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페인❄️ Profile picture
May 9, 2023 228 tweets >60 min read Read on X
정략결혼에 후회공 한스푼 #태준원영 ImageImage
태준은 다급하게 집안으로 뛰쳐 들어왔다. 숨을 고를새도 없이 거실에서 마주한 것은 자신이 한번도 보지 못한 윤화백의 부드러운 미소였다. 곁에 앉은 이는... 물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여기, 네 약혼자다."
태준은 윤화백을 노려보며 휙 몸을 돌렸다.

"예의 없게 무슨 짓이냐, 앉아라."

태준은 이렇게라도 예의를 차리려 했던 자신을 돌려세운 것은 윤화백이라고, 그러니 지금 벌어지는 이 일들도 자신의 탓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원영."
"형, 오랜만이네요. 저 형 작품 전시회도 자주 갔는데."
"아... 그럼 업계에서 내 이야기도 좀 들었나?"

싸늘한 태준을 보면서도 원영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윤화백이 진노하며 태준의 이름을 불렀으나, 태준의 분노로 일렁이는 눈빛이 여전하듯이.

"윤태준!"
"저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사람 있다고."
"...새로 가족이 될 아이 앞에서 내 자식도 나도 망신 당하고 싶지 않구나."
"누군지 아시잖아요."
"...이 말을 하게 만든건 바로 너다. 명심해라."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그 애가 돈을 받고 떠났다."
윤화백의 말에 태준이 얼굴을 굳혔다.

인호형이... 돈을 받고 떠났다고? 그가 유학길에 오르며 눈물의 작별을 한게 바로 일주일전 밤이었다.

"태준아, 나 기다려 줄거지?"

애틋하게 울먹이던 얼굴. 선명한데.

"거짓말하지 마시죠."
태준은 원영을 싸늘하게 바라보곤 등을 돌려 긴 다리를 뻗어 집을 벗어났다. 윤화백과 한공간에 있으면 언제나 숨이 막혔다. 윤화백은 한번도 자신에게 아버지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스승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아버지라는 이름을 내세워 정략결혼이라니.
그렇게 두지 않을 것이라고 태준은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인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시차 때문인지 쉽게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를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확인 받고 싶었다. 이대로 비행기표를 끊을까 고민하던 차에 누군가 태준의 어깨 위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톡톡 치며 불렀다
원영이었다. 원영이 싱긋 웃으며 그를 보고 있었다.

"뭐야?"
"우리 오랜만인데 인사도 제대로 못했잖아요, 형."
"인사할일 없어. 난 너랑 결혼 안 하니까."
"전... 형이랑 하고 싶은데."

생글 웃는 원영을 향해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태준이 몸을 물렸다.
"아까 못 들었어? 난 사랑하는 사람 따로 있다고."

원영의 손가락이 머물렀던 제 어깨 위를 보란듯이 큰 손으로 털어내며 태준은 뒤돌았다. 뒤에서 시선이 느껴졌지만 일부러 돌아보지 않았다. 무슨 상관인가, 볼일 없는 사람인데.
'태준아, 윤화백님 뒷배경이 없는 네가... 나한테 필요할거라 생각했니?'

태준은 뻑뻑한 눈을 겨우 떠, 새벽에 겨우 전화연결이 된 인호의 목소리를 다시 떠올렸다. 전화 목록을 켜보니... 꿈이 아니었다. 허탈한 웃음과 함께 눈물이 함께 맺혔다. 허무하고 허망했다. 사랑이 이런거였나
5년의 시간동안 최선을 다해 그를 사랑했는데, 그도 그러고 있다고 믿었는데.

태준은 다시 눈을 감았다. 다 싫었다. 며칠을 누워 있다 훌쩍 떠나고 싶은 기분에 휩싸인 태준은 무작정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탔다. 목적지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서울과 먼 곳이면 됐다.
인호와의 추억이 없는 곳이라면 더 좋았다. 달리고 달려 늦은 밤까지 달리던 태준은 강릉을 앞에 두고 교통사고가 났다.

윤화백은 병원에 누운 아들을 걱정스레 내려다 봤다.
자신이 아들에게 혹독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평생을 함께할 사람만큼은 다정하고 착한 아이를 찾아주고 싶었다. 인호에 대해서도 알아본 터였다. 상처를 준 것은 아버지인 자신으로 족했다. 본의 아니게 이번에도 작은 상처 빗겨 나가게 하려다, 또 다른 상처를 받게 한 것 같았지만.
태준은 거짓말처럼 기억을 잃었다. 대학에 진학한 직후의 기억을 전부. 그러니 당연히 인호에 대한 기억 역시도.

그것빼면 그는 너무도 멀쩡했다.

몸의 회복은 빨랐고, 도예가로서의 감각도 여전했으니까.
"원영아... 부탁 좀 들어주겠니?"

윤화백은 원영의 손을 잡았다. 태준의 병문안을 온 원영은 태준보다 그의 아버지인 윤화백을 먼저 마주했고, 태준이 기억을 잃었음을 전해들었다. 태준이형이 기억을 잃었구나...
태준과 원영은 어린시절부터 자주 보던 사이였다. 그리고 그들의 첫만남은 윤화백의 전시회였다. 미술관 정원에 뛰어 다니다 그와 부딪쳐 넘어져 울었던 어린 날의 기억.

"괜찮니?"

다정히 묻던 잘생긴 형을 보고는 원영은 윤화백에게 찾아가 화가님 아들이냐고, 저 형 달라고 말했던.
원영에게는 첫사랑과의 만남이었고, 동화같은 이야기였지만... 태준은 그날 일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종종 마주치면 무심하게 다정했을 뿐이니까. 그래도 상관 없었다. 그의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어떤 것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매몰찬 눈빛 정도야 감수할 각오도 한터였다.
"사귄척을... 하라고요?"

하지만 병원에서 조우한 윤화백의 부탁은 원영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부탁이다."

윤화백은 원영에게 은인이었다. 어린시절엔 아버지를 따라 멋모르고 갔던 전시회.유복했던 어린날과 갑자기 기울었던 집안의 가세. 윤화백은 기꺼이 자신의 친우 아들을 위해 원영이 대학에 갈 수 있게 도왔다. 장학금이야 원영의 노력이었지만, 대학입학금은 도움 없이는 어려웠으니까.
"넌 내 아들을 아주 오랫동안 좋아해 왔잖니? 난 너를 믿는단다."

처음 태준과 결혼을 하게 해주겠다 했을 때도 이런 행운이 나에게 와도 되는 걸까 했었는데.

하지만... 이 상황은 원영도 어려웠다.
자신이 손가락을 올린 어깨 위를 탁탁 쳐내던 손길이 떠올랐다.

"원영아, 내 부탁이다."

원영의 눈빛이 흔들렸다.

"강릉에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내가 다 미리 준비해주마."
원영은 이 연극의 막이 올라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예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극의 막이 내리면 태준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함을 안고서.
윤화백이 원영에게 제시한건 6개월 정도 사귄 태준의 연인이었다. 태준에 대해선 잘 아는 원영이니 달리 많은 것을 설명할 필요는 없었으나, 기본적인 것은 가족들과 입을 맞춰야 했다. 태준의 어머니가 걱정하며 말려봤지만, 윤화백의 대쪽같은 고집에 쉽지 않았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귀는 사이였다고요?"

태준의 질문에 원영이 두 손을 꼼지락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거짓말이 나중에 밝혀지만 어떻게 될까? 형은... 나를 보려하지도 않을텐데. 겁이 났지만 섣불리 물러날 수도 없었다.
태준은 낯설어하면서도 원영을 멀리 하거나, 물리지 않았다. 때로 부축이 필요할때면 자연스레 원영에게 기대기도 하면서 두 사람은 가까운 듯, 먼 듯 그렇게 병원에서 사이를 유지했다.
"우리 둘이 여기서 한동안 지내기로 했었어요?"

강릉에서 살 집에 도착한 순간. 원영은 태준의 질문에 도로록 눈을 굴리며 네, 라는 짧은 대답을 한 후 먼저 집안으로 들어섰다. 윤화백님, 집 좀 작은걸로 구해주시지...
태준이 강릉에서 조용히 지낼 수 있도록 차주헌으로 이름을 바꿔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준 것도 윤화백이었고, 그가 도예가로서 감각을 잃지 않도록 공방을 만들어 준 것도 그였다. 태준의 선배 건희에게 이런저런 부탁같은 명령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버지인 윤화백의 친절이 태준으로선 달갑진 않았으나 지금의 상태에서 미디어가 몰리는 것은 사절이었으니 그도 동의하는 바였다. 물레질도 놓고 싶진 않았다. 점토를 만지는 감각이 병원에 있으면서도 그리웠으니까.
강릉에서 땅덩이가 제일 큰 곳에 지어진 집을 얻어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원영은 식은땀이 나는 걸 간신히 숨겨야만 했다.

"형이 안방써요."
"근데... 내가 병원에서부터 물어 보고 싶었는데요."
"네?"
"우리 6개월 정도 사귀었으면 거의 200일 가까이 된건데... 존대했나요?"
"아... 아니요. 우리 원래 어릴때 얼굴도 본 사이라... 자주는 아니지만. 형 대학 가고 나서도 몇 번 봤어요. 저한테 존대 안 하셨는데."
"...나만 편하게 이야기 한 것 처럼 말하네?"
"사귄지 얼마 안됐잖아요, 200일 좀 안 된거니까..."
"성인이 200일 좀 안되게 만난거면 꽤 만난 거 아닌가?"
태준이 천천히 원영의 앞으로 걸어왔다. 원영의 등은 태준을 피할 곳 없는 벽으로 가 닿았다.

"...아닌데?"

태준이 깊은 눈으로 원영을 바라봤다.

"뭐가요?"
"너... 게이 아니잖아."
"형."
"...?"
"형이 기억 안 난다고해서 내가 형을... 사랑 안했던 건 아니거든요. 지금 형은 대학 전까지 기억
나는데도 내가 기억 안 나지만... 나는 형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가 다 기억이 나요. 내 오랜... 첫사랑이자 짝사랑이었니까."

