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기사 카오루에 대해 이야기를 해봅시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본래 <미소녀전사 세일러문>의 영향을 받은 기획이었기 때문에 <세일러문>의 감독 이쿠하라 쿠니히코를 공동 연출자로 하여 기획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쿠하라 쿠니히코는 본인의 성미에 맞지 않는 작품이라는 이유로 거절했습니다.
참고로 안노 히데아키가 얼마나 <세일러문>의 광팬이었냐면, ‘어떤 장면’을 본 안노 히데아키는 감동을 받아서 울었다고 합니다. 안노 히데아키가 왜 감동을 받아서 울었냐면요,
“그 장면은 UP의 컷인데, 트랙업(카메라가 캐릭터를 향해 다가가는 효과)을 하면 핀트가 흐려지는 것도 좋았고, 변신뱅크의 H-1(음악)이나 SE(효과음)도 그대로 겹치는 점도 좋았죠(웃음) 리얼타임으로 (마모루 앞에서 변신하는 걸) 시사하고 있어서.”
이해가 안되는 게 정상입니다.
원래 오타쿠는 이런 존재거든요.
게다가 안노 히데아키는 세일러문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제작사 가이낙스의 스태프들을 끌고 가서 세일러문 제작을 돕기도 했습니다. 안노가 이쿠하라보다 업계 선배였기 때문에 난데없이 찾아와 일하고 있는 안노를 보고 이쿠하라가 “저 사람이 왜 여깄어” 황당해했다는 후문.
물론 이쿠하라도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사실상 이쿠하라의 자캐라 할 수 있는 세일러 넵튠과 세일러 우라노스의 변신씬을 안노에게 맡깁니다. 덕업일치답게 결과물은 발군.
...이런 인연 덕분에 안노 히데아키는 이쿠하라 쿠니히코와 함께 세일러문 뒷풀이 온천여행에도 참가할 수 있었는데, 이때 이쿠하라 쿠니히코와 나눈 대화가 ‘나기사 카오루’라는 캐릭터 조형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꽤 널리 알려져 있지요.
물론 대체 그 온천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우리 상상의 영역에만 남겨놓도록 해요. (사실 별 일은 없었고 이쿠하라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네요.)
여튼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메카 버전의 세일러문으로 기획되었기 때문에 이쿠하라 쿠니히코에게 함께 작업하자고 제안했지만, 앞서 말했듯이 거절. 대신 <세일러문>의 각본가 에노키도 요지가 합류합니다. 이분은 추후에 <소녀혁명 우테나> 대부분 에피소드의 각본을 담당하시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안노 히데아키는 안노 히데아키이고 이쿠하라 쿠니히코가 아니었기 때문에 ‘모든 주역이 여성인 메카물’을 구상했지만 결국 이는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감성적인 면에서 그만큼 따라주지 못했던 걸까요?
에노키도 요지도 초반 에피소드들을 담당하다가 본인의 작풍과 맞지 않다는 이유로 중도 하차하면서 결국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후반부는 안노 히데아키가 홀로 하드캐리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사실 초기 기획에서 나기사 카오루는 지금과 사뭇 다른 디자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보다 노골적인 ‘이쿠하라 쿠니히코’였는데요, 일단 세일러복을 입고 검은 고양이를 안고 다니며 팔목에는 자살 기도의 흔적이 남아있는 소년이었습니다. 이 해석도 맛나네요.
자살 기도 흔적이라는 게 의아할 수도 있는데, 온천 여행에서 이쿠하라가 얘기한 내용 중에 ‘청소년기에 자살을 하려 했지만 자살 대신 [이 이후의 삶은 덤]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살게 되었다’고 얘기한 내용이 있었던 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튼 이 초기 기획은 그대로 방영되지는 못했는데 그 이유는 마음껏 추측해볼 수 있죠. 추측은 시청자로서의 권리입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뇌피셜입니다만, 아니 제가 쓰는 모든 글들이 뇌피셜애 의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여튼.
이 초기안대로 가면 나기사 카오루가 고양이를 죽이는 장면이 나와야 하기 때문인 것도 있고 (이 장면은 애니메이션에도 나올 뻔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왜냐하면… 카오루의 마지막과 대구를 이루거든요.)
