 서로한테 연락 안함. 뽀는 본가가면 폰을 안본다는 핑계로, 나머지 둘은 다른 의미로 뽀를 기다리면서. 뽀가 추한테 연락이 온건 12월 31일 저녁이었음.
-나 이제 간당
-올때 술사와
-오키~

일주일 연락 안했는데도 대화는 자연스러웠고, 춥다고 동동거리며 들어온 뽀에게 담요를 내어주는 것도 익숙했음. 세월이 주는 신뢰와 편안함. 그게 둘에게는 있었고, 추한테는 그게 큰 용기가 됐음. 9년인데. 9년이야. 옆에 앉은 뽀를 보며 말을 고르는 추.
둘의 연말 루틴은 시덥잖은 대화를 하다가 새해 카운트다운을 하고, 그때 있는 집에서 떠들다 잠드는거였음. 섫은 그 시간에 혼자 방 안에서 핸드폰을 보고 있었음. 오늘 올라온다고 했는데. 연락이 없네. 생각 중인가. 비교적 덤덤하긴 했지만 기대가 안되는건 아니었기에. 섫은 무릎에 얼굴을 묻음.
엓뽀는 일주일간 무슨일이 있었는지 대화를 나누고, 뽀가 의도적으로 섫 얘기를 안하는것 같아서 굳이 안물어봄. 다행이라는 생각은 어쩔 수 없었고. 10분 남은 시간에 이왕 이렇게 된거 카운트다운에 고백하자 마음먹는 추. 마땅한 채널을 찾는데, 옆에서 맥주캔을 한참 딱딱거리던 뽀가 말했음.
"소졍아"
"엉?"
"..나 혅정언니한테 고백 받았어"

리모컨을 이리저리 휘두르던 추가 멈췄음. 그리고 뽀가 안보이는 위치에서 입술을 꽉 씹었음. 이제 9분 남았는데. 지엱아. 제발. 불안함에 어떻게든 뒷말을 안들으려고 얼음 핑계를 대며 일어나려는 추. 근데 뽀가 추 손목을 붙잡고 다시 앉혔음.
"생각해보겠다고 했거든"
"....."
"그래서 생각을 해봤어. 대구에서 계속 그 언니만 생각했어"
"...그래서?"
"모르겠어. 너무 복잡해. 같이 있으면 편하고 재밌긴 해. 잘 챙겨주고, 언니가 조금.."

추만 바라보고 얘기하다가 시선 떨어트리더니 볼에 홍조가 올라오는 뽀.

"예쁘기도, 하고" Image
그 뒤에 여러 이야기가 나왔지만 추는 그 순간에 정지되어 있었음. 예쁘다고 말하는 목소리, 설렘이 가득 묻은 얼굴. 모를 수가 없었음. 뽀가 섫에게 느끼는 감정을. 뽀도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을 제대로 마주한게 처음이라 헷갈린다는걸 알았음. 모르고 싶은데. 알기 싫은데. 빌어먹게도 알았음.
생각했던 고백이 무너지고, 마지막이 흐려져. 모니터 안에서는 카운트다운이 분주하게 준비되고 있어. 그냥 지를까 나중에 또 이순간을 후회하지 않을까. 그런 이기적인 마음이 들다가도 앞을 가로막는 이유.

아까 섫을 말하던 뽀가,
김혅정을 담은 김지엱이.
9년동안 봐왔던 어떤 모습보다 예뻐서.
그리고 첫사랑의 단어를 지워도 뽀는 저에게 소중했고, 아끼는 사람이었음. 섫도 못지않게 그랬고. 지금까지 수없이 많았던 기회들을 떠올리다 바닥을 보며 숨을 들이쉬는 추. 그렇게 1분이 흐르고, 미련을 삼키고. 추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59분이 됐고, 핸드폰에 향해있는 뽀 시선을 발견해.
그리고 이번엔 망설임없이 뽀 손등 위에 손을 겹쳐잡고 시선을 가져 오고, 잠시 그 눈에 담기는 제 모습과 눈을 맞춤. 아직도 뽀 눈에서 일렁이는 애정을 보며 울컥하는 감정을 억누르는 추. 카운트다운이 시작 되고, 8이 외쳐지고.

"좋아해"

뽀의 눈이 커지고, 추는 이를 꽉 깨물어.
4초의 진심이 흐르고, 이제 크게 울려지는 3초. 추는 피식 웃으면서 손을 뒤로 뺐고, 아프고 홀가분한 얼굴로 웃었음.

"네가 언니를"

내가 너를.
추소졍이 김지엱을.
내가 지금까지 너를.
그 말은 마지막 1초에 흘려 보내면서.