태준의 눈빛이 흔들렸다. 병원에 있을때 원영은 한번도 날 기억해내라며 재촉하지 않았다. 그래서 의심이 갔다. 이렇게 고요할 수 있다고? 연인이 자길 잊었는데?
하지만 지금 자신을 올려다 보는 올곧은 눈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나를 정말 사랑하는구나. 태준은 원영을 가두려 벽에 짚은 손을 떼내고 몸을 뒤로 물렸다.

"미안합니다."
"형이 미안할 건 없어요..."

원영이 고개를 숙이고 빠져나가려던 순간, 태준이 그의 손목을 부드럽게 감싸쥐었다.
"같이 노력해봐요, 우리."

시큰거리는 가슴 통증에도 원영은 웃으며 태준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후에 일은 후에 생각하자, 지원영.
청년몰 한쪽에 그릇가게를 연 태준은 꾸준히 도자기를 구웠다. 처음에는 태준의 가게 일을 돕던 원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에선 자신이 그닥 쓰임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릇 앞에서 태준은 섬세한 사람이었고, 자신은 무지한 사람이었으니까.
"너 우리 카페 알바 할래?"

붙임성 좋은 원영은 태준과는 달리 시장사람들과 쉽게 가까워졌다. 그중 가장 친해진 것은 카페 사장 동희였다. 그릇가게에서 그릇은 커녕 종일 태준의 얼굴만 보고 있는 것을 발견한 그가 와 제안한 일이었다.

"너 관상이 라떼아트 좀 하게 생겼어."
"아 그런 관상이 어딨어요?"
"대충 너네 사이는 알겠는데 일터까지 같은거 좋은거 아니거든?"

동희의 꾀임에 넘어간 원영이 카페로 알바를 다니겠다고 했을 때 태준은 군말없이 그를 보내줬다. 미묘하게 서운한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애초에 이 가게에서 원영이 할만한 역할도 없었으니까.
깐따삐아는 바로 옆에 있는 가게니 멀리도 아니니 불안할 일이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근데... 내가 뭘 불안해할까봐 걱정하는거야?"

스스로도 잘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태준은 갸웃거리면서도 원영의 앞에서는 잘됐다며 웃었다. 미소에 진심이 담기진 않았지만.
평화로운 강릉 생활에서 두 사람은 점점 함께 하는 생활에 익숙해져갔다.

"몇시에 와요?"

일찍 마친 원영의 전화에 태준은.

"8시 전에 들어가니까 저녁 같이 먹자."

다정한 대답을 했고.
"형, 어디 아파요?"

태준의 갑작스런 고열 앞에서 원영은 낯설고 어두운 길을 헤치고 약을 구해오고, 그를 간호하며 밤을 세웠으며.
"내일은 노을 보러 나갈까?"

때로 태준이 먼저 원영에게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신청하기도 했다.

"노을보는거 좋아했어요?"

신발을 벗어 든 원영이 파도의 옅은 잔물결에 발장구를 치며 웃자 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형도 신발 벗어봐요!"
"강아지 같다."
"응?"
"아... 아니야."

마음속의 말이 튀어 나온 태준이 답지 않게 허둥거리며 신발을 벗었다. 파도의 얕은 잔물결이 두 사람의 발목까지 올라와 찰랑거렸다.
차가운데도 기분이 좋아서 두 사람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갑자기 높아진 물결 탓에 접어 올린 바짓단이 와르르 젖었는데도. 태준은 형 바지 다 젖었어요, 라며 웃는 원영의 손을 스르륵 잡아쥐었다.

원영이 놀란 시선이 태준에게 머물렀다.
"기억 못해서 내가 미안해."
"아..."
"근데 알 것 같아, 내가 왜 너 좋아했는지."

원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형을 사랑한건 나지, 형이 사랑한건 내가 아닌데요. 지금 여기 모래사장에서 무릎이라도 꿇고 다 말할까.
"말 못한게 있어요. 사실 정략결혼... 같은거였어요, 우리."
"그건 이미 아버지한테 들은 이야기야. 너랑 결혼하래서 내가 질색팔색 해놓고 좋다고 사귀었다고 하더라."

원영의 눈빛이 흔들렸다. 윤화백이 이렇게까지 말해놨으리란건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지금이라도, 지금이라도 말을 해야...
"나랑 연애해줄래, 원영아?"

태준의 한마디에 원영은 모든 고백을 할 용기를 상실했다. 그의 다정한 미소를 잃고 싶지 않다는 욕심에. 그것이 명백한 기만임을 알면서도.
바다는 어느새 어둠에 휩싸였다. 태준이 원영을 끌어 당겼다. 입술이 맞물렸다. 원영은 눈을 깜밖였다. 이건 꿈일까. 꿈이라면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

태준이 살짝 입술을 떼고 속삭였다.

"눈... 감아야지."

원영은 스르륵 눈을 감았다. 사위는 어둠 속에 잠기고 두 사람은 더 깊게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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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은 이른 새벽 눈을 떴다. 태준의 품이었다. 어느 정도 어둠에 눈에 익자 태준의 턱에 푸르스름하게 올라온 수염이 보였다. 원영은 손을 들어 까슬한 그의 턱을 더듬었다.

"깼어?"

나른한 목소리에 원영은 그의 품에 다시 파고들었다.
맨살의 감촉을 그대로 느끼며 두 사람이 서로를 끌어 안았다. 태준은 미소지으며 원영의 머리 위로 까슬한 턱을 부볐다. 행복했다. 품안의 원영이 사랑스러웠다. 기억을 찾으면 좋겠지만 돌아오지 않아도... 이대로라면 충분할 것 같았다.
"윤화백님이 나 오늘 서울 올라오라고 하셔서... 잠깐 가야 하는데 같이 갈래?"
"나 이제 깐따삐아 알바생이라 안 돼요. 갑자기 빠진다고 하면 동희형은 어쩌고."
"하... 그 알바 하지 말라고 할걸 그랬다."

태준이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원영의 입술을 느릿하게 핥았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원영이 더 이상은 무리야, 중얼거리자 태준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양심 있어."
"...없던데."
"진짜 없어봐?"
"으휴, 진짜!"

미약한 힘으로 태준을 밀쳤지만, 그는 밀려 나는 대신 원영을 더 끌어 안았다.
"진짜 서울 가기 싫다..."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오전 내내 침대 위에서 뒹굴다, 원영의 출근 시간이 되어서야 두 사람은 겨우 일어났다. 원영을 청년몰에 내려주며 태준이 차 안에서 손가락으로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주위를 살피던 원영이 재빠르게 입술 위에 버드키스를 남긴 후 떨어지려던 걸, 태준이 더 빠르게 그의 목을 손으로 감싸고 혀를 얽었다. 생각보다 깊고 짙은 키스에 원영의 목덜미가 묽게 물들었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누가 보든 어쩌라고?"
태준이 코를 찡긋거리며 밤에 보자는 인사를 남기고 멀어졌다. 원영은 멀어지는 차를 보며 한참동안 손을 흔들었다.

"꿈같다..."

아... 사실 이거 다 꿈인가? 원영이 스스로 볼을 꼬집어 봤지만 아플 뿐이었다. 꿈이 아니라서 원영은 다시 덜컥 겁이났다.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어지기 전에 태준이형한테 말해야 해. 원영은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 태준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오늘 밤에 나 꼭 할 말이 있어요. 늦게라도 기다릴게요.'

휴게소에서 원영의 메시지를 본 태준이 최대한 빨리 가겠다는 답장을 하려던 찰나.
"윤태준?"

태준의 이름을 부른 것은 인호였다. 잠시 일정이 있어 귀국한 인호로서도 이 만남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지만 충분히 이용할 가치가 있었다.

"잘 지냈어?"
인호는 마치 어제 본 사람처럼 태준에게 말을 걸었다. 태준은 빤히 인호의 얼굴을 바라봤다. 아는 사람인가?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불쾌한 기분일까? 태준은 공식적으로 기억상실증을 밝히지 않았다. 미디어의 관심도 사절이었고, 어정쩡하게 아는 지인들의 걱정도 싫었으니까.
어정쩡한 지인 중 한명이었을까. 그 정도로 판단한 태준이 옅게 미소지으며 인호의 인사를 받았다.

"잘 지냈지, 그럼."

인호가 갸웃거리며 태준의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

"굳이 앉을 필요까지?"

아, 그럼 그렇지... 인호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어쩐지 윤태준이 받아준다 했다.

"그땐 미안해. 나도 경황이 없어서 말이 심하게 나갔어."
"..."
"그래도 태준아 우리가 5년을 만났는데 너무 차갑게 구는거 아니니?"

허공을 응시하던 태준의 시선이 느릿하게 돌아와 인호에게 머물렀다.
"5년?"
"그래, 5년. 우리 만난게 5년이야. 너한테 가려져 있으면서 나도 괴로웠어. 내가... 이런 선택한게 그렇게 잘못은 아니잖아. 난 몸도 줬는데."

태준은 인호에게 길게 묻지 않았다. 상대에게 긴 말을 들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윤화백으로 충분할 것 같았으니까.
윤화백은 집이 아닌 화실에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가 이제 막 붓을 놓는 중이었다. 태준은 저벅저벅 걸어가 윤화백의 앞에 섰다.

"원영이 일... 아버지가 다 셋팅하신겁니까?"

윤화백은 너무 빨리 다가온 진실 앞에 깊은 한숨을 몰아 쉬었다.
"최인호는 돈 받고 널 떠난 애다."
"...아..."
"난 그저 널 사랑해주는 애 곁에서 네가 안정되기를 바란 것 뿐이다. 아버지로서."
"...진짜 예나지금이나 아버지로선 빵점이시네요. 이런식으로 상황을 이용하시다니. 원영이랑 저 정확히 무슨 사입니까?"
"원영이 그 애가 널 좋아한 건
명백한 사실이야. 그러니 내 억지 부탁을 들어준거고. 너흰 결혼할 사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억지로 결혼 시킬 생각을 하신거겠죠."

