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준은 원영의 앞머리를 매만졌다. 지난 새벽까지 이어진 사랑으로 땀에 젖었던 머리카락은 더위 때문에 여전히 젖어 있었다. 달달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낡은 선풍기를 원영을 향해 틀어놨지만 오래 튼 탓에 더운바람만 불고 있었다. 열린 창문 사이로 사람들의 신발이 보였다.
에어컨도 없는 반지하방. 지난 새벽까지 원영과 사랑을 나누느라 문을 꼭꼭 여며 닫았던 일들이 문득 태준은 환상 같다고 생각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원영의 안을 비집고 들어가면서 자신이 얼마나 울고 싶었는지.... 원영이 알까
너무 사랑해서, 나는 자꾸만 울고 싶어졌어.
"원영아, 아침 먹자"
원영을 조심스레 흔들어 깨운 태준이 낮은 상위로 후라이팬에 구운 식빵과 계란프라이를 내왔다. 비몽사몽 막 세수를 하고 나온 젖은 얼굴을 수건으로 톡톡 닦아준 후, 직접 구운 식빵을 원영의 입에 물렸다
"형은?"
우물우물 식빵을 씹다 조금 정신이 든 원영이 묻자 태준이 그때서야 자신도 식빵 한쪽을 베어 물었다. 잠깐 껐다킨 낡은 선풍기는 여전히 원영을 향해 있었다.
바닥 껍질이 벗겨진 프라이팬을 좁은 싱크대에 우기듯 던져 넣으며 태준은 원영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원영의 손을 꼭 잡은 태준이 천천히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장마철도 아닌데 눅눅한 공기를 늘 머금은 반지하방과 달리 여름의 새벽은 쾌적했다. 해가 더 떠오르면 열기를 머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헤어지기 싫다..."
삐죽 입술을 내밀며 투정 부리는 어린 연인을 보며 태준은 준비한 이야기를 꺼내야 했다.
"원영아."
"응?"
"우리 헤어지자."
가볍게 마주 잡은 손을 흔들던 원영의 움직임이 멈췄다.
쾌적하게 느껴지던 새벽의 공기는 해가 완전히 떠오르며 여름의 끈적한 열감으로 바뀌었다. 태준이 원영의 손을 놨다. 땀이 차 있던 손바닥이 미끄러웠다.
"형 지금 무슨 말을..."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단거 다 거짓말이야. 돈이 없는 가난한 예술가인 난...
한여름 더운밤에 사랑하는 사랑 껴안으면서도 죄책감 느껴야 한다."
"무슨 소리야? 나 어제 행복했어!"
"선풍기조차 낡아서... 네 땀하나 식혀주질 못하더라."
"윤태준!"
"원영아... 내가 너를 너무 사랑해."
"..."
"그래서 네 앞에 선 내 가난이 너무 비참해."
원영은 몇번이고 입을 벙긋거리다 다물었다. 가난을 모르고 시작한 사랑이 아니었다. 윤태준의 젖은 흙냄새를 사랑했고, 땀에 젖은 등을 사랑해왔는데.
"형... 왜 그래? 응?"
원영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자신의 손을 놔버린 그의 손을 부여 잡으며 애원하는게 전부였다.
"이제 오지마, 전화도 하지 말고... 찾아 오지도 마. 헤어진단건 그런거니까."
버스가 오기 전에 택시를 불러 세운 태준이 원영을 억지로 밀어 넣었다.
"이제 너답게 살아. 내 눈치 볼 필요 없이."
태준이 원영의 집주소를 대신 불러준 후 택시의 문을 닫았다
완전히 단절된 기분에 원영이 창너머 태준을 불러봤지만 그의 돌린 고개를 다시 자신을 향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택시가 움직였고 원영은 고개를 숙였다. 무릎 위로 모은 두손 위로 뚝뚝 눈물이 떨어졌다.
"윤태준..."
비참하다고? 몇번이나 내 도움을 거절하는 네 앞에서 나도 비참했어. 사랑 보다 예술이 중요한 너, 그런거 알면서 시작한거니까 감당해야 된다 생각했지만. 낡은 선풍기를 새것으로조차 바꿔주고 싶다 말하지 못한 내 서글픔을 형이 알까?
택시에서 내린 원영이 엉엉 울기 시작했다. 비가 쏟아져 내렸다. 빗소리에 눈물소리가 묻히길 바라며 원영은 어디로 걷는지도 모른체 하염없이 울었다.
원영을 보내고 돌아온 태준은 열어놨던 낮은 창문 사이로 들이친 비에 엉망이 된 방을 보며 허탈한 숨을 토해냈다. 원영을 일찍 돌려 보내 다행이라고. 이런 모습까진 보여주지 않아 정말 다행이라고.
태준은 낡은 선풍기를 건져 식탁으로 썼던 낮은 상위로 올리고, 창문을 연 상태 그대로 방 바닥에 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