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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는 다음과 같은 부분이 붙는데, 스칼렛이 대략 이렇게 번역되는 글귀를 새겨 준다고 합니다.

"오하라네가 포크에게 - 유능하고 신실한 하인이로다"

아니 이 미개한 백인놈들이?????
그런데 여기서 특이한 건 포크의 반응인데, 스칼렛의 제안에 말을 빙빙 돌리다 화제를 딴 데로 옮겨 버리죠.

<히익!!?? 아니 아가씨 에이 뭐 그건 아니고요, 아 그렇죠 그거 그 엇 유에프오다! 아닌가? 헤헤 제가 잘 몰라서 저기 그런데 말이죠 아가씨 아씨는 천사십니다 흑인애호가이죠 그렇죠...!>
그냥 넋놓고 읽다 보면, 결과적으로 시계에 <너 노예 ㅊㅋ>라는 글귀를 새기지 않게 된 건 깜빡 잊고 - 스칼렛 본인도 잊어버렸습니다! - <흑인들은 좀 어리석구나...> 정도의 인상만 남긴 채 넘어가기 쉬운 구절입니다.
미첼이 이 효과를 기획했으면 참 대단한 협잡꾼이고, 설마 기획히지 않고 이런 구성이 나왔으면 그것은... 실로 다른 의미로 천재적이라고 할 수밖에.
그나저나 일가친척친구네 집들 모두 셔먼이 쓸고 지나간지라, 300달러가 나올 곳이라곤 도무지 없어 보이는데요. 대체 누구한테 돈이 있을…..
레트.
그렇습니다. 레트. 파워 진정성맨이 되어 떠났던 그 남자는 이미 전쟁특수로 한몫 거하게 땡겨 놓은 상태였죠. 그 진정맨에게 진심을 담아(라고 착각하게 만들면서) 고백하면 300쯤은 우습게 뽑지 않을까요?
애틀랜타로 갑시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레트는 도로 자본주의의 돼지가 되어 있었어요 꿀꿀
- 꿀꿀!
- 꿀꿀꿀!
이게 사람 사는 데니? 돼지우리지!
결국 스칼렛은 레트에게 한푼도 못 건지고 퇴각하고 말죠.
셔먼이 신나게 해체한 애틀랜타는 다시 지어지고 있죠. 도시로 나온 흑인들과, 전쟁 후 남부로 찾아온 북부인들로 왁자지껄. 이렇게 남부 사회가 공화당에 의해 다시 지어졌던,

정확히 말하면 짓긴 지으려고 했는데 뭔가 미완성으로 끝났던

이 시기를 <재건 시대Reconstruction era>라고 부릅니다.
래디컬 리퍼블리컨, 곧 공화당 급진파는 북부의 이주민들, 남부의 협력자들, 해방된 흑인들로 주정부를 구성해서 개혁을 밀어붙이려 했죠. 남부 수꼴 백인들은 이들을 적대했는데, 이주민들을 카펫배거, 협력자들을 스캘러왝이라고 불렀습니다.
카펫배거는 카펫을 싸고 다니다 그걸 깔고 노숙하는 거지라는 뜻이고, 스캘러왝은 대충 건달 정도의 의미. 레트 버틀러가 전형적인 스캘러왝, 즉 공화당 협력자죠.
선거 결과 흑인들이 의회에 대거 진출했고, 이는 백인들에게 '흑인들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어!' 라는 공포를 불러일으켰죠. 하지만 인구비례로 따지면 의회에 흑인들이 오히려 적게 들어간 셈이었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뭐 비슷비슷합니다.
영화의 이 장면에서도 래디컬 리퍼블러컨에 대한 악감정이 드러나죠. 실제로 공화당 내부에서 남부 농장들을 쪼개서 흑인(남성) 하나당 <40에이커와 노새 1마리>를 주자는 의견이 있긴 있었다고.

당시 기준으로나 1939년 기준으로나 아주 급진적이죠. 심지어 지금 미국 기준으로도 마찬가지.
공화당 급진파에서 나온 다른 급진적인 주장으로는 ‘8시간 노동법’이나 ‘여성 투표권’ 같은 게 있었죠. 역시 당시 기준으로 너무 급진적(?)이라서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이렇게 이야기하니 공화당 급진파가 천사같아 보이지만…
네이티브 아메리칸, 일명 인디언들을 학살하는 데는 이들도 매우 열심이었죠. 결국 흑인이나 여성을 시민의 한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게 국민국가와 산업사회를 구성하는 데 유리했기 때문이고, 공화당원들이 반드시 박애주의자라서 그렇게 된 것은 또 아니었던 셈.
여튼 레트를 낚는 데 실패하고 애틀랜타 시내를 방황하던 스칼렛은 다른 통통한 물고기를 발견해 이내 낚아챕니다. 이웃이었던 프랭크 케네디. 프랭크는 전쟁이 끝나고 제법 돈이 있는 사업가가 되었죠.
<스칼렛 오하라 케네디>
스칼렛의 결혼 소식을 듣고 절규하는 동생 수엘렌
내 애인이랑 결혼했다고!
멜라니는 오늘도 변함없이 또 여념없이 최애쉴드 #수엘렌_진정해
얼굴천재
(대변인)
스칼렛은 애슐리와 같이 애틀랜타에서 사업을 하자고 꾀지만, 애슐리는 반대합니다. 멀리 뉴욕으로 떠나 그곳에서 취직할 거라고.
갑자기 큰 소리로 울기 시작하는 스칼렛.
그러자 멜라니가 순식간에 달려오죠. 수엘렌이야 울든 말든
남편을 매섭게 째려보는 이 짧은 순간이 아주... 좋죠.
무슨
이유가
끊임없이
튀어나오는
멜라니. 소설에서 멜라니의 논거-제시는 영화보다도 훨씬 길죠. 막판에는 스칼렛조차 당황할 정도. 이 토론의 승자는 이미 정해졌습니다.
오, 마이 달링!!!!
그 와중에 포옹까지 성공. 그렇습니다, 애슐리가 오는 바람에 스칼렛이랑 같이 안 잔 지 오래 됐죠.
여기서 달링darling이라는 표현에 대해 살펴봅시다. 달링은 사랑의 표현이죠.
애틀랜타에 살 때, 멜라니가 받은 애슐리의 편지를 스칼렛이 훔쳐보는 대목이 있었죠. 맨 처음 My dear wife라고 쓰여 있는 걸 보며, 스칼렛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

<고작 dear라니, 무릇 사랑하는 사이라면 darling이나 sweetheart를 써야 해. 둘은 별로 사랑하는 사이가 아닌 거야, 으흐흐흐흐….>
전쟁으로 아들 넷을 모두 잃은 타알턴 부인이 말합니다.

““우리 달링들이 다 없어졌으니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

그리고 소설에서 이어지는 문장은

“모르는 사람들은 죽은 아들 얘긴 줄 알겠지만, 태라 여인들은 그것이 말을 뜻함을 알았다.”
타알턴 부인은 말덕후인데 광신적인 수준이죠. 소설에서 맨 처음 달링이라는 단어를 쓴 것도 이 사람인데, 이 경우에도 달링이란 자신의 애마입니다. 말들을 모두 잃자 사람이 애슐리처럼 허공에 붕 뜬 것처럼 묘사되죠.

이렇게 미첼은 <달링>의 사용법에 대해 우리에게 살짝 힌트를 주고 있답니다.
그렇습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달링은 사랑의 밧데리…

가 아니라 사랑의 바로미터. 이제 한 번 기압계의 애정수치가 얼마나 나오는지… 측정해볼까요!
소설에서 달링이라는 표현은 모두 91번 나옵니다. 스칼렛이 누군가를 달링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15번. 레트는 12번입니다. 앞서 말한 타알턴 부인이 5번으로 당당히 4위. 예상하시겠다시피 미세스 타알턴의 다섯 달링은 몽땅 말이죠.

멜라니는 소설에서 몇 번 달링이라는 표현을 쓸까요?
멜라니가 누군가를 달링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34번입니다. 압도적으로 1위.

그 중에서 스칼렛은? 28번입니다.
달링!
잘 자, 달링
있잖아, 달링!
언제 왔어, 달링?
나를 버리고 가지 않을 거지, 달링?
오, 마이 달링!
나머지 멜라니의 달링들은 멜라니의 남편인 애슐리 2번, 조카인 웨이드 해밀턴 2번, 오빠 찰스 1번, 불확실(미드 부인?) 1번. 게다가 이 중 4번의 달링은 스칼렛과 대화하다 나온 것. 애정도를 다소 감해 볼 필요가 있겠죠.

그리고 애슐리의 경우가 아주 특이한데 둘 다 죽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애슐리의 실종통지서를 받았을 때. “우리 달링이 죽었구나, 난 알 수 있어!”

아니 이건 암시도 아니잖아.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휴가나온 애슐리를 보고 멜라니가 이렇게 말할 때입니다 : “옷이 엉망이야, 달링.”
영화에서는 이 대사들이 안 나오고, 대신 원작에 없는 이성애 착즙 장면들이 수차례 들어가 있죠. 여기서 저는 다시 권위자들의 의견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옷이 엉망이야 달링”은 <용케 안 죽고 살아 돌아왔네^^> 정도 의미라는 거죠.
물론 사람은 누구에게나 애증을 동시에 갖고, 그것은 친한 사이일수록 심하기 마련. 저는 애슐리에게 멜라니가 <그 나름>의 애정은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설을 읽다 보면 그것조차 부정하기는 어렵죠. 딱히 지극하지도 혹은 성애적이거나 하지도 않아 보이는 애정이지만.
그런데 그렇다면 문제는 오히려 애슐리 쪽. 멜라니는 애틀랜타에서의 난산으로 몸을 크게 해쳐 다시 아이를 낳을 수도 없게 되었죠. 섹스를 못하는데, 아니 애초에 동성애자인데, 애슐리 말마따나 <최고의 아내>가 될 수 있을까요?
혹시 애슐리 윌크스도 ‘일코’하는 양성애자쯤이 아닐까요? 그런데 여기에는 딱히 증거가 없습니다. 글쎄요, 애슐리는 호모소셜적인 지향이 매우 강한 사람이라는 것 정도는 소설에서 묘사되긴 합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그러거나 말거나 애슐리는 심각하게 의존적인 인물이기에 멜라니에게 매여 살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것이 어떻든 가장 큰 이유죠. 다시 강조되지만 백인 농장주들이 지구상에서 가장 의존적입니다.
멜라니의 조카 웨이드 해밀턴이 누구냐 하면 스칼렛과 찰스의 아들. 스칼렛은 아들을 심히 미워하거나 학대하거나 하는 건 아닌데, 별 관심이 없고 귀찮아하죠. 표현하기 껄끄러운 캐릭터라서인지 영화에서는 안 나옵니다. 단 웨이드라는 캐릭터 자체는 매우 현실적이죠.
여기서 멜라니가 조카에게 달링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도 따져 보면 웃긴데, 이렇게 말하죠 : <오, 이 귀여운 것you precious darling! 네가 내 아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멜라니는 자기 애를 스칼렛처럼 키워 달라고 말한 적이 있었죠. 종합하면 상식을 아득하게 초월하는 발언입니다.
- 자기, 왜 여자끼리는 아이를 못 가지는 걸까?
- 또 무슨 소리 하니?
정리하면

멜라니 34번, 그 달링 중 스칼렛에게가 28번
스칼렛 15번, 그 중 레트에게가 6번
레트 12번, 그 중 스칼렛에게가 11번
(스칼렛이 머릿속으로 누군가를 달링이라고 생각함) 8번, 제각각
(이외 미첼이 설명하면서 달링이라는 표현을 씀) 5번, 제각각
타알턴 부인 5번, 모두 말

되겠습니다.
스칼렛은 멜라니를 딱 한 번 달링이라고 부르죠. 횟수로 따지면 레트가 사온 초록 실크 보닛(빠리제 신상품)과 1달링으로 동급.
멜라니의 이 <오마이 달링> 대사의 한국어 번역들을 보면 제각기 괴상한데, “오, 내 아가!”도 있고, “오, 여보!”라고 옮긴 것도 있고, 그러니까 애슐리에게 하는 대사로 생각한 것이죠, 그리고 그 와중에 가장 괴이한 대사는 KBS 더빙판 번역인데

“가엾은 스칼렛…!”이 되겠습니다.
물론 K국 더빙판 번역에서는 좋은 대목이 많습니다. 가령 이 <어쩜 그렇게 거짓말을 잘해>는 더빙판 번역 그대로인데 멋진 번역이죠.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역시 마지막 대사겠고요.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거야…!”. 한국인들에게 영화 명대사 꼽으라면 “그대의 눈동자에 건배”와 함께 투탑으로 꼽히던 대사죠. 원문은 “내일도 또 다른 날이니까”인데 이건 뭐 태양에 비하면 그러거나 말거나.
그런데 멜라니 대목만 나오면 원작의 이성애 착즙에 더해 현모양처 착즙의 유교정신까지 더해지니 도저히 버틸 수가 없다 입니다.

“멜라니는 너를 너무나 사랑해”라는 고백이 “(멜라니는) 스칼렛을 무척 좋아해요”로 돌변하다니 이럴 수가.
그리고 “우리는 이제 진짜로 정말로 < >인 거야”라는 멜라니의 의미심장한 대사에서 <자매>는 <한가족>이 되어버렸죠.

갑자기 분위기 가족오락관.
여담이지만 스칼렛의 달링 발언은 상당수가 감언이설이죠. 웃기는 것은 애슐리를 달링이라고 칭하는 경우도 몇 번 없습니다. 겉으로 2번 속으로 2번인데 멜라니의 달링공세에 비하면 하찮은 수준. 더 웃기는 것은 애슐리인데 스칼렛은 물론 누구에게도 달링이라는 말을 안 쓰죠.
그리고 그리고 여러분, 제가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의 이 인터뷰 동영상을 찾았는데요. 드 하빌랜드 여사의 딕션이나 표현력이나 유머러스함에 대한 감탄은 나중에 하시고, 16분 36초로 어서 가시죠(다급).
드 하빌랜드 여사 가라사대, 우려 속에서 감독이 플레밍으로 바뀌고, 멜라니가 스칼렛을 영화에서 처음 만나는 씬이 촬영되었죠. 리허설에서 드 하빌랜드는 스칼렛을 매우 <정중>하고 <프렌들리>하게 대하는 멜라니를 연기했어요. 그러자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던 플레밍은 드 하빌랜드를 살짝 불러....
“멜라니가 말하는 것 무엇이든, 그 의미는... ( ) ...자, 이제 돌아가서, 그 의미를 담아 연기해 봅시다.“

그래서 그 ( )에 따라 연기했더니 원더풀했고, 플레밍에 대한 신뢰가 차올랐다는 것이죠!

여러분은 이미 압니다. ( )에 무엇이 들어가야 하는지.
다른 사람들이 여태까지 멜라니에게 기대했던, 정중하고 친구다운 그 어떤 우애의 감정이 아닌, 그것과 언뜻 비슷하지만 그것을 벗어나는 다른, 살짝 감춰진, 또는 감춰져야만 했던 어떤 감정,

그것은

바로 연애감정

곧 연정 즉 사랑입니다. #본인피셜
뒤에 보면 ‘기왕에 하는 거 파워레즈물 찍고 싶었는데 좀 아쉽’이라는 얘기도 나오죠. 멜라니가 입은 드레스에 은유해서.
이것으로 큐커가 잘린 중요한 이유가 멜라니 때문이었다는 추측은 더욱 힘을 싣습니다. 그게 아니었으면 드 하빌랜드가 폴라이트하고 후렌들리하게 연기를 할 필요도 플레밍이 그걸 몰래 교정할 필요도 그것 갖고 플레밍에 대한 신뢰가 충만해질 이유도 없겠죠. 곧 이성애 착즙러는 아무래도 셀즈닉.
물론 셀즈닉을 위한 변명도 있으니, 감독이야 영화에서 책임질 건 작품성과 명예밖에 없지만, 프로듀서에게는 돈이 걸린 문제니까요. 당시 기준으로 역대 최고 제작비를 들이고 있었는데, 어떻게든 본전을 뽑아야 하지 않겠어요! 결과는 본전을 넘어 너무 뽑은 영화이긴 하지만(역사상 최고 흥행작).
하여튼 이렇게 멜라니는 애틀랜타로 가겠다는 애슐리의 대답을 이끌어냅니다. 이것이 사랑의 힘입니다…! (동성애였지롱 이 남부놈들아!)
한 명의 실망과 두 명의 만족을 얻었으니 공리적인 결과(아님)
(쓸쓸해 보이는 뒷모습)
소설에서는 스칼렛의 결혼과 멜라니의 애틀랜타행 사이에 반 년 정도 텀이 있지요. 그리고 소설에서 등장하지 않는 인물인 윌은… 이렇게 말하죠. “글쎄 뭘 보더라도 그 양반(애슐리)이 뉴욕에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언뜻 <사랑>을 배반하는 듯한 윌의 이 발언은, 멜라니가 소설에서 잠시 등장하지 않던 사이(36~38장)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의 단서가 됩니다. 그전까지 멜라니는 온갖 구실을 만들어 스칼렛과 꼭 붙어다니고 있었죠. 게다가 멜라니는 고향인 애틀랜타로 무척 돌아가고 싶어했지요.
멜라니 : 피티 고모가 애틀랜타로 온다는데, 우리도 가는 게 좋지 않을까? 어쩌구저쩌구
스칼렛 : 갈 테면 혼자 가! 안 말려.
멜라니 : 아니 그게 아니고ㅠㅠ

라는 대목도 있고 말이죠. 그런데 왜 반년 동안이나 태라에? 이에 관한 부분은 다른 단서들이 나오기 전까지 잠시 미뤄놓도록 합시다.
멜라니가 자랐던 피티 고모의 집은 - 사실 이것은 멜라니와 찰스의 공동 소유였고 찰스가 죽은 다음에는 지분이 스칼렛에게 넘어가는데 - 스칼렛과 프랭크가 신혼살림을 차린 곳이었죠. 멜라니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자기 집에서 그것도 최애랑 안 살고, 다른 집을 구하겠다고 합니다.
뭐 그래 봤자 멜라니가 살기로 작정한 곳은 스칼렛네 바로 옆집이었지만. 지하실이 매우 큰 집(???)이죠. 멜라니가 여기서 대는 핑계도 아주 그럴듯하기에 살짝 넘어가기 쉬운데, 이 부분도 잠시 나중을 위해 남겨놓도록 합시다.
멜라니 해밀턴이 애틀랜타로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의 환영 속에, 그리고 순식간에 멜라니는 애틀랜타를 장악해 버리죠.
"자신이 새로운 사회의 리더가 되었다는 것이 멜라니에게는 전혀 납득되지 않았다. It never occurred to Melanie that she was becoming the leader of a new society."

멜라니를 다루는 미첼 특유의 화법이 잘 드러나는 문장. 멜라니가 사회의 <리더>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제시되지만,
시선을 끄는 강력한 부정어구 never occurred로 인해 이 <리더>라는 요점은 독자들에게는 매우 흐릿하게 전달됩니다. 설령 리더라는 것을 인식해도, 멜라니의 지도적 역할이 규범적이거나 상징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고 독자들은 착각하기 쉽죠.
하지만 조금만 주의깊게 살펴보면 알 수 있으니, 멜라니는 애틀랜타 <시민사회>, 엄밀하게 따지면 백인 상류층의 사회겠습니다만, 거기서 일어나는 대소사에 대한 결정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명백히 현존하는 권력이죠.
멜라니 해밀턴 최고지도자 동지...!
여기서 멜라니가 어떻게 애틀랜타의 당 조직... 아니 시민사회를 구성하는 단위 조직들을 장악하게 되었는지, 그 비결을 살펴보도록 하죠.
앞서 보셨다시피 미국 남부 세계는 주로 각자의 (유사) 가족적 세계를 이루는 (남성) 농업인들로 이루어졌었죠. 이런 사적 영역을 넘어서는 공적 세계는 허술했고요. 남부는 도시화도 북부에 비해 더뎠으니, 조지아에서 가장 큰 도시였던 서배너의 인구가 2만 가량.
환경이 이랬기에, 백인 남성 대농장주들이 자기네들끼리의 서클 안에서 사회적 문제를 좌지우지할 수 있었던 거죠.
이 대농장주들은 간섭이 싫고 특히 세금이 내기 싫어서 인종주의적 선동을 일삼았고, 그러다 전쟁이 일어났고, 역설과 마주하게 되었죠. 멜라니에게 보낸 애슐리의 편지에서 잘 드러나듯이. 전쟁에서 이기려면 자기들이 싫어하던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스칼렛이 소설에서 처음 애틀랜타에 도착해서 마주한 것들이 바로 그런 것들이었죠. 철도와 공장들과 정부조직 같은 것들. 그리고 이 때다 싶어서 집 밖으로 뛰쳐나온 여성들이 있었으니, 간호단체를 조직하는 메리웨더 부인 같은 사람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간호단체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고, 개개인의 인맥에 따라 중구난방으로 결성되어 있었습니다. 멋도 모르고 사람들에게 ‘네! 그래요! 가입할께요!’를 외쳤던 스칼렛이 ‘일이 너무 많잖아! 이럴 거면 하나만 들어갈걸!’이라고 투덜대는 대목이 있죠.
그리고 우리는 멜라니가 이렇게 투덜대는 모습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죠.

‘이게 뭐야 대체, 더 효율적으로 간호원들을 조직하고 부상병을 회복시킬 방법이 있는데…’

라고요. 남부가 이런 비효율성으로 인해, 인력과 물자를 끝도 없이 뽑아 내는 링컨의 전쟁기계에 결국 참패한 것 아니겠어요.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애틀랜타에는 많은 단체들이 활동하게 됩니다. 애틀랜타는 전쟁과 재건을 거치며 인구가 크게 늘었죠. 그래 봤자 2만명 정도긴 합니다만. 멜라니는 고향에 돌아와 이런저런 명목의 봉사 단체들과, 음악이나 문학을 다루는 문화 단체들을 발견하게 되죠.
이렇게 <그냥 사교모임>을 초월한 여러 단체들이 난립하는 상황은 무엇을 예정할까요?
농업사회의 사교모임에서 대립할 것이라고는 그저 취향이고, 사람의 취향은 무엇이 꼭 옳고 그를 것도 없으며, 취향이나 성격이 안 맞으면 안 친하게 지내면 그만. 하지만 사회단체는 무언가를 꼭 결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제각각인 사람들을 이끌어 결정한 일을 하게 만들어야죠.
단체 하나만 있어도 속에서 싸움이 나기 쉽죠. 서로 활동영역이 겹치는 단체들이 여럿 존재한다면? 이 단체들의 입장은 늘 엇갈리기 마련. 곧 분쟁의 일상화입니다. 여기서 감정대립이 있을 만한 동기만 주어지면 서로 멱살 잡게 되는 건 시간문제.
이렇게 멜라니 동지의 전인적 인격이 빛을 발할 환경이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자료사진이 살짝 이상한 기분이 들긴 하지만 일단 넘어가도록 해요.
멜라니는 다방면에 인문학적 교양이 있으며 피아노도 제법 치고(잘 침) 게다가 노래도 제법 잘하고(참고로 스칼렛은 음치라고) 투철한 봉사정신은 두말하면 잔소리에다 사람들과 두루두루 친하기에, 각양각색의 단체들로부터 환영을 받습니다. 아니 그쪽에서 알아서 모셔가죠.
이렇게 이곳저곳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다가, 수습이 불가능해 보이는 분쟁에서 멜라니는 해결사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소설에서 군인묘지의 제초를 쟁점으로 전몰영웅 묘지 단장회와 희생자 가족 지원 재봉회가 충돌하는 장면이 나오죠. 멜라니가 튀어나와 의견을 제시합니다. 사리에도 맞는 것 같고, 무엇보다 사람들이 멜라니를 좋아하기에, 그렇게 하자고 결론이 납니다. 그렇게 결론이 나면 대체 왜 싸웠나 싶죠.
그리고 나서 멜라니는 아예 두 단체의 서기secretary 직을 맡게 되지요. 단체들의 행정적 결정권이 멜라니 책임서기 동지에게 위임된 것. 이렇게 멜라니는 위임된 권한으로 단체들을 열심히 재조직하죠. 가령 애틀랜타의 이런저런 연주단체들을 모아 오케스트라(회장은 물론 멜라니)를 만든다거나.
그렇습니다. 당 권력을 장악하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프라우다에서 아무리 떠들어 봤자 소용이 없어요! 서기국을 장악해야죠!
인구 2만의 애틀랜타는 사람들이 서로 다 아는 사이인, 우리의 기준으로는 여전히 작은 도시. 그런데 이 애틀랜타를 장악하면 인구 백만의 조지아에 대한 적어도 상당한 장악력이 생기는 셈인데, 그곳이 남부 산업과 철도교통의 심장이기 때문. 한국사람은 서울에 살지 않아도 서울에 들르게 되죠.
멜라니 동지의 방식은 대중정치를 요구하는 현대 자유주의국가의 정치체계에 그리 적합한 방식은 아닌 셈. 여기서 멜라니의 대단한 일면이 또 하나 드러나는데...
똑똑하고 말 잘하는 사람은 조용하게는 못 있는 법입니다. 자아도취에 빠지기도 쉽죠. 그렇게 여기저기, 권력과는 무관할 일에까지 일일히 잘난 척을 하고 다니다, 원망을 사기 마련이죠. 우둔하거나 굼뜬 사람들로부터.
<품 성>이 중요한 좁은 사회에서 이것은 권력획득에 치명적입니다!
그래서인지 배후조직가 유형(가까운 예로 이석기)을 보면, 아예 처음부터 말재주가 영 별로였던 경우가 많기도 하지요. 하지만 멜라니의 말빨은 절대 약하지 않습니다. 단지 자제력이 뛰어날 뿐이었죠! 멜라니 동지의 브레이크는 세상에서 제일 강력합니다.
멜라니 동지가 절정의 행정능력을 발휘한 합주단은 너무도 성공적이어서, 그것의 정기 연주회는 심지어 뉴욕이나 뉴올리언즈의 프로페셔널보다 낫다는 평을 받지요.

애틀랜타가 승리했습니다! 뉴욕에! 북부에. 책임서기 동지의 <지도력>이 입증된 것이죠!
뭐 여담이지만 아주 가까운 곳에 이렇게 예술공연의, 그 경우에는 연극의 흥행으로 능력(?)을 인정받고 결국… 최고위에 오른 사람이 하나 있는데, 그 사람이 그랬다는 사실은 몰라도 그 인간 자체가 있<었>다는 사실은 다들 알고 계시죠. 바로 이 양반입니다.
김정일 씨의 절망적인 국가-령도(국가원수가 히키코모리라니 이럴 수가)에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하게 되는 걸까요. 그렇습니다, 인문학이란 역시 유해한 것입니다. 그 중에 제일 유해함은 문학이니라, 라고 성서에 쓰여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여튼 멜라니는 연주회의 성공을 발판으로 다른 조직들도 접수, 또는 다른 조직들이 알아서 접수당하기 시작합니다. 멜라니는 일약 조지아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가 되지요. 멜라니의 나이 23세 혹은 24세쯤의 일. 그야말로 정치계의 알렉산드로스입니다.
여기서 메리웨더 부인이 다소 코믹하게 그려지는데, 멜라니를 일 잘하는 착하고 얌전한 후배로 생각해서 <실권>을 주었다가, 아차 하는 순간 2선 원로로 밀려나게 된 것. 서기라고 하면 그거 뭐 잡일하는 따까리 아니냐 하기 쉽지만, 그것이 바로 실권.
글쎄요, 앞서도 마키아벨리 이야기가 나왔습니다만, 마키아벨리도 명료하지는 않지만 앞서와 비슷한 말을 하죠. 군주라면 어떤 권력은 부하에게 줘서는 안 된다는 것. 마키아벨리의 경우는 형벌권이죠. 행정권, 특히 인사권은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절대로 주면 안 되겠죠.
몽테스키외 : 음…? 절대군주를 약화시키려면 사법권을 뺏으면 되겠군?
역사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이라면 시종장이라든가 그런 행정서기가 결국 전권을 장악하게 되는 경우를 보셨을 겁니다. 멜라니와 가장 비슷한 케이스는 물론 스탈린. 미첼은 어쩌면 스탈린에게 쫓겨나온 트로츠키의 저서들을 읽었을지도 모르죠.
여담이지만 소설에서 메리웨더 부인은 애틀랜타 여성계의 어엿한 1세대 프론티어. 역시 여성인 멜라니의 성공(?)은 그것에 어느 정도 빚지고 있지요. 미첼은 메리웨더 부인을 ‘로마시대에나 있을 여장부’로 묘사하는 등, 주인공을 높이기 위해 조연의 능력치를 함부로 깎지 않습니다.
멜라니는 남부 사회의 주요인사가 되었지만, 솔직 소박 겸손 성실 그리고 용감의 <품 성>적 모범은 잊지 않습니다. 애초에 그것 때문에 딴 권력이기도 하지만.
잠깐만, 솔직? 멜라니는 뛰어난 거짓말쟁이가 아니냐고요? 맞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것입니다. 거짓말인지 아무도 모르잖아요!
지도자의 모범은 말 그대로 <본보기>가 되어서 최면적 효과를 불러일으키게 되죠. 우리가 부모나 연예인에게 보이는 그런 추종자적 감정을 정치인에게 갖게 된단 말씀. 이제 멜라니는 사람들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NL동무들은 수령론이라고 하죠. 넘어가면 안 됩니다.
미드 박사가 자기가 무슨 세례 요한마냥 멜라니에게 <당신이야말로 남부의 정신이오>라고 말하는 대목이 그 정점. 소설은 심각하게 탈정치적인 스칼렛의 시선에 맞추기 때문에 이런 도취감이 오히려 잘 안 드러나죠. 그래서 역설적으로 정치광인들이 멀쩡해 보이는 효과가 있고요.
멜라니는 이렇게 <새 사회의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새로운 사회new society죠.
소설에서 말하는 남부의 전통은 농업사회의 것. 그것은 대지주들의 사교파티와 그 이면에 가려진 흑인들의 노예노동에 있었지, 멜라니 같은 행정가의 조직운영에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멜라니는 겉으로 드러나는 사회단체들 말고도, 다른 조직들을 거느리고 있음이 소설에서 암시됩니다. 암시가 아닌 증거로써 충분히 입증할 수 있는 경우도 있고요. 이 점도 나중을 위해 남겨놓도록 합시다.
품성론 비판에서 언급한 부분과 통하는 내용일 텐데, 멜라니가 구성한 조직(들)은 여러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먼저, 전체 조직이 멜라니라는 핵심에 따라 굴러가기는 하는 것 같은데,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의사결정이 일어나는지 알 수가 없지요. 외부자는 물론이고 구성원들도 잘 모를 겁니다.
누가 어떤 방식으로 결정을 했는지 모른다는 것은, 그렇죠. 결정권자가 그 결정에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됩니다. 게다가 결정권자는 어떻게 추대(?)되었습니까? 품성의 탈을 쓴 정치질이었죠. 품성 1짱은 계속 품성 1짱입니다. 대안이라는 게 존재할 수 없죠.
가장 유별난 특성은 아마 누가 <지도자>인지도 밖에서는 잘 모를 거라는 점일 텐데요. 비밀이 밝혀지면 사람들은 모두 놀라게 되죠.

"아니 뭐라고??????"

가 아니었나요? 이석기가 통진당의 막후조종자다! 라는 말을 들은 우리의 심정은?
멜라니 해밀턴의 경우는 사람들이 놀라지도 않겠죠. 아무도 안 믿을 테니까. 이 정도로 주저리주저리 타래를 쌓아 와야 비로소, 멜라니가 문자 그대로 <새로운 사회의 지도자>임이 조금은 실감나는 법이겠어요.
정치에서, 그리고 조직을 어떤 방식으로 운영하든지, 필수적인 것이 하나 있으니, 그리고 그것은 중요하면서도 외부자가 알기 어려운 것이니, 그렇습니다, 바로 돈이죠. 공식적으로는 정치자금이고 비유적으로는 실탄이며 속어로는 오까네... 인 것.
멜라니의 가장 중요한 자금줄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무시할 수 없는 고정자금의 출처를 독자들은 알죠. 바로 스칼렛입니다.
스칼렛은 떼돈을 벌고 있었습니다.
저는 돈 이야기가 자주, 집요하게 나올수록 모범적인 소설에 가깝다는 편견을 갖고 있는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역시 그렇습니다. 이걸로 자기계발서를 하나 써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제목은 <성공하는 스칼렛의 7가지 습관> 정도면 어떨까 싶네요 아니면 <부자 스칼렛 가난한 멜라니>...?
스칼렛은 유능한 비즈니스맨으로, 그에 필요한 자질을 빠짐없이 갖추고 있어요.

결단력과
열정과
적극성은 무릇 기본. 이것들은 사회가 여성들에게 요구하는 미덕과는 거리가 멀지만… 아니 정반대지만, 스칼렛은 그런 것 따위는 신경쓰지 않기로 합니다.
반면 자신이 여성이기에 우월했던 재능들은 알뜰하게 써먹으며 스칼렛은 남자들을 쳐부수고 다니죠.
스칼렛은 일명 감정노동, 곧 자신의 속마음과 다른 감정을 표시하는 작업에 매우 능합니다. 여성들은 감정노동에 능하도록 사회화되기 때문이라고 미첼은 설명하죠.
스칼렛은 누가 호구인지 정확히 파악하여 가격을 후려치는 재주도 갖추고 있죠. 이것 또한 타인의 심리를 이해하는 작업이 여성들에게 평소 강하게 요구되기 때문.
스칼렛은 감성마케팅에도 능하죠. 역시 <가부장제는 너희에게 복수를 하러 왔어> 입니다.
그런데 스칼렛의 성공에는 이런 것 말고도 어떤, 다른 독특한 원인이 있습니다. 스칼렛은 부잣집 아가씨라 정식 교육을 받았죠. 그 근방의 파예트빌 여학교 출신이라는데, 멜라니도 여기를 다녔는지는 불명.
스칼렛은 지지리도 공부를 안 하는 학생이었습니다. 당연히 성적도 형편없었죠. 단 한 과목을 제외하고는. 그리고 그 과목에서 어떤 인간이 가지는 특수한 재능이 드러나지요. 그 과목은 바로
수학입니다.
스칼렛은 사람들이 경악할 암산력을 가진 것으로 나오죠. 가장 먼저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은 스칼렛의 둘째 남편 프랭크. 자신은 덧셈이 세 자릿수가 넘어가면 종이와 연필이 필요한데, 스칼렛은 훨씬 복잡한 사칙연산도 머릿속으로 즉시 계산이 가능한 것이었어요.
물론 정확히 어떤 수식을 몇 초만에 스칼렛이 풀었는지는 소설에서 나오지 않죠. 이것은 영화도 마찬가지. 자신은 그런 계산이 불가능하다는 것(저는 두 자릿수만 넘어가도 계산기가 필요합니다. 프랭크 이 똘똘한 친구!)을 독자들이 깨달을 테니까요. 스칼렛을 질투하기 시작하면 안 되죠.
그런데 영화에서는 엉뚱하게도 이 대사만 그대로 들어가 있습니다. “새 보닛을 쓰면 있던 숫자도 머릿속에서 빠져나간다니까.”

