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이쿠하라 쿠니히코의 문제작이자 아직까지도 회자되고 있는 컬트 애니메이션 <소녀혁명 우테나>에 대해 이야기해봅시다. 도입부는 생략하고, 이번 타래의 제목은 <세 가지 레이어로 읽는 우테나>입니다.
소녀혁명 우테나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너무 많이 이야기를 나눴고, 상대적으로 시청하지 않으신 분들이 많을 거라는 생각에 내용을 일일이 짚으면서 이야기하지는 않으려 합니다만, 그래도 스포일러가 포함될 수 있다는 점 미리 양해 구합니다.
도입부는 생략하겠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도입부 없이 글을 쓸 수는 없으니 <소녀혁명 우테나>라는 작품을 짚고 넘어가는 시간을 가집시다. <미소녀전사 세일러문>에서 두각을 드러내어 2기부터 총감독(시리즈 디렉터)까지 맡게 된 이쿠하라 쿠니히코는 세일러문의 세계적 흥행에 큰 기여를 합니다.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다르게, <미소녀전사 세일러문>은 사실상 원작과 애니메이션이 동시에 기획된 작품이기 때문에 원작의 느린 속도에 맞출 수 없어 오리지널 아이디어를 많이 포함해야 했는데 거기에 가장 크게 기여한 인물이 이쿠하라였습니다.
<미소녀전사 세일러문>의 원작과 애니의 차이에서 두드러지는데 원작의 '주종관계'를 애니는 '우정'으로 재해석했고, 원작의 세일러문에게 순종적이고 신비로운 이미지였던 히노 레이를 애니는 세일러문의 절친이자 라이벌, 다혈질로 재해석하기도 했습니다. 원작자는 이런 변화를 꺼렸다고 해요.
이쿠하라 쿠니히코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라면 역시 <미소녀전사 세일러문S>에서 외행성 전사들을 투입하여 내행성 전사들과 사상전을 벌이게 한 것일 텐데 이런 전개는 <세일러문>의 전개에 '깊이'를 줬다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그 사상전이라는 것은, '개인을 구할 것이냐, 세계를 구할 것이냐'라는 것으로, 외행성 전사들에게 '세계를 구하는 것'은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는 '개인'을 구하는 것입니다. 모두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내행성 전사들의 생각과 충돌하게 되지요.
무엇보다도 이쿠하라 쿠니히코가 <세일러문> 팬덤에게 각인된 이유는 우라노스와 넵튠의 관계를 동성애 관계로 재해석한 것인데 '서로만을 위해 존재하는 운명공동체형 캐릭터'는 이후의 이쿠하라 쿠니히코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모티브가 됩니다. 그리고 이 둘, <우테나>의 직접적인 모티브고요.
대중매체, 그것도 <세일러문> 정도로 메이저한 작품에서 이렇게 직접적으로 동성애가 다뤄진 적은 드물었기 때문에 이쿠하라 쿠니히코는 단숨에 '백합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기에 이릅니다. 이 둘의 관계는 동인계로 이어져 백합(GL) 장르를 활성화하는 계기가 되었으니 적절한 칭호인 셈이죠.
재밌게도 북미판에서는 동성애 관계를 직접 보여줄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이 둘의 관계를 '사촌'이라고 검열했는데 (이런 검열은 한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세일러문 방영 당시에 북미의 레즈비언들 사이에서 "내 '사촌'이 되어줄래?"라는 은어도 생겨났다고 하니… 우라넵튠이 일으킨 사회적 여파가 참 대단했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이게 우테나 타래야 세일러문 타래야. 사실 둘 다입니다.
90년대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그 누구보다도 LGBT 이슈에 진심이었던 감독이 바로 이쿠하라였던 겁니다. 세일러문 한 작품에서만 게이(쿤차이트-조이사이트), 레즈비언, 바이(우라넵튠), 트랜스젠더(피쉬아이)가 등장했으니까요. 다시 말하지만 원작을 비틀어 재해석한 설정들입니다.
그러나 세일러문의 방영이 장기화되면 장기화될수록 감독 이쿠하라 쿠니히코와 원작자 타케우치 나오코 사이의 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원작자 입장에서 애니는 원작을 존중하지 않았고 감독 입장에서 원작은 지나치게 연재가 느려 애니의 발목이나 잡는 장애물이었습니다.
결국 <세일러문R 극장판>부터 세일러문의 세계적 인기를 이끌었던 이쿠하라 쿠니히코는 원작자와의 갈등이 폭발하면서 감독직에서 강판을 당하게 됩니다. 강판을 당한 이유는 공식적으로 밝혀진 바는 없지만 그럴듯한 '소문'이 하나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소문이라는 점을 염두에 둬주세요.
그 소문은 바로, 이쿠하라 쿠니히코가 턱시도 가면의 영구 퇴장, 즉 사망 전개 기획서를 제출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턱시도 가면이 죽어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전개를 구상한 것이죠. 이 아이디어는 이쿠하라 쿠니히코의 강판 이후 부분적으로만 채용되어 전개됩니다만, 어디까지나 소문이니.
