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타래는 드디어 대망의 작품. 제 오랜 근원. 제 오랜 고향. 이쿠하라 쿠니히코 버전의 <은하철도의 밤>, 바로 <돌아가는 펭귄드럼>입니다. 이건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메이션과 달리 어디서 구해 볼 곳도 마땅치 않고 가독성도 좋지 않은 애니메이션이니 이 타래 때문에 보시는 건 비추합니다.
<돌아가는 펭귄드럼>은 <미소녀전사 세일러문>, <소녀혁명 우테나>를 만든 이쿠하라 쿠니히코의 복귀작입니다. <우테나> 이후 ‘함께 하기 어렵단’ 평을 받으며 후원이 끊겼고, 이쿠하라 본인도 애니메이션에 흥미를 잃고 은퇴해버려 오랜 공백기를 가졌죠. 복귀작이란 타이틀만으로 화제가 됐어요.
‘백합’이라는 하위장르를 대중매체에 공식적으로 소개하면서 ‘백합의 아버지’로 거론되기까지 한 이쿠하라 쿠니히코. 사실 이쿠하라는 애니 업계에 돌아오려고 꽤 오래 전부터 노력해왔습니다. 하지만 <우테나> 때 보여줬던 난해한 스타일이 도리어 독이 되어 돌아왔죠.
사실 이렇게까지 복귀가 어려웠던 데에는 이쿠하라가 <세일러문> 시절의 경험 때문에 고용 감독을 하지 않으려 했던 것도 있습니다. 이쿠하라는 <마리아님이 보고 계셔>의 감독으로도 거론되었는데, 결국 연출을 맡지 않았습니다. 오리지널 기획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쿠하라는 “귀여운 펭귄들이 나오는 슬랩스틱 애니메이션”의 기획을 통과시킵니다. 사람은 일절 나오지 않고 귀여운 펭귄들이 나와서 좌충우돌 소동을 일으킨다는 귀여운 기획이었지만…
…방심해선 안되었습니다. 이쿠하라는 어디까지나 이쿠하라였던 겁니다. ‘펭귄만 나오는 캐릭터 애니메이션’을 만들던 이쿠하라는 마침 일어난 동일본 대지진을 보면서 ‘이런 가벼운 작품으로 괜찮은가?’ 자아성찰을 시작해버린 겁니다. 괜찮을까요 그래도?
[이미지 출처]
m.blog.naver.com/PostView.nhn?b…
이쿠하라 쿠니히코는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기획을 크게 손보게 됩니다. 이쿠하라는 “자기가 아니면 이런 이야기를 할 사람이 없다 생각했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펭귄드럼>은 현대 일본 사회에 대한 은유, <은하철도의 밤> 두 모티브를 놓고 제작되기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나온 <돌아가는 펭귄드럼>의 반응은 미묘했습니다. 충격적인 시작과 귀여운 펭귄들로 초반에는 관심을 모으는데 성공했지만 템포 조절의 실패, 난해해지는 스타일, 상징의 남발 때문에 중도하차하는 시청자들이 늘어갔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흥미롭고 독특한 연출, 아름다운 음악과 인상적인 아트 스타일 때문에 끝까지 남아 지켜보는 시청자들도 있었습니다. 결국 <펭귄드럼>은 “난해해서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아름다운 애니메이션이었어”라는 평을 받으며 소수의 절대적인 추앙을 받는 컬트 애니메이션이 됩니다.
도입부는 여기까지입니다.
저녁 먹고 돌아와서 이어가겠습니다.
시작합니다.
이번 타래의 제목은 <돌아가는 펭귄드럼: 남겨진 아이들의 생존전략> 정도로 할까요. 타래가 늘어날수록 느끼는 건데 타래는 제목 짓는 거까지가 제일 재밌더라고요.
이쿠하라 쿠니히코는 미야자키 하야오와 사뭇 다른 유형의 창작자입니다. 애니메이션의 스타일만 놓고 보면 대척점에 있다고 볼 수 있어요. 미야자키 하야오가 대단히 고전적인 스타일로 애니메이션을 만든다면 이쿠하라 쿠니히코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외칩니다. 전위 예술 좋아하는 양반이거든요.
단적인 예로, 미야자키 하야오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은하철도의 밤>을 따와 만들었으면서도 <은하철도의 밤>을 모르는 사람이 이 영화를 봐도 문제가 없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돌아가는 펭귄드럼>은 좀 다릅니다. <돌아가는 펭귄드럼>은 대놓고 은하철도의 밤을 인용하는 걸로 모자라,
작품이 시작되자마자 미야자와 겐지의 <은하철도의 밤>을 해설하고 있는 한 소년과 그걸 듣고 있는 소년을 보여주면서 시작합니다.
