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해성 어머니는 별일이라고 웃으시며, "너희는 매일 그렇게 붙어 다니면서 대화는 안 하니?" 장난스레 말씀하시는데 괘씸하면서도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 서운하게 나한텐 말도 안 하고.
- 석호가 이해 좀 해 줘. 우리 해성이가 워낙 무뚝뚝하잖니. 집에서도 어쩜 그렇게 말이 없는지.
내 핑계대고 방학 보충수업도 패스했으면서 정작 내가 없는 곳에서 노시겠다? 내가 푸켓으로 여행가자고 그렇게 질척대도 꿈쩍도 않더니 미국으로 놀러를 가신다고?
- 갑자기 따라가면 형이 싫어할까요?
- 시간 되면 같이 가면 좋지. 한 일주일 다녀온다던데 같이 가자고 해봐.
- 그럼 오늘 저 온 거 형한테는 비밀로 해주시겠어요? 원래 같이 푸켓 가기로 했었는데 대신 간다 생각하고 서프라이즈 하려구요.
주해성 어머니는 날 예뻐하신다. 내가 Y그룹 아들이어서가 가장 큰 이유겠지만 싹싹한 척 했던 것도 한 몫 했을 거다. 그 덕에 비행기 정보도 쉽게 얻었으니 신속히 사라져 짐을 좀 싸보실까.
- 형. 비행기 표 하나만 예약해줘.
- 어디 가려고?
- 미국.
- 갑자기 웬 미국?
- 놀러.
- 누구랑?
- 주해성이랑.
- 걔는 아냐? 니가 걔랑 놀러 간다는 거?
- 모르지.
비서형은, "받아주고 있는 걔도 참 대단하다." 중얼 대더니 차에 시동을 건다.
- 주해성이 그렇게 좋아?
- 그런가봐. 이젠 그 새끼 생각하면 웃음부터 나온다?
- 그거 참 소름끼치는 일이네.
형이 그러거나 말거나 난 주해성과 같은 시간대의 티켓을 손에 넣었다.
- 일찍 좀 다녀라.
- ..여긴 또 어떻게 알고 왔을까?
공항에서 맞이한 주해성에게 "엄마찬스 좀 썼지. 너희 어머니가 날 좀 좋아하시잖아?" 했더니 입술을 힘주어 꾸욱 다물곤 빡침을 참아낸다.
- 들어가자.
- 따라가려고?
- 비행기 시간 늦기 전에 들어가시죠, 두 도련님들?
중간에서 정리를 해 준 형 덕분에 사이좋게 비행하게 됐으니 어쨌거나 해피엔딩이라고 정신승리 해가며 비서형에게 휴가 잘 보내라는 인사를 남기고 탑승했다.
- 이만큼 따라다닐 집념이면 통일도 시키겠다.
- 그건 내 할일이 아닌거 같고. 근데 너 전학왔을때 도수도 없는 안경은 왜 쓰고다녔냐?
- 이 꼴로 학교가면 애들이 말을 걸고 싶겠냐? 시비 안 붙으면 다행이지.
아, 납득 완료.
- 언제까지 따라 올 건데? 숙소 안 잡냐?
- J호텔 스위트룸 놔두고 내가 왜?
- 그건 내 숙소고 씹새야.
- 너네호텔 스위트룸이 그렇게 좋다며? 나도 구경 좀 해 보자.
- 안 가 본 거처럼 말하지 마라.
- 한국에서야 가봤지. 미국 J호텔은 처음.
- 똑같으니까 좀 꺼져.
주해성이 구박하거나 말거나 따라가는 난 이미 알고 있다. 말은 꺼지라고하지만 나랑 입씨름하기 귀찮아서 그냥 내버려 둘 거란 걸. 원하는 게 있으면 그걸 이룰때까지 귀찮게 구니까 빠른 포기가 정신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걸 여러번 겪어봤을테니 말이다.
- 크으, J호텔 클라스 봐라. 서비스 좋고, 뷰 좋고, 무엇보다 침대도 좋고, 너도 옆에 누워볼래?
- 수작 부리지마.
- 이럴때만 눈치 빠른 새끼.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누워 주해성을 은은하게 바라봤지만 단호박이 따로 없다. 저 놈은 짐부터 다 풀더니 누군가와 통화를 한다.
- 파티 하게?
- 어.
통화할 때 엿들은 바로는 풀파티를 하려나 본데 주해성 친구들이 좀 궁금해졌다. 미국에서 별 짓 다 하고 살았다더니 오늘 그 별 짓들 같이 하던 친구들 좀 볼 수 있으려나?
- 일주일 정도 있다 갈 거라며. 뭐 할 건데?
- 파티.
- 파티에 환장했냐?