여튼 이쿠하라 쿠니히코는 감독직을 잃게 됩니다. 세일러문의 마지막 시리즈인 <세일러문 슈퍼S>는 에노키도 요지가 이어가는데, 물론 이 시리즈도 여전히 이쿠하라 쿠니히코의 영향력 아래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모든 제작진들이 이쿠하라와 연이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백수가 된 이쿠하라는 휴식기를 갖다가 마침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충격적인 후반부 전개로 사회적 이슈를 일으키는 것을 보고 영향을 받아,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같은 본인만의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을 기획하기로 결심합니다.
애니메이션 제작자 • 만화가 • 각본가 등을 차례로 영입하여 이쿠하라 쿠니히코를 감독으로 하여 신작을 만들기 위한 창작집단 'Be Papas'가 결성되고, 그렇게 우테나의 원안이 기획되기 시작하는데…
이 새로운 기획이라는 게 뭐냐면, <세일러문>에 들어간 본인의 오리지널 아이디어들을 다시 회수하기 위한 작품이었습니다. 세일러문에 이쿠하라의 아이디어가 잔뜩 들어갔으니 그 공을 다시 가져와야 했던 것이죠. 그러니까 이 신작의 원안은…
대기업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일하던 주방장이 모종의 이유로 쫓겨난 뒤 그 대기업 식당에서 자기가 만든 레시피를 이용해 다시 식당을 차린 격이었습니다. 필연적으로 이 신작은 <세일러문>의 안티테제, 즉 세일러문을 비판하는 작품이 될 수밖에 없었겠죠.
세일러 우라노스의 캐릭터성은 우테나가 되었고 세일러 머큐리의 캐릭터성은 카오루 미키와 카오루 코즈에가 되는 식으로, 우테나의 캐릭터들은 세일러문의 캐릭터들을 과장하거나 변형하여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세일러문>에서 구상했지만 실현되지 못한 몇몇 아이디어들도 신작 <우테나>의 기획에 영향을 미쳤는데 개중에 하나가 <세일러문S 극장판>이었습니다. 본래 이쿠하라가 구상했던 극장판의 내용은 따로 있었죠.
이 (실현되지 못한) 극장판에서 세일러 우라노스와 세일러 넵튠이 처음 등장하게 되는데, 세일러 넵튠은 '세계의 끝'이라 불리는 미지의 세계(미래로 추정되는)에 잠들어 있습니다.
세일러 우라노스는 세계의 끝에서 잠들오있는 세일러 넵튠을 구하기 위해, 검은색 페가수스를 타고 나타나 세일러문의 은수저… 아니 은수정을 들고 달아납니다.
이에 세일러문 일행들은 하얀색 페가수스를 타고 검은색 세일러 우라노스를 쫓으며 한바탕 로데오를 벌이게 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내용은 '어린이들에게 맞지 않고 너무 무겁다'는 이유로 기각됩니다. 하지만 이와 유사한 장면을 우테나의 오프닝에서 찾아 볼 수 있다는 게 재밌습니다.
아이폰으로 글을 작성하니 오타와 비문이 날뛰는군요. 여러분들은 저처럼 이렇게 글을 막 쓰시면 안되겠습니다.
그래서 생긴 실수 하나 정정하고 넘어가려고요. 이쿠하라 쿠니히코가 떠난 이후에 제작된 마지막 시리즈는 <세일러문 스타즈>입니다.
그러나 <우테나>의 기획은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미소녀전사 세일러문>에 강하게 얽매였다보니, 도리어 그 아류라는 느낌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던 게 아닐까 합니다.
일례로 <우테나>의 초기 기획 중 하나는 우테나를 위시한 '네오 엘레강서'(훗날의 '학생회')들이 외계에서 찾아오는 악에 맞서 듀얼을 벌인다는 내용이었다고 하는데, 이 구상은 <세일러문>의 영역 안에 머무르고 있는 게 확실하게 느껴지죠.
그러다 이쿠하라가 문득 떠올린 내용 ~ 공주가 되고 싶지만 왕자의 동생이기 때문에 공주가 될 수 없어 마녀가 되어버린 존재 ~ 이 실마리가 되어 <소녀혁명 우테나>의 기획은 급진전하게 됩니다. 가장 기이하고 입체적인 캐릭터 '안시'의 탄생이었지요.
<소녀혁명 우테나>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부모를 여의고 슬퍼하다 왕자에게 위로를 받고 왕자를 동경하게 된 우테나는 스스로 왕자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공주가 되고 싶었지만 왕자와 혈육관계였기 때문에 공주가 될 수 없었던 안시는 도구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소녀혁명 우테나>를 읽는 첫번째 레이어는 바로 <세일러문>의 비판이자 보완으로서의 <우테나>입니다. 세일러문은 다양한 사람들의 이상이 뭉쳐 탄생했지만, 대기업과 자본의 이해관계에 얽힌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세일러문> 프랜차이즈가 내재하고 있는 모순입니다.
<소녀혁명 우테나>의 두번째 엔딩곡 <VIRTUAL STAR 발생학>의 가사를 곰곰이 읽어보면 우테나라는 작품이 겨누고 있는 칼끝이 <세일러문>을 향하고 있다는 추측에 힘을 실어줍니다. 태양계의 이름을 나열할 때 '월천(Moon Sky)'로 시작하는 것부터가요.