그래서 영화만 보면, 언뜻 스칼렛이 수알못 같죠. 하지만 이것은

‘아, 오늘 수리영역 너무 어렵지 않았니?(물론 나는 다 풀었지만)’ 같은

가증스러운 발언.
소설에서 스칼렛의 수학실력을 구체적으로 측정할 만한 부분이 어디 있을까요. 그렇지, 남자의 관심을 유도하는 것은 스칼렛에게 <수학공식>처럼 쉬웠다는 대목이 있죠. 그러니까 수학은 스칼렛에게 이 정도로 쉬운 것.
수학을 잘하는 것은 사업에 무슨 이득이 있을까요? 소설에서 간략하게 나오는 토미 웰번과의 대화를 한번 상상력을 발휘해 풀어 봅시다.
스칼렛 : 토미 웰번? 얘! 그건 바가지 쓰는 거야. 동업자가 있는 데서 내가 이런 소릴 하면 안 되겠지만, 친구가 집짓는데 내가 그걸 그냥 보고 있으면 되겠니 안 되겠니? 우리 가게에서 이거보다 훨씬 더 나은 제품이 있는데 블라블라블라블라한 건데도 그것보다 훨씬 싸. 네가 사려는 게 지금
...개당 3달러 50센트인데 우리 제품은 2달러 95센트고 너는 친구니까 16개 사면 내가 5%더 깎아 줄께. 그럼 단돈 44달러 84센트인데 와 11달러 16센트나 더 싸다!

토미 : 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이 당시는 스마트페이는 물론 전자계산기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인간계산기를 탑재한 스칼렛은 독보적으로 정확한 거래를 할 수 있고, 이것은 일종의 신용이 되죠. 그리고 자신이 절대 만만히 보지 못할 사람임을 다른 남정네들에게 각인시키는 효과도 있고요.
소설에서 더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수학의 이점은 회계입니다.
스칼렛은 집안의 경제권을 탈취하기 위해 우선 프랭크의 장부부터 털죠. 프랭크는 좀 주먹구구식으로 사업을 운영했지만, 스칼렛은 회계적 디테일을 바탕으로 현황을 파악하고 미래를 구상하죠.
스칼렛이 회계장부를 붙들고 계산하는 대목이 심심찮게 나오죠. 안정효의 번역에는 스칼렛이 복식부기를 쓴다는 표현이 있는데, 제가 볼 때도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그럴 공산이 꽤 커 보입니다.
스칼렛에게는 유사한 유형의, 또 다른 재능도 있지요. 목재의 재질과 등급과 용도에 뛰어난 이해력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영화에서 살짝 나옵니다.
여담이지만 애틀랜타 주변에 그득하다는 저 조지아 소나무는 우리가 대왕송이라고 부르는 그것인데요, 스칼렛 같은 인간들이 하도 베어대서 지금은 멸종위기종이 되었죠. 고급목재인데 생장이 느리다고.
그렇습니다. 스칼렛은 이런 쪽으로만 머리가 비상하게 잘 돌아가는 인간이었습니다. 흔히 하는 말로 공대적성.
문과빌런 vs 이과빌런
- 문과반엔 왜 왔어 자기?
- 너 보러 온 거 아니거든?
- ㅠㅠ
스칼렛이 남자들의 심리를 <이해>하는 방식도 참 특이한데, 남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안중에 없고, 무슨 <행동>을 하는지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만 열심히 연구하죠. 사람들이 행동주의 심리학이라고 부르는 그것인데요, 아주 미국적이라고 할 수 있겠죠.
가령 스칼렛이 이야기하며 보조개를 피우면 남자들은 헤벌레 미소를 짓는다거나… 너무 예쁘다고 칭찬한다거나… 이따가 춤을 추자고 한다거나… 그런다는 것이고, 그것만 밝혀지면 스칼렛은 더 이상 실험의 필요를 느끼지 않지요.
수학적으로 말하면

행동함수 f(x) · 상황변수 = 남자들이 넘어옴

을 성립하는 x의 값과 상황변수의 행렬...쯤이나 될까요??? 간단히 말해... 스칼렛에게 남자란 스키너가 자극을 주고 있는 실험용 흰쥐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열두 참나무> 저택 안의 남자라면? 어떤 미친 스칼렛 오하라가 거기에 신경자극을 주는 거라면?
여담이지만 스칼렛이 애슐리에게 계속 관심을 보였던 이유 중 하나는 이런 과학적(?) 수법이 잘 안 통해서였다고 소설에 나오죠.
여기서 하나 의문이 남지요. 스칼렛은 분명 추상적인 사고가 결여된 즉물적인 인간이었는데, 수학은 추상성의 정수가 아닌가요? 어쩌면 플라톤주의자들이나, 일부 현대 수학자들도 말하는 것처럼, 사실 수학이야말로 진정한 실체인지도 모르죠.

알파고가 머지않아 그것을 증명할지도.
글쎄요, 리오넬 메시가 19세기에 태어났으면 어땠을까요. 적성을 가장 잘 발휘해 봐야 연대 연락병 정도나 되었으려나요. 하지만 현대에는 축구라는 스포츠가 있고, 그것을 전 세계에 상품으로 파는 미디어 사업이 있지요. 곧 개인이 재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에 물적 기반이 있어야 합니다.
스칼렛도 마찬가지. 스칼렛의 장삿속이나 수학적 재능은 농장주 딸이나 농장주 부인으로 사는 데엔 별 의미없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링컨이 몰고 온 산업사회가 바로 그 재능을 요구합니다.
곧 스칼렛은 링컨적인 모범입니다. 바로 자본가죠. 스칼렛은 자본가의 어떤 전형을 보여 주지요. 자본가의 미덕을, 그리고 자본가의 악덕을.
자본주의는 옛날 세계의 규범을 밟고 일어난 새 질서입니다. 주술적이거나 종교적이거나 가부장제적이거나 신분제적인 억압을 -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 해체시키죠.
“스칼렛에게는 생각조차 없었으나, 애슐리와 결혼한다면 자신도 자동적으로 정자나무나 응접실 앞쪽으로 강등되어, 무딘 비단옷차림의 둔한 부인들과 같이 자신도 무디고 둔하게 있어야 하며, 재미나 발랄함과 같이할 수는 없을 노릇이었겠다.”

소설 초반의 대목.
앞서의 것이 (상류층) 여성들에게 요구되는 규범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남부의 규범은 셔먼에게 한 방 맞은 다음 비틀거리며 쓰러지고 있죠. 물론 소설에서는 폰테인 부인이나 피티 고모처럼 구세계의 틈을 조금씩 후벼팠던 여성들도 등장하지만, 스칼렛에게 주어진 기회의 폭은 훨씬 더 커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칼렛은 사회의 (약해졌으되 여전히 살아 있는) 제약을 뚫고 재능을 발휘하는 주인공입니다. 독자들이, 그리고 관객들이 스칼렛을 사랑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겠죠.
멜라니 역시 최애의 이런 뛰어남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죠.
스칼렛의 성공은 멜라니에게도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영화야 애틀랜타의 가장 중요한 원로 가운데 하나인 미드 박사가 스물도 안 된 멜라니의 허락를 맡으러 다니는 (원작보다 더) 미친 설정이지만, 소설에서 멜라니의 정치적 대두는 애틀랜타에 최애보다 반 년 늦게 오고 나서니까요.
물론 스칼렛의 성공은 멜라니의 정치질에 직접적인 영향도 강력하게 미치는데 곧, 앞서 말한 <정치자금>입니다. 스칼렛과 애슐리는 표면상으로는 목재소의 동업관계죠. 하지만 멜라니의 남편은 그냥 스칼렛 사장님의 조수에 불과합니다. 그것도 무능한 조수.
애슐리의 주머니에 그럼에도 스칼렛은 제법 꽂아 주지만, 그 많던 돈은 멜라니가 다 써버렸습니다.
숫자 이야기만 나오면 눈이 뜨이는 스칼렛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 돈을 애슐리가 도대체 어떻게 마련하는데? 걔들 집엔 일 센트도 없어. 애슐리가 벌어 오는 대로 멜라니가 다 써버린다고."

어디에 쓰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써버린다는 사실은 정확히 알죠.
나중에 이런... 대목도 나오죠.

레트 : 그… 멜라니 씨. 아들 대학은 보내야 하지 않겠어요?
멜라니 : 네! 보내야죠! 그런데 집에 저축해 놓은 게 없으니 어쩌죠? 대체 돈이란 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요 호호호 뭐 괜찮아요 요새는 다들 가난하니까요
레트 : (야)
하긴 정치는 돈을 쓰는 작업이고, 저 정도로 뻔뻔하지 못하면 정치를 못 하죠. 하여튼 현모양처와는 거리가 정말 아득하게 먼 인물.
우리가 보는 히어로물은 긍정적인 인물과 부정적인 인물의 대립구도를 짜죠. 긍정적인 인물은 사회의 긍정적인 면을 대변하고, 부정적인 인물에게 승리하지요. 그 내면도 마찬가지여서, 긍정적인 인물은 고뇌를 겪긴 하지만 그 결과는 (거의 언제나) 긍정적인 방향.
반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인물들은 긍정적인 면만 갖지 않습니다. 그리고 긍정적인 측면이 그렇지 않은 면에게 꼭 승리를 거두지도 않습니다. 무엇보다,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동전처럼 딱 나뉘지도 않지요. 우리의 현실처럼.
스칼렛의 자본가로서의 전형성 역시, 그리 좋지만은 않아 보이는 일들을 불러오지요. 일단 대왕송부터 위기에 몰렸잖아요.
스칼렛은 동종업자들에 대한 허위정보를 퍼뜨리는 데 거리낌이 없죠. 스칼렛이 <덤핑>, 다시 말해 저가공세를 동원하여 제재사업에 진입하려는 다른 업자를 제거하는 대목도 나오죠. 시장에서 정정당당하게만 승부하는 건 아닙니다.
스칼렛이 돈을 벌자, 목재업에 사람들이 다투어 뛰어들어 경쟁은 심해집니다. 스칼렛은 잘못하면 낙오될 것이라는 불안감에 과로하게 되고, 정신적으로도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하죠. 집에 돌아온 스칼렛은 그래서 건드리면 터지는 폭탄.
스칼렛은 사업의 고비만 넘기고, 충분한 돈만 벌면 가족들에게 신경도 써주고 잘해주리라고 다짐하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적절한 수준의 돈이라는 건 없으니까요.
하기야 한국인들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잘살게 - 한국전쟁 직후로 돌아가, 가까운 미래의 한국이 이 정도로 부유해지리라고 사람들에게 말하면, 무슨 그런 황당한 거짓말을 하냐는 면박이 돌아올 것입니다 - 되었지만, 그런다고 돈에 대한 집착이 누그러지진 않았단 말이죠.
자본주의는 돈이라는 단일한 척도를 제시하고, 그것에 따라 권력과 가능성들을 배치합니다.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람은 많은 것을 누릴 수 있고, 없으면 아무것도 없죠. 돈을 벌어야 합니다.
스칼렛은 돈을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어떤 일들을 하고, 일부는 나쁘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돈을 버는 선택을 하죠. 극히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되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고, 역시 크게 다르지 않게 행동합니다.

미첼은 그런 공통점을 독자들이 체감하도록 유도하고 있고,
독자는 스칼렛에게 동지적 감정을 느끼게 되죠. 선생님이 잠깐 나간 사이 교실에서 같이 떠드는 학생들처럼요. 살펴본 것처럼 스칼렛이 살짝 특이한 인물임에도 그렇습니다. 좀 과도할 정도로 실물지향적이죠.
스칼렛에게 집이라는 것도 비슷한데, 고향 태라에 대한 사랑을 늘 이야기하지만, 한국인들도 무척 그러하다시피, 이게 가정에 대한 향수인지, 아니면 그냥 부동산에 대한 집착인지 분간이 안 간단 말씀.
실제로 스칼렛은 가치저장수단으로 부동산을 선호하죠. 레트는 채권파인 것과 대비되는 점. 둘은 똑같이 벼락부자로 비슷해 보이지만, 스칼렛은 그래도 재화를 창출하는 제조업을 하는 반면, 레트는 순수한 투기꾼에 가깝습니다. 아니 뭐 그것도 일종의 금융업일 수는 있겠는데요.
토지… 자본… 노동...
그렇습니다. 고도성장기의 산업자본가라면 꼭 해야 할 일 하나가 남았죠. 노동자들을 착취해야죠.
스칼렛은 처음에는 해방된 흑인노동자를 쓰다 나중에는 죄수들을 끌어다 부리죠. 가장 큰 이유는 임금이 더 싸기 때문. 그리고 부수적인 이유가 또 하나 소설에서 나오는데, 당국의 근로감독을 회피하기 위해서입니다.
앞서 나왔던, 조나스 윌커슨의 <해방노예국>이 흑인들의 그런 권리를 챙겨 주곤 했었죠.
빛나스 윌커슨 선생님!
빛나스 윌커슨 선생님!
여기서 자본주의의 재능발휘의 기회란 것도 밑바닥의 노동자들에게는 딴 세상 이야기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 수 있죠. 그들의 일은 꼭 죄수가 아니라도 사실상, 강제노동이나 다름없으니까 말이죠.
애슐리가 지적하듯 자본주의사회의 노동은 어떤 의미에서는 노예노동보다 너 나쁩니다. 노예는 재산이기 때문에 최소한 건강을 지켜 줘야 했거든요.
애슐리는 (남부 백인 남성치고는) 최소한의 양심은 있는 인물이고, 스칼렛의 행동에 강한 문제의식을 느끼죠. 하지만 그래 봤자 의식이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의존적인 인간. 그 심각한 의존성으로 인해 애슐리는 스칼렛의 의지에 끌려다닐 뿐이죠.
둘째 남편 프랭크 또한 스칼렛한테 신나게 휘둘리죠.
프랭크는 영화에서 보면 그래도 제법 재능이 있는 장사꾼 같죠. 그런데 소설을 보면 그다지… 애초에 돈을 그렇게 모으게 된 계기도 이 사람이 원래 보급장교였는데, 종전 당시 남부의 보급물자를 꿀꺽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프랭크 : 그건 원래 남부재산이었으니, 북부놈들에게 내주느니보다 남부사람들이 가져야 맞지 않겠나요, 스칼렛 양? 일단 제 소유로 놓긴 했지만, 앞으로 사람들과 나누면서 살려고요ㅎㅎ
스칼렛 : (오예 내가 다 먹어야지)
마침내 다 먹으려고 (나중에) 가게에 침입한 스칼렛의 감상은

‘물건은 그냥 구석에 쌓아 놓고 청소도 안 해놓고 하이고 이러면서 장사를 하겠다고...’
“사람들이 절 타고난 장사꾼이래요ㅎㅎ” 도 알고 보니 그냥 이웃들의 공치사. 하지만 애슐리보다는 나은데, 프랭크는 스칼렛이 채찍질하는 대로 따라오기는 합니다. 애슐리는 시켜도 못 하죠.
그래도 프랭크는 상냥하고 친절하고 예의바른 남자. 섹시함만 요건에서 빼놓는다면(이게 빠질 수 있다는 가정하에) 그럭저럭 괜찮은... 배우자가 아닐까요. 피티 고모가 유난히 프랭크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아주 의미심장하죠.
멜라니 : 피티 고모, 고모는 그런 남자가 좋수?
피티 : 아니 남자가 섹시해서 뭐 한다니? 내가 걔들이랑 잘 것도 아닌데
멜라니 : (수긍) (납득) (인정)
프랭크는 게다가 성실하기까지 하니, 종합하면 더할나위없는 <품성인>. 운동권에서 아주 좋아할 만한 인재입니다.
멜라니: 프랭크! 우리 개강총회때 봤지?
프랭크: 어 멜라니 누나! 웬일이세요?
멜라니: 같이 밥이나 먹을까 하고. 내일 어때?
프랭크: 네!좋아요!야호!
멜라니: ㅎㅎ그럼 학관 앞에서 12시에 보자
프랭크: 누나 근데 질문이 있어요!
멜라니: 뭔데?
프랭크: 누나랑 밥 먹은 애들은 왜 수업에 안 나와요?
프랭크는 (수학은 스칼렛보다 못 하지만) 두뇌회전도 나쁘지 않아서, 결혼하고 이내 깨달았으니, 스칼렛과 평화롭게 지내는 방법은 자신이 (마침 적성에도 맞게) 조신하게 지내는 것뿐이었습니다. 하지만 프랭크는 불행히도 남자다움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이는 다른 사건들을 불러오죠.
스칼렛의 출산을 틈타 프랭크는 스칼렛의 <경력단절>을 시도합니다.
가부장제의 망령인 유모가 아니나다를까 적극 협력합니다. 마침 애틀랜타의 치안도 심각하게 불온한 상태였기에 좋은 핑계가 되었죠. 프랭크와 유모는 스칼렛의 예금 명의를 돌려놓고 현금도 죄다 감추어버려서, 스칼렛은 마차삯이 없어 나다니지도 못할 상황.
격분한 스칼렛은 옆집으로 달려가 고래고래 소리지르죠.

'나는 제재소까지 걸어서라도 갈 것이다! 내 앞길을 막는 놈들은 권총으로 다 쏴죽여 버리겠다!'
이에 혼비백산한 멜라니는 그날 오후에 스칼렛에게 ‘어깨’를 하나 마련해 주는데, 그 이름은 바로 아치Archie입니다.
이 부분만큼은 멜라니의 조신함을 철석같이 믿으며 책을 읽던 분들도 순간 '어라?' 싶으셨을 텐데요. 멜라니는 당일에 무슨 폭력배 같은 인간을 공수해왔단 말이죠. 아닌게아니라 소설에 따르면, 멜라니는 그전부터 부랑자들에게 음식과 잠자리를 주는 수상쩍은... 아니 <자비로운> 행동을 해 왔지요.
아치는 비중이 제법 있음에도 영화에서는 등장하지 않지요. 이 인간이 하는 행위들은 다른 사람들이나 심지어 사물에게로 조각났는데 가장 큰 지분은 엉뚱하게도 유모가 차지.
아치는 소설의 캐릭터들 중 사회적 위치가 가장 낮은 백인일 텐데요. 남부 하층계급 백인의 어떤 전형성을 보여 주는 캐릭터입니다. 특히 정치적인 면에서.
하루는 스칼렛이 이렇게 묻지요.

스칼렛 - 너 흑인들을 왜 그렇게 싫어함?
아치 - 내가 사는 동네에는 흑인이 없었지만… 걔들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잖음. 그래서 싫음. 하지만 내가 진짜 증오하는 건 양키들임
스칼렛 - 너 양키들은 만나 본 적이나 있음?
아치 : 물론 나는 양키들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지만… 걔네들에 대해 <들어서> 다 앎.
스칼렛 : 하이고 기가 차서
아치 : 그리고 내가 가장 싫어하는 건 말 많은 여자임!
스칼렛 : ㅡㅡ^

하나만 차별을 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 진정 차별주의자답죠.
아치는 불륜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아내를 살해하고 조지아 감옥에서 40년 동안 썩다, 전쟁 말기에 포로부대로 차출되었고, 발을 하나 잃은 대가로 자유의 몸이 되었죠.
스칼렛은 의아해합니다 : 자기 딴에는 정당한 살인이었다면서? 그런데 왜 자기를 잡아가두고 노역시키고 군대보낸 조지아 주정부를 원망하지 않고, 엉뚱한 사람들을 원망하지?
이것이 남부-하층계급-백인-남성이 극우로 빠지는 이유. 자신이 백인이며 자신이 남성이라는 점에 몰입한 나머지, 자신의 빈곤과 소외를 흑인과 여성의 탓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들은 강력한 백인-남성에게 자신을 이입함으로써 위안을 얻을 수 있죠. 우리가 루리웹에서 흔히 보는 그런 심리.
이런 사람들이 수두룩한 덕분에 미국의 부유층들은 (특히 남부의) 하층계급들에게 아무런 사회적 대가를 주지 않아도 되지요. 증오할 거리만 던져 주면, 그들은 쉽게 강자의 편에 서서 같은 약자들을 공격하니까요.
그런데 앞서 보셨다시피… 다름아닌 미첼이 그런 증오 투척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프리시처럼, 흑인들은 게으르고 불성실하고 어리석으며 열등한 집단이라고 열심히 주장하지요.

스칼렛 : 아치 저건 주정부에 뺨맞고 뭔 쓸데없는 데 화풀이람?
미첼 : 흑인들은 나빠! 이방인들은 나빠! 조지아 만세!
미첼은 소설의 이 지점에서 정말 대놓고 거짓말들을 하는데, 본인이 거짓임을 모를 리가 없다는 게 더 문제죠. 대표적으로 이런 주장 : 원래 남부에는 흑백혼혈이 없었는데 북군 진주 이후 많아진 것이다!

그럼 그 많은 흑백혼혈들은 외계인들이 가져다 놓았단 말인가요?
미첼은 <톰 아저씨의 오두막>은 완전 구라다 그런 일 없다 아니 성급한 일반화다! 같은 이야기도 열심히 합니다. 글쎄요, 거기에서 <82년생 김지영>에 대항하는 성차별주의자들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으면... 또 이상한 것입니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은 전쟁 전에 해리엇 비처 스토우가 쓴 소설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나 <82년생 김지영>과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여성 작가의 작품이고, 문체는 비교적 단순하지만, 시사적이고 사실주의적이라는 평가와 함께 베스트셀러가 되었지요.
물론 미첼과는 달리 스토우의 소설은 진보적이었고, 진보적인 결과를 낳았지요. 특히 <톰 아저씨의 오두막>은 <이야기>의 어떤 긍정적인 측면을 보여 주는데, 책을 읽은 미국 백인들에게 흑인들도 그들과 똑같이 느끼고 사유하고 행동하는, 그러니까 <사람>이라는 점을 각인시켰다는 점이죠.
가령 홍석천이나 특히 하리수가, 특정한 성역할을 답습하며 그것의 고착화에 기여한다는 비판이 있었음에도, 한국사회에 미쳤던 영향이란 그 비슷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달라 보이지만 어쨌든 그런 사람들도 <있고>, 그들 역시 같은 존재이며 사회의 일원이라는 것을 삶의 서사로 보여 준 것이죠.
하리수 씨의 활동이 요새 뜸한 것과, 트위터에서 무슨 <젠더론 X>라는 주장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서로 완전히 무관하지는 않을 거라는 말씀.
하여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참 특이한데, 캐릭터들이 작가의 정치적 주장에 전혀 부합하지 않죠. 진짜 무능하고 의존적인 인간들은 흑인이 아니었습니다. 다 백인 남성 농장주들이었죠.
반면 여성들이 보이는 모습은 인상적이죠. 메리웨더 부인도 경제적으로는 작은 성공을 거둬, 빵집 경영인이 되었죠. 레트마저 그에 감명을 받았는지, 그런 사람이라면 (담보는 물론) 차용증조차 없이 1만 달러라도 빌려 주겠다고 할 정도.
가장 돋보이는 사람은 물론 스칼렛, 그리고 멜라니 역시 분야는 다르지만 두뇌회전과 추진력이 남다른 인물.
백인 남성들 중에도 농장주가 아닌 위인들은 나은 편이죠.
그 중에 가장 나은 사람은 물론 빛빛나스 윌커슨 선생이었고요.
소설의 흑인 캐릭터들에게 진취성은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위에서도 말했듯 그게 있으면 떠나서 안 보였겠죠. 하지만 남아 있는 흑인들도 제랄드나 애슐리와는 다르게, 자기 삶의 주도성을 갖고 있었어요. 주도적으로 부역을 한다는 점은 더 나쁘지만.
프리시는 트롤러였고, 유모는 학대범인 데다, 포크는 노예라고 불리기 싫어했으며, 딜시는 살짝 미쳐 있고, 피터는 피티네 집의 가장이나 마찬가지였죠.
물론 피티패트는 애틀랜타 비혼여성들의 영감 그 자체이긴 하죠. 하지만 그것이 피티의 유일한 진취성이며, 그것을 제외하면 멜라니의 고모는 극도로 소극적이고 어리석으며 의존적인 인물입니다. 피터는 그와는 철저히 정반대죠. 애초에 피터가 없었으면 피티의 비혼육아인생이 가능이나 했을까 의문.
피터는 무슨 찰스의 입시플랜까지 짜던 인물. 이런 인재가 하인을 하고 있으니 그런 오버스펙이 없죠.

사실이 그런데도 스칼렛이 피터를 보며 이 어리석은 흑인이여… 라며 속으로 중얼대는 대목을 보면, 이게 혹시 기획된 블랙유머가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흑인들이 의존적이라고 울부짖는 애틀랜타 사람들은 또 이렇게도 외치고 있잖아요?

‘여성들은 무력해! 어리석어! 열등해! 의존적이야! 그것들이 여성의 본성이야. 여성은 주체적인 행동이 불가능하고, 남자들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야 해. 그런데 스칼렛 저저저저 썅년이!!!!!!!
저저저저
저저저저저저저!
저저저저저저저저저저저저ㅠㅠ
애틀랜타 사람들은 불행합니다.
저저저저저저저저저저!!!!! 스칼렛 때문이죠.
스칼렛이 돈을 버는 건 좋아요. 아니 사실 그것도 나쁘지만, 스칼렛이 친척의 유산이라든가 뭐 그런 걸로 잘살았으면 나았을 거예요. 일을 하는 건 좋아요. 하지만 그냥 성실하다든가, 아니면 최소한 운이 좋다든가 해서 돈을 벌었어야 해요. 차라리… 몽땅 사기를 쳐서 벌었으면 또 몰라요.
하지만 스칼렛은 능력으로 벌고 있잖아요! 그것도 지적 재능으로! 그것도 하필이면 여자가 절대 가져서는 안 되는 수학적 재능이에요. 노력을 해서, 아니 노오력하는 척이라도 했으면 최악까지는 정말 아니었을 거예요. 하지만 스칼렛은 그냥 타고난 머리가 좋은 것이었어요!

이거 환장할 노릇입니다!
이 와중에 아치는 스칼렛의 운전기사 겸 경호원 역을 그만두지요. 죄수를 부리려는 스칼렛을 보고, 수감시절 자신이 강제노역으로 착취당했던 기억이 떠올랐던 것. 하지만 남부 백인답달까, 노동계급으로서의 자각이 일어나진 않습니다. 결국 종합혐오세트 인생은 그대로.
스칼렛은 아치의 사직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직접 말을 몰고 다니죠. 그리고 스칼렛의 이 자가운전은 더 거대한 분노를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여성이 주변 상황을 이해하고 사물을 통제하여, 자신이 목표한 곳으로 간다는 것은... 너무 끔찍한 일입니다!
'하느님 제발 스칼렛 저 년을 혼내주세요
저 년을 혼내주세요'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리 한가하시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계율로 사람들을 못살게 구는 건 그만하기로 하셨어요.
스칼렛을 죄수들을 착취한다는 사실이, 뭐 물론 사람들의 윤리관이야 다양한 법이긴 합니다만, 가장 큰 잘못이지 않을까 싶은데요. 애틀랜타의 이웃들도 이를 비난하긴 하지만, 어차피 남 일이라서인지, 잠깐 투덜대고 말아버리죠. 이 문제를 나중에까지 거론하는 사람이 딱 하나 있는데 유모입니다.
유모는 노동착취 자체에는 물론 관심이 없고, 가부장제의 틀에 스칼렛을 몰아넣기 위해 핑계를 동원하는 것에 불과하죠. 하지만 스칼렛이 죄책감을 일으킬 만한 포트폴리오를 짜 온다는 점에서, 유모의 재능이 드러나죠. 어쨌거나 유모는 똑똑한 사람.
한편 누군가를 질투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원하는 무언가를 그 누군가가 갖고 있다는 이야기. 살짝만 뒤틀면 그것은 선망이 되죠. 애틀랜타로 이사온 북부 여인들에게 스칼렛은 인기폭발.
어느 북부 출신 여인의 편지가 눈에 보이는 것 같죠.

‘...하지만 남부 사람들 중에서도 친절한 분이 계시니, 바로 케네디 부인입니다. 그분은 사우스캐롤라이나 유수의 명문가 출신으로 애틀랜타 근교에 대저택이 있다고 합니다… 시내로 나온 것은 친척들의 사업을 돕기 위해서라는군요.’
‘그분만큼 똑똑한 여성을 제가 본 적이 있었던가요? 아니, 그분의 총명함에 심지어 남자들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랍니다. 게다가 그분은 대단한 미인으로(한참 동안 얼굴 얘기)… 게다가 어쩜 그렇게 몸가짐이 바르고 매너가 뛰어난지, 보고 있기만 해도 감탄이 저절로 나오고 맙니다.‘
‘저는 그렇게 똑똑한 분 앞에서 어떤 이야기를 꺼내야 될지 몰라 허둥대기만 했습니다만, 그분은 배려심도 실로 지극하여서, 자신의 지식을 조금도 과시하지 않고, 보닛이나 드레스 같은 알기 쉬운 화제들로…(후략)’

같은.
하지만 스칼렛은 이 여성팬들에게 약간의 짜증을 빼면 철저히 노관심. 애초에 여자들이 꼬인다는 자각부터가 없는 듯하죠. 멜라니가 이 경쟁자(?) 들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역시 불명.
이쯤에서 스칼렛은 한 가지 특이한 면모를 보이게 되지요. 극도로 탈정치적인 인물이지만 (스칼렛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치성을 띄게 된 것입니다. 스칼렛은 공화당 인사들과 점점 친하게 지내기 시작하고, 나중에 가면 그냥 공화당원이나 다름없다고 여겨지죠.
이유는 뻔한데, 앞서 보셨다시피 당시 공화당은 조지아의 집권당이었고, 산업 발전을 장려했으며, 흑인은 물론 여성의 사회활동과 권리획득에도 적극적이었지요. 여성인 스칼렛이 나다니며 장사하는 데 이처럼 이익이 되는 집단은 없습니다.
물론 당시의 여성은 참정권이 없었으니, 스칼렛 본인이 <공화당원>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겠지만요. 여담이지만 소설은 여성 참정권에 대해서는 심드렁한 입장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미첼의 어머니가 서프러제트, 즉 여성선거권운동가였다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개인과 사회의 상호작용을 묘사하는 데 대단히 탁월하죠. 링컨이 산업사회의 길을 열었고, 그 산업사회는 스칼렛의 개성을 자본가라는 구체적인 사회적 역할로 이끌었죠. 그리고 다른 많은 스칼렛들이 모이고 모여 산업자본이 전진하는 것입니다.
공화당은 자본가를 대변하고, 스칼렛은 자본가로서 공화당을 지지하게 되죠. 스칼렛이 인문학적 상상력, 다시 말해 망상가의 기질이 있으면 혹시나 다른 결과가 나왔을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시점에서 스칼렛의 정치적 포지션은 이미 정해진 것.
자본계급으로서 자본계급의 이익에 따라 친연방 공화당맨이 되어 가는 스칼렛을 멜라니는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물론 이것도 소설에서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지요.
하지만 멜라니와 스칼렛은 이미 선명하게 대비되고 있죠. 멜라니가 전통적인 가치들을 철저히 존중(하는 것처럼 연기)하며 보수적인 사람들의 마음을 샀던 반면, 스칼렛은 그런 것들은 열심히 파괴하며 돈을 벌고 있으니까요.
여담이지만 삼국지에서 유비 vs 조조의 대립이 이와 비슷하죠. 천시, 즉 시대정신의 조조와, 그에 저항하는 인간적 무언가(그게 뭔지는 정확히 몰라도)의 추구로서의 유비. 물론 전근대인이었던 나관중 선생은 귀신과 운명을 너무 좋아하셔서인지 결과적으로는 멸망.
반면 미첼의 20세기 작품에서 - 삼국지연의와는 달리 - 캐릭터는 사회의 거울이 되어, 현실의 모순이 인물의 갈등으로 구현될 것입니다. 물론 20세기 작품이라고 다 이것을 추구하고 추구한다고 다 되는 건 아니지만요.
가령 남성전용 살롱 <요즘 가시나들> 앞에서의 언쟁에서, 인물들의 정치적 입장들이 잘 대비되고 있죠.

메리웨더 노인 : 호헌철폐! 투쟁! 투쟁!
애슐리 : 일단 수정헌법은 비준하고 합법노선으로 가야...
아치 : 남자는 쫀심! 렛츠 뽜이트!
스칼렛 : 미친놈들아! 장사에 방해되잖아!
여기서 수정헌법이란 위에서 나왔던 수정헌법 제 13조를 말합니다.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그것이죠. 대체 이게 정치적 논쟁거리가 될 주제인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이 시기 미국의 수준은 이렇습니다. 머릿속에 장삿속밖에 없는 스칼렛이 황당하게도 압도적인 정의의 편.
스칼렛 말마따나 비준에 반대하는 놈들은 다 쏴버려야 마땅하죠. 셔먼 1승.
그런데 공화당은 반동분자들은 물론, 자본의 길을 막는 무산계급들도 다 쏴버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스칼렛은 자신의 조수 조니 갤러거가 담당하는 제재소에 들르게 됩니다. 스칼렛은 이내 발견했으니, 조니 갤러거는 죄수들을 학대하고, 그들에게 돌아갈 음식과 피복들을 삥땅을 쳐 주머니에 넣고 있었죠.
스칼렛이 화를 내자 갤러거는 주장합니다 : 내가 이 정도로 당신 수입에 공헌하는데 이만한 인센티브도 못 먹냐! 당신이 방해하면 나 관둔다!

