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올린 트윗에 많은 분이 여러 의견을 이야기해주셨습니다. 제가 모르는 것도 있고 새롭게 알게 되는 것도 있어서 흥미롭더군요.
그런데 여기서 몇가지 질문이 생겨나서, 새로운 내용으로 추가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아내가 물어봤습니다.
"근데 왜 일본 사람들은 가만히 있는거지?"
아시겠지만, 일본은 권력에 대한 반항이라는 것이 매우 약한 나라입니다. 전세계에서 이런 나라를 찾기 힘들죠.
한국에서 촛불 집회가 있을때, 일본인 친구들이 의아하게 생각했어요.
"어떻게 국민이 대통령을 몰아낼 수 있어?"
방법이 아니라 '이상한 일'이라는 뜻이죠. 아마 일본인의 그런 반응에 의아했던 분들이 많으실거에요.
그리고 생각하겠죠? 일본에도 '농민 반란'은 있지 않았어? 왜 지금은 없는데?
네. 일본에도 민중 봉기가 없었던 건 아닙니다.
잇키(一揆)라는거죠. 신장의 야망 시리즈 같은 걸로 전국시대가 익숙한 분은 혼간지를 중심으로 한 잇코 잇키가 친숙할거에요. 이들은 일종의 자치 조직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대대적으로 나서서 일종의 독립을 추구하는 느낌을 보였던 거죠.
그런데 한가지 주의할 점이 있어요. 잇키는 '민중봉기'가 아닙니다. 잇키를 굳이 번역하자면 '노동쟁의'라고 보는게 더 맞아요. 잇키를 통해서 달성하려는 것은 크게 두가지입니다.
1) 세금을 낮추어달라.(급료 교섭)
2) 좀 더 자치권을 달라.(권리 교섭)
역사적으로 유명한 형태가 아니라, 지방에서 심심치 않게 벌어지는 소규모 잇키의 모습을 묘사해보죠.
보통 이런 잇키는 재난에서 시작됩니다. 홍수가 나서 작황이 좋지 않았다.당연히 굶주리게 되죠.
그럼 사람들이 모입니다.보통은 신사에 모이는데 일단 그들끼리 이야기를 나누죠.
한참을 얘기한 끝에 말합니다.
"좋아. 이제 반대하는 사람없지? 그럼 일어나자."
(중요한 것, '전원 찬성'이 매우 중요해요. 어쩌면 일본의 독특한 창작 시스템 '제작위원회'의 원류일까요?)
여기에 나름대로의 서약식이 있기도 해요.
그리고 뭔가를 들고 일어날 것입니다. 무기를 들기도 하겠죠.
집단으로 뛰쳐나간 사람들. 그들은 딱히 폭력을 휘두르거나 하지 않습니다.
영화 [드래곤 하트]에서는 초반에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이를 진압하던 왕이 살해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일반적인 잇키에선 이런 건 없어요.
집단의 위용 그 자체가 힘이 될 수도 있겠지만, 다이묘도 딱히 그들을 진압
다이묘도 그들 집단을 딱히 진압하지 않습니다. 사실 봉건시대에 영민들을 살해하는 일은 매우 드물어요. 중세시대로 그렇고요. 왜냐하면 영민=노동력이거든요. 중세시대 농민들의 이주를 엄격하게 금지한 것도 그런 원인이 있죠.
여하튼 잇키는 영주의 관저 근처에 가서 멈추고, 대표가 나섭니다.
대표는 대나무 자루를 들고 있는데, 그 끝에는 상(上)이라고 써진 상소문이 있죠.(일본 만화에서 흔히 나오는 연출입니다.^^)
이렇게 되면 다이묘도 위기에 몰렸죠. 잇키 무리들은 수가 무진장 많고,당연히 위협일거에요. 하지만, 다이묘가 직접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격에 대해서 여러가지 이야기했죠? 다이묘 정도가 되면 농민과는 격이 완전히 다릅니다. 다이묘가 직접 농민 앞에 나서는 일은 거의 없으며, 있다고 해도 모습만 드러내지 직접 말을 하지 않습니다.
"OO님께서 직접 모습을 드러내셨으니 여러분은 진정하십시오."
만화에서 너무 많이 나와서 익숙하겠죠
보통은 하급 무사가 나섭니다. 그리고 잇키 대표는 작대기 를 길게 내밀고 상소문을 바치죠.
"내가 잘 받았으니 윗분(우에사마)께 전하겠다. 너희는 그만 돌아가거라."
기세에 따라 다르지만, 작은 규모의 잇키는 보통 여기서 끝납니다. 나중에 우에사마께서 칙령을 내려서 세금을 내려주시거나 하겠죠
자... 여기까지의 모습을 보면 뭔가 익숙한 느낌이 드는 분들도 있을거에요. 일본의 비즈니스 드라마들에서 매우 자주 등장하는 모습이죠. 회장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비서 정도가 나서서...
네. 잇키는 민중봉기가 아닙니다. 잇코 잇키 정도의 규모라면 조금 다르겠지만, 대개는 노동쟁의에요.
그렇다면 일본에서 민중이 대대적으로 저항한 일은 없었을까요? 있습니다. 하지만 별로 눈에 안 띄죠.
그중 하나가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사무라이의 시대]에 나옵니다. 오다에 반항한 이가의 난. 이 다큐에서는 잇코 잇키보다도 더 상세하고 길게 소개되죠. Image
실제로 이가의 난은 굉장히 오래 지속되며 오다를 괴롭힌 사건이었습니다. 이른바 '이가 닌자'의 전설은 바로 여기서 나왔다고 해도 좋죠.
이가는 다이묘가 다스리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다이묘가 다스리는 땅이 아니라 완전히 자치적인 세력. 일본 내의 '외국'이라고 해도 좋은 곳이었죠.
이가의 난이 여느 잇키와 다른 것은 '근거지'가 없다는 겁니다. 자... 다시 이야기할게요. '자리(격)'이 없습니다.