태준은 차갑게 돌아섰다. 마음이 분노로 일렁였다. 어젯밤의 기쁨이 비수가 되어 돌아왔다. 윤태준의 사람이 아니었구나, 지원영.
너는... 윤화백님의 사람이었구나.

태준은 원영이 마지막으로 남긴 메시지를 떠올리며 다시 차를 몰았다. 일적인 건은 어찌 되든 상관 없었다.

날 사랑한게 사실이라면... 그래서 할 말이 있다는게 지금 이 이야기라면... 그래도 믿어 주고 싶은 마음이 그에게도 있었다.
분노와 실망의 감정 너머 사랑이 있었으니까. 이미 사랑해 버린 원영을 용서하고 싶었으니까. 이해해 보고 싶었으니까. 윤화백과의 일을 고백한다면... 넘어가 주고 싶었다. 새롭게 시작하자고 해볼까. 하지만 끝내 말을 하지 않는다면...
"형이 안 믿어 주면 어쩌지..."

진실을 안 태준을 알지 못한 원영은 정원을 오가며 시름에 잠겨 있었다. 오늘만... 오늘 하루만 더 미루자. 형 피곤할텐데, 그냥 오늘은 일찍 자자고 하자. 두려움이 삼켜버린 용기가 곧 일어날 일을 알리 없었다.
"왔어요?"

대문이 열리자 원영이 정원을 가로질러 쪼르르 태준에게 달려 안겼다. 태준은 원영의 등을 한 번 쓸어주고는 그를 떼어냈다. 낯설지만 익숙하기도 한 태준의 표정. 원영은 덜컥 겁이 났다.
"우리 6개월 정도 만났다고 했지?"
"네...? 아, 네..."
"나 휴게소에서 우연히 대학 선배 만났거든. 나한테 애인 있던거 모르던 눈치던데."
"그게... 말을 안 하고 다녀서..."
"그렇구나."

기대감이 어려있던 태준의 눈이 서늘하게 식었다.
"좀 씻어야겠다."

태준의 등을 보며 원영은 불안함에 휩싸였다. 그의 방에라도 따라 들어가 지금이라도 하려던 말을 해볼까. 자기 방문 앞에 서서 잘근 이를 깨물던 원영의 눈앞에서, 문이 벌컥 열리며 태준이 그의 두 팔을 결박하고 침대 위로 밀어 넘겼다.
"형?"
"윤화백한테 이야기 다 듣고 왔어. 우리가 무슨 사이였는지 전부 다. 언제까지 속일 생각이었는데? 그래도 난! 지금이라도 네가 이야기하면 다시 생각해보려 했어. 말 못할 사정이 있진 않았을까, 네가 하려던 말이 이건 아니었을까. 근데 넌 결국... 내가 아닌 윤화백의 거짓말을 선택한거야."
"아니... 그게 아니고, 겁이 나서 그랬어요. 다 말하고 나면 형이랑 헤어질까봐. 형이랑 헤어지는게 무서워서."
"생각보다 빨리 넘어오니 기회다 싶었니?"
"형..."
"다 거짓말... 이제 난 어디부터가 네 계획이고, 어디까지가 네 진심인지 모르겠어."

원영의 얼굴 위로 태준의 눈에 맺혀 있던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태준은 원영을 결박한 두 손을 풀고 뒤로 물러섰다.

"형..."
"지원영씨, 우리 다신 보지 맙시다."

단호하게 선을 긋는 태준의 등을 보면서도 원영은 끝내 그를 붙잡지 못했다.

이렇게 될거란 것을 알았으면서, 바보 같은 지원영.

닫힌 문 앞에서 원영은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한 원영이 태준의 방문앞에 서성거리다 문을 두드렸지만 대답을 듣지 못했다.

"형...?"

텅 빈 방만이 원영을 맞이할 뿐이었다. 원영은 눈물을 삼키며 방으로 돌아가 캐리어 손잡이를 잡았다.
이대로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여기에 있을 수도 없어서.

"저 잠깐만 그릇집 좀 다녀올게요."

출근한지 얼마 안된 시간에 자리를 비우는게 마음에 걸렸지만 원영으로선 간절했다.
"형!"
"내 말... 못 알아 들었어? 다신 보지 말자고 했을텐데."
"제 얘기도 한번만 들어주세요. 전부 다 제 잘못이예요. 윤화백님 제안... 거절할 수 있었는데 형이랑 같이 있고 싶은 마음에 거절 안 했어요. 형이 마음 열어줄수록... 빨리 사실을 말했어야 하는데.. 말 못한건데 제 잘못이예요.
정말 그랬으면 안 되는거였는데... 다 변명으로 들리겠지만... 형에 대한 내 마음은 다 진심이었어요. 형이 너무 좋아서... 너무 좋아서 그랬어요. 영영... 이런 기회가 나한테 오지 않을까봐. 욕심이 나고, 욕심을 내보니까 정말 좋고... 가져보니까 잃을까봐 겁이 나서."
"욕심이 좀 과하네.
곁에 붙어 있으면서 기회를 보자... 하고 작전을 바꾼거야? 연기하지마. 돌이키기엔 너무 늦었으니까."

원영의 젖은 눈이 태준에게 머물렀지만, 태준은 얼굴을 돌렸다. 그리고 원영의 전화가 울렸다.

윤화백이었다.

"화백님이시네... 전화 받아. 그리고 네 자리로 돌아가.
그 자리가 어디었든... 내 옆자리는 아닐테니까. 나는 네가 죄책감을 느꼈으면 좋겠다."

원영은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태준의 시선이 끝내 자신에게 머물지 않아서. 그의 말이 너무도 차가워서. 한번도... 윤태준의 옆자리가 지원영의 자리는 아니었다는 말이 서러워서.
"원영아, 너 왜 그래?"

터덜터덜 카페로 돌아온 원영이 결국엔 또 다시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원영아, 괜찮아? 너 왜 그래? 차주헌이 뭐라 그랬는데?어?"

동희가 화난 얼굴로 따지려는 듯 일어서는 걸 원영이 울며 붙잡았다.
"아니예요. 제가 잘못했어요. 제가 거짓말 했어요... 흐흡."

동희는 눈물을 쏟는 원영을 토닥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으니까. 태준과 원영의 사이가 끝났다는 걸.
서울로 돌아온 원영은 기다리던 태평그룹의 입사 합격 문자를 받았지만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강릉에서 소식을 들었더라면 필시 포기했을 입사였다.

하지만... 이제는 돌아갈 태준의 품이 없었으므로 그는 입사를 결정했다.
'태준이형 오늘 가게 나오셨어요?'
'태준이형 밥은 잘 드세요?'
'태준이형 괜찮으세요?'

동희는 서울로 올라가서 새로운 생활을 하면서도 매일 같이 오는 원영의 문자에 꼬박꼬박 답장을 줬다. 애가 탄 이 마음을 너무도 잘 알 것 같아서.
태준과 가까워진 것은 원영 덕이었는데. 이제는 원영이 자신에게 그의 안부를 묻고 있었다. 차주헌이 윤태준이란 사실도 원영이 떠나기 전 한 부탁을 통해 미리 알았는데. 원영이 떠나자마자 귀신 같이 사람들이 윤태준 작가를 보러 창립몰을 찾아 들었다.

"시나몬 라떼 한 잔."
카페로 들어와 익숙하게 커피를 주문하는 태준을 대놓고 노려봤지만, 그는 덤덤한 얼굴이었다.

"아직도 화났구나. 사정이 있었다니까."
"원영이는? 사정이 없었을 것 같아?"
"이번이 처음이었으면... 믿으려고 했겠지. 5년을 만났어도 깨지는게 믿음이야. 근데 겨우 몇달..."
원영이 떠난 자리, 태준의 기억은 자연스레 그를 찾아 돌왔다. 아무런 노력 없이도. 자길 향해 좋아한다고 말하던 원영의 얼굴이 먼저. 그 이후에 인호가 상처 주던 순간같은 것도. 인호가 그리운 것은 아니었다. 기억을 찾은 후에도 그에 대해선 그닥 큰 감정이 들지 않았으니까.
자꾸만 원영이 미워질 뿐. 감정이 자꾸만 엉켜 들었다. 집안 거실에 혼자 앉아 있는데도 자꾸만 원영이 들리고 보여서. 침실에 있던 아카시아향 방향제를 쓰레기통에 던졌다가 그걸 다시 꺼낸 날도 있었다.

"윤태준... 뭐 어쩌고 싶은거냐...?"
원영을 안던 밤, 태준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였다. 그런데 그 행복이 다 거짓이었다니. 그래서 용서가 더 되지 않았다. 진실을 말해주지 않던 그 입술이 미웠는데. 태준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도 원영의 얼굴이 아른거렸지만.
원영이 입사하고 얼마 되지 않아 윤태준 작가의 도록 촬영 일정이 태평갤러리에 있었다. 윤태준이란 이름을 듣는 순간 원영의 마음이 요동쳤다.

"신입들, 오늘 야근 당첨."

거절할 명분 같은 것도 없었지만... 태준이 너무 보고 싶어서 원영은 회사에서 보내주지 않아도 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갤러리에서 지원을 나가 일을 하던 원영의 귓가에 태준을 향한 인사가 들렸다.

원영은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경직된 몸을 겨우 움직이자 태준과 눈이 마주쳤다. 태준의 시선이 싸늘했다. 왜 네가 여기 있느냐고 묻는 것 같았다.
먼저 시선을 돌린 쪽 역시 태준이었다. 원영의 심장이 지끈거렸다.

일하자, 지원영... 집중해보려 했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아, 오늘 최인호 작가 촬영도 있다던데. 그것도 운영팀에서 조금만 도와달래."

박대리의 말에 원영이 겨우 표정 관리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인호와의 일은 이미 잘 알았다. 윤화백에게 듣기로는... 태준은 기억이 돌아왔다고 했고, 그렇다면... 굳이 만나서 좋을게 없을 것 같아 원영은 재빨리 태준의 대기실 이름을 바꿔 끼웠다.