너무 ‘이쿠하라’가 되어버리는데다가...
가장 현실적인 이유는 아무래도 방영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일 겁니다. 나기사 카오루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해야 559초였기 때문에 많은 이야기를 담아낼 수가 없는 상황이었거든요. 물론 559초만에 모든 커플링을 제치고 에반게리온에서 가장 임팩트 있는 커플링을 남겼지만요. 야, 얼굴 붉히지마!
안노 히데아키는 “아무래도 나기사 카오루라는 캐릭터를 깊이 있게 보여주기에는 시간이 모자르다 보니까... 의도한 것과 다르게 좀 이상하게 된 것 같다”고 변명했지만,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Q의 러닝타임은 1시간 46분, 팬들의 반응은 ‘했네, 했어’였죠.
참고로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Q는 연출이 좀 이상합니다. 자꾸만 이카리 신지와 나기사 카오루가 함께 있을 때 몇몇 순간들을 보여주지 않고 넘겨버리는데 안노 히데아키답지 않은 실수처럼 보입니다.
안노 히데아키가 평소에 애니메이션을 어떻게 보는지 살펴보자고요. 이 사람은 그런 초보적인 실수를 할 양반이 아닙니다. 감독이 거들고 있어요. “했네, 했어.”
그래요. 카오신은 완전 오피셜입니다.
오늘의 타래는 여기까지 (야 잠깐만)
피아노 협주가 가진 성적인 함의는 박찬욱도 영화 <스토커>에서 기깔나게 써먹었죠. 그러니까 카오신 팬분들은 적폐 해석이라고 기죽으실 필요가 없다는 것이 오늘의 결론입니다 #어라
갑자기 나기사 카오루 이야기를 시작한 이유는,
다음 도장깨기의 대상이 결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겨울에 찾아뵙죠.
근데 시대가 어느 땐데 ‘또’ 에반게리온 얘기를 하고 있어야 하는 걸까요? 솔직히 20년 넘게 우려먹었으면 더 할 얘기가 없는 게 맞잖아요?
이미 저보다 뛰어난 분석가들이 물고 뜯고 씹고 즐기고 맛보고 심지어는 골수를 파서 그걸 또 국을 끓이고 그 국에다가 라면사리까지 넣어서 끓인 뒤에 먹고 남은 국물로 죽까지 끓여먹은 게 에반게리온이잖아요.
아니 죽까지 끓여먹었으면 몰라 죽 먹고 남은 그릇을 설거지하지 않고 그대로 물을 넣어다가 다시 찌개를 끓인 게 지금의 에반게리온인데 여기서 무슨 얘기를 더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우리는 조금 달리 접근하겠습니다.
그럼 에반게리온 타래에서 뵙겠습니다.
+ 이 타래의 절반은 농담입니다.
+ 사실관계만 취해주시고 제 자의적인 해석은 그러려니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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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Nov
다음 타래는 드디어 대망의 작품. 제 오랜 근원. 제 오랜 고향. 이쿠하라 쿠니히코 버전의 <은하철도의 밤>, 바로 <돌아가는 펭귄드럼>입니다. 이건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메이션과 달리 어디서 구해 볼 곳도 마땅치 않고 가독성도 좋지 않은 애니메이션이니 이 타래 때문에 보시는 건 비추합니다.
<돌아가는 펭귄드럼>은 <미소녀전사 세일러문>, <소녀혁명 우테나>를 만든 이쿠하라 쿠니히코의 복귀작입니다. <우테나> 이후 ‘함께 하기 어렵단’ 평을 받으며 후원이 끊겼고, 이쿠하라 본인도 애니메이션에 흥미를 잃고 은퇴해버려 오랜 공백기를 가졌죠. 복귀작이란 타이틀만으로 화제가 됐어요.
