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해성은 선상파티 이후로 몇 번 혼자서 호텔밖을 나가 놀다 들어왔는데 여자와 데이트를 했는지 잤는지 의외로 건전하게 놀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일일이 쫓아다니기엔 나도 무리가 있다보니 주해성이 모르는 여자를 안는다던가 하는 애꿎은 상상력만 늘어난데다,
한 번 자봤다고 그놈이 섹시해 보일때마다 아랫배가 간질간질해지는 느낌이 자주 들어 힘든 것만 빼고는 그래도 꽤 수확이 큰 미국행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생각해보니 일주일을 붙어있는동안 알게 모르게 주해성과 많이 가까워진 거 같다. 그 전에는 한정적인 모습밖에 볼 수 없었는데
일주일간 조금 더 다양한 표정과 다양한 모습을 보게 되기도 했고 전보다 대화도 확실히 늘었다. 싸가지야 일관성 있게 없다지만 그래도 이제 말 걸면 대답도 그럭저럭 잘 해주고, 한심하게 쳐다보는 눈빛도 여전하지만 그래도 이제 비웃음이긴 해도 피식 피식 잘 웃기도 한다.
- 뭐 했다고 방학이 일주일밖에 안 남았냐.. 시간 존나 빨라.
처음 일주일은 주해성을 일일이 찾아다녔고, 그 후 일주일은 미국 쫓아갔고, 이제 남은 일주일은 뭐 하지..?
- 집에 안 가냐?
- 나중에.
주해성 침대에 누워 뒹굴대면서 만화책을 보고 있는데 달칵거리는 마우스 소리와 타닥거리는
키보드 소리가 멈춘다.
- 너 혹시 지금 나 단속 하냐?
- 어. 나 집에가면 유흥거리 찾아다닐 거잖아.
그래서 외출하기엔 집안 눈치보일 시간까지 게기고 있었더니 올가미가 따로 없다며 다시 게임을 한다. 그러다 문득 궁금한 게 생겨 폰을 집어 들었고, 곧 주해성은 피곤한 얼굴로 날 못마땅하게
쳐다보며 제 폰을 들어 보인다.
- 너 뭐하냐?
대자로 뻗어서 주해성에게 전화를 걸다가 일어나 다가갔다. 폰 화면에 '양아치'라고 뜨는 내 이름을 보고나니 썩소가 절로 나온다.
- 내 이름을 아주 그냥 사랑스럽게도 저장해 두셨네?
주해성은 내 손에 들린 폰을 뺏어서 저도 ‘개새끼’라고 저장된 제 이름을 확인해 보더니, 유투다 새끼야. 하고선 다시 게임에 집중한다. 흐음.. 좀 순화해서 강아지로 바꿀까..?
매일 지가 놀고 싶은데로 노는 주해성이다보니 나도 내가 노는 곳에서 같이 놀아보고 싶은 생각에 게이바를 가려고 어거지로 저녁 약속을 잡았다. 목적지를 말하면 안 가려고할까봐 일부러 바 근처에서 보자고 했다. 먼저 도착해 담배나 하나 태울까 싶어 옆에 있던 골목으로 들어갔는데,
누가봐도 '나 양아치요.' 써 있는 두 명이 다가오는데 낯이 좀 익은 거 보면 옛날에 시비가 붙었던 딴 학교 애들인 거 같기도 하고..
- 날도 더운데 불쾌지수 올라가게 괜히 시비 털지 마라.
지랄맞은 내 성격때문에 시비가 붙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먼저 시비를 걸어오는 경우도 종종
있어왔기에 익숙하긴한데,
- 내가 곧 데이트가 있어서 뽀송함을 좀 유지해야 하거든?
이만큼 정중하게 얘길 했으면 좀 물러설 줄도 알아야지. 기어이 쓸데없는 싸움을 만드는 두놈을 상대해 줄 수밖에 없었다. 이래봬도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지는 않는다고.