댕-댕-
종소리가 울리고, 한해와 함께 추소졍의 첫사랑이 끝났음. Image
뽀는 그 말을 듣고 물었음.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추는 대답했지. 그냥 그렇게 보인다고. 결국 뽀는 처음으로 새해를 추와 보내지 않고 집을 나섰고, 그날 집에 남겨진 추는 속이 시원해질 때까지 펑펑 울었음. 감정을 와르르 쏟아내면서 펑펑. 그리고 뽀는 집을 나서자마자 섫에게 전화를 했음.
어두운 방에 웅크리고 있다가 전화를 받는 섫. 어쩐지 목이 메인 뽀 목소리가 들려 와.

'지엱아?'
'대답, 할게'
'.....'
'대답 들으러 와주면 안돼?'
'....너 어디야'
'여기 사거리 앞에,'
'추워. 집에 있어. 언니 금방, 아니 바로 가'

섫은 전화를 끊자마자 나갔음.
한겨울에. 티 한장만 걸치고.
가면서 별 생각을 다 해. 거리가 있어서 택시타야 하는게 싫고, 소졍이는 알고있나 싶고. 사거리에서 내리자 마자 일단 뽀네 집으로 뛰는 섫. 가다가 추네 집이 보이긴 했지만 멈추지 않고 바로 뛰어감. 몇번 와본 집. 여느날과 다른 길. 섫은 그날 만큼이나 빨리 뛰었고, 건물 아래에 뽀가 서있었음.
그 앞까지 뛰어간 섫. 뽀는 왠지 울것 같은 얼굴로 있다가 섫 옷 입은거 보자마자 놀라서 팔 붙잡음.

"언니 미쳤어?! 영하 몇도인데..!"

지금 다른말 전혀 안들리는 섫. 하얀 입김 내뿜으며 뽀한테 얘기함.

"대답"
"..지금 그게!"
"중요해. 나 지금 그게 제일 중요해"
"....."
"지엱아"
"좋아해"
부끄러운지 눈 피하면서 말하는 뽀. 섫은 여기까지 온 이상 더 기다려줄 생각 없었음. 뽀 시선 다시 들어 올려서 말함.

"내 눈 보고 말해줘"
"..다 들었잖아"
"한번만"
"...좋아해"
"....."
"좋아해, 혅정언니"
"지엱아"
"나도 보고싶었어"

그 말과 함께 숨막히게 뽀를 끌어안는 섫. Image
"진짜 좋아해.."
"숨막혀 언니이"
"안믿겨서 그래. 조금만"
"들어가서, 응? 몸 너무 차가워"
"지엱아"
"왜"
"한번만 더 말해줘"
"그것도 들어가면 해줄게. 빨리 가자. 곧 눈온대"

새해가 시작되고, 첫눈이 내리는 날.
둘은 연애를 시작했음. ImageImage
추는 그 이후로 정말 조금씩 마음을 정리했음. 첫사랑이라는 무게가 한번에 지워지긴 힘들어서 정말 하루에 이만큼씩, 일주일에 이 정도. 정해놓은건 아니지만 너무 급하지 않게 이젠 접어야할 사랑을 죽여갔음. 물론 쉽지는 않았지. 처음엔 이 마음이 사라지긴 하는건가 의심되고 고통스러웠음.
처음 둘이 사귄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날, 둘의 프사가 서로로 바뀐 날, 셋이 만나도 결국 둘과 하나로 찢어지는걸 실감한 날. 그때마다 눈물이 났고, 계속 아프고 막막했음. 둘도 아닌 혼자하는 짝사랑과의 이별이 사무치게 외로웠음. 감정이 닳아지고 있는건가 의심되는 날도 많았지.
섫은 추가 힘들어하는걸 느꼈지만 해줄 수 있는게 없었음. 마음은 편하지 않았지만 정말 줄 수 있는게 없어서. 다시 돌아가도 김지엱 하나는 못줄것 같아서. 그저 최대한 셋이 있는 자리에서 티를 덜 내고, 둘이 있을 때는 뽀에게 온전히 집중했음. 무슨일 있냐고 묻지도 못했지. 무슨일인지 아니까.
그리고 더 마음이 불편했던 이유. 사귄지 이주정도 지났을 때 뽀가 해준 이야기 때문에.