“사과는 우주 그 자체야. 손 위에 얹힌 우주. 이 세계와 저쪽 세계를 연결하는 존재야. 캄파넬라나 다른 승객이 향하고 있는 세계 말야.”
“그거랑 사과에 무슨 관계가 있어?”
“말하자면 사과는 사랑에 의한 죽음을 스스로 선택한 자에 대한 보상이기도 해.”
“그래도 죽으면 전부 끝이잖아.”
“끝이 아냐. 오히려 거기서 시작된다고 켄지는 말하려는 거야.”
“전혀 못 알아듣겠어.”
“사랑 얘기잖아. 왜 이해를 못 해?”
<돌아가는 펭귄드럼>은 여기서부터 대놓고 선언을 하며 시작합니다. 이 작품은 <은하철도의 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TVA 애니메이션이기 때문에 방영 기간이 기니까 그 사이에 이 정도는 읽을 수 있지? 숙제를 내주면서 애니메이션이 시작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 선언에는 <돌아가는 펭귄드럼>은 이해하기가 어려운 작품이 될 거라는 걸 전제하고 들어가는데요, 위 두 소년의 대화는 사실 <돌아가는 펭귄드럼>의 주제를 노골적으로 던지고 가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이 애니메이션은 사랑에 대한 애니메이션이야. 왜 이해를 못해?”라고요.
등장인물을 소개합니다.
순서대로 쇼마, 칸바, 히마리입니다.
캐릭터 디자인은 탐미주의 작화의 끝판왕이라 불리는 호시노 릴리 선생님께서 담당하셨습니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어렵지 않습니다. 히마리는 불치병에 걸려 시한부인 상태, 결국 수명을 다한 히마리는 병원에서 수명을 다해 목숨을 잃습니다. 히마리가 죽기 전 마트에서 구입한 펭귄 모자가 기적을 일으켜 히마리를 다시 되살려놓는데요, 히마리를 되살린 펭귄 모자는-
여동생을 다시 살리기 위해서는 ‘펭귄드럼’이라는 정체불명의 무언가를 찾아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에 쇼마, 칸바 형제는 여동생을 살리기 위해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펭귄드럼’을 찾게 된다는 것이 애니의 기본적인 줄거리입니다.
사실 펭귄드럼이 뭔지에 대해서는 정답이 나와 있습니다. 펭귄드럼은 사과이고, 사과는 손 위에 올려진 우주이며, 곧 사랑을 뜻합니다. 이 도식은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애니메이션의 연출을 통해서 전달됩니다. 이쿠하라는 늘 연출을 통해 이야기를 전달해나가죠. 시나리오가 아니라요.
그리고 1화에서 제시된 <은하철도의 밤> 말인데요. <은하철도의 밤>은 대단히 모호한 작품이라 ‘정답’이 제시되는 소설이 아닙니다. 교과서에서 “난 보랏빛이 좋아.”가 죽음을 암시하는 복선이라고 밑줄 긋고 필기시키고, 이런 게 불가능한 작품이란 거지요.
참고로 <은하철도의 밤>은 ‘스기이 기사부로’ 감독이 애니화를 했는데 대단한 명작으로 꼽힙니다. <우테나>와 <돌아가는 펭귄드럼>에서 정말 많이 오마주했죠. 문제는 워낙 정적이라서 좀 지루한 면이 있습니다.
<은하철도의 밤> 모호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위 대사에서도 나온 캄파넬라입니다. 캄파넬라에 대한 설명은 센과 치히로 타래에서 했으니 생략. 그런데 사실 캄파넬라는 성별조차도 알 수가 없어요. 성별을 드러내는 단서가 없기 때문이죠.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이 고양이 수인이 된 이유.
<은하철도의 밤>에 대한 설명은 이 타래를 참고하세요.
그런데 이쿠하라 쿠니히코가 이 <은하철도의 밤>을 다루는 방식이 특이합니다. 이쿠하라는 은하철도의 밤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을 끝마친 상태로 그 해석을 강요하는 면이 있어요. ‘이쿠하라가 펭귄드럼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게 중요해지게 됩니다.
이 후기도 마찬가지. 캄파넬라를 잃은 후 조반니가 불행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쿠하라 쿠니히코의 해석입니다. 원전에서 조반니의 내면은 독자들의 상상에 맡겨집니다.
그럼 이쿠하라 쿠니히코는 <은하철도의 밤>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요? <돌아가는 펭귄드럼>에서는 그 실마리가 제시됩니다. 링고의 죽은 누이 ‘모모카’는 ‘마법’을 쓸 수 있습니다.
그 마법이란 자신의 일부를 희생하여 이 세계의 운명을 뒤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일기장에 적힌 주문을 읽으면 이 세계가 변화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죠.