"태준이형 지금 나 때문에 충분히 힘들거든요, 최인호씨... 이해 부탁합니다."
원영의 노력으로 인호는 태준을 마주하지 못했다. 원영은 인호가 지나간 태준의 대기실 앞에 섰다.

몇번의 심호흡 후 똑똑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요."

비스듬히 의자에 기대 눈을 감은 태준의 모습은 한폭의 그림 같았다. 여전히 두근거리는 자신이 바보 같았다.
"태준형... 원영이예요. 저 태평그룹 다니는데... 업무 지원왔어요. 형 온다고 해서 온 거지만."
"..돌아가."
"잠시만..잠시만 이야기 해요.나... 형이 용서해줄 때까지 진짜 노력할거예요."
"노력이든 뭐든 하지마. 용서도 감정이 남아 있을 때 하는거니까. 난 지금 너한테 아무런 감정도 없으니까."
"태준이형..."
"화가 안 났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이해해보려고 마음 먹었고 그렇게 하는 중이야. 근데 난 네가 왜 이렇게 미련을 남은 얼굴을 하는걸까. 더 할 거짓말이 있는걸까... 그런 생각만 계속 든다. 나가, 이제 쉬고 싶어."

차가운 축객령에 원영은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차갑게 닫혀 버린 문이 태준 같아서 원영은 스르륵 문에 머리를 기댔다. 억울했다. 서러웠다.

거짓말을 한건 사실이지만... 마음만큼은 언제나 진실이었는데. 진심인데. 지금도 형을 너무 사랑하는데.
원영은 눈물을 훔치며 바로 섰다. 일을 마친 태준이 차를 타러 나올때까지 기다려 성큼 그에게 다가서 그의 팔을 붙잡았다.

"무슨 짓이야, 이게?"
"미친 짓인 줄 알아요, 이렇게라도 해야 봐 줄 것 같아서..."
"사람 질리게 하네."
태준의 차가운 눈빛과 날이 선 문장에 원영은 주춤거리며 손길을 거뒀다.

태준과 함께한 꿈같은 시간에서 깨어날 시간이었다.
원영은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조차 기억이 잘 나질 않았다. 몇번의 자동차 경적 소리와 욕을 들은 것도 같았는데 시야가 흐리면 청력도 잘 안 들리는걸까. 스르르 무너지듯 스러진 원영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 흘렀다. 원영은 소리 없이 무너지며 흐느꼈다. 어째서... 기회를 줄거라 기대했을까.
애초에 그런 거짓말을 해선 안되는거였는데. 원영의 베개가 축축하게 젖어갔다.

원영은 그저 모든게 버거웠다. 질린다던 태준의 눈빛과 언어가 아직도 원영의 심장에 달려 있었다. 끊어내고 싶은데 끊어지지 않았다.
강릉으로 돌아온 태준은 원영이 없는 일상에 적응하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그렇게 차갑게 말을 한 후, 운전을 하며 내려 오는 내내 몇번이고... 원영의 얼굴을 곱씹었다. 상처 받은 얼굴. 내가 너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사람인걸 나는... 확인 하고 싶었던걸까.
버석거리는 마음 한 구석과 시간이 지날수록 채워지지 않는 허기에 태준은 서서히 메말라갔다.

"원영씨... 안 보고 싶은거 확실해?"

점토 작업에 집중하던 태준을 무심하게 스치듯 지나며 선배인 건희가 물은 순간. 태준은 치대던 점토를 손에서 떼어냈다.
"무슨 말을 하는거야, 갑자기?"
"너 계속 날 서 있잖아. 점토는 무슨 죄가 있다고 그렇게 패대기를 치는데?"
"할 일 끝났으면 집에나 가요."
"너 스스로를 좀 돌아봐라, 태준아."
"...윤화백님이랑 짜고 거짓말한건 형도 마찬가지야."
"그래, 나도 마찬가진데 왜 나는 보고 원영씨는 안 보는데?"
태준은 입을 꾹 다물었다. 어둠 속에 창가에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원영이 이 곳에 놀러와 이 자리에 앉았던 순간이 떠올랐다.

"뭐보는데?"
"아... 아무 것도 아니예요."

수줍게 웃던 얼굴. 너는... 나를 보고 있었구나. 지끈, 태준은 통증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이 통증이 말하는 바를 알았다.
그리움. 윤태준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 지원영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걸.

"정신 차려, 윤태준."

태준은 애꿎은 점토를 던지듯 치대며 원영의 생각을 떨치려 애를 썼다. 끝났다고, 끝나버린 사이니까 이제는 잊어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끝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울며 보낸 밤, 원영은 애써 몸을 추슬렀다. 시련을 당했다고 연차를 낼 순 없으니까. 감당해야 되는 현실을 피할 수도 없으니까.

'난 꼭 너희 결혼 성사시킬거다.'

윤화백의 메시지였다. 다 끝났는데... 이제와 어쩔 생각이실까.
원영은 이미 모든게 버거웠으므로 윤화백의 메시지에도 달리 답장을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태준의 차가운 말과 시선이 두려웠다. 더 사랑하는 자도 아닌 혼자 사랑하는 자. 지원영이 하는건 짝사랑이니까. 지독한 짝사랑.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 잘못을 빌어도 돌이킬 수 없다면...
그게 상대를 질리게 하고 힘들게만 하는거라면... 용서를 강요하는 것도 폭력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리고 그게 스스로를 향한 감정적인 폭력이란 생각도 들었으니까. 그 몇달의 생활로 만족하자, 지원영. 처음부터 네 것이 아니었던 것이니까.
"윤태준 작가 저번에 봤지?"
"네."
"이번에 사내 도예클래스 제안해봤는데 그쪽에서 찬바람이 쌩쌩 불어서. 직접 가서 설득한번 해보고 와. 실력 보여줄 기회야, 원영씨."

기획안을 내밀며 사람 좋게 웃는 상사를 보며 원영은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제가요, 그 사람한테 거짓말을 했어요, 좋아한단 이유로... 너무 많은 것을 속였어요. 그래서 절 보면 싫어할텐데.

원영은 하고 싶은 말을 꾹꾹 삼키며 기획안을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강릉에 가는걸 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작업실에 도착하자 건희가 익숙하게 원영을 맞았다.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어요?"
"태준이 만나러 왔어요?"
"네..."
"원영씨... 이만 태준이 포기하는거 어때요?"

자리에서 일어서는 건희를 보며 이제는 정말 그럴거라고 대답하려던 원영은 휘청거리는 그를 본능적으로 감싸느라 미처 제대로
대답을 돌려주지 못했다.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에 놀라 안에서 튀어 나온 태준이 두 사람에게로 온 몸을 숙였다.

"선배? 선배! 지원영?"
"걱정마요. 갑자기 정신 잃고 쓰러지셔서..."
"너는 괜찮아?"

태준이 소리치자 원영이 그와 눈을 마주쳤다.

"저는 진짜 괜찮아요. 빨리 병원 모시고 가요."
건희는 생각보다 빨리 깨어나 괜찮은 얼굴을 보였지만 예상치 못한 재회에 태준과 원영은 어색하게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뭐라 말을 해야 할지 태준은 머뭇거렸고, 원영은 아무말도 하지 않으려 입을 다물었다.

"그나저나 당장 어쩌냐, 작품 마감이 당장 얼마 안 남았잖아?"
"선배 치료나 신경써요."

두 사람의 대화를 걱정스레 기웃거리던 원영이 용기를 내 끼어 들었다.

"제가 도와 드리는거 어떨까요? 저 어차피 할 일 없는데."
"넌 치료부터 받아."
"괜찮은데."

태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원영의 손목을 잡아끌었다.태준이 감싸쥔 손목에 원영은 또 다시 울 것만 같았다.
"반창고까지 붙일 필요 없었는데."
"선배 일은 고마워."
"일... 내가 도와줄게요. 급한거 맞잖아요. 나 그 정도 눈치는 이제 있는데."
"...정말 이런 부탁하고 싶지 않았는데... 지금 좀 난처한 상황이라. 그럼 좀 도와줄래?"

원영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번에 보는게 마지막일텐데
그에게 남는 자신에 관한 기억이 도움이 되는거라면... 거짓말쟁이 보다는 덜 최악이 될테니까.

"옷 갈아 입고 와."

태준이 작업복을 내밀고 돌아서자 원영이 천천히 옷에서 나는 그의 체향을 맡았다. 그를 끌어안고 숨을 들이키면 나던... 약한 아카시아향이 여전해서 원영은 자꾸 울고 싶었다.
돌아본 태준이 원영과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이번에도 먼저 자리를 피한건 태준이었다.

태준이 부탁한 일을 끝낸 원영이 가마터 앞을 지키는 그에게로 다가갔다. 불에 가까이 가려는 태준의 옷자락을 붙잡자 그가 영문을 모르는 표정으로 원영을 바라봤다.

"다칠까봐..."
팔의 화상을 다듬던 원영의 손길이 떠올라 태준은 고개를 숙였다.

'아팠겠다...'

다정하게 속삭이던 목소리. 사랑스럽게 올려다 보던 얼굴. 당연하게 윤태준의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뭐가 그리 화가 났을까.
네가 거짓말을 해서? 윤화백이 시킨대로 한거라서? 나한테 진실을 말하지 않아서? 정말 그게 다였을까.

"태평그룹에서... 제안한게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온거야?"
"아... 맞긴한데 이거 도와준건 그런거 때문 아닌데."
"기획안 한 번 보자."

원영이 와락 얼굴을 구기며 속상한걸 숨기지 못했다.
태준에게 아무런 대꾸도 없이 휙 돌아서자 당황한 그가 원영을 붙잡았다.

"왜 그러는데?"
"뭐가요?"
"화났잖아, 지금."
"제가 화낼 주제나 되나요? 그것 때문에 도와준거 아니라고요. 어차피 제 말 안 믿으시겠죠? 어차피 내 말 안 믿으니까, 형은..."
"그냥... 도와주고 싶어서 그랬어.
고마우니까. 지금 그거 필요한 것 같아서 그런 건데."
"나한테 필요한거 그거 아니라구요!"