이쿠하라 쿠니히코는 왜 <우테나>를 통해서 <세일러문>을 비판하려 했던 걸까요? 결과적으로 <세일러문>은 어린 여성 시청자들을 위시한 다양한 시청자들에게 꿈과 희망을 준 작품이 아니던가요?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상'을 제시한 바로 그 작품인데 말이에요.
저는 바로 거기에서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발생했다 생각합니다. LGBT를 위시한 소수자 이슈에 관심이 많은 이쿠하라가 '소외된 여성'에 관심을 가지는 건 당연했고, 그를 중심으로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상을 제시하는 작품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여성을 '거대시장'으로만 인식하는 기업이 있으니까요. 언젠가 제가 존경하는 분이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LGBT를 의식하는 것은 좋은 현상이지만 LGBT가 '거대시장'으로만 여겨지게 되는 것만큼 공포스러운 일이 없다"고요. 세일러문이 내재한 모순이 여기 있습니다.
결국 <세일러문> 프랜차이즈 안에서 여성들은 '거대시장'으로만 여겨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제작진들의 이상이 모여 이뤄진 내용이 자본주의 대중매체라는 특성과 결합하는 순간 시청자들에 대한 기만으로 변해버리게 되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버추얼 스타의 발생학'입니다.
그렇지만 <우테나>와 <세일러문>이 완전히 별개이며 <우테나>가 <세일러문>의 비판이기만 한 것도 아닙니다. <우테나>는 <세일러문>이 없었다면 나올 수 없었던 작품이기도 하거든요. 그보다는 <세일러문>의 비판적 보완이라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제안해봅니다.
<소녀혁명 우테나>를 읽는 첫번째 레이어가 세일러문과의 연관성이라면, 두번째 레이어는 우테나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입니다. 바로 여성입니다. <소녀혁명 우테나>와 페미니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지요. 왜냐하면 이 작품은 여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니까요.
<소녀혁명 우테나>의 주제가 '여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첫번째 레이어인 <세일러문>에 있습니다. 언젠가 트위터에서 인상적인 글을 읽은 적 있는데, '몇년이나 쉬지 않고 세일러문 같은 걸 만든 사람은 우테나를 만들 수밖에 없다'는 내용의 글이었습니다.
세일러문의 감독이 <우테나>를 만드는 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일 수밖에 없다는 거지요. <세일러문>은 여성 시청자층을 강하게 의식한 작품인 만큼, 이쿠하라는 <세일러문>을 만드는 동안 끊임없이 '여성'과 '여성성'이라는 것에 대해 고민하고 성찰할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문제가 있었으니, 감독인 이쿠하라 쿠니히코를 포함하여 <소녀혁명 우테나>의 실무진 상당수가 남성이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애니메이션 업계는 남초였기 때문입니다. <소녀혁명 우테나>은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바로 퀴어성입니다.
이쿠하라는 (본인의 성정체성에 대해 공식적으로 밝힌 바가 없긴 하지만) 사회적으로 패싱되는 성별은 남성입니다. 그런 이쿠하라가, 남성 실무진들이 주도하는 현장에서 '여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을 만든다면 기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소수자성'을 부여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리고 이쿠하라는 이미 예전부터 LGBT를 위시한 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를 해왔지요. 소수자들은 소수자성이라는 공통점을 통해 연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연대 페미니즘입니다.
물론 이런 방법은 반발을 낳기도 했는데, 다른 게 아니라 바로 '우테나'의 성우인 '故카와카미 토모코'가 독실한 가톨릭교도였기 때문에 우테나와 안시의 관계를 동성애 관계로 해석하기를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이쿠하라는 이 때문에 며칠을 앓아 누웠다고.
결국 이쿠하라의 설득, 작품을 진행하면서 변화한 가치관 등 덕분에 극장판을 제작할 즈음이 되어서는 우테나와 안시의 관계를 동성애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고 하니 결과적으로는 잘 해결되었다고 볼 수 있겠네요.
