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수은혁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AU. 은혁은 패션 매거진의 젊은 사장인데 총 책임자 치고는 굉장히 어린 나이임. 패션 계에는 꽤 오랫동안 몸을 담고 있었고 가끔 자사 잡지 모델로도 활동한다. 그리고 그런 은혁은 오픈리 게이임. 원래 결혼을 했었던 모델 남편이 있고 둘 사이에 아이까지 있었는데 ImageImage
지금은 이혼 상태임. 전남편이랑 좋게 이별한 게 아니었어서 한동안 은혁에 대한 가십이 끊이질 않았을 거임. 은혁을 두고 바람난 전 남편은 한 명도 아닌 여러 명을 돌려 만나면서 은혁을 기만했음. 그러나 은혁이 이혼한 이유는 대중에 정확히 공개되지 않아서, 다들 이 이혼이 은혁의 성질머리
때문일 거라고 짐작했던 거임. 이혼한 뒤로 양육권은 은혁이 가지고 있었음. 그래서 지금은 딸이랑 둘이서 살고 있는 은혁임. 한편 현수는 원래 방송사에서 글 쓰는 뉴스 기자가 되고 싶었는데 일이 잘 안 풀렸음. 그런데 어쩌다 보니 겨우 면접에서 붙은 게 패션 매거진 회사 사장인 은혁의
비서직이었음. 은혁네 회사가 워낙 영향력이 있는 편이니까 여기서 경력 쌓고 추천까지 받으면 원래 현수가 하고 싶었던 기자가 되는 것도 일사천리였음. 그런데 그 비서직이 쉬운 게 아니었음. 은혁은 좋게 말하면 빈 틈이 없는데 나쁘게 말하면 까탈스럽고 싸가지가 없기로 유명함. 은혁의 성격을
못 견디고 사표 쓴 비서가 한 트럭은 된다고 했음. 현수는 첫 출근에서 은혁을 처음 만났음. 텔레비전 같은 데서 한두 번 대충 본 적 있는 날 선 얼굴은 예민한 인상을 줬음. 현수는 좀 긴장을 했었는데 은혁을 마주친 직후에는 저도 모르게 그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게 됐음. 잘은 모르지만 고급일
게 분명한 옷으로 휘감긴 은혁의 얼굴이 예뻤음. 그런데 은혁은 현수를 맞닥뜨리자마자 탐탁찮은 표정을 지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번갈아 가며 훑어가는 시선이 노골적이었음. 뭘 입고 온 거야? 은혁이 툭 내뱉은 말은 진짜 뭘 입고 왔는지가 궁금해서 묻는 질문이 아니라 비난에 가까운 힐난조였음.
현수는 은혁의 얼굴에 잠깐 혼이 나갔던 걸 제하고 순식간에 기분이 나빠졌음. 사장님 성질이 보통 사람 같지는 않으니까 단단히 마음 먹으라고 들었던 게 진짜인 모양이었음. 그래도 현수가 쉽게 나가떨어지진 않았음. 오히려 은혁이 싸가지 없게 굴수록 독기를 품고 더 열심히 했음.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보자 존버는 승리한다. 현수는 주먹을 꽉 쥐며 다짐했음. 사무실이 너무 따뜻한 것도 싫고 너무 썰렁한 것도 싫다는 은혁 때문에 현수는 매일 아침 온도계로 사무실 온도를 맞춰 놓았음. 온도계 들고 헛짓하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깨달을 때면 현타가 와서 당장 자리에 앉아 사표를
작성하게 되는데 다 쓰면 결국 제출은 또 못하고 서랍에만 처박겠지. 일 년만 참자는 생각으로 버티는 거임. 게다가 사장님 입은 또 얼마나 고급인지 맹물은 못 드시고 레몬이나 라임 조각을 띄워놓은 비싼 물만 드심. 이게 물 맛이 뭐가 다르냐고 중얼거리면서 사장님 유리컵에 따라 놓는 현수.