원영은 처음으로 태준에게서 먼저 고개를 돌렸다.

"좀 쉴게요."

돌아서는데 구차한 감정이 휘몰아쳤다. 본디 짝사랑이 구질구질한거라지만... 너무 비참해서.
작업실 한켠 구석에서 깜밖 잠이 든 원영이 눈을 뜨자 맞은편에 태준이 의자에 그림처럼 앉아 있었다.

'사람 질리게 하네'

그 말을 하던 날도 대기실에 저렇게 앉아 있었는데.

"나요... 형이 미워죽겠는데... 형이 너무 좋아요. 진짜 미치도록."
원영의 그림자가 태준의 그림자 위로 조심스레 겹쳤다 떨어졌다.

원영은 천천히 작업실을 걸어 나왔다.

윤태준, 안녕.

형이 기억하는 마지막 나는... 그래도 필요가 있는 사람 정도였으면 좋겠습니다.
태준은 천천히 눈을 떴다. 입술 위로 원영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손을 들어 입술을 매만지다 그는 일어나 밖을 나갔지만 원영은 이미 택시를 타고 떠난 후였다.

잡아서, 너를 잡아서...뭘 어쩌고 싶은걸까, 나는.

태준은 마른 세수를 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후에 그때라도 잡았어야 한다 깨닫지만.
'원영씨 우리 와이프가 너무 고맙다고 식사 대접 하고 싶다는데. 주말에 시간 되나요? 참고로 태준이도 옵니다.'

건희의 문자에 원영은 쓰게 웃었다. 태준이 온다면 가고 싶었지만, 태준이 와서 가고 싶지 않았다. 가봤자... 상처만 잔뜩 받겠지. 날이 선 시선을 받는게 이제는 버겁고 힘들었다.
'말씀 감사합니다. 그런데 한동안 일이 바빠서 못 갈 것 같아요. 마음만 받겠다고, 정말 감사하다고 꼭 아내분께도 전해주세요.'

원영은 고개를 들었다. 하늘이 시리도록 새파랬다. 기획안도 결국 성사시키지 못했으니까 회사에서도 한소리 듣겠지만... 되려 다행인가 싶기도 했다.
태준이 가까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자꾸 근처를 맴돌게 될테니까. 이제는 정말 그와 헤어지기로 마음 먹었으므로 원영은 휴대폰에서 그의 번호를 지웠다. 자신의 번호를 바꿀까도 생각했지만.

어차피 형은 나한테 절대 먼저 연락 안할거야.

윤태준에게 지원영은 지워 버린 사람일테니까.
"원영씨 우리집에 초대했는데 안 온다더라?"

태준과 작업을 함께 하다 잠깐 쉬는 시간, 건희가 먼저 운을 띄웠다.

"난 솔직히 너네 잘 됐으면 해서... 원영씨한테 너 온다고 말도 흘렸는데 안 온다고 하던데."
"헤어졌다니까. 헤어진 것도 아니지, 애초에 사귄 적이 없는데."
"정말 없어?"
"뭐가?"
"정말 사귄 적 없냐고. 너 강릉 와서 원영씨랑 한거 사랑 아니었냐? 난 그거 사랑으로 봤는데."

태준은 대답 대신 커피를 마시며 허공을 응시했다. 자길 바라보던 원영의 반짝이던 눈이 떠올랐다. 형, 태준이형, 자길 부르며 강아지처럼 뒤를 졸졸 쫓아다니던 여상한 나날들.
"...고맙다고 오라고 한건데 나 때문에 안 온 것 같으니까 내가 말해볼게. 마음 불편하기 싫네."

건희가 다 안다는 듯 씩 웃었지만 태준은 슥 시선을 피해 다시 작업실 안으로 들어갔다.

원영이 보고 싶었다. 그게 지금 윤태준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핑계를 대서라도 보고 싶은 마음.
"원영씨 대단하네? 윤태준 작가 그 기획안 받아드려서 한다고 연락왔어?"
"네?"

퇴근을 준비하던 원영을 향한 상사의 칭찬에 사무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아니, 죄송하다고 나한테 그러더니... 깜짝 선물 주고 싶었던거야?"
"그게 아니라.."
"이번에 진짜 잘 했어, 원영씨. 내가 고과에
제대로 반영할테니까 걱정마."

원영은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기획안을 태준이형이 한다고 했다고?

"당장 이번주 금요일 기획안 회의로 올라오기로 했으니까 알고 있어. 물론 갤러리 쪽에서 이런저런 준비는 할거고, 우리 총무팀쪽에서 할일들은 원영씨가 정리하면 되고."
정말 보고 싶지 않은데.

"다른 분이... 하는건 어떨까요?"
"에이, 원영씨가 해낸 일인데. 그건 가로채는거지. 왜 그래, 여기까지 잘 하고."

원영은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고 싶은 것만 할 수는 없는 세상이지만, 잔인하게 차인 상대와 일을 해야 하는 건... 너무 잔혹한 일이었다.
"오늘이 오는 날이네..."

원영은 달력을 바라보며 태준이 서울에 왔음을 가늠했다. 같은 서울 하늘 아래, 태준이형과 있구나. 태준이형은 이 일 왜 한다고 했을까.

복잡한 마음으로 터덜터덜 1층으로 내려온 원영은 문밖으로 태준을 마주했다.
곁에는 인호가 함께였다. 인호는 다정하게 태준을 향해 웃었고, 태준은 그가 열어주는 택시 뒷좌석에 함께 타는 모습까지. 원영은 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5년의 연애. 내가 애초에 끼어들 틈 같은게 있을리가 없겠지. 돈을 받은 저 사람은 용서할 수 있을만큼 사랑했지만, 거짓말을 한 나는
용서할 수 없을만큼 이겠지. 사랑이었던 적 없었으니까. 모두 착각으로 한 행동일 뿐일테니까. 나를 사랑했다는.... 내 거짓말로 인한 형의 착각.

원영은 질끈 눈을 감았다 떴다. 문밖에는 더 이상 태준도 인호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정말 지원영의 인생에서 윤태준을 밀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는 살 수 없어서, 심장이 찢어질 것만 같아서. 너무 아파서. 잘못을 한건 스스로라는 걸 알면서도 윤태준이 미워져서.

사랑한만큼 엄청나게 미워져서.

사랑과 미움이 고스란히 비례했다.
태준은 갤러리에 도착하자마자 원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긴 신호음과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메시지가 반복됐다.

"내 전화 안 받은 적 없는데..."

태준의 중얼거림을 들으면서도 인호는 곁을 배회했다.

"궁금하네... 5년 만나면서도 한번 본 적 없는 얼굴인데."
"나 형한테 아무 감정 없어, 좀 가."
"하..."
"그냥 있든가."

인호를 무시한체 태준은 끊임없이 원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회의를 목전에 두고도 태준이 뚫어져라 전화기만 노려보고 있어 주위에선 다들 눈치를 볼 정도였지만, 태준은 그걸 신경쓸 여력조차 없었다.
원영은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온 전화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지웠지만 아는 번호. 늘 외우던 번호. 지운게... 아무 의미도 없는 번호.

무슨 일로 태준이 전화를 하는 것일까. 인호와 함께 새출발이라도 한다는 이야기일까? 그걸 말해주고 싶어서?

잔인하고 나쁜 윤태준. 그런데도 내가 너무 사랑
하는 윤태준.

'나 서울이야. 건희형네 초대 거절했다고 들었어. 바쁜거면 내가 기다릴테니까 같이 가자. 답장 줘.'

한참전에 온 메시지를 뒤늦게 봤지만 그렇다고 다른 생각이 들진 않았다. 나한테 도움 받은 걸 반드시 갚고 싶어하는건가 보구나, 태준이형은.
내가 원하는건 그냥 형인데. 형이 포기가 안 되서 그랬던건데. 아무리 원하는게 그게 아니라 말했다 한들 들리지 않았겠지, 내 말 같은거... 내 진심 같은 거...

"여보세요."

원영은 잠긴 목소리로 겨우 전화를 받았다. 그대로 두면 배터리가 다 닳아 전화가 꺼져 버릴 것 같았지만...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이 있다면 지원영은 들어야 하는 입장이었으니까. 철저한 을, 그게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전화 왜 이제 받아? 내 메시지 못 봤어?"
"봤어요."
"그럼 답장이든 전화든 해줬어야 하는거 아니야?"
"형은... 한번이라도 답장 해줬어요? 내 전화도 다 안 받았잖아요."
"알겠어. 다 알겠으니까... 건희형네 같이 내려가자."
"싫어요, 안 갈래요."
"왜?"
"그냥... 내가 형을 보고 싶지가 않은데요."

쿵, 태준의 심장이 떨어져 내렸다. 원영에게서 들을거라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문장인 탓이었다.
'사랑해요, 형.'
'나 형이 너무 좋아요.'
'태준이형!'

언제나 다정하게 웃으며 먼저 손을 뻗던 얼굴이 전화기 너머 차갑게 선언하고 있었다. 지원영은 윤태준이 보고 싶지 않다고.

태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원영은 태준이 뭐라도 대답해주기를 바랐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는 자신의 말에 조금이라도 그가 상처 받았다면 위로가 될 것도 같았다. 하지만 원영은 그가 상처 받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다.

태준과 원영의 관계에서 상처를 줄 수 있는 사람은 윤태준 뿐.

지원영은 그럴 수 없으니까.
뭐라 대답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전화기를 붙들고 멍하니 서 있던 태준을 깨운건 원영의 이어진 한마디였다.

"이제 우리... 다시 보지 마요."
태준은 원영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 받으면서야 깨달았다.

윤태준은... 지원영을 사랑한다.

윤태준은 지원영을 안 보고는 살 수 없다.

다시 보지 말자는 말이 지독하게 아픈 말이었다는 걸.

태준은 그제서야 알았다.
"미안합니다. 회의 다음에 하죠."