'아 소졍이 밥 한번 사야되는데'
'소졍이 왜'
'걔 덕분에 언니 만난거야'
'...응?'
'그날 있잖아. 내가 언니한테 전화한 날'

뽀는 숨김없이 12월 31일 이야기를 해줬고, 섫은 그거 듣고 아무 대답도 못했음.
그저 잡고있던 뽀의 손을 더 꽉 쥐고, 따뜻한 핫팩이 든 주머니에 넣으면서. 그저 그렇게 걷고, 또 걷고. 그러다가 춥다고 옆으로 붙어오는 뽀의 목도리를 더 단단히 둘러 주면서 섫은 말했음.

'지엱아'
'응?'
'언니가 진짜 잘할게'

내가 잘할게.
내가 지엱이한테 잘할게.
소졍아. 내가 그럴게. Image
섫은 추가 힘을 얹어준 선택을 후회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고, 뽀를 사랑하는 만큼 정말 잘했음. 그리고 날이 갈수록 예쁘게 사랑하는 둘을 지켜보는 추도 아주 서서히 마음을 접어가겠지. 마침 또 새로운 학기에 컴공과에 학점교류가 있다는 공고가 떴고, 추는 고민하다가 그걸 신청했음.
둘을 보는게 불편해서도 있었지만 미래를 위해서기도 했음. 좋은기회 였거든. 섫도 원래 1학년 때부터 관심있어 했는데 이번엔 공고 제대로 보지도 않고 접음. 추가 놀라서 안할거냐고 물어보니까 섫은 흥미없다는 얼굴로 가방 챙기면서 대답함.

"거기 너무 멀어. 지엱이 보기 힘들잖아"
그리고 추는 생각했음. 만약에 내가 저 상황이면 어땠을까. 이렇게 좋은 기회를,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너를 위해 버릴 수 있었을까. 확답이 안나왔음. 고민을 했을것 같은거야. 나는 그랬을것 같아. 그 날도 추가 꽤나 큰 감정의 조각을 내려놓은 날이었음.
결국 추는 그 학점교류에 뽑혔고, 뒤늦게 알게된 뽀가 섭섭하다고 난리를 쳤지만 추는 어깨만 으쓱하고 넘겼음. 그렇게 1학기를 둘에게서 멀어진 채로 지낸 추. 일부러 바쁘다는 핑계로 한달에 한번 정도만 얼굴 보고 살았음. 공부에 매진했고, 새사람들에 집중했음.
그렇게 지내니까 있잖아. 놀랍게도 말이야. 진짜 잊혀지는거야. 너무 흘러가듯 사라져서 실감은 못해도, 점점 희미해지는거야. 한달만에 얼굴을 봤을 때 처음으로 붙어있는 둘이 벅차지 않았고, 두달 후에 만났을 때는 저보다 뽀를 더 잘챙기는 섫을 보며 박탈감이 느껴지지 않았음.
그렇게 또다시 여름방학. 그 해 방학에는 추가 해외봉사를 간다며 또 자리를 비웠음. 추가 1학기 동안 깨달은건 마음은 시간을 거스르지 않는다는 사실이라 그걸 가속화 시키기 위해 일부러 거리를 두고, 뽀가 없는 것에 익숙해지려고 했음. 그러고나니 2학기가 시작할땐 셋이 다니는게 괴롭지 않았음.
2학기를 보내는 동안에는 뽀의 옆에 섫이 있다는 것에 익숙해졌겠지. 9년동안 꿰차고있던 1순위를 내어주는게 어떤날은 여전히 사무쳤지만, 추는 급하지 않게 첫사랑이란 단어를 지우고 제일 친한 친구로 뽀 옆에 다시 한번 다가갔음. 그리고 둘이 사귄지 꼬박 1년이 되어가던 그 해 겨울.
첫눈이 빨랐던 해였음. 셋이 저녁먹고 돌아가는 골목길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중간에서 걷던 뽀가 갑자기 섫 팔을 붙잡고 허공으로 손을 뻗었음.

"눈온다! 언니 눈!"

사귄 날에 눈이 왔었지. 그 날. 섫을 보며 해맑게 웃는 뽀와 그걸 보고 슬며시 고개를 끄덕이는 섫. 추는 우뚝 걸음을 멈췄음.
잘어울려. 행복해보여. 그런 생각이 들었음. 처음으로 그랬어. 질투도 없고, 박탈감도 없이 정말 처음으로 온전히 둘을 향한 축복이 떠올랐음. 그 순간 추는 마음에 희미하게 남아있던 감정이 뚝 끊어지는 느낌이었음. 말로 표현못할 감정. 첫사랑의 상실. 추는 멈춘 걸음을 떼지 못했음. ImageImage
행복하게 붙어서 걸어가는 둘의 뒷모습을 담고있던 추. 몇걸음 걷다가 섫이 먼저 추를 돌아봤고, 뽀도 몸을 돌렸음. 몇걸음을 두고 두사람과 한사람이 마주 봤음. 추는 둘을 바라보다가 서있는 곳에서 한걸음 더 물러남.

