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0평 집으로 돌아와 혼자 끙끙 앓았으면 좋겠다. 희미한의식 속에서도 잠깐 눈만 뜨면 원영이한테 전화했으면. 연락 안된 탓에 걱정된 동희가 집에 찾아왔을때 휴대폰 꽉 쥔 손으로 의식 잃은 태준과 마주하겠지
한숨 한번 쉬고 휴대폰 손에서 빼주려는데 무의식 속에서도 손에 힘주는 태준. 굳이 따라온 고호태가 빤히 보다 원영이한테 전화할 듯.
"그릇집형 너 때문에 아픈거냐?"
태준이 아프단 얘기에 심장 덜컥한 원영이지만 이내 덤덤하게 대답할 듯
"아니요"
아프다면 내가 아닌 그 사람 때문일거라 생각하며 전화 끊는 원영이 마음도 마음이 아니겠지.
"원영이 연락은?"
눈 뜨자마자 태준은 원영이 찾는데 동희가 고개 내저을듯
태준은 그때서야 막막한 기분에 갇히겠지. 비로소 자신이 원하던 이별이 이뤄졌는데. 도예클래스 수업이 있을때마다 원영을 찾아 보지만 없어. 원영이 책임감에 이 일을 쉽게 남에게 넘기진 않았을텐데. 태준은 시간이 지날수록 이별을 더 실감할거야
내가 포기가 안 된다더니.거짓말쟁이.불쑥 원망도 치솟다가,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겠지. 회사로비에서 하염없이 기다려도 봤지만 그를 미리 본 원영이 뒷문으로 가버려 만나지 못해.태준은 점점 더 이별이 실감나. 볼 수 있는데 안 보는 것과 보고 싶은데 보지 못 하는 것은 전혀 다르니까 #태준원영
태준을 피해 뒷문으로 빠져 나온 원영은 깊은 한숨을 토해내.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 사장님은 왜 저러시는걸까. 다시는 보지 말자고 하시더니. 태준이 끈질기게 매일 연락한 흔적들이 휴대폰에 남아 있어. 전화 달라고 남긴 메시지까지.
연락 달라, 만나자. 이야기 하고 싶다... 다 자신이 원했던 이야기들이지. 지금은 아니지만. 크리스마스 이브 서울까지 올라와 그렇게 상처를 준 최인호와 나란히 택시를 탄 걸 본 순간 발 밑으로 땅이 꺼지는 기분이었어. 비참했어.
원영은 비로소 이별을 실감했지. 그리고 태준이 자신을 좋아했던 것 보다, 자신이 훨씬 그를 사랑했음도 깨달았지. 원영의 연애는 언제나 상대방이 시작하자 해서 시작되었고, 상대방이 끝을 내자 해서 끝이 나곤 했어.
넌 참 좋은 사람이지만 좋은 연인은 아닌 것 같아. 다들 웃으며 돌아섰고, 나쁘게 끝나진 않았지만... 원영은 그 말이참 어렵다고 생각했지. 똑같이 대했을 뿐인데 뭐가 문제였을까? 그러다가 다시 잊곤 했지만.
그리고 원영은 이제 깨달았어. 사랑을 하는 일은 상대방이 나만 바라 보길 원하는 일이라는 걸. 이런 질투심이 제 안에 있는 줄은 전혀 몰랐어. 그리고 그런 질투심이 비참함과 패배감에 젖게 만드는 일이라는 걸. 너무 사랑해서 상대가 너무 미워지는 일도 있다는 걸.
크리스마스 당일은 기억에도 안 나. 이브날 저녁에 혼자 술을 잔뜩 마시고 취해서 잠들었다 일어나 보니 늦은 오후였지. 숙취에 시달리다 보니 출근이 찾아왔으니까. 햇빛 한번 안보고 지나가버린 성탄절과 여전히 상처에 허덕이는 자신이 있어.
터덜터덜 걷다보니 집 앞이야. 그런데 가로등 아래로 긴 그림자 하나가 있어. 고개를 들어 보니 태준이지. 태준이 깊게 젖은 눈으로 원영을 바라보며 다가왔어. 동희가 망설이다 결국 원영의 집 주소를 알려준거야. 태준이 느릿하게 걸어와 원영의 앞에 섰어
"내 전화 못 봤어요?"
"...봤어요."
"메시지는요?"
"그것도 봤어요."
"그럼 연락 줬어야 하는거 아닙니까?"
"사장님은 저한테 연락 주셨어요?"
어, 여보세요? 지우야, 나야 서준이... 우리 고3때 같은 반이었는데 기억나? 일년만인가? 필현이한테 네 삐삐번호 받아가지고 연락해봐. 어... 사실 너랑 친해지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용기가 안 났어. 날이 춥다, 따듯하게 입고 다니고 내 삐삐번호 남겨놓을게. 연락... 줄래?
강서준이네? 되게 오랜만에 보네... 쟤는 여전히 잘 생겼구나. 강서준이 저런 얼굴도 하는구나. 널 그런 얼굴로 만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서준지우
ver.1
서준은 끝내 자신의 음성을 지우의 음성사서함에 남기지 못했다. 지우는 공중전화박스 안에서 주저 앉아 머리를 헝크러트리는 서준을 바라보며 자신의 첫사랑이 저무는 것을 느꼈다. 세월이 흘러 서준은 지우의 결혼소식을 들었다. 안녕, 나의첫사랑. 숱한 연애에도 잊지 못했던 사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