그래서일까요, <소녀혁명 우테나>에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들은 기본적으로 성별에 구애받지 않는 바이섹슈얼 혹은 팬섹슈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어떤 캐릭터도 예외는 없습니다. 이 작품에서 성정체성은 중요한 반면 성지향성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세일러문>과의 관련성, '여성과 소수자성'만으로는 뭔가 설명할 수 없는 찝찝함이 있습니다. <소녀혁명 우테나>를 해석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여기에 있는데, 분명히 여성(과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작품인데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찝찝함이 있거든요.
그리고 바로 이 '찝찝함'에서 <소녀혁명 우테나>가 가진 세번째 레이어가 드러납니다. 그 이전에 우리는 이쿠하라 쿠니히코의 성장한 시대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쿠하라 쿠니히코는 1964년생입니다. 전공투로 대표되는, 일본의 학생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에 태어났죠.
이쿠하라 쿠니히코 세대는 이른바 '좌절의 세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쿠하라가 학생이 되었을 때인 70-80년대에 일본의 운동권은 이미 외부의 압박과 내부의 모순으로 인해 무너져가고 있었습니다.
이쿠하라 쿠니히코가 가장 존경했던 이단아적인 예술가 테라야마 슈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학생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시인으로 시작해 연극 연출가를 거쳐 영화감독에 이르게 된 사람인데, 거쳐간 모든 매체마다 문제적인 작품을 발표한 이단아 중에서도 이단아였죠.
이쿠하라 쿠니히코는 테라야마 슈지를 엄청나게 존경해서, 사실 지금도 그의 작품에는 테라야마 슈지의 영향이 강하게 묻어나고 있습니다. <전원에 죽다> 한 편만 봐도 이쿠하라의 연출이 어디서 유래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을 정도니까요.
이쿠하라 쿠니히코는 사실 테라야마 슈지가 이끌던 극단이자 창작집단인 <텐조지사키>에 입단하려고 했던 적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쿠하라가 20살이 되던 해에 테라야마 슈지가 복막염으로 요절해버린 것이었습니다. 테라야마 슈지라는 강력한 구심점을 잃은 텐조지사키도 자연스럽게 와해됐습니다.
이쿠하라는 '세계를 변화시키려고 했던 인물들의 좌절'을 보면서 자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상을 쫓아 거대한 담론을 이야기하던 학생운동, 그런 학생운동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예술을, 나아가 세상을 변혁시키려고 했던 테라야마 슈지와 같은 인물들이 실패하는 걸 지켜만 봐야 했던 거죠.
그리고 이쿠하라가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하는 90년대에 이르면 일본 사회는 버블소비사회로 직행하게 됩니다. 더 이상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순수한 열망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때마침 소련의 붕괴까지 이뤄지며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은 '거대담론'은 결국 종언을 맞이합니다.
모두가 공유하는 어떤 가치, 즉 거대담론의 시대가 끝나고 찾아온 것은 개인주의였습니다. 개인의 내면에 집중하는 시대가 찾아옵니다. 이런 시대적 흐름의 기수가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입니다. 그가 발표한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는 철저하게 개인의 내면을 탐구하는 작품이지요.
"선생님 실례지만, 우테나 타래라고 해서 찾아왔는데 도대체 우테나 이야기는 언제 하려고 하시는 건가요?"
그러게 말입니다...
<소녀혁명 우테나>를 읽는 세번째 레이어이자 가장 중요한 레이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담론의 실패'입니다. 세계를 변화하고 혁명하려는 의도는 (내부적인 모순에서는 외부적인 압력에 의해서든) 결국 실패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세계를 혁명할 힘을"이라는 <소녀혁명 우테나>의 캐치프레이즈와 달리, <소녀혁명 우테나> 속 우테나는 철저하게 실패합니다. 결과적으로 우테나는 세계를 혁명하는데 실패합니다. 왜냐하면 우테나는, 이쿠하라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룰 수 없는) 이상만을 쫓는 바보'이기 때문입니다.