회의를 박차고 나간 태준이 무작정 원영의 회사로 향했지만 그가 이미 퇴근을 한 후라는 대답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태준은 비겁하다는 걸 알면서도 권력을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윤태준 작갑니다, 일 때문에 지원영씨랑 연락을 좀 하고 싶어서요."
비겁하다는 걸 잘 알았지만 지금 그걸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조급증이 일었다. 보지 말자는 원영이 그대로 사라질 것만 같아서. 이대로 사라지면 찾을 방법 같은 거 없을 것 같아서.

윤태준이 지원영에 대해 아는게 아무것도 없어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태준은 원영의 상사로부터 그가
아직 회사에 있는 것을 확인 받았다.

너는 정말 내가 보고 싶지 않은 거였구나, 그래서 이 건물 안에 내가 있는 걸 알면서도... 거부한거야.

태준은 안쪽에서 나온 경비과장을 따라 그룹 안쪽으로 들어섰다. 태준에게 안내를 끝낸 그는 목례 후 사라졌고, 태준은 엘리베이터가 멈추기만을
기다렸다. 원영이 야근하고 있다는 층까지 가는 동안 흐르는 시간이 억겁 같았다.

"지원영."

원영은 처음엔 환청인가 생각했다. 이 공간에서 태준으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리 없을테니까.

"원영아."

두번째로 그 이름을 들었을 때는 더 그랬다. 태준이 그렇게 다정하게 자길 불러 줄리 없으니까.
"나 좀 봐."

태준의 손이 자신의 어깨에 가 닿고, 그의 완력에 의해 몸이 돌아서야 원영은 그게 환청이 아님을 깨달았다.

"왜..."
"나 밑에서 너 찾았는데, 왜 없다고 거짓말했어?"
"..그거 따지고 싶어서 왔어요?"

거짓말. 지긋지긋한 거짓말. 나를 당신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 내 모든 거짓말들이
버겁기만 한데. 그래서 안 보려고 했던건데. 원영이 태준의 시선을 피해 얼굴을 떨어트렸다.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아 입술을 깨물었다. 우는 모습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굳이 이렇게까지 찾아와야 할 이유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이 있다면 결국엔 다 들어줘야 하는거겠지.
"무슨 일로 오신건데요?"
"일단 얼굴 보고 이야기 좀 해."

태준이 자신의 손목을 조심스레 잡으려는 순간 원영은 주춤 뒤로 물러났다. 원영은 단 한번도 태준의 손길을 거부한 적이 없었다. 태준의 손이 갈곳을 잃고 허공에서 멈췄다.
"이야기 좀 하자고, 제발."
"하세요."
"내가 왜 보고 싶지 않은데?"
"..."
"말해줘."
"나 안 보면 좋은거 아녔어요? 원하던 거잖아요."
"이해가 안 가서 그래. 왜 내가 보고 싶지 않은지. 너무 갑작스럽잖아. 너... 나 포기 못하고 있던 거 아니었어?"
원영이 고개를 들어 태준과 눈을 마주봤다. 원영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태준은 내심 안도했다. 너는 여전히 나를 사랑해. 그렇지, 원영아? 사과를 받아 준다고 말하기만 하면 원영이 당연히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면서. 태준은 다시 물었다.

"왜 내가 보고 싶지 않은데?"
"오늘 최인호씨랑 나란히 택시 타는 거 봤어요. 내가 한 거짓말은 절대 용서가 안 되고, 최인호씨가 한 행동들으 용서가 되는 거잖아요. 5년간 나눈 감정을 내가 이길 수 있을리가 없겠죠. 너무 당연한건데 비참했어요. 비참해서 형 목소리도 듣기 싫었어. 그게 그렇게 형한텐 궁금할 일이었어요? 이렇
게 나한테 직접 들어서 속 시원해요? 나! 나요... 형 포기가 정말 안 됐어요. 이대로 포기하고 싶지 않았는데! 최인호씨랑 나란히 택시 타는 형 얼굴 보고 깨달았어. 형 얼굴이 너무 편해보여서... 나한테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형 얼굴은 뭐였더라 떠올렸는데... 기억이 안 났어.
분명히 우리 같이 지낸 시간동안 웃어주던 많은 날이 있었는데도! 나한테 마지막으로 어떤 표정 지었는지는 기억이 하나도 안 날만큼... 그랬어요, 오늘... 내가. 그니까 나는..."

끝내 원영은 눈물을 숨기지 못했다. 태준은 말을 잇지 못하는 원영을 와락 끌어 안았다. 그의 질투가 못내 기뻐서.
"오해야, 원영아. 그건 있잖아. 걔도 태평그룹내 도예클래스를 하는 모양이야. 근데 내 회의가 있다는걸 어떻게 알았는지 따라온거야. 그래서..."

눈물을 삼키던 원영이 태준을 밀어냈다.

"그런거 왜 설명해요, 나한테?"
"그러니까 난... 네가 날 안 보겠다고 하니까 알겠더라."
"뭘요?"
"내가 너한테 원한건... 사과가 아니라 연애구나 라는걸."

태준이 손을 뻗어 원영의 손가락 끝을 다정하게 매만졌다. 그와 손을 꽉 맞물리려는 순간, 원영의 손이 스르륵 태준으로부터 빠져 나갔다.

"...난 형이랑 연애 못해요."
"뭐? 그게 무슨..."
"윤태준은 지원영 사랑 안 하잖아."
"아니야!"
"윤태준이 지원영 사랑한다고 착각했던 것 뿐이잖아요."
"아니야, 원영아. 그래, 물론... 네 거짓말에 상처 받았고, 너한테 상처 주고 싶었어. 심지어 그 거짓말이 내 아버지인 윤화백한테서 나온거라는 거 알았을 땐
배신감도 너무 심했어. 네가 내 사람이길 바랐으니까."

원영은 말이 없었다.

"원영아."
"아니야... 다 거짓말."
"진심이야."
"그랬으면 나한테 안 그랬어, 형은... 진짜 나 사랑하게 된거였으면 내가 거짓말 한거 알았어도 분명히 기회 줬을거야. 그렇게 매몰차게 그렇게 못했어요."
"내가 심한 말 했던거, 심한 행동 했던 거 알아. 그거 내가 다 미안해. 미안하니까..."
"형은!"
"..."
"형은 아는거야. 형이 이렇게 말하면 내가 쉽게 용서할만큼 형을 사랑한다는거. 형이 함부로 해도 나는... 형 거부 안 할거라는거. 다 받아줄거라는거!"
"원영아..."
"근데요, 형... 나 이번에 깨달았어요. 최인호씨와 일? 그래요, 그거 오해해서 일부러 날서게 말한거 맞아요. 근데... 그 일이 아니었어도 나 형 안 봤어."
"그게 무슨 말이야?"
"작업 도와주던 그 날 밤에, 내가 형한테 키스할 때요... 형 깨어 있었죠?"

태준의 눈이 흔들렸다. 그걸 알
고 있을거라곤 생각하지 못해서.

"...형이 깨어 있단거 알면서 키스한거야, 나도. 형이 밀쳐내도, 안 밀쳐내도 상관 없었어요. 그때 이미 나는 형 안 보기로 마음 먹었거든요. 다신 안 볼거라고. 이렇게... 결국 보게 되버렸지만... 나 이제는 진짜 형 그만 보고 싶어요."
"아니야... 그거 진심 아니잖아, 지원영. 너 나 사랑하잖아."
"맞아요, 나 형 사랑해요."
"다시 시작해, 우리."
"다시?"
"그래, 처음부터 다시."

태준이 이번에는 원영의 손을 꽉 잡았다. 태준에게 단단히 잡힌 원영의 손이 희게 질릴 정도로.
"틀렸어요, 형."
"뭐가?"
"우리 다 틀렸다고. 형도 나도 다 틀렸어. 난 이제 윤태준 사랑하는거 그만하고 싶어."
"아니야, 너 그거 그만 못해."
"형이 이러는거... 그냥 소유욕에 아집같은거야. 지금도 내가 형한테 매달리고 있다고 생각해봐요. 이렇게 굴었을까?"
다시는 보지 말자던 태준의 얼굴을 떠올리며 원영은 눈을 감았다.

태준이 눈 앞에 있는데도 고통스러웠다. 심장이 미어지다못해 모두 불타 재가 되버릴 것만 같았다.

차라리 멀리서 짝사랑할때가 좋았는데.
결혼하라는 윤화백님 말에 좋다고 말하지 말걸.

그러면 윤화백님도 형이랑 나랑 연인 사이었다는 거짓말 해달라는 제안 같은 것 하지 않으셨을텐데.

그냥 멀리서 계속 짝사랑만 할걸.
원영은 태준의 다정한 손길 하나하나를 기억했다. 다정함, 온기, 눈빛. 연인에게 보여주는 유일한 것들을.

그래서 이제는 그걸 잃는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를 잘 알았다.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어리석은 지원영.

이제는 정말 그만하고 싶었다.

"우리 이제 정말 헤어져요."

원영과 태준의 시선이 또렷하게 교차한 순간.

그는 태준을 바라보며 한치의 흔들림 없이 이별을 선언했다.
[태준원영] 거짓말을 부탁해 02 posty.pe/hdqy36 #태준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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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어, 안돼."

본능적으로 튀어나온 말과 다르게 놓쳐버린 원영의 손. 태준은 허공에 떠 있는 제 손과 놓쳐버린 원영의 손을 바라봤다. 원영은 태준으로부터 한걸음 뒤로 물러 서다, 이내 완전히 돌아서 버렸다.
태준은 휘청거리며 데스크 모서리를 부여 잡았다.