그런데 사실 은혁이가 맹물 못 마시는 건 지금 임신 중이어서 그런 거였으면 좋겠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전남편과의 아이였는데 입덧이 너무 심해 물에서도 비린내가 나는 수준인 거임. 그런데 물을 안 마실 수는 없으니까 레몬물이나 라임물을 만들어서 먹는 거고. 어쨌든 현수는 잘 모르니까 그냥
혀만 내두름. 매일 다른 옷에 머리까지 세팅하고 들어오는 은혁은 그래도 참 멋지고 예쁜 사람이었음. 대령한 커피가 너무 뜨겁다며 그냥 갖다 버리라는 저 싸가지만 빼면. 은혁의 차 옆자리에 타서 오늘 미팅 스케줄을 읽어주던 현수는 오늘도 자기 몸을 연신 마뜩찮은 기색으로 오가는 시선을
알았지만 무시했음. 눈으로 자길 훑어보던 은혁은 현수의 말이 끝났을 때 입을 열었음. 차현수 씨는 집에 상의가 딱 세 벌이야? 내가 세어 봤더니 그런 것 같아. 중얼거리는 얼굴이 냉정해서 현수는 또 속이 부글거리는 걸 겨우 삼키겠지. 아 네... 대강 대답하고 한숨이나 쉬며 차창 밖을 바라보는
현수. 보통 은혁의 마음에 안 들면 하루만에도 잘리곤 한다던 비서 자리를 그래도 꽤 오래 유지하고 있었으니 이만하면 합격인 건가 싶긴 했는데, 그래도 은혁은 여전히 자신이 성에 안 차는 모양이었음. 현수는 속으로만 툴툴거렸음. 은혁은 패션 산업의 선두주자니 어쩌니 하는 타이틀을 달고 있으니
뭔가 보는 눈이 다른지 모르겠지만 자긴 그냥 세일 매장에서 대강 색만 보고 집어 온 옷들을 번갈아가며 입고 출근하는 게 단데. 그래도 왠지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잖음. 그런데 은혁이 먼저 입을 열었음. 아무리 잘 입어도 태가 안 나는 놈들도 있어. 전에 온 모델 봐. 뭘 입어도 안 되는
놈들이 모델이랍시고 그러고 있는 거. 현수 씨는 잘만 입히면 바로 태가 날 옷걸이라 그래. 그런데 그 옷걸이를 왜 썩히나 안타까워서. 회사 창고에 촬영하고 남는 옷 있으니까 출근하면 그거라도 가져다 입어. 작게 내뱉은 은혁이 피곤한 눈두덩을 누르며 눈을 감았음. 그런데 은혁의 말투는 이제껏
들어온 무덤덤하고 냉정한 류와는 조금 달라서 현수는 속으로 이죽거리던 건 잊고 얼떨떨해졌겠다. 내용은 신랄했지만 오히려 그냥 평범한 조언 느낌. 그러고 보면 현수는 오늘 아침 어떤 전화를 받고 처음으로 크게 소리를 지르는 은혁의 목소리를 들었었음. 그게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해?
당신한테 양심이 있으면 그딴 소리를 할 수 있어? 두 번 다시 전화하지 마. 민서 당신 애 아니야. 내 애야. 분에 찬 목소리로 전화를 끊은 은혁의 숨이 한참 가빴고 현수는 문 밖에서 굳은 채 어색하게 서 있었었음. 그 일 때문인가... 오늘 좀 유난히 힘이 빠지신 것 같기도 하고. 사장님이 이혼을
하셨고 아이가 있다는 것까진 알았지만 그래도 정확한 사정까진 모르니까. 뭘 쳐다봐? 그런데 얼마 뒤 날아온 은혁의 뾰족한 물음 때문에 곧장 그런 따위 생각을 접어 버렸지. 그럼 그렇지 저 싸가지가 어디 가겠음. 이혼도 저것 때문에 했을 거다. 저 성질을 집에서도 견디는 사람이 어디 있겠음.
그래도 다음 날부터는 쭈뼛거리며 회사 창고까지 내려가보는 현수겠다. 기자 되겠다고 들어와서 이제 패션까지 신경쓰고 있는 처지가 웃기긴 한데 뭐 어쩌겠음. 그리고 그 날 꽤나 깔끔하게 차려입은 채 머리까지 만지고 온 현수는 사무실로 들어온 은혁의 시선이 잠깐 자기한테 머무는 걸 느꼈겠다.
한참 훑어보던 은혁이 그랬음. 괜찮네. 그러곤 쓱 스쳐 지나가는 은혁. 별 거 아닌 칭찬이었는데 현수는 이상하게 뿌듯해졌음. 생각해 보면 그게 이은혁한테 처음으로 들어 본 칭찬이었음.
그 후로 현수는 일을 하면 할수록 자꾸만 은혁한테서 의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됨. 어느 날 은혁이 자기 자택으로 가져 오라고 시킨 목업 책을 들고서 밤 늦게 도착한 현수. 뉴스에서나 구경하던 으리으리한 부잣집인데 현수는 좀 얼이 빠져서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한숨을 푹 뱉었음. 이 사람 아래에서
자기가 언제까지 일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음. 사람 인생이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거긴 하다지만 살면서 자기가 패션 매거진 회사에서 일하게 될 거라곤 상상도 해본 적 없는 현수임. 아무리 잘 해도 수틀리면 잘릴 수 있는 위치기도 하고. 사실 기자가 되기 위해 추천서 같은 걸 써 주는 것도
전적으로 은혁의 의사에 달렸지 자기가 맨날 이래 봤자 아무것도 얻는 게 없을지도 모르고. 이런저런 상념에 잠긴 채 문이 열리기까지 기다렸는데 뜻밖에도 은혁이 직접 문을 열어줬을 거. 여느 때처럼 은혁네 집에 있는 도우미분이 대신 나오실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음. 현수는 갑작스레 마주친
은혁의 얼굴에 좀 멍해졌음. 집에서 방금 막 나온 모습은 처음 보니까. 깔끔하고 간편한 실내복 차림에, 늘 칼같이 세팅하던 머리도 그냥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렸다. 게다가 동그란 알의 안경을 쓰고 있었고. 이렇게 보니까 정말 생각보다 더 젊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음. 원래도 어린 나이란 건
알았지만 이제야 제 또래처럼 느껴지는 거임. 그런데 그런 은혁의 머리카락 한쪽에 서투르게 매달린 깜찍한 머리방울이 있어서 현수는 그걸 보고 몹시 의아해졌음. 사실 웃음을 터트리려다 겨우 참았음. 영유아기 애들이나 쓸 만한 귀여운 머리방울인데 은혁의 머리가 조금 긴 편이라 그걸로도 머리가
묶이는 모양이었음. 그런데 또 묶은 솜씨가 딱히 깔끔하지는 못하고 비뚤빼뚤했음. 책 주려고 와선 왜 안 주냐는 식으로 눈썹을 올리던 은혁은 현수의 시선이 와 닿는 곳을 알아챘음. 그제야 깨달았는지 묶인 머리를 급하게 풀어내는 손. 은혁의 귀가 좀 빨개진 것 같았음. 시키신 거요.