우테나 팬분들이 백만개의 검을 들고 저를 찌르려고 오시는 게 느껴지지만 아직 이야기 안 끝났으니까 그 검 좀 잠시 내려주시기를 간청드리며...
그럼 우리는 질문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패에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지?' 여기서 소녀혁명 우테나의 세번째 레이어가 드러납니다. 바로 '실패의 의미'입니다. 이상을 쫓던 이들의 혁명과 운동이 실패하고 버블소비사회로 직행하는 걸 보고 자라야 했던 이쿠하라가 이 질문을 던지는 건 당연합니다.
"결국 사람들이 공유하는 어떤 변화에 대한 이상(=즉 거대담론)이 무너지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거라면, 그 실패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이 정서는 2020년대 한국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유효한 질문입니다. 일본도, 한국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회피하고 있지만요.
"분명히 날 많이 닮았군. 나도 한때는 그랬다.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에 가치가 있다… 그것이 세계를 혁명할 유일한 방법이라고. 하지만 힘이 없으면 그런 객기 가지고는 아무 것도 못 바꿔."
여기서 다시 한 번 <소녀혁명 우테나>라는 작품을 돌아봅시다. <우테나>는 선구자적인 작품이라고 불립니다. 페미니즘 담론에 20년 앞서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말이에요. 하지만 사실 90년대 일본에서는 (버벌소비사회로 인해 형성된 여성 시장에 힘입어) 페미니즘 담론이 형성된 적이 있습니다.
오카자키 쿄코, 안노 모요코, 키리코 나나난과 같은 여성 만화가들이 '여성'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여성 뉴웨이브 만화'라는 사조를 형성하기도 했죠. 일본에서는 90년대에 이미 페미니즘 담론이 형성되고 있었던 겁니다.
<소녀혁명 우테나>의 원안을 맡은 사이토 치호 또한 그런 사조의 일원이었고요. 학생운동을 위시한 거대담론의 실패와 그로 인한 버블소비사회로의 직행은 사실 또다른 담론을 탄생시키고 있었던 겁니다. 하나의 거대한 담론이 실패하더라도, 새로운 담론은 탄생합니다.
한 가지 질문을 던져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공동체는 언제 죽을까요?
극장판 <소녀혁명 우테나: 어도레센스 묵시록>에서는 꽤 직설적으로 이야기됩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담론(왕자)이 죽었을 때, 함께 죽습니다. 왕자가 죽은 <우테나>의 세계, 즉 오오토리 학원은 망자들의 세계나 다름이 없습니다. 분명히 존재하고,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허상인 거죠.
담론과 이상은 우리 사회를 유지시키는 가장 강력한 구심점입니다. 그렇지만 이야기되어야 할 담론이, 이상이 더 이상 이야기되지 않을 때 사회는 힘을 잃습니다. 90년대 이후 일본 사회가 그런 동력을 상실하여, '보수화되고' 있는 것처럼요.
<소녀혁명 우테나>가 '여성'과 '소수자성'이라는 담론을 가져온 것은 그 시기에 대두되던 새로운 담론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서 <소녀혁명 우테나>의 세번째 레이어가 그 실체를 드러냅니다. '우리에겐 여전히 논해야 할 많은 담론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성과 페미니즘, LGBT 이슈처럼요.
물론 새로운 담론의 제시가 항상 성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새로운 길의 개척은 실패의 위험성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상을 쫓던 많은 담론들은 실패했던 경험을, (일본의 사회는) 가지고 있습니다.
이쿠하라 쿠니히코는 <소녀혁명 우테나> 완결 이후 인터뷰에서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새로운 담론이 제시되어도, 그것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면 새로운 담론을 제시하는 행위에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일까?" 이 질문에 <소녀혁명 우테나>는 대답합니다. "실패에도 가치가 있다"고요. 세계를 혁명하지는 못할 지언정, 개인을 변화시킬 수는 있을 거라고.
<소녀혁명 우테나>는 개인을 변화시키고, 나아가 극장판인 <어도레센스 묵시록>에서는 그렇게 개인의 변화가 누적된 결과 마침내 세계의 혁명에 성공하게 되는 모습을 담은 것은 그런 의미에서 대단히 논리적인 구성인 겁니다. 물론 이런 변화는 필연적으로 백래쉬를 낳지만요.
