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에게 '자리(격)'란 무언인가?
어느 나라건 자신이 태어난 땅, 소속된 장소에 대한 집착은 분명히 있습니다. 고향은 매우 소중한거죠. 하지만 일본인의 형태는 (적어도 창작물에 나오는 형태는) 조금 다릅니다. 일본에선 '천도'라는 개념을 찾기 힘듭니다. 자리를 옮긴다는 건 불경한 일이에요.
일본은 '천손이 강림하여 다스리는 신성한 땅'. 이게 일본의 극우적 창작물의 기본자세입니다. 그 중엔 '일본이 세계의 중심'이라던가, '일본은 세계의 모습을 이어받았다' 같은 내용도 있어요.
사실 이런 인식은 요즘에 시작된게 아니죠.
일찍이 일본의 쇼토쿠태자는 당나라 황제에게 칙서를 썼다고 하죠.
"해가 뜨는 나라의 천자가, 해가 지는 나라의 천자에게."
...
일본은 신성한 땅이에요. 그 땅은 일본인에게 축복이고, 동시에 저주이기도 하죠. 아실 거에요. 일본계 미국 의원들이 일본군 위안부와 관련한 법률을 제정하곤 한 것.
"어떻게 일본인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아마 그 의원은 자기가 '일본인'이라는 자각이 없을거에요.(당연한 일이죠. 일본인이란 일본에 사는 사람이 아닌가요? 한국인도 마찬가지죠.)
이런 걸 생각해서 고마츠 사쿄는 [일본침몰]에서 일본 열도를 없애버리고 일본인들이 바뀌는 모습을 그려냅니다.
물론, '그래도 소용없네.'라고 생각해서 반세기뒤에 쓴 2부에선 '그래도 일본에서 태어나고 일본식 세계관에 빠진 사람은 안 바뀌더라...'라고 했지만.^^
어찌되었든, '신성한 땅 일본'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은 일본의 세계관에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죠.
신성한 땅 일본...도 있겠지만, 그것을 좀 더 세분하면, 각각의 지역이 제각기 '신성함'을 지닙니다.자신은 그 '신성한 곳'에 속한 존재이고요.
물론, '신성한 땅' 개념도 일본만의 것은 아니에요. 대개 수도는 '신성한 땅'이라서 정해지는 것이니까요.
일본의 '신성한 땅'은 쉽게 안 바뀝니다. 그래서 일본에서 나온 판타지에선 종종 '성스러운 제도를 빼앗겼기 때문에 제국의 후계자를 자처할 수 없다.' 같은 표현이 매우 자주 나옵니다.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한 것 같은 상황은 나오기 힘들어요.
비잔틴 제국 사람들은 자신들이 '로마인'이라고 생각했다고 하죠. 수도는 바뀌어도 그 전통은 로마. 뭐 그런 거에요. 하지만, 일본에선 수도가 바뀌면 나라도 바뀌는 것. 메이지 유신에서 천황이 도쿄로 옮긴 것도 '기존의 적폐를 모두 몰아내고 새로운 일본을 세우자.'라는 인식이 강했죠.
자. 자리(격)의 얘기로 돌아갑니다. 일본 창작물에서 자주 보이는 것, 그건 '자리'가 사람을 속박하는 모습입니다. 사람이 자리에 속하는게 아니라, 자리가 사람을 소유하는거죠. 왜 일본 드라마에선 재벌의 사원이 중소기업 사장에게 큰 소리 칠까요? 왜 블랙 기업에서 사원들이 참고 버틸까요?
조금 다른 창작물 얘기를 해 보죠.
소설 [오버로드]는 이세계 전생물에서 한 획을 그은 작품입니다. [전생하고 보니 슬라임이었던 건]도 이 작품에서 영향을 받아 탄생한 것으로 유명하고, 유사한 작품을 많이 낳았죠. 존재 자체로 고귀한 주인공.그 뜻을 알아서 헤아려 정복전쟁에 나서는 가신들. Image
일본식 천손강림 이야기의 기본 패턴이죠.
그런데 이 작품엔 외전이 하나 있습니다.
[망국의 흡혈공주]
아시는 분도 많겠지만, 주인공이 나자릭이라는 '영역'이 없이 홀로 전생하는 내용입니다.
이 작품 속의 주인공은 내면은 같을지 몰라도 그 외면은 완전히 틀립니다. Image
동료와 함께 자유롭게 세상을 돌아다니며 모험을 즐기는 (이름조차 아인즈나 모몽가가 아니라, 스즈키 사토루) 그 모습은 [오버로드] 본편에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죠.
동료들을 모아서 조직을 만들기는 했지만, 그 조직에 집착하는 느낌도 없습니다. 세상의 경이를 찾아서 자유롭게... Image
인간은 무언가에 기대고 싶어지는 존재. 하지만 너무 가까이 다가가서 의지하는 것은 '그 존재에 종속'될 위험이 있습니다.
특히 영역과 격의 개념을 갖고 철저한 상하관계가 만들어지는 일본 사회에서 어떤 존재에 의지하려면 그 가신이 되는 수 밖에 없죠.
가신이 되지않으려면 일국일성의 주인이...
하지만 일국일성의 주인이 된다고 자유롭지는 않습니다. 그 '일국일성'. 그리고 그곳에 소유된 존재들이 나를 속박하게 될테니까요.
[오버로드]의 주인공은 자신의 말을 하지 못합니다. (그 점이 [전생슬]과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왕'의 격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격'이라는 것은 인간의 높낮이를 말하지만, 그 높낮이에는 그에 어울리는 품격도 따라야 합니다.
(능력과는 다르다! 능력과는!)