방금 마무리되자마자 가지고 왔습니다. 현수가 책을 건네자 어색하게 받는 은혁. 그래. 가 봐. 책을 품에 받아든 은혁이 머뭇거리는 태도로 고갤 끄덕인다. 그런데 그 찰나에 또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음. 아빠아... 조심스레 눈치보며 부르더니 그대로 복도 끝에서부터 종종 뛰어오는 작은 여자아이.
은혁은 당황한 낯으로 현수와 아이를 번갈아 바라보았음. 압바 빨리 와야 대. 아이스크림 녹는단 말이야... 아이가 은혁의 손에 매달려 칭얼거리는 걸 현수도 당황스러운 눈길로 보고 있었고. 응. 아빠 곧 갈 거야. 이모랑 먼저 가 있어. 은혁이 아이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으며 달래자 아이가 현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음. 현수는 이 애가 은혁을 몹시 닮았다고 생각했음. 좀 예민해 보이는 인상이나 섬세한 이목구비가. 눈 모양이 또 붕어빵이었음. 아이는 물론 은혁의 딸이었음. 외부에 얼굴이 공개된 적 없는 딸. 아저씨 누구세요? 아이가 동그란 눈으로 새침하게 묻는다. 현수가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뒤에서 겨우 따라온 도우미는 연신 죄송하다고 허릴 숙이더니 먼저 아이를 데리고 들어갔음. 내가 아저씨라고 불릴 나이는 아닌 것 같은데. 무심코 그런 생각을 먼저 한 현수는 이제 어색하게 은혁과 대치하고 있었음. 은혁의 머리에 묶여 있던 방울은 아마 저 애의 솜씨인 것 같았음.
자기 딸을 위해서 머리카락까지 내어주는 아빠라고. 이 날카로운 사장님이. 지금의 풀어진 모습도 그렇고 영 매치가 안 됐음. 가 봐. 빨개진 낯으로 한번 더 뱉은 은혁이 문을 닫았음. 현수는 얼떨결에 밀려나며 고개를 꾸벅 숙였음. 다음 날 출근했을 때 다시 본 은혁은 어제 집에서 마주한 것과는
또 딴판이었겠지. 한 치의 빈틈 없이 세팅된 모습이라 현수는 자기가 어제 본 사람이 이 사람과 동일인이 아닌가 하는 멍청한 생각까지 하게 된다.
그 날엔 퇴근을 하려던 은혁에게 전화가 왔음. 한두 번은 무시를 했지만 연신 울려 대니까 그냥 둘 수는 없었을 거. 결국 전화를 받은 은혁의 표정이 차가워졌음. 현수는 그가 타고 갈 차와 기사를 불렀는데 은혁이 여전히 차에 타지 않고 있어서 그 근처에 어색하게 서 있었음. 그만 하라고 했잖아.
당신 이러는 거 지긋지긋해. 조용히 씹어뱉은 은혁이 눈을 깊게 감았다 뜬다. 심각한 대화는 얼마간 더 이어지고 현수는 그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분위기를 보면 그의 전남편과 하는 대화가 확실했음. 일전에 본의 아니게 은혁의 전화를 엿들었던 날처럼. 전화를 끊은 은혁이 작은 한숨을 뱉어냈고
곧 현수를 응시했음. 차현수. 네. 갑자기 급한 약속이 생겨서 가 봐야 할 것 같아. 네. 부탁 하나만 들어줘. 갑작스레 부탁이라니까 현수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음. 그리고 그 부탁을 들어준 결과로 현수는 지금 내비에 찍힌 유치원을 향해 차를 몰고 가는 길이었음. 나 대신 민서 좀 픽업해 줘.
도우미가 오늘 늦어. 따님 분이요? 민서 얼굴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 그런데 이제 그 중에 너도 있고.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아니라 너한테 시키는 거야. 얼떨떨하게 선 현수의 손에 차키가 쥐여졌음. 내가 곧 집에 갈 거니까 그냥 데려다 주기만 하면 돼. 안 늦을 거야. 은혁이 제게 딸의 얼굴을
들켰을 때 꽤 당혹스러워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냥 뻔뻔해지기로 한 모양이었음. 이 차 타고 가. 그러고 나서 은혁은 급히 가 버렸음. 현수는 이제 하다하다 자기가 베이비시터까지 하는 건가 싶음. 현수는 아기자기한 놀이터가 꾸며져 있는 유치원 건물 근처에 차를 세우고 어수룩하게 애를
찾았음. 은혁이 미리 연락해둔 모양이었음. 비서가 대신 갈 거라고. 현수는 선생님 손을 잡고 나온 이민서 어린이를 그렇게 다시 만나게 됐음. 노란 유치원복을 입고 종종 걸어나오는 이은혁 붕어빵. 어 그 아저씨다. 강아지 아저씨. 의미 모를 말을 종알거리는 민서에게 쭈뼛거리며 손을 흔든 현수.
민서를 차에 태우고 아기용 카시트에 앉혔음. 다시 운전을 해 은혁의 집으로 가면서 진짜 내일은 사표를 써야 하는 건가 진지한 고민을 했음. 기자가 되려고 팔자에도 없는 패션 매거진 사장 비서직에 있는 건데 이제는 사장님 애 보모 노릇까지 하게 됐음. 아저씨. 우리 아빠는요?