결국 <소녀혁명 우테나>는 학생운동의 실패가 낳은 작품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혁명가적인 학생 vs 학생회의 대립 구도도 사실은 학생운동이 한창 일어나고 있던 시기, 일본 서브컬쳐에 반영된 역사적인 맥락을 보면 우테나는 학생운동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는 작품이지요.
이상을 쫓는 변혁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새로운 담론을 얘기하는 것을 멈춰서는 안됩니다. 비록 실패하더라도, 담론은 개인에게 남아 서서히 변화를 일으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테나는 얘기합니다. "너와 내가 만나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라"고요. 그것이 실패할지라도.
실패가 두렵다고 시도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변화도 이루어지지 않게 될 겁니다.
이쿠하라 쿠니히코는 사실 팬들과 괴리가 가장 심한 인물 중 하나입니다. 게다가 팬들 사이에서 지금까지도 논쟁이 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죠. 가장 큰 이유는 '이쿠하라 쿠니히코는 정말로 페미니스트인가?'입니다.
이쿠하라 쿠니히코라는 창작자와 팬들 사이의 괴리는 바로 '페미니즘'을 대하는 태도에 있다 생각합니다. 이쿠하라 쿠니히코는 페미니즘적인 가치관을 가진 인물이지만, 그것은 이쿠하라 쿠니히코를 구성하는 많은 사상과 담론들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우테나'로 이쿠하라 쿠니히코에게 입문한 많은 팬들은 그가 페미니즘 담론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바라며, 그 잣대로 이쿠하라 쿠니히코를 봅니다.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 과정에서 어떤 괴리가 발생하는 것이 아닐까,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이쿠하라 쿠니히코의 진정한 주제의식은, 사실 '새로운 담론의 개척'에 있다 생각합니다. 이는 <소녀혁명 우테나>부터 <돌아가는 펭귄드럼>, <유리쿠마 아라시> 나아가 <사라잔마이>까지도 적용될 수 있는 주제의식이기 때문입니다.
<펭귄드럼>은 담론의 실패 이후 남겨진 세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유리쿠마>는 "새로운 담론의 제시 = 눈치 없음 = 악"으로 여겨지게 된, 보수화 된 일본 사회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라잔마이>는 과거 세대의 실패가 어떻게 다음 세대의 성공으로 이어지는지에 대해 얘기합니다.
눈치없이 새로운 담론을 꺼내드는 녀석들은 빨갱이입니다.
한국 사회에서도 현재진행형인 이야기지요.
"빨갱이"는 악입니다. "페미"는 악입니다. 소수자 인권을 얘기하는 "PC 세력"들은 악입니다. 눈치 없이 새로운 담론을 제시하여 사회의 안정을 파괴하려 들다니!
<유리쿠마 아라시> 속 '투명한 폭풍'은 새로운 담론을 제시하는 '아웃사이더'들을 배제하여 사회의 안정을 꾀합니다. 재미난 것은 사실 진짜로 그 사회를 위협하고 있는 것은 이런 곰과 아웃사이더들이 아니라 바로 새로운 담론을 배제해버리는 '투명한 폭풍'이라는 구조 자체라는 사실입니다.
배제! 배제! 배제! 배제!
그렇지만 '정말로' 사회를 좀먹고 있는 것은, 나아가 사회를 자멸의 길로 몰고 있는 것은 소수자와 그들이 제시하는 새로운 담론을 배제해버리는 사회입니다. 사실 이쿠니 월드(우테나-펭귄드럼-유리쿠마-사라잔마이로 이어지는 일련의) 작품들은 하나입니다.
철저하게 실패하여 남은 트라우마를 우리는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그 장황한 트라우마 극복의 이야기는 <돌아가는 펭귄드럼>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돌고 돌아서 결국은 사랑이지만요. "어차피 아무 것도 되지 못할 아이들"은 마침내 '연대'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냅니다.
그래서 <펭귄드럼>의 히마리는 아이돌 스타를 꿈꿉니다. 소외된 이들은 슈퍼스타가 되고 싶어합니다. 왜냐하면 무대 위에 올라가면 우리는 마음껏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으니까, 모두가 내 목소리를 들어주니까. 하지만 이 세계에는 그런 '무대'에 오르지 못하는 소수자들이 잔뜩 존재하지요.
<사라잔마이>는 이런 주제의식의 완성형입니다. 레오와 마부로 대표되는 과거 세대는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아주 철저하게 실패한 인물들입니다. 이보다 더 실패할 수는 없습니다. 밑바닥을 찍고 지하까지 파고 들어갑니다.
그러나 이들의 철저한 실패는 역설적이게도 미래 세대의 길을 밝혀주는 빛이 됩니다. 문자 그대로의 연출이라 더 할 말이 없긴 한데, 과거 담론의 실패에서도 우리는 배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저하지 말고 '시작하라는 것', '시작되지 않으면' '이어지지 않고' 나아가 '끝나지 않으니까'요.