격이라는 말을 쓰다가 '자리'라는 말을 쓰게 되었군요. 그런게 그럴 수 밖에 없어요. 일본의 '타고난 격'이라는 것에 이 '자리'라는 말을 포함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봉건 세계였습니다. (지금도 중세 봉건 시대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만.) 봉건 세계의 특징 중 하나는 상부-하부 구조가 매우 엄격하게 나뉜다는 겁니다. 그리고 상부 구조를 나타내는 상징이 반드시 존재하죠.
지배층-피지배층의 관계는 어느 시대나 존재하지만, 봉건 시대의 관계는...
봉건 시대는 지배-피지배나 주종 관계 이상.소유 관계에 더 가깝습니다. '농노'라고 하잖아요? 봉건 통치자는 영민들을 소유했습니다. 그것은 그의 생산력이자 재산이고 영토에 묶인 아이템입니다. '봉건'이라는 말 자체가 바로 영토에 묶인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어요.
지배자는 자신의 위용을 드러내기 위하여 눈에 띄는 상징물을 원합니다. 바로 '성'입니다.
흔히 성은 전투용이라고 생각하지만, 처음 성을 세우는 이유는 전투보다도 '이 건물이 보이는 곳에 있는 모든 것이 내 소유' 같은 느낌이 더 강했습니다. 요새보다도 '탑'에 가깝군요.
바이킹들이 아일랜드를 정복할때 우선 '성'부터 세웠습니다. 처음에는 나무, 나중에는 돌. 거주지이기도 했지만, 중요한 건 눈에 띄는 거였어요. 봉건 영주들이 성을 세운 것은 소유체제를 확고하게 만들겠다는 뜻이 강했죠. Image
그래서 봉건 시대의 성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 일단 중앙탑부터 세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재력이 부족하면 여기서 그치죠. 하지만 여유가 있다면 여기에 연결해서 탑을 더 세우거나 주변을 둘러싸는 성벽을 만듭니다.
더 여유가 생기면 성벽을 늘리고, 늘리고... 아예 마을,도시 전체를 둘러싸는.
여기서 '신장의 야망' 시리즈를 해봤다면 뭔가 익숙할 거에요. 신장의 야망 시리즈에서 성을 세우는 시스템이 등장하곤 합니다. 이때 무조건 중앙부터 세우죠.
일본의 성을 볼때 가장 눈에 띄는게 바로 그겁니다.
천수(天守, 천수각)라고 불리는 탑과 같은 시설. Image
여기서 재미있는 표현이 나옵니다.
천수(天守, 하늘을 지키다)
왜 중앙탑의 이름은 '천수'일까요? 여기서 말하는 '하늘'이란 뭘까요?
말할 것도 없이 다이묘. 더 정확히는 다이묘의 '자리(격)'입니다.
그런데 왜 '하늘'이라고 부르죠? 그냥 높아서?
자. 여기서 고대 수메르 시대로 가봅니다.
고대 수메르는 신이 통치하는 세계입니다. 수메르의 여러 도시에는 각기 수호신이 있었는데, 정확히 말하면 '수호신의 화신', 또는 '수호신' 그 자체입니다.
고대 세계에서는 신이나 신의 화신이 통치하는게 자연스러웠습니다. Image
신의 화신인 지배자들은 '신의 영역'에 머무르는게 보통이었습니다. 당연히 그 영역은 높은 곳에 있죠. 이집트와 비슷하면서도 용도와 느낌이 다른 중앙아메리카나 남아메리카의 피라미드도 역시 비슷한 것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Image
봉건시대는 '영토'가 중요하다고 했죠? 이 '영역'이라는 것을 따지는 문화가 매우 강하고, 영역자체가 '자리(격)'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가장 높은 자리는 말할 필요도 없이 '하늘'입니다. 하늘은 인간이 존재하는 곳이 아닙니다. 신이 존재하는 곳이죠.
신이 존재하는 곳, '신역'이라는 개념은 세계 각지의 종교 시설에서 자주 등장합니다. 일본의 신사를 예로 들면, '도리이'라는 문을 넘어선 내부는 바로 '신의 영역(신역)'. '신의 자리'입니다.
참고로 가운데는 신이 다니는 곳이라서 사람들은 절대로 가운데로 다니면 안 된다고 합니다만. Image
일본은 종교 시설 외에도 '영역(자리)' 개념이 굉장히 강합니다. 앞서 말한 천수도 그 중 하나입니다. 천수는 '다이묘의 영역'입니다. 가장 높은 곳은 다이묘 이외의 사람이 함부로 들어갈 수 없도록 되어 있고요.(가족 조차 예외는 아닙니다.) 그런데 그 이름은 '하늘'입니다. Image
말했죠?
'하늘은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곳'
다이묘는, 더 정확히는 다이묘의 영역(자리, 격)은 하늘입니다. 영지 내에 있지만, 영지와는 다른 세계.
재미있는 것은 다이묘와 영지의 관계와 같은 형태는 일본의 문화에 깊이 새겨있다는 겁니다. 천손-일본 관계와 같은 개념이죠.
고대 일본에서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관계는 '인간-인간' 관계가 아닙니다. 천손-일본처럼, 신-인간 관계에 가깝습니다. 봉건 체제를 넘어서 수메르 시대의 '신이 다르시는 도시'의 개념에 가까우며, 당연히 봉건 체제의 소유자-피소유자 관계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창작 작품에서 비슷한 구조라면, '원피스의 신 에넬'을 떠올리시면 편할 거에요.
자, 여러분이 에넬의 신민이라면, 에넬에게 반항하나요?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하늘(신)'인데?
참고로, 고대 수메르에서 인간은 신을 위해서 만들어졌습니다. 신들이 놀고먹기 위해서 만들어진거죠. Image
당연히 수메르의 인간들은 찍소리 못하고 신을 위해 일했습니다. 한번은 조금 불만을 터트렸더니 분노한 신이 홍수를 내려서 인간을 벌하기도 했어요.(그 탓에 굶주린 신이 고생한건 애교?로 칩시다.)