화려하게 노는 걸 좋아하는 건지, 시끌벅적하게 노는 걸 좋아하는 건지, 그냥 파티를 좋아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난 좀 파티문화에 관심이 없어서 금수저들 모임에도 잘 나가지 않는 편이다. 어쩌면 파티문화에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여자에게 관심이 없어서 흥미를 못 느끼는 걸 수도 있다.
그런 곳에서 남자들끼리 노는 일은 잘 없으니까.
- 안 피곤하냐?
- 니가 날 제일 피곤하게 해.
길고 긴 비행시간은 아무것도 안 해도 진이 빠지기 마련인데 주해성은 쌩쌩해 보인다. 난 비행기에서 잠도 꽤 잔 거 같은데 자도 잔 거 같지 않고..
- 샤워하고 좀 자야겠다. 같이 씻을래?
- 넌 저기. 난 여기.
욕실은 왜 또 이렇게 많아, 쯔.. 간단히 입을 옷가지를 챙겨들고 욕실로 갔다. 돈을 얼마나 발라 놓은 건지 어느 것 하나 자잘한 것 까지 고급지지 않은 게 없는 이 곳이 가장 좋은 건, 다른 것보다 일주일간 주해성과 단 둘이라는 점이다.
한국 가기 전에 꼭 역사를 쓰리라.
- ..너 설마 지금 그거만 입고 있을 생각이냐?
- ?
천천히 씻고 나왔더니 촉촉한 머리칼을 대충 손으로 쓸어올리며 침대에 누워 티비 채널을 돌리고 있는 주해성은 해도해도 너무 했다.
- 나 존나 변탠데?
- 미친놈이 갑자기 자기소개야.
갓 씻고 나와 달랑 가운 하나만 입고 침대에 누워 있으면 내가, 어? 막 덮치고 싶고, 어? 그렇지 않겠냐? 상식이 있으면 생각을 해 보라고 주해성아.
- 내가 덮치면 어쩌려고 그 꼴을 하고 누워있냐?
- 맞고 싶으면 해보던가.
하.. 난 저 성의없이 툭툭 던지는 말투가 왜 이렇게 좋은지 모르겠다. 커밍아웃 하고 나니 나도 모르게 좀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는데 그럼에도 주해성은 여전히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이젠 경이롭기까지 하다.
- 맥주?
- 그러던가.
미니바 안의 맥주를 두 개 꺼내들고 주해성의 옆으로 가 나도 침대에 기대앉으며 한 캔을 건넸다. 피곤했는데 이렇게 편하게 기대 있으니 개운하고, 시원하고, 두 세트가 준비되어 있는 샤워제품들 중 한 세트를 사용했을 주해성에게서 내가 선택한 세트와 같은 향이 나기에
느낌이 통한 것 같아 괜히 기분도 좋고, 잠이 솔솔 오는 게 뭔가 힐링이 되는 기분이다.
- 너 연애 해 본 적 있냐?
- 아니.
- 주해성 연애고자라고 소문 내야겠다.
- 넌 있냐?
- 있지.
- 남자?
- 어.
- 남자랑 연애하면 만나서 뭐 하냐?
- 나도 제대로 해본적은 없어서 사실 잘 모르겠다. 몇 번 만나면 지겨워서 헤어졌으니까. 넌 여자한테 환장하면서 왜 연애 안 하는데?
- 여자한테 환장하니까 안 하지. 한 여자 만날 자신도 없고, 연락 해줘야 하고, 신경 써줘야 하고 그런 귀찮은 짓 할 자신도 없고.
알 만 하네. 나 역시 그랬다. 남자를 만난다고 많이 다르진 않으니까. 남녀커플들처럼 신경써주길 바라고, 연락 자주 해 주길 원하고, 난 그게 귀찮고. 맥주를 한 캔씩 비울때까지 웬일로 대화가 좀 길게 이어졌다.
- 남자끼리 사귀면 잘 때 따로 역할이 정해져 있나?
- 꼭 그렇지는 않은데 대체로 정해져있지. 반대 성향을 만나기 마련이니까.
- 넌?
- 개인적으론 상대방이 알아서 리드 해주는 게 좋은데 현실은 반대. 한 번은 하도 만나자고 매달리길래 사귄 놈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바텀이고 지랄. 서로 탑인 줄 알고 만났다가 하루만에 쫑났지.
주해성은 내가 깔린다는 게 상상이 안 된다며 그 지랄 맞은 성격에 그게 가능하냐고 신기해한다
- 내가 까는 건 상상이 되고?
- 남자니까 그게 더 자연스럽긴 하지.
- 그럼, 니가 한 번 깔려볼래?
무방비하게 널부러져 있던 몸 위로 휙 올라 타 주해성을 내려다보며 양쪽 손목을 잡아 눌렀다.