제품납기일이 코앞이라 다급했던 스칼렛은 갤러거가 노동자들을 빨아먹게 그냥 놔두기로 하죠.
““아, 나중에 생각할래.” 스칼렛은 그렇게 결심하고, 그 (죄수들에 대한) 생각을 자신의 마음 속 헛간 안에 넣어 놓고 문을 닫아버렸다.”

스칼렛의 이 전형적인 행동을 보고 우리는 무엇을 예견해야 합니까? 아무리 자본가에게 감정이입을 잘하시는 분도 - 그 예감에서 자유롭지는 못하실 터.
그리고 정말 죽창 하나가 날아오죠.
스칼렛은 제재소에서 돌아오는 길, 빈민가에서 강도를 만나죠.
무산계급은 둘! 유산계급은 하나! 누가 이겨!
하지만 유산계급도 둘이었습니다. 지배층의 편에 서는 누군가가 꼭 있는 법이죠.
빅 샘이 등장했습니다. 빅 샘은 스칼렛네 집 노예였는데, 전쟁이 끝나고 박애주의적인 북군 장교에게 이끌려 북부로 가게 되었죠. 하지만 그곳의 프리하고 리버럴한, 그리고 어쩌면 가장적인 공기는 샘의 마음 속에 있는 어떤 갈망을 - 소속감에 대한 강렬한 갈망을 채워 주지 못했고,
구속의 세계로 샘은 도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 구절을 읽으며 저는 무슨 이런 @#$%… 라고 생각했지만, 미첼이 그렇잖아요? 부역자들이라도 하여튼 현실에서 존재하는 유형의 부역자들이었단 말이죠. 그래서 저는 샘에 대한 평가를 일단 유보했습니다. 그게 2018년 9월경이었는데요.
아니나다를까 며칠 지나지 않아… 카니예쨩이 나 여기 있지롱! 하고 나온 것 아니겠어요! 인간아! 쫌!
여튼 스칼렛은 샘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나죠.
소설에서 노동착취와 빈민가의 강도들은 분명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문학적인 인과관계라고 하겠어요. 조금 있다가 인디아가 스칼렛의 고난이 업보라고 주장하는 대목도 있고 말이죠. 영화에서는 죄수들이 나오지 않아 이런 생각이 살짝 어렵지마는.
그건 그렇고, 피지배계급의 이런 무력행사는 정당한가요? 우리는 대개 로빈후드는 옳다고 말하고, 강도범들은, 특히 여기서처럼 강도강간쯤 되면 예외 없이 나쁘다고 말할 테지만, 노상강도와 로빈후드의 구분도 사실 애매하지요.
집으로 돌아온 스칼렛에게, 프랭크는 멜라니네 집으로 가서 있으라고 합니다. 자기는 <정치모임>에 가야 한다네요. 스칼렛은 울분을 터뜨립니다.
그날 저녁, 멜라니의 집에서 멜라니, 스칼렛, 인디아, 피티는 바느질을 하고 있습니다. 아치가 옆에서 경비를 서고 있죠. 영화에서는 피티 대신 미드 부인이, 아치 대신 유모가 있지요. 멜라니는 그날 있었던 일을 이야기합니다…
이야기의 내용인즉 하프 연주자들이 곡 선정의 문제로 소동을 피웠으며, 연주회장인 멜라니가 격노한 다음에야 간신히 무마되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부드럽지만, 분개의 빛을 띈 목소리로’라는 구절에서 멜라니가 <사회의 리더>임이 잘 드러나지요.
- 아침에는 현악소조 동무들이 와서, 위원장 동지, 이거 바꿔주세요, 안 그럼 못해요, 라는 거 아니겠어요. 협박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의견을 표명할 기회를 그렇게 줬는데 꼭 나중 가서 딴 소리 하기에요? 당에서 결정하면 결정한 대로 따라야지요. 대체 이러려면 민주집중제는 뭐하러 하는지...
스칼렛은 멜라니의 화제돌리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신세한탄을 개시, 이에 인디아의 수동공격성이 대폭발.
개인적으로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 영화에서 인디아 윌크스는 알리시아 레트(성이 그 레트Rhett입니다. 신기하죠?)가 연기했습니다. 조연이지만 캐릭터 연구를 정말 열심히 한 것 같은데, 뭘 하든 내면의 수동공격성이 드러나죠.
심지어 인디아가 손님맞이를 할 때도 목격할 수 있으니, 저것이야말로 수동공격맨의 영업. 의심되는 분은 언젠가 명절날 큰집에 왔던 작은며느리 분을 떠올려 보십시오. 바로 저런 얼굴이었을 겁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여성캐릭터는 다양하면서도 개성적이죠. 이것은 여성작가로서의 장점, 강력한 장점일 텐데, 남성들은 이렇게 잘 못하거든요. 이유인즉 남성은 평소 여성을 이해할 필요성을 강력하게 느끼지 못해서이겠습니다.
물론 어머니에게는 관심이 있지만, 남성의 어머니에 대한 관심은 박경리가 말하는 그 수준. 남성들이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유일한 대상은 ‘나를 차고 떠난 그년’ 정도? 그 밖의 여성-인물들은 창작의 대상은 둘째치고 비평의 대상은 되는지 살짝 좀 의심스럽죠.
하지만 미첼의 여성들은 매우 다양하죠. 그리고 인간적입니다. 머릿속은 거대한 꽃밭이지만 친화성 만렙인 비혼계의 프론티어 피티패트나, ‘고대 로마의 여장부’같은 빵집경영 인생 2모작 정치원로 메리웨더 부인이나. 자존심 강한 일코형 톰보이 (나중에 타락함) 캐슬린이나.
물론 더 뛰어난 캐릭터는 공학형친연방산업자본가+마성적둔감여혐헤테로 스칼렛이고요. 다양한 개성들이 한 개인으로 완전하게 압축돼 있죠. 그리고 가장 뛰어난 캐릭터는 개인적으로 아무래도 멜라니.
알리시아 레트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이후 만족스러운 배역을 찾는 데 어려움을 느끼다가 연기를 그만둬 버렸는데요. 그것은 앞서의 문제를 더 통감하게 만들죠. 여성캐릭터 구현의 어려움이랄까, 게으름이랄까.
이를 갈고 있던 스칼렛은 멜라니의 만류에도 불구, 인디아와 싸우기 시작하죠. 인디아가 꼰대력을 최대한 발휘하지만, 여자가 운전을 하고 다닌다는 둥의 트집으로 스칼렛을 무너뜨리기는 역부족. 스칼렛에게는 1의 데미지도 없습니다.
하지만 말싸움 끝에 스칼렛도 뭔가 이상하다는 점을 눈치채는데…
애슐리가 아닌 누군가가 찾아와 문을 두드립니다. 영화를 보다 보면 유모… 발자국을 읽는 능력도 있었어? 싶죠. 원래는 아치.
멜라니가 갑자기 총을 꺼내죠. 원래는 이것(?)도 아치입니다.
총은 왜 꺼낸 걸까요? 물론 쏘려고 꺼낸 것이죠.
레트가 황급히 들어와, 다짜고짜 멜라니에게 묻습니다. “그 사람들 어디 갔습니까?”
인디아가 다가와서 말합니다. “아무것도 말하지 마, 쟤는 양키 스파이야.”

스칼렛이 점점 친공화당스러워지는 반면, 처음부터 레트는 대놓고 이긴 편에 붙었죠.
멜라니가 묻습니다. “어떻게 알았지?”
레트가 답합니다. “양키 대위 둘이랑 포커를 하고 있었는데요. 양키들은 오늘 밤 일이 터질 걸 알고, 그곳에 기병대를 대기시켜 놨습니다.”
인디아가 옆에서 다그치죠. “말하지 마! 너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거야!”
눈빛이 오가고, 멜라니가 말합니다. “디케이터 길로 가면 옛날 설리번의 농장이었던 데가 있어요. 집은 불탄 상태고, 그 지하실에서 집결해요.”
노력해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레트는 나갑니다.
설명을 요구하는 스칼렛에게 멜라니는 답합니다. “애슐리와 프랭크 그리고 몇몇이 네가 습격받은 곳을 쓸어버리러 갔어.”
그리고 덧붙이죠. “많은 우리 남부 신사들이 최근 들어 자경활동을 시작했어.”
인디아가 윽박지릅니다. “그들이 잡히면 교수형이야. 모두 네 탓이야!” 소설에서는 아치의 대사.
멜라니가 인디아의 말을 자릅니다. “한 마디만 하면 이 집에서 쫓아내겠어. 스칼렛은 자기가 생각한 바 할 일을 한 거야. 우리 남자들도 생각한 바 할 일을 하는 거고.“
그리고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죠. 하지만 진행을 잠깐 멈추고, 레트의 방문부터 지금까지의 대사들을 복기해 보도록 합시다. 이 부분은 중요합니다.
아무리 권력적인 행동을 하는 여성이라도 무력과 관련짓기는 쉽지 않죠. 특히 멜라니는 코스프레든 어떻든 현모양처의 역할을 맡아 하는 사람이며, 남부의 남녀차별적인 문화는 - 미첼은 이것을 자주 강조합니다 - 남성의 일들과 여성의 일들을 쉽게 구분하게 만들죠.
소설이 멜라니가 애틀랜타 사회의 리더라고 분명히 지적하긴 하나, 그 영도적인 사업들은 문화적이고, 평화로운, 즉 여성적인 것들이었습니다. 군인묘지의 풀을 뽑는다거나. 모임에서 디킨스를 낭송한다거나.
앞서에서도 멜라니는 그날의 공격적인 행동은 남자들이 하는 일이고, 남자들이 결정한 일이라며, 자신과 한 걸음 떨어뜨려 놓고 이야기하고 있었지요. 소설에서는 그 뒤에, 사람의 결단은 타인이 왈가왈부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까지 덧붙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나, 모두가 비슷한 것은 아니야. 그리고 자신을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심판하는 것은 잘못이야We don’t all think alike or act alike and it’s wrong to — to judge others by ourselves..."
그런데 레트는 멜라니에게 그날의 작전계획을 물으러 왔지요.
물으러 왔다는 것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계획을 멜라니가 당연히 안다는 것을 전제하고 왔다는 것입니다.
멜라니는 아니나다를까 <집결지>를 알고 있죠. 군대에 다녀오신 분들은 - 특히 육군이라면 - 감이 오실 텐데, 집결지는 굉장히 중요한 기밀입니다. 특히 이것은 야간작전이죠.
19세기에는 LED조명이나 민가의 불빛 같은 것은 물론 GPS항법장치도 없었습니다. 말 그대로 집결지에 모여서 작전을 개시하고, 작전 종료 후에도 모두 집결지에서 집결할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거기에 증거가 남아 있겠죠. 집결지만 알면 멤버들을 다 찾을 수 있고 싹 다 털어버릴 수 있습니다.
무력행사의 동기를 봅시다. 레트가 말하듯, 아니 공무원들이라는 동물의 행태가 그러한데, 사고가 터지면 그날 당일은 군경이 어지간히 게으르지 않은 이상 준비태세를 갖추기 마련입니다. 곧 남부인들의 이 계획은 굉장히 무모한 작전이죠.
소설에서는 이런 표현이 나오죠. “잠깐 동안 멜라니는 세게 한 방 얻어맞은a heavy blow 것 같이 휘청거렸고…”

비슷한 표현이 소설의 다른 부분에서 나오죠. 스칼렛이 애슐리가 멜라니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입니다. “경고 없이 어찔어찔하게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그리고 사람들은 스칼렛이 받은 상처에 이런 즉각적인 보복이 필요하다고 여겼을까요? 애틀랜타 이웃들은 스칼렛을 내심 미워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인디아는 노골적으로 쌤통이라는 반응을 보이죠. 굳이 무리한 보복을 주장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프랭크 케네디?
무엇보다, 인디아가 멜라니에게 하는 말이 무엇이었나요? “말하지 마! 너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거야!”
이 부분 역시 엉뚱하게 번역되곤 합니다. 가령 KBS더빙판에선 “‘우리를’ 속이려는 거예요”로(아래 구글 영화 번역처럼), 심지어 떠도는 인터넷 자막들 중에서는 ‘그들을’도 있지요.

여기서, <달링>이라는 표현의 번역이 어땠는지 떠올려 봅시다.
멜라니가 스칼렛에게 “오, 마이 달링!” 이라고 외치며 껴안는 대사를 어떤 번역자는 “가엾은 스칼렛!”으로, 어떤 번역자는 “오, 여보!”라고 번역했습니다. 왜 이랬을까요? 생각이 짧아서?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머리를 너무 많이 굴린 결과입니다.
<달링>은 명백한 사랑의 표현이고, 멜라니가 스칼렛에게 그랬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는 뭔가 잘 안 맞기 때문에, 나름대로 앞뒤가 맞게 번역가가 의역한 결과가 그것들이란 말이죠. 곧 원문과 동떨어진 번역은 오히려 균열의 표지입니다.
원문 자체에 뭔가가 숨겨져 있다는 거죠!
인디아의 앞서 대사도 마찬가지. 왜 ‘너를’을 '우리를'로 엉뚱하게 번역할까요? 멜라니가 이 계획과 관련이 없다면, 심지어 단순 가담자라 하더라도, ‘너를’은 굉장히 어색하기 때문이죠. 인디아의 말마따나 디케이터 로로 떠난 남자들은 목숨이 위험한 상황입니다. 멜라니가 위험해 보이나요?
그렇습니다. 인디아의 “말하지 마! 너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거야!”는, 계획이 탄로나면 가장 위험에 처할 사람이 사실은 멜라니란 소리입니다.
멜라니의 말마따나 이 계획은 자칭 <자경활동>의 일부입니다. 그것은 그 얼마 전부터 계속된 활동이죠.
하지만 레트와 인디아의 말에서, 그것은 자경의 탈을 쓴 불법 무장활동이라는 점이 드러나지요. 이 부분만으로도 결론은 명백합니다.
멜라니 해밀턴은 극우 테러리스트였습니다.
멜라니가 있는 테러조직은 아주 유명하지요. 바로 KKK단(Ku Klux Klan)입니다.
KKK단은 지금도 존재합니다만, 19세기의 KKK조직을 직접적으로 계승한 건 (아마도) 아닙니다. 물론 하는 짓은 비슷하죠. 백인의 정치적-사회적 우월성을 관철시키는 것이 목적. 수단은 심리적 위압이며 구체적 도구는 사적 폭력입니다.
KKK단 1기는 전쟁이 끝난 다음해, 테네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오컬트 취향을 가진 인간들이 결성한 듯한데, 그래서인지 이 조직에는 뭔가 음습한 유치함이 감돌죠. 그 이듬해인 1867년 퇴역 남부 군인인 포레스트가 수장으로 취임, KKK는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하게 되었습니다.
테러활동은 1860년대 말에 정점에 이르렀고, 심지어 포레스트 본인이 1869년 조직해산을 외쳤는데도 각 지역 조직은 계속 심각한 테러를 일삼았죠. 지부들이 상당한 자율성을 가진 느슨한 조직이었던 것 같습니다. 구조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어 있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역사가들은 대체로 전직 남부군 장성인 고든을 KKK-조지아의 수괴라고 보는 듯. 이 인물이 멜라니의 집에 자주 찾아온다는 언급이 소설에서 있지요. 그리고 그 다음에 찾는다는 라이언 신부 역시 KKK 주요 인사. 그렇다면 또 그 다음의 스티븐스(남부연맹 부통령)도 한통속이라는 추측이 가능하죠.
앞서의 추론이 맞다면, 멜라니의 집은 일종의 연락소 또는 사무국이었던 셈입니다. 보셨다시피 애틀랜타는 교통의 요지니까요. 멜라니가 KKK의 조지아 지부 총무를 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습니다.
여기서 뭔가 이상했던 대목들의 실마리가 풀리죠. 멜라니는 왜 자기 집을 놔두고 다른 집에 세들어 사는가? 스칼렛이 자신이 도모하는 위험한 활동에 말려들면 안 되니까죠.
왜 윌 벤틴은 멜라니 가족이 뉴욕에 가기를 바랐는가? 멜라니는 태라에 있던 때부터 무장활동에 빠져든 것입니다. 왜 멜라니는 애틀랜타에 안 오고 태라에 반년 동안 있었는가? 역시 답은 같습니다.
여기서 조나스 윌커슨 암살사건도 굉장히 의심스러워지죠. 그것은 바로 저 반년 사이에 일어났으며 애슐리가 개입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동기는 충분합니다. 곧 멜라니가 배후일 가능성이 있죠. 물론 이것은 사실적인 추론입니다. 소설의 <작법>대로라면 100%.
왜 멜라니의 집은 지하실이 넓은가? 부랑자들을 포섭하여 행동대로 써먹기 위해서입니다. 아치가 그 예죠.
소설에서는 그전까지도 이런 결과에 대한 암시가 여러 차례 있었죠. 가령 와이티님이 예리하게 지적하셨다시피, 패전 직후부터 멜라니는 다른 전쟁을 기획하고 있었어요. 그 구체적 결과는 테러전이 되었지마는.
그리고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대사 -

“남부연맹의 일원이었던 사람들이 어디서든 둘만 모이면, 화제는 오직 하나뿐이었고, 한 다스나 그보다 더 많이 모이면, 한번 더 전쟁에서 기차게 붙어 봐야 한다는 익숙한 결론이 났다.”
중국에 유사한 케이스가 있는데, 여모라고 불리는 여성입니다. 이름이 불명인데, 여모呂母란 여呂아무개라는 사람의 어머니母라는 뜻이죠. 관청에 살해당한 아들의 복수를 위해 떠돌이들을 끌어모아 반란을 일으켰죠. 심지어 그 반란세력은 나중에 국가를 전복해 버렸던 것.
여기서 멜라니의 일이 왜 이렇게 흘러갔는지를 살펴봐야 하겠죠. 발제는 앞서 다 했으니 정리만 하면 되겠습니다. 다시 품성론, 민족주의, 그리고 자본주의입니다.
우리는 앞서 자본주의의 도래를 보았죠. 그리고 유능한 자본가로서의 자질을 모두 갖춘 스칼렛이 (시드머니를 손에 넣자마자) 자본가로 변신하는 광경을 보았어요.
멜라니도 아주 비슷합니다. 어떤 사회적 상황에서 몇 가지 조건만 갖춰지면 역사적 필연에 가까운 일이 일어나곤 한다는 거죠. 만약 그것이 한국의 80년대라면 어땠을까요?
평행세계의 멜라니, 그러니까 이를테면 60년대생인 김멜라니아 어린이를 상상해 볼까요. 이 아이는 학창시절 공부를 열심히 해서 명문대에 진학했을 겁니다. 그리고 운동권에 들어가 조직을 장악한 다음 미국문화원에 불을 질렀겠죠.

단 한 치의 예외 없이 그랬을 겁니다.
어쩌면 얼마 지나 특사로 풀려나서, 어쩌면 노무현 정권 때 대변인을 했을 수도 있겠고(조선일보 사이트에 악플 오백만개 달림), 지금 2선이나 3선쯤 되는 국회의원일 수도 있겠죠.
이 전대협 버전 멜라니가 KKK만큼 사악하다는 분도 계실 겁니다. 하지만 KKK보다 더 나쁘다는 분은 드무실 터. 왜 같은 품성의 결과가 살짝(?) 다를까요?
멜라니 역시 스칼렛처럼 자본주의적 세계를 반영하는 인물이죠. 특히 그것이 몰고 오는 공동체와 인간관계의 붕괴에 초점을 맞추는 인물. <품 성>의 재능은 그것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품성적 정치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죠. 정념의 공동체를 추구하기에 비합리적으로 흐르기 쉽다는 점. 인물의 됨됨이를 중시하기에 사람들 사이에 위계가 생긴다는 점. 의사결정이 비민주적이리라는 점. 잘못된 습속을 타파하기보다 그것에 영합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품성의 공동체는 소속감을 추구하기에 배타적 성향을 띄게 되지요. 현실정치에서 그것은 민족주의라는 형식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민족이란 건 상상의 산물입니다. 종교, 언어, 외양이 기준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미국 북부와 남부처럼 셋 다 모두 같더라도 꼭 같은 민족일 것도 없습니다. 생각하기 나름이고, 어떻게 생각한들 별 차이랄 것도 없죠.
즉 민족주의란 지향만 강력하지, 현실의 문제성을 치열하게 반영하는 사상은 아닌 것. 민족주의자는 강력한 국가를 소원하기에, 계급, 성, 인종, 전쟁 같은 문제들에서 오히려 반동적 입장으로 돌아설 때가 많아요. 아치가 좋은 예죠.
그런 의미에서 민족모순은 (민족주의자들 본인에게 있어) 가장 심각한 모순인 것이죠.
멜라니 역시 - 특히 레즈비언으로서 - 여성주의적 활동을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지만, 손도 대지 않아요. 여성주의는 논쟁적이며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고, 그러면 남부연맹부활작전에는 방해만 되거든요. NL이 통일 빼면 별 관심 없는 것과 같습니다.
게다가 남한에서는 민족국가 건설을 위해 빠져야 하는 집단이 딱히 드러나지는 않았습니다. 양키들이야 뭐 주한미군 정도니까요. 하지만 미국 남부의 경우는 양키와 흑인을 (무시할 수 없는 숫자임에도) 배제하는 것이 민족주의적 강령이 되었단 말이죠.
남부 엘리트계급의 정치는 인종차별을 지렛대로 하층민을 백인-정체성에 동원하는 정치이고, 이것은 멜라니의 개성과 너무 나쁜 상호작용 - 굳이 문자를 쓰자면 악무한적인 - 을 일으키고 있죠.
이 점이 NL과의 가장 큰 차이이며 남부-멜라니의 문제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상대역인 링컨과 박정희의 차이일지도 모르죠. 링컨은 연방과 흑백통합을 추구한 반면, 박정희는 분단과 전라도 차별을 권력강화의 기반으로 삼았으니까요.
따라서 (소설 안과 그 바깥 현실에서의) 인종차별은 멜라니 해밀턴의 캐릭터를 정의하는 데, 그리고 또 평가하는 데 있어 주요한 과제가 되겠습니다. 멜라니는 정치광인이고, 당대 정치의 핵심 쟁점이 하필이면 또 인종이니까요.
소설은 살펴보았듯이 대단히 인종차별적이지만, 그런 차별적 편견으로도 사실을 감출 수는 없었지요. 흑인들은 (뭐 당연한 얘기겠지만) 열등하지 않으며, 의존적이지도 않았습니다. 즉 멜라니 해밀턴의 정치는 시작부터 극복할 수 없는 오류를 짊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담이지만 멜라니는 흑인들과 상호작용을 하는 장면이 (특히 소설에서) 거의 없죠. 어쩌면 그것부터가 문제.
말발굽 소리는 연방군 기병대였습니다. 북군 장교가 멜라니의 집 안으로 들어오죠. 스칼렛을 알아보고 인사를 한다는 점으로부터, 스칼렛이 차츰 친북세력이 되고 있음을 눈치채실 수 있겠어요.
장교는 애슐리의 소재를 묻고, 멜라니는 언제나처럼 그럴듯하게 변명하죠. 하지만 북군 병사들은 정보를 입수하고 온 것입니다.
그들은 집을 포위하고 경계를 서기 시작하죠.
책을 꺼내들고 <독서모임>으로 위장하려는 멜라니.
이 빨갱이노무쉐키들(아님)
멜라니가 읽는 책은 디킨스의 <데이비드 코퍼필드>입니다. 소설에서는 <레미제라블>.
언어영역 듣기평가가 시작되자 비명부터 지르고 보는 스칼렛
이번 한 번만이라도 좀 차분하게 들어 봐, 얘…!
영화에서는 멜라니에게 괴상한 설정 하나가 붙었는데, 낭독성애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싶은 그런 것입니다.
책을 읽는 사람은 섹시한가요? 책벌레가 아니라면 정말 상상조차 못할 취향인데요.
하여튼 영화의 멜라니는 그러합니다. <스칼렛이 자신의 머리맡에 앉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책을 읽어 주는 것>이 분명 멜라니의 위시리스트에 있겠죠.
하지만 스칼렛이 그럴 리가. 차라리 햄스터에게 줄넘기를 가르치는 게 빠를 겁니다.
멜라니는 차선책으로 스칼렛 옆에서 자신이 읽지만, 스칼렛의 표정은
(문학 싫어) (문학 싫어) (문학 싫어)
이 컨셉트의 결과 영화에서는 정말 미치광이 같은 장면이 나왔는데요. 바로 <전사자 명단을 읽는 최애가 너무 섹시한 점에 관하여>죠. 영화를 다시 틀고 저 장면에서 멜라니의 시선처리를 보십시오.
뭔가 저씨문학스러운 부분이죠 각본가가 아저씨들이라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반면 소설에는 뭔가 라노벨스러운 부분들이 있었죠. 최애한테 <무릎베개>를 한다든가. 최애 앞에서 자신을 <3인칭>으로 부른다거나.

아, 이 부분 앞에서 넣었어야 했는데. 소설에서 이 부분에 들어간 대사는 “마이 달링, 멜라니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렴!”입니다.
??? : 중대장은…
멜라니의 낭송은 계속되고 계속되어 벌써 9장이 되었습니다. 일반적인 속도(1분에 130단어)로 읽었을 경우 375분이 소요된다는 계산이 나오는군요.
미치기 직전인 스칼렛
하지만 이 긴장을 뚫고, 남자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오는데…!
소설에서 레트가 부르는 노래와, 영화에서 레트가 부르는 노래가 다릅니다. 제작자 셀즈닉이 (당시 기준으로) 정치적으로 민감한 부분을 거의 다 빼버렸기 때문. 영화에서는 일단 KKK의 K자도 안 나오죠. 그리고 이 대목에서의 레트의 정치성도 사실상 완전히 소거되었습니다.
레트 버틀러 역시 오늘날 우리의 기준으로는 극우에 가까운 인물이죠. 하지만 멜라니와는 노선이 다릅니다. 이 노선의 차이는 소설 후반부를 아우르며 강력한 갈등을 불러오죠. 물론 영화에서는 이 갈등도 딱히 안 나오지마는.
레트는 KKK에 반대하는 인물인데 - 대략 유승민이나 김무성이 태극기부대를 바라보는 그 시선으로 KKK를 보고 있습니다. 짜증과 경멸과 조소가 섞인 그런 느낌이랄까요.
레트는 소설에서 예의 그 셔먼-등장곡, 즉 “조지아 행진곡”을 우렁차게 부르며 다가오죠. 반면 영화에서는 포스터의 <Massa's in de Cold Ground>입니다. 한국에서는 <기러기>로 개사되어 불린 곡이죠.

미국 민요의 아버지라고 흔히 불리는 백인-남성 포스터는 사실 인종차별의 왕이기도 한데, 우리가 익히 아는 <스와니 강> 역시 마찬가지죠. 어느 흑인이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 무엇을? 스와니 강변의 노예농장을.
이런 노래들은 위에서 언급했던 <민스트럴 쇼>를 위한 것들이었습니다. 백인들이 흑인으로 분장해서 오~ 노예농장 그리워요~ 라고 딸랑딸랑 노래한단 말이죠! <Massa's in de Cold Ground>도 마찬가지인데, 흑인 노예가 주인(흑인 사투리로 Massa)의 죽음을 슬퍼한다는 내용.
듣다 보면 정말 불현듯 슬퍼지는 노래인데, 왜 안 그렇겠어요, 백인놈이 하나밖에 안 죽었잖아요.
하긴 이 <주인님 주금>도 어떻게 생각하면 풍자적이겠지만, 셔먼 행진곡처럼 노골적으로 풍자적이진 않지요.
전주곡이 이렇게 다른 것처럼, 이 무대를 위해 레트가 짜놓은 <각본> 역시 영화가 소설과 다릅니다. 하지만 멜라니는 그것에 맞추어 혼신의 연기를 선보일 것입니다. 기대하시라 무대광풍.
스칼렛은 무대의 막이 올랐다는 것을 미처 모르고 있지만
멜라니가 스칼렛의 팔을 잡아 제지하죠.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 맡겨.” 소설에서는 아치에게 하는 대사.
스칼렛은 세이버를 들고 계단 위에 서 있던 멜라니를 떠올립니다. 태라에 북군 탈영병이 찾아왔을 때였죠. 그 사건에서 내면의 과격함과 아울러 멜라니의 연기력이, 또는 거짓말하는 재주가 드러났었죠. 지금 그 능력이 다시 드러날 것입니다.
남자들은 술독에 빠져 헤롱거리고 있습니다. 소설에서는 레트, 애슐리, 그리고 휴 엘싱의 조합이죠. 영화에서는 휴가 미드 선생으로 대체.
멜라니는 남편의 주벽에 머리 썩이는 아내를 연기할 것입니다. 소설 버전이 더더욱 희극적이죠. 소설에서의 멜라니는 속칭 메소드 연기파(?)입니다. 격분하여 바가지를 박박 긁는 마누라 역. 반면 영화에서는 원래 이미지에서 크게 일탈하지 않고, 불편한 진실에 한 걸음씩 다가서는 탐구자.
연방군 장교가 애슐리를 체포하려고 하지만, 멜라니는 늘 그랬다는 듯 남편을 집 안으로 들여보내죠.
- 일베한다고 잡아가면 오유충들도 다 잡아가야죠!!!!!!
미드 선생이 끼어들어 시간을 끌고,
멜라니는 애슐리를 의자에 앉히는 데까지 성공했습니다.
- 너 나가 오지마
- 우리 애는 착한데 친구를 잘못 만나서… 같은 소리하시네!
눈에서 레이저를 쏘는 멜라니. 드 하빌랜드의 눈은 참 초롱초롱하죠. 참고로 동생도 그렇습니다(심지어 더 초롱초롱함). 집안 내력인 듯.
-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그리고 멜라니는 남편을 알콜중독자로 만들기 시작. 참고로 애슐리는 술을 잘 안 마신다고 소설에서 나오죠. 애슐리는 무슨 평생자극을 추구하는 걸까요.
뭔가 이상하다는 점을 눈치채고 애슐리를 체포하려는 장교.
레트와 장교는 친구 사이였습니다. 여기서 장교의 이름이 나오죠. 풀 네임은 톰 제퍼리.
톰이라, 그런데 왜 이름이 톰이죠?
아니나다를까 쥐새끼처럼 빠져나가려는 레트
여기서 왜 연방군인들이 멜라니의 집에 우르르 몰려왔는지의 이유가 나오죠. 그들은 애슐리를 그날 판자촌 습격의 주동자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잘 살펴보시면 - 증거가 없죠.
군인들은 물증은커녕 현장에서 애슐리를 목격했다는 증인조차 안 갖고 있죠. 그런데 톰은 어떻게 애슐리가 주동자임을 확신하지요?
결론은 하나입니다. 군 당국은 애슐리를 그 지역 테러조직의 수괴로 알았던 것입니다. 홀로 멜라니의 집에 찾아왔을 때 레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으니, 곧 당국에서는 KKK를 유심히 관찰하며 정보를 수집해 왔었습니다.
건수를 잡은 즉시 주모자의 신변을 확보하기 위해 연방군이 출동한 것. 그런데 애슐리가 테러집단의 지휘를 할 만한 사람인가요?
이런 사람이?
애슐리는 어떻게 분위기에 휩쓸릴 수는 있어도, 뭘 주동할 성격은 아니죠. 그리고 더 중요한 부분은, 애슐리는 지속적으로 합법노선을 지지하고 무력투쟁에 반대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람은 애초에 남북전쟁부터 혼자 반대하고 있었죠.
그런데 당국은 왜 애슐리를 주모자로 찍었을까요? 이것 역시 멜라니가 최소한 애틀랜타 지역 조직의 보스라는 증거입니다. 군 당국은 수집한 정보에 따라 테러조직의 핵심에 가까이 다가갔죠. 애슐리는 핵심에 아주 가까웠습니다. 그리고 당국은,
그 지점에서 결론을 내려 버린 것이죠. 설마 멜라니가 보스일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것입니다.
스칼렛과의 관계에서도 애슐리는 표면적으로는 동업자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바지사장이랄까 조수랄까, 뭐 그런 위치였죠. 멜라니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봐야 하겠어요. 심각하게 의존적인 인물이기에, 자기 생각에 반함에도 애슐리는 멜라니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
당국이 설령 애슐리를 체포하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을 겁니다. 멜라니가 또다시 인력을 동원하여 조직을 재건하겠죠. 당국은 그때 가서야 멜라니를 의심하기 시작할 터. 애슐리는 멜라니의 카게무샤 비슷한 존재입니다.
윌 벤틴의 ’그 양반들 여러모로 뉴욕 가는 게 좋겠어’라는 말이 새삼 통렬하죠. 심지어 멜라니 본인에게도 어떤 의미에서는 그러한데 - 멜라니가 북부로 갔으면 테러활동은 아마 안 했을 테니까요.
어쩌면 작가의 어머니처럼 멜라니는 여성운동을 했을 수도 있고, 어쩌면 ‘본체’인 드 하빌랜드처럼 노동운동을 했을 수도 있고, 어쩌면 둘 다였을 수도 있겠죠. 전대협 버전 멜라니에게서 느끼셨겠다시피, 비슷한 자질이라도 환경이나 계기에 따라 상당히 달라지곤 하는 법이니까요.
그렇게 멜라니의 지령에 따라 애슐리와 일당들은 스칼렛을 덮친 강도 둘을 살해하고 판자촌을 불태운 것. 민족해방의 숙명은 방화에 있는 걸까요.
톰 : 당신네 반란분자들이 법을 직접 집행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을 때요!