원영이 이별을 선언했다. 원영이 등을 보였다. 자신을 거부하던 그의 모든 문장들의 태준의 안을 떠돌았다. 내가 너를 거부하는 문장을 내뱉던 모든 순간들이 너도 이토록 아팠을까? 상심한 마음을 가누지 못하며 태준은 허청거리며 텅빈 사무실을
빠져 나왔다. 주변을 달려봐도 원영은 모습을 감춘지 오래. 태준은 집으로 돌아와 원영이 쓰던 방문을 열었다. 텅 비어 버린 방, 너의 마음도 이제는 텅 비어 버렸을까? 나라는 존재를 지워버렸을까? 그런데 나는... 너로 꽉 차버렸는데, 원영아.
태준은 무너져 내렸다. 이제는 주인을 잃은 침대 시트를 부여 잡은 상태로 고개를 숙이자 바닥으로 툭툭 그의 눈물이 떨어졌다. 바닥이 얼마나 젖어 들었을까. 태준은 숨이 가쁠 정도로 눈물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불과 얼마전의 윤태준이 너무 미워서, 그런데 그게 자신이라서, 이대로 원영을 잃을까 겁이 나서. 태준은 울다 지쳐 기다시피 원영의 침대 위로 올라가 몸을 뉘였다. 길다란 몸을 웅크리며 베개위에 코를 파묻었다.

"네 향이 하나도 안 나, 원영아..."
코끝이 시릴 정도로 얼음 같은 추위가 태준의 몸을 휘감았다. 태준은 직감했다. 열이 나기 시작한다는 걸. 추운데 열이나. 네가 있어줬으면 좋겠어. 아프던 나를 다정하게 보살펴주던 네 얼굴이 보고 싶다, 원영아. 태준의 마지막 기억은 그렇게 끝이었다.
눈을 뜬 순간 보인 얼굴은 윤화백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못마땅스레 내려다 보고 있었고, 곁에 어머니는 걱정스레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하는 짓이냐, 다 큰 놈이."

아버지로서는 정말 최악이신 분. 예술가 윤태준의 엄격한 스승. 태준은 다시 눈을 감았다.

"가세요..."
잠긴 목소리로 대꾸하자 어머니의 걱정스러운 음성이 들렸다.
"아버지가 네 걱정 많이 하셨어."
"괜찮아요, 그러니 두 분 다 돌아가셔도 됩니다."
태준을 향해 윤화백이 쏘아 붙였다.
"자기 사람 하나 못 알아 보더니 꼴 좋구나."
태준은 그 소리에 반짝 눈을 떴다. 윤화백의 형형한 눈빛과 태준의
눈빛이 한치의 물러섬 없이 부딪쳤다. 그러다 먼저 눈을 내리 깐건 태준이었다. 태준은 이 문제에서 윤화백의 힘이 필요하단 걸 알았으니까.
"...원영이가 절 만나지 않겠답니다."
"어지간히 그 애한테 상처 준 모양이구나."
"화백님과는 연락 합니까?"
"한다."
태준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평소라면 절대로 자존심상 용납하지 못했을 일을 태준은 하고 있었다.
"도와주세요."
태준이 깊은 숨을 토하며 부탁하자 윤화백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마."
돌아서는 윤화백의 눈이 순하게 처진 것을 태준은 알지 못했다.
태준이 연애를 다시 시작하자고 한 그 날 밤, 엉엉 울기는 원영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고백을 받고자 하던 나날들이 얼마나 길었는데. 그토록 원했는데.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잃는 것이 두려워서, 차가운 눈빛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출근을 한 원영은 그래도 일을 해야 했다. 생은 사랑과는 달랐다. 해야 하는 것들은 쌓여 있었고, 어른은 그걸 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으니까. 정신없이 하루가 지나가고 지친 몸의 원영이 퇴근길에서 마주한 것은 윤화백이었다.
"여긴 어떻게..."
"내 죄가 있잖니, 얼굴 한 번 보러 왔다."
원영이 흐리게 미소 지었다. 윤화백은 은인이었고, 거짓말을 부탁했다 한들 동의한 것은 자신이었으니까.
따듯한 커피를 앞에 두고 마주 앉은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고요한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윤화백이었다.
"내 아들이지만 태준인... 차가운 놈이다. 능력은 있지만, 감성은... 모자라지."
"형이 얼마나 따듯한 사람인데요."
"그렇게 생각하니?"
"그럼요. 그래서 좋아하기 시작한건데..."
"내 아들의 그런면을 보고 좋아해준 건... 네가 유일했단다, 원영아."
원영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졌다.
윤화백은 원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집안이나 배경... 그런게 아니라 우리 태준일 그대로 바라봐주고 사랑해주는 그런 사람을 원했단다. 태준인 사람 보는 눈은 또 그닥 없어서 말이다. 원영아... 태준이에게 상처 받은거 내 다 안다. 그래도 그 애한테 조금 더 기회를
줘보겠니? 무조건 다시 시작하란 강요가 아니다. 네가 날 은인으로 생각해 내 부탁을 들어준 것도 안다만. 그럴 필요 없다. 난 내가 원해서 그랬던 것 뿐이니까. 다만... 못난 아들을 둔 애비로서 부탁하는거야. 태준이 녀석이 뒤늦게서야 자기 잘못을...
자기 진짜 감정을 마주한 모양이다."
"...그게 진짜일까요?"
원영이 묻자 윤화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늘 그 놈에게 스승이었지만, 그렇다고 아버지가 아닌 적은 없었단다. 태준이가 어젯밤에 많이 아프다가 병원에 실려갔어."
원영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자 윤화백이 안심하라는 듯
미소지었다.
"지금은 괜찮다. 나보고 가버리라고 할 정도로 평소처럼 멀쩡해. 하지만... 다만 실연은 버겁겠지."
"실연이라뇨... 그런거 제가 태준이형한테..."
"기회를 주겠니?"
원영이 머그잔의 손잡이를 매만졌다. 커피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 태준을 여전히 사랑하지만 두려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가 아프다니 마음은 또 속절없이 흔들려서. 어젯밤의 그 지원영은 어디로 가버렸을까. 원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게 윤화백을 위한 대답은 아니었다. 원영은 태준과 자신의 어긋나버린 타이밍을 떠올렸다.
느리게 헤어진다... 그게 필요할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 주말 원영은 태준에게 말도 없이 강릉으로 내려갔다. 주말엔 쉬었던 태준이라 막연히 집에 있을거라 생각한 터였다. 카페에 가볼까, 동희형에게 연락을 해볼까 고민하던 원영은 언젠가 태준과 함께 본 노을이 문득 그리워졌다.
그는 창업몰을 피해 강릉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니다 노을이 지는 시간에 맞춰 해안가를 찾았다. 그리고 발목까지 찰랑이는 바닷물에 발을 담군 상태로 지평선을 바라보는 익숙한 뒷모습을 마주했다. 어쩌면 이제 우리 타이밍이 조금은 맞아 가는걸까?
원영이 천천히 다가가 모래사장을 가르는 중에 태준이 풍덩 앞으로 고꾸라졌다. 놀란 원영이 허우적 거리는 듯한 태준을 향해 바다로 뛰어 들었다.
"윤태준!"
바닷물에 흠뻑 젖은 태준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원영을 바라봤다.
"뭐하는거야, 지금?"
태준에게 마구 소리를 지르는 원영을 보다 그가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진짜 원영이네."
태준은 원영을 끌어 안았다. 바닷물을 잔뜩 머금은 탓에 원영의 옷도 몸도 그처럼 젖어 버렸지만.
"그냥... 네가 보고 싶어서. 너무 보고 싶어서... 우리 같이 노을 보던 날도 떠올라서. 그래서 왔는데."
"근데 왜 바다에 몸은 던져요? 어?"
"그냥... 발을 헛디뎠어."
태준은 거짓말을 했다. 고개를 숙여 발목까지 찰랑이며 반짝이는 바닷물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레 원영의 얼굴이 떠올랐다.
볼 수 없다는게 순간 괴로워서 숨을 쉬고 싶지 않다는 충동에 휩싸인 그는 몇걸음을 더 걸어 그대로 바다에 빠진 터였다

원영을 안은 것만으로 호흡이 안정적으로 바뀐 태준과 달리 원영은 불안으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그의 젖은 어깨 위로 얼굴을 기댔다

형 정말 날 사랑해요?원영은 묻고싶었다
[태준원영] 거짓말을 부탁해 04 posty.pe/e7czcf #태준원영
트위터썰 백업 + 물에 잠긴 밤
원영은 꿈을 꿨다. 어린 원영에게는 무척 넓었던 미술관의 정원. 푸른 잔디밭 위를 뛰어 다니던 원영은 쿵, 누군가와 부딪쳐 넘어졌다.
으앙, 울음이 터졌다. 상대방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다정하게 물었다.
"괜찮니?"
딸꾹. 원영은 눈물이 멎고 대신 딸국질을 시작했다. 심장이 쾅쾅 거려서 이 낯선 감정이 뭔지 어린 마음으로 가늠하느라.
엄지 손가락으로 슥 눈가를 닦아준 다정한 소년은 원영의 몸을 일으켜 조심스레 먼지를 털어주곤 멀어져갔다.
"태준이를 만난 모양이구나?"
젊은 윤화백이 어린 원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따듯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아들을 향한 따듯한 눈빛.
"저 형 아세요?"
"내 아들이란다."
"원영이는 화백님 아들이랑 결혼할래요!"
원영이 작은 새끼 손가락을 내밀자, 젊은 윤화백이 길다란 새끼 손가락을
마주 걸었다.
"그러면 참 좋겠구나."

다정한 윤화백의 얼굴을 한번 바라본 뒤 원영은 소년 태준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봤다.

아, 빈자리. 그 소년은 없어. 이건 꿈이야.
원영이 눈을 뜨자 축축하게 젖은 눈가를 태준이 엄지로 닦아 주고 있었다. 이것 역시 꿈일까. 어둠 속에서 원영은 몇번이나 눈을 깜밖였다. 어둠에 익숙해지자 태준이 또렷하게 보였다.

"왜 울어, 원영아? 응?"
이게 진짜일리 없는데. 형은 나한테 화가 났는데. 현실일리가 없어. 원영은 태준의 손을 내버려둔체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태준이 그런 원영의 등을 꽉 끌어안았다. 맨살의 감촉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멈추지 못한 원영의 눈물 탓에 태준의 심장께가 그의 눈물로 젖어갔다.
"형... 이것도 꿈이야?"