근데, 왜 일본 얘기인데 왜 자꾸 수메르 얘기가 나올까요? Image
일본이 수메르와 관련되었다는게 아닙니다.(무슨 환단고기도 아니고.^^) '신화 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영역(자리, 격)'을 바탕으로 한 일본의 고대 지배 체제는 고대 수메르의 '신이 다르시는 땅'과 비슷한 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신 에넬이 다스리는 '스카이피아'가 일본...
다시 돌아가죠. 일본에서 진정한 민중 봉기가 없는 이유는, 고대 일본의 지배체제가 봉건시대, 더 정확히는 신화의 도시국가시대에서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배자는 '하늘'이고, 영민은 그 영토에 묶인 아이템. 그들에게 자신들이 통치한다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가의 난'은 서양의 일본 연구자들이 보기에는 흥미롭고 눈에 띄는 사건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민중의 반항'이거든요.그도 그럴것이 이가의 사람들은 영토에 묶인 소유물이 아니고,지배자도 없던... 자유민이었으니까요. '이가 닌자'라는 이름으로 조직에 속한 것처럼 나오지만 실상은 아닙니다
하지만 일본 내부의 역사에서는 주목받지 못해요.
"이가 닌자"라는 창작 아이템에 묶여서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조금 과감하게 생각하자면, '이가의 난' 자체가 대단치 않은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일본의 역사는 '지배층의 역사'. '격이 높은 존재들의 역사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가의 난'은 -제 아무리 오랜 기간 오다를 괴롭히고 큰 피해를 주었다고 해도- 단지 소규모 집단의 반항처럼 여겨질지 모릅니다. 실제로는 이가라는 지역 전체의 수많은 이들이 조직적으로-특히 일본에서는 찾기 힘든 게릴라전으로- 반항하고, 그 결과 어마어마한 이들이 학살되었더라도
이가의 난과 함께, 민중 봉기로 거론되는 것으로, 시마바라의 난이 있습니다. 기독교도들이 중심이 되었지만, 민중이 중심이 된 조직적인 반란처럼 보이는데...
사실 여기에도 중심엔 '몰락한 무사 계급'이 존재합니다.
조금더 넓은 관점에서 보면 지배층이었던 자가 자신의 '자리'를 찾고자 움직인 것
앞서 '이가의 난'은 '본거지가 없다'라고 했습니다. 철저한 게릴라전이었고, 그 때문에 오다군이 고생했죠.
이가 사람에겐 자기가 머무르는 곳이 곳 자신의 땅. 그러니 위험하면 조금 피했다가 다시 돌아와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시마바라의 난을 주도한 것은 한때 영역(자리, 격)에 속한 무사집단.
그 지역의 토착 영주들이었던 지도자들은 처음부터 그 땅을 차지하려 했고, 거기에 얽매였습니다. 정확히는 '권력을 지닌 자리(격, 영역)'으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기독교나, 가혹한 세금 등은 민중을 부추킨 수단일뿐. 목적은 따로 있었습니다.굳이 말하면 전국시대의 잔향이죠.
문제는 이런 '자리를 얻고자 하는 행위'에 중앙의 허락이 없다는거죠. 당연히 중앙의 분노를 샀고, 토벌됩니다. 마지막에는 농성으로 막을 내리죠.
시마바라의 난은 전국시대의 종막으로 자신의 '자리'를 얻을 기회를 잃은 이들이 어떻게든 그 자리를 차지하고자 했던 마지막 반항.민중봉기가 아닙니다
다시 돌아가죠.왜 고대 일본에서 민중 봉기가 없는가?일본인들은 '천손이 강림한 땅 일본'에 속한 신민입니다.그들은 자신이 태어나서 살아가는 영토에 소유되어 있는 아이템이며,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때때로 '하늘(천수)'에서 누군가가 내려와서 그들을 통치하지만,그건 인간이 아닙니다
하늘(천수)의 통치자는 이 세상에 관심을 기울일 겁니다. 특히 영토를 얻는데 관심이 생길 겁니다. 자신의 영토(영역)가 늘어날수록 그의 '격'이 높아지니까요.
그 이외의 통치는 자신이 알바 아닙니다. 그래서인지 고대 일본은 생각보다 자유로운 세계였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세금만 잘바치면'
극단적으로 고대 일본의 영민들은 '세금만 잘 바치면' 생활에 어떤 제약을 받지 않았습니다. 민중의 문화, 오락 등이 생각보다 많이 발달한 것도 그런 영향이 있겠지요.
고대 일본도 봉건제니 통행은 어느 정도 제약했지만, 중세 유럽 정도는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영역'을 떠나면,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하는건 농민도 마찬가지. 당연히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땅에서 벗어나지 않죠.
그들은 멀리 보이는 천수를 보면서 '나는 이 땅의 소유물'이라고 자각하며 살아갑니다.
'저기 하늘(천수)에는 윗분(우에사마)이 계신다지?'
성을 중심으로 소유자의 위엄을 떨치며 지배하는 봉건영주 체계에 '하늘의 존재'라는 신화적 개념이 더해지면서, 고대 일본의 영민들은 자유라는 개념을 완전히 잃어버립니다.
당연히 민중 봉기는 없습니다. '하늘'은 인간이 범접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니까요.
반대로 하늘(자리)에서 떨어진 존재는 더 이상 신이 아닙니다. 전쟁에서 패한 '낙오무사 사냥'이 넘쳐나도록 많았던 것은 전쟁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하늘에 억눌려사는 영민들의 작은 반항일지도 모릅니다.
다시 '자리(격, 영역)'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죠.
왜 '격'이라는 말이 있는데, 자꾸 '자리'라는 말을 할까?
처음 말했듯, 일본의 '타고난 격'에는 이 '자리(영역)'이라는 요소가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일본에는 '일국일성의 주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보통 가게를 차리거나 할때 등장하죠.
한 만화에서 편의점주를 모집하는 이가 친구에게 "너도 일국일성의 주인이 되는거야!"라고 설득합니다.
'일성'... 천수, '신의 영역'을 말합니다.
'일국일성의 주인'이라는 말은 '내 영역을 얻고, 격을 높인다'라는 뜻이죠.