응? 아, 사장님... 아니, 그러니까 아빠는. 현수는 자기 입으로 은혁을 아빠라고 칭했다가 괜히 헛기침을 했음. 사장님 아닌 호칭이 어색하게만 느껴졌음. 그 사람이 애한테는 다정한 아빠라는 게 여전히 매치가 잘 안 되기도 했고. 갑자기 급한 약속이 생기셨어. 좀 이따 오신대. 그러자 아쉬워할 줄
알았던 애가 뜻밖에도 그냥 얌전히 고개를 끄덕거리는 거임. 그리곤 집에 도착할 때까지 조용했음. 현수는 은혁의 집 안 주차장까지 차를 몰아와서 차에서 내렸고 아이를 차에서 내려줬음. 도우미 분이 나오실 줄 알았는데 현수가 아무리 기다려도 기척이 없었음. 결국 자기 옆에 말똥하게 서 있는
아이를 데리고 집 안까지 들어서는 현수겠다. 실례하겠습니다. 은혁이 잠깐 불러서 방문을 할 때도 항상 현관 정도까지 들어온 게 전부였는데 이렇게 집 안에 들어선 건 처음이었음. 여기저기 아이의 사진 액자들이 놓여 있었음. 그 가운데엔 은혁과 함께 나온 사진들도 있었음. 생일을 맞은 민서가
고깔모자를 쓰고 행복하게 웃고 있었고 그 옆에는 아이를 껴안은 채 미소짓는 은혁이 있었음. 두 사람은 너무나 닮아있었는데, 특히 현수는 은혁의 얼굴에서 잠깐 시선을 떼지 못했음. 이렇게 웃을 줄도 아는 사람이면서 밖에서는 늘 차갑게 굴어댔던 거였구나. 사진이 놓인 복도를 지나친 아이는
익숙하게 자기 방까지 잘 찾아갔음. 현수는 널찍한 거실에 우두커니 서서 이도 저도 못 하고 있었음. 은혁은 그냥 애만 데려다 주면 된다고 했었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고. 그렇다고 유치원생 어린애를 이 넓은 집에 혼자 두고 가 버리는 것도 좀 그렇지. 결국 거실의 낮은 의자 위로 걸터앉은
현수. 사장님이 오시기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될 거였음. 똑딱거리며 시계 초침 흐르는 소리가 컸고 현수는 가시방석에 앉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곧 아이 방에서 연신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민서가 뭔가 작은 물건들을 한아름 안고 나왔음. 아저씨 우리 미용실 놀이해요. 응? 미용실 놀이요.
현수 앞까지 다가온 민서가 그렇게 말을 해왔을 때에는 차마 뿌리칠 수도 없었겠지. 은혁이 오기 전까지 조금만 놀아주자는 생각이었음. 사실 현수가 애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첫째라서 동생들 놀아주는 데엔 일가견이 있었거든. 그리고 한 한 시간쯤 뒤에는 현수의 머리에 온통 머리핀과 머리방울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겠다. 마치 예전에 자기가 본 은혁의 모습처럼. 그러고 난 뒤에야 만족한 듯한 민서가 고개를 끄떡거리더니, 이번엔 동화책을 안고 나왔음. 그럼 이제 책 읽어 주세요. 머리에 방울을 잔뜩 매단 현수는 어쩔 수 없이 또 책을 받아들었다.
그렇게 애를 놀아주며 기다린 지가 한참이었음. 애는 놀다가 좀 졸렸는지 소파에서 잠들어 버렸는데 은혁은 아직도 돌아올 생각이 없었음. 벌써 두 시간이나 흘러버렸음. 무슨 일이 있으신가. 연락이라도 해볼까 하던 차에 마침 도우미가 먼저 도착했음. 놀란 도우미분에게 사정 설명을 한 현수.
그래서 이제 애는 도우미 품에 안겨 방에 눕혀졌고 현수는 어색하게 복도에 선 꼴이었음. 그래도 이제는 가 봐야 할 것 같아 도우미에게 인사를 드리고 집을 나서려는데, 그 때 때마침 은혁이 돌아왔음. 현관에 들어서고 있는 은혁과 마주친 현수. 은혁은 구두를 벗으려다 조금 비틀거렸음. 반사적으로
은혁을 붙잡은 현수는 은혁의 체온이 좀 높다는 걸 눈치챘음. 사장님. 현수가 부르자 은혁이 고개를 들어올렸음. 시선 교환은 길지 않았음. 겨우 여기까지 몸을 이끌고 온 은혁이 의식을 놓고 쓰러진 건 당장 그 다음이었으니까. 사장님. 놀란 현수가 그를 붙잡아 안고서 흔들었음. 그 소란에 뛰어
나온 도우미도 놀란 기색이었음. 제가 모시고 병원에 갈 테니까 아이 좀 부탁드립니다. 현수가 정신 없이 은혁을 들쳐업고 주차장의 차로 향했음. 은혁은 키에 비해 너무 가벼웠음. 군살 하나 없이 얄팍하게 마른 몸이었음. 현수는 은혁에게 받았었던 차키를 다시 사용해서 문을 열고 은혁을 태웠음.