그것이 따르지 못할때, 타케다 카츠요리 휘하의 타케다 군단처럼 가신들이 떨어져나갑니다.큰 가문에는 큰 가문의, 작은 가문에는 작은 가문의... 따라야할 격이 있는거죠
영화 [도라도라도라]에서 미국 침공을 주장하는 군부 측에 천황이 보낸 편지가 도달합니다. 거기에는 넌지시 '나는 전쟁에 반대한다'라는 내용이 담겨있었지만(야마모토 제독이 이를 읽고 놀라면서 '천황은 반대하시는군요.'라는 장면이 나오죠.) 당연히 무시되죠. 그냥 시였으니까요.
다른 트윗에서 이야기했듯, 이번에 천황이 올림픽에 대한 반응도 천황 자신의 말이 아니라, 궁내청에서, 그것도 몇다리를 거쳐서 "천황이 우려하고 있다." 정도로 나왔습니다. 사실은 이것도 천황으로서는 굉장히~~~~~ 강경한 표현이지만, 그에 대해 정부에선 '궁내청 일부 사람의 의견'으로 무시했죠.
타고난 격에 따른 상하 관계라는 것은, 지배자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당연히 지배자가 더 많은 것을 누리고 더 즐겁고 편안하고 행복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격'이라는 것은, 영역을 차지한다는 것은 동시에 '영역에 속박되고 격에 묶인다.'라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격을 지니고, 영역을 차지하고, 조직에 속하고... 이 자체는 사회적 존재인 인간을 안심시키고 평온하게 만들고, 싸움을 줄이거나 안정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체계입니다.
어딘가로 이동할 수 없어서 '공멸'로 갈 수도 있었던 섬나라 일본에서 이러한 '얽매임'이 늘어난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르죠.
세상 어느 나라건, 물론 우리도 이런 얽매임이 존재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남의 얘기만 할 것은 아니지요.
때문에 세상 그 누구보다도 '자리(격)'이라는 얽매임에 휘말려서 '안심하는 동시에 자유롭지 못한' 세계관을 바라보면서, 우리 자신도 경계하고 생각해야 한다고 느끼게 됩니다.
저는 [오버로드]를 좋아하지만, [오버로드:망국의 흡혈공주]가 더 재미있고 좋았어요.^^
좀 더 자유로운(더 이상적인 천손얘기?) [전생슬]쪽이 더 좋고, 영생을 누리는 -나라에 묶인- 통치자면서도 끝없이 고민하며 자유로운 영혼을 갈구하는 [십이국기]도 맘에 들죠. 일본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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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Jul
일본적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이를 위해 일단 '세계관'이란 것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해보죠.
제가 세계관과 관련하여 책을 쓰거나 번역할때 '유니버스'라는 말을 씁니다. 그런데 이건 정확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유니버스는 '창작된 세계'라는 말에 더 가깝기 때문입니다. 중심이 '세계 설정'에 있죠.
반면, '세계관'이라는 것은 '그 세계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법', 즉, 그 세계에 살아가는 이들에게 중심을 둡니다.
나아가서 그들이 그런 관점을 갖게 된 이유, 그러한 배경을 함께 아우러서 세계관이라고 부릅니다.
세계관이라는 것을 비교적 친숙한 말로 표현하면 '민족성'이나 '국가성'... 하지만, 이런 표현은 쓰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세계관은 바뀔 수 있고 바뀌는 것이지만, 민족성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정해져서 바뀌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죠. 차별적 용어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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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Jul
어제 올린 트윗에 많은 분이 여러 의견을 이야기해주셨습니다. 제가 모르는 것도 있고 새롭게 알게 되는 것도 있어서 흥미롭더군요.
그런데 여기서 몇가지 질문이 생겨나서, 새로운 내용으로 추가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아내가 물어봤습니다.
"근데 왜 일본 사람들은 가만히 있는거지?"
아시겠지만, 일본은 권력에 대한 반항이라는 것이 매우 약한 나라입니다. 전세계에서 이런 나라를 찾기 힘들죠.
한국에서 촛불 집회가 있을때, 일본인 친구들이 의아하게 생각했어요.
"어떻게 국민이 대통령을 몰아낼 수 있어?"
방법이 아니라 '이상한 일'이라는 뜻이죠. 아마 일본인의 그런 반응에 의아했던 분들이 많으실거에요.
그리고 생각하겠죠? 일본에도 '농민 반란'은 있지 않았어? 왜 지금은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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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Jul
아내가 유투브를 보다가 "일본 사람들은 왜 우리가 자기네를 알아서 돕는게 당연하다고 여기는거?"라고 물었습니다.유투브의 일본 댓글 반응에서 그런 내용이 자주나와서 그렇겠죠. 사실 이 점은 한국인이 가장 이해하기 힘든 반응일지도 몰라요. "왜 당연히 도와야 한다고 여기는거?"라고 말이죠.
물론 일본의 모든 반응이 그런건 아닙니다.하지만 그런 반응이 눈에 띄는 것도 사실이죠.
그럼 왜 일본에서는 "한국이 일본을 돕는건 당연"이라는 반응이 나올까?그건 일본의 일부 사람들이 한국을 '가신의 국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 봅니다.더 정확히는 한국은 일본보다 '낮은 자리의 나라'인거죠.
일본의 '자리'라는 개념은 계급이나 현재의 지위 같은 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이건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온, 굳이 말하면 신화시대에서 결정된 무언가죠.
여기서 주목할 것은 겉에서 보는 일본 역사에선 별로 드러나지 않는 계급 "공가"입니다.공가란 천황을 모시는 신하 가문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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