"먼저 가"
"어?"
"나 놓고온게 있어서"

둘은 거기, 나는 여기.
이게 맞는거지.
뽀는 같이 찾으러 가자며 운을 띄웠지만, 추를 가만히 바라보던 섫이 잡고있던 뽀 손을 잡고 말렸음.

"그래, 들어가면 연락해"

뽀가 무슨일인가 하고 돌아보니까 섫은 웃으면서 입모양으로 '집에 가자' 그랬음. 다시 몸을 섫 옆으로 붙이며 딴길로 새지 말라는 뽀를 보며 끄덕이는 추.
제게 기울여지는 뽀의 몸을 막아서는 섫을 보며, 단단하게 맞잡은 둘의 손을 보며 추는 다행이라고 생각했음.

그래.
계속 그렇게 잡고있어.
놓지말고.

앞서 가는 둘을 덩그러니 보고 있기는 싫어서 먼저 뒤돌아서 걸어가는 추. 처음으로 귀가길에 세사람의 목적지가 갈라지는 순간이었지.
등을 돌린지 얼마 지나지 않아 뒤에서도 발걸음이 들려왔고, 그 소리들이 코너를 돌아 모래를 밟을 때까지 앞만 보고 있는 추. 그러다 그 발소리가 안들릴 때가 되어서야 천천히 담벼락을 짚고, 다리에 힘이 풀리고, 쪼그려 앉아. 이상하게 눈물이 나왔음. 이제 그렇게 마음이 남은것도 아니었는데.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이었던 첫사랑이 지워진걸 알았을 때. 그렇게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9년의 사랑이 시간에 져버린걸 깨달았을 때. 내 사랑이 고작 이 정도였다는 자괴감. 어떤 상실감. 어떤 허무함. 어떤 슬픔. 첫사랑에 제대로 마침표를 찍은 그날, 추는 마지막으로 뽀때문에 울었음. Image
그 후로는 정말 괜찮았음. 시간이 겹겹이 쌓일 수록 첫사랑이라는 타이틀은 묻어졌고, 추는 친구로 뽀 곁에 남아있었음. 이제는 가끔 얘를 내가 왜 그렇게 좋아했지,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네가 예전에 지엱이 얘기할 때 표정이랑 똑같아서"
"....."
"그래서 알았어"

..언니 설마 다 알고있었어?
추는 정말 놀랐음. 한번도 섫이 그런티 낸적도 없고, 제가 얘기한적도 없었음. 이 세상에 혼자 알고 있던 이야기가 섫의 입에서 나왔음. 추 반응에 그럴줄 알았다는듯 덧붙이는 섫.

"처음엔 몰랐어. 네가 티를 안내니까."
"....."
"한참 뒤에 알았지"

언제냐고 캐묻고 싶은데, 알고 싶지 않기도 해.
애초에 섫은 제가 좋아하는줄 알았으면 마음에 품지 않았을 사람이었음. 그건 확실해. 아마 감정이 번진 후에 어떤 계기로 제 마음을 알아챘던것 같음. 그제서야 쏟아지는 기억들. 한강에서 먼저 말해준 감정, 저를 배려해준 수많은 순간들, 고백 했다고 말해주던 목소리. 추는 술잔을 꽉 쥐었음.
나는 어땠었더라. 기억도 희미해진 날이 많지만 분명히 서툰 감정에 섫에게서 뽀를 뺏어오기도 했고, 쓸데없이 섫에게 날을 세우기도 했음. 섫이 얼마나 간절한지 다 보면서 이기적으로 굴었던 순간이 너무 많았음. 근데 다 알고 있었다고. 이제 과거가 된 이야기라 아쉬움보단 미안하고 부끄러웠음.
추가 앓는 소리 내면서 두손에 얼굴 파묻고 있으니 잔에 술 채워주며 웃는 섫.

"뭐하냐"
"진짜 쪽팔리다..왜 말 안했어?"
"말해서 뭐해. 너 고백하라고 부추기는거 밖에 더 돼?"

네가 그때 자극 받아서 고백하면 지엱이가.., 생각하다가 뒷말은 술 한잔에 말아서 넘겨버리는 섫.
진짜 창피하긴 한데 이제 추에게도 멀리 지나가버린 이야기라 타격이 오래가진 않을듯. 시뻘개진 얼굴은 차가운 물 마시면서 가라앉히고 다시 찬찬히 생각해보니까 섫이 대단하다 싶어. 그 감정을 알면서 뽀 옆에 저를 계속 뒀다는게. 이제는 아니라도 분명 미련이 남은 시기가 있었는데.
섫은 할말이 그게 다 였는지 흥미 떨어진 얼굴을 하고 있었고, 술잔만 돌리던 추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음.

