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짜 원하는 게 뭐야?
- 말 했잖아. 내 개가 되어 달라고. 뭐해? 번호 안 찍고. 어려울 거 없어. 전화하면 받고, 부르면 달려오는 거 정도? 간단하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더니 손에 들고 있던 내 폰을 바닥에 툭 떨구고 발로 질끈 밟으며, "좆까, 미친새끼야." 조용히
읊조리곤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더니 뒤돌아 걷는다. 와, 이렇게 단호하다고? "그냥 가면 후회할텐데~" 터벅터벅 걸어가는 뒷모습에 대고 한 내 말에 뒤도 보지 않고 주머니에 찔러넣은 손만 꺼내어 가운데 손가락으로 대신 답하고선 골목을 빠져나간다. 비실비실 새어나오는 웃음. 저 새끼랑 어떻게
하면 엮일 수 있을까.
- 어딜 간다고?
- 주해성네 집.
- 왜?
- 친해지려고.
- 뭔 소리야, 갑자기?
어제 결국 받지 못 한 주해성 번호는 비상연락망을 가지고 있는 반장에게 전화해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더불어 집주소까지 한큐에 말이다. 선전포고 좀 하러 가보실까?
- 즐거워 보인다? 너 뭐 있지? 똑바로 말 해. 갑자기 그 집엔 왜 가?
목적지를 들은 비서형은 시동을 걸다 말고 무슨 꿍꿍인지 불라며 불안해한다.
- 친목도모하러 간다니까?
- 걔 착하고 완벽해서 싫다며. 갑자기 무슨 친목도모야?
내 성 정체성까지 알고 있는 마당에 형에게 비밀을 만들 일이
없었는데, 그런 형에게도 주해성의 이중성에 대해선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 언제는 가깝게 지내라며?
- 그것도 단계라는 게 있지. 하루아침에 무작정 이러면 내가 불안해, 안 불안해? 뭔 생각인진 몰라도 그쪽 집안이랑은 척지만 안 된다 양석호. 마음에 안 든다고 괜히 쑤시고 다니지마.
건드려도 되는 사람이 있고 안 되는 사람이 있다는 거 알지?
- 쑤시긴 누가 뭘 쑤셔, 진짜 친해지려고 그러는건데. 생각을 바꿨거든. 나 이제 주해성 안 싫어.
주해성이 대단하기 하구만? 커밍아웃에도 덤덤했던 형이 이렇게 잔소리 폭격을 할 정도라니.
- 안녕하세요. 저 해성이형이랑 같은 반
학생 양석호라고 하는데 혹시 형 있나요?
거침없이 누른 인터폰에선 누구세요? 묻는 고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최대한 예의를 갖춰 인사를 드린 후 무사히 주해성 집 안으로 입성했다. 누가봐도 기품있어 보이는 주해성 어머니는, 오늘 만나기로 했는데 연락이 안 되길래 걱정되서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다는 내 말에 직접 주해성에게 전화를 걸어주신다.
- J그룹 도움 많이 받고 계신다더라구요.
주해성이 오길 기다리며 우리 아빠 안부도 물으시기에 뻔한 대답을 해드리며 대화를 하다보니 어느새 뛰어 들어오는 반가운 얼굴.
- 왔어, 형?
- 니가 여긴 왜! 후우.. 우리집엔 어쩐 일이야?
- 넌 동생 기다리게 해 놓고 무슨 말이 그래.
약이 올라있는 주해성을 보고있자니 기분이 좋아진다. 흐트러진 사복차림의 주해성은 오늘도 역시 취향저격. 아줌마가 도우미들이 요리중인 주방으로 발걸음을 하자 틈을 놓치지않고 내게 가까이 와 어깨를 꽉 그러쥐고 이를 간다.
- 따라와 새끼야.
키득거리는 나와 달리 날이 서 있는 주해성은 제 방으로 날 끌고 들어가더니 멱살을 잡고 주먹까지 들었다가 결국 치지는 못 하고 신경질적으로 날 팍 밀쳐낸다.
- 그러게 어제 얌전히 번호 줬으면 이 지경까지 안 왔을텐데 왜 쓸데없이 튕겨서 찾아오게 만드냐? 이제 감이 좀 와? 어제 내가 했던
말들이 다 진심이었단 거.
