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확히 짚고 넘어가야 하고, 확실하게 얘기를 끝냈어야 했던건데 너무 황당한 나머지 자꾸 피하려고만 했던 내 잘못도 있는거 같다.
- 이해해. 그래서 나도 지금은 섣부르게 섹스부터 하자고는 안 하잖아.
이해하긴 뭘 이해해. 내 말의 요점은 그게 아니잖아 정신나간 새끼야.
- 생각이라는 걸 좀 해보자고. 나랑 진짜 자고싶냐?
- 응. 너랑 자보는 게 내 새로운 꿈이야. 만약 거부감이 조금이라도 느껴지면 널 향한 내 마음은 단지 친한 친구이기 때문에 특별한 거지 내 성정체성은 보통의 사람들과 같은 거고, 만약 거부감이 안 들고 좋으면 난 널 사랑하는 게 맞는 거잖아.
뭐지 이 흑백논리는.
- 너 전에 사귀던 누나랑 해봤잖아. 그땐 징징대더만.
- 그땐 몸 안 좋다고 안 된다고 했는데 누나가 막 그랬던거고. 기억도 잘 안나고 억울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내가 하고싶어서. 나 야동도 많이 봤어, 너랑 하려고.
- 야이씨,
이런 놈이랑 아직도 친구를 하고 있는 내가 문젠가.
- 너랑 대화를 하느니 차라리 게임을 하자.
- 그래. 시간은 많으니까. 밤은 길어, 해성아.
미친놈이 그런 고전적인 말은 어디서 주워들어선 나한테 써 먹고 지랄이야. 저 순수한 눈빛과 아무것도 모를 것 같은 말간 표정을 한 지호성 입에서
섹스라는 말이 나왔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 야, 지호성.
- 응.
- 너 몽정은 하냐?
처음으로 물어봤다. 지호성은 왠지 모르게 또래의 시꺼먼 놈들과 달리 뭔가 보송보송한 느낌이라 가장 오래 된 친구이지만 성적인 대화를 나누기엔 가장 먼 친구이기도 했다.
- 응. 하지.
- 해?!
아니 물론 열아홉의 건강한 청소년이라면 몽정을 하는 게 당연한 거긴 하지만 어쩐지 안 어울린다고. 그런거랑 매치가 안 된다고, 지호성은.
- 허.. 그래, 안 하는 게 더 이상하긴 하지..
- 그래서 너한테 자자고 한 건데? 나 몽정 할 때마다 니 꿈 꾸거든.
툭. 결국 조이스틱을 떨어뜨렸다.
- 내 꿈에서 너 되게 변태같고 야해.
누가봐도 변태같은 건 지금 넌데..?
- 게임도 내가 이겼는데 기념으로 키스 한번만,
- 누가 이겼든 내가 왜 키스를 해줘, 변태새끼야.
- 한번만 하자.
- 싫어.
- 아, 한번만.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 사람 소원,
- 못 들어줘.
- 치사한 놈. 그러지 말고 한번만. 혀만 넣어볼게.
답도 없는 지호성은 자꾸만 졸라댔다.
- 좋아. 니가 넣어.
- 아니, 씨발 넣긴 뭘 넣어!
- 내가 넣는다 그래서 불만인 거 아니었어?
아아, 갔습니다. 나의 친구는 갔습니다. 정신이 저 우주 어딘가로 떠나버렸습니다.
- 우린 형제야, 형제. 오죽하면 부모님들이 우리 이름을 해성, 호성으로 맞춰서 지었겠냐고.
- 커플이름 같지 않아?
이 새끼 사람 돌게하는 재주가 있었구나...
- 내 말은, 우린 둘 다 같은 염색체를 가지고 있고 같은 거 달린 사내놈이라고.
- 응. 그래서 내가 처음엔 야동만 보다가 게동도 봤지.
..지호성 승. 말을 해도 알아 쳐 먹질 않으니 이길 자신이 없다.
- 나 간다. 너랑 있다간 내가 미친놈 될 거 같다.
- 이 시간에 어딜?
- 어디든. 너 없는 곳.
- 아줌마한테 전화해야겠다. 주해성 가출하려 한다고.
- 맘대로 해라.
- 진짜 가?
대꾸 없이 일어나서 현관으로 가는 날 지호성은 뒤에서 졸졸 따라오다 옷자락을 잡는다.
- 나도 지금 내가 좀 이상한 거 알아.
- ......
- 안 보챌게. 그러니까 가지마.
뒤 돌아보면 안 된다, 주해성. 뒤 돌아 보는 순간 보나마나 맹해빠진 얼굴 보고 마음 약해진다. 하나도 안 순진한 지호성한테 속는거다 너. 그대로 직진해서 신발 딱 신고 나가는거다.
- 안 보챈다고. 섹스 얘긴 다신 안 꺼낼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질질 끌려오듯 날 붙잡고 늘어지는 지호성의 축 쳐진 목소리에 조금은 제정신으로 돌아온 건가 싶기도 하고 사실 갈 곳도 마땅치 않아서 살짝 뒤를 돌아 지호성을 쳐다봤다. 고개를 푹 숙이고선 여전히 내 옷의 끝자락을 꾸욱 쥐고 있는 놈을 보고있자니 한숨만 나온다.
