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아침 일이 수월하게 빨리 끝나서 말인데, 팔로워가 늘어난 김에 미야자키 하야오에 관해 얘기를 좀 해봅시다. 주말에 ‘인간, 미야자키 하야오에 대하여’라는 타래를 쓰려 했는데,
그 이전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미야자키 하야오는 소아성애자인가?’하는 부분입니다. 결론부터 잡고 시작합니다. ‘아니다’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결론을 확실히 잡고 시작해야 오해가 생기지 않습니다.
이번 타래의 주인공.
미야자키 하야오
라이벌.
토미노 요시유키
초창기 오타쿠 세대에게 있어 미야자키 하야오(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와 토미노 요시유키(기동전사 건담)는 흥미로운 비교의 대상이었습니다. 재패니메이션 산업이 커지면서 애니메이션을 ‘아이들만 보는 것’이 아니라 진지한 담론의 장으로 만들려 했던 두 창작자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vs토미노 요시유키가 흥미로웠던 것은 두 인물이 비슷하면서도 모든 면에서 비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미야자키 하야오는 낭만주의적이고 회귀적인 작품을 지향했고, 토미노 요시유키는 보다 미래적이고 진보적인 작품을 지향했다 정도로 요약할 수 없을 정도로요.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림을 그리는 애니메이터 출신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근본은 그림을 그려서 영화에 움직임을 주는데 있습니다.
반면에 토미노 요시유키는 제작관리 출신입니다. 토미노 요시유키의 근본은 애니메이션 제작 과정 전반을 관리하면서 작품이 수월하게 만들어지도록 조율하는데 있습니다. 이런 출신의 차이가 결과적으로 어떤 차이를 낳느냐하면,
말빨입니다.
실력지상주의의 냉혹한 애니메이션 세계에서 그림을 그리지 못하거나 애니메이팅 실력으로 연출자가 된 게 아니라면 함께 작업하는 애니메이터에게 자신의 비전과 이상을 설명하고 설득할 ‘말빨’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그 비전을 믿고 따라갈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이런 제작진행 출신 감독들은 인터뷰를 읽는 재미가 있습니다. 자신이 어떤 의도와 비전을 가지고 작품에 임했는지를 아주 상세하게 설명해주거든요.
미야자키 하야오와 같은 애니메이터 출신 감독들은 그런 부담이 덜합니다. 본인이 만들고자 하는 걸 그림으로, 기술로 보여주면 되니까요. 그래서 이런 감독들의 인터뷰를 보면 작품을 다 설명해주지 않는다는 인상이 듭니다. 인상비평이지만요.
도입부가 길어졌는데 이런 이야기를 길게 늘어뜨린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미야자키 하야오가 소아성애자다’라는 이야기의 근원을 파고들면 토미노 요시유키가 있기 때문입니다.
토미노 요시유키라는 인물은 대단히 승부욕이 강하고 직설적인 화법을 가지고 있는 데다가 ‘창작자는 솔직해야 한다’는 사상과 자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래서 토미노 요시유키의 행적을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비판할 여지가 상당합니다.
게다가 토미노 요시유키는 본인이 미야자키 하야오와 비교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인터뷰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를 *농담으로* 비판하곤 했습니다. 농담으로를 다시 강조합니다. 죽자 사자 달려들었다는 게 아닙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소아성애자다’라는 이야기는 그렇게 토미노 요시유키의 농담으로 시작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갑니다.
마케팅의 측면에서는 논란이 없는 예술가보다 논란이 있는 예술가가 더 유리할 때가 있습니다. 봉준호가 말했듯이 ‘악플보다 무서운 건 무플’이거든요. 마케팅 측면에서 의도적으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소아성애 의혹을 부추긴 것도 이런 괴담이 퍼져나가는데 일조하게 됩니다.
이야기는 덧붙이고 덧붙여져서 결국에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망토의 펄럭임을 더 완벽하게 표현하기 위해 점심시간마다 공원에 나가 사람들을 크로키하며 연습했다’는 일화는,
시간이 지나면서 ‘미야자키 하야오 소아성애자라서 공원에서 여자들 팬티 훔쳐보면서 그림 그렸다면서요 으 극혐;;’으로 변질되기에 이르렀죠. 유언비어의 무서움을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이건 전혀 별개의 이야기이지만 <마녀 배달부 키키>의 펄럭거림 묘사를 보고 이상한 스위치가 켜진 작가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저만 알고 있기 어렵네요. 가공할만한 작화와 묘사로 사람들을 놀라게 한 괴력의 작가 ‘모리 카오루’ 선생님 되시겠습니다.
여하튼간에 이 미야자키 하야오 로리콘은 어디까지나 농담으로 시작된 이야기였다는 것은 알아주시면 좋겠다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진지하게 할 때에는 적어도 근거라도 들고오는 자세가 필요하겠습니다. 오늘의 타래 끝.
다음에는 하야오의 인생을 총체적으로 돌아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일본의 미야자키 하야오 관련 다큐멘터리에서 다시 한 번 확대재생산 되는데 해당 다큐멘터리에서 ‘스커트’ ‘스커트’ ‘스커트’를 강조하는 바람에 오늘도 미야자키 하야오는 바람 잘 날 없는 인생이 되어버리는데 일조하게 됩니다.
다음 타래는 드디어 대망의 작품. 제 오랜 근원. 제 오랜 고향. 이쿠하라 쿠니히코 버전의 <은하철도의 밤>, 바로 <돌아가는 펭귄드럼>입니다. 이건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메이션과 달리 어디서 구해 볼 곳도 마땅치 않고 가독성도 좋지 않은 애니메이션이니 이 타래 때문에 보시는 건 비추합니다.
<돌아가는 펭귄드럼>은 <미소녀전사 세일러문>, <소녀혁명 우테나>를 만든 이쿠하라 쿠니히코의 복귀작입니다. <우테나> 이후 ‘함께 하기 어렵단’ 평을 받으며 후원이 끊겼고, 이쿠하라 본인도 애니메이션에 흥미를 잃고 은퇴해버려 오랜 공백기를 가졌죠. 복귀작이란 타이틀만으로 화제가 됐어요.
‘백합’이라는 하위장르를 대중매체에 공식적으로 소개하면서 ‘백합의 아버지’로 거론되기까지 한 이쿠하라 쿠니히코. 사실 이쿠하라는 애니 업계에 돌아오려고 꽤 오래 전부터 노력해왔습니다. 하지만 <우테나> 때 보여줬던 난해한 스타일이 도리어 독이 되어 돌아왔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