구구절절 옳으신 말씀.
하지만 레트는 이중의 계략을 꾸미고 있었는데,
숙녀들 앞에서는 이야기하기 그런…곳에 있었다는
알리바이를 만들어 온 것입니다.
미끼를 정확하게 낚아채는 멜라니.
그곳은 우리, 아니 그 남자들의 친구…
벨 와틀링의 유흥업소였습니다.
여기서 소설의 멜라니는 베… 벨 와틀링...? 이라고 외치며 혼절.
경악하는 여자들
그리고 남자들의 흔들린 우정
톰 : 아냐 이게 아닌데 왜 난
톰 : 미안해 내 친구야 잠시 너를 기만했던 걸
톰 : 지금까지 너에 대한 내 우정이 아직도 좀 모자란가 봐
톰 : 그렇게 생각해 줘
야 톰 야
멜라니는 무죄다를 외치며 퇴각하는 톰.
톰이 나가자마자 본색을 드러내는 우익사범들
생명에 지장이 없는 부상이라니, 불의의 대가가 너무 작군요!
레트는 부상당한 애슐리를 안아들고 침대로 향합니다.
...뭔가 좀 이상하지만 일단 넘어가기로 합시다.
미드 선생이 애슐리를 진료할 준비를 하죠. 소설에서는 미드 선생도 사건에 연루되어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에, 다른 의사를 인디아가 불러옵니다. 의사의 이름은 딘. 여기서 멜라니의 지출내역 중 하나의 단서가 나온다고 봐야겠습니다.
나중에 멜라니가 구체적으로 어떠어떠한 곳에 돈을 쓰고 있다고 설명이 나오죠(57장). 옮기자면,
“물론, 그녀의 의사들의 요금이 아주 많이 나왔고, 애슐리가 뉴욕에서 주문하는 책과 가구도 실로 돈이 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방랑자들이라면 얼마든지 지하실에서 재우며 먹이고 입혔다. 그리고 애슐리는 남부군에 있었던 사람이 빌려 달라는 돈이라면 거절하지 못했다. 그리고 - (문단 끝)”
책과 가구도 또 혹시 모르겠지만, 나머지 네 개는 아무래도 반란사업과 연관되어 있죠. 맨 마지막의 “And -” 라는 구절은 지금 와서 보면 좀 노골적이고요. 어쨌든 저 의사 이야기도 언뜻 보면 멜라니의 치료에 드는 돈이 많다는 이야기 같죠. 멜라니는 건강이 좋지 않다는 설명도 여러 번이었고요.
그런데 딘 박사가 왕진을 온 것을 보면, 테러활동을 하다 부상당한 사람의 처리에는 외과의사가 필요하고, 그 의사에게 역시 위험수당이 제공되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의사들에게 돈이 많이 든다는 문장의 뜻은 바로 이것이겠죠.
소설에서 미드 선생은 영화와는 달리 형편없는 연기자로 묘사되죠. 그리고 또 영화에서는 벨의 업소에 지대하게 관심이 많은 미드 부인을 타박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소설에서는 그 나이치고는 보기 드문 닭살부부.
반면 뛰어난 연기를 펼친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휴, 메리웨더 할배, 헨리 삼촌, 애슐리, 레트, 그리고 멜라니가 있겠는데요. 남자들은 정확히 그 금녀의 남성클럽 <요즘 가시나들>에서 봤던 그 멤버들이죠.
클럽 이름도 참 특이하고 말이죠. 어쩌면 게이클럽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멜라니가 어느 정도 그러하겠듯, 혹시 일코(일반인 코스프레) 생활로 다져진 연기력이 아니었을까요?
이 대목이 (소설에서나 영화에서나) 유난히 재미있는 이유는 죽음의, 범죄의, 그리고 매춘의 불건전한 유혹에 더해, 어쩌면, 남성들의 희극적인 호모소셜 아래에서 꿈틀대는 섹슈얼리즘이 우리의 무의식을 자극하고 있어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가설은 특히 레트라는 캐릭터 설명에 유용합니다. 소설의 레트는 불가해한 구석이 많고, 그렇기에 어떤 신비감마저 감도는 캐릭터죠. 왜 아버지와 절연까지 했는가? 라는 질문에 레트는 나름대로의 설명을 내놓습니다만, 듣는 스칼렛에게나 보는 우리에게나,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남지요.
레트는 애슐리를 겉으로는 경멸하지만, 실제 행동의 결과는 정반대에 가깝습니다. 특히 이날 사건에서 레트는 자신이 KKK의 공범으로 몰릴 위험까지 무릅쓰고 있죠. 그런데 앞서의 가설을 적용할 경우, 레트를 둘러싼 여러 의문들은 갑자기 명쾌해지죠.
물론 소설에서 남자들의 퀴어성은 <꼭 그렇다>고 단정짓기까지는 살짝 어려운 주제입니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열혈레즈인 멜라니의 경우와는 달리요. 혹시 조지아에 거주하는 분께서 이 타래를 읽으신다면, 19세기 애틀랜타의 게이클럽에 대한 자료를 찾아 주세요.
본론으로 돌아갑시다. 우리의 주인공인 멜라니에게로! 멜라니의 개성은 다른 남캐들보다 훨씬 심각하고 시사적이고, 또 문제적이지요. 정보가 나올 만큼 나왔으니, 이제, 그것들을 종합해서 멜라니가 구성한 반-링컨적 조직의 그림을 그려 봅시다.
멜라니는 남편인 애슐리를 앞세워서 전직 남부군인들을 포섭해 왔을 것입니다. KKK라는 테러조직을 운영하는 데에도 애슐리가 마찬가지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이죠. 이 사실을 더 강력하게 추론할 수 있는 근거가 소설의 뒤에서 나옵니다.
인디아 윌크스는 의사를 불러오는 것으로 보아, 아니, 레트의 방문 당시 보인 행동만으로도 충분하겠지만, 테러조직 운영에 협조하고 있겠어요. 더 믿을만하게 느껴지는 걸까, 지하조직의 운영에서 가족이나 가까운 친척이 동료로 선호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인디아는 멜라니를 곧 배신하지요.
프리시의 어머니인 딜시는 어느 순간부터 멜라니의 하인 노릇을 하고 있고, 멜라니의 지하실에서 지내죠. 곧 이 인간은 멜라니의 부랑자-동원사업의 하수인입니다. 동기가 뚜렷하게는 안 나오는데, 원주민 혼혈인 딜시가 순수-흑인들을 경멸하는 듯한 발언을 한 적이 있긴 있었죠.
아울러 멜라니는 애틀랜타 시민사회단체의 총서기에 해당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단체들의 활동을 지배할 수 있죠. 그리고 멜라니에게는 조지아의 외곽 지역이나 다른 주의 유력인사들과의 인맥이 있습니다. 특히 KKK로 의심되는 사람들과.
전체적으로 구성이 약간 마피아 조직이랑 비슷하죠. 폭력이라는 수단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이를테면 선군정치까지는 아니지만요(물론 폭력은 중요합니다!).
마피아라고 하니 언뜻 주토피아의 한 장면이 떠오르는데, 특히 자그맣고 연약해 보이는 멜라니가 대부, 아니 대모인 점에서.
정리하면 멜라니는 공화당이 건설한 공식적 정부에 대응하는, 지하세력의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애틀랜타에 한정해서라도) 지하정부라고 불릴 정도의 실질까지 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어쨌든 행정조직과 무력을 모두 갖추고 인민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죠.
여기서 멜라니라는 캐릭터의 개성 가운데 가장 중요한 - 어쩌면 레즈비언이라는 것 이상으로, 그리고 수꼴이라는 것 자체보다 확실히 - 부분이 드러나고 있죠. 멜라니는, 적어도 정치적 인물로서의 멜라니는 흔히 안티-히어로라고 불리는 그런 유형의 인물에 해당합니다.
서사문학의 주인공은 무언가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작품에서 주인공의 그런 추구함, 곧 의향은 인물의 영혼을 밝히며 사회의 문제성을 드러내는 등불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공이라고 해서 꼭 긍정적인 인물만 있는 것은 아니죠.
멜라니 해밀턴은 일단은 복합적이지만, (미첼이 어느 정도는 의도했을 것이고, 어느 정도는 감수했을 터인데) 부정적인 지향이 상당히 두드러지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전형적인 악인은 아니죠. 착각이나 유혹에 빠져서 행하는 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대중문화에서는 단순하고 명백한 악인들이 등장합니다. 이를테면 <다크 나이트>의 조커라든가. 만화 <몬스터>의 요한이라든가. 이런 작품들에서 악은 인물 그 자체의 특질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사악하다는 느낌을 가질 사건들과 조건들을 악역들은 몸에 걸치고 있지요.
하지만 그런 악들은 우리에게 어떤 가르침도 사실 주지 않는데, 중요한 이유는, 그런 설정들이 장식적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우리 현실의 누군가가 조커의 개성을 갖고 있다고 해서, 영화 속에서 조커가 하는 행동들을 재현시킬 수는 없습니다. 우리 세계의 악은 악의로 구성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죠.
물론 악의적인 인간들은 있고, 그들은 사소한 악을 만들 능력이 있죠. 하지만 단지 그것뿐입니다. 이것을 그리는 작품은 물론 소품으로서의 가치가 있겠지요. 하지만 소품일 뿐이죠.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성을 지닌) 악인가? 소설에서 그것은 이미 예시되었습니다. 가령 스칼렛이 죄수들을 착취하는 것이 악입니다. 인디아 말마따나 정의가 살아 있다면(그러니까 그 자체로 살아 있지 않다는 이야기인데) 그 악은 처벌받았어야 하죠.
스칼렛은 노동자들을 악의적으로 착취하는가요? 전혀. 하나마나한 수준이긴 하지만, 스칼렛은 죄수들에게 복지를 제공하려고 하고, 건강을 지켜 주려고 하고, 그렇지 못한 자신에 죄책감을 느끼기도 하죠.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닙니다. 스칼렛에게는 사실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적어도 통계적인 인간은 그것이 없죠. 스칼렛은 굉장히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사람이긴 합니다만, 스칼렛에게 부여된 자유란 사실 방식의 자유일 뿐입니다. 자본가에게 주어진 길은 다르지만 주어진 목적지는 같습니다. 자본축적이죠. 소설에서나 영화에서나, 스칼렛은 그 요구에 끊임없이 쫓기고 있죠.
유산계급을 굳이 변호하려는 게 아니라, 세계의 방식 아래서 개인은 사소할 뿐이라는 겁니다. 왜 이 소설에서 셔먼은 (등장하지도 않는 주제에) 미친 듯이 세 보이는가? 모든 것을 박살낼 것 같은가? 사실 강력한 것은 자본주의입니다. 단지 우리의 정신이 버릇처럼 세계를 의인화시킬 따름입니다.
곧 진지한 서사문학에서 정의란 개인의 사적 특질이 아닌, 개인의 지향이 낳은 사회적 형식이 어떤 권력과 폭력과 배제의 지도를 그리는지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곧 문학작품의 독해는 피할 수 없이 정치적인 작업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철저히 정치적이어야 마땅합니다.
우라사와 나오키를 읽으며 늘 부족하게 여겨졌던 것 - 세밀하게 구현된 세계와 세밀하게 구현된 개인 사이의 괴리, 즉 사회적 법칙 속의 개인 - 이 멜라니에게는 구현되어 있죠. 현실의 조커는 실패한 연쇄살인범 이상이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멜라니의 정치적 개성은 역사적으로 검증된 개성이죠.
멜라니 해밀턴처럼 노력하고 행동하면 (물론 특정한 조건하에서) 사람을 끌고 조직을 꾸려서 정치적으로 파괴력이 있는 무언가를 만들 수 있죠. 세상을 근본적으로 변혁시킬 수는 없더라도, 자본주의사회의 인간들을 충격에 빠뜨릴 정도의 일은 가능하다 이 말씀.
따라서 멜라니는 여느 소설의 악역들보다 위험해 보이고, 그런 의미에서도 비할 수 없이 사악하게 느껴지죠. 이를테면 멜라니의 문학적 모범인 디킨스의 악역들보다도.
침대에 애슐리를 눕히고, 레트는 멜라니에게 전후사정을 설명하죠. 레트에 따르면, 애슐리가 부상으로 도망칠 수 없었기 때문에 부재증명을 만드는 쪽을 선택한 것입니다. 레트는 벨의 업소의 실소유주.
레트가 굳이 벨의 집을 알리바이의 장소로 택한 이유가 소설에서 하나 더 나오는데, KKK단의 명예에 흠집을 내기 위해서입니다. 유흥업소에서 남부놈들끼리 다투다 여럿이 부상당하고 심지어 사망자가 났다는 발표에 친공화당파들은 기뻐하고 의기양양해하지요.
사망자 하나는 스칼렛의 둘째 남편 프랭크 케네디. 소설에서는 스칼렛에게 목재를 샀던 그 토미 웰번도 같이 죽죠.
레트는 애슐리 일당도 살리고, 그 대신 앞으로의 무력활동은 방해하는 해법을 그 잠깐의 순간에 발견한 것. 하지만 이 계략에 관해 레트는 멜라니 앞에서는 쭈볏거리며 변명하고 있죠.
이날 멜라니의 작전은 방법론적으로 잘못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애초에 계획이 너무 무모하고, 그 이전에, KKK의 명분과는 동떨어진 것이었어요. KKK는 남부의 백인이 피해자라는 정체성에 기인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멜라니의 조직은 백인과 흑인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공격했죠.
어떻게 생각하면 그것이 바로 극우다운 점이긴 합니다. 백인 정체성에 호소하지만 사실은 가난한 백인들을 조종하기 위해, 더 나아가 계속 가난한 상태로 묶어 두기 위해 정체성을 들먹이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어떻게 보더라도 정치에서 명분은 중요합니다. 굳이 (그것이 본색이라면) 본색을 드러낼 필요가 없죠. 그렇다면, 멜라니는 <(모든) 남부 백인의 내셔널리즘>이라는 다른 거대한 연극에서는 실패하고 만 것입니다.
게다가 스칼렛은 전후의 링컨적 세계상에 적극 협력하는, 곧 남부의 배신자입니다. 노골적으로 스칼렛을 위하는 모양이 나오는 것은 정치적으로 마이너스. 멜라니가 그날 당일에 보복을 결행한 것은 여러모로 큰 패착이었죠.
결국 멜라니는 지극히 사적인 복수를 위해, 조직을 전혀 엉뚱한 데에 동원했던 것입니다. 이 결과 조직원 둘이 죽었고, 그뿐만이 아니라 조직을 전부 날릴 위험에 처했었고, 레트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다, 그 대가로 망신을 당하고 말았죠.
어느 쪽으로 봐도 지도자 동지의 영도력에 거대한 스크래치가 난 사건이 아닐 수 없지요. 멜라니는 이 사건의 연장과 연장을 겪으며 권력에 대한 도전을 겪게 됩니다.
다음날 멜라니에게 벨 와틀링이 찾아오죠. 멜라니가 남편을 구해 준 것에 대해 감사를 전하자, 벨 와틀링이 직접 들른 것.
이것도 언뜻 멜라니의 자애로움을 강조하는 에피소드 같지만, 자세히 보면 벨이 멜라니에게 열심히 굽신대고 있죠. 소설은 개인이 체제에 굴종하는 방식을 다양하게 보여 줍니다. 벨 역시 마찬가지.
그 자신이 일탈자이지만, 다른 일탈에 벨은 오히려 모질게 굴죠. 유모와 살짝 비슷합니다. 상층계급의 윤리를 적극적으로 내면화한 것.

아니나다를까 벨은 애틀랜타의 대표 일탈자, 스칼렛을 비난하기 시작하죠.
벨 : 여자가… 조신하지 못하게… 운전이나 하고 다니고...!
예고도 없이 팩트의 짜르봄바를 터뜨리는 벨 와틀링
멜라니 : 그래 내가 쏜 거나 마찬가지다 어쩔래
바로 깨갱하는 벨.
정신을 차리고 품성 또 품성으로 자기포장에 열심힌 멜라니 해밀턴
하지만 사실은...
최애밖에 모르는 바보
상심하고 있는 멜라니의 최애(얼굴천재)
슬퍼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것도 아니죠. 단지 다른 감정들이 살짝 더 강할 뿐
프랭크를 잃고 일 년쯤 지났을까, 무척 상심한, 아니 심심한 상태였던 멜라니의 최애는 또 남자랑 결혼을 해 버리죠. 이번 남편은 레트.
레트와의 결합으로 스칼렛은 그냥 부자에서 아주 부자가 되었습니다. 저 진심으로 행복한 표정을 보세요.
이미 부자가 되었음에도 스칼렛은 제재소를 계속하려고 하죠. 제재소는 스칼렛의 노고의 산물이며 그 인격이 낳은 사회적 가치로서, 일종의 분신과 같은 존재입니다. 스칼렛에게는 제재소가 자식이나 마찬가지라는 표현이 소설에 있죠.
하지만 스칼렛의 일은 사람들의 질시를 낳고, 이웃들과의 사이가 멀어지게 만들죠. 또한 스칼렛의 고삐 풀린 이익추구로 노동자들은 착취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고요. 맑스의 노동-소외 이론과는 언뜻 달리, 스칼렛의 노동은 스칼렛을 오히려 사회적으로 더 소외시키는 결과를 가져오죠.
하지만 어쨌든 부자가 된 스칼렛은 작심하고 부를 과시하고 다니죠. 그 덕분이라고나 할까, 영화에서 비비안 리의 드레스를 구경하는 재미 하나는 아주 쏠쏠합니다.
스칼렛의 소위 돈지랄은 상당 부분 레트의 영향이기도 합니다. 레트는 금전으로 쾌락을 교환할 수 있고, 쾌락으로 소외를 극복할 수 있다는 마인드의 소유자였죠. 레트는 스칼렛을 끌어들여 일종의 사회적 실험에 돌입한 것입니다.
게다가 당시 레트는 노골적인 친공화당파, 일명 스캘러왝이었기에 스칼렛은 더욱 그쪽으로 기울게 되었죠. 그러던 어느 날, 스칼렛과 레트의 호화주택이 완공되었습니다.
신난 스칼렛은 아는 사람들을 몽땅 초대해서 집들이를 기획하죠. 당연히 여기에는 멜라니가 낍니다. 그런데 레트의 영향으로 친해진 사람들까지 초청되었고, 그 중에는 당시 조지아의 공화당 주지사인 불럭(Rufus Bullock)도 있었습니다.
스칼렛의 집에서 의문의 조지아 영수회담이 열릴 뻔한 것이었어요. 하지만 불럭을 발견한 멜라니가 무리를 이끌고 철수함으로써 둘의 만남은 무산.
화가 난 스칼렛은 다음날 멜라니에게 달려가 앙탈을 부리기 시작하죠.
스칼렛 : 전쟁도 끝났는데 다같이 사이좋게 지내면 좋잖아!

멜라니 : 그게 자기… 나는 그 사람들이랑은 친하게 지내기가 좀 그래…!

스칼렛 : 몰라몰라몰라시러시러시러미워미워미워으아아앙!!!!!
지금 우리가 보는 영화에는 이 부분이 없죠. 그런데 오디션 영상은 남아 있습니다. 멜라니 역의 공개오디션을 이 장면으로 봤거든요.

다른 배우들의 연기도 꼭 나쁘다는 건 아닌데, 보다 보면 중요한 뭔가가 없는 느낌이죠. 드 하빌랜드의 영상은 없는데, 캐스팅 당시 드 하빌랜드도 큐커 앞에서 이 장면의 대사를 읽었을 테지요.
위에서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공개오디션만 거창하게 하고 정작 캐스팅은 죄다 뒷라인으로 쓱싹쓱싹 처리. 오디션의 주목적은 사실 홍보였던 것입니다.
오디션까지 했던 걸 보면, 제작진들은 이 대목을 흥미롭게 받아들였던 모양. 그럼에도 영화에서 이 장면이 결국 들어가지 않은 이유는, 그렇습니다, 지나치게 정치적이어서였겠죠. 큐커가 중간에 짤린 이유 중에 노골적인 정치성이 있었음을 인터뷰에서 암시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스칼렛은 그런 미묘한 정치적 문제를 모릅니다. 특이하게도 멜라니가 다른 사람들을 실제로 좌지우지했다는 사실은 스칼렛도 용케 알지마는. 물론 그것이 무슨 권력이라는 상상까지는 하지 못하죠. 소설의 대사를 봅시다.
“멜라니 윌크스, 넌 나한테 창피를 줬어. 그리고 애슐리랑 다른 사람들까지 날 망신주도록 만들었어! 너도 알겠지, 네가 끌고 가지 않았으면 그들이 바로 돌아가진 않았을 거야. 난 똑똑히 봤다구! 내가 너한테 불럭 지사를 소개시켜 주려고 하자마자 넌 토끼처럼 도망갔잖아!”
멜라니는 자신이 KKK조직 보스라는 사실만은 스칼렛에게 끝까지 숨기죠. 애슐리와 프랭크가 KKK와 연관되었다는 사실도 알음알음 숨겨 오긴 했지만.

멜라니 : 왜 KKK 이야기를 안 했냐면… 네가 K자에는 너무 노골적으로 반대해서...

라는 대사가 있었죠.
멜라니는 안절부절하다가, 계속 다그치는 스칼렛에게 결국 소리칩니다.

멜라니 : 나는 양키들이 싫어! 나는 양키들을 증오해!

멜라니가 여기서 내뱉는 대사 일부는 영화에서 스칼렛이 돈을 세는 장면에 짤막하게 들어가 있죠.
그 뒤에 붙는 대사는,

“나는 (양키들이 저지른 짓을) 잊지 못해. 잊지 않을 거야. 나는 보우에게도 잊지 말라고 할 것이고, 내 손주들한테도 그자들을 증오하라고 가르칠 거야. 그리고 내 손주의 손주들에게도, 신께서 나를 그때까지 살도록 하신다면! 스칼렛, 어떻게 너는 잊을 수 있어?”
한데 멜라니는 과연 진심으로 양키들을 증오하는가요? 물론 진심이라는 것만큼 애매모호한 것도 드물겠습니다만… 제 의견은 글쎄올시다입니다.
앞서 전몰자 묘지의 제초를 쟁점으로 애틀랜타의 사회단체 두 곳의 여성들이 싸워댔던 대목이 있었죠. 여기서의 멜라니의 연설을 봅시다.

“하지만 좋은 양키 여자들도 있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멋진 일이겠습니까 - "
"좋은 양키 여자들도 분명 일부는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그들 모두가 나쁠 리는 없으니까요. 그 착한 여인들이 우리 남자들의 무덤에 난 풀을 뽑아 주고 꽃을 가져다 준다면, 그들이 적이었더라도, 멋진 일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왜 그때는 양키 여인들과의 박애정신 같은 걸 이야기했으면서, 지금 하는 소리는 정반대에 가깝게 다를까요? 어떻게 생각하면 그것이 바로 정치적인 것입니다. 사람이 하는 어떤 활동이든 그렇겠지만, 정치는 유난히 연극적인 성격이 있지요.
정치판에서 왜 사람들은 꼭 피켓을 들고 깔맞춤한 옷을 입고 같은 구호를 외칠까요? 그것은 역설적으로, 멜라니의 말마따나 - 우리가 모두 다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루카치의 표현대로라면 “불은 모든 빛의 영혼이며, 모든 빛이 불로 둘러싸여 있는” 시대가 더는 아닌 것.
하지만 어쨌든 사람은 사회를 이루어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 인간은 그냥 그렇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 같은 집단이라는 믿음이 요청됩니다. 루소 이후 사람은 합리로 믿는 것을 그만두기 시작했기에, (집단적) 감정의 고양과 그것의 상호 확인이 주는 최면적 효과는 강력한 정치적 동인이 되었어요.
가령 남초 사이트의 허황된 분노 - 사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트위터에서도 남녀나 성향을 가리지 않고 흔히 보이는데 - 는 남성-정체성을 선전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그것에 동참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타겟이 되는 남성들은 소외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게 되지요.
곧 멜라니의 이 분노는 <진심>이라기보다는 내셔널리즘의 정치적 제스처가 습관화된 것에 차라리 가깝다고 할 것입니다. 멜라니는 똑똑한 사람이기에 그것이 어디까지나 허위의식 - 그러나 유용한 허위의식이라고 생각할 텐데 - 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겠죠.
하지만 스칼렛에게 이런 수작은 안 통하죠. 결국 멜라니는 스칼렛을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고, 스칼렛이 양키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을 내버려두기로 합니다.
이 지점에서, 아니 스칼렛을 건드린 놈들을 죽이려고 든 시점에서 이미 뻔한 이야기였는데, 멜라니에게 스칼렛은 어떤 예외입니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사람을 이용하고 희생시키는 데 멜라니는 거리낌이 없었지만, 스칼렛에게만큼은 그렇게 못 하고 있죠.
곧 스칼렛은 멜라니의 정치적 약점이라는 것인데요. 아니나다를까…

인디아 윌크스가 정확히 이 지점을 노리고 쿠데타를 기획하죠. 이것이 일명 5월 종파사건(?)으로...
전애틀랜타여성단체총연합회에서 인디아 윌크스가 외칩니다 : 스칼렛은 미제의 앞잡이예요!!!
메리웨더 부인 등의 원로파들도 인디아의 편을 들죠.
??? : 미주 남부를 불법점거하고 있는 공화당 괴뢰정권 타도를 위해, 우선 내부의 첩자부터 솎아내야...
이 선전포고에 멜라니는 스칼렛을 버리기는커녕 오히려 배째라는 식으로 대응하죠.

“이걸 명심해 주셨으면 합니다. 스칼렛을 방문하지 않는 분은 절대로, 절대로 저에게 방문할 생각도 하지 마십시오.”
그럼에도 반란군은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멜라니는 이미 너무 중요한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애틀랜타의 반-공화당적 수꼴투쟁조직은 멜라니 개인의 인적 네트워크로 구성되었고, 멜라니가 빠지면 과연 돌아갈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것이었지요. 물론 멜라니가 얌전히 관둔다는 전제 하에서나 그런 것이고, 대개의 경우, 보스는 그냥 권력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최근의 (남한) 노동당의 소위 <언더조직>의 사례에서도 비슷한 결과를 볼 수 있었죠. 노동당이 뭐냐고요? 예전에 진보신당이라는 데가 있었던 것 같지 않습니까? 그것의 잔여물 같은 정당이었죠. 실세는 권력을 내놓느니 차라리 다같이 망하는 쪽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멜라니의 강요로 간신히 애틀랜타 이웃들은 스칼렛과 레트의 집에 방문하게 됩니다. 멜라니의 이런 지극정성(?)을 스칼렛은 까맣게 모른 채, 점점 더 공화당과 친하게 지내며 정치인 멜라니의 시한폭탄이 되어 가죠.
그러던 와중에 스칼렛과 레트와의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납니다. 스칼렛은 이 여자아이에게 유지니아 빅토리아라는 다소 진부하고 유치찬란한 이름을 지어 주지요. 그런데 이 아이는 그 이름은 간데없이, 보니 블루라는 별명으로만 불리게 됩니다.

보니 블루 버틀러.
멜라니가 아이의 눈을 보고 <보니 블루 플랙>처럼 파랗다고 해서 붙은 이름. 멜라니는 아이의 대모가 되는 셈이죠. <보니 블루 플랙>, 즉 <멋진 푸른 깃발>은 전쟁 때 유행했던 남부의 상징적인 노래입니다.
애틀랜타 기차역 장면에서 애들이 연주하던 바로 그 곡이죠. 소설에서는 멜라니의 정치광인적 면모가 처음 드러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애틀랜타 군병원 자선무도회에서 이 노래를 열창한 다음, 멜라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스칼렛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
멜라니 : 너무 멋지지 않아, 스칼렛? 나는 지금 너무 행복해!
스칼렛 : (미… 미친 것 같아)

별 하나 달린 파란 기 자체는 독립전쟁 당시부터 쓰였다고.
그런데 왜 갑자기 이게 남부의 상징이 되었냐 하면, 미시시피 주에서 반란을 결의할 때 반란군들이 이 깃발을 흔들어서, 가 되겠습니다.

- 귀여운 아가씨, 이름이 뭔가요?
- 보니 블루 버틀러예요^^
- 히익 수꼴
- ㅎㅎ…. 부모님이 많이… 보수적인분이신가봐요!
- 아뇨 옆집 아줌마가…
희대의 애국보수 멜라니 해밀턴
보니가 태어나고 스칼렛은 또 산후우울증을 보이죠. 스칼렛은 매우 튼튼한 사람임에도, 아이를 낳을 때마다 정신적인 고난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레트는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부부의 관계는 어긋나기 시작하죠. 레트의 쾌락주의적 실험은 빨리도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면, 스칼렛과 레트가 결혼하고 아이를 가질 잠깐에 오직 세상의 평화가 있는 것 같죠. 하지만 그것은 독자나 관객이 스칼렛의 의식을 따라가기 때문일 터인데, 실제 역사를 돌이켜 보면, 그 당시가 KKK의 테러활동이 가장 심각할 때였습니다.
그러나저러나, 레트 버틀러는 참 여러 가지로 일이 풀리지 않는군요.
집권 공화당이 국정운영을 잘 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장외투쟁을 벌이는 극렬우익들에게 수권능력이 없다는 사실 역시 만천하에 드러났죠. 그런데, 그런데

왜?
합리적 보수는 지지율이 오르지 않는 걸까요?
레트 : (내가 토론도 훨씬 잘 했는데, 왜지…?)
스칼렛 : (아니 애슐리 이 인간은 왜 사칙연산을 계속 틀려? 이 정도 덧셈뺄셈곱셈은 암산으로 돼야 하는 거 아냐?)
레트 : (합수… 합리적 보수… 참 좋은데, 정말 좋은데…)
스칼렛 : (크으 양변에 로그를 취한다)
레트 : (…..)