<우테나>는 현재에도 유효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작품입니다. 물론 <우테나>라는 작품 자체가 숭배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메세지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실패할지도 모르지만 그 실패의 가능성 때문에 지쳐서는 안된다'는 거지요.
마지막으로 하고픈 말, <우테나>라는 작품을 '숭배'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우테나>는 어디까지나 33살의 혈기왕성한 인간, 이쿠하라 쿠니히코가 만들어낸 '엔터테인먼트'라는 점입니다. 우테나는 사상서나 철학서가 아닙니다. 우테나의 본질은 대중매체-엔터테인먼트-애니메이션이에요.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우테나에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우테나의 계보는 일본을 넘어 전세계에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핀과 제이크의 어드벤처 타임>, <스티븐 유니버스>, <우주의 전사 쉬라>, <아날로그: 어 헤이트 스토리>에 이르기까지.
그런 계보의 위에 있는 작품으로서 즐기면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솔직히 저도 제가 2020년까지도 우테나 타래를 쓰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어서 이쿠하라 쿠니히코를 졸업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저만 덕질할 수 있으니까요.
~ 오늘의 타래 끝
여기로 이어집니다. 트위터는 정말 장문 쓰기에 안 좋네요.
우테나 이야기하는 타래라며 시작했는데 결과적으로 우테나 빼고 다 이야기한 타래가 되었네요.
보충 타래 시작합니다.
<소녀혁명 우테나를 이루는 근원들을 찾아서>
1. 슬픔의 벨라돈나
이쿠하라 쿠니히코가 애니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된 성인용 애니메이션으로, 이쿠하라 특유의 탐미주의적이면서도 정적인 연출 스타일은 이 작품에서 비롯되었다고 봐도 좋습니다. 봉건주의 사회 하에서 억압 받던 여성 '벨라돈나'는 악마와 계약하여 마녀가 됩니다.
이 작품의 가장 특이한 점은 '움직임'이 극도로 적다는 것입니다. 그림 한 장 올려놓고 목소리로 이야기를 진행하는 식이죠. 크레딧에는 야마모토 에이이치가 올랐지만 애니메이션 <은하철도의 밤>을 연출한 스기이 기사부로가 사실상의 감독직을 수행했다고 합니다.
<슬픔의 벨라돈나>의 마지막에는 봉건주의 체제가 만들어낸 마녀, 벨라돈나의 화형이 결국 사람들의 변화를 자극하여 프랑스 대혁명의 시초가 되었다는 식의 묘사가 등장하는데, <소녀혁명 우테나>가 강하게 연상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2. 다카라즈카
<소녀혁명 우테나>의 연출은 연극에서 따온 것이 많습니다. 이쿠하라가 연극 매니아이기 때문인데, 개중에서도 '다카라즈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다카라즈카는 전원 여성으로 이뤄진 가극단으로, 우테나의 듀얼 장면에서 다카라즈카를 모방한 연출이 많습니다.
3. 테라야마 슈지
일본 문화예술계가 낳은 가장 기이한 돌연변이, 테라야마 슈지. 테라야마 슈지는 시인으로 시작해 연극 연출가를 거쳐 영화감독이 된 존재로 미성년자들에게 마약을 해보라고 권하는 글을 쓰거나, 가출을 해봐야 한다는 주장을 했던 문제적 인물입니다.
게다가 저런 주장을 대단히 논리정연하게 펼쳤기 때문에, 테라야마 슈지는 '사회를 어지럽히는 위험인물'로 낙인 찍혔습니다. 테라야마 슈지는 '위험한 테러리스트'라 불렸고, 교사들은 그의 책을 찢으며 '이런 책을 읽으면 정신이 망가진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테라야마 슈지는 애니메이션 <PSYCHO-PASS>의 악역, 마키시마 쇼고의 모티브이기도 한데, 마키시마 쇼고는 작중에서 테라야마 슈지의 격언을 인용하기도 합니다. 테라야마 슈지의 별명을 생각하면 꽤 적절한 차용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테라야마 슈지의 영화 <전원에 죽다> 한 편만 보아도 '아! 이쿠하라!' 싶은 연출이 대거 등장하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테라야마 슈지의 영향은 <우테나>에서 보다 직접적으로 이루어지는데요,
테라야마 슈지의 연극과 영화의 음악을 담당한, 테라야마 슈지의 음악적 페르소나이자 제자인 동시에 후계자이기도 한, "J.A. 시저"를 <소녀혁명 우테나>의 음악감독으로 영입한 겁니다. 테라야마 슈지의 두 정신적 후계자가 한 자리에 모이는 자리가 된 거지요. (극단 <텐조지사키>를 이어간 인물)
이쿠하라 쿠니히코가 J.A. 시저를 영입하겠다고 했을 때 모든 스태프들이 뜯어 말렸지만 그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쿠하라 쿠니히코의 선택은 옳았고, 우리에겐 이 끝내주는 장면이 남았지요.
그 결과물:
이상으로 오늘의 타래를 진짜 끝냅니다.