'편의점이라는 영업'보다 '편의점이란 자리'가 부각되는걸 주목해보세요.
일본에서는 한 자리에서 머무르며 영업을 하는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몇대째 계속해온 가게...이런게 눈에 띄죠.
충분히 돈을 벌었음에도 가게를 옮기거나 하는 일을 찾기 힘듭니다. 물론 가게를 옮겨서 잘 된다는 보장이 없기도 하겠죠. 하지만, 이 '제 자리'라는 것에 대한 집착도 원인이 아닐까요?
다시 돌아가죠. '자리(영역)을 잃어버린다.'라는 것은 그에 해당하는 '격'도 잃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패하고, 영역을 잃은 무사는 하늘에서 떨어진 존재이며, 당연히 격을 잃은 존재. 그러니, 설사 어제까지 주인이었더라도 처단해도 상관없습니다. 아니, 새로운 주인을 위해서라면 더욱 나서야죠.
자 여기서 '전쟁에 패한 무사'를 부르는 표현 '오치무샤(落武者)'라는 말에 주목해 보세요. 무리에서 벗어난게 아닙니다. '자리에서 떨어진(落) 것'입니다. 자리에서 떨어지고, 격이 떨어진 존재.
물론, 지위를 높다 낮다...라고 이야기하는건 자연스럽죠. 하지만, 전쟁에서 패해도 사무라이잖아요? Image
자리를 잃어버리면, 격이 떨어지는 건 신도 마찬가지죠.
노라가미처럼 말이죠. 여기서 신은 '인간에게 기억되는 것'에 집착하지만, 일본의 신토에서 가장 중요한 건 '신의 영역'입니다. 설사 살아있는 사람도 신사를 세워서 모시면 신이 됩니다. 다이묘의 '천수'는 일종의 신사라고 보셔도 되겠죠. Image
물론 신의 힘은 그를 따르는 신자의 수에 따라 달라지겠죠. 이건 고금동서 무수한 종교에 나오는 설정이에요.
하지만, 특정한 '신사'라는 장소에 얽매인 신의 구조는 찾기 힘듭니다.
그리스신들은 올림포스에 살죠. 신전이 아니에요. 헤라클레스가 죽어서 신이 될때 올림포스로 올라갔죠.
또 다른 만화의 한 대목, 사람들에게 잊혀진 신사 얘기가 나옵니다. 여기의 신물을 누군가가 훔쳐갔고 신은 사라졌다고 생각하며 신사를 지키는 이들이 있죠.
하지만 신은 사라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미약한 힘이지만 신사에 남아 있었던 것이죠. Image
일본의 신사는 고대의 신전이나 기독교의 교회처럼 신을 만날 수 있는 장소가 아닙니다. '신이 사는 곳'입니다
잉카의 피라미드, 다이묘의 천수 같은 곳이에요.
이곳을 잃어버리면 당연히 '격'을 잃어버립니다. 노라가미처럼 힘을 잃고 돌아다니는게 아니라, 그냥 사라져버려요. 적어도 신격은 잃죠.
'일국일성의 주인'
지금도 일본인들이 가게를 시작하거나 할때 쉽게 나오는 이 말에는 바로 '자리(영역)를 만들어 격을 높인다.'라는 마음이 포함된 것입니다.
그럼, 자리를 만들면 누구나 격을 높일 수 있으니 민중봉기도...?
아니죠. 격이 높은 존재들이 용납하지 않거든요. 격이 높은 존재들은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동격의 존재가 등장하면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 수도 있거든요. 그러니 야쿠자들의 '나와바리 싸움' 같은 상황이 쉽게 전개됩니다.
물론 여기에는 경제적인 이유도 있을거에요.
하지만 그보다도 '격의 문제'를 무시할 수 없는거죠. 격=자리인 이상, 그 자리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새로운 도전자가 등장하는 것을 도저히 용납하지 않아요.
중세의 '길드'가 경제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일본에서는 비슷한 집단이 등장해도 '격'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강했어요.
정리.
일본에서 민중봉기는 역사상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대라면 '전공투' 이야기를 할지도 모르겠는데...이 전공투는 중국의 천안문 사태와 비슷한 면이 있어요. 천안문 사태는 중국의 민중이 일으킨 봉기가 아닙니다. 외국 문물에 익숙해진 학생들이 주도한 것이죠. 자,전공투는 누가 시작했죠?
진정한 의미에서의 일본 민중 봉기는 '이가의 난' 하나 정도입니다. '오닌의 난' 같은 것도 있지만,이건 용병이었던 사무라이들이 '내 돈 내놔'라며 싸운거고, 결국 사무라이들은 새로운 '격'을 얻어서 지배층이 되죠.이가의 난이 민중 봉기가 될 수 있는건 그들이 누구의 소유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자리'가 없고, '자리'에 대한 집착도 없었습니다. "일국일성의 주인"같은 생각은 하지 않아요.
그렇기에 일본에선 보기드문 '게릴라전'이 가능했습니다. 그게 '이가 닌자의 전설'을 낳았고요.
게릴라전은 '자리'에 집착하면 절대로 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게릴라전의 주체는 사람이거든요.
사람이 존재하는 한 게릴라전이 존재한다. 설사 영토를 모두 잃어도... 이런 상황은 일본의 전쟁에선 찾기 힘듭니다.
임진왜란 때 일본이 고생한 것도 바로 그런 점이죠. 왕이 '본성(천수)'을 버리고 도망치고, 영민들이(물론 선비가 중심이었지만) 대대적으로 반항한다... 아무도 생각못했죠.
하지만 그렇기에 '이가의 난'은 철저하게 진압됩니다. 그야말로 씨를 말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에요. 이후 일본에서 민중봉기는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대개는 '자리에서 떨어진 지배층의 복귀 운동'이 대부분이었죠.
살아남고자 발버둥치는 [노라가미]처럼... 자리에서 떨어진 존재들은 그야말로 목숨을 거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낭인(浪人)은 단지 직업이 없는 사람이 아니에요. '머무를 자리'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어떻게든 기를 쓰고 자리를 얻고자 노력하죠.
