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하야오는 애니메이션 <나우시카>를 만들기 위해 코믹스 <나우시카>를 그려야 했습니다. 원작이 없는 작품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 수 없다는 애니사 임원들에 대한 대답이었습니다. 원작이 없으면? 만들면 되는 겁니다.
애니메이션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가 나온 후 나우시카에 환호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우시카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과장된 자연의 힘, ‘메시아’에 기대는 스토리가 영웅주의적으로 보인다는 것 등등.
그래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일련의 비판들을 피드백하여 코믹스 연재를 재개하게 됩니다. 그러나 미야자키 하야오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아직 모르고 있었던 게 있었습니다. 바로 ‘미야자키 하야오가 힘을 감춤’이었습니다.

“엥 그 사람이 무슨 힘을 감춰요.”
미야자키 하야오는 애니메이션을 만들 때 ‘온 가족들이’ 극장에 둘러앉아서 보는 것을 가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개중에서 가장 중요한 관객은 어린이들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애니메이션은 ‘아이들이 보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코믹스에서 그런 제약은 해금되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모든 애니메이션이 (표면적으로는)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이유는 애니메이션이 끝나고도 살아갈 어린이들에 대한 응원과 배려입니다. 하지만 코믹스는 다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모든 사상, 그리고 차마 애니메이션에는 담을 수 없었던 어두운 이면까지도 코믹스에서는 직접적으로 다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연의 위선, 문명의 참혹함, 기술에의 의존, 구조에 의한 차별 등등이 묘사되기 시작합니다.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코믹스는 사실 더 풀어서 이야기 할 내용이 없습니다. 대단히 직설적인 작품이거든요. 그리고 ‘인간’에 대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결론을 옅볼 수 있는 귀중한 텍스트이기도 합니다.
코믹스에서 나우시카는 더 이상 납작한 ‘메시아’이자 ‘영웅’이 아니라 더욱 복잡한 칭호를 얻게 됩니다. 모든 존재는 양면성을 가지니까요. 이 칭호는 코믹스에서 여러분들이 직접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안노 히데아키 또한 이 나우시카 코믹스의 굉장한 팬이라 ‘이런 굉장한 걸 왜 애니화하지 않고 있느냐’며 자신이 2부의 연출을 맡고 미야자키 하야오가 3부의 연출을 맡아 애니화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안노 히데아키에게 “너는 전쟁놀이나 하고 싶을 뿐이지.”라 일갈했습니다. 그도 그럴 게 이를 3부작으로 만들면 2부는 전쟁 전면전을 다루는 파트가 되거든요. 그럼에도 안노의 러브콜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안노 히데아키의 단편 <거신병 도쿄에 나타나도>도 그런 러브콜들 중 하나입니다. 이 작품은 에반게리온이라는 프랜차이즈에 나우시카 시리즈를 끌어들여 그 정통성을 가져오려는 시도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거신병의 사용은 허락했지만(그도 그럴 게 애니에서 거신병 출격 장면을 지휘했던 인물이 바로 안노 히데아키입니다. 스케치북 하나 들고 와 일거리를 달라던 청년에게 덜컥 이 중요한 장면을 맡겨버렸죠.) 그런 속셈을 옅본 것인지 다시 한 번 안노 히데아키에게 일갈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거신병 사용은 허락하지만 “나우시카는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안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분명히 했습니다.
여튼 <에반게리온> 감독 안노 히데아키와 미야자키 하야오는 여러 시련을 겪으면서도 사제로서의 관계를 원활하게 이뤄오고 있습니다. 안노 히데아키는 독립해 나갔지만 스튜디오 카라는 여전히 지브리의 하청 회사로서의 업무를 도맡아 하고 있는 데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자전적인 애니메이션 <바람이 분다>에서 주연 목소리를 연기하기도 했습니다...? 좀 의아한 일이지만 미야자키 하야오가 자기 자신을 연기시킬만큼 안노 히데아키를 믿고 있다는 증명이기도 할 겁니다.
안노 히데아키는 과연 언제쯤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애니화를 인정 받을 수 있게 될까요? <에반게리온 신극장판>의 완결 이후, 더 이상 기다릴 게 없어질 애니메이션 팬들에게 주어질 또 하나의 베이퍼웨이브를 기대해봅니다. 신극장판처럼 이번에도 한 20년만 더 기다리면 되지 않을까요?
나우시카 코믹스는 서점에서 절찬리 판매 중이니 팬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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