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어째서, 어떻게, 내게 고백하는 사람이 형제와도 같은 부랄친구일 수가 있는거지? 몰카인가? "좀 개소리 같긴 하지?" 고개를 끄덕이며 지호성이 다가온다.
- 말을 할까말까 고민도 해봤는데, 나도 사실 확신이 안 서서 차라리 터놓고 말 하는 게 좋을 거 같더라고. 나 새로운 꿈이 생겼어.
와아, 뭔지 진짜 하나도 안 궁금하다. 마침내 코앞으로 다가온 입술이 정점을 찍는 흉측한 말을 뱉어낸다.
- 일단 나랑 섹스해보자.
- ...뭐?
꿈인가? 지금, 방금, 이 새끼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온거지?
- 내가 너랑 그딴 걸 왜 해?!
- 지금 내 감정이 오래 된 친구이기 때문에 특별한 것인지 아니면 내가 정말 널 좋아하는건지 모르겠으니까?
- 근데?
- 난 이 감정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거든. 그러니까 나랑 자자.
대체 뭔 소릴 지껄이는거야. 지금 니가 하는 말들이 하나부터 열까지 다 이해가 안 되긴한데,
결론이 기승전섹스인 이유는 도저히 이해를 못 하겠다고. 전에 사귀던 누나한테 덮쳐지고선 순결을 잃었다며 뿌에엥거리던 새끼가 나랑 뭘 하자고?
- 이건 내 인생이 달린 문제야.
그래, 뭔지는 몰라도 니 인생이 달린 문제지 내 인 생이 달린 문제는 아니잖아.
- 내 성 정체성에 대해 생각을 해봐야 할 때가 온 거 같아. 그러기 위해선 너랑 자봐야 할 거 같고.
- 대체 왜?
- 아 왜 이렇게 말을 못 알아먹어? 오래된 친구여서인지 아님 진짜 좋아하는건지 헷갈린다니까?!
뭐 뀐 놈이 승질낸다더니 황당한 건 난데 오히려 제가 더 큰소리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뭐? "모텔갈래?" 오늘 뭘 잘 못 쳐먹었나..
- 못 들은걸로 할 테니까,
쪽. ...응? 쪽? 쪼오오옥?! 아니 시발 방금 그 소리 뭔데? 뭐였는데?!
- 어? 야, 뽀뽀하니까 좀 설레는 거 같애.
아까 얼떨결에 받은 꽃다발을 든 손이 아닌 주머니에 꽂혀있던 내 손을 굳이 끄집어내서
지 가슴에 올리더니, "느껴지지, 심장 뛰는거." 말하는 이 또라이.
- 심장은 누구나 뛰거든? 안 뛰면 죽어 병신아. 근데.. 방금 너 뭐한거냐?
나한테 뽀뽀를 한 거였어?! 아 시발, 너무 놀라서 충격 받을새도 없었네. 분명 쪽 소리가 났었다고, 쪽! 내 입술에 뭔가가 닿았다고 이 씨발!
뭐가 닿았냐면 존나 낭창한 표정으로 나한테 섹스하자는 개소리를 당당하게 하고 서 있는 지호성 입술이 닿았다고 씨이이발!
- 괜찮아?
후우, 침착하자. 그래, 침착해야돼 주해성. 너무 순식간에 남자한테 당한 내 입술이 억울해 손에 든 꽃다발을 지호성에게 집어던지며 말했다.
- 머리가 어떻게 됐냐? 한번만 더 그런 정신나간 짓 하면 나 너 안 본다.
제 가슴에 팍 맞고선 떨어지는 꽃다발을 내려다보던 지호성이 순간 아무말도 못 한다. 발을 떼려던 찰나 찬찬히 고개를 들어 물끄러미 내 눈을 쳐다보는 멍-한 얼굴이 마치 내가 큰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속으로는 욕을 천만번 쏟아붓고 얼굴에 수천번 죽빵을 날렸지만, 이것도 친구라도 좀 신경이 쓰이긴 한다.
- 알았어.. 내가 너무 좀, 그랬지..?
알긴 아네.
- 그렇다고 그렇게 울상일 필요는..
- 아니야. 내가 너한테 너무 성급하고 갑작스럽게 무리한 얘길 해버린 거 같다.
- 뭐.. 그렇긴 한데..
- 절차라는 게 있는데, 그치?
- ?
- 어휴, 키스부터 하자고 했어야 하는데 멍청하게 자자는 말부터 했으니 당연히 차이지. 미안, 그럼 우리 키스부터 할까 해성아?
..개노답 지호성. 내가 다시는 널 상종하나 봐라 다짐했지만.
옆집에 사는 지호성네와 우리집은 워낙 돈독한 사이라 오늘처럼 창고정리를 한다던가 할 때에는 서로의 아들을 부려먹곤 했다. 지호성네 창고를 정리하며 하루종일 시달렸다. 더위에? 놉. 먼지에? 그것도 놉. "한 번만 하자니까?" 개노답 지호성 헛소리에 시달렸다. 이렇게 집념이 대단한 놈인줄이야.
- 싫다고 몇 번을 말해 병신아. 넌 옆집만 아니었어도 진짜.. 아우 확 쥐어팰수도 없고.