젖은 목소리로 묻자 태준이 원영의 이마에 짧게 입맞추며 대답했다.

"나도 묻고 싶어, 원영아. 이건 꿈이야?"

고개를 든 원영의 눈에 푸르스름하게 올라온 태준의 수염이 보였다. 원영은 손을 들어 그의 턱을 매만졌다.
까슬한 감촉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손길을 느끼던 태준이 이내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의 입술이 맞물렸다. 원영은 여전히 울고 있었다. 태준의 입술이 원영의 눈물을 머금었다. 입술만 맞닿은 상태로 두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
커텐틈 사이로 작은 빛이 새어 들었다. 아침이 오는 모양이었다.

"꿈... 아닌가보네."

태준이 입술을 떼고 중얼거릴 때 즈음에서야 원영도 이게 현실임을 실감했다.
묵직하고 아릿한 통증이 그때서야 원영의 전신을 휘감았다. 태준은 육체는 자신에게서 빠져 나갔는데 아직도 안에 있는 것만 같았다.

"원영아."
"응..."
"사랑해."

태준이 진심을 다해 사랑을 속삭였다. 원영이 고개를 숙인 탓에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어 애가탔다.
겨우 몇달이었을 뿐이라고. 모든게 거짓말로 시작된 착각이 다라고 생각한 어리석은 나날들을 지워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변명들을 치우고 오롯이 지금 이 순간은 고백하고 싶다. 너를 사랑한다고. 너무도 사랑하고 있다고. 이 마음 진심이라고.
"나도 사랑해요..."

입술을 벙긋거리며 한참을 망설이던 원영이 아주 작게 속삭이자 태준은 참지 못하고 그를 꽉 끌어 안았다. 이 온기가 그리웠어. 그 누구도 내게 주지 못한 온기 말이야.
"그런데 형... 나는 다시 시작할 자신이 없어."

물기 어린 목소리가 두려움을 토해내자 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촉 안 할게. 이번엔... 내가 기다릴테니까. 안 본다는 소리만 하지마, 응?"

원영은 눈을 감았다. 수락의 의미였다.
원영이 지친 마음에 다시 잠든 사이 태준은 그를 위한 아침을 준비했다. 오랜만에 함께 맞이하는 아침에 태준은 들뜨는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른 아침부터 원영의 식사를 사러 청년몰을 들렀다가 태준은 동희와 마주쳤다.

"어이, 윤작가!"
"카페 연거야?"
"뭐야, 표정 폈네? 살만하냐?원영인 그렇
게 내쳐놓고."
동희의 날선 소리에도 태준은 기분 나쁜 티 하나 없이 웃으며 커피를 주문했다.
"시나몬라떼 하나랑 그냥 라떼 하나 줘."
"왜 커피를 두잔 주문하지? 거기다 그냥 라떼? 아 그건 그렇고.아직 오픈 준비 중이지 오픈한거 아니거든?"
"원영이거야,빨리 줘."
"뭐?!! 원영이가 강릉에??!!"
"우리 원영이가 강릉에 와 있든 말든 관심 끄고 커피나 내놔."
"우리 원영이~?"
동희가 대놓고 흘겨봤지만 태준은 전혀 동요가 없었다.
"나 음식 사올거니까 미리 내려놔, 금방 온다."
뒷통수에 대고 주먹을 꽉 말아쥔 동희는 이내 휴대폰을 들어 원영의 연락처를 들여다봤다. 연락을 할까 했지만 이 이른 아침에 윤태준이 여길 왔다면... 지금은 눈치껏 빠져줘야 하는 상황이겠지, 원영아? 네가 많이 안 아프면 좋겠다. 동희는 진심으로 원영의 행복을 바랐다.
원영이 태준에게 외면 당하고 울며 가게 앞에서 무너지던 순간이 선명해서 자꾸만 마음이 아렸으니까. 그래서 윤태준이 더 미웠으니까. 그런데 다시 재회라... 그래도 애는 좀 더 태워라, 원영아. 에스프레소 샷을 내리며 동희는 그런 생각을 했다.
태준이 음식과 커피를 들고 집에 도착했을 때 대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같이 지낼 때부터 원영은 아침이 되면 대문을 살짝 연 상태로 마당에 앉아 햇빛 받는 것을 좋아했으니, 이번에도 그런것일까 기대하며 그가 문을 열었다.
그러나 태준을 맞이한 것은 고요한 적막이었다.
일순 태준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재빨리 안방 문을 열자 이불은 곱게 정리되어 있었고, 원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지원영! 원영아! 원영아!"

다급하게 원영의 이름을 불러봤지만, 그 어디에서도 원영은 대답을 들려주지 않았다.
태준이 들고 온 것들을 내팽겨치고 대문을 활짝 열어 나가려는 순간.

"형..."

원영이 작업실 쪽에서 나와 태준을 불러 세웠다.

"너... 너...!"
태준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불안이 최대치를 찍었다가 가라 앉았다.

"몸도 힘든 애가 어딜 갔다 왔어?"
"그냥... 형 작업실... 물레 돌리는거 같이 해줬던 거 기억나서... 거기 잠깐 있었어요."

울먹이던 태준이 원영을 꽉 끌어안았다. 아릿한 통증에 신음이 터지려는걸 원영은 이를 깨물
며 참았다. 자신이 태준을 불안하게 만들 수 있는 존재라는게 좋아서. 그런 사실을 이제서야 알아서.

태준과 함께 지내는 동안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한번도 그의 마음에 진짜 자신의 것이라 생각한 적은 없었으니까.
원영이 양 손을 들어 여전히 떨고 있는 태준의 등을 마주 안으며 토닥였다.

헤어지는데 시간이 걸리는 걸지도 모른다고, 그러니까 우리 그런 과정이 필요할거라고... 그런 생각들은 다 핑계였던 것 같아요, 형.

나는 그냥 당신을 사랑하고 있을 뿐이라고.
원영은 눈을 감고 온전히 태준에게 기댔다.

마당의 햇살이 천천히 옮겨오고 있었다.

태준과 원영에게로.
[태준원영] 거짓말을 부탁해 05 (완결) posty.pe/4b1bl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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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23, 2023
열대야 #태준원영 ImageImage
태준은 원영의 앞머리를 매만졌다. 지난 새벽까지 이어진 사랑으로 땀에 젖었던 머리카락은 더위 때문에 여전히 젖어 있었다. 달달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낡은 선풍기를 원영을 향해 틀어놨지만 오래 튼 탓에 더운바람만 불고 있었다. 열린 창문 사이로 사람들의 신발이 보였다.
에어컨도 없는 반지하방. 지난 새벽까지 원영과 사랑을 나누느라 문을 꼭꼭 여며 닫았던 일들이 문득 태준은 환상 같다고 생각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원영의 안을 비집고 들어가면서 자신이 얼마나 울고 싶었는지.... 원영이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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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5, 2023
비가 오던 날의 너 #기태완 Image
이삿짐을 정리하던 완은 툭 떨어져 내린 폴라로이드 사진 하나를 주워 올렸다. 사진 속에서는 여름 풀냄새가 날 것 같은 기태와 자신이 있었다. 송진가루 때문에 환기를 시킬 엄두가 안 나던 요며칠. 드디어 비가 와 창을 활짝 열어 놓은 체였다.
창너머로 빗소리가 몰려 들며 완은 벽에 스륵 기대 앉았다. "우산 있어?"
비가 오는 날이면 언제나 묻던 그 애의 목소리.
"작은 건데."
"상관 없어."
완의 사물함에는 언제나 작은 삼단 우산이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둔 거였고, 나중엔 기태가 비가 오는 날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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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 30, 2023
불안과 후회로 굴리고 싶다
5000평 집으로 돌아와 혼자 끙끙 앓았으면 좋겠다. 희미한의식 속에서도 잠깐 눈만 뜨면 원영이한테 전화했으면. 연락 안된 탓에 걱정된 동희가 집에 찾아왔을때 휴대폰 꽉 쥔 손으로 의식 잃은 태준과 마주하겠지
한숨 한번 쉬고 휴대폰 손에서 빼주려는데 무의식 속에서도 손에 힘주는 태준. 굳이 따라온 고호태가 빤히 보다 원영이한테 전화할 듯.
"그릇집형 너 때문에 아픈거냐?"
태준이 아프단 얘기에 심장 덜컥한 원영이지만 이내 덤덤하게 대답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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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 20, 2023
너를 소중히 대해야 한다고 속삭이는 가이드와 그를 두고 전장으로 떠나는 센티넬 #서준지우 twitter.com/i/web/status/1…
폐허가 된 행성의 모래바람을 뚫고 서준은 나아갔다.뿌연 모래를 헤치고 도달한 곳에 서준이 간절히 찾고자 했던 이가 있었다
"지우야..."
ver.1 흐릿한 시선을 맞춘 지우를 향해 서준이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 버석한 모래알갱이가 느껴지는 꺼끌거리는 입술. 초첨없던 눈동자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갔으나 서준은 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도 알았다. 지우가 기억을 잃었음을. 강서준을 잊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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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 19, 2023
라떼갬성... 나는 그런거 이제 막 같은 반 된 서준지우... 낯가리는 지우랑 친해지고 싶은 서준이, 걔가 마이마이 들고 다니면서 듣는거 유심히 봐뒀다가 라디오 들으면서 공테이프에 음악 하나하나 녹음해서 선물해주는 그런거
서준이 대하기가 어려웠던 지우가 자기 책상 위에 덜렁 있는 테이프 보고 뭐지 하는데 옆에 서준이가 선물이야 입모양으로 말하고는 냅다 책피는거 얘도 애라서 부끄러워가지고... 그리고 하교길에 서준이가 준 테이프 마이마이에 넣어서 듣는 지우
지우가 좋아하는 노래가 가득했던 테이프... 같았던 거 그리고 시작되는 몽글몽글한 첫사랑... 우연히 같은 버스에 타면 맨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서 이어폰 나눠 끼는 그런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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