물론 그 ‘마법’에는 대가가 뒤따릅니다. 몸에 불이 붙는 것이죠. (이 또한 <은하철도의 밤>의 인용입니다.) 결국 세상을 변화시키고 운명을 갈아타기 위해서는 마법사의 자발적인 ‘희생’이 뒤따라야 합니다.
이 마법의 구조가 이쿠하라 월드의 실마리를 드러냅니다. 하야오 월드와 달리 이쿠하라 월드의 마법은 잔혹하고 냉철하며 또 계산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럼에도 이런 행위가 ‘마법’인 이유는 이런 마법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를 돌립시다. <펭귄드럼>은 24화나 되는 애니메이션이기 때문에 보다 직접적으로 할 이야기만 골라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제 ‘사랑’의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이게 이 애니메이션의 주제라고 1화 오프닝에서 대놓고 나오니까요.
펭귄드럼의 세계는 사실 세계의 구조만 이해하면 참 쉽습니다. 그래서 이 세계가 어떤 세계인가 하면 ‘사랑이 한정자원인 세계’입니다. 사람에게는 줄 수 있는 사랑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로지 ‘선택 받은 사람’만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해서 죽거나 사라지지는 않지요. 그런데 펭귄드럼의 세계는 다릅니다.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정말로 죽거나 사라져버립니다(여기서는 ‘투명해진다’고 표현됩니다.) 그야말로 가장 극단적인 세계의 구조를 취하고 있는 셈입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애니메이션은 더 극한까지 나아갑니다. 1995년 일본 도쿄 지하철에서 있었던, 옴진리교에 의한 사린가스 테러 사건을 극중에 직접 삽입해버리기까지 한 것입니다. 도대체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세 개의 픽토그램. 95와 지하철, 그리고 펭귄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사실 펭귄드럼의 해석은 지난 10년간 무수히 많이 쏟아졌기 때문에 여기까지의 해답은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95는 1995년을 뜻합니다. 도쿄 사린가스 테러사건이 일어나 일본 사회가 급격히 개인주의로 이행하게 된 시기입니다. 우리는 곧 다시 이 시기에 대해 얘기하게 될 겁니다.
여기서 이쿠하라 쿠니히코는 좀 독특한 접근을 요구합니다. 애니메이션 안의 내용만으로는 애니메이션을 이해할 수 없게 만들어, 그 해답을 애니메이션 밖에서 찾게끔 하는 겁니다. 그 실마리로 제시한 것이 바로 옴진리교 사린가스 테러사건이고요.
옴진리교 사린가스 테러사건은 아사하라 쇼코라는 교주가 만들어낸 사이비 종교에서 시작됩니다. 이들은 일본 사회를 전복시키고 옴진리교를 국교로 하는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지하철에서 테러 사건을 벌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저서 <언더그라운드>와 <약속된 장소에서>라는 에세이를 통해서 피해자와 가해자를 각각 취재하여 이 테러 사건을 집요하게 파고든 바가 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평에 따르면 이 사건은 ‘현대 일본 사회를 만든’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이쿠하라 쿠니히코는 도대체 왜 이 옴진리교 사린가스 테러사건을 작품 속에 집어넣어야 했던 걸까요?
타래의 해설 방법을 좀 달리 하겠습니다. 요소들을 하나하나 설명하는 건 이제까지의 해석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본 사람들에겐 흥미롭지 않고 안 본 사람들에겐 난해해지기만 할 테니까요.
그러니 이번 타래는 아예 거꾸로 가봅시다. 결론부터 놓고 시작하자구요. 이 애니메이션은 학생 운동의 실패 이후의 세대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진행을 위해서는, 어느정도 단정을 짓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연대를 구하여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힘 미치지 못해 쓰러짐은 개의치 않으나
힘 다하지 않고 꺾이는 것은 거부한다”
맆님께서 지적하신대로 이쿠하라 쿠니히코는 “일본 운동권이 추락하고 버블소비사회로 이행되는 걸 그대로 보고 자란 세대”입니다. 이쿠하라 쿠니히코는 학생 운동의 좌절 때문에 ‘세상은 혁명될 수 없다’는 좌절이 어린 시절의 큰 상처로 남았다고 말했을 정도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습니다.
일본의 학생 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이유에 대한 진단은 많아서 이야기하기가 조심스럽지만 폭력적인 노선을 선택한 과격한 세력이 등장한 것도 사실입니다. 이른바 “적군파” 같은 세력이 대표적이죠. 결국 이런 폭력 노선은 내부 모순에 의해 서서히 망가져갑니다.