"..신경 안쓰였어?"
"뭐가"
"둘이 사귀고 나서 말이야. 내가 좀..그럴 수도,"
"쓰였지. 어떻게 안쓰여"
"....."
"근데 네가 선넘을 사람 아닌거 아니까"

섫이 술잔을 추 앞으로 가져다 댔음.
그리고 추가 급하게 술잔 집어 드니까 그 끝을 살짝 부딪히고 말함.

"혹시 네가 양심없게 나와도"
"......"
"자신있었어"
"....."
"안뺏길 자신"
"....."
"흔들려도 너한테 안가게 할 자신 있었으니까"

그 겨울 뽀를 붙잡던 섫이 떠오르고, 확신 가득한 말에 추는 헛웃음이 터졌음. Image
할말이 없었음. 진짜 그랬을것 같아서. 제가 사랑에 미쳐 뒤늦게 둘을 찢으려고 했어도 김혅정은 또 간절하게 뛰어서 붙잡았을것 같아서. 고개를 저으며 술잔을 넘기는 추. 안주만 뒤적거리며 말해.

"아 언니 설마 김지엱도,"
"몰라"
"..다행이다"
"알게 해줘?"
"절대. 제발. 평생."
첫사랑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뽀가 알게 되는건 죽기보다 싫었음. 당연히 섫도 말할 생각 없었고. 섫이 예고없이 첫사랑을 들쑤시는 바람에 놀라서 술을 많이 마신 추. 몽롱한 눈 깜빡이다가 문득 물어. 왜 오늘 갑자기 그런 얘기를 했냐고. 그 순간 섫 시선에는 멀리서 걸어오는 뽀루가 보였음.
하하호호 웃는 뽀륵을 보고, 추를 한번 보고.
추에게 머물던 시선이 뽀에게, 그리고 륵으로. 그렇게 어떤 정리를 마친 섫이 대답함.

"륵다라서"
"우리 륵다?"
"네가 쟤 사랑하는것 같아서"

소졍아.
너 그거 아니.
지금까지 네가 만났던 사람들.
좋아한다고 했지
사랑한다고 소개한적 없었던거.
너무 행복하다고 하면서, 매일 데이트 한다면서 우리한테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을 안하더라. 그리고 너는 그랬어. 첫사랑에 비교하고, 그 감정과 빗대어보고. 그것만을 사랑이라고 여기면서 살았잖아.

너는 몰랐겠지만, 이젠 감정도 없겠지만.
얼마전까지도 너한테 사랑의 정의는 김지엱이였어. Image
근데 처음으로 그게 무너졌어. 쟤 때문에. 네가 지엱이를 향했던 형태가 아닌 다른것을 이제 사랑이라고 부르더라. 너한테 진짜 새로운 사랑이 생겼구나 했어. 이제 너의 정의가 륵다가 되었구나 싶었어.

"..륵다 너무 사랑하지"

응, 그래서.
그래서 알려줬어.
이제 지엱이가 네 사랑이 아니라서. Image
어쩌면 뽀를 향했던 감정보다 더 짙은 사랑이었음. 순수했던 첫사랑. 그 마음을 넘어선 어떤 무게. 그게 이제 추한테는 있었고, 섫은 그제야 묵혀뒀던 이야기를 풀어낸거. 추도 섫의 그 말을 듣고서 대충 이해했음. 내가 륵다를 정말 많이 사랑하는구나. 그 생각만 가득 찼어.
둘의 이야기가 끝나기 무섭게 뽀륵이 들어왔고, 각자 손에 애인한테 줄 물건을 들고 있었음. 뽀는 아이스크림, 륵은 숙취해소제. 언니가 좋아하는게 없었다며 꿍얼대는 뽀한테 코 찡긋해준 섫은 괜찮다고 머리를 쓰다듬었고, 추는 륵이 눈 부릅 뜨고 지켜보는 앞에서 숙취해소제를 마셨음.
"륵다야 이거 술보다 써"
"쓴게 몸에 좋아요"
"그럼 술은?"
"...그러게요. 생각해보니까 이거 오류가 있는 말이네?"
"....."
"..왜요?"

오류가 있다며 작은 머리를 팽팽 굴리는 륵을 보고 있으니 괜히 울컥 감정이 차오르는 추. 몸 구겨가며 륵 어깨에 이마 기대더니 작게 말함.