- 후우.. 알았어. 안 나갈테니까 놔.
- 진짜?
그제야 고개를 들어 내 눈을 쳐다보는 초롱초롱한 눈빛에 두 손을 들었다. 키는 이렇게 큰데 한번씩 애새끼같을 때가 있는 거 보면 이 놈은 신이 잘못 만든 게 분명하다.
- 요즘 니가 왜 자꾸 나한테 이러는건지 모르겠는데, 그래. 여자를 만나자. 내가 소개해 줄 테니까,
- 알았어.
다행히도 고분고분 내 말을 듣는 지호성 어깨를 툭툭 치곤, "피곤한데 일단 자고나서 내일 얘기하자." 하며 녀석의 방으로 갔다. 거실에서 주섬주섬 게임기를 정리하던 지호성은
얼마 안 있어 빼꼼히 제 방에 있는 날 한 번 쳐다보더니 들어온다.
- 잠들까봐 빨리 정리하고 왔어.
- ?
- 아무래도 굿나잇 키스 정도는 꼭 해봐야겠어.
- 뭐?!
예상치 못 하게 침대 위에서 날 덮치기라도 하듯 달려드는 지호성을 밀쳐내며 소리쳤다.
- 안 보챈다며, 개자식아!
- 응. 섹스하자고 안 보챈다고. 키스만 하자, 키스만.
속았다. 지호성이 애새끼같은 얼굴로 날 속인건지, 아니면 내가 그냥 지호성 생겨먹은 거에 속아 넘어간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 혀만 넣어본다니까?
- 야이 씨, 저리 안 꺼져?!
- 니가 넣을래?
- 아니, 아까부터 뭘 자꾸 넣으래 병신 새끼가!
내가 하도 질겁을하니 지호성은 내게 덤벼들던 행동을 우뚝 멈춘 채 까만 눈동자를 도록도록 굴리며 생각에 잠긴 듯 했다. 부디 니가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이 정상인의 범위 안에 드는 것이길 바라건만..
- 야동 볼래?
응. 그런 걸 바라는 내가 미친놈이지. 암, 내가 미친놈이고 말고.
- 아무래도 니가 흥분이 되면 좀 더 관대해질 거 같거든. 어떻게 생각해?
어떻게 생각하긴 존나 골 때린다 생각하지. 플러스로 지호성의 꿈(?)을 향한 집요함을 안일하게 생각한 날 매우 치고 싶다는 생각도 좀 들고.
- 아무것도 하지 말고,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좀 쳐 자자. 개피곤해.
- 넌 운동도 그렇게 열심히 하는 놈이 창고정리 좀 했다고 이렇게 녹초가 되냐?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랬는데.. 넌 입도 안 삐뚤어졌는데 왜 자꾸 말 같지도 않은 소릴 지껄이는걸까.
- 너 때문에 피곤하다고, 너 때문에. 존나 지호성 너 때문에 피곤해서 당장이라도 기절 할 거 같다고.
- 아, 그거 좋다!
뭐가요, 미친놈아.
- 기절해 봐. 그럼 내가 다 알아서 해 볼게.
이게 진짜! 단시간에 야동을 얼마나 봤길래 이렇게 섹스에 환장을 하는 거야?
- 뒤질래?
- 왜. 너도 나한테 그랬잖아.
- 뭐?
- 니가 나 기절했는데 막 이렇게 옷 벗기고,
- 미친, 내가 언제!
- 엊그제 내 꿈에서 니가,
그만, 거기까지. 주절대는 다음 말을 더 들었다간 노이로제 걸릴 판이기에 나불대는 주둥이를 손으로 막아버렸다. 그랬더니 이제 눈짓 몸짓 등등이 가관이다.
- ...야, 야, 얼굴은 왜 빨개지는 건데, 기분 나쁘게.
너 이 시발 지금 무슨 상상하고 있길래 이래, 응? 도대체 그 상상속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길래 지금 니 눈빛이 ‘아유, 너두 차암~’ 이라고 말하고 있는건데? 심지어 그걸로도 모자라 왜 내 어깨를 콩콩 때리며 수줍다는 듯 얼굴까지 붉히고
지랄이냐고 왜, 왜! ..후우, 아니다. 듣고 싶지 않아서 틀어막은 거니까 그냥 내 손에 입 막힌 채로 아침까지 부디 닥치고만 있어라.. 요 며칠 지호성의 기상천외한 상태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다 못 해 숨이 막힐 노릇이다. 주해성 인생이래봐야 아직 고작 19년째이긴 하다만 내 평생 지호성의
변태성 때문에 이렇게 스트레스 받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상상이 다 뭐야. 상상으로도 있을 수 없는,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는데.
- 으읍, 읍, 읍읍,
뭐래.
- 닥치고 있어봐. 엉아가 지금 진지하게 생각중이잖아.