• • •

Missing some Tweet in this thread? You can try to force a refresh
 

Keep Current with 심야인레㋐

심야인레㋐ Profile picture

Stay in touch and get notified when new unrolls are available from this author!

Read all threads

This Thread may be Removed Anytime!

PDF

Twitter may remove this content at anytime! Save it as PDF for later use!

Try unrolling a thread yourself!

how to unroll video
  1. Follow @ThreadReaderApp to mention us!

  2. From a Twitter thread mention us with a keyword "unroll"
@threadreaderapp unroll

Practice here first or read more on our help page!

More from @inlemidnight

6 Dec
이 말에 정말 정말, 정말, 정말로 동의해요. 그림만이 아니라 모든 예술에 통용될 수 있는 이야기고요. 저는 작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어떤 소재를 선택해, 관찰해서, 이야기를 뽑아내는 존재라 생각하거든요. 소재는 작가를 만들고 작가는 소재로 기억되어요.
미야자키 하야오를 생각하면 비행기와 바다가 떠오르고, 쭝 레 응윈을 생각하면 동화와 인어가 떠오르고, 박찬욱을 생각하면 감금된 사람과 벽지가 떠오르는 것처럼요.
이쿠하라 쿠니히코는 작가가 '소재를 선택하는 자'라는 걸 가장 잘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라 생각해요. 그는 아예 소재를 정해놓고 작품을 구성해나가지요.
Read 4 tweets
6 Dec
<벼랑 위의 포뇨>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 이 장면의 모든 것이 좋지만 꼭 이유 하나만 말해야 한다면 포뇨가 눈을 감은 동안 몰래 햄과 계란을 넣어주는 장면이에요. 포뇨의 입장에서는 면에 물을 부었을 뿐인데 갑자기 햄이 생겨나는 '마법'이었겠지요. 리사는 마법사고요.
작중 소스케의 어머니, 리사는 25살입니다.
다들 충격을 받지만, 네 사실입니다.
리사의 초기 스케치.
Read 4 tweets
5 Dec
오늘은 김치 이야기를 해봅시다.
한국인에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바로 김치입니다. 김치 문화는 이미 요리의 범위를 초월하여 별개의 카테고리로 독립해나갔다 봐도 무방할 정도로 발달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익숙한 '김치'는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사진 출처 '셔터스톡' Image
이렇다 할 냉장 시설이 없었던 고대에 채소를 오래 보관하기 위해서 '절임'이라는 개념이 생기는 건 무척 당연했습니다. 서양에서는 소금이나 식초 담근 물에 음식을 절여 '피클'을 만들었고 중국과 한국에서도 이 피클과 유사한(사실상 같은) '저'를 만들어 먹었습니다. 소금물에 절인 채소를 뜻해요.
한국에서는 이런 '저'를 '디히'라고도 불렀습니다. 디히는 곧 '지'로 변했는데요, 지금도 '단무지' '장아찌' '묵은지'와 같은 단어에 '지'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일부 주장에 따르면 '찌개'도 이 '디히'에서 생긴 말이라고 하는데요,
Read 13 tweets
5 Dec
경상도식 김치에 대한 이야기
경상도에서도 간혹 김치에 굴을 넣어 굴김치를 담글 때가 있습니다. 다만 굴의 가격이 비싸다 보니까 김장을 할 때 자기가 상대적으로 아끼는 사람의 김치에 굴을 넣는 경우가 많다고 해요. 김치가 왔는데 굴이 들어간 굴김치라면 감사히 여기세요(?)
다만 김치는 집안마다 방식이 다 다르니까, 특정한 집안에만 통용되는 이야기겠지요. 굴을 좋아하는 사람의 집에만 굴김치를 담아준다거나 하는 경우가 충분히 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경북 내륙 기준입니다!
Read 4 tweets
27 Nov
단편소설은 학창시절부터 써왔지만 2016년을 전후해서 소설 창작 흥미가 싹 사라져버려서 더 쓰지 않게 되었죠.
사실 근래에 소설을 하나 준비하고 있긴 합니다. 제목은 정해지지 않았지만 컨셉과 스토리는 정해져 있어요.
포스트아포칼립스물이고, 구어체로 전개되는 소설입니다. 구성은 천일야화를 따르고 이야기꾼이 나와서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이 이야기꾼에겐 분명한 목적이 있고 그래서 이 이야기꾼의 이야기는 믿을 수 없는 구석이 있어요.
이런 소설을 구상하게 된 계기는 트위터 때문인데요, 소설 쓰는 게 트위터처럼 편하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그럼 트위터 쓰는대로 소설을 쓰면 되는 거 아녀? 해서 이걸 스타일의 준거로 삼고 쓰고 시작했지요.
Read 4 tweets
27 Nov
어느 의대, 교수가 질문했습니다.
"한 부부가 있다. 남편은 매독에 걸렸고 아내는 심한 폐결핵에 걸렸다. 이 부부에겐 아이가 넷 있었는데 하나는 며칠 전에 병으로 죽었고 나머지도 건강하지 못하다. 이 부인은 다섯번째 아이를 임신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한 학생이 대답했습니다.
"낙태 수술을 해야 합니다."
교수는 대답한 학생을 바라봅니다.
"자네는 방금 베토벤을 죽였네."
90년대생까지는 익숙할 이 이야기는, 사실과 무관한 도시전설입니다. 분명한 의도를 위해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는 점에서 악랄하게 보이기까지 합니다. 낙태 반대를 위해 거짓으로 지어낸 '이야기'죠.
Read 73 tweets

Did Thread Reader help you today?

Support us! We are indie developers!


This site is made by just two indie developers on a laptop doing marketing, support and development! Read more about the story.

Become a Premium Member ($3/month or $30/year) and get exclusive features!

Become Premium

Too expensive? Make a small donation by buying us coffee ($5) or help with server cost ($10)

Donate via Paypal Become our Patreon

Thank you for your support!

Follow Us on Twit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