"..사랑해"
워낙 표현에 능숙한 추라 말은 자주 했지만 이런 자리에서 들으니 놀란 륵. 대답을 해줘야 하는데 섫뽀 눈치는 보여서 추 어깨만 쓰다듬어. 그거 안보고도 대충 느껴지는 추는 테이블 밑으로 륵 손 잡으면서 말함.

"대답은 이따해줘"
"....."
"..사랑해 르다야"

내가, 너를.
추소졍이, 이르다를.
그거 듣고 륵도 왠지 눈물이 날것 같았음. 맨날 추 눈물 많다고 놀리기만 했지 누군가의 고백을 받고 울컥할 수 있다고 생각해본적 없었음. 천장 보면서 추만 토닥이고 있으니까 앞에서 아이스크림 먹던 섫이 슬슬 정리하자고 일어나겠지. 더 안먹냐고 올려다보는 뽀한테 허리 숙여서 귓속말하는 섫.
"방 잡아놨어"

어제 이미 예약해뒀음. 동거 중이다보니 항상 집에만 있게 되고, 그게 루틴이 될까봐 가끔 바깥에서 자고 들어가는 둘. 섫이 웃으면서 떨어지니까 뽀는 또 하압 입다물고 가방 챙김. 5년이나 됐는데 아직도 귀가 빨간 뽀가 마냥 사랑스럽지. 엓루도 금방 정리하고 따라일어남.
먼저 결제하더니 정산은 됐다고 쿨하게 나가는 섫.

"우리언니 짱이다!!"

큰소리 내면서 달려나가더니 섫 품으로 뛰어드는 뽀.

"금액 꽤 나왔던데"
"언니 돈 많이 벌어"
"그래도.."
"르다야 이럴때는 뭐라고?"
"감사합니다"
"그렇지"
"...언니 감사합니다!!!"

똑같이 그 뒤를 따라서 나가는 륵.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을 닫고 나온 추. 눈앞에는 섫뽀가 엉겨 붙어서 륵을 귀엽다는듯 보고 있었고, 륵은 술이 올랐는지 들뜬 얼굴로 섫에게 허리를 푹 숙였음. 그 장면을 잠시 멈춰서 눈에 담아보는 추.
별거 아닌 그 순간이 너무 감동으로 다가왔음. 빠르게 지나가는 옛추억, 옛사랑. 그리고 오늘.
여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 싶음. 이렇게 각자 모두가 행복하기까지. 우리가 이렇게 서있기까지. 옛추억과 함께 들이마신 숨을 밤하늘에 전부 내뱉는 추. 이번에 내려온 시선은 온전히 륵에게만 꽂혔음.

"르다야 같이 가!"

이제 또 다른 길을 갈 시간이야.
그 길의 이름은 너로 불리울테지.
달려온 추를 륵이 자연스럽게 품에 안았고, 손을 깍지껴 잡았음. 이제 제대로 섫뽀와 마주보는 엓루. 섫이 먼저 살짝 웃으면서 말해.

"우리는 이쪽"

섫이 가리키는 방향이 둘의 집 방향과 전혀 다르다는걸 깨닫고 눈썹 꿈틀하는 추. 섫은 그런 추를 못본척 뽀와 함께 인사를 하고 뒤를 돌았음.
딱 붙어 얘기를 하면서 몸이 이리저리 기울어지는 둘을 바라보는 엓뽀. 먼저 시선을 뗀건 추였음.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는 륵을 보다가 입술을 꽉 물었다 놓는 추. 두어번 그 행동을 반복하더니 말함. 잡은 손을 왼쪽으로 끌면서.

"우리는 저쪽"
"거기는 우리집,"
"응, 저쪽"
"...네, 저쪽"
결국 서로 다른길을 가는 넷이었지만, 밤은 똑같이 뜨거웠음. 조금 다른 분위기로, 조금 다른 온도로.

"지엱아 허리"
"..자세 좀 바꾸, 자니까"
"언니가 잘할게"
"갑자기 무슨, 아,"
"이것도 잘하고"
"5분만 쉬면 안돼?"
"응, 사랑해"
"하아..사랑해"

이제는 여유롭고 느긋한 두사람과,
"언니 여기 더워요.."
"한번만"
"..아까도 그랬잖아"
"그럼 두번만"
"진짜.."
"얼른 나가야지"
"....."
"아까 대답 지금 해줘"
"....."
"응? 르다야"
"잠깐, 갑자기 그렇게, 알았어요..멈춰, 봐.."
"사랑해"
"..나도 많이 사랑해요"
"....."
"언니 눈 돌지 말고, 아!"