- 내가, 데이트, 있다고, 말, 했지, 씨발,
- 내가, 데이트, 있다고, 말, 했지, 씨발,
두 명 정도는 제압할 수 있으니 여느때처럼 주먹을 날리고 봤는데, 어..? 저 안쪽에서 한패로 보이는 무리가 한 여섯명정도 우루루 걸어오고 있어서 잠시 고민했다. 곧 있으면 주해성도 올텐데 여기서 튀면 엇갈려서 기다려주지도 않고 그냥 갈 거 같고,
그렇다고 이 인원이랑 싸우다간 곤죽이 될 게 분명하고.. 고민하는 동안 반대편으로 잠시 고개를 돌렸더니 골목 끝에서 주해성이 무슨 일인가 싶은 얼굴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게 보인다. 하, 씨 존나 반갑네. 더 고민할 것도 없이, "야 튀어!" 주해성에게 소리치며 그쪽으로 뛰었고,
어리둥절해 있는 녀석에게 가까워 졌을 때 다짜고짜 손목을 붙잡고 무작정 달렸다. "나는 왜..?" 하며 황당해하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지금은 그딴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뒤에서 쫓아오는 놈들을 따돌리기 위해 이쪽저쪽 방향을 틀어가며 뛰다가 익숙한 게이바로 몸을 감췄다.
입구를 들어서고 나서야 숨을 고르고 있는데 주해성도 숨을 몰아쉬며, 뭐냐? 묻는다. 왠지 모르겠지만 뽀송함을 유지하긴 커녕 땀을 이렇게나 흘렸는데도 웃음이 튀어나왔다.
- 푸흐흐, 방금 존나 청춘드라마 같지 않았냐?
- 니가 아는 청춘드라마는 스릴러냐?
뭐가 그렇게 즐겁냐는 듯 키득거리고 있는 날 보며 무릎에 손을얹고 숨을 고르는 주해성에게, "재밌잖아. 걔네 약 존나 올랐겠다, 그치?" 했더니 똑바로 서며 귀 옆에 손가락을 두고 빙글빙글 돌린다.
- 그렇다살다 골로 가 새끼야. 생각 좀 하고 행동해라. 니 머리는 무슨 머리카락 기르는 화분이냐?
지는 나보다 더 하고 살았으면서 누가 누구한테 훈계야. 난 뒷통수 맞고 말겠지만 넌 미국에서처럼 살면 칼 맞아 새끼야. 숨이 차서 전해주지 못한 말을 속으로 삼키며 빈 테이블에 앉았고, 주해성은 그제야 남자만 득실득실한 주변을 살피며, 여기 뭐냐? 묻는다.
- 게이바.
일그러질 줄 알았던 표정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암만 봐도 알 수 없는 놈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거부감을 느낄 일들에는 늘 덤덤하고, 오히려 사소하고 쓸데없는 일에 인상을 쓴다. 예를 들면, "오늘 뭔데 존나 꾸러기 같냐?" 하는 내 말을 들은 지금처럼.
- 모자 그렇게 뒤집어쓰니까 좀 귀엽네.
가운데 손가락을 드는 주해성을 못 본 체 하며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거울을 보며 땀 좀 닦고 손도 씻고 머리도 한 번 만진 후 다시 테이블로 돌아가는데, 하아.. 저 새끼 몸에는 사람 끌어당기는 자석이라도 달려있나..?
- 뭐야?
어떤 남자가 주해성 옆에 서서 말을 걸고 있었고 심기가 불편해진 난 맞은편에 털썩 앉으며 주해성 옆에 서 있는 남자를 띠껍게 쳐다봤다.
- 아, 혼자 온 거 아니구나.. 혹시, 애인..?
주해성의 평온하던 얼굴에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더니 남자를 향해, "그냥 아는애." 하며 날 한 번 슥 쳐다본다.
이 새끼봐라..? 그냥 아는 애? 친구도 아니고 그냥 아는 애?! 합석을 제안하는 남자는 내게도 웃어주며, 자기도 친구랑 둘이 왔다고 같이 한잔 하잔다.
- 관심 없고. 지금 안 꺼지면 시끄러워 질 예정이니까 그냥 조용히 가라?
- ..?
- 내가 저 새끼를 존나 좋아하거든. 한번만 더 찝쩍거려봐 시발.
남자는 내 말에 탐탁치않은 표정으로 내가 아닌 주해성을 쳐다본다. 언제나 그렇듯 여유만만 주해성은 어깨를 으쓱하며, "난 괜찮은데 저 놈 성격이 워낙 더러워서." 한다. 뭐래, 미친놈이. 난 괜찮은데에? 괜차아않으으은데에에?! 짜증나네 진짜. 남자를 떨쳐내는데 성공한 후 맥주를 원샷했다.