- 왜 이러는건지 이유나 좀 알자. 뭔데?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서 나한테 시간까지 쏟아가며 이 지랄 떠는건데?
- 오해하지마. 마음에 안 들어서가 아니라 마음에 들어서 시간까지 쏟아가며 이 지랄 떠는 거니까.
- 아 시발, 뭔 개소리야.
크으, 넌 웬만하면 그 표정으로 욕하지마라. 내꺼 하자고 존나 조르고 싶어지니까.
- 너네 어머니께서 밥 먹고 가라던데 어떻게, 식사 좀 하고 갈까? 착한 청소년은 어른 말씀을 잘 들어야하지 않겠어?
- 좋게 말할 때 알아서 꺼져라?
- ㅋㅋㅋ알았어, 알았어. 오늘은 이쯤에서 끝내줄테니까
앞으로는 내가 이렇게 찾아오지 않도록 잘 좀 하자, 해성아?
속으로 얼마나 줘패고 싶을까. 푸흐흐. '내 번호 저장해둬. 내일보자 범생아.' 문자를 보내놨지만 예상대로 답은 없었다.
- 주해성! 오늘따라 유난히 반갑다?
느지막이 교실로 들어서며 주해성을 향해 파이팅 넘치는 인사를 전하자 다들
의아한 표정으로 주해성과 날 번갈아 쳐다본다. 주해성은 재빠르게 표정관리에 들어갔지만 찰나에 뭐 씹은 표정 지었던 거 다 봤다, 새끼야.
- 니들은 얘한테 꿀 발라놨냐? 뭐 심심하면 둘러싸서 짹짹대고 있어.
- 애들한테 시비 좀 걸지마. 너한테 피해준 것도 아니잖아.
늘 그랬듯 단정하고,
다정한 학교에서의 주해성을보니 소름이 오소소. 그 전에야 실체를 몰랐으니 짜증나고 재수없는 정도였는데 이제는 이게 다 연기라는 게 역겨울 정도다. 놀라워, 짝짝짝.
- 수업 끝나면 내 차 타고 가자.
주변에 있던 애들은 주해성을 대하는 태도가 갑자기 바뀐 날 이상하게 보더니 끼어들면 안
되겠다 싶었는지 슬슬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고, 주해성은 동그리 안녕 너머로 눈을 접어 싱긋 웃으며 누가 들을까 내 귓가에 속삭인다.
- 친한 척 하지마, 씹새야.
- ㅋㅋㅋㅋㅋ
주해성이 욕을 하면 괜히 웃음이 터진다. 아무도 모르는 가식 다 좆까고 어차피 걸린 거 내 앞에서는 성격을 여과없이
드러내는 게 재밌다고 해야하나? 마치 나와 친해진 것처럼 비춰지기만 해도 저에게 해가 된다는 듯, 제 이미지에 먹칠하지 말라는 주해성에게 나도 소근거려줬다.
아하, 우리 선배님 캠핑 한 번 야무지게 다녀오셨네? 같이 캠핑 가자는 얘기 나눈지 오래 됐는데 혼자 신나게 놀다 오셨겠다?
- 놀다 오느라 피곤하실텐데 어쩐 일로 전화를 다?
- 응? 아, 캠핑 간 거?
- 나랑도 가기로 했으면서.
- 앜ㅋㅋㅋ 너랑도 가야짘ㅋㅋ
- 이제 제가 그냥 '너'가 된 건가요?
- 아니아니, 지우야 그게 아니랔ㅋㅋㅋ
내가 한지우인지 한지우가 나인지 가끔 자아가 왔다갔다 하는데, 나별 촬영때나 방영 당시에는 팬들이 좋아하니까 메이킹 찍고 있으면 서로 더 챙겨주는 척 해가며 몰입을 유도하는 행동을 많이 했었다. 시즌1때는 내가
어색해할까봐 강서준 그 잡채였던 형이 일부러 장난도치고 먼저 말도 걸고 번호도 먼저 물어봐주고 다가와줬지만 열흘 남짓한 촬영기간은 낯가리는 내가 형과 허물없이 지내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오히려 방영이후 같이 하는 스케줄도 많이 생기고 팬미팅 준비도 하면서 급속도로 가까워졌던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