스칼렛 : (Σ·n=2·12 n(n-2)T*95/100/2 + 274984...)
레트 : 그래. 역시 <품 성>이야.
스칼렛 : ?
레트 : 멜라니 선생님을 벤치마킹해야겠어.
스칼렛 : (뭔 소리야?)
<품성>...!
레트 버틀러는 품성인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재수없는 청년이었던 링컨은 중년의 어느 순간 자기객관화의 극의를 깨달았지요. 레트 역시 막 40대에 접어들어, 다른 사람이 원하는 대로 자신의 행동을 조절할 수 있게 되었던 것. 테스토테론이 덜 분비되어서일까요, 멜라니를 오래 관찰한 결과일까요.
품성의 시작은 인사부터!
품성인은 절대 잘난척하지 않습니다! 겸손합니다! 특히 아는 척하지 않습니다!
품성인은 늘 남을 격려하고 칭찬해야 해요.
품성인은 쫌생이처럼 굴지 않아요.
젊은 날의 객기로 망한 전투에 뛰어들었던 것마저 지금의 레트에게는 <솔선수범>의 품성이 됩니다.
그리고 레트가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도구는… 그렇습니다. 딸인 보니 블루 버틀러죠.
아니, 보니 블루 버틀러죠.
레트에게 보니는 복합적인 존재인데, 물론 레트는 아버지로서 딸을 사랑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스칼렛의 대용품이라는 불건전한 의도가 여기 끼어들어가지요. 영민하고 열정적인 스칼렛은 그래서 매력적이지만, 또한 그래서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는 존재였던 것.
또한 레트에게 보니는 상층계급의 상속자로서의 의미 역시 가집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가문 모두 찰스턴의 명문가이기에, 보니는 핏줄로서만 보면 남부 귀족 중의 귀족이 되는 셈. 돈은 있을 만큼 있으니 충분한 평판만 얻으면 계급상속의 정수가 되죠. 레트는 아버지와 사이가 험악해서인지, 혈통에 집착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그 모든 자식사랑 중에 가장 음험하고 음험한 부분은 앞서 말한, 정치적 도구로서의 보니 블루 버틀러.
품성인이 품성을 함양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이었나요? 그렇습니다. 유사-가족적인 일체감으로 구성원들을 도취시키는 것이었죠.
레트는 딸바보 아빠 연기로, <연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역할을 다소 과장되게 수행하며, 멜라니의 통치에 내심 불만을 가진 원로 여성동지들을 공략해 나가기 시작하죠.
언뜻 별 접점이 없어 보였던, 멜라니와 레트 사이에 갈등이 첨예해지고 있어요. 레트는 판자촌 습격 사건에서도 은근히 그러고 있었지만, 이제 제법 노골적이죠. 레트의 목적은 정치적 기반을 차근차근 갉아서 멜라니의 조직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어느덧 폭풍 같았던 남부의 1860년대가 가고, 1871년이 되었습니다. 대략 이 시점에서 연방정부는 남부 치안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테러분자들을 본격적으로 때려잡기 시작하죠.
바로 이 타이밍에 멜라니는 애슐리의 생일파티에 집중합니다. 멜라니가 늘 그렇듯, 언뜻 보면 남편을 지극히 아끼는 아내의 행동이죠. 하지만 없는 살림에 큰 돈을 들여 파티를 거창하게 계획하는 걸 보면, 그리고
초대되는 사람의 면면을 보면, 이 파티는 정치집회의 성격이 아주 강하다는 걸 알 수 있지요. 조지아 KKK의 수괴로 의심되는 고든이 있고, 정치 거물인 알렉산더 스티븐스와 그자의 절친인 로버트 툼즈가 방문할 계획이지요. 툼즈는 남부연맹의 국무장관이었습니다.
소설 설정상 애틀랜타의 가장 존경받는 원로인 미드 선생님(실존인물 아님)도 계시는군요.
당시 조지아 KKK 중에 존 리드라는 인간이 있었습니다. 리드의 패거리들은 1860년대 말 애틀랜타 외곽에서 정치깡패질을 열심히 했지요. 구체적으로 농촌 지역 유권자들을 협박하여 공화당에 투표하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한국인들에게는 이승만 정권 시절의 추억같은 광경이죠.
그런데 이 리드가 나중에 증언하기로는, 애틀랜타 지역 KKK의 그랜드 타이탄 - 정말 중2병스러운 직위명입니다 - 이 더들리 두보즈였다고 합니다. 두보즈는 앞서 로버트 툼즈의 사위인 동시에 동업자. 미첼이 은근슬쩍 두보즈-툼즈-스티븐스의 배후라인을 암시하는 것 같죠.
리드는 딱 70년까지만 저지르고 그 다음부터는 관뒀다, 그 다음 일어난 테러는 우리 책임 아니다, 라고 주장하는데, 사실인지는 의문. 아니나다를까, 미첼의 앞서 리스트는 고든이나 스티븐스나, 다들 겉으로만 얌전떨면서 뒤로는 여전히 폭력적인 모략을 꾸미고 있었다는 느낌을 선사하지요.
다른 누구도 아닌 멜라니가 그래 왔던 것처럼.
곧 이날 애슐리의 생일파티는 연방정부의 공세개시에 대응하는 단합회의 성격도 있을 것이고, 작게는 KKK조직의, 크게는 남부 백인-보수 정치집단의 미래전략을 논의하는 자리이기도 하겠어요. 멜라니의 집에서 조지아 수꼴들의, 일종의 전당대회가 열린 셈이죠.
쭉 살펴보면 멜라니는 자신의 행동을 포장하는 데도 뛰어나지만, 정말 감탄스러운 점은, 그 포장에서 나타나는 집요한 일관성이 아닐까 싶은데요. 가령 신영복에 따르면, 교도소에서는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죠.
이유인즉, 거짓말로 한 번 속이는 것은 가능하지만, 교도소처럼 단순하고 좁은 세계에서 쌓인 거짓말들은 결국 서로 모순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멜라니는 애틀랜타라는 좁은 세계의 사람들은 물론, 자신의 이야기를 읽는 독자들도 대부분은 성공적으로 오해시키고 있죠.
멜라니의 비결은 앞서에서 언뜻 드러나듯이, 그리고 판자촌 습격 사건에서 이미 분명했듯이, 자신을 특정한 캐릭터로 상상하고 연기하는 것입니다. 그 창조된 사회적 자아 - 멜라니의 경우라면 현모양처이며 품성인 - 에 몰입할수록, 일관성과 진정성(?)이 나온다고 하겠어요.
물론 착한 여러분은 멜라니처럼 그러면 안 돼요.
애슐리의 생일파티의 정치적 성격을 고려했을 때 당연히 스칼렛이 초대되면 안 되겠지만, 멜라니는 최애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수꼴들과 계속 어울리다 보면 스칼렛 역시 그렇게 되리라고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르죠.
공식적으로는 깜짝파티였기에, 멜라니는 스칼렛을 애슐리에게 보내, 애슐리가 일찍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붙잡아 두라고 합니다. 손님들이 들락날락하는 와중에 스칼렛이 있으면 부적절하겠다고 여겼을 수도 있겠고요.
그 선택은 재앙을 불러오게 됩니다.
스칼렛은 애슐리와 그냥 플라토닉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뿐인데, 재수 없는 타이밍에 인디아와 아치가 그 광경을 본 것(영화에서는 아치 대신 미드 부인). 스칼렛을 지독하게 미워하고 있었던 두 사람은 앞뒤 가리지 않고, 온 애틀랜타에 소문을 퍼뜨려 버리죠.
인디아는 여기서도 멜라니를 공격하는 선택을 하게 되지만, 그것은 멜라니를 싫어해서라기보다는, 비뚤어진 애정이라고나 할까요, 인디아가 꼭 레즈비언이라는 것은 또 아니고, 느와르물의 남성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유사-성애적인 감정입니다.
권력을 다루는 드라마에서 흔히 남자들은 다른 남자의 인정을 얻으려 하고, 그러면서 경쟁자를 질투하며, 인정이 거부되면 복수하려고 들죠. 그런 남자들의 격정은 관객들에게 동성애와 언뜻 비슷하게 느껴지곤 해요.
인디아는 스칼렛을 뻔히 질투하고 있지만, 그 자신은 그것을 열렬히 부정하고,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전애인인 찰스(소설에서는 스튜어트 타알턴) 때문에 질투하는 것처럼 보이기 마련이지만, 가장 큰 문제는 사실 멜라니.
레트가 멜라니를 다급히 방문할 때, 멜라니 옆에 선 영화 속 인디아의 자신만만한 눈빛을 떠올려볼까요. 그리고 멜라니가 비밀을 말해 버리자, 그 자신감을 자신의 세계가 무너지는 놀라움으로 바꾸는 알리시아 레트가 인상적이죠.
집으로 도망쳐 침대에 숨어 있는 스칼렛. 하지만 레트는 스칼렛을 억지로 끌어냅니다.
레트는 스칼렛에게 최대한 섹시하게 단장하고 가라고 요구하죠. 스칼렛은 별 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여기서 레트의 전략을 알 수 있겠어요.
멜라니의 집에서는 애슐리의 생일파티가 일단은 평온하게 열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멜라니는 어려운 결단을 내릴 때가 되었지요. 멜라니는 아마도 태라에서 테러활동에 가담하기 시작한 이래, 또는 어쩌면 맨 처음부터… 아주 먼 길을 왔습니다.
멜라니는 그 무엇보다 열심히 정치를 해 왔고, 그것에 놀라운 재능을 발휘했지요. 물론 그 결과물은 우리 모두(!)의 윤리관에 비추어 볼 때 아주 사악한 것이었지마는요. 이제 멜라니는 폭주하는 남부정치열차에서 내릴 수 없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무책임하고, 아무래도 위험한 일이죠.
멜라니는 획득한 정치적 위상을 유지하기 위해 스칼렛과의 관계를 반드시 끊어야 합니다. 스칼렛은 지금 이 시점에서 명백히 멜라니의 정치적 아킬레스건이니까요. 멜라니가 아무리 스칼렛을 사랑하더라도.
물론 스칼렛으로부터 나오는 자금은 중요하겠지만… 멜라니 정도 위치에 있으면 어떻게든 돈은 생기는 법이겠어요.
어쩌면 멜라니는 스칼렛이 나타나지 않기를, 그래서 자신과 스칼렛과의 인연이 약간 더 싸늘해진 채로 살짝 더 이어지기를 바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스칼렛은 그 얼굴을 드러냅니다.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2012)은 단점과 장점이 카라멜콘과 땅콩처럼 섞여 있죠. 그럼에도 저는 이 영화를 좋아하는데, 이유 하나는 코제트 역의 어맨다 사이프리드가 아주 예쁘게 등장해서.
소설의 멜라니가 애슐리와 레트를 기다리며 읽던 이 레미제라블에서, 젊은 청년 마리우스는 우연히 아름다운 코제트를 목격합니다. 그 다음부터 마리우스는 현실의 인생을 반쯤 팽개치고 코제트의 흔적을 찾아다니죠. 젊은 사람의 열정이랄까, 객기라고 해야 하나, 하여튼 그런 것입니다.
내면이 묘사되는 소설에서는 마리우스의 감정을 따라갈 수 있지만, 영상물에서는 어렵지요. 그전까지의 영상화들에서는 “음 그 장면이군…” 정도의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2012년에 나타난 코제트를 보면 당연히 마리우스는 각본대로 행동해야 할 것 같죠. 얼굴이 곧 개연성이라고나 할까요.
비비안 리도 예쁘죠. 심지어 자신이 안 예쁘다고 주장할 때조차 예쁘죠. 하지만 이 장면에서의 리의 대사는 설득력이 있어요.
분명히 더 예쁠 때가 있으니까요. 그것도 마술처럼 어느 순간 예뻐지곤 하죠.
링컨과 레트, 그리고 멜라니의 자기객관화를 이야기했죠. 비비안 리도 이런 재주를 갖고 있습니다. 배우답게, 어떻게 자신의 신체를 조작하면 관객에게 기획된 인상이 전달될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겁니다.
“이날 밤 그녀는 완벽하게 단장했고, 철저하게 계산된 인상이 모두를 사로잡았다." 라고나 할까요. 가령 영화 <애수Waterloo Bridge>의 장면에서처럼. 관객은 로버트 테일러의 미소를 보며, 자신의 심상을 스크린에서 목격하는 초현실적인 경험을 하게 되지요.
소설에 따르면 스칼렛 역시 이 재능이 있어요. 인디아가 스튜어트 타알턴과 사귄다는 걸 알고 심술이 난 스칼렛은 단번에 스튜어트의 마음을 빼앗습니다. 특히 보조개가 사기적이라고 소개되는데, 바로 비비안 리 그 자체. 이 얼굴에 안 넘어가는 게 이상한 것입니다.
소설에서 스칼렛은 극도의 노잼인간으로 묘사되지만, 비비안 리의 얼굴은 무척 재미있죠.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얼굴만 봐도 재미있습니다. 그것은 늘 예상을 압도하며 다채롭게 변화하니까요.
돌이켜 보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맨 처음 문장부터, 스칼렛의 얼굴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스칼렛 오하라는 아름답지는 않았다..."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누군가가 스칼렛을 목격합니다. 그 누군가는 아주 영민한 사람이어서, 자신의 운명을 살짝 예감하고 있죠.
그이는 그래서 <스칼렛은 안 예쁘다, 안 예쁜 것이다> 라며 자신에게 미리 경고했습니다. 그래! 안 예쁘잖아! 뭐가 그렇게 매력적이래! 전체적으로 불안정한 인상이야. 턱도 날카롭고 하관도 네모낳고 눈은 초록색이고 눈썹은… 이라고 뚫어져라 탐닉하는 시점에서 그런데 이미 망한 것입니다.
결단의 순간에, 멜라니는 분명히 그 첫인상을 떠올렸을 테지요. 애틀랜타의 민선시장 - 어쩌면 조지아의 어둠의 주지사, 정말 어쩌면, 미국 남부의 밤의 대통령 - 이 동성의 매력에 홀려, 그것도 남들이 모두 보고 있는 자리에서, 대사를 그르친다는 것은 언뜻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날의 스칼렛은 완벽하죠. 표정도 완벽합니다. 사실 멜라니는 스칼렛이 애슐리와 뭘 하건 말건 손톱만큼의 관심도 없습니다. 둘의 사이가 가까워질수록 오히려 내심 좋아할지도 몰라요. 오직 멜라니에게 문제가 되는 건, 자신이 정치인으로서의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는 데...
스칼렛의 나쁜 평판이 걸림돌이라는 것뿐. 하지만 멜라니의 객관적인 정신은 스칼렛이 자유롭게 행동하고 양키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을 - 자신의 주관성이 헌신하는 그 정치적 입장과는 상극이더라도 - 심판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이해하고 있지요.
바로 그 멜라니의 심정에 이 얼굴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나요?

“내가 무슨 문제를 일으킨 것 같긴 하지만, 그걸 갖고 날 탓하려는 너는 나빠”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얼굴이 곧 개연성입니다. 또는 그 얼굴에 이미 인과가 내재된 것입니다. 멜라니에게 스칼렛은 정치보다도 살짝 더 중요했습니다. 멜라니는 스칼렛을 쫓아내기는커녕, 사랑하는 스칼렛에게 사람들을 인사시키죠.
이 순간 멜라니의 품성의 제국은 붕괴하기 시작합니다.
다음날 스칼렛은 부부싸움이 끝나자마자(레트는 가출) 멜라니에게 달려갑니다. “멜리, 나 접때 있었던 일 해명해야 되겠는데…”

하지만 멜라니는 이미 잔뜩 화가 나 있지요. 스칼렛에게 화가 난 게 아니라, 세상에.
“아니 얘, 우리... 우리 셋(멜라니, 스칼렛, 애슐리)은 함께 그 오랫동안 이 세상과 싸워 온 병사들이나 마찬가지고, 그런데 그런 하찮은 소문이 우리 사이를 어찌할 거라고 네가 생각하고 있으면, 정말이지 창피할 노릇이 아니겠니!”
멜라니는 오토만 체어 - 그러니까 아래 사진과 같은 의자 - 에 두 발을 올려놓고, 격분을 삭이며 매몰찬 말을 내뱉죠. 멜라니의 본색이, 물론 전부는 아니고 살짝 드러난 것입니다만, 스칼렛은 이런 태도에 깜짝 놀라죠.
(최소) 애틀랜타 지역 조직의 보스인 멜라니는 보스답게 이런 <보스> 자세로 앉아 - 하지만 몸집이 작은 멜라니가 뜨개질거리를 갖고 그러고 있으니, 어쩌면 살짝 우스워도 보이겠지요 - 스칼렛에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정말이지 이제 사람들이 널 흉보는 소리는 지긋지긋해, 달링... 또 참는 것도 한도가 있고, 가만히는 못 있겠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건 사람들이 널 질투해서야. 네가 똑똑하고, 또 성공했으니까. 남자들은 숱하게 실패했지만 너는 성공했으니까.”
“그러니까 자기, 그런 말로 나를 괴롭히지는 마. 지금 네 행실이 여자답지 못하다거나 여성스러움이 결여되었다거나, 그런 얘기는 아니야. 다른 인간들이야 그렇게들 말하지마는. 그 사람들이 너를 이해하려고 들지 않기 때문이고, 여자가 똑똑한 걸 못 참는 사람들 때문이야.
“그런데 아무리 네가 똑똑하고 또 성공했대도, 너랑 애슐리를 두고 그렇게 말할 권리를, 누가 그들에게 그런 권리를 줬단 말이니… 저 하늘의 별들이 보고 있는데!”
"하늘의 별들이 보고 있다Stars above" - 는 말은 언뜻 얼토당토않아 보이죠. 스칼렛이 애슐리와 포옹하고 있었다는 <소문>은 하여튼 팩트에 기초한 것이니까요. 스칼렛 역시 그것에 집착하지만, 멜라니에게 그런 <사실>은 고려할 가치가 전혀 없이 사소한 문제입니다.
이 순간 멜라니는 갑자기 페미니스트가 된 것 같습니다. 그것도 아주 체계적이고 정통적인 페미니스트가. 그전까지는 절대 그런 발언이나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정반대였죠.
멜라니는 현모양처 코스프레를 하며, (정작 본인이 아닌) 다른 여성들이 전통적 규범에 종속되도록 유도하였고, 그것으로 정치적 평판을 얻어 왔어요.
하지만 이날의 멜라니는 여성에게 주어진 그런 성역할을 부정하고 있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여성성 자체를 부정하지는 또 않습니다(중요). 이어 스칼렛이 증명한 지적 능력이나 획득한 사회적 성취를 언급하며, 스칼렛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비난을 모두 대중의 질투 탓으로 돌리죠.
물론 스칼렛은 자본가로서의 분명한 악덕을 지녔죠. 특히 노동자를 착취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하지만 멜라니가 정치기반으로 삼아 온 애틀랜타의 부유한 수꼴 이웃들은 그것에 대체로 무관심하기에, 멜라니의 여성주의적 주장은 언뜻 그들의 반박을 완벽히 잠재울 수 있어 보입니다.
<주인공이 개심하여 옳은 사상을 추구하는 인물이 되었다>는 설정은 독자들에게 더없이 만족스럽겠지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순순히 그래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멜라니가 변명에 아주아주 능한 인물이라는 사실부터 일단 상기해야 하겠어요.
가령 자기 가정을 꾸리기 위해 스칼렛과 다른 집에 살겠다는 멜라니의 변명을 생각해 봅시다. 언뜻 이치에도 맞아 보이고, 자기가 추구하는 <가정적>인 컨셉트에도 정확히 부합하죠. 하지만 진짜 목적은 아무래도 스칼렛의 안전. 멜라니는 언제나 감탄스러울 정도로 이런 식이었죠.
멜라니의 여성주의적 논변 역시 스칼렛을 옹호하기 위해 동원되는 논리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반드시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겠지만, 스칼렛이 다른 입장이었다면, 왠지 멜라니에게서는 다른 핑계가 나왔을 것 같죠. 게다가 멜라니는 보수정치를 끝까지 그만두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여성주의, 또는 여성으로서의 정치성의 문제는 첨예한 동시에 평가하기 대단히 모호한 주제입니다. 이제까지 있었던 사건들을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대체로 체제에 순종적이에요. 그러면서 일탈자들을 미워하죠. 심지어 벨 와틀링과 스칼렛조차 서로를 기회가 닿을 때마다 열심히 씹어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탈에 대한 묘한 선망을 역시 소설은 표현하고 있죠. 가령 점잖은 부인들의 유흥업소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라든가. 그리고 여성들은 다들(!) 약간씩은 규범에서 벗어난 일들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업을 가지려 하죠.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의 그런 엔터프라이즈는 가정, 특히 육아로 축소되기 쉬운데, 미첼은 그것에 열심인 여성을 잘 묘사하지 않습니다. 스칼렛의 엄마인 엘렌이 그것에 가깝긴 한데, 우호적으로 대해지는 캐릭터이지만 정작 본인은 불행하죠.
반면 스칼렛의 아이들(특히 웨이드 해밀턴)은 어머니의 무관심에 따른 성격적 특성을 잘 드러내며, 그런 점은 스칼렛의 그 개성 - 선택적 모성 - 을 에둘러 비판하는 듯하기도 합니다.
물론 소설의 태도는 <애들을 낳아서 잘 키워야지…!> 보다는 <그럴 거면 낳지 말아야…!> 가 아닐까도 싶습니다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선 출산부터가 예기치 못한 재난에 가깝죠. 영화는 그 취지(?)에 따라 스칼렛의 애 둘을 아예 빼버렸습니다.
생각해 보면 애초에 작가인 미첼부터 자녀가 없는 커리어우먼이었죠.
스칼렛은 여성들 중 가장 탈규범적이고 진취적인 사람입니다만, <코르셋>, 즉 꾸밈에 과히 집착하기도 하죠. 그리고 무엇보다 이 사람은 여성혐오자입니다. 권력, 더 단순하게는 힘을 숭상하고 그것을 갖지 못한 사람을 멸시해 왔죠.
그래서인지 스칼렛은 폭력에 상당히 관대한 것을 넘어 거기에서 희열마저 느낍니다.

“(스칼렛이 찰스와 결혼할 거라고 말하자) 스튜어트는 심지어 찰스든, 스칼렛이든, 자기 자신이든, 아니면 셋 다 쏘겠다고 위협까지 했다.”

이것에 대한 스칼렛의 반응은

“최고로 짜릿한 순간이었다.”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애슐리의 생일날 밤 레트와 스칼렛 사이에 있었던 일일 텐데요. 명백한 부부강간이겠습니다. 스칼렛은 이것도 매우 짜릿하게 느끼는데, 소설의 여러 불건전한 짜릿함들 중 가장 티나게 불건전하죠.
짜릿함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피학 또는 폭력에서 짜릿함을 느낄수록 그것은 더 위험한 것입니다. 그 폭력적 행동이 계속되고 심지어 악화될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애초에 그런 개인의 취향은 제도적 판단에서 굳이 고려될 필요가 없는 것들이기도 하고요.
eponine.tistory.com/entry/%EC%A6%9…
소설의 레트는 상당히 난폭하고 위험한 인물이죠. 영화의 레트는 소설에 비해 상당히 얌전한 사람이라 미안하다고 사과는 합니다마는.
멜라니도 약간 비슷합니다. 멜라니는 티나게는 아니지만 마찬가지로, 폭력적이고 위험하고 문제적인 행동들을 하죠.
멜라니는 전통적 여성으로서의 성역할을 언뜻 열심히 수행해 왔어요. 하지만 그것은 철저히 연극적이었고, 사람들을 낚기 위한 유인책에 불과했지요. 목표는 어디까지나 반-미합중국적인 내셔널리즘 운동이었습니다.
전쟁 직후 이웃에 마실을 갔다 돌아오며 멜라니가 한 이야기처럼. 아이를 많이 낳아 잘 기르자는 주장은 언뜻 여성들의 전통적인 역할을 촉구하는 이야기로 들리지만, 다들 그렇게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진정한 목적은 상실된 국가인력의 재충전이라는 딱딱하고, 사무적인 것이었지요.
이렇게 멜라니는, 이제까지, 여성-문제를 철저히 내셔널리즘의 정치에 동원하는 방식으로만 다루어 왔어요. 심지어 성폭력이라는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최근 트위터에 이 사진이 돌았는데, 살해되어 매달린 흑인 앞에서 백인들이 파티를 벌이는 장면이었죠. 사진을 보는 우리는 저 백인놈년들의 인간성은 왜 저 꼬라지인지 당황하기 마련이지만 - 인간은 고금과 젠더와 인종을 가리지 않고 비슷한 일을 벌일 준비가 되어 있지요.
앞서의 흑인들은 범죄 혐의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강도, 강간, 그리고 살인이었다고 하죠. 우리는 학교에서 범죄자들도 저렇게 대우하면 안 된다고 아마 배웠던 것 같습니다만, 내심 범죄자들에게는 그래도 된다고 여기는 한국인들이 적지 않을 테지요.
소설에서도 이 문제가 언급됩니다. 멜라니가 스칼렛의 운전기사로 아치를 붙여 준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당시 애틀랜타의 치안이 불안해서였었죠. KKK단이 강간 혐의로 조사받게 된 흑인을 살해했던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곧 배후에는 멜라니가 있겠어요.
살인의 명분은 재판에서 피해자인 (백인) 여성이 증언대에서의 모욕이나 심지어 명예살인을 당하는 것을 막겠다는 것이었는데, 멜라니의 행동이 늘 그러했듯, 가부장적으로 생각해도, 심지어 여성주의적으로 생각해도 언뜻, 명분이 곧 행동을 정당화시키지는 않더라도, 동기 자체는 그럴듯해 보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보는 스칼렛의 시선은 사건을 혼돈으로 몰아넣죠.

스칼렛 : 얘기 들어 봤는데, 나는 그 흑인이 범죄자인지 잘 모르겠던데?
스칼렛이 꼭 여성혐오자라서 저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소설을 읽어 보면 정말 혐의 자체가 애매합니다. 반반도 아니고 아닐 가능성이 훨씬 높은 쪽으로 애매하죠. 곧 흑인의 범죄라든가, 여성의 안전이나 명예 같은 것은 린치의 핑계입니다.
흑인에게 사적 처벌을 가하여 백인-집단의 단합을 꾀하고, 다른 흑인들을 침묵시켜 정치적으로 거세하려는 시도는 미국, 특히 미국 남부의 오랜 전통이지요. 앞서와 같은 사진이 유명한 것은 그런 장면이 엽서로 제작되어 널리 팔렸기 때문입니다.
널리 팔렸? 엽서? 뭐라고? 싶으시겠지만 이런 흑인에 대한 사적 처벌, 즉 린칭은 미국에서 상업화된 이벤트에 가까울 정도였습니다.

“신문이 대표적인 예인데 린칭에 대한 보도기사는 물론, 언제 어디서 린칭 행사가 있을 것이니 많이 와서 구경하라는 광고도 적지 않았다...”
“실제로 큰 행사가 벌어지는 경우에는 대대적 광고는 물론 멀리서 구경 오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특별열차가 운행되기도 했다.”

위 인용 부분의 출처는 아래 링크. 미국 흑인에 대한 린치의 역사를 제법 자세히 소개하는 글입니다. 단, 잔인한 사진이 많으니 <유의>.

suyunomo.jinbo.net/?p=8802
여담이지만 린치 사건에서는 피해자의 특정 부위를 훼손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던 것인데, 이것은 남부 백인들의, 흑인에 대한 묘한 성적 충동을 암시하죠.
어쩌면 피부가 까맣고 육체파라고 묘사되는 레트 버틀러는 이런 충동의 어떤 무의식, 또는 알레고리일지도요. 제목을 붙이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나타난 흑인에 대한 성적 열망 - 레트 버틀러를 중심으로” 쯤이나 되겠지만... 증거가 분명한 이야기만으로도 부족하기에 이쯤에서 생략.
여튼 인종정치의 입장에서, 흑인의 범죄는 최대한 강조하고 부풀려야 하겠죠. 범죄가 없다면 만들어야 하겠어요. 그리고 나서 마음에 안 드는 인간을 그 <범죄자>와 엮으면 되겠죠. 일단 하나만 엮는 데 성공하면, 그 다음부터 줄줄이 엮을 수 있겠죠.
조나스 윌커슨 암살사건이 전형적이죠. 흑인의 추행사건이 있었습니다. 이웃이었던 토니 폰테인은 그것을 흑인민권운동을 하던 조나스 윌커슨의 탓으로 돌리죠. 소설에서 은근히, 정말 은근히 암시되기로는 아마도 멜라니의 영향. 곧 1차적 동기는 윌커슨에 대한, 멜라니의 개인적인 원한이겠죠.
한국인들이 해방공간에서 저질렀던 테러행각도 비슷한 양상을 보였습니다. 사회주의자를 범죄자로 몰고, 그 다음에는 빨갱이들을 모두 범죄자로 몰고, 그 다음에는 상대편을, 나중에는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을 빨갱이로 몰았죠. 맨 마지막이 가장 맛있는 부분입니다.
반대편에서도 김일성이 자기에게 반대하는 사람을 미제 간첩으로 몰고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으면 극우분들이 억울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군요. 이렇게 어떤 조건만 거의 동일하게 갖춰지면, 세상사란 비슷비슷하게 되는 것이겠어요.
물론 현대 한국인들도 1860년대의 미국인들이나 1940년대의 한국인들처럼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유머> 유저들을 봅시다.
그들은 가령 다음과 같은 사람들을 사냥했습니다 : 메갈리아에서 다투고 나온 사람이 만든 티셔츠를 입은 사람의 계약해지를 비판한 사람의 트윗에 마음을 찍은 사람과 친분이 있었던 사람이 소속된 <동인 모임 참가자들>을.

김두한도 놀랄 만한 연좌제죠.
오늘의 유머가 원래부터 그냥 인간쓰레기 집합소였다면 차라리 우리의 마음은 편할 것입니다. 문제는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정상, 혹은 평균의 범위 안에 있었다는 것이죠. 준비만 되면 여전히, 누구든, 서북청년단원이 될 수 있다는 좋은 증거입니다.
심지어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분들 중에서도 일부는 비슷한 행동을 하죠. 그들은 성소수자들을 공격합니다. 그 TERF(트랜스젠더를 배제하는 래디컬 페미니스트)의 권력으로 가능한 것은 사이버불링 정도입니다만, 그걸로도 충분히 사람을 죽일 수 있지요.
이렇게 멜라니는 어떤 전형을 보여 줍니다. 집단 안과 집단 밖을 갈라치고, 사람이 빠지기 쉬운 감정들 - 국가주의이건, 가부장제의 관습이건, 연극적인 분노건, 심리적 우월감이건, 또는 성적 충동이건, 그리고 무엇보다, 공동체에의 갈구 - 로 구성원들을 동원해서, 정치적 우군으로 삼는 것이죠.
이것이 소설의 어떤 리얼리즘, 또는 모르는 사이에 나온 고백, 어쩌면 폭로일 것입니다. 심지어 토니 폰테인 같은 위인들도 자세히 살펴보면... 아, 이거구나! 싶죠. 단순하며, 잘 흥분하고, 자기확신이 강한 사람. 바로 이런 사람이 이용당하는 것입니다.
멜라니가 정치적 목적을 위해 동원했던 수단은, 특히 폭력은, 그런데 소설에서 아이러니를 낳습니다.
흑인에 대한 앞서의 린치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볼까요. 격발된 폭력으로 인해 당국이 격분했으며, 흑인들도 반격을 고려하게 되었습니다. 수꼴 백인들은 보복이 두려웠던 나머지 집안에 콕 박혀 있었죠. 그런 것들이야 멜라니가 예상했고 또 감수했을 터입니다.
그런데 멜라니의 스칼렛이, 가장 사랑하는 스칼렛이 돈…!!!! 이라고 외치며 밖으로, 멜라니가 창조한 위험 속으로 뛰쳐나가려고 하지요. 이것도 어쩔 수 없는 게… 아니죠!
멜라니는 스칼렛의 행동에 당황하며, 스칼렛에게 애원하며 말합니다.

“다 내 잘못이야...” 그리고,

“네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난 죽어버릴 거야/I should die if anything happened to you”.

뒷문장은 중의적입니다. “...난 죽어 마땅해”로도 읽히죠. 그리고 그쪽이 본심에 더 가까울 것 같지요.
여기서 멜라니는 분명 죄책감을 느끼고 있어요. 물론 자기가 한 일이 나쁘다고 생각해서라기보다는, 결과적으로 <스칼렛>을 위험하게 만든 것에 대한 자책일 뿐이지 싶죠.
하지만 멜라니의 목적을 순전히, 최애에 대한 뻔뻔할 정도의 편애라고 가정하더라도, 결국 꺼내든 카드는 핑계일지언정 어쨌든 여성주의입니다. 이것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기획된 페미니즘 도서까지는 아닐지라도, 읽기에 따라 페미괴작으로 읽을 수 있는 작품 정도로는 만들어 줍니다.
멜라니가 전-여친인 캐슬린과 이별하는 순간에 갑자기 꺼내들었던 대안공동체처럼. 그것은 남성도, 국가가 요구하는 재생산도 없는, 여성들의 공동체였어요.
적어도 우리는 국가주의 속에 숨겨진, 여성들의 삶에 대한 위협을 소설에서 발견할 수 있지요. 그것은 결국 여성들에게 요청되는 자매애와 충돌합니다. 동성애적 세계와 충돌함은 물론이고요.
멜라니는 캐슬린 앞에서는 물러섰었지만, 이번에는 물러설 생각이 없습니다.

“멜라니는 말을 멈추었고, 갑자기 그녀의 얼굴에서는 분노가 가시고 슬픔이 차올랐다. 멜라니는 조지아인들에게 유별한, 친지(clan. 중의적입니다)들에 대한 열정적인 충실 그 자체였고,"
"가족들(이것도 당연히 쿠클럭스클랜 멤버들을 아울러 의미하겠어요)의 반목을 생각하면 그녀의 가슴은 찢어졌다. 그녀는 잠시 흔들렸다. 하지만 스칼렛이 무엇보다 소중했고, 그녀의 마음에 가장 먼저 다가옴이 스칼렛이었으니, 그녀는 성실하게 말을 이었다."
스칼렛 앞에서 <나는 무조건 네 편이야>라고 선언한 즉시 멜라니는 행동에 들어가죠. 아니, 이미 들어가 있어요. 멜라니는 스칼렛을 비방했던 자들부터 손보기 시작합니다.
멜라니는 아치를 은혜도 모르는 범죄자라며 격렬히 비난하죠. 그리고 멜라니에 따르면 아치는 애틀랜타를 그 시점에서 이미 떠나 있습니다. 떠나서 어디로 갔을까요. 아마도… 그렇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RIP Archie(???~1871)
멜라니는 그리고 인디아를 허위사실유포자로 몰아 조지려고 들죠.
멜라니는 말합니다.

“인디아는 늘 질투하고 있었어... 내가 널 제일 사랑했으니까.”

아니 이 사람, 이제 대놓고… 아니, 그 이전에, 멜라니 이 사람, 인디아의 심정을 다 알고도 이러는 거잖아요?

멜라니 씨 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 무서운 사람이다
멜라니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정보를 스칼렛은 이제 세번째로 들었습니다. 세 명이 모이면 호랑이도 만든다던데요. 심지어 이번에는 본인에게서죠.