그런데, 격을 올리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여러가지가 있어요. 격이라는 것은 '자리'와도 관련되었으니, 지위가 올라가면 자연스레 격도 올라갑니다. 이건 계급제나 신분제와 큰 차이가 없겠죠.
하지만 이러한 형태의 격을 얻는 건 쉽지 않아요. 기준이 어마어마하니까요.
대표적으로 다테 마사무네를 생각해 봅시다. 그의 목표는 천하인이지만, 그 과정에서 노린 것은 '100만석'이라는 기준이었어요. 왜 100만석? 99만석이면 안 되나? 그냥 '많다'의 기준이겠죠.
그는 처음에 전쟁으로 이를 달성하려 합니다. 하지만 히데요시에게 막히고 말죠. Image
마사무네는 끝까지 기회를 노립니다. 하지만 쉽지 않았죠. 그래서 후기에는 '영토 개발'에 진력합니다.
마사무네만이 아니에요. 전쟁으로 영역를 넓히는게 불가능하니, 격을 높일려면 자신의 영역의 수준을 높일 수 밖에 없었죠.
'자리'를 통해서 '격'을 높인다. 이걸 실현하기 위해서 일본에서는 공격적으로 영역을 넓히는데 애를 씁니다.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왜냐하면 일본에는 진정한 평등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원래 사람이 있으면 서열이 생긴다지만, 고대 일본의 '격에 따른 서열'은 사람-사람 관계가 아닙니다.
그건 '신-인간' 관계, 또는 '소유자-소유물'의 관계에 가까워요. 일본에서 주군이 가신을 모욕하는게 일상이었다고 했죠? 중세유럽에서 국왕이 봉신을 모욕하면 계약위반이었지만, 일본은 아니었어요. 왜냐하면 그들은 '주군의 소유물'이니까요.
이를 위해서 '자리를 얻어 격'을 높이려 애씁니다.
근데 이렇게 이야기를 들으면 어제 이야기와 다르지 않나요? '타고난 격은 망해도 유지되는거' 아니었나요?
네. 이게 계급이나 권력으로 유지되는 자리와 '타고난 격'의 자리의 차이입니다.
일본에선 무사건 신이건 자리를 잃으면 격이 떨어지죠.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 만은 아니에요. 낭인이 되면 당연히 무사의 격을 잃죠. 하지만 '이름'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적어도 그 당대에는 말이죠. 특히 본래 격이 높았다면, 그 잔향은 남습니다.
특히, '관동관령' 정도 되는 격을 지닌 성씨라면, 설사 영토를 모두 잃어도 '명분으로서의 격'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에스키 켄신(본래는 나가오 성)이 그를 보호하고 우에스키의 성씨를 물려받음으로서 격을 높이게 되죠.
여기서 '격'을 좀 더 파고들면,
고대 일본에서 '격'은 '신격'과 같은 것입니다. 이 '격'은 타고난 것이며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격을 높이는 가장 쉬운 방법은 '영역'을 넓히는 것이며(특히 전국시대), 그 영역의 수준을 높이는 것입니다.
현대라면 재산을 늘리는 것도 한가지 방법이겠군요.
하지만, 재산이 많아도 안 됩니다.
그래봐야 '나리아가리(成り上がり)'에 불과합니다.
벼락부자라고 번역하겠지만, 굳이 제대로 번역하면 '어쩌다 운이 좋아서 격이 올라간(올라간 것으로 착각하는) 놈'입니다. 별로 좋은 표현은 아니죠.
일본에서 이른바 벼락부자가 다이묘 가문이나 (극히 드물지만) 공가 가문과 정략결혼을 하는건, '재산'만으로 격이 쉽게 올라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주의할 점, '데릴사위'가 된다고 격이 높아지지 않아요. 그 가문의 일원이 되는게 아니거든요.
여기서 '드래곤 퀘스트 5'로 돌아가 봅니다. '드래곤퀘스트 5'는 용사가 아닌 이가 영웅으로 활약하는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은 (본래 왕이던) 아버지와 함께 모험하다 마왕의 수하에게 아버지를 잃고, 노예라는 시련을 거쳐 영웅으로 거듭나서 세계를 구합니다. 하지만 '용사'가 아니죠? Image
제가 이 게임을 할 때, 알고보니 용자(용사)가 아니라는 것이 아쉽긴 했지만, "그래 내가 열심히 해서 아들이 용사가 되었어. 함께 세상을 구하는 3대에 걸친 이야기야."라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같은 상황에서 일본은 조금 다른거 같아요.
만화 [은혼]에 드퀘를 패러디한 [타마퀘스트]라는게 나옵니다. 여기서 주인공의 대사 하나
"나와 비앙카의 아들은 천공의 용사가 된다고!"
네... 드퀘5의 주인공에 대입한거죠.
[은혼]은 일본의 여러 문화를 패러디란 걸로 유명한 작품이죠.노골적인 패러디가 참 많아요. Image
그런데 위 대사의 중심은 누군가요?
'나?' 아닙니다. '천공의 용사가 되는 아들'이잖아요?
나쁘게 말하면 드퀘5의 주인공은 천공의 용사를 낳기 위한 종마... 부품인거죠.(신의 장치라고 해도 좋겠네요.) [은하철도 999]에서 안드로메다별을 유지하기 위한 부품의 길을 선택한 테츠로... 뭐 그렇습니다
다시 돌아가죠. '나리아가리(벼락부자)'가 격이 높은 가문과 정략결혼을 할 수 있습니다. 대개는 그 성씨를 받죠.
정략결혼으로 성씨를 받아도 격이 올라가지 않습니다. [명탐정 코난] 같은데서 종종 보지 않나요? 사위가 무시당하는 모습. 정략결혼은 그의 격을 높여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략결혼으로 격이 높은 가문과 맺어지면, 그 '격'을 빌릴 수 있습니다. 외부 사람들에게 그는 최소한 '그 가문의 가신' 정도는 되는 거에요.
"내 뒤에는 격이 높은 OOO 가문이 있다."