은혁은 여전히 열이 펄펄 끓었음. 도저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음. 현수는 태어나 그렇게 정신없이 운전을 한 경험은 처음이었음. 사고가 안 난 게 다행일 지경이었음. 게다가 병원에서 진단 내린 내용은 현수를 더 놀라게 했음. 약물 반응으로 쇼크가 오신 것 같은데 그것 때문에 뱃속에 있는 아기가
정말 위험할 뻔 했다는 거임. 다행히 지금은 아이 맥박이랑 은혁의 맥박도 정상이지만 앞으로는 주의하셔야 한다고. 특히 약에 대해서는 더 주의해야 하고. 현수는 병원 침대 위에 가만히 누워 있는 은혁의 모습이 너무 낯설었음. 아까는 분명 없었던 아랫입술의 상처와 손목께의 멍도 이질적이었음.
약속이 있어 잠깐 다녀오겠다던 두 시간동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었던 것인지 현수는 알 수가 없었음. 현수는 그 날 은혁 곁에서 한참 머물렀음. 은혁은 새벽 즈음에 눈을 떴음. 현수는 은혁이 안경을 찾으며 바스락대는 소리에 덩달아 잠을 깼다. 은혁의 병상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던 차라
겸연쩍은 기분이 먼저였음. 눈을 마주쳤을 때 은혁은 잠시 침묵했음. 병원이란 거야 눈을 뜨자마자 눈치챘음. 차현수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꼴을 보인 것만이 좀 신경 쓰였다. 둘 사이엔 낮은 한숨만 머물렀다. 임신 중이신 거 몰랐습니다. 결국 현수가 먼저 입을 열었지. 말하기 껄끄러운 주제라 다소
망설였는데 은혁은 생각보다 담담했음. 모르는 게 당연하지. 내가 말을 안 했으니까. 이 세상에서 딱 나랑 주치의 둘만 알았어. 그런데 이제 차현수 씨도 아니까 세 명이네. 은혁은 습관적으로 눈두덩을 덮어 누르며 마른세수를 했다. 아무렇지 않은 체 뱉는 말이 꼭 가면 같아서 현수는 입술을
깨물었음. 사장님 무슨 일 있으셨던 거죠. 은혁이 가만히 고른 숨만 뱉는다. 그 분 만나러 가신 거 아닙니까. 이혼한 전 남편분이요. 현수가 당돌하게 묻는 말이 사생활을 파고드는데 은혁은 그냥 조용했다. 그는 드물게 벽을 허물고 있었음. 은혁의 풀어진 모습을 보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음.
응. 무슨 일 있었지. 은혁이 대답하며 눈두덩 덮은 손을 떨어트린다. 멍하니 공중 어딘가를 바라보던 은혁이 생각에 잠긴다. 그 사람이 나한테 약 먹였어. 현수는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음. 섹스 한번 해 보면 다시 좋아질 거래. 내가 너무 오래 사랑받질 못해서 사랑이 뭔지 모르는 거라고.
그러니까 한 번만 기회를 주면 다시 가르쳐 주겠대. 자기가 나한테 주고 있는 게 사랑이라고. 웃기지. 사랑을 잘 아는 새끼라 그렇게 바람을 피웠나. 난 둘째 임신한 것도 이혼 후에나 알았는데... 은혁이 감정 없이 중얼거리는 말들이 하나하나 차곡차곡 박혀서 현수는 어쩔 줄을 모르게 됐음.
신, 신고 하셔야죠. 누굴? 그 사람이요. 약까지 먹여 억지로 몸을 취하려 했다는 말을 그의 입에서 듣는 건 현수를 경악하게 했음. 게다가 바람이라니. 현수에겐 그 사실도 충격이었음. 은혁의 전남편이 그런 사람이라는 건 전혀 몰랐음. 그도 그럴 것이 전남편은 대외적으로 굉장히 이미지가 좋았음.
그래서 이혼을 했을 때도 분명 은혁 쪽에 문제가 있을 거란 소문이 주가 됐던 거였음. 공교롭게도 현수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됐어. 그런데 은혁은 그렇게 대답했음. 현수는 멍해졌음.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던 사장의 모습 이면에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유리 경계면이 있단
걸 깨닫게 된다. 민서는? 차마 아무 대답도 못 하는 현수에게 은혁이 먼저 물었음. 잠들었을 거예요. 도우미 분이 봐주시고 계세요. 은혁은 고갤 끄덕였음. 가만히 누워서 자기 손등에 꽂힌 링거 바늘을 바라보던 은혁이 덧붙였음. 난 민서한테 항상 미안해. 혼자 있는 걸 익숙하게 만든 것 같아서.
은혁은 그러다 스르르 잠들어버렸고 현수는 그런 은혁의 옆에서 한참 돌처럼 굳어 있었다. 아까 아빠가 약속이 있어 오지 못했다는 말에 얌전히 고갤 끄덕이기만 하던 민서가 떠올랐음. 그게 그냥 얌전함이 아니라 습관이라고 생각하면 은혁의 미안함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음.