첫번째는 애슐리에게서, 두번째는 전날 밤 레트에게서.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해보는 레트
하나도 모르면서 괜히 아는 척해보는 스칼렛
이쯤 되면 스칼렛은 언뜻, 눈치없기도 너무 작위적으로 없는 캐릭터가 아닌가도 싶죠.
하지만 스칼렛만 모르는 게 아니었죠. 애틀랜타의 이웃들은 물론, 독자였던 우리도 상당수는(물론 저 역시!) 모르고 있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런데 인디아는 아치처럼 순순히 고꾸라지지 않지요. 그것은 단지 질투나, 배신감이 낳은 열정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일단 아치와는 달리, 인디아는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지요. 소설은 남부 상류 사회의 내부 카르텔을 가끔 묘사합니다. 가령 앞서 나왔듯이 덜 부유한 백인들을 <백인 쓰레기>로 부른다거나. 아치 같은 최하류층은 아예 사람취급도 못 받는 것 같죠.
또한 인디아는 누가 봐도 거짓말을 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인디아는 고리타분하고 답답한 위인이었지만, 그렇기에 인디아의 말에는 늘 사실성이 있었죠. 덮어놓고 멜라니의 편을 드는 사람을 제외하면, 사람들은 인디아의 말이 사실이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멜라니는 사람들이 스칼렛을 비난하지 못하게 은근히 위협하고, 그걸 넘어 사람들에게 선택을 강요합니다. 심지어 멜라니는 직접 스칼렛을 억지로 끌고 사람들과 만나고 다니죠.
이 결과 애틀랜타는 인디아를 편드는 반과 스칼렛 - 사실은 멜라니 - 을 편드는 반으로 갈리고, 사람들은 서로 대립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정치인 멜라니의 기본을 흔드는 것.
멜라니의 가장 뚜렷한 정치적 강점은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멜라니의 행정적 유능함 역시 멜라니가 일처리를 잘 하고 똑똑해서이기도 했겠지만, 사람들이 잘 따른다는 점이 상당히 중요했죠.
그 반대로 사람들이 다투고 반목하기 시작하면 될 일도 안 되는 것이고요. 남부연맹부활 같은 황당한 프로젝트는 어림도 없겠죠. 그래서 멜라니는 철저히 사람들간의 갈등을 해소하는, 또는 은폐하는 방식으로 일을 처리해 왔죠.
하지만 멜라니는 갑자기 자신의 강점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만든 정치적 기반도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듯 행세하고 있죠. 오직 스칼렛을 위해서.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스칼렛을 두둔하는 건 좋습니다. 그런데 굳이 이렇게까지 격하게 옹호할 필요가 있을까요? 멜라니는 어째서 이러는 걸까요?
멜라니가 스칼렛을 생일파티에서 내쫓지 않은 것은 뭐 그렇다칩시다. 굳이 사람들에게 인사를 시키고, 심지어 스칼렛으로 하여금 손님을 맞게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그날 있었던 수꼴들의 대회합은, 멜라니가 심혈을 기울여 준비했던 행사는 보나마나 멸망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최애가 까이는 걸 보면 (이유불문하고) 누구나 열받기 마련이긴 하죠. 하지만 소설에서 관찰되는 가장 큰 원인이란 살짝 엉뚱해 보이는 데 있죠. 바로 스칼렛과 애틀랜타 이웃들과의 사이의 인간관계입니다.
공동체는 왜 중요했나요? 감정적 교류. 그 이전의 소속감. 그리고 마르크스가 말하는, 사회적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비로소 얻어지는 인간의 가치. 이런 이유들을 소설에서 발견할 수 있었죠.
아닌게아니라 마침 레트와 사이가 틀어진 다음, 스칼렛은 외로움을 타기 시작하죠. 그리고 멜라니야말로 사교 그 자체인 캐릭터입니다. 사교적인 삶을 살며, 사교의 중요성을 알며, 불건전할 정도로 그런 것들에 재능이 있죠.
그런데 왜 하필 애틀랜타 이웃들과의, 그러니까 백인-수꼴들과의 공동체여야 할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공동체가 지닌 어떤 효과입니다. 특히 멜라니의 정치는 이것을 심화시켰다고 봐야겠는데요 - 바로 구성원의 안전이죠.
다시 조나스 윌커슨 암살사건을 돌이켜 봅시다. 조나스 윌커슨은 왜 암살당했죠? 몇 가지 원인이 있었습니다. 열성적이었던 공화당원(스캘러왝)으로 많은 사람들과 정치적으로 대립했다는 점. 흑인과 식사하는 등 기존의 관습적 틀을 깼다는 점.
흑인들의 복지를 지원하며 부유층에게 세금, 곧 경제적 손실을 강요했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사적 원한을 샀다는 점. 또한 부수적으로 술집 같은 공개적이고 혼잡한 장소에 혼자 있음으로써 자신의 신변에 위협을 초래했다는 점. 이런 것들이 있겠죠.
기록을 보면 <해방노예국> 직원들을 목표로 한 테러가 조지아에서만 200건 넘게 있었습니다. 조나스 윌커슨 같은 사람들은 정말 목숨을 걸고 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freedmensbureau.com/georgia/index.…
조나스 윌커슨이 왜 암살당했는지를 알았으니 이제, 우리는 그 <왜>를 뒤집어야 합니다. 이 소설 안에서는 이것이 조나스 윌커슨 살인사건 자체보다도 더 핵심적인 미스테리일 테죠 -

왜 어떤 스캘러왝은 테러당하지 않았을까요?
레트를 봅시다. 레트는 객관적으로 의인은 아니지만, 윌커슨과 겹치는 점이 상당히 많죠. 남부의 배신자로 사람들과 정치적으로 대립했으며, 관습에 비추어 불건전한 생활을 하고 있었고, 투기꾼으로 부당한 이익을 챙겼죠. 소설의 레트는 분명히 위험합니다.
레트의 행동을 보면 일신의 안전을 추구하는 자세가 살짝살짝 엿보이죠.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안전입니다.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등의 난폭한 행동들조차 그렇죠. 마치 맹견을 키우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그런 위협적인 자세는 테러대상의 선정에서 자신을 후순위로 밀어 놓게 될 것입니다.
군경과 친하게 지내는 점도 역시 그렇죠. 전적으로 안전 때문만은 아니고 사업상의 목적도 있었을 것이나, 공권력과 줄이 닿아 있으면 분명히 덜 위험하죠. 테러범들도 성공 가능성과 자신의 안전을 가늠하니까요.
멜라니가 린치로 애틀랜타를 뒤집어 놓았을 당시엔 심지어 그 어지간한 레트도 견딜 수 없었던 모양인지, 조지아를 떠나 한참을 돌아오지 않고 있었죠.
한국의 해방공간을 봐도 역시 그런 것입니다. 정치적 목적이나 정치를 빙자한 원한으로 상대방을 마구 죽이던 시대에는 자신도 무력을 동원하거나 무력에 줄이 닿아 있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었지요.
최소한 기를 쓰고 조심 또 조심하며 지내야지만 용케 암살당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목숨을 끝까지 유지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죠.
그렇습니다. 이 소설에서는 극우 테러의 타겟이 되기 아주 쉬운데, 최소한 그 집단의 어그로를 끌 만한 행동을 하는데, 그에 대한 대비는 거의 않는 사람이 하나 있죠.
스칼렛에게는 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걸까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애틀랜타 이웃들이 스칼렛에게 폭력까지…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하지만 이 점을 살펴봅시다 - 테러의 목적입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의 정치적 의사표현을 제압하는 것에 있죠. 억압이 목적이라면, 살인이나 폭탄 말고도 다양한 방법이 있겠어요.
암살이나 린치로 상대의 입을 <물리적으로> 다물게 할 수도 있지만, 그런 것들로 본보기만 잘 보여 왔다면, 단지 위협만으로도 충분히 위압이 가능하겠습니다. 나중에는 누군가를 점찍어 놓기만 해도 사람들이 기피하기 시작할 테고, 그럼 그 사람의 목소리는 사회 안에서 고립되는 것이죠.
가령 한국의 군사정권 시절, 빨갱이라는 낙인은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의 사회적 활동을 충분히 제약할 수 있었죠. 이런 마일드한 수단이 더 광범하고, 더 일반적이며, 더 자주 쓰여집니다. 물론 고문이나 사법살인이 여차하면 일어날 준비가 되어 있었기에, 그런 공포가 잘 먹혔던 것이겠지만요.
즉 유혈사태는 설령 스칼렛에게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그것보다 더 낮은 수준의 위압은 이미 빈번하게 시도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스칼렛은 이를테면, 장사에 대한 위협을 이미 여러 차례 받았어야만 했습니다.
제재소를 처분하라거나, 애틀랜타를 아예 떠나라거나 하는 압력 정도는 극우폭력이 일상화된 애틀랜타에서는 아주 얌전한 축에 속하겠지요. 최소한 양키들과 거래를 하지 마라, 가만안둔다, 라는 협박투서 정도는 수시로 스칼렛에게 날아왔어야 했어요.
그런데 아주 사소한 위협조차 전혀 없었죠. 왜 극우의 총구는 스칼렛에게서만 고개를 돌리고 있을까요?

어째서일까요?
답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멜라니가 스칼렛의 옆집에 살고 있어서죠.
생각해 보면, 누가 봐도 위험인물인 아치를 멜라니가 굳이 스칼렛의 운전기사로 붙여 준 것도 그런 의미였던 것입니다. 건드리지 마라,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 라는 뜻이죠. 그리고 실제로 건드리는 놈들이 생기자마자 온갖 무리수를 뒤집어쓰고 다 죽여버렸고 말이죠.
멜라니에게 스칼렛은 자신이 만든 폭력의 세계 속 작은 정원이었던 셈입니다.
<옆집 친한 아저씨가 알고 보니 해결사> 같은 이야기는 흔하고 경우에 따라 뭔가 로맨틱하죠. 그런데 이미 눈치채셨겠다시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의 폭력의 세계는 정원을 부수려 하고 있죠. 뛰어나죠. 그리고 더 뛰어난 점은 폭력의 세계에 대해 주인공에게 책임이 지워진다는 점이겠어요.
인디아의 이 말은 스칼렛에 대한 보복이 아주 KKK적인 입장임을 드러냅니다. 여러모로 사건들을 이어 주는 고리 같은 역할을 하는 발언이죠.
생각하기에 따라, 스칼렛을 습격한 언뜻 <그냥 무산자>들도 (멜라니와 대립하던, 또는 인디아처럼 과잉 충성하던) KKK 가담자였다고 상상해 볼 수도 있겠지요. 물론 이것은 검증할 수 없는 이야기이고, 이쯤하도록 하겠어요.
멜라니가 없었어도 조지아와 애틀랜타에 KKK는 있었겠지만, 이렇게 심각하게 테러활동을 벌이지는 못했겠지요. 실제 역사에서도 이 동네 KKK가 전 남부를 통틀어 손꼽힐 정도로 거대하고, 잘 조직되고 열성적으로 활동했다고 합니다.
메갈리아 사건, 일명 티셔츠게이트를 다시 돌이켜 볼까요. 말씀드렸듯 이것은 21세기의 작은 1940년대를 드러냈는데요. 특기할 만한 점은, 영역마다 <서북청년단>의 행동의 상한선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게임계에서는 메갈이라는 낙인으로 피해자의 직업수행을 직접적이고 광범위하게 침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웹툰계에서는 이것이 한정적이었죠. 그리고 사회의 다른 영역에서는 그 선까지 이르지 못했습니다. 영역에 따라서는 낙인찍기의 시도가 오히려 역으로 조롱의 대상이 되곤 했죠.
곧 어떤 위협적 행동이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으면, 그것의 수단으로서의 가치는 상실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반대로 어느 구역에서 용인되면, 그 행동은 빈번하게 되겠죠. 곧 스칼렛이 위험하게 된 것은 여기서도 멜라니의 탓입니다.
스칼렛은 이런 사정을 모릅니다. 스칼렛부터 모르기 때문에 독자들도 모르게 되죠. 스칼렛은 단순히 멜라니가 자신의 인간관계를 위해 애써 주는 줄 알아요. 하지만 그 속에는 안전이 숨겨져 있죠.
프레이저의 <황금가지>(19장, 타부 행동)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어요. 같이 밥을 먹은 사람들은 서로에게 (당분간은) 안전한데, 그 이유란 공동의 음식을 먹었다는 사실이 서로의 몸을 (주술적으로) 이어주어서입니다. 일단 상대에게 해를 끼치면 자신도 죽게 되는 거죠.
물론 주술은 사실 그 자체가 아닙니다만, 인간은 주술적으로 사고하기에, 인간에게 주술은 이를테면 제2의 자연이 됩니다. 스칼렛과 다과를 나눈 사람은 스칼렛에게 해를 끼치면 안 된다는, 적어도 무의식적인 믿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겠죠.
이렇듯 자신을 위해 멜라니가 정치적 명운을 걸었다는 사실은 물론, 정치적 명운 같은 게 있는지도 애초에 모르지만, 멜라니의 이런 열정적인 헌신에 스칼렛은 어쨌든 감동하게 되죠.
애슐리의 생일파티가 있은 지 3달이 지났습니다. 딸을 데리고 떠난 레트는 소식도 없죠. 그러던 어느 날 스칼렛은 멜라니의 집을 방문하는데, 멜라니가 또 특이한 행동을 하고 있어요.
아이들이 나무칼을 들고, 소파로 함성을 지르며 돌진하죠. 소파 뒤에서 이어 산발을 한 머리가 드러납니다. 그 머리의 주인인 멜라니는 설명합니다 :

“게티스버그야. 내 쪽이 양키인데, 패배하고 말았어. (자기 아들을 가리키며) 얘가 리 장군이고, (조카의 어깨를 짚으며) 이쪽이 피켓 장군이야.
스칼렛은 <전쟁놀이라니, 멜라니 얘는 애들이랑 이런 것까지 하고 놀아 주네, 흑흑흑…> 이라고 생각하고 끝. 하지만 우리 독자들은 멜라니의 이 모의전을 보며 다른 반응을 보여야 하겠죠.

“이 인간이 이제 애들까지…!”
또는, “드디어 반란인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상징이나 비유 같은 수단을 거의 쓰지 않습니다. 드물게 나올 때마다 스칼렛이 화를 내면서 흩어 버리죠. 하지만 쭉 보아 오셨다시피 멜라니의 경우만은 이것이 아주 예외인데, 이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쟁놀이는 한편으로 멜라니의, 이제 여러분이 익히 아는 폭력적인 지향을 드러내지요. 그리고 “나는 양키들이고 나는 패배하고 말았어”라는 대사는 바로 그 당시의 조지아의 정치적 상황을 가리킵니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으실 텐데, 여기서 그 역사를 살펴봅시다.
소설을 읽다 보면, 양키 세력의 축출과 조지아 민주당의 정치적 승리는 이 시점보다 나중이고, 또 다소 급작스럽습니다. 함석헌의 표현을 살짝 빌리자면, 그것은 어느 날 도둑같이 찾아온 듯싶죠(스포일러인가요?). 그런데 이것은 스칼렛이 현실정치가 돌아가는 것에 그다지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레트가 1868년이나 69년쯤에 대략 이렇게 말하는 부분이 소설에 있죠. <이거 조지아 공화당 폭망인데… 민주당으로 갈아타야 되겠는데…> 소설의 구성 때문에 레트의 발언은 대단한 선견지명으로 보이겠습니다만, 이것은 그 시점에서 어느 정도 예측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멜라니의 조지아는 전후 독특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사실 남부 어디서나 결론적으로는 민주당이 주의회를 재장악하게 되었지마는요. 늦어도 1877년경에는, 그러니까 대략 10년만이었죠. 그런데 조지아에서는 이것이 굉장히 빨랐습니다. 1869년의 레트의 눈에 명백해 보일 정도로.
앞서 KKK분자인 존 리드의 정치깡패질을 이야기했죠. 조지아 정치깡패들은 대단히 성공적으로 활동하여, 1868년과 1870년의 선거에서 (당시의 수꼴정당이던) 민주당이 승리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공화당 지지자들이 제대로 투표를 못했기 때문이었죠.
혹시, 이 불법분자들만 때려잡으면, 그 다음부터는 공정한 선거가 이루어질 수 있지 않았을까요? 실제로 연방정부에서 KKK를 처리하기 시작할 테고 말이죠. 그렇게만 되면 흑인들과 공화당원들이 승리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지 않게 선출될 테고, 수꼴들의 독주를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문제는 이것입니다 : 온갖 부정으로 입법기관을 장악한 양반들이... 그 다음부터는 순순히 민주적인 게임을 할... 리가 없지요!
가령 개리멘더링, 곧 선거구역의 편파적 획정은 아주 <합법적>이고 불공정한 게임 방식이죠. 이것은 오늘날의 미국도 정말 어지간한 수준입니다.
현재의 노스캐롤라이나 선거구는 이웃인 조지아보다 한술 더 뜨는데, 아래 트윗의 지도를 보십시오.
농번기에 선거를 치러서, 농업노동자가 대다수였던 흑인들의 투표를 막는 수법도 있었고요. 왠지 한국사의 추억이 떠오르는 장면들이죠.
그리고 이승만이나 박정희조차 하지 않았던 기가 막힌 짓들이 또 미국 남부에서는 벌어졌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투표세(또는 인두세poll tax)입니다. 흑인들이 1달러 반에서 2달러를 내야만 투표를 할 수 있게 만들었던 것이죠.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돈이었습니다.
또한 사리판별능력이 있는 사람만 투표해야 한다는 엘리트주의적 명분을 근거로, 투표를 하려는 유권자들은 시험을 봐야 했어요. 그런데 백인용 시험과 흑인용 시험이 또 달랐습니다. 물론 흑인들 쪽이 훨씬 어려웠죠.
가령 아래 앨라배마의 시험문제를 보십시오. 맞혀야 투표를 할 수 있습니다.

"B"
1. 대통령은 탄핵될 수 있는가?
2. Representative의 적절한 정의를 고르라.
3. FBI는 무엇의 약자인가?
4. 앨라배마 내 카운티들은 투표로 주류판매를 결정할 수 있는가?

C는 보다 보면 발이라는 소리밖에 안 나오죠.
이런 합법적인 부정선거로 인해, 조지아에서는 사실상 일당독재가 가능해진 것입니다.
1872년경이 되면 공권력까지 슬슬 수꼴들 쪽으로 넘어오기 시작합니다. 이 때부터 흑인들에 대한 린치에 경찰들이 오히려 앞장을 서게 되지요. 그래서일까, 기록을 보면 당시 조지아 백인들 사이에서 <아주 급작스러운 군사적 열정>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멜라니의 전쟁놀이는 바로 이 사실을 정확히 반영하죠. 멜라니의 말 그대로, 게티스버그 같은 결정적인 싸움에서 양키들이 패배했던 것입니다.
<Black Politicians & Reconstruction in Georgia>에 따르면, 조지아에서 이렇게 신속하고 급작스러운 반전이 일어났던 가장 큰 이유는 조직력이었습니다. 조지아의 공화당원들과 흑인 지도자들은 다소 미숙했던 반면, 수꼴들은 효율적으로 세력을 규합했던 것이죠.
특히 KKK라는 테러집단을 조직하는 데 조지아에서는 유독 재주가 발휘되었던 것이고요.
실제 역사에서 어떤 인물이 얼마나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소설에서는 - 그렇습니다. 멜라니가 제일의 공헌자죠. 패전 직후 눈물을 글썽이던 갓 20대의 여성이, 단 7년만에 설욕에 성공한 것입니다. 아주 가지각색의 사악한 수단을 동원해서 말이죠. 결과도 매우 사악합니다.
멜라니라는 캐릭터의 아주 인상적인 점은 바로 여기에 있겠습니다. 사람들이 미덕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집요하게 쌓아 거대한 (정치적) 악을 구현했다는 것이죠.
보시다시피 멜라니는 이렇게 정치적 정점에 서 있지만 - 하강의 단서들이 드러나고 있죠. 이제 수꼴들은 불법적으로 불공정한 게임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합법적으로 불공정한 게임을 하면 되니까요. 멜라니의 비선조직은 덜 필요해지고, 대신 의회에서의 남성들의 협잡질이 정치를 좌우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로 스칼렛 때문에, 멜라니의 <품성>적 기반이 천천히 무너지고 있어요.
곧 멜라니의 가장 인상적인 점은 이것입니다 - 사람들이 악덕이라고 부르는 것을 갖는데, 그러니까 여색을, 다른 여자의 얼굴을 심히 밝히는데, 누구나 그것을 악덕이라고 하는데, 그것 안에 사람들이 생각하는 어떤 올바른 점이, 치명적인 정의가 있지요.
애슐리의 생일날, 수꼴들은 KKK단의 향후 방향을 놓고 토의할 계획이었을 겁니다. 연방정부와 수정헌법의 통제를 받는 것이 수꼴들 입장에서는 여전히 싫겠지만, 꿀맛같은 정치적 권력을 어느 정도 되찾은 시점에서 이미 만족하는 위인들이 많아졌겠지요.
반면 멜라니의 입장을 추측해 봅시다. 멜라니는 급진적이고 과격한 성향이죠. 그리고 정치인은 자신의 권력을 상실하는 방향으로는 행동하지 않으려 들겠고요.
실제 역사에서도 역시나 조지아 북부, 즉 애틀랜타 주변에서는 KKK의 폭력이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스칼렛이 파티에 난입하지만 않았으면, 다른 우익들도 멜라니의 < 품 성 >적인 설득에 아무래도 더 가깝게 움직였겠죠.
이 당시의 미국민주당도 충분히 나쁘겠지만, KKK는 정말 심각하죠. 대한민국의 어지간한 극우분들이라도 민주당보다 KKK가 낫다고 이야기하진 않으실 겁니다. 점잖은 자리에서 남 이야기를 할 때는 누구나 합리적이죠.
합… 리적보
수….
그렇습니다. 레트가 바로 정확히 그 멜라니의 반대편에 서게 됩니다. 품성정치의 신예 레트 버틀러는 영화에서는 런던에 간 것으로 나오지만, 소설에서는 남부를 돌아다니며 보니를 데리고 정치질을 하고 있었죠.
레트는 정치모임에까지 어린 딸를 꾸역꾸역 데려갑니다. 왜 하필 보니를 끌어들이는 걸까요? 표면적 이유는 이렇습니다 : 자신의 정치적 공헌으로 인해, 아이가 장래에 사회에서 인정을 받으리라는 것이죠. 하지만 결정적인 목적은 아마도 그것을 뒤집어 놓은 데에 있습니다.
회합에 보니를 데려간 레트를 한 번 상상해 볼까요!

- 허허허 선생님은 웬 따님을 데리고?
- 공화당을 타도하는 이 역사적 현장에 우리 작은 공주님이 있었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기억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 아이의 장래는 그럼 블링블링
- 허허허 그렇지요 허허허 그래, 안녕하신가요 우리...
- 귀염둥이 아가씨, 이름이 뭘까요?
- 보니 블루 버틀러예요^^
- ….!!!
- 애국자다…! 이분은 애국자다…!
- 오직 진정한 남부인만이 아이에게 이런 이름을 지어 줄 수 있지.
레트가 그리고 소설에서 또 뭐라고 하는지 보십시다.

“그거 알아? 사람들이 보니에게 무엇을 가장 사랑하냐고 물으면, ‘아빠랑 민듀댱’이라고 답하고, 무엇을 가장 미워하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지 : ‘스캘리왝들’”

맙소사.
보니 블루 버틀러는 레트가 휘두르는 깃발이었던 것입니다. <멋진 푸른 기>란 이름 그대로죠.
물론 진정성 넘치는 남부인은 레트가 아니라 멜라니였으니, 레트는 그 애국감성의 정수를 도둑질한 셈이죠. 그리고 이제 레트의 무기가 된, <품 성> 역시 멜라니의 비법을 카피했던 것이었고요.
링컨에게서 배운 조직운영으로 연방에 맞서던 멜라니 앞에, 다시 적수가 나타난 것입니다.
레트는 다시 멜라니의 아성인 애틀랜타로 귀환합니다. 그런데 돌아온 레트와 다투던 와중에, 스칼렛은 계단에서 제풀에 넘어지죠. 크게 다친 스칼렛은 결국 유산을 하게 됩니다.
갈비뼈까지 부러진 스칼렛은 생애 처음으로 앓아눕지요.
영화에서 스칼렛은 침대에 누워 헛소리를 하며 레트를 찾아 부르죠. 그러나 소설에서 스칼렛이 부르는 이름은 <멜라니>입니다.
안됐군요, 버틀러 선장님. 사실 제가 공식이에요.
멜라니 : 자, 따라해보세요. 멜라니x스칼렛
레트 : .....
병상에서 스칼렛이 레트를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레트가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스칼렛은 레트를 부르는 걸 포기해 버리죠. 스칼렛이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결국 멜라니가 된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스칼렛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단지 알았으니, 그녀가 한때 어머니의 인정을, 어쨌거나 딸이 예의바르고, 상냥하고, 순수한 마음을 가졌다고 여겨 주기를 갈구했던 것처럼, 이제 멜라니에게 인정받기를 그녀가 열정적으로 갈망한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오직 알고 있었으니, 곧 세상이 어떻게 생각하건, 애슐리나 레트가 어떻게 그녀를 생각하건 그녀에겐 알 바 아니었지만, 멜라니가 그녀를 생각함만은 그전과 달라지면 안 되었던 것이다.”

라는 구절이 애슐리의 생일 다음날(소설에서는 며칠 후) 스칼렛과 멜라니의 대화 장면에서 나왔죠.
스칼렛 : 사람들이 멜라니가 나한테 자매?애?였던가? 뭐 그런 게 있다고 그러더라고. 그런데 내가 요새 생각해 보니까,
레트 : 보니까?
스칼렛 : 그거랑은 약간 다른 거 말야. 그러니까 그… 무슨 성애였는데 그게....
레트 : ...
스칼렛 : 그래, 모성애.
레트 :
스칼렛 : 하긴 내가 여간 귀여워야지!
스칼렛 본인은 이게 자매애인가? 모성애 같은 건가? 라며 갈피를 못 잡고 있지만, 어쨌든 멜라니의 애정전선은 착착 전진하고 있죠.
그리고 레트의 군세는 다른 방향에서 진격하는 중입니다.
한 달이 지나, 스칼렛은 요양차 태라로 떠납니다. 그 즉시 레트는 멜라니를 방문하죠. 독자들은 발견할 수 있으니, 어느 새인가 멜라니와 레트는 아주 어색한 사이가 되어 있습니다.
멜라니와 레트는 적어도 전쟁 당시에는 허물없이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어요.

“레트는 멜라니에게 (메리벨 메리웨더의 웨딩드레스가 없다는 소식을 듣자) 잉글랜드로부터 빛나는 백색 새틴과 레이스 면사포를 몇 야드나 가져와서 메리웨더네에게 결혼 선물로 주었다.”
“한 시간 동안 스칼렛은 목격하고 발견하였으니, 멜라니가 뜨개질을 하며 돌리는 실뭉치를 레트가 들고 있다거나, 애슐리에 또 애슐리의 진급에 관한 자랑스럽고 장황한 멜라니의 이야기에 레트가 공허하고 불가해한 표정을 짓고 있다거나 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나중에 레트와 친하게 지내지 말라는 소리를 듣자, 멜라니는 격분하여 메리웨더 부인에게 대들기까지 하죠. 뭔가 사이좋은 퀴어-헤테로 커플 같은 느낌이기도 합니다. 아니 혹시 레즈-게이일 수도 있겠지만 하여튼.
그랬던 둘의 관계는 이제 아주 껄끄러워져 있죠. 이미 멜라니도 레트가 뒤에서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독자들이 이것도 멜라니의 소심함 또는 <여성스러움>의 탓으로 돌리도록 소설은 유도하고 있어요.
이 둘의 대화의 배경으로 앞서 이야기했던, 멜라니의 정치적 행위들에 대한 암시가 깔리죠. 가령 멜라니가 돈을 조직원 치료비나 조직원 포섭비용이나 기타등등에 소모하고 있다는 내용.
어쨌거나 레트는 멜라니에게 스칼렛의 제재소를 팔겠다고 제안합니다. 그것도 자기가 몰래 돈을 지원해서, 게다가 스칼렛과 애슐리 몰래 말이죠. 레트는 멜라니에게 아들의 교육을 - 그러니까 대학 진학자금을 - 고려해 보라고 권유합니다. 이에 대한 반응은

멜라니 : 수작 참 뻔하다…
소설의 대사는

“어머니의 교만에 호소하다니! 당신(마음)을 책처럼 읽을 수 있을 것 같군요.”
스칼렛 : 어떻게 생각해, 역시 모성애일까…?

레트 : (아냐)
하지만 멜라니 동지에게도 어쨌든 하버드 진학이 나쁜 이야기만은 아니겠죠. 소설을 읽어 보면, 아무리 애국적인 남부인들이라고 해도, 아니 애국적인 남부인일수록 이상하게도, 자식만큼은 미제의 심장인 하버드에 보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살짝 흔들린 멜라니는 더 강력한 레트의 패에 넘어가게 되지요.

““스칼렛을 돕기 위해서라도 안 되나요?” 레트는 아주 상처받은 것처럼 보였다. “그이가 그렇게 당신을 좋아하는데요!”

멜라니의 눈꺼풀에서 눈물이 떨렸다.”
레트가 스칼렛의 제재소를 팔려는 표면적인 이유는 스칼렛의 건강입니다. 여러 제재소를 왔다갔다하며 스칼렛이 과로한다는 것인데요. 애틀랜타 건축자재계의 거물인 스칼렛은 그간 인수합병을 통해 사업을 확장해 왔죠.
물론 스칼렛의 건강이 딱 그 시점에서 안 좋긴 하지만, 원인제공자는 제재소라기보단 레트 본인. 그리고 레트의 주장이 무색하게, 워낙 강골이었던 스칼렛은 몇 달 안 지나 회복하지요.
배경으로 깔리며 레트의 주장을 얼핏 정당화시키는 사실은 스칼렛의 소외입니다. 미국영화답달까, 영화에서는 이게 메인으로 나오죠. 스칼렛은 분명 일 때문에 가족에게 소홀하지요.
제재소는 멜라니의 말마따나 남성적인 사업이고, 게다가 남성들도 흔히 실패하는 사업이기에 스칼렛의 성공은 사람들의 질시를 낳았죠. 제재소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스칼렛이 저지르는 여러 비양심적인 행동은 그런 질투에 어떤 정당성을 부여해 왔고요.
스칼렛의 그런 자본가로서의 <나쁜> 전형성은 멜라니의 신조 - 검약, 그리고 특히 공동체적 유대 - 라는 에 비추어 볼 때 좋지 않은 것이겠지요.
물론 멜라니는 <좋은> 전형성이 있다는 걸 알고 있고, 그 좋음과 나쁨은 분리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겠지요. 이것은 누구의 입장에서도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단지 레트의 말재주가 성급한 결론을 내려 버린 것이겠지도 싶죠.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는데, 레트에게는 스칼렛의 소외를 부추기는 면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질투할 걸 뻔히 알면서도 스칼렛의 사치스러운 행동을 부채질한다거나, 자애로운 아버지로 행세하면서 은근슬쩍 사람들이 스칼렛을 욕하게 만든다거나.
레트는 멜라니 같은, 스칼렛이라는 이야기만 나오면 인생의 우선순위가 뒤집히는 사람이 아닌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보면, 레트가 왜 제재소를 자신이 손해를 보면서까지 팔려고 하는지, 그것이 애매해지죠. 개인적으로 혹시 이건가 싶은 점은 있지만, 이거다 싶은 점까지는 솔직히 말해 없습니다. 혹시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시는 분은 제게 말씀해주세요.
멜라니와 합의에 이르자, 레트는 다음과 같이 조건을 답니다.

“제가 돈을 윌크스 씨에게 보내 드리면… 그 돈이 제재소를 사는 데에 쓰이지 않는지 - 글쎄, 빈곤한 옛 남부연맹 사람들에게 주어지지 않는지 봐주시겠습니까?”
이것은 보내 준 돈을 KKK와 반란사업에 쓰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 조직이 주로 전직 남부군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은 다들 아는 사실이었고, 그러니까 상당히 노골적인 요구죠.
그리고 여기서 정치폭력단체들이 어떤 사람들을 주로 포섭하는지의 힌트도 나오죠. 일정한 직업이 없고, 빈곤하며, 사회에 불만이 있는 남자들이 그 타겟입니다. 떠돌이거나, 무력에 능숙하다면 더 좋습니다. 아치가 좋은 예죠.
생각해 보면 서북청년단이나, 나치 돌격대 같은 단체들도 역시 그랬지요. 사회의 급격한 변동, 특히 그것이 야기하는 실업은 극우의 좋은 토양인 것이죠.
레트의 요구를 듣고 멜라니는 순간 표정관리가 안 되었지만, (이 새끼가...!)
이내 미소를 지으며 레트에게 알겠다고 합니다. 그것이 <품 성>이며 정치인의 덕목.
글쎄요, 제재소 구입자금만 유용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운영수익은 내 마음대로다라는 꿍꿍이였을까요, 어쨌든 멜라니의 동의도 얻고, 나중에 스칼렛마저 구워삶은 레트는 정말 제재소를 애슐리에게 넘기게 됩니다.
애슐리는 축하 파티에서 양심경영을 천명합니다. 악덕 자본가 스칼렛은 그에 이렇게 반응하지요 :

스칼렛 : (망했어…)
레트의 행동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아주 특이한 점이 있는데, 애슐리를 아주 싫어하는 듯하지만,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이상하게도 애슐리의 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이라는 것입니다. 애슐리에게 흘러들어갈 것을 알면서 스칼렛에게 돈을 빌려 준 것이라든가,
프랭크의 기일에 굳이 자신이 위험을 무릅쓰며 애슐리를 구해 준 것이라든가. 제재소 건은 결과적으로 레트 자신이 애슐리에게 제재소를 사준 셈이 되었죠.
생각해 보면, 소설에서의 이 장면도 애슐리의 평화주의가 궁지에 몰리자 레트가 애슐리의 편(?)에서 갑자기 난입했던 것이었습니다. 레트의 이런, 예상 밖의 일관성은 소설에서 정말 의외의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레트가 열심히 수꼴들을 만나는 걸 알아챈 스칼렛은 불안에 휩싸이지요.

스칼렛 : 다… 당신도 딴 놈들처럼 KKK에 들어간 거 아냐! 확실히 말해!

그리고 레트에게 스칼렛은 의외의 대답을 듣게 됩니다.

레트 : K같은 소리 하시네. 이제 애틀랜타에 그런 건 없어.
레트는 주장합니다 - 조지아 KKK는 사실상 와해되었습니다. 그리고 레트 본인이 이 일의 어엿한 주동자죠. 조직이 <완전히> 분해되었는지는 레트도 장담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요. 레트가 성공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내부자 하나를 포섭했기 때문인데요.
레트와 그 내부자는 의기투합하여 불법 야외활동보다는 정치적 모략이 낫다고 KKK구성원들을 설득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그자가 조직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었다고 추론할 수 있겠죠. 그래서 그 내부자가 누구냐면…
애슐리입니다.
누군가의 마음속에 불타고 있을 비엘혼(BL魂)을 일단 외면한 채, 레트가 어떻게 말하는지를 볼까요.

레트 : “그래, 진부하지만 진실로, 정치는 기이한 동반자들을 만들지. 애슐리나 나나 서로를 별로 동반자로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 애슐리는 모든 폭력에 반대하는 사람이라 클랜을 믿지 않았어..."
그리고 레트는 KKK가 단지 멍청한 짓거리라고 생각했던 것이고요. 애슐리와 레트의 첫 만남에서 전쟁을 놓고 둘만, 오직 애슐리와 레트 둘만이 일치했던 장면과 꼭 같죠. 애슐리는 비폭력, 레트는 수단적 합리성. 긴긴 세월을 지내고 다시 어느 첨단에서 만난 이 둘은,
드디어 했군요! 해버린 것이에요!

라고 외치고 싶으시겠죠? 진정하고 그 다음을 살펴보도록 해요. 이 둘은 연방정부의 개입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폭력노선의 포기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의견이 일치하였습니다. 그리고 같이 사람들을 설득해 온 것이죠. 그리고 그들은 성공했습니다.
스칼렛이 습격당한 날, 당국이 애슐리를 미리 주모자로 찍어 놓고 잡으러 왔던 것을 기억하시나요? 애슐리는 확실히 조직의 핵심인물입니다. 지금 이 지점에서 그것이 더 확실해지죠. 그리고 또 가령, 애슐리의 깜짝생일파티날, 애슐리는 이미 그 <깜짝>을 알고 있었는데,
누가 가르쳐 줬나 하고 봤더니 앞서의 그, KKK수괴라고 흔히 얘기되는 고든이었습니다. 고든은 아마도 <마음의 준비를 잘 하고 있어야 더욱 잘 깜짝 놀랄 수 있다>고 조언했던 모양. 가령 어디 딴 데로 새서 예정했던 시간에 안 나타난다거나, 미리 술을 쳐마신다거나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렇게 주의를 받았는데도 스칼렛과 사고를 쳐 버린 것 역시 애슐리의 KKK에 대한 무의식적 반감을 반영하는 것일지도요. 이렇게 이 인간은 전혀 안 어울리는데도 폭력의 한복판에 있었습니다. 이건,
전적으로 멜라니 때문이죠. 하기야 애슐리가 정치고관심자인 멜라니와 결혼한 것부터가 이런 결과를 어느 정도 예정한 것이었겠습니다만.
애슐리 : 결혼은 (섹스 때문에 하는 게 아냐. 그건) 동업자 같은 거야.
스칼렛 : (뭔 소리야 이게 대체??? 섹스는 안 하고 산다는 거야???)
그런데 애슐리가 선택한 동업자는 의외로 심지가 굳고 진취적인 것을 이미 아득히 초월하여 너무 급진적이고 위험한 인물이었던 것이죠. 애슐리는 당면한 정치적 과제의 해결을 위해 일단 레트와 동반자가 되었는데 말입니다.
여기서 <동반자>라고 번역한 그 부분의 원문을 볼까요.