좋게 생각하자, 좋게. 나쁘게 생각하면 한도 끝도 없으니까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하자. 만약 지호성이 내가 아닌 다른 남자한테 이 지랄을 떤다고 생각해 봐, 얼마나 심각한 일이냐고. 그나마 나니까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는 거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같은 남자한테 집요한 성희롱을 당하는 건데 순간 욱해서 살인났을지도 모를 일이잖아? 아니, 모를 일이 아니라
이 정도 집념이면 분명 살인났을 거야. 어떻게 보면 내가 니 목숨 살린 거니까 감사한 줄 알아라, 새끼야. 세상천지 나같은 친구가 어딨겠냐, 그치 호성아?
- 왘! 미친, 존나!
는 무슨, 너 죽고 나 살자고 씨발.
- 뭔 짓이야, 이 또라이야!
터진 입이라고 막 놀리는 주둥이를 기껏 쳐 막고, 최대한 경건하고 넓은 마음으로 너의 죄를 사하노라- 하고 있는 내 손바닥은 왜 핥는 건데.
- 손에 땀 나 주해성. 이거 혹시 성적 긴장감?
식은땀이다 이 새끼야.
- 너 혹시 전에 누나한테 차이고 충격받아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냐?
- 야. 주해성.
- 뭐.
- 장난같아도 보여도 나 진지하거든? 나한테 병신아 병신아 하다 보니까 니 눈엔 내가 진짜 병신인 거 같지?
목소리까지 깔면서 진지하게 정색을 하면 나도 진지하게 대답해줘야 하잖아.
- 응. 진짜 병신인 거 같아.
- 뭐, 정 그렇다면 인정.
쿨하게 지가 병신인 걸 인정하는 지호성은 결국 또 다시 답 없는 소리만 해댄다. 전에 뽀뽀하니까 설레서 계속 하고싶어 지는걸 어떡하냐고 찡찡대는데 그냥 뒷목을 쳐서 기절을 시켜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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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에서 창피한줄도 모른채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한참을 울었다. 오만가지 생각이 다 떠오른다. 떠났을때 내 심정이 어땠었는지, 널 잊기까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자꾸만 보고싶고 생각나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외로움에 못 이겨 도망쳐놓고도 남아있는 미련에 붙잡고
싶어지던 마음을 얼마나 참았었는지, 떠나기 전에는 내 마음을 헤아려주지 않았으면서 왜 헤어지고 나서야 이렇게 내게 진심인건지...
- 사는 게 참 힘들죠?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힘내요.
얼마나 서럽게 울었으면 택시기사님이 날 다 위로하고 있을까.
헤어진 후 매일밤을 기도했다. 넌 내가 떠났어도 아무렇지 않게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고, 그렇게 잘 살고 있겠지? 꼭, 너같은 사람 만나길.. 그렇지 않는 한 죽었다 깨어나도 내 심정을 이해하지 못 할 테니까 너와 똑같은 사람 만나서 너도 나처럼 힘들어하고 아파하길 수도 없이 바랬다.
- 아저, 아니 형. 형도 나 좋잖아. 아버지때문이면 내가,
- 전 제 할 일만 하면 됩니다.
- 그래? 도대체 아저씨가 할 일이 뭔데?
- 지키는거요. 박장군을.
- 나는 내가 알아서 지킬테니까 그냥 나 자체만 봐달라고!
- 스스로를 지키시기엔.. 아직 너무 어리네요.
언제까지 애 취급 할 건데.
- 도련님.
- 그 빌어먹을 도련님 소리 좀 하지 말라고!
나는 언제까지 당신한테 지켜져야 하는 사람인건데.
- ..제가 어떻게 해드리길 바라시는 겁니까?
- 계급 나이 다 떠나서 나도 그냥 아저씨랑 동등한 사람으로 봐줘. 나도 아저씨 지켜줄 수 있다고.
- 저를 지키고 싶으시면, 사랑타령 마세요.
- 나이가 어리다고 감정도 어린건 아니잖아!
- 치기어린 감정이 어른스러운것도 아니죠.
겨우 몸을 추스리고 멍하니 샤워를했지만 조금도 정리되지 않는 감정에 다시금 흐르는 눈물이 속절없이 날 주저앉힌다. 머리도 말리지 못 하고 쇼파에 앉아 꾸역꾸역 억지로 참아보는 눈물조차 서럽게 느껴져 또 주륵 흘러내리는데 머리가 어지럽고 부운 얼굴에 열감이 돈다.
- 지우야. 한지우!
울리는 인터폰. 쿵쿵대며 두드려지는 문. 그리고 강서준 목소리.
- 문 좀 열어봐!
한밤에 신고라도 들어올 기세의 소음에 힘겨운 몸을 일으키다 휘청. 겨우 현관문을 열었는데 강서준이 다급하게 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다.
- 톡도 안 보고 전화도 안 받.. 한지우 너 왜 울어.
- 무슨 일인데 이 난리야.
- 눈 부은 것 좀 봐. 어디가 얼마나 아픈건데?
- 용건만 좀 간단히..
- 어떻게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몸 상태 안 좋아보였잖아. 너 그렇게 가고나서 걱정돼 죽겠는데 넌 전화도 계속 안 받고 혹시나 쓰러진 거 아닌가 싶어서 얼마나 놀란 줄 알아?
-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