그런데 하필이면 그 날 병원에 함께 들어선 현은의 모습이 사진으로 찍히고 말았음. 그를 안고 병원에 들어가는 내내 정신이 없어 은혁의 얼굴을 가릴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게 원인이었음. 병원 내에서 어떤 루트로 말이 새어나갔는지 은혁이 임신 중이라는 사실까지 그대로 까발려졌음. 그 와중에
비서인 현수가 함께 있었으니 겨우 잠잠해지는 듯했던 은혁의 이혼에 대한 소문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음. 현수도 그 기사를 봤음. 은혁이 전남편과 이혼한 이유는 비서인 현수 때문이고, 비서와의 사이에 아이를 가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던 거라고. 배신감을 느낀 전남편이 은혁과 이혼을 결심한
거라고. 사장과 비서 간의 연애라는 제목이 대중의 눈길을 끌기 딱 좋았음. 마치 은혁이 먼저 바람을 피우고 문란하게 군 사람처럼 써내려간 기사들이 포털을 뒤덮었음. 현수는 기가 차고 어이가 없었음. 다 고소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현수는 한참 씩씩거렸는데, 그 일 이후 회사에 나온 은혁은
마치 현수와 나눈 대화나 그 시간들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굴었다. 그리고 문제의 기사들을 분명 봤을 텐데 그에 대한 언급도 일절 하지 않았음. 아무렇지 않은 듯한 얼굴로 태연하게 일을 보고 원래대로 성질도 부리고 이것저것 까탈스럽게 명령하는 은혁이 현수는 이해가 되지 않았음.
결국 그날 차를 타고 스케줄 가는 길에 현수가 조심스레 먼저 기사에 대한 얘기를 꺼냈을 거. 그리고 은혁은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이 대답했겠지. 어차피 사실도 아닌 걸 왜 신경 써. 무시해. 이쪽에서 열성적으로 반응하면 오히려 인정하는 꼴이야. 차에 탄 채 목업 북을 대충 넘겨보는 은혁의 시선은
냉담했음. 네 커리어에는 지장 안 가도록 할 테니 걱정하지 마. 은혁이 현수를 흘긋 바라보다 툭 이어놓은 말이 그랬음. 그게 현수의 속을 답답하게 했음. 사장님은 억울하지도 않으세요? 그건 사실이 아니잖아요. 사장님이 바람을 피웠다고, 그런 게... 현수가 답답한 건 사실 자기가 그의 일에
엮였다는 사실보다는 은혁에 대한 거짓들 때문이었음. 누구보다 은혁의 가까이에서 그를 위한 일들을 해 오며 의외의 모습까지 알게 된 현수. 그래서 지금의 은혁을 이해할 수가 없었음. 그 때문에 저도 모르게 언성이 좀 높아진 것을 깨닫고서 금방 입을 다물고 마는 현수겠다. 죄송합니다.
결국 먼저 사과를 하고 열을 식히려는 듯 차창 바깥만 바라보는 현수. 둘 사이엔 침묵이 맴돈다. 왜 날더러 억울해하라고 화를 내줄까. 은혁은 그런 현수의 옆얼굴에 무심코 시선을 두었다가 떼어냈음.
이후 일이 생겼으면 좋겠음. 은혁의 전남편은 모델이다 보니 이런 저런 행사를 다니다 보면 은혁과 어쩔 수 없이 동선이 겹치는 상황이 생기곤 했음. 그럴 때마다 웬만해서는 지금껏 현수 선에서 끊어내고 부사장을 대타 삼아 대신 보냈었음. 특히 은혁은 그 병원 일이 있었던 이후로 전남편의 연락을
전혀 받아주지 않았음. 현수도 그런 상황을 대충 알고는 있었다. 그런데 그 날은 그야말로 돌발 상황이었음. 현수가 사전에 대비할 만한 방법이 없었음. 은혁이 참여한 브랜드 런칭 파티에 그의 전남편이 들어선 거였음. 은혁이 개최한 파티는 아니고 잠깐 인사 차 들른 거였는데 하필이면 오기로 미리
연락받지 못했던 전남편을 만난 거다. 원래 그 자리를 채우려고 했던 모델에게 일이 생겨 대신 대타로 온 거였음. 이혼한 부부에 대한 이야기는 기자들의 좋은 먹잇감이었음. 이미 많은 기자와 카메라 앞에 서 있었던 은혁은 크게 동요했음. 그러나 곧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 관리를 하는 은혁.
그러나 그의 손이 잘게 떨렸음. 현수는 은혁이 떠는 것을 목격하고 이를 깨물었음. 은혁을 당장 데리고 자리를 나서기라도 하고 싶은데 상황이 여의치가 않았음. 카메라가 너무 많았음. 간단한 인터뷰를 겨우 마친 은혁이 자리를 뜨려고 했음. 그러나 그렇게 하기도 전에 은혁의 곁에 붙어오는 전남편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음. 전남편은 사람 좋게 웃는 얼굴로 은혁의 팔을 쥐고서 아는 체를 했다. 카메라 플래시 세례는 한층 더 바쁘게 터지고 있었음. 은혁은 이제 완전히 굳은 채 멍하니 허공만 응시했음. 두 분의 관계에 진전이 있었던 겁니까? 이 뜻밖의 만남을 의도한 분이 있는 건가요?