아직은 급하고 불타는 두사람.
네사람의 사랑은 각자의 출발선이 달랐지만 결국 같은 결말을 맞이했음. 행복이라는 엔딩을. 가장 먼저 뛰기 시작했던 섫은 용기있게 뽀를 따라 움직이게 했고, 그 빈트랙에 남겨져 한참을 서성이던 추는 드디어 새롭게 찾아온 륵을 만나 한번도 본적 없던 모양의 트랙을 그려가며 달리고 있었음.
누가 먼저 뛴게 중요할까. 누가 오래 뛴게 중요할까. 사랑 앞에서는 순서도, 세월도, 실수도 중요하지 않았음. 그 때였기에 사랑했고, 그 때였기에 성공하고 실패했을 사랑이 너무나도 많았기에. 내가 달리고 싶어졌을 때. 내가 진짜 달릴 수 있을 때. 그 때 눈앞에 있는 사람. 그게 사랑이지 않을까.
추는 달리고 싶지만 달릴 수 없을 때 뽀를 만났고, 비로소 달릴 수 있을 때 륵을 만났음. 섫은 달릴 수 있을 때 뽀를 만났고, 뽀는 달리고 싶어졌을 때 섫이 눈앞에 나타나줬음. 그 모든 타이밍과 우연들이 모여 각자의 사랑이 됐고, 이제는 정말 앞만 보고 달려가야 할 때.
사랑했었기에, 사랑하기에, 사랑할것이기에.
더이상 뒤를 돌아볼 필요가 없었고, 손바닥 만큼 열려있던 과거는 닫히고 자물쇠가 채워졌음.

한없이 불공평한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또 다시 기회를 주는 것.
준비된 사람에게 주어지는 이름.
사랑이며, 사랑이었다. ImageImageImageImage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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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 14, 2022
인스타 섫뽀 그 잡채,,
이거 찍어준 거 매니저 김혅정인 상상,,
신인상 받을 때는 대판 싸웠었고
이후로도 크고 작은 싸움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이제 헤어지지 않고 잘 사귀는 중,,
상 받고 헤어질뻔 했던지라 김본아
시상식마다 불안해하는데 김혅정 그거 알고
덤덤하게 먼저 찍어 준다 했을것 같어 Image
신인상 받은 연말에 싸우고 화해하느라
그때 사진을 한장도 못찍어줬었거든,,
거의 모든 스케줄마다 사진이
다 있었는데 유일한 공백이 그때였음
김본아는 몰랐지만 김혅정은 그게 항상 미안했어서,,
더이상 반복하지 않을 거라는 의미로 바쁜 김본아 데리고 나와서 핸드폰 부터 들이 밀었을 김혅정
김본아는 인터뷰 한다고 오는 카메라 때문에 정신 없다가 김혅정 앵글에 담기고서야 편하게 숨 쉴것 같지,,
모든게 공유되는 삶을 사는 김본아가 유일하게 편하게 느껴지는 카메라 렌즈가 딱 언니 핸드폰 뿐이라서,,
억지로 더 환하게 웃던 김본아는 사라지고
장난스러운 얼굴의 김지엱이 돌아와
Read 52 tweets
Sep 16, 2022
뽀도 오늘의 결과를 알고 있었음. 워낙 회사 내에서 유명한 프로그램이기도 하고, 담당 매니저가 관련 업무도 같이 하고 있어서 원치 않아도 알 수 밖에 없었음. 녹화 날인 거 알아서 일부러 신경 끄고 있었는데 매니저가 굳이 눈 앞에 보여준 덕에 모른 척 할 수도 없었지.
정리 된 명단에서 어쩔 수 없이 섫 이름을 먼저 찾았고, 당연히 상위권에 있을 거라고 생각한 이름이 18위에 적힌 거 보고 심장이 덜컹했음. 그러다 투표 순위와 한줄 평가까지 확인한 뒤에는 마음 속에서 뭔가 뚝 끊어졌겠지. 이걸 보고 섫이 무슨 생각을 할지, 어떤 감정을 느낄지 너무 뻔했거든.
뽀는 섫을 잘 알았음. 얼마나 데뷔가 간절한지,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존심이 얼마나 강한지.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었음. 왜 꼭 언니한테 이런 일이 생길까. 왜 꼭 우리여야 했을까. 엘리베이터 앞에서 가늘게 몸을 떨던 섫이 떠오르고, 뽀는 우리에게만 너무나 가혹한 운명을 원망했음. Image
Read 35 tweets
Jul 12, 2022
이렇게 생겨서 부끄러움 없는 연상
이렇게 생겨서 최고유교걸인 연하
이 둘이 연애하는거 보고싶어 ImageImage
둘이 CC였으면 좋겠다. 섫은 공간연출과 졸업반이고 뽀는 연극영화과 2학년. 섫이 중간에 휴학 오래 했고, 뽀도 재수하고 들어 온거라 나이는 세살차이. 스물다섯 스물둘. 과는 달라도 학부가 같아서 술자리 몇번 같이 한게 인연이 돼서 만나게 됐음.
둘이 처음에 서로 좋아하게 된건 솔직히 외적인 요소가 컸을 것 같지. 섫은 뽀의 우아한 분위기(그리고 얼굴)가 좋았고, 뽀는 섫의 하얗고 말랑한 분위기(그리고 얼굴)가 좋았음. 처음에는 서로 얼굴이 너무 완식이라 성격이나 성향 이런거 돌아볼 틈도 없었음. 그저 눈호강 데이트 레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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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 29, 2022
머드 축제가서 처음 만나는 섫뽀,,
김혅정 하필 그날 렌즈가 빠져가지고
계속 인상 찡그리고 다니다가
화장실에서 허리 숙여서 손씻고 있는
흑발 긴머 뒷모습 보구
당연히 일행인 긍서인줄 안 김혅정,,
말끔한 등에 진흙 손바닥 자국 야앗!
했는데 알고보니 무대하러 온 아이돌 김본아여라ㅜ
무대 의상이라 뒤에 훤히 드러내고 있었는데
거따가 손바닥 두개 챱 남겨버린 김혅정,,
대박 개빡치고 놀라서 돌아보는 얼굴이
전혀 다른 사람이라 손대고 굳어뻐려,,