이들은 가부장제를 극복하지 못했고, 드높던 이상은 망상으로 변해갔습니다. ‘공산주의적 인간이 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12명의 내부인을 우치게바로 숙청한 ‘산악 베이스 사건’이 그 결과였습니다.
결국 학생 운동의 이상은 좌절되었습니다. ‘더 인간다운 삶’에 대한 부르짖음은 좌절되고 만 것이죠. 일본의 학생 사회가 혁명에 대한 실패로 좌절감에 빠져있을 때 그 공허함을 달랠 존재가 등장합니다. 바로 일본의 ‘옴진리교’와 같은 ‘컬트 종교’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언더그라운드’를 집필하게 된 이유는 옴진리교에 빠져 테러사건까지 감행하기에 이른 컬트의 간부들이, 무식하거나 경제적인 이유로 세상에 불만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대학을 나온 중산층 엘리트들이 많다는 데서 호기심을 느껴 진행하게 되었다고 밝히는데요,
90년대에 이르러 일본의 학생 운동이 실패로 끝난 이후,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했던 열망이나 이상, 그리고 대안 공동체에 대한 열망이 컬트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단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학생 운동의 실패는 정신적 공허함을, 정신적 공허함은 컬트 종교의 부흥이라는 결과를 낳은 셈이죠.
옴진리교의 부흥도 결국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순수한 열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세상을 사랑으로 채우고, 대안적 삶을 추구하면 유토피아가 찾아올 거라는 믿음.
그 믿음은 결국 세상을 적으로 만들어 테러를 일으킨다는 극단적인 결과로 끝을 맺게 됩니다.
일련의 사건들은 일본 사회를 보수화하고 나아가 ‘튀어서는 안 된다’는 이념을 고착하게 만듭니다. 더 이상 ‘세상을 바꾼다’는 순수한 이상이 통하지 않게 된 세계가 이렇게 완성된 것입니다.
이쿠하라의 표현을 빌리자면, “행복한 미래를 상상할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이죠.
그래서 <돌아가는 펭귄드럼>이 보여주는 이쿠니 월드는 매우 잔혹합니다. 사랑은 한정 자원이기 때문에 부모가 자식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의 양도 정해져 있습니다. 누군가는 부모의 선택을 받아 사랑을 받으며 자랄 수 있지만 누군가는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해 죽거나 ‘투명해지고’ 말죠.
누군가는 사랑을 받아 살아남을 수 있지만, 누군가는 사랑을 받지 못해 살아남지 못합니다. 이런 구조가 부조리한 것은 후천적인 노력으로 바꿀 수 없다는데 있습니다. 이건 타고난 환경에 의해 결정되거든요.
깜빡하고 위에서 얘기하지 않았는데 이 애니메이션에서 반복되는 ‘생존전략’은, 결국 이 애니메이션이 학생 운동의 좌절 이후의 세대(=즉 ‘생존’만이 유일한 의제이자 구호가 되어버린 세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일련의 이야기는 사실 <우테나>와도 일맥상통하는 이야기.
“분명히 날 많이 닮았군. 나도 한때는 그랬다.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에 가치가 있다… 그것이 세계를 혁명할 유일한 방법이라고. 하지만 힘이 없으면 그런 객기 가지고는 아무 것도 못 바꿔.”
얼마나 면상을 때리고 싶게 연출했던가요.
이런 세계의 구조를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어린이 브로일러’입니다. 어린이 브로일러는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가는 곳인데 이곳에서 아이들은 ‘투명해집니다’ 이 사회에서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한 채 그저 근근이 살아가는 존재가 되고 만다는 은유로 보는 것이 적합할 겁니다.
어린이 브로일러는 결국 소비자본주의 세계의 단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투명해진 채(=삶의 의미를 잃은 채) 그저 살아만 가고 있을까요.
이쿠하라: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세계가 '이극화' 되었다고 생각해요. 이 세계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의 감정이 무시되기 시작했달까, 그것이 피부밑의 지하같은 장소로, 마그마처럼... 부글부글 끓으며 모여있었던 게 아닐까. 모두가, 그것을 보고도 모르는 척하지 않았나 합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종합하자면 결국 돌아가는 펭귄드럼이 제시하는 이야기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삶의 이유를 잃어버린 (일본) 사회”
일본을 괄호 속에 넣은 이유는 한국도 사실 다르지 않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맥락이 조금 다를 뿐.
오늘의 타래는 여기까지! 사실 해야 할 이야기가 너무 많은 작품이라 아직도 갈 길이 멀지만 지금 끊지 않으면 안되겠단 생각이 듭니다. 여기까지 1부로 하죠. 다음 2부에서는 본격적으로 모모카와 사네토시의 이야기를 해보려 해요. 그럼 빠이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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