뭐 이거죠.
이 가문의 격이라는 것은 일본에만 존재하는 건 아닙니다. 전세계 모든 나라에서 지도층이라는 세력의 '가문의 격'은 존재할 수 있어요. 역사가 오래되면 자연스레 생겨나는 것일지도 몰라요. 영국 같은 나라가 대표적이며, 미국에서도 그런 면이 있죠. 정계의 유명한 가문이라던가...
정략결혼으로 맺어지면 자식이 태어나겠죠. 그 자식은 그 가문의 일원입니다. 물론, '격'으로 보면 조금 떨어질거에요. (앞서 타케다 카츠요리를 생각해 보세요.)
우리나라로 보면 홍길동?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아니요. 이 경우는 반대에요. 아버지가 아들을 아들이라 부르지 못하고...
왜냐하면, 데릴사위로 들어온 아버지보다 아들/딸의 격이 더 높거든요. 이상할까요? 근데 '영역 의식'에 따르면 당연한 거에요.
데릴사위는 어디까지나 외부인입니다. 아무리 공을 세우고 해도 '고마운 남'이에요. 하지만 그의 자식은 내부인이죠. 영역내에서 태어나 영역의 격을 얻은 존재.
"벼락 부자였던 아버지가 데릴사위로 들어와서 성을 지켜주어서 가신들이 감사하고 있어."
한 만화에서 다이묘 후손. 옛날이었다면 공주님이라 불렸을 한 캐릭터가 한 대사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표현으로 좀 이상하지만, 원래 그런 겁니다.
물론 정말로 이런 말을 할지는 몰라요.^^
정말로 격이 높은 가문이 이렇게 표현한 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은 천상의 존재거든요. 일반인 창작자는 상상만 할 뿐이죠. 하지만 이런 표현이 자연스레 나올 만큼, 일본인들은 격의 체계를 자연스레 인식하고 있는 겁니다.
격의 세계인 일본에서 동격이 아닌 존재가 만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창작물에서 흔히 나오듯 격이 매우 높은 존재는 유치원부터 대학교까지 특별한 코스를 밟기 쉬우니까요. 애니에서 많은 아가씨 학교가 바로 그것이죠.
아. 오해하지 않기 위해서 이야기하면 요즘은 이런 경향도 많이 줄었다곤 해요. 적어도 도쿄처럼 인구의 유출입이 많고 사람이 많은 지역에서는 말이죠. '예전 같으면 히메사마'라도 평범한 고등학교에 다니고 평범하게 친구와 만나고... 뭐 얼마든지 되는 거에요.
이런 경향이 일본만의 일은 아니죠. 지배층, 권력자에게 있어서 상부-하부 구조를 나누는 것은 권력 유지에 도움이 되는 일입니다.
SF에서도 흔히 나오잖아요? 아예 세계 자체를 나누어 버리는 상황.
교류가 많을수록 격이 떨어지고, 상대를 만만하게 본다... 굉장히 자연스러운 흐름이죠. Image
부유층만 다니는 학교, 귀족만 다니는 학교, 특정 카스트만의 학교... 이런 건 보통 민주주의의 적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특별한 존재'라고 여기게 되고, 차별의식이 강해지기 때문이죠.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에겐 일본 성의 '천수'처럼 올려다보면서 '저들은 뭔가 달라'라고 느끼게 만드는 존재죠.
그럼 정말로 만화의 '아가씨 학교' 같은게 있냐? 네. 정말로 있다고 합니다. 그런 학교를 다니던 이들의 인터뷰를 종종 보았는데... 물론 그 인터뷰를 한 사람은 '히메사마'는 아니죠.^^ 자신을 팜피(パンピー, 일반인. 보통 오타쿠가 오타쿠가 아닌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표현하던데...
현대 일본에서 아가씨 학교라고 해서 만화에 나오는 야마토나데시코만 있는 건 아닙니다. 공가나 다이묘의 히메 사마만 다니는 것도 아니고요. 명문가 히메 사마라도 염색에 갸루 패션을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해요. 원조교제는 물론이고... 당연히 야마토나데시코파와 갸루파는 대립...
여기에 파벌이 당연히 붙는데, 이 파벌에는 팜피(일반인)은 들어가지 않습니다. 시종조차 '최소한의 격'이 있어야 하니까요.
히메사마의 격이 그렇게 높지 않다면 일반인도 충분히 시종이 되거나 할 수 있겠죠. 그래서 나중에 가신이... 하지만 보통 가신단이 함께 합니다.
러브코미디 작품에서 종종 나오죠? 저택에 살고 있고, 항상 옆에 두명 정도의 시종 역할이 따라다니고(가끔은 집사도)... 이건 상당히 희화된 경우지만, 실제 그런 학교도, 그런 아가씨도 존재한다는 건 여러 인터뷰에서 소개된 바와 같습니다. 그런 세계는 존재한다...
히메 사마는 당연히 정략결혼을 하겠죠. 대개 격이 맞는 가문과 하겠지만, 때로는 데릴사위를 맞을 수도 있어요.
여기도 자격이 필요하죠.돈은 하나의 자격이 될 수 있습니다.재정적으로 궁핍하다면 가능성은 조금 있죠.
(보통 가신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메우지만, 성이라도 있다면 유지가 힘듭니다.)
특별한 능력을 인정받는 상황도 가능하죠. 일찍이 전국시대 공적을 인정받은 사무라이가 공주를 맞이한 것처럼. 특히 가문의 위기에 뛰어든 낭인이 큰 공적을 세운다면 사위까지는 아니어도 가신단이 될 가능성은 클 거에요.
여기에는 당연히 여러가지 제약이 따릅니다. 히메사마의 사랑은 당연히 중요하겠죠? 아닙니다. 고대 일본에서(중세 유럽도 그렇겠지만) 사랑을 얻어서... 뭐 이런 건 없습니다. 서로 보지도 못하고 맺어지는게 보통이니.
여기서 중요한 건 윗분(우에사마)의 허락, 그리고 친족과 가신단의 인정입니다.