- 한 대 맞을테니까 뽀뽀할래?
몇 시간을 뽀뽀니 키스니 귀에 못이 박힐만큼 졸라대며 불쑥불쑥 제 얼굴을 내 얼굴 앞으로 들이미는데 와, 내가 오죽하면 지호성한테 애원을 다 했다.
- 하.. 제발 그만 좀 해라 지호성. 내가 이렇게 사정할게.
- 그럼 일단 옷부터 벗고,
- 이 사정이 그 사정이 아니잖아, 이 미친 개노답새끼야!
이런 나의 사정(그 사정 아닙니다)도 모르고 아줌마는 생글생글 웃으며 우리에게 고생했다고 아낌없는 칭찬세례를 하셨다.
아줌마 아들은 오늘 1도 도움이 안 됐다는 걸 좀 알아주셨으면 좋겠는데.. 땀 흘리던 우릴 욕실로 밀어넣으며 말씀하신다.
- 시원하게 화채 만들어줄 테니까 얼른 씻고 나와.
아니, 난 그냥 집에가서 씻어도 되는데요 아줌마...
- 뭐해, 얼른씻고 화채 먹자. 담에 너희 집 창고도 정리 좀 할까?
지호성과 같이 샤워하는 게 별스러운 일은 아니었는데 이제는 별스러운 일이 된 것만 같다. 내게 되먹지않은 고백 비슷한 것을 한 후로는 시도때도 없이 달라붙는 지호성이 날 너무 귀찮게 하니까 말이다. 아무래도 내가 덜 귀찮으려면 최대한 둘만 있는 시간을 줄이는 게 답이니까 빨리 씻고
- 아저, 아니 형. 형도 나 좋잖아. 아버지때문이면 내가,
- 전 제 할 일만 하면 됩니다.
- 그래? 도대체 아저씨가 할 일이 뭔데?
- 지키는거요. 박장군을.
- 나는 내가 알아서 지킬테니까 그냥 나 자체만 봐달라고!
- 스스로를 지키시기엔.. 아직 너무 어리네요.
언제까지 애 취급 할 건데.
- 도련님.
- 그 빌어먹을 도련님 소리 좀 하지 말라고!
나는 언제까지 당신한테 지켜져야 하는 사람인건데.
- ..제가 어떻게 해드리길 바라시는 겁니까?
- 계급 나이 다 떠나서 나도 그냥 아저씨랑 동등한 사람으로 봐줘. 나도 아저씨 지켜줄 수 있다고.
- 저를 지키고 싶으시면, 사랑타령 마세요.
- 나이가 어리다고 감정도 어린건 아니잖아!
- 치기어린 감정이 어른스러운것도 아니죠.
겨우 몸을 추스리고 멍하니 샤워를했지만 조금도 정리되지 않는 감정에 다시금 흐르는 눈물이 속절없이 날 주저앉힌다. 머리도 말리지 못 하고 쇼파에 앉아 꾸역꾸역 억지로 참아보는 눈물조차 서럽게 느껴져 또 주륵 흘러내리는데 머리가 어지럽고 부운 얼굴에 열감이 돈다.
- 지우야. 한지우!
울리는 인터폰. 쿵쿵대며 두드려지는 문. 그리고 강서준 목소리.
- 문 좀 열어봐!
한밤에 신고라도 들어올 기세의 소음에 힘겨운 몸을 일으키다 휘청. 겨우 현관문을 열었는데 강서준이 다급하게 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다.
- 톡도 안 보고 전화도 안 받.. 한지우 너 왜 울어.
- 무슨 일인데 이 난리야.
- 눈 부은 것 좀 봐. 어디가 얼마나 아픈건데?
- 용건만 좀 간단히..
- 어떻게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몸 상태 안 좋아보였잖아. 너 그렇게 가고나서 걱정돼 죽겠는데 넌 전화도 계속 안 받고 혹시나 쓰러진 거 아닌가 싶어서 얼마나 놀란 줄 알아?
- 가.
- 서준이형 백수야?
- 뭐?
- 올 때마다 시간대가 다 다르길래. 회사원은 절대 아니고 그렇다고 사업하는 사람같지도 않고. 걸치고 다니는 거 보면 돈은 또 많아보이고. 부모님이 재벌이신가?
- 백수는 아니고.. 프리랜서.
- 일을 하긴 하는구나. 것보다, 너 그 형 좋아하지?
훅 들어온 질문에 그릇을 정리하던 손이 멈췄다.
- 무슨 소리야, 갑자기.
- 첨엔 형한테 유독 까칠하길래 형이 뭐 잘못해서 사이가 틀어진건가 싶었는데, 뭔가 달라.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이며 그릇을 정리하다 이를 꽉 깨물었다. 내가 미쳤다고 강서준을..
솔직히 다시 만난후로 자꾸 내 앞에 알짱거리는 낯짝이 신경쓰이는 건 사실이다.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겠냐고, 4년 사귄 첫사랑을 5년만에 옆집 이웃사촌으로 만났는데. 불편하고 또 불편한 이 마음이 김형기 눈에는 전혀 다르게 보였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