임신하고 있다는 아이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어느 분의 아이인 건가요? 두 분의 이혼은 이 사장님의 외도로 인해서가 맞습니까? 사전에 현수가 차단했던 질문들은 그것을 기점으로 봇물 터지듯 쏟아지기 시작했음. 한 사람이 선을 넘으니 모두 같이 달려들기 시작해 밑도 끝도 없었음. 은혁은 얼굴이
창백해졌고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있었음. 옆에 서서 여전히 웃는 낯으로 은혁의 팔을 어루만지던 전남편이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은혁 씨가 허락해 준다면 제가 다시 은혁 씨 곁으로 돌아갈 수 있겠죠. 이렇게 멋진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죠. 과거 일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지금 저희는 그냥 친구 사이일 뿐입니다. 현수는 표정 관리를 못하는 은혁을 뒤에서 바라보며 주먹을 꽉 쥐었을 거다. 질문 세례는 끊이지가 않았음. 현수는 어떤 핑계로 그를 저 레드카펫 위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단지 비서에 불과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음. 점점 표정이 굳어지던 은혁은 결국 까딱 고개를 숙이며 먼저 자리를 피해 버렸을 거다. 은혁의 팔을 감싸고 있던 전남편도 뻔뻔하게 그를 따라갔음. 인적이 드문 파티장 뒤쪽 복도로 걸어들어간 은혁이 그제야 전남편의 손을 매섭게 쳐냈음. 창백해진 은혁의 표정에 날카로운 분노가
서려 있었음. 제발 그만 좀 해. 은혁이 뱉어낸 말은 완전히 지쳐 있었음. 아까 다정한 듯 웃고 있었던 전남편의 얼굴도 이제는 거짓말처럼 굳어 있었음. 이은혁. 너 임신했어? 그리고 남자가 묻는 말은 한껏 비아냥대는 투였음. 은혁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기사에서 봤어. 병원 실려갔다는 거.
그리고 뱃속에 애 있다는 것도. 그거 내 애야?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너 찾아온 거야. 내 연락은 씨발, 네가 다 씹으니까. 전남편의 말에 은혁은 입술을 깨문다. 당신 애건 아니건 무슨 상관이야. 신경쓰지 마. 그 대답에 바람 빠지듯 웃은 전남편이 내뱉는다. 그럼 그 새파랗게 어린 비서 새끼 애야?
새로 뽑은 놈이 있다더니 그 새끼가 네 새 기둥서방이라도 되나? 응? 이은혁. 남자를 가만히 노려보던 은혁이 냉정하게 잘라낸다. 그만해. 한숨을 내뱉은 은혁이 그대로 남자의 옆을 지나치려던 찰나였음. 은혁은 그대로 강하게 떠밀려 복도 벽에 부딪혔음. 왜 이래. 미쳤어? 당황한 은혁이 몸을
뒤틀며 소리쳤음. 남자는 이제 그에게 애원하기 시작했음. 은혁아. 나 너 정말 사랑해. 나 후회하고 있어. 나 정말 너랑 다시 잘해보고 싶어. 너만한 사람 나한테 절대 없어. 니 뱃속에 애새끼가 그 비서 애건 말건 신경 안 써. 한 번쯤 다른 놈한테 안겨보고 싶을 수도 있는 거잖아? 난 다 이해해.
그러니까 나한테 다시 한번만 기회를 줘. 잘할게. 나 민서도 보고 싶어. 우리 민서도 나 보고 싶어 하잖아. 응? 은혁아. 은혁을 벽에 밀어붙인 남자가 막무가내로 입술을 들이밀며 그의 허리와 엉덩이를 주물러댔음. 연신 고개를 뒤틀며 키스를 피하는 은혁. 결국 턱을 붙들린 채 강제로 입맞춤당한다.
은혁의 입술 틈을 억지로 파고들어 타액을 섞는 움직임이 집요했음. 한편 현수는 뒤늦게 그 두 사람을 뒤쫓았음. 카펫 위에서 전남편과 함께 사라져 버린 은혁을, 많은 인파 때문에 잠깐 놓쳐 버렸음. 아까 그가 들어가는 것 같았던 파티장 뒤쪽 복도로 접어들자마자 싸우고 있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음. 분명 은혁이었음. 비서. 기둥서방. 일련의 단어들을 멀리에서 들으며 현수는 다급해졌음. 그리고 현수가 은혁을 발견했을 때 그는 벽에 짓눌린 채 유린당하고 있었음. 은혁의 몸을 함부로 만지며 입 맞추던 전남편은 현수가 그에게 뛰어들기도 전에 갑자기 은혁에게서 떨어져나왔음.
은혁이 그의 혀를 깨문 것 같았음. 이 미친... 거칠게 숨을 씨근거리던 남자가 은혁을 내리치려는 것처럼 손을 들어올렸음. 현수는 그 때 가까스로 남자의 팔목을 붙들었음. 제 뺨에 날아들 타격을 대비해 눈을 질끈 감았던 은혁은 천천히 눈을 떴다. 경찰 부르겠습니다. 현수가 눈을 똑바로 뜨고
맞붙었음. 현수의 손이 분노로 떨렸음. 이거 잘 보니 그 비서 새끼네. 은혁이 기둥서방. 누구냐는 듯 바라보던 남자가 비아냥거리는 투로 웃었다. 잘 모르시겠지만 여기 감시 카메라 있습니다. 영상 가지고 경찰한테 갈 겁니다. 현수가 한 자씩 뱉어내는 말에 뾰족한 가시가 있었음. 카메라가 있다는
걸 미처 몰랐던 것 같은 남자는 그 때에야 낭패라는 낯빛이 되었다. 그거 지금 협박이라고 하는 거야? 좆같은 새끼들. 너네 한 패야? 내가 너네 둘 다 가만 안 둬. 이은혁 너는 내가 끌어내릴 거야. 네가 나 떠난 거 후회하게 만들어 줄게. 기회 놓친 건 내가 아니라 너야. 똑똑히 기억해.