‘백합’이라는 하위장르를 대중매체에 공식적으로 소개하면서 ‘백합의 아버지’로 거론되기까지 한 이쿠하라 쿠니히코. 사실 이쿠하라는 애니 업계에 돌아오려고 꽤 오래 전부터 노력해왔습니다. 하지만 <우테나> 때 보여줬던 난해한 스타일이 도리어 독이 되어 돌아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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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Nov
제가 언제나 말하지만 이미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의 기대도는 엄청나게 높아져 있는 상태라서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단 하나입니다.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가 엄청 망하지도, 그렇다고 엄청 대단하지도 않게 끝나고 찝찝한 상태에서 관객들이 나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로 “하지만 다음 번에도 서비스 서비스!”하는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갑자기 들려오는 “란 란 라란 란 란 란”
나우시카 레퀴엠이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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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Nov
미야자키 하야오는 애니메이션 <나우시카>를 만들기 위해 코믹스 <나우시카>를 그려야 했습니다. 원작이 없는 작품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 수 없다는 애니사 임원들에 대한 대답이었습니다. 원작이 없으면? 만들면 되는 겁니다.
애니메이션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가 나온 후 나우시카에 환호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우시카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과장된 자연의 힘, ‘메시아’에 기대는 스토리가 영웅주의적으로 보인다는 것 등등.
그래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일련의 비판들을 피드백하여 코믹스 연재를 재개하게 됩니다. 그러나 미야자키 하야오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아직 모르고 있었던 게 있었습니다. 바로 ‘미야자키 하야오가 힘을 감춤’이었습니다.

“엥 그 사람이 무슨 힘을 감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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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Nov
종종 애니메이션 업계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애니메이터들 사이에선 ‘잘 그리는 사람이 진리’ 같은 게 있는 기분. 그런데 제작진행 출신들은 얼마나 말을 잘해야지 애니메이터들에게 눌리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거지…
미야자키 하야오 • 안노 히데아키 • 유아사 마사아키는 ‘애니메이터’ 출신 애니메이션 감독. 움직임이라던가 작화에서 재능을 드러내어 연출가에 이르게 된 케이스. ImageImageImage
다카하타 이사오 • 이쿠하라 쿠니히코 • 토미노 요시유키 • 오시이 마모루는 제작진행 출신 감독. 애니메이션이 어떤 식으로 만들어지는지, 그 공정의 전반을 관리하면서 연결해주는 역할로 시작하여 그 이해도를 바탕으로 연출가에 이르게 된 케이스. ImageImageImage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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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Nov
미야자키 하야오와 이쿠하라 쿠니히코의 작품을 들여다보면 ‘같은 정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들이 하는 이야기가 같은 궤에서 탄생했기 때문일 겁니다.
“제 생각에 우리 세대나 어쩌면 다음 세대는 상상력이 부족한 듯합니다. 그래서 많은 아이들이 자살을 하는 거겠지요. 제 생각에 그들은 행복한 미래를 상상할 수 없는 거예요.”
“좀 잔인하게 말해서 부모의 시야는 아이들에게 미래를 위한 모티베이션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부모들은 행복해보이지 않죠. 아이들은 행복한 미래를 상상할 수 없는 겁니다. 아이들이 교류하는 어른이란 게 부모나 선생 정도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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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Nov
오늘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 가운데서도 확고한 지지층을 가진 작품에 대해 얘기해보겠습니다. 지브리 타래는 끝이라고 말했는데 이 작품에 대한 질문이 넘치기도 하고. 도입부만 지금 써두고 일하고 와서 저녁에 마저 쓰겠습니다.
<마녀 배달부 키키>는 지옥의 강행군이었습니다. 후배가 만들던 작품을 죄다 갈아엎어 다시 만드느라 히사이시 조가 상영 직전까지 촉박하게 음악을 작곡해야 했는데요, 그래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까맣게 불타올라 한동안은 단편에 집중하면서 휴식을 취하려고 했습니다.
극장 다음으로 영화의 수요가 높은 장소가 어딜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바로 비행기입니다. 비행기는 다음으로 역사가 오래된 영화 감상의 장소였고 지금도 비행기와 영화는 관련이 깊습니다. 아시아나 항공 같은 경우엔 <국제 아시아나 단편영화제> 같은 영화제를 개최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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