- 넌 키만 크지 몸은 종이처럼 팔랑거리는 게 어디서 그런 성질머리가 나오냐? 아가리 파이턴줄 알았더니 아까 골목에서 보니까 잘 싸우더라?
- 내가 어딜봐서 팔랑거려 개새끼야. 안그래도 빡치는데 기름붓지 마라.
그러고보니 이 새끼 아까부터 은근 나 약 올리는 거 같은데..
- 너 저놈이 말 걸 때 나 약 올린다고 일부러 거절 안했지?
- 눈치 좀 돌아왔나보네.
- 너 은근 사람 희망고문 한다? 예전엔 대놓고 무시하고 싫어하더니 요즘 왜 사람 헷갈리게 구냐고.
- 웃겨서.
- 뭐가 웃겨.
- 니가 파르르 거리는 거?
- 그게 왜 웃겨.
- 웃기는데 무슨 이유가 있어 병신아.
하.. 요즘은 진짜 주해성때문에 하루에 열두번도 기운이 생겼다, 힘이 빠졌다 반복한다. 호기심인지 아니면 그냥 진짜 내가 우스운건지 주해성은 한결같은 태도로 날 대하는데 난 기분이 좋았다가, 나빴다가 아주 그냥 미친년 널뛰듯이 널뛰기를 한다.
그렇게 게이바를 처음 간 후에도 두번정도 더 같이 간 적이 있었는데, 마지막으로 갔을 땐 한 세 번 가봤다고 흥미가 떨어진 건지 이제 신선하지도 않고 재미도 없다며 지루해했다. 근데 이상하게 나도 요즘은 뭔가 재미가 없다.
- 넌 내가 영상 안 찍었으면 졸업할 때까지 쌩깠겠지?
- 말이라고.
제 침대에 누워있는 내게, 이제 개학인데 집에 좀 가서 잠이나 자라며 구박을 하는 주해성을 빤히 쳐다봤다. 그래도 몸을 섞은 사인데 스킨십은 미국 갔을 때 후론 일절 없었고, 여전히 내가 나대지 않으면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는 주해성은 날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전에 비해 많이 친해졌다지만 애초에 약점으로 연결 된, 아무것도 아닌 우리 사이가 앞으로 발전할 껀덕지는 그 무엇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주해성이랑 있어도 별로 즐겁지가 않다. 회의감이 든다고 해야 하나? 전엔 그냥 같이 있기만 해도 즐거웠고 흥미로웠다.
다른 건 둘째치고 약점을 잡고 있다는 사실이 가장 재밌기도 했다. 근데 지금은 오히려.. 난 앞으로도 주해성에게 약점을 잡은 씹새 그 이상도 이하고 아닐 거고, 영상이 없다면 언제든 아는 척도 안 할 Y그룹 아들일 뿐이라는 게 힘이 좀 빠진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지지않은 사실인데 내 감정이
전 같지가 않으니..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주해성에게 더 진심이 되어가니까 처음과 같을 수 없는 게 당연한 거 같기도 하고.
- 이제 너랑 있어도 재미가 없다.
- 다행이네.
조금의 타격도 없는 주해성은 여전히 덤덤하게 게임을 하고 앉았는데, 그런 반응이 생각보다 속상하지가 않다. 왤까.
- 그만해야겠다, 재미없는 이 짓도. 나 간다.
이유야 어떻든 이제 그냥 놓기로 했다. 섹스는 나 아닌 누구와도 할 수 있는, 내가 방해하지만 않으면 언제든 여자와 데이트 하러 다닐,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날 사랑할리 없는, 이성애자 주해성을.
- 형, 나 오늘 집에 안 들어가.
- 왜? 개학한 기념으로 니가 좋아하는 도련님이랑 밤거리라도 헤매기로 했나보지?
- 아니. 딴 놈이랑 헤매려고.
등굣길에 비서형에게 외박을 미리 예고한 후 하굣길엔 데리러 오지 않아도 된다고 전했다.
처음엔 학교를 빠질 생각은 아니었는데 교문으로 가는 길에 문득 걸음이 멈춰졌다. 과연 내가 옆자리에 앉아있는 주해성을 보고도 놓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래서 방향을 돌려 택시를 타고 번화가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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