자기 팔을 붙든 현수의 손을 탁 쳐낸 남자. 남자는 형형한 눈길로 은혁을 쏘아보다 곧 도망치듯 떠나 버렸다. 그리고 현수는 그제야 은혁을 살필 수 있었음. 벽에 멍하니 기대어 서서 숨을 고르는 은혁의 눈가가 붉었음. 세팅했던 머리카락은 아래로 흐트러지고 옷매무새도 엉망이었음. 사장님.
현수가 조심스레 불러도 대답이 없었음. 은혁은 경황이 없어 보였고 현수는 그런 은혁을 데리고 파티장 뒷문으로 조심스럽게 빠져나왔음. 현수에게 이끌려 나오는 내내 은혁의 얼굴엔 표정이 없었음. 의연한 척 구는 태도와는 달리 은혁의 손만은 줄곧 떨리고 있어서 현수는 입술을 꽉 깨물었음.
뒷문으로 나온 곳엔 조용하고 좁은 골목길이 있었음. 거기까지 나오고 나서야 은혁이 작게 숨을 들이마신다. 여전히 창백한 은혁의 얼굴이 걱정 됐음. 현수는 저도 모르게 여태 붙들고 있었던 은혁의 팔을 놓아주었고 은혁은 그대로 느리게 주저앉았음. 낮은 돌계단 위에 웅크려 앉은 채 연신 호흡을
고르는 은혁을 내려다보다 그 옆에 나란히 앉아보는 현수. 위로라도. 아니면 현수도 이제는 실체를 알게 된 그 쓰레기 새끼에 대한 욕이라도. 정말 뭐라도 한 마디를 해 주고 싶은데 도무지 적당한 문장이 떠오르지가 않았음. 은혁은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겨 있었음. 사장님이 안 하실 거면
제가 신고할게요. 현수가 결국 먼저 뗀 첫마디가 그랬음. 그러지 말라고 하실 거 알아서 이러는 겁니다. 제가 신고할 테니까... 느리게 고갤 들어올린 은혁의 시선이 잠깐 현수에게 닿았음. 그러지 마. 그리고 은혁이 한 대답은 현수가 생각했던 것과 한 치도 다르지 않았음. 왜요? 왜 혼자서만
참으시는 건데요. 그렇게 참아서 뭐가 나아집니까? 사장님만 참으면 누가 대단하다고 칭찬이라도 해 줘요? 그런 거 아니에요. 말 안 하면 아무도 몰라요. 끝까지 사장님을 욕하고 사장님만 나쁜 새끼라고 할 거예요. 현수는 화가 나서 자기가 주제넘은 말을 하고 있단 것도 깨닫지 못했음. 하지만
은혁은 그런 현수를 물끄러미 보다가 다시 시선을 떼어내기만 했음. 애 때문에 그래. 현수는 그 때 입을 다물고 말았음. 애는 저 사람 그래도 좋은 아빠라고 생각해. 애한테 나쁜 기억 심어주기 싫어서. 그래서 그래. 나만 참으면 그럴 수 있어서. 어딘가를 멍하니 보며 중얼거리는 은혁의 목소리에
현수는 목 안으로 얼음이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뭐라 말을 더 할수가 없었음. 담배도 애 때문에 끊었는데 이럴 때 담배 아니면 뭘 해야 생각을 멈출 수 있는지 모르겠어. 자조적인 미소가 떠오른 은혁의 얼굴은 여전히 예뻤음. 현수는 손톱 자국이 남을 정도로 주먹을 꽉 쥔 채 답답한 속을 삼켰음.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었음. 이건 사실 사장과 그의 비서간 관계일 뿐이고 자기가 은혁의 사적인 영역에 끼어들 수 없다는 건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음. 그러니 더 화가 나. 왜 화가 나는지도 정확히 알지 못한 채로 속이 끓는 거였음. 은혁을 함부로 대하는 남자에게 분노가 치밀어서?
물론 그 이유도 무시할 수 없었지만 현수의 감정은 보다 복합적이었음. 혼자 분을 짓눌러 삭히는 듯 한참 침묵하는 현수. 곁에서 찬 밤바람을 맞으며 머리를 식히는 은혁. 그리고 은혁은 그런 현수에게 입을 열었다. 차현수 씨. 혹시 별 일 없으면... 은혁의 시선이 현수를 향하지는 않았음.
그냥 허공 어딘가. 은혁은 천천히 말을 이었음. 나랑 한 잔 할까. 현수는 그 말에 겨우 다시 고개를 돌렸음. 은혁의 옆얼굴을 바라보는 현수. 은혁의 얼굴이 젖어 있었음. 그는 울고 있지 않았지만 꼭 그만큼 슬퍼 보였음. 현수는 무너져 내린 은혁의 이면을 보는 게 싫었음. 차라리 냉정하고 싸가지
없다고만 생각했던 가면으로 자길 대해주었으면. 지금 평범한 사람처럼 곁에 앉아 웅크리고 있는 남자를 보는 것이 현수를 견딜 수 없게 했으니까. 현수는 다른 건 몰랐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자긴 지금 은혁의 손을 잡아주고 싶었음. 현수는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음. 후회하게 될 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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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Feb
현수은혁 버려져서 센터에 있던 강아지 수인 차현수 데려와서 돌보게 된 은혁이... 은혁이는 잠깐 그 센터에서 봉사 겸으로 잠깐 일하던 수인 전문 의사인데 어리고 내성적인 현수가 일하는 내내 좀 마음 쓰였음. 자꾸 눈이 가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센터 떠나기 하루 전에 겨우 결정 내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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