히메사마의 사랑은 그 후에 얻어도 되는 것... 순서가 반대같지만, 그래요.
앞서 [썸머워즈] 얘기했죠. 오해하지 않길 바라지만(^^), 저는 이 작품을 좋아하고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그리고 감독이 어떤 특정 의도로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하지만...
확실히 말하죠. [썸머워즈]는 '낭인이 위기에 빠진 가문을 구하고, 그 인정을 받아서 히메사마의 반려가 되는 이야기'라고 말이죠.
이를 드러내는 부분이 몇개 있습니다.
1) 할머니는 당주. 당주 권한으로 수많은 가신단(가신의 후손)들을 격려한다.
2) 무대는 혼마루. 가문의 영역.
3) 친족, 가신단이 함께 모여 혼마루를 지킨다.
4) 주인공은 '당주'로부터 히로인을 부탁받는다.
5) 처음에는 주인공을 부정하던 친족, 가신들이 그의 활약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얘기했지만, 감독이 이를 의도한게 아닙니다. 그리고 고전적인 영웅물의 패턴이기도 하고요.
고전 영웅물 패턴과 차이점이 몇가지 있습니다. 그중 가장 중요한게 '혼마루'와 '친족-가신'인 것 같아요.
[알라딘] 같은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공주의 사랑을 얻으면 됩니다. 그리고 시련을 거쳐 영웅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사랑을 쟁취합니다.
낭인 이야기에서는 반드시 '가신의 인정'이 따릅니다.
왜냐하면, '영역'에 외부인을 들이는 것은 당주나 히메사마 혼자만으로 결정하기 힘들기 때문이에요. 특히 친족이나 가신의 힘이 강하다면 말이죠.

몇번이고 말하지만, 일본은 '영역 의식'이 매우 강한 나라입니다. 몸만이 아니라 마음마저도 '사회적 거리두기'를 상시화하는 나라입니다.
영역과 관련하여 내부인과 외부인의 차이는 어디에서나 나옵니다. 우리나라도 그렇고요.
하지만, 외부인은 '끝까지 외부인'인 나라는 찾기 힘듭니다. 데릴사위가 가문의 일원이 되지 못하고 외부인으로 남는 것도요. 부락쿠민 차별, 원주민 차별, 재일외국인 차별... 모두 외부인이죠.
일본에서 이런 인식이 엄격한 것, 외부인을 받아들이지 않고 '내-외'를 나누며, 외부인은 절대로 내부인이 되지 못하는 구조... 역시 일본이 섬나라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봅니다. 같은 섬나라 중에서도 유독 일본이 심한 것은, '신화 시대의 격식(영역)'이라는 체계가 더해진 영향이 있겠죠
일본인은 '천손이 강림한 땅 일본'에 사는 사람입니다. 대대로 그곳에 살아오며 그 '격'을 공유하는 사람입니다. 섬나라인 일본에서 '영역'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었고, 이것이 격과 연결되며 '자리'라는 개념을 만들어냈습니다.
다이묘들은 대대로 자리에 머무르며 그 영역의 소유물과 시간을 나누었고
그로 인하여 일본은 특히 지방의식이 강한, 지방 자치가 강한(실례로 자민당이 일본을 지배해도, 각 지방에는 지방만의 당이 따로 있을 정도) 나라가 되었습니다.
격은 영역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영역을 벗어나면 격이 떨어지지만 오랜 전통을 통해 축적된 격은 하루 아침에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낭인이 된 주군을 따르면서 충성하는 가신들의 이야기가 눈길을 끕니다. 하지만 그것도 그 대의 일이고, 영역을 잃어버린 주군은 결국 격이 사라지고 맙니다.
'일국일성의 성주'가 되지 않은 시점에서 그 가문의 격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한편, 영역 의식을 중시하는 만큼, 그 영역 내에서 보호받으며 살아가는 것, 그곳에 소속되어 살아가는 것에 대한 집착도 나옵니다.(이건 봉건 사회에서 흔히 나오는 특성입니다.)
그곳은 '하늘(천수)'에 사는 천상인(다이묘)이 다스리는 땅입니다.
하늘은 인간이 범접할 수 없으니, 그에게 반항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단지 크게 예의를 바쳐서 상소를 올리는 정도.이를 위해 '잇키'라는 거창한 시스템이 필요합니다.신격의 존재에게 부탁하는 건 '물러서면 죽는다'라는 각오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기에 모두 합의하고, 결의를 다지면서 출발합니다.
예외적으로 '소유물이 아니었던' 이가의 사람들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반항합니다. 이는 영토가 아니라 '자신'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죠.
일본 역사상 보기 드문 민중 봉기이지만, 그래서인지 일본의 역사에서 잘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반면 서양에선 매우 흥미롭게 바라보고 다룹니다.
일본의 역사는 '천상인이 만들어낸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천상인이 아닌 일반인들은 그들만의 역사를 만들고, 그들만의 자유를 누립니다. 천상인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의 격을 유지하고 높이는 것',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항없이, 세금만 바치면 자유가 보장되었죠.
일본의 일반인에게 정치란 '천상인의 행위'입니다. 일반인이 나서서 뭘 할 수 있는건 아닙니다. 때문에, '정치가의 자식'이란 이유만으로 정치가로 당선됩니다. ('도지사의 아들'만을 내걸고 출마한 사람도 있었다는데, 정말인지 아닌지...) 대를 이은 정치가,최근 비율이 줄었지만, 아직도 많습니다.
영역을 벗어날 수 없고, 영역이 바뀌지 않는 섬나라. 이것이 일본의 중요한 특성이었고, 여기에 '천손이 강림한 세계', '천상인이 존재하는 천역이 있는 세계'라는 인식이 또 하나의 특징을 만들어냈습니다. 일본의 고대 세계가 독특한 세계관을 갖게 된 것은,'와(和)'의 문화 같은 것도 여기서 나오죠
격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하관계이며, 그래서 일본에서는 '상하관계를 나타내는 말'이 매우 많습니다.
'자리에서 떨어진다 = 격이 떨어진다'
'자리에 올라간다 = 격이 올라간다.'