"근더기가....어..."

근데 더 놀라운 사실,,
둘이 아는 사이였음 좋겠어,,
정확히 말하면 김본아가 좋아했던ㅜ
학생때 첫사랑이고 김혅정도 좋아했는데
아이돌 준비하는 김지엱한테 버려질까바
걍 먼저 놔버렸었음,,
공부하느라 바빠졌다는 핑계루,,
(근데 그 직후 모의고사 개망쳐서
한달동안 김지엱 피해다님ㅜ)
그리고는 그냥저냥 묻어두고 살았고
티비 나오면 멍때리고 보는 정도였는디,,
Read 17 tweets
Jun 16, 2022
결혼했으면 좋겠어 ImageImage
그냥 평범한 연애, 그리고 결혼. 운명적인 첫만남이라든가 소설처럼 온 세상이 뒤틀리는 경험은 없었지만 잔잔하고 여유로운 그런 사랑. 처음 만난 것도 둘이 잘 어울릴것 같다~ 라는 겹지인 추소졍의 오지랖으로 주선 된 소개팅. 둘 다 기대없이 편하게 나왔고, 서로의 완벽한 이상형도 아니었음.
예쁘다. 성격도 괜찮네. 근데 나랑 잘 되기는 힘들겠다. 저녁 먹고 나오는 길에 둘 다 같은 생각을 했음. 사람이 안좋은건 아닌데 일단 생활패턴도 너무 다르고, 연애적으로 시너지가 좋을것 같지는 않다고 할까. 둘은 그날 웃으면서 가게를 나왔지만 그후 애프터는 없이 깔끔하게 헤어졌음.
Read 12 tweets
May 16, 2022
캠퍼스 설뽀,,
같은 무리에서 사이 애매한 사이,,
단체로 있을 때는 잘 노는데
둘만 놔두면 눈 깜빡 손 꼼지락 사이,,
왠지 기류가 묘해서 너네 이상하다??
소리 삼천번 듣는 사이,,
그러다가 1~2년 뒤에는
친구들한테 대놓고 너네 진짜 사겨?
소리 듣는 사이,,
그때마다 뭐래~ 함서 술잔 내미는 김지엱,,
안주로 나온 강냉이 반 쪼개는 김혅정,,
그러다 졸업하고 나면 단체 모임
빼고는 얼굴 볼일 없는 사이,,
그러다가 졸업을 하고도 n년,,
각자 사회적으로 어느정도
자리도 잡은 상태,,
누구 결혼한대서 모인 자리,,
술 마시면 나오는건 과거 이야기,,
한창 다같이 재밌던 에피소드 얘기하다가
오랜만에 꺼내지는 설뽀의 묘한 사이,,
너네 진짜 이상했다고,
친한건지 어색한건지
왜 그랬냐고 한마디씩 거들면,,
나이 좀 먹었다고 능글 맞아져서
어후 야 기억도 안나~ 그러는 김지엱,,
나이 좀 먹었다고 강냉이 대신
와인 쪼개 마시는 김혅정,,
Read 16 twee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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