놀랄 노자도 보이지 않는 주해성은 가소롭다는 듯이 그저 내가 하는 양을 가만히 보고만 있다.
- 이럴 땐 놀라는 척이라도 좀 해, 새끼야.
고개를 천천히 숙여갔다. 입술이 닿을 듯한 거리가 됐을때야 얼굴을 옆으로 휙 돌려 피하는 주해성이 생각보다 귀여워서 날 꽤 안달나게 한다.
돌려진 얼굴덕에 부각되는 턱선이 예술도 예술도 이런 예술이 없다. 하.. 어쩌냐고 이 새끼를 진짜...
- 나 텐션 올라간다? 진짜 덮쳐?
- 넌 못해.
- 내가 못할거라 생각하는 이유는?
다시 고개를 돌려 날 보며 피식 웃는 주해성의 여유에 진짜 확 덮쳐버릴까 생각했다.
일단 흥분만 하게 되면 그 후엔 알아서 덤벼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너무 과한 바램이려나. 내 손아귀에 눌려진 손목에 힘을 살짝 주며 움직여보려던 주해성이 내 눈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 이유라면 너무 명확하게 있지. 니가 날 좋아한다는 거. 니가 아무리 양아치여도 내 동의없이는 아무것도 못한다는 것쯤은 알아.
- ......
- 난 니 고백을 신경 안 쓰는 것 뿐이지 안 믿는 건 아니거든.
손목을 움직여 보려다 체중을 실어 누르고 있는 내 무게에 포기했나 싶었는데 갑자기 팔 전체에 힘이 들어가더니 숨 한 번 들이마실 시간도 없이 자세를 확 뒤집는다. 목이 타 나도 모르게 혀로 입술을 축이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다.
하지만 좀 전의 자세를 그대로 재연해 내 위에 올라 탄 주해성을 올려다보고 있어야만 하는 건 마음을 가라앉히기엔 너무 잔인했다. 흐트러진 가운 사이로 슬쩍슬쩍 보이는 단단한 몸과 나른하게 날 내려다보는 속쌍커풀이 진하게 진 눈과, 여유롭게 살짝 올라가 있는 입매와 날 제압하고 있는 팔까지,
모든 게 섹스어필로 다가오는 내게 주해성은 느릿느릿 말해왔다.
- 적당히 까불면 내가 그냥 넘어가주잖아 석호야. 그러니까 딱 적당히만 까불어.
생전 안 부르던 내 이름 하나 불러 주는 게 이렇게 섹시할 일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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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에서 창피한줄도 모른채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한참을 울었다. 오만가지 생각이 다 떠오른다. 떠났을때 내 심정이 어땠었는지, 널 잊기까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자꾸만 보고싶고 생각나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외로움에 못 이겨 도망쳐놓고도 남아있는 미련에 붙잡고
싶어지던 마음을 얼마나 참았었는지, 떠나기 전에는 내 마음을 헤아려주지 않았으면서 왜 헤어지고 나서야 이렇게 내게 진심인건지...
- 사는 게 참 힘들죠?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힘내요.
얼마나 서럽게 울었으면 택시기사님이 날 다 위로하고 있을까.
헤어진 후 매일밤을 기도했다. 넌 내가 떠났어도 아무렇지 않게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고, 그렇게 잘 살고 있겠지? 꼭, 너같은 사람 만나길.. 그렇지 않는 한 죽었다 깨어나도 내 심정을 이해하지 못 할 테니까 너와 똑같은 사람 만나서 너도 나처럼 힘들어하고 아파하길 수도 없이 바랬다.
- 정확히 짚고 넘어가야 하고, 확실하게 얘기를 끝냈어야 했던건데 너무 황당한 나머지 자꾸 피하려고만 했던 내 잘못도 있는거 같다.
- 이해해. 그래서 나도 지금은 섣부르게 섹스부터 하자고는 안 하잖아.
이해하긴 뭘 이해해. 내 말의 요점은 그게 아니잖아 정신나간 새끼야.
- 생각이라는 걸 좀 해보자고. 나랑 진짜 자고싶냐?
- 응. 너랑 자보는 게 내 새로운 꿈이야. 만약 거부감이 조금이라도 느껴지면 널 향한 내 마음은 단지 친한 친구이기 때문에 특별한 거지 내 성정체성은 보통의 사람들과 같은 거고, 만약 거부감이 안 들고 좋으면 난 널 사랑하는 게 맞는 거잖아.
뭐지 이 흑백논리는.
- 너 전에 사귀던 누나랑 해봤잖아. 그땐 징징대더만.
- 그땐 몸 안 좋다고 안 된다고 했는데 누나가 막 그랬던거고. 기억도 잘 안나고 억울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내가 하고싶어서. 나 야동도 많이 봤어, 너랑 하려고.
- 야이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