하지만 후자는 빈정대는 표현이 많죠. '나리아가리'처럼... 격의 상승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격의 상하 관계'는 모든 조직, 국제 관계에서도 통용됩니다.'국격'이라는 개념은 서양에서 시작되었지만, 이 개념은 '현재의 지위'라는 측면이 더 강합니다. (물론, 문화적인, 도덕적인 국격도 등장하죠. 특히 미국인들이 중시하는 '정의의 국격' 같은 것도.) 여기에는 반드시 상하관계는 없습니다
다만, 일본,특히 일본의 극우적인 지도층 등에게 이 '국격'은 매우 중요하고, 그 상하 관계를 엄격하게 따져야 합니다. 일본의 전통에서 '격이 높은 존재'는 '격이 낮은 존재'를 마음대로 해도 되었으니까요.격을 따지는 데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습니다.가장 중요한건 '얼마나 신에 가깝나'일 것입니다
신에 가까운 것 = 천손에 가까운 것. 그래서 공가는 천황을 제외하면 그 누구보다 격이 높은 존재입니다. 대대로 말이죠.
영역,특히 '신역을 지닌 영역'은 격을 높이는 수단입니다.
봉건 영주가 과시의 상징으로 만들었던 성. 이는 지배의 수단이자 상징이지만,일본의 성은 여기에 '하늘'이 더해집니다
그럼, 다른 나라와의 격은 어떻게 따지나요?
일단 격이라는 것은 중세 유럽의 '명분'과 비슷할 수 있습니다. 중세의 명분은 '누구나 인정할만한 무언가'입니다.
다시 말해 '남의 인정'이 일단은 필요합니다.
또 하나, '승패'가 있습니다. 여기서 궁극적인 패배란 '영역을 빼앗기는 것'입니다.
혼마루가 무너지고, 천수가 붕괴되는 것. 항복을 거부한 다이묘의 최후는 바로 이렇게 진행됩니다. 일단 상대의 혼마루를 점령하면 싸움은 끝났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항복하면 상대에게 굴복해야죠. 여기서 '도게자'가 등장합니다. 도게자는 곧 '내 격이 당신의 격보다 낮음'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일본의 극우주의자가 보기에 한국(그들은 끝까지 조선이라 부릅니다. 왜냐하면 '이름'이 바뀌면 다른 나라니까요.)은 일본에게 혼마루를 내어주고 도게자를 하여 굴복한 나라입니다. 가신이자 격이 한참 낮은 존재이죠.
미국은? 원래 상하관계가 없었지만(페리 제독의 개항은 굴욕이지만 패배는 아님)
태평양 해전에서 패배하고 미국에게 혼마루를 내어주며, 사실상 도게자를 합니다. 그리고 동맹(일본 전국시대의 동맹은 절대로 '대등한 관계'가 아닙니다. 독립성은 있지만, 가신에 가까운 상하관계죠.)을 맺습니다.그 관계는 지금도 지속됩니다.
1980년대 일본이 전성기를 누릴 때 미국인들은 걱정합니다. 일본을 적으로 묘사한 작품이 수없이 쏟아지고, 사이버펑크 장르에선 일본 기업이 지배하는 미래 모습이 무수히 등장했죠.일본의 기업이나 사람들도 '미국을 사버릴 수 있다'라고 호언한 것도 있습니다.실제로 미국의 토지/기업을 많이 샀죠.
그러면 일본-미국의 상하관계가 바뀔까요? 바뀌었을까요?
그에 대해서는 현재의 일본-미국 동맹 관계를 보시면 아실거에요. '격'이라는 것은 그렇게 쉽게 바뀌는게 아니라는 것을 말이죠.
당연히 일본 극우파가 보기에 조선과의 격의 상하 관계도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가 일제시대 너희를 도와주었는데', 이건 일반인, 그리고 외부인에게 설명하기 위한 변명. '너희는 우리 가신'이라는 본심이 있다고 얘기했죠.
한가지 더하면 격에는 '품격'이라는 것도 포함됩니다.
천수처럼, 격에는 겉으로 보여지는 것도 필요한 법이에요.
아니, 격을 중시할수록 '겉으로 보이는 품격'은 더 중요하죠.
높은 이에게는 높은 이의 품격이, 낮은 이에게는 낮은 이의 예절이.
일본의 취직철에, 일본 거리에서 보이는 '스미스 집단'은 이러한 격의 예절을 강요한 결과이죠. Image
이를 강조하는 일본의 전통파, 극우주의자에게 조선은 외적으로는 일본에 지켜야 마땅한 예절도 지키지 않는 무례한 놈, 내적으로는 '격이 높은 지도자가 우민들에게 쫓겨나는 품격 없는 나라'라고 여겨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마도 '이가의 난을 일으킨 자들'과 비슷하게 여길지도 모르죠.
일본 역사상 유일한 '민중 봉기'인 이가의 난은 일본 역사 속에 묻혔습니다. 외국인들은 흥미롭게 볼지 몰라도, 일본에선 '닌자'라는 콘텐츠의 덤 정도에 불과한 거에요.
품격이 없는, 격이 낮고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이가'라는 집단(은 아니지만)은 오다라는 신격에 도전했다 멸망한 존재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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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Jul
일본적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이를 위해 일단 '세계관'이란 것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해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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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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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Jul
아내가 유투브를 보다가 "일본 사람들은 왜 우리가 자기네를 알아서 돕는게 당연하다고 여기는거?"라고 물었습니다.유투브의 일본 댓글 반응에서 그런 내용이 자주나와서 그렇겠죠. 사실 이 점은 한국인이 가장 이해하기 힘든 반응일지도 몰라요. "왜 당연히 도와야 한다고 여기는거?"라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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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자리'라는 개념은 계급이나 현재의 지위 같은 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이건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온, 굳이 말하면 신화시대에서 결정된 무언가죠.
여기서 주목할 것은 겉에서 보는 일본 역사에선 별로 드러나지 않는 계급 "공가"입니다.공가란 천황을 모시는 신하 가문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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