“Yes, platitudinously but truly, politics make strange bedfellows. Neither Ashley nor I cared much for each other as bedfellows but -”
<bedfellows>는 일단 가장 흔한 의미로는 ‘의외로 같이하게 된 사람들’인데요. 보시면 아시겠다시피 이 Bed+Fellow에는 어떤 뉘앙스가 있냐면...
“둘이 완전히 떡을 쳤군요! 오피셜이에요!!!” 라고 말씀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신중하게 접근하려고 합니다. 일단 미첼은 모든 문장의 세부적인 표현에 집요하게 매달리는 작가는 아니지요. 상징이나 은유를 그리 열심히 쓰지도 않고요.
스칼렛 : 비유란 게 뭐지?
레트 : 음… 가령 <멋진 푸른 깃발>에서 깃발을 남부연맹을 뜻하고 별은 남부의 가치관을 상징하잖아?
스칼렛 : 그랬어?
레트 : 그럼 무슨 생각을 하고 부르는 거야?
스칼렛 : 그걸 생각을 하고 불러야 하나?
레트 : ...
스칼렛 : 그럼 별=가치관이군?
레트 : 꼭 그런 건 아니고 경우에 따라 여러...
스칼렛 : 다항함수 같은 건가!
레트 : 아니 뭐라고 딱 떨어진다기보다
스칼렛 : 실수해를 갖지 않는다는 이야기야?
레트 : 그게 아니라, 같은 비유를 놓고 사람에 따라 생각이 다를 수 있어
스칼렛 : 뭐야 그거 사기잖아
물론 문체에 아주 집중하는 작가들도 그 표현에서 의도치 않은 효과를 낳는 경우가 있지요. 혹시나 제가 저 앞에서 <Clan은 친족이라기보다는 KKK(Klan)의 암시>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물으실지도 모르겠지만, 그 부분은 뭐랄까, 의심의 여지가 없는 종류입니다.
이것은 제가 퀴어착즙에 홀려 원작을 곡해한다는 비판을 의식하기 때문일까요! 어쨌든 애슐리와 레트가 어떤 야릇한 사이인지는 독자들 각자의 해석에 맡겨놓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저도… 이지만 정말 여기까지 하겠어요.
어쨌든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의문이 있지요. 애슐리는 멜라니를 배반한 게 아닌가요?
어쩌면 애슐리는 멜라니를 <설득>했을 수도 있겠죠. 전쟁 당시 애슐리의 편지로부터, 레트와의 친교를 놓고 벌인 멜라니와 메리웨더 부인의 다툼까지의 경과를 한 번 되돌아가 살펴봅시다.
애슐리는 전황이 매우 불리하며, 설령 전쟁에 이긴다고 한들 멜라니와 애슐리가 원하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는 내용의 편지를 멜라니에게 보냈습니다. 멜라니는 그 편지를 근거로, 메리웨더 부인 앞에서 레트의 혐전주의적 태도를 두둔했지요.
비슷한 결과가 KKK-합법노선논쟁을 놓고도 나왔을 수도 있겠지요. 애슐리와 멜라니 사이의 갈등이 그 이후로도 딱히 표면으로는 드러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것을 뒷받침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이렇게 상상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 사실 애슐리는 여기서도 멜라니의 하수인이고, 레트와 실제로 합법노선에의 이면합의에 이른 대상은 멜라니라고요. 제재소의 소유권은 그 계기 또는 계약금쯤이 되는 것이죠.
실제로 아무 역사가에게나, 또는 일반인들에게라도, 방금의 사태를 단순화한 모델을 가져다 주면, 이쪽이 가장 높은 지지를 얻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1. 폭력조직을 사실상 운영하던 어느 부부가 있었다. 2. 그 부부 중 주도적인 쪽을 통해 어느 날 <입금>이 되었다. 3. 그 부부 중 하수인의 역할을 맡던 사람에 의해 조직의 활동이 정지되었다.

이 경우, 극히 대부분의 관찰자는 이 부부가 입금자에게 매수되었다고 결론내릴 것입니다.
이렇게 보아도 소설에서 이어 등장하는 사건들을 <해명>할 수 있지요. 그리고 동기는 이미 충분히 제시되었습니다. 아들 생각 약간, 그리고 스칼렛의 행복과 안전이 가장 중요한 계기라고 생각한다면, 멜라니의 노선변경을 납득하지 못할 것도 없겠지요.
그리고 어쨌든 돈은 좋은 것이니까 말입니다. 가령 레트가 스칼렛에게 선물공세를 펼치던 것을 떠올려 볼까요. 꼭 스칼렛 같은 <현실주의자>가 아니더라도, 내면의 속물근성이 결국 금전 앞에서 굴복하는 경우를 우리는 많은 <한때의 혁명적 개인>들에게서 보아 왔지요.
앞서의 전개가 어쩌면 <상식적>이겠지만, 저는 멜라니의 입장이 앞으로도 여전히 폭력노선이라는 쪽을 일차적으로 가정하고 앞으로의 전개를 풀도록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소설의 구성에 비추어 볼 때 더 적절한 해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레트-멜라니의 매수-합의설을 따를 경우 애슐리-레트의 BL라인을 잇지 못해서는 꼭 아니겠고요. 물론 그것은 아주 흥미로운 주제이긴 합니다. 꼭 어떻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어쩌면 그래서 오히려 더 상상의 여지를 많이 남겨놓고 있지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최후반 사건들 역시 독자에게 여러 해석의 가능성을 부여합니다. 부분적으로는 소설의 설정 자체가 불확실하기 때문이죠.
어쨌든 멜라니는 적어도 레트가 스칼렛의 제재소를 넘기려 온 그 시점에서는 폭력노선을 견지하고 있었습니다. 레트가 KKK단에 돈을 쓰지 말라고 조건을 붙인 것으로 보아 명백하죠. 멜라니가 살짝 화를 낸 것을 보면 그것은 더 명백하고요.
설령 멜라니가 KKK단의 활동정지에 마지못해 합의했더라도, 그것은 전략적 후퇴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레트의 제재소 양도는 멜라니의 검약한 이미지에 다소간의 타격을 준 것을 제외하면 대체로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레트는 결정적인 정치적 성과를 이끌어냅니다. 이것을 리뎀션Redemption이라고 부르지요.
레트는 스캘러왝, 즉 한때의 배신자 남부인으로서의 강력한 전형을 보여 주는 캐릭터입니다. 전후 재건시대의 조지아 공화당 세력은 북부 출신들(카펫배거), 그에 협력하는 남부인들(스캘러왝), 그리고 해방 흑인들로 구성되었다고 말씀드렸죠.
지주계급이 이끄는 민주당은 가난뱅이 백인들을 선동하여 자유민주주의의 물결에 대항하고 있었고요. 이 선동질에는 그런데 약간의 사회경제적 타당성이 있었습니다. 링컨의 산업화가 기존의 전통을 흔드는 건 둘째치고라도, 농촌경제를 아작내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KKK의 정치깡패질로 민주당이 선거에서 승리하자, 이 대결구도는 애매해졌습니다. 지주들 입장에서는 정치권력이라는 중요한 목표를 탈취했고, 그렇다고 연방정부와 다시 한 판 붙어 볼 실력은 어쨌거나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전쟁으로 따끔한 맛을 보았죠.
한편 공화당의 내부동맹 역시 흔들렸는데, 일단 조나스 윌커슨처럼 신념을 가진 평등주의자가 그 안에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레트만 봐도 흑인민권에 0.1도 관심이 없죠. 특히 조지아는 흑인들을 동등한 정치적 파트너가 아닌, 조수나 거수기쯤으로 여기는 경향이 심했다고 합니다.
소설의 공화당 지지자들 역시 인종차별주의적 사고를 갖고 있으며, 그것을 드러내는 데 그리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물론 미첼이 이런 묘사를 할 자격이 있느냐 하면 그건 아니라고 해야겠지만, 윤서인 선생 같은 분이 아닌 이상, 사람의 주장 안에는 약간의 진실성이 들어 있기 마련이죠.
소설에서 금방 말한 부분이 좀 웃긴데, 북부인들이 니그로라는 언피시한 발언을 피터 아재에게 합니다. 그리고 뜬금없게도 스칼렛이 일명 PC, 즉 <정치적 올바름>의 편에 서 있죠.
스칼렛 : 니... 니거라니...! 우리 엄마 같은 교오오양인은 저런 말을 안 썼는데!!!

물론 스칼렛의 엄마가 그렇다고 제대로 된 <올바름>을 가진 인간이 되는 건 아닙니다. 엘렌은 흑인을 착취하는 예의바른 꼰대일 뿐이죠.
이 에피소드는 무례한 말을 들은 피터 노인이 북부인들에게 분개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보시다시피 정치적 올바름은 뭐 지키는 게 예의겠습니다만, 그 예의란 것이 치명적으로 중요하다고 보기는 어렵겠죠. 사회경제적 착취가 더 나쁘니까요.
어쨌든 공화당원들은 흑인들의 인권이 중요해서 공화당에 있던 게 대체로 아니었습니다. 음험하게 이야기하면 그냥 눈에 보이는 권력에 붙었을 뿐이죠. 정권교체가 눈앞에 보이자 여러 스캘러왝들은 흑인들을 배신할 준비를 하게 됩니다.
이에 응답하여 수꼴들은 가난한 백인들을 배신했고요. 이렇게 희대의 정치적 야합이 일어났습니다. 레트와 애슐리의 Bedfellow됨은 어쩌면 이것의 상징. 정략적 결탁은 언제나 어디서나 사람들의 눈에 불륜과 비슷해 보이나 봅니다.
이것은 산업자본가와 지주들의 야합이고, 백인 상류층들 사이의 야합이고, 정치공학적으로 보면 좌우의 양 극단 - 공화당의 급진 평등주의자들과 민주당의 과격분자들 - 을 배제한 보수대연합이었던 것이죠.
보수대연합의 주정부는 절약을 주장하며 감세를 추구하였고, 복지예산, 특히 교육예산을 팍팍 깎았지만, 땅을 파헤치고 삽질하는 데 - 아주 대표적으로 철도공사 - 는 돈을 아끼지 않았지요. 드디어 파라다이스가, 합리적 보수의 지상낙원이 열린 것입니다!
이 연합은 구 토지귀족들에게도 <투자>의 기회가 마련됨으로써 완벽하게 튼튼해졌다고 하겠는데요. 앞서 여러 차례 나왔던, 실존인물 고든도 폭력생활을 청산하고 이 때부터 투기질에 빠져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레트가 멜라니에게 제재소를 제공한 것은 아마 이런 목적이었겠지 싶죠. 멜라니뿐만이 아니라 레트는 돈을 여기저기 마구 뿌리고 다닌 것으로 묘사되는데요. 스칼렛은 수챗구멍에 돈을 버리냐며 화를 냈지만, 레트가 부은 돈은 전후 경제질서의 기초를 굳히는 시멘트가 된 셈입니다.
민주당을 지지하던 백인 소농들은 부자들에게 정말 철저하게 배반당했죠. 그러나 보수대연합은 남부-백인이라는 소속감으로 그들을 희롱하며, 하층계급의 경제적 불만을 성공적으로 무마시켜 왔습니다. 우리가 남이가!
인권의 측면에서 보면 흑인차별을 금지하는 수정헌법은 비준되었으되 장식화되었고, 흑인들은 합법적으로 차별받게 되었죠. 이것을 막아야 할 연방대법원은 쓰레기 같은 판결들을 양산하며 인종차별에 오히려 나팔을 불었어요.
그 히틀러가 감동하고 실제로 벤치마킹하려고 했던 - 정말 미국에 법률가들을 파견했다고 - 악명높은 인종차별법들이 여기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분리하되 차별하지 않으면 합헌이라는 짐 크로 법이 대표적. 언뜻 저것도 차별하지 말라는 소리 아니냐 싶지만, 차별은 입증하기가 분리보다 어렵습니다.
북부 정치인들 역시, 자본주의의 인스톨로 남부정세가 어쨌든 결론나자, 남부에서 벌어지는 사태들에 신경을 꺼버렸습니다. 어쨌든 중요한 건 <자본주의>였거든요. 이렇게 미국 역사의 일명, <도금 시대>가 활짝 열린 것이죠. 이 정신나간 투기열풍은 19세기 말까지 계속됩니다.
결국 조지아의 정세는 스캘러왝의, 특히 산업자본집단의 배신을 주도하고, 자본가들과 구 남부지주귀족들의 화학적 결합을 이끌어낸 레트의 완승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공화당 주지사 불럭의 축출은 그 정점.
민주당으로 레트가 데리고 돌아온 철새들을 사람들은 리디머들Redeemers로 불렀답니다. 그 돌아옴은 리뎀션으로, 용서 또는 속죄의 뜻을 지니지요. 그러니까 남부 백인의 관점에서, 정확하게는 백인 기득권의 관점에서 리뎀션은 <돌아온 탕아> 정도 느낌이 되는 셈인데요.
하지만 미국 흑인들의 입장에서라면 이런 느낌. 그들이 참여했던 첫 사회운동은 백인들의 폭력과 위선과 배신 속에서, 일시적인 실패로 끝난 것입니다.
멜라니도 그렇지만, 소설의 레트 역시 대단한 인물이죠. 전후 남부의 정치적 세계 - 흔히 말하는 상부구조 - 를 창조한 사람이니까요.
레트가 동원한 수법도 품성, 돈, 정치적 야합 등 다채롭죠. 특히 딸까지 선전도구로 써먹은 점, 아내를 이용하여 강력한 정치적 라이벌인 멜라니에게 권력과 사랑의 양자택일을 강요한 점이 아주 음험해 보입니다.
멜라니의 오빠 찰스가 레트에게서 보르자를 연상한 것은 지금 와서 보면 아주 적절하죠. 르네상스 시대의 모략가인 체사레 보르자도 정치에 가족들을 동원했고, 심지어 친족에게 해를 끼치는 짓도 서슴지 않았거든요.
수단이야 뭐 그렇다치고라도, 레트의 정치적 업적 역시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KKK단 자체보다도 더 나쁜 면이 있는데요. 레트가 만든 질서는 안정적이고 오래 갔기 때문이죠.
우리 같은 관찰자의 입장에서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무모하게 행동하다 박살나 주는 편이 어쩌면 고맙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부활한 수꼴민주당을 <부르봉 민주당>이라고 불렀는데요, 부르봉은 그 예전 프랑스의 왕가 이름이죠. 민주당이 무슨 프랑스와 연관이 있는 건 아니고, 요새 사람들이 흔히

“조선시대야 뭐야…?”

할 때의 그 느낌이었답니다. 시대착오적이라는 이야기죠.
하지만 흑인민권에만 반동적인 입장을 취했을 뿐, 전후의 민주당은 자본주의를 옹호하고 농민들을 열심히 착취했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한 차이가 있겠습니다.
레트의 보수대연합은 1890년대 농민의 정치적 각성과 1930년대의 뉴딜, 그리고 1960년대의 민권운동을 거치며 변화를 겪었고, 그 와중에 공화당으로 남부 수꼴들이 또다시(!) 대이주해 오늘에 이릅니다. 하지만 그 보수정치의 기본은 변하지 않고 있죠.

아래는 조지아 상원의 낙태죄 찬반 투표 결과.
여기서 뉴딜 이야기를 잠깐 해야겠는데, 뉴딜을 이끈 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1933년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당시 미국의 과제는 대공황 극복. 루즈벨트는 그것을 위해 정부의 역할을 강화하고 빈곤층과 서민 노동자들을 지원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백인 기득권들은 사회보장제도와 세금과 루즈벨트를 저주하며 공화당을 편들기 시작했지요. 반대로 미국 흑인들은 민주당 지지로 천천히 돌아서고 있었습니다.
루즈벨트는 근본이 민주당이라 지지기반을 완전히 거스를 수 없었습니다만, 흑인의 권익향상에 그럭저럭 노력한 공을 흑인들이 알았던 것이지요. 특히 고용과 복지에서의 루즈벨트의 친서민 정책이 결정적이었는데, 흑인이 곧 서민이었고 노동자였기 때문.
반면 남부의 많은 가난한 백인들은 기득권의 선동에 휩쓸리는 편이었으니, 인종적 우월감이 그들 자신을 함정에 빠뜨린 셈입니다.
이 지점에서 멜라니의 입장을 한 번 상상해 봅시다. 멜라니 역시, 한때의 폭력맨이었던 고든 - 이 인간은 나중에 주지사까지 해먹습니다 - 처럼, 잘나가는 사업을 하나 얻고 만족하게 됐을까요? 멜라니가 정치를 하는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스칼렛이 훔쳐보던, 애슐리가 멜라니에게 보낸 편지는 애정 대신, (스칼렛이 보기에는) 괴상야릇한 정치적 분석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멜라니가 가진 정치성의 어떤 단서가 바로 여기에 들어 있죠.
애슐리 : “그렇다면 두려운 일이야, 우리 남부인들은 양키들처럼 되고, 우리가 지금 경멸하는 영리적 활동이나, 물욕이나, 상업주의를 따라하게 될 테니까.”

스칼렛 : “뭐 이런 정신나간 편지가 다 있담. 내 남편이 나한테 이런 편지를 썼다가는 무사하지 못했을 거야.”
스칼렛이 화를 내며 편지의 내용을 곧 잊어버리는 것처럼, 독자들도 자본주의에 대한 애슐리의 공포를 무의식 속으로 밀어놓게 되지요. 하지만 여러 차례 보아 오셨듯, 스칼렛이 쉽게 망각하는 것일수록 오히려 더 중요합니다. 그것은 현실에서 곧 나타나거든요.
편지는 멜라니와 애슐리의 관계를 암시해 주지요. 그들은 스칼렛이 기대하는 성적인 끌림으로 맺어지는 부부가 아닌, 비슷한 정치적 이념을 공유함으로써 구성되는, 어떤 동지적인 관계였습니다. 그리고 그 공통점은 바로 저 편지에 나온, 상업주의에 대한 반대죠.
애슐리가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이유는 남부 대지주로서의 삶을 수호하기 위해서였죠. 하지만 멜라니는 그 삶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영화에서는 관심을 보이는 장면이 살짝 끼워져 있지마는요.
멜라니는 결혼한 후에도 시댁에 가지 않고 애틀랜타에 남아 지냈죠. 물론 시댁은 누구나 가기 싫은 곳이긴 하지만, 도시인이었던 멜라니에게는 전원생활 역시 취향이 아니었던 것이죠.

멜라니 : 여보, 친정에는 언제 가...?
애슐리 : 내... 내일 아침에?
멜라니 : ...자고 간다고???
남북전쟁은 여러 가지 쟁점을 놓고 벌어진 역사적인 충돌이었습니다. 여기서 진보라면 당연히 북부를 옹호해야 할 것 같지만, 실제로 마르크스나 엥겔스 같은 사회주의자들은 북부를 열성적으로 지지했지만, 좌파진영 안에서도 모두 생각이 같았던 건 아닙니다.
가령 아나키즘의 대부인 프루동은 전쟁에서 남부를 옹호했는데, 프루동이 인종차별적인 구석이 있기도 했답니다마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애슐리의 편지에서 나온 그것이었습니다. 강력한 국가와 산업사회는 개인의 자율성과 소규모 공동체들의 연대를 파괴한다는 것이죠.
다른 네임드 아나키스트인 바쿠닌 역시 (전쟁에서 북부를 지지했음에도) 남부사회의 농촌적 가치에 주목했고요. 그것은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저 개인은 아나키스트들의 의견이 결론적으로는 틀렸다고 생각하지마는요. 그것은 마치 비트코인으로 구현되는 분권화 같은 소리죠.
애슐리가 태라에서 스칼렛과 대화하던 내용 중에 그런 것이 있었죠. 자신이 누리던 세계는 (극히 일부의 대지주로서의 특권이었지) 남부 사회 전체 인민의 삶과는 전혀 동떨어져 있었다고요.
멜라니가 구성한 전후 사회의 모델은 애슐리의 것과는 비슷하지만 아주 달라서, 매우 격렬하고 위태로운 것이었습니다. 여기서의 사람들간의 관계는 단순한 농업사회의 그것보다 조직적이고 집단적이지요. 그것은 그리고 자유민주주의, 즉 링컨적 세계와 폭력적으로 대립합니다.
멜라니와 링컨을 비교하면 당연히 링컨의 손을 오백 번쯤 들어 줄 수밖에 없지만, 자본주의가 사람들의 관계맺음을 파괴한다는 문제의식 자체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레트적 해법은, 그리고 다른 수꼴들이 돈에 넘어가 투항해 버린 그 세계는, 이 문제가 전혀 해결되어 있지 않지요.
특히 멜라니는 정치적 경력을 태라에서 농촌노동자들과 시작했는데, 자본이 지배하는 레트적 남부라는 결론은 그 농민들에 대한 가혹한 배신이었죠. 멜라니는 가장 중요한 문제에서 양보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거대한 체스판 위에서 승리를 거둔 레트는, 개선장군처럼 한동안 애틀랜타를 활보하고 다니죠. 보니 블루 버틀러와 함께.
버틀러 가문과 로비야르(스칼렛의 엄마네) 가문의 혈통인 보니는 자본과 대지주들의 정치적 야합을 암시합니다. 하지만 그 이름은 과거로부터 이어지는 남부를 가장 먼저 연상시키며, 남부 상류계급의 물신주의로의 전향을 살짝 은폐해 놓죠. 레트가 심혈을 기울여 조각한 이 남부의 미래는 그런데,
얼마 못 가 말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말을 사준 것이야 딸을 순수하게 예뻐해서라고도 얘기할 수 있겠지만, 위험한 곁안장을 타게 한 것부터는 확실히 보수적인 이웃들의 눈치를 본 것입니다. 좋은 가정의 좋은 아빠라는 이미지메이킹의 결과가, 곧 어른들의 욕심이 아이를 죽인 것이지요.
또는 신들께서 그 아이를 데려가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을 믿으시나요? 저는 신이 있음을 믿지 않지만, 신이 있는 느낌은 믿습니다. 곧 (저를 포함한)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종교적 심성이 있음을 믿지요.
반대로 박진영 씨처럼, 신의 존재는 믿지만 불신적인 예감에 사로잡히곤 하는 분도 계실 테고요.
판결문이나 신문기사를 작성할 때, 우리는 레트가 보니를 죽였다고 적지는 않을 것입니다. 레트의 불건전한 정치적 욕망과 아이의 사망, 이 둘 사이의 인과는 물론 분명하죠. 하지만 불의의 사고가 없었다면, 그 둘은 이어지지 않았을 테죠.
곧 합리적인 세계관에 따르면 이렇습니다 - 행위에서 그 결과를 기대할 수 없을 때, 우리는 행위자에게 책임을 돌릴 수 없지요.
하지만 종교적인, 또는 원초적인 믿음 안에서 인과는 전능해집니다. 사람이 겪는 모든 나쁨은 결과가, 저질렀던 죄악은 원인이 되죠. 원인, 결과, 그리고 연결, 그것들 중 하나만 몰랐어도 행복했으련만, 보니네 가족들은 쓸데없이 똑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종교적 격정에 휘말리지요.
레트는 죄책감에 살짝 미치게 됩니다.
평생에 걸쳐 집안 여인들을 못살게 굴었던 유모는 보니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레트에게 고해합니다. 두 죄인들은 서로를 용서해 주지요. 물론 그들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반면 자신이 죄책감을 느낄 어떤 이유도 없었던 스칼렛은 레트에게 책임을 묻죠. 아버지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어머니는 징벌을 원하니, 그들이 진정 아가멤논과 클뤼탬네스트라.

레트의 집이 그리스 비극의 무대가 된 셈이죠.
자신의 살인을 거부하다가 죽음 자체를 거부하고, 마침내 보니의 장례식까지 거부하기 시작한 레트를 설득하기 위해, 유모는 멜라니를 찾습니다.
멜라니는 <대체 내가 그걸 왜…> 라고 반응하다, 잠시 자기 아이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유모의 부탁을 받아들이죠.
멜라니는 아이를 정서적으로 잘 보살피는 어머니지만, 멜라니에게 아들은 어쨌든 첫번째가 아니었습니다. 정치만 포기한다면 경제적으로 호강시켜 주는 것이 가능했겠지만, 멜라니는 그러지 않았죠. 그래서인지 멜라니에게서는 아들에 대한 미묘한 애틋함 같은 게 엿보입니다.
멜라니는 레트를 만나 단둘이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보니의 장례를 치른다는 결론을 가지고 방에서 나오죠.
멜라니는 레트에게 뭐라고 했을까요? 언제까지 아이를 자기 욕심에 이용할 거냐고 다그쳤을까요? 또는, 품성의 팔을 벌려 위로했을까요? 이것은 독자의 상상에 맡겨져 있습니다.
장례식이 끝나고, 워낙 현실적이었던 스칼렛은 이 상식의 세계로 돌아옵니다.

스칼렛 : 생각해 보니 그것은 사고였고... 이미 죽은 사람은... 어쩔 수 없지.

그럼에도 비극은 계속되지요. 다른 사람들의 달아오른 머리들은 스칼렛처럼 차가워지지 못했던 겁니다.
이웃 사람들은 명색이 기독교도들이어서인지, 아니 사실 이것이 기독교적 심성의 정수라 할 만한데, 죄를 자책하는 레트를 동정하게 됩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리뎀션 - 앞서 말했던, 남부 백인 기득권의 속죄로 치장해 놓은 배신 - 의 은유일지도 모르죠.
반면 속죄하지 않는 스칼렛은 더 미움을 받게 되죠. 이렇게 신앙인들은 그들의 일상에서 골고다 언덕길을 다시 거니는 것이라고나 할까요.
보니의 장례식은 보셨다시피 두 가지 알레고리를 지니죠. 하나는 아이(보니)가 부모의 사회적 사업(레트의 보수대연합 결성)을 상징한다는 것. 그 비슷한 내용이 그전에도 있었습니다. 제재소를 팔 때 스칼렛은 자신의 아이를 잃은 것 같은 기분이었지요.
또 하나는 사람의 어떤 미신적 믿음이, 드러나지 않은 이면의 사건을 암시한다는 것. 레트에게 보니의 죽음은 정치에 아이를 이용한 징벌처럼 <느껴집니다>. 이 두 가지는 바로 다음의 사건에서 그대로 변주되지요..
이 막간에 잠깐, 소설은 스칼렛의 심정을 묘사합니다. 스칼렛은 새로 사귄 친구들 사이에서 외로움을 느끼고, 애틀랜타의 옛 이웃들과의 추억을 공유하고 싶어하죠.
사건은 사람을 하나로 묶어 주는 힘이 있죠. 그리고 김영환 선생의 품성론에서 언급했듯, 이야기도 거의 유사한 기능을 할 수 있습니다.
가령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읽은 백인들은

“흑인들도 사람이네!”

라고 깨달은 동시에, 흑인들의 이야기를 자신들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었지요. 흑인들에 대한 이 박애적 열정은 남북전쟁 당시 북부의 강력한 동력이 되었어요. 그리 오래 버티지는 못한 열정이지만.
서사가 만드는 공동체적 의식은 반대로 차별을 낳기도 하는데, 유명한 사례가 바로 미국의 D. W. 그리피스가 감독한 영화 <국가의 탄생>입니다.
1915년작인 이 영화는 최초로 서사적 구성을 스크린에 완벽하게 이식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데, 하나의 문제는 옛 남부를 대책 없이 낭만적으로 묘사했다는 점이었고, 더 큰 문제는 흑인을 비하하고 (사라졌던) KKK단을 열정적으로 미화시켰다는 점이었죠.
이 영화 때문에 당시 다 죽었던 KKK단이 도로 살아났습니다. 감명을 받은 감리교 목사 하나가 극장에서 나와 폭력배들과 KKK단을 재결성한 것입니다. 그 회합장소가 하필이면 또 애틀랜타인데, 그것도 멜라니가 스칼렛의 보복테러를 저지르던 그 근방.
폭력배들은 <메리 페이건 기사단>이라는 자들로, 이 단체의 결성목적은 메리 페이건이라는 13세 여성을 살인한 혐의로 수감된 레오 프랭크라는 유대인의 린치였습니다. 프랭크는 결국 린치로 사망. 어느 정도 예상하시겠다시피, 이 살인혐의는 누명이었습니다.
창립자들의 면면에서 드러나듯이, KKK단 2기는 흑백차별에 더해 종교차별에 같은 백인에 대한 인종차별까지 했지요. 심지어 이자들은 1번 타겟이 천주교도, 2번이 유대인이며 3번이 흑인이라고 주장하고 다녔다고.
당시는 아일랜드에 이어 남유럽에서 이민자들이 지속적으로 몰려오던 때. KKK단 2기의 요점은 반이민 정서였던 것입니다. 여담이지만 비슷한 시기 미국의 금주법도 술고래들이었던 아일랜드계 천주교인들을 겨냥한 개신교도들의 문화투쟁의 성격이 있었지요.
웃기는 건 미첼도 그렇고, 스칼렛이 바로 아일랜드계죠. 스칼렛은 나이롱 신자이지만 천주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은 분명합니다. 카톨릭을 까면 발끈하죠. 그리고 살짝 알콜의존증도 있고요.
1차세계대전을 거치며 미국은 링컨이 기획한 초강대국으로 올라섰지만, 자본주의적 자유와 평등의 그림자에는 링컨에 대한 불만이 자리했던 것이죠. <국가의 탄생>에서 낭만적으로 묘사된, 백인들만의 가족적이고 동질적인 사회가 그 대안으로, 또는 테러의 핑계로 여겨졌던 것이고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도 그 비슷한 감성의 소설입니다. 물론 살펴보았듯 이 소설은 독자가 면밀하게 읽을 경우 그 <감성>와 반대되는 독해가 가능하긴 하며, 아니, 당연히 그 반대로 읽어야만 할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내적으로 뛰어난 작품입니다. 하지만,
대체로 독자들은 이 소설을 읽으며 남부는 선하고 낭만적이며 흑인은 어리석고 셔먼은 무섭다는 인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인상에 따라 사실들을 재단해 버리죠. 따라서 이 소설은 미국사회의 문제를 오히려 왜곡하고 악화시켰다는 평을 받아 왔고, 그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타당합니다.
생각해 보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서사의 흡인력이 비정상적으로 뛰어난 소설인데, 투박한 문체가 그런 특징을 은폐한다고 하겠습니다. 스칼렛만 봐도 그런데, 스칼렛은 극한의 속물이며, 남부의 배신자이고, 가끔씩 후회만 할 뿐이지 전향 같은 건 하지 않습니다.
스칼렛 : 불럭이 쫓겨났다고? 에이, 줄을 잘못 섰네…!
가령 <죄와 벌>의 맨 마지막에 라스꼴리니꼬프가 반성한다고 해서 이 인간이 법치주의의 상징이 되지는 않지 않습니까? <레미제라블>에서 자베르가 내적 모순 때문에 자살한다고 해서 그자가 박애주의의 상징이 되지도 않는 것처럼요. 하지만 스칼렛은 남부 여성의 상징입니다. 이것은 기괴한 일이죠.
영화의 스칼렛 역이 영국인으로 결정되자, 남부에서 난리가 난 것이라든가. 영화 오프닝 행사 당시에 남부 여성들이 스칼렛을 꿈꾸며 무도회에 몰려온 것이라든가. 소설은 그런 방면에서 의외로 대단히 기교적입니다. 독자들이 어떻게든 스칼렛에게 호감을 느끼게 하는 수완이 탁월하죠.
잘 기획된 서사는 이렇게 파괴력이 있는 물건입니다. 최소한 단기적으로는 사실보다 더 사실적인 효과를 내죠. 플라톤은 이런 이유 때문에 이야기꾼들을 배격했지만, 정작 그 자신의 작품들은 이야기의 형식을 갖추었죠.
<국가의 탄생>의 인종차별로 당대에도 신나게 까인 감독 그리피스(팩트에 충실하려 했다는 발언으로 더 욕먹음)는 이듬해 <불관용>이라는 영화를 내놓았는데, 이 영화를 보고 감탄한 레닌이 그리피스를 소련의 영화산업 총책으로 초청하기도 했다고. 유물론자들에게도 서사는 필요한 법입니다.
한국에서도 이야기의 비슷한 효과가 관찰되죠. 가령 전후세대의 전쟁공포증이 그런데요. 한국전쟁을 기억할 리 없는 나이의 사람들이 전쟁을 이야기하는 것을 사람들은 비웃지만, 그들은 친족과 이웃들의 전쟁 이야기를 공유하고 자란 사람들입니다. 일종의 서사공동체인 셈이죠.
또는 나무위키가 있겠는데, 파라과이 유령회사가 운영하는 이 <위키>는 사실 위키라기보다는 (시사적인 문제에서는) <일요시사>에 가까운 매체죠. 곧 운영진의 편집방침에 따르는 서사들을 제공합니다. 이 선전매체의 반여성 서사는 적어도 젊은 인터넷-과몰입 남성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지요.
멜라니가 애틀랜타의 이웃들 앞에서 스칼렛의 탈영병 사살 - 스칼렛 본인은 잊고 싶어하는 - 을 이야기했을 때, 멜라니는 그런 서사의 능력을 기대했던 것이겠어요.
시외로 잠시 나가 있던 스칼렛은 멜라니가 위독하다는 레트의 전보를 받습니다.
스칼렛은 황급히 애틀랜타로 돌아오지요. 레트는 멜라니가 유산을 했다고 말합니다.
돌연 멜라니는 죽음의 문턱에 섭니다. 영화에서는 멜라니가 아이를 낳을 거라고 다짐하는 대목을 복선으로 넣어 놨죠. 그런데 소설에서는 어떠한 전조도 없습니다. 사건은 아주 갑작스럽게 느껴지죠.
레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멜라니는 내게 (임신을)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어. 나는 알았으니까. 그녀는 아주 - 행복했지, 지난 두 달간 말이야. 나는 그것이 다른 어떤 의미가 아니란 걸 알았지.”

어떻게 생각해도 만족스러운 설명은 아니겠죠.
일단 유산일 가능성은 높지 않습니다. 이유는 뒤에서 말씀드리겠어요. 물론 반드시 유산이 아니라고 단정지을 수도 없겠지만요. 이 사건의 진실은 기본적으로는 독자의 상상에 맡겨져 있을 텐데요.
여기서 저는 암살에 한 표 던지겠습니다. 권력에서 밀려난 보스가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았다, 그렇다면 당연히 암살을 의심해 봐야겠죠. 그리고 암살의 복선이라고 여길 만한 대목도 소설에서 몇 군데 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레트를 껄끄러워하던 멜라니의 태도를 떠올려 볼까요. 한때 친했던 둘이 서로를 불편해하는 건 정적이 되어서였겠죠. 그런데 이 부분을 더 파고들면 다른 특이한 점이 나옵니다. 멜라니가 레트와 같이 있는 걸 두려워한다는 사실이죠.
소설의 표현은 언뜻, 멜라니가 남성들 일반을 무서워한다는 인상을 줍니다.

“...멜라니의 손이 떨렸다. 레트는 아주 몸집이 크고 또 남성이었을뿐더러, 지나치게 남성적인 피조물들은 언제나 멜라니를 불안하게 했다.”
멜라니는 분명 남자사람친구들이 많았고, 레트와도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였죠. 누가 봐도 불량배인 아치도 있었고요. 그리고 멜라니네 집의 지하실에는 부랑자들이 늘 들끓어 왔죠. 그런데 왜 갑자기 남성이 두려워지는가요?
이것은 남성 자체에 대한 공포일 수가 없습니다. 건장한 남성들이 수행하기 쉬운 어떤 행위에 대한 공포죠. 곧 멜라니가 우려하는 것은 그 남자가 돌연 저지를 가능성이 있는 폭력입니다.

소설에서 비슷한 부분이 또 있는데요.
술 취한 사람을 역시 멜라니가 두려워한다는 대목이 그것. 소설에 따르면 멜라니는 거리에서 직접 부랑자들을 포섭하곤 했습니다. 그 중에 알콜의존증이 없는 사람이 오히려 드물지 않았을까요?

여기서 한반도 역사상 최악의 테러리스트 중 하나인 김두한의 자서전을 봅시다.
“나는 3천여명의 대원들을 시 경찰국 앞에 모이게 했다… …나는 그 집에 산적한 정종 수십 통을 도끼로 깨고 3천 명의 대원들에게 아침부터 술을 먹였다. 술을 먹을 줄 아는 자고 아니고 간에 작전상 다 먹였다. 나도 간부들과 함께 아침부터 위스키를 마셔 우리의 정신을 마취시켰다…”
그런 다음 김두한 일당은 파업현장을 습격해 노조원들을 색출하고 지도부를 살해한 것입니다. 여기서 볼 수 있듯, 맨정신으로 폭력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습니다. 술은 가장 구하기 쉬운 정신의, 김두한 말마따나, 마취제죠.
곧 술에 취한 남자가 멜라니에게 접근한다면, 그자는 용역 또는 테러분자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닌게아니라 멜라니도 반대파에게 비슷한 수법을 썼을 겁니다. 취객이 멜라니에게 유독 더 무섭게 느껴지는 것은 그래서이겠죠.
여담이지만 실제 역사에서 이 조지아 북부 지역(그러니까 애틀랜타 권역) KKK의 자금줄은 주류밀매였다고 합니다. 여기까지 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미첼은 소설의 판자촌 묘사에서 살짝 밀주 제조자들을 언급하고 지나가죠. 만약 노린 것이라면 정말 디테일한 복선.
정말 암살이라면, 배후는 누구일까요?
레트가 멜라니를 제재소로 매수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그것을 기각하겠다고 앞서 말씀드렸죠. 저 해석대로라면 한 곳으로 혐의를 좁힐 수 있겠으니, 바로 KKK 강경파들이겠어요.
반대로 만약 멜라니가 레트의 보수대연합에 포섭되지 않았다고 본다면, 용의선상에 오르는 사람들이 아주 많죠. 이제 막 미국의 <도금 시대>가 열렸습니다. 온갖 협잡질로 떼돈을 벌 기회가 기득권들의 눈앞에 펼쳐져 있죠. 멜라니는 이것을 방해하려고 드는 사람입니다, 아마도.
멜라니는 예나 지금이나 열성적인 반체제인사지만, 옛날에는 그래도 남부 기득권의 절반이 멜라니의 배후세력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멜라니는 모든 권력의 적입니다. 절대 용서하지 못할 적군이죠. 마키아벨리 말마따나, 사람은 부모의 원수는 용서해도 돈을 뺏은 사람은 용서하지 못하는 법.
그리고 이렇게 정치적으로 고립된 인물에게, 사람들은 쉽게 사적 원한을 실현할 수 있죠. 높으신 분들은 원한을 가진 사람을 이용해 보고 싶기 마련이니까요. 조지아의 전후 폭력을 주도했던 멜라니에게 복수심을 품고 있던 사람은 적지 않겠죠.
물론 배후선상에서 연방정부를 빼놓는다면 섭섭한 일입니다.
정리하자면 수꼴이건 합수건 연방이건, 조지아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정치권력이 암살의 배후일 수 있죠. 가담자가 될 수 있는 사람도 아주 여럿인데, 극단적으로 스칼렛이나 피티 고모를 뺀 나머지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구체적으로 실행자가 누구인지는 저에게 딱히 짚이는 구석이 없지만, 김현진님의 힐튼(멜라니의 옛애인이었던 캐슬린의 남편) 가설이 왠지 마음에 드는 것입니다.
그래도 애슐리는 아니겠지만, 소설 외적으로 흥미롭게 걸리는 점이 딱 하나 있죠. 이것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겠어요. 또 누가 있을까요, 혹시나 (이승에서) 떠난 줄 알았던 아치가 돌아왔을 수도 있고, 인디아가 개입했을 수도 있고, 어쩌면 레트일 수도 있죠.
멜라니의 집으로 들어온 스칼렛은 애슐리, 미드 선생, 피티, 그리고 인디아를 만납니다. 영화와는 다르게, 소설에서는 이 안에 레트가 없죠. 잠시 후 레트는 같이 들어오지 않은 이유를 캐묻는 스칼렛에게 “나는 그것을 감당할 수 없었어 / I couldn’t have borne it”라고 답하죠.
애슐리는 몽유병자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요. 그이는 아내의 유산에 대해 설명하며, 멜라니가 스칼렛을 찾고 있었다고 이야기하죠. 곧 의사가 나오고, 애슐리에게 말합니다.

“아직 당신은 아니오. 그녀는 스칼렛과 이야기하고 싶어해요.”
아침부터 거기 있었다는 인디아는 의사에게 호소합니다.

“저도 잠깐만 그녀(멜라니)를 보게 해 주세요. 저는 그녀에게 이야기하고 싶… 이야기해야만 해요, 내가 잘못을 했다고… 어떤 것에 대해.”
<어떤 것something>이라는 애매한 표현은 스칼렛이 옆에 있어서이겠죠. 스칼렛이 몰라야 하는 그것은, 그렇습니다. 정치적인 이야기죠. 인디아는 정치인 멜라니를 궁지에 빠뜨리려고 노력해 왔죠. 어쩌면 복수에 눈이 먼 나머지, 암살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정적들에게 제공했는지도 몰라요.
어쨌거나 인디아의 행동은 멜라니를 죽음으로 이끄는 데 상당히 공헌한 것입니다. 뭔가 예수와 유다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자신을 외면하는 동성의 사람을 죽일 정도로 애정하다가, 정말 죽음으로 몰아넣고, 그 다음에는 후회하는 캐릭터가 여기 인디아죠.
멜라니가 죽기보다는 자신이 죽는 편이, 그것보다는 둘 다 죽는 편이 인디아에게는 더 짜릿했겠지만, 야비한 작가양반은 인디아에게 그 정도까지 스포트라이트를 주지는 않습니다.
남남커플의 호모소셜로도 인상적인 이야기가 많이 만들어져 왔지만, 여여커플에 이런 설정을 끼얹으니 더 참신하죠. 좀 유심히 관찰해야 알 수 있는 참신함이긴 하지만요.
듀나 말마따나 우리가 찾는 모범은 고전(?)에 이미 나와 있는 모양인가 봅니다.
의사는 인디아의 요청을 들어 주기는커녕 인디아를 오히려 비난합니다.

“그녀도 당신이 잘못했다는 걸 알고 있소.”

그리고 미드 선생은 멜라니가 애타게 찾던 스칼렛만 들여보내죠.
문 앞에서 미드 박사는 인디아에게 했던 것처럼 스칼렛을 책망하죠. 소설의 표현은 꽤 험합니다. "(허튼 말하면) 목을 비틀어 버리겠다"

그리고 스칼렛은 멜라니의 방에 들어가죠. 미첼은 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
“그 작은 방은, 값싼 검정 호두나무 가구를 들여놓았는데, 램프를 신문지로 가려놓아 어둑어둑했다. 그것은 마치 여학생의 방처럼 작고 새침했는데, 낮은 등받이를 단 좁고 작은 침대라든가, 뒤로 걸어 넘긴, 장식이 없는 레이스 커튼이라든가…. ….스칼렛 자신의 침실의 사치스러움과 매우 달랐다.”
멜라니의 이 방을 직선적으로 <침실>이라고 서술한 번역본이 있는데, 물론 이 방은 멜라니의 침실 겸 사무실 같습니다. 그런데 침실이라고 단정하는 순간 - 멜라니는 애슐리와 같은 침대를 쓰지 않아 왔다는 결론이 나오죠. 스칼렛이 남편이랑 그랬던 것처럼요.
또 영화에서는 애슐리가 멜라니의 방에서 나오며 앞서의 장면들이 시작되지만, 소설에서는 애슐리는 멜라니의 방에 - 아마 멜라니가 죽는 순간까지 - 들어가지 못하죠. 애슐리에게 멜라니는 뭔가 괘씸했던 점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애슐리는 뭐 그렇다치고, 다른 가족들 - 특히 피티 - 까지 못 들어오게 하는 점 역시 병사라고 보기에 이상한 부분. 스칼렛과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다면, 다른 사람을 잠깐 내보내면 되니까요. 방이 어두운 것도 구체적으로 몸에 어떻게 문제가 있는지 알 수 없게 하려는 의도라고 보기에 충분하죠.
이런 점들을 고려해 보면, 유산일 가능성은 상당히 희박하죠. 그런데 왜 하필 레트며 애슐리는 <아이> 이야기를 할까요? 물론 비밀스럽고 급작스러운 죽음에 유산만큼 좋은 변명거리가 없긴 하겠죠. 여기서 앞서 보니의 죽음을 떠올려 봅시다.
보니의 죽음에는 두 가지 상징적인 측면이 있었죠. 하나는 죽음에 대한 죄책감이 드러나지 않았던 어떤 이면을 드러낸다는 점. 하나는 부모의 사회적인 사업이 아이로 표상된다는 점입니다. 보니는 레트의 보수대연합적 미래상을 반영하는 깃발이었죠.
보니의 죽음과 멜라니의 죽음은 연이어 등장하는 사건이니만큼, 후자에서도 같은 밑그림이 자연스럽게 그려지죠. 아마도, 멜라니는 또다른 남부의 미래를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른 시기에 실패했고, 멜라니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
멜라니의 계획은 역시나 급진적인 것이었을 터입니다. 그걸 두고 보지 못한 누군가들에 의해 그래서 암살당했겠지요. 그 내용은… 글쎄요,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남부연맹 부활을 목표로 한, 또다른 반연방 반란모의가 아닐까요.
하지만 여기서 소설은 독자의 상상을 넓게 허용하고 있지요. 아니, 오히려 등장하지 않았던 다른 것을 상상해 보라고 독자에게 권유하는 듯하기도 합니다. 바로 그 태어나지 않은 ‘내일의 태양’이란,
어쩌면 남부적 보수성이 인종주의나 사회진화론과 더 강렬히 결합한 전-파시즘적인 무언가일 수도 있고,
남부의 향수와 아나키즘적 환상이 조합된 신세계일 수도 있고, 조합주의적 분권사회일 수도 있고,
사회주의-지상락원일 수도 있고,
우리가 미처 예견하지 못하는 다른 어떤 것일 수도 있겠지요.
물론 소설을 읽는 우리는 여기서 멜라니가 반드시 죽는 것이라고 단정하지도 못하겠습니다. 어쩌면 침실이 어두운 것은 멜라니가 정말 위독하다고 사람들을 착각하게 만드려는 것일지도 몰라요. 그렇다면 멜라니는 토니 폰테인이 그랬던 것처럼 며칠 후면 텍사스로 가거나, 어쩌면, 국경을 넘어 -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서사적 정신은 멕시코의 어떤 작은 마을에서 아이들에게 과자를 나누어 주고 있는, 온화한 얼굴의 멜라니아 마르티네즈 여사를 꿈꾸게 되는 것입니다 -

"그런데 얘들아, 너희들은 <품성>을 아니…?"
만약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속편이 나온다면, 앞서의 설정 - 멜라니는 죽은 척 - 대로여야겠죠. 물론 <스칼렛>을 읽는 김현진님의 사순절 고행을 보면, 더 이상의 속편이 나오는 일은 없어야 할 것 같습니다만.
한편 스칼렛은 멜라니의 낯빛을 보고 죽음이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미신적인 고뇌”가 스칼렛을 사로잡지요.

“내가 멜라니를 죽였어. 내가 너무 자주 멜라니가 죽기를 바랐어서, 신께서 그걸 듣고 나를 벌하시는 거야.”
이곳에서도 죽음의 양식이 반복됩니다. 보니의 죽음 뒤에 레트의 정치적 행동이 있었고, 그것이 어떤 원인이 되었던 것처럼, 멜라니의 죽음 뒤에도 스칼렛의 행동이 있지요.
멜라니는 스칼렛에게 아들을 부탁합니다. 그리고 멜라니는 애슐리 역시 부탁하지요. 멜라니는 말합니다.

“애슐리는 - 현실적이지practical 못해.” 이어

“그이를 보살펴 줘, 스칼렛… 하지만… 그이가 전혀 알지 못하게.”
겉으로는 더할나위없는 가부장제-부역적인 행동입니다. 하지만 멜라니는 사실 남편에게 신경을 그다지 쓰지 않았죠. 임종시에도 - 죽었다고 가정한다면 - 굳이 얼굴을 보지 않을 정도로.

솔직히 그 정도에서나 머무르면 다행인 게,
애슐리는 지금까지 용케 살아 있다는 느낌입니다. 레트랑 붙어먹지 않았다면, 폭력정치의 소용돌이 안에서 애슐리 쪽이 멜라니보다 훨씬 먼저 죽었을 것 같죠. 멜라니가 애슐리에게 부채의식조차 갖지 않는다면, 이제 독자에게 너무 비인간적으로 느껴질 겁니다.
그리고 애슐리가 현실적이지 못하다 - 또는 실용적이지 못하다 - 는 말은, 뒤집어 보면, 다른 어떤 사람에게 그대로 적용되죠. 바로 스칼렛에게.
인류의 전체 역사의 관점에서 본다면야 하부구조 - 사회의 물적 토대 - 가 가장 중요하겠지만, 단기적으로는 인간의 의식이 창조한 상부구조의 의외성, 가령 정치의 그것 역시 사람의 삶을 휩쓸어 버릴 힘이 있어요.
개인은 오래 못 살기에, 사적 의미에서 상부는 하부만큼 중요하죠. 인간의 그 비합리성이 창조한 것들을 이해하지 않고, 이해하려 들지도 않았던 스칼렛을 멜라니는 늘 보살펴 왔던 것입니다.
멜라니는 애슐리에게 늘 이야기하곤 했겠지요. 스칼렛은 지나치게 현실적이어서 우리가 지켜 줘야 한다고 말이죠. 하지만 스칼렛이 알지 못하게.
애슐리는 평판이 좋고 정치적 영향력도 있긴 분명히 있으니, 나중에 주의회 의원 정도는 먹지 않을까요. 멜라니처럼은 물론 못하겠지만, 애슐리는 이후로도 스칼렛을 보호해 주겠지요. 뭐 이제 KKK도 해체되었으니 그렇게까지 안전에 신경쓸 필요는 없겠지만요.
그 보답으로 스칼렛에게 애슐리에 대한 경제적 관심을 요구했으면, 멜라니 입장에서는 서로 그럭저럭 공정한 거래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스칼렛은 애슐리를 싫어하기 시작하죠. 스칼렛이야 뭐 늘 그렇습니다.
어쩌면 스칼렛은 애슐리가 여성한테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도...

레트 : 애슐리는 사해의 과일과 같은 존재지. 따먹을 수 없는 거야.

스칼렛 : 그걸 지금 알려 주면 어떡해!
스칼렛은 기도합니다. “오, 신이시여, 부디, 제발, 그녀를 살게 하소서! 저는 그녀에게 보답하겠나이다. 그녀에게 잘해주겠나이다. 저는 애슐리에게 평생 절대 말도 걸지 않겠나이다, 그녀를 낫게만 해주시면!”

하지만 소설의 초월적 정신은 인물에게 단지 영감만을 주지요.
멜라니가 "기억해?" 라는 말로 방아쇠를 당기자, 스칼렛은 멜라니와 겪었던, 잊을 수 없는 일들을 상기합니다. 멜라니가 아이를 낳던 순간을, 그리고 셔먼의 군대를 피해 그들이 애틀랜타를 빠져나오던 순간을 말이죠.
이어 스칼렛이 북군 탈영병을 죽일 때, 멜라니가 칼을 들고 서 있던 모습도.

여기서 우리는 스칼렛과 함께, 진실의 어떤 요약에 다다르죠. 스칼렛은 깨닫습니다. 멜라니는 언제나, 그때와 같이, 칼을 들고 자신을 지켜 주었다는 사실을요.
"...그녀(스칼렛)의 그림자처럼 은밀하게, 그녀를 사랑하며, 그녀에 대한 맹목적인 열정과 신실함으로, 양키들과, 화재와, 굶주림과, 가난과, 세상의 평판과, 심지어 피를 나눈 자신의 사랑하는 겨레와 싸우며, 멜라니는 그녀의 곁에 있었다."
"스칼렛은 생각했었다. "멍청하긴, 멜리는 저 칼을 들어올릴 수도 없다구!" 하지만 이제 그녀는 알았으니, 그럴 필연이 서면 멜라니는 계단을 돌격해 내려가, 그 양키를 죽였으리라 - 또는 그녀 자신이 죽었으리라.”

독자는 흔히 이런 문장들을 어떤 은유나, 일어나지 않은 예시로 읽기 마련이지만 -
스칼렛이 직감하는 것들은 오히려 문자 그대로에 가까운 사실들이죠. 멜라니는 정적이었던 양키들과 폭력적으로 대립했으며, 한편으로는 사랑이라는 이유로 스칼렛을 보호해 온 것입니다.
세상의 평판이란 애틀랜타 수꼴 이웃들을 의미하고, 피를 나눈 동족이란 유혈을 수단으로 한 인종주의적 단체, 곧 KKK단의 살짝 비껴난 정의겠죠(Clan이라는 표현처럼). 그들은 멜라니의 정치적 동지였으나, 스칼렛에게는 어느덧 양키나 화재와 동급의 위협이 되었습니다.
정치와 사랑 사이에서 결정해야 하는 순간, 멜라니는 스칼렛을 선택했죠. 멜라니는 자신이 결심한 것에 양보란 없었으며, 그 실현에 열렬하며 맹목적인 인물이었죠. 스칼렛을 보호한다는 것에나, 양키들의 질서에 맞서는 것이나, 어느 하나 양보가 없었기에 멜라니는 결국 파멸하고 만 것입니다.
스칼렛의 미신적 믿음은 만약 멜라니가 스칼렛에게 그렇게 충실하지만 않았다면 죽지는 - 적어도 이렇게 죽게 되지는 - 않았으리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지요. 멜라니의 죽음은 더욱 암살에 가까워지고요.
물론 멜라니의 정치는 그 내용이 무엇이었든간에, 그 시점이 언제였든, 어떻게든 파멸했겠지요. 그 종말은 그 시대의 필연이라고 불려야 마땅할 겁니다. 멜라니는 양키들 - 즉 자본주의적 세계와 절대 화해하지 않을 테니까요. 이제까지 우리가 아는 그 누가 셔먼과 싸워 승리했단 말입니까?
단지 스칼렛은 그 죽음의 시기와 형식만을 결정지은 것입니다. 죽음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그 죄책감을 미신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죠.
이처럼 멜라니는 삶을 걸었던 정치를 처절한 실패로 마감하고 죽게 되지만, 자신이 어떻게 실패하였는가는 스칼렛에게 마침내 이해시킬 수 있었습니다. 멜라니의 사랑은 성공한 것입니다.
스칼렛이 작별인사를 하고 일어나자, 멜라니는 스칼렛을 다시 부릅니다. 그리고 소설의 이 순간,
스칼렛은 멜라니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달링이라고 부르죠.
우리는 소설에서 달링이라는 표현이 몇 번 나왔는지 반드시 세어 봐야 했습니다. 스칼렛에 대한 멜라니의 심정이 얼마나 거대한지를 알기 위해, 그리고 바로 저 작은 순간을 위해.
멜라니는 앞서 스칼렛에게 이런 말도 하지요.

“너는 너무 똑똑하고… 너무 용감하고… 언제나 나한테 너무 잘해주고…”

스칼렛이 똑똑하고 용감한 건 사실이지만, 멜라니에게 언제 잘해 준 적이 있었나, 잘해 준 적이 굳이 꼽자면 있기야 있지만 언제나는 아니었지 않았나 싶죠.
하지만 멜라니의 저 말은 가령 아이돌 팬들이 “태어나 줘서 감사해”라고 외치는 것과 같죠. 스칼렛은 있는 것만으로 멜라니에게 너무 잘해주었던 것입니다.
멜라니는 스칼렛에게 이어 레트를 다정하게 대해 주라고 권합니다. 레트는 멜라니의 가장 큰 적이었지만, 죽음의 순간에서 멜라니는 호의를 베푼 것이죠. 승자의 여유일까요, 관대함일까요.
어쩌면 그냥 최애 앞에서 꿋꿋이 좋은 모습만을 보이려다 보니 그런 말이 나왔는지도. 애슐리가 밖에서 비 맞은 유기견처럼 앉아 있는 걸 보면, 죽음을 둘러싸고 사람들 사이의 불화나 구질구질한 다툼이 있었을 것도 같죠. 하지만 그 모습은 스칼렛에게 보여 줘선 안 되는 것입니다.
“레트라고?” 라고 묻는 스칼렛에게 멜라니는 의식을 잃어가며automatically “그래, 정말로”라고 답합니다. 그리고 스칼렛의 손에 키스한 다음 침대에 묻히죠. 영화에서는 반대로 스칼렛이 키스.

이것으로 멜라니 해밀턴의 여정이 끝났습니다.
멜라니의 집에서 나온 스칼렛은 짙은 안개가 바깥을 - 애틀랜타의 그 피치트리 거리를 메우고 있음을 목격하죠. 스칼렛의 악몽이 마치 현실로 나타난 것처럼 말이죠.
상징을 열심히 안 쓰는 소설이라고 늘 말씀드렸지만, 이 장면은 아주 상징적입니다. 별로 안 쓰는 상징이기에 더 중요하죠. 가령 <보니 블루 버틀러>처럼요. 멜라니와 레트 둘이 이와 같은 악몽에서 스칼렛을 깨우는 사람들이었고, 그 중 하나가 막 떠났다는 점을 떠올려 볼까요.
스칼렛은 집에 돌아가 레트와 대면합니다. 레트는 멜라니가 죽었는지를 묻습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하게 말하지요.

“신이 그녀를 쉬게 하셨군. 그녀는 내가 이제껏 본 사람 중 유일하게 완벽한 ______ 인간이었어 / the only completely kind person.”
한때 한국인들은 이렇게 단정하곤 했습니다 - 한국인이 노벨문학상을 타지 못하는 이유는 한국어의 우월한 표현력을 영어가 따라가지 못해서이다. 우리는 그것이 헛소리라는 사실을 이제 압니다. 영어의 표현이 훨씬 정밀하고 깊이 있고 풍부하죠. 이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영어의 물적 기반이 한국어의 그것에 비할 수 없이 우월했으니까요. 한국어는 이제 막 다듬어 가는 언어입니다 - 하지만 레트의 문장에서 우리 한국어 화자들은 잠깐의 우월감을 느낄 수 있죠.
우리는 저 빈 곳에 딱 맞는 한 단어를 아니까요. 그것은 Kind보다 덜 중의적이지만 더 명료하죠. 레트도 <강철서신>을 읽었다면 아마 그것을 <Pumseong>이라고 말했을 겁니다.
그리고 레트는 말합니다 - “아주 위대한 여성이었지.”

그리고 감상에 잠시 빠져 있다 다시 한 번 말하죠.

“아주 위대한 여성 / A very great lady.”
이것은 가령, <위대한 개츠비>에 위대하다는 수식어를 그 작가가 붙인 이유와 같습니다. <위대한 멜라니>인 셈이죠 - 저 개츠비는 읽어서 나쁠 건 없는 소설이니, 안 읽으셨다면 이 기회에 한번 읽어 보세요.
미국문학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위대한 개츠비>는 1925년작으로, 36년작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아주 닮았어요. 배경인 1920년대는 1차대전으로 촉발된 호황이 정점을 찍던 시기입니다. <도금시대>와 비슷하게, 이 때를 일명 <재즈시대>라고 부릅니다.
두 소설의 인물들은 서로 친형제들 또는 친자매들 같죠. 심지어 이름들도 대체로 유사합니다. 가령 남성적인 - 곧 위계적이고 폭력적인 - 톰 뷰캐넌은 레트 버틀러와.
무기력한 개인인 윌슨은 애슐리 윌크스와.
정부인 머틀은 벨 와틀링.
데이지는 미인이며, 다시 말해 다른 캐릭터들의 욕망의 대상입니다. 그리고 속물이죠 - 곧 평범한 사람들의 소망을 대변하는 캐릭터예요. 팬지 오하라와 이름까지 꼭 닮았죠.
오하라네에 팬지라는 사람도 있었냐고요? 스칼렛의 원래 이름이 팬지였답니다. 출간 직전에 편집자가 스칼렛으로 바꿨다고. 이처럼 가슴을 쓸어내릴 일이 흔하지는 않죠.
그리고 경제호황 속의 어두움을 상징하는 인물, 개츠비는 바로 멜라니가 되겠어요. 둘 다 범죄적인 사업을 벌이고 있고, 심지어 그 세부 분야도 밀주업으로 비슷하죠. 하지만 한편으로는 로맨티스트들이라고 해야 할까요, 둘 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하려다 죽음을 맞습니다.
“그렇군요! <아주 위대한 여성>이라는 레트의 말은 저 개츠비의 오마주였군요!”

라고 말씀하실지 모르지만, 이건 의외로 간단하지 않은 문제. 왜냐하면 <위대한 개츠비>는 당대에 그렇게까지 잘 나가는 소설이 아니었습니다.
작가인 스콧 피츠제럴드도 그렇게까지 잘 나가던 작가는 아니었고요. 오히려 말년에는 좀 안습한 처지였는데, 이걸 잘 보여 주는 일화가 하나 있죠.
피츠제럴드는 1930년대에 부업으로 영화 시나리오 작가 일을 했습니다. 이 양반이 각본에 참여한 작품 가운데 하나가 바로바로바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피츠제럴드는 여기 뭔가 꽂히는 구석이 있었던 모양인지, 2주 동안 각성제(암페타민)을 먹어 가며 죽어라고 썼다고.
그런데 그 결과물을 관찰한 제작자 셀즈닉의 반응은

“응 존못”

피츠제럴드는 그리고 잘렸습니다. 잠을 제때 자야 합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각본작업에 참여한 작가들에게는 모두 비극적인 결말이 찾아왔는데, 각본가들을 수십 명씩 불러 난리를 치고 난 다음 셀즈닉은

“첫번째 버전이 제일 낫네요 그걸로 가죠”

를 시전했던 것입니다.
영화 크레딧을 넣을 때도 셀즈닉은 나중에 들어온 작가들의 기여가 거의 없었다고 주장, 시드니 하워드의 이름만 들어갔죠. 아카데미 각본상도 하워드가 단독 수상. 셀즈닉 선생이 예술인들의 지옥에서 무사하셔야 할 텐데요.
여기서 하워드한테만은 잘된 일이 아니냐고 물으시겠죠. 하지만 하워드에게는 최악의 불행이 찾아왔으니, 그이는 영화가 개봉하기도 전에 차량사고로 사망하였습니다.
하워드의 아카데미 각본상 발표 장면. 최초의 사후수상이라고.
여튼 위대한 개츠비의 화자 닉 캐러웨이는, 사실은 작가 피츠제럴드는, 개츠비를 위대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유를 대략 정리해 보면,
1. 주인공이 벌이는 일들에서 사회의 좋은 면과 아울러 나쁜 면이 분명히 드러나고,

2. 주인공이 세상의 질서에 그저 순종하기보다는 거역하고 극복하고자 하는 의욕을 지닌 인물이며,

3. 주인공의 삶을 돌이켜 보았을 때 어떤 긍정적인 단서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죠.
위 셋에서 개츠비가 아주 성공적인 작품이냐 하면 뭐 개인적으로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개츠비가 긍정적인 인상을 주는 이유는 화자에게 잘해주기 때문이고, 개츠비가 객관적으로도 언뜻 괜찮아 보이는 이유는 무슨 나쁜 짓을 하는지가 직접적으로 묘사되지 않기 때문이죠.
그렇게 개츠비가 걸치고만 있는 사악함 - 이를테면 살인 - 조차도 다소 어색한 장식이라고나 할까요. 중서부의 샌프란시스코가 오히려 그럴듯하다는 느낌. 개츠비는 자기 말마따나 친척의 유산을 득템한, 한때의 살짝 몰락 귀족어야 어울리죠.
어쨌든간에 개츠비가 시도하는 기행들은 당시 사회의 문제점을 잘 드러냅니다. 호황기였지만 사람들은 불안하죠. 그래서 그들은 타인과의 관계는 대충 덮어놓고 - 괜히 건드렸다 폭발할까 두려우니까요! - 일시적인 자극에 몰두하고 있어요. 다음날 일어나 보면 숙취와 쓰레기만이 남아 있지요.
그리고 그 이면의, 분명 인간의 창조물로 동작하고 있지만 우리가 만져 볼 수는 없는, 자본주의라는 강력한 체제가 있어요. 그 거대한 논리적 기계는 자본축적이라는 목표 아래, 인간을 동원합니다. 인간은 파편화된 채 기계장치의 부속품으로 기능하죠. 매트릭스의 세계는 이미 실현된 것입니다.
개츠비는 열심히 운동하는 부속이죠. 다른 사람들에게 양분도 주고요. 그러면서 그이는 영원하고 완벽한 사랑을 꿈꿉니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사회가 허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없죠. 그 사랑이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 목표인지도 불분명하지만.
하여튼 개츠비는 체제가 주는 사다리를 어쨌거나 올라, 체제가 주는 거대한 것을 얻었음에도, 주지 않는 것을 갈구하다 받은 것마저 모두 잃고 장렬하게 파멸했죠. 이 부분이 체제의 문제성을 암시합니다.
개츠비는 파멸로서 세상의 요구를 거부하는 동시에, 그것에서 자유롭게 되었죠. 사랑이 - 다시 말하면 인간의 인간에 대한 지향이라는 다른 가치가 - 더욱 중요하다고 행동으로 선언하면서 말이죠. 이 점이 (작가 딴에는) 개츠비의 긍정적인 측면이고, 그래서 그 인간이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소설을 평안한 마음으로 읽는 분들은, 뭐 도를 넘는 행동을 하면서까지 출세하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결론쯤이나 내겠지만, 뭐 그쯤으로도 의미가 대충은 전달되는 셈이겠어요. 우리는 - 정확히 말하면 유산계급 동무들일수록 - 언제나 도를 넘고 있기 때문이죠.
물론 일부는 그 소설에서 범죄를 저질러서라도 폼나게 살아보자라는 교훈을 얻는 모양이지만요. 우리가 버닝썬 게이트에서 적나라하게 목격했듯이 말이죠. 이렇게 인문학은 또 패배하고 마는 것일까요.
저 위에서 잠깐 만화 <몬스터>와 영화 <다크 나이트>를 언급했는데, 가령 몬스터는 사회의 문제성이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개츠비와는, 그리고 멜라니와는 달리, 요한이 제시하는 지향이 왜 어떤 사람들에게는 맛있는지를 설명할 수가 없죠.
오히려 몬스터에서 문제가 돌려지는 곳은 체제가 아니라 일탈 - 곧 범죄 그 자체죠. 일본인답다고나 할까요, 극도로 탈정치적인 서사는 이런 결과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 다크 나이트는 (감독이 어떻게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본주의가 어떤 은유로 등장하죠. 배트맨은 정부를 기업이 사실상 붕괴시킨 극단적 세계의 자본가입니다. 즉 현실-지옥인 고담시를 만든 업적은 배트맨(과 그 부모)의 것. 이 경우는 파괴의 충동에 어떤 정의가 깃들게 되죠.
기존 질서를 싹 부수고 처음부터 사회를 새로 건설하는 것이 상당히 현실적인 대안이 된다는 말씀. 최소한 배트맨부터 일단 제거하고 뭐든 시작해야겠죠. 따라서 도이칠란트 교양인들의 평화로운 세계를 그리는 몬스터와 다르게, 고담시의 범죄는 묘한 설득력을 갖게 됩니다.
물론 애초에 배트맨이 정의의 주인공으로 설정된 것부터가 심각한 에러지만 말이죠. 배트맨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마쓰이 오장 송가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요. 다크 나이트는 잠깐 체제에 대한 의문이 스친 서정주의 머리쯤이나 되겠죠. 우리는 그 머리가 의문을 곧 망각하리라는 사실을 알죠.
다크 나이트는 그런 점에서 다른 배트맨 시리즈보다 상대적으로 낫죠. 뭔가 계속 없던 것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다시 없겠죠. 사람들이 (저는 아니지만) 조커를 좋은 캐릭터로 느끼는 이유는 거기에 있겠습니다. 영화의 바깥. 고담시가 우리의 현실과 접점을 이루는 어떤 곳에 설득력이 있는 캐릭터.
한편 마츠모토 세이초의 추리소설에서, 범죄는 세상의 일그러짐을 숨김없이 드러내죠. 그렇다고 범죄자 개인이 책임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은 아니나, 사람을 그 범죄적 행동으로 미끄러뜨리는 주범은 사회의 문제성. 이것이 세이초 소설의 포인트입니다.
또한 도스토옙스키가 창조한 죄인들도 세상을 뒤흔드는 힘을 가지고 있어요. 도스토옙스키는 극도의 수구+꼴통임에도 그렇습니다. 범죄자는 늘 실패하지만, 여전히 사회를 전복할 잠재력만큼은 인정받고 있죠. 달리 말하면 도스토옙스키는 실패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작가.
<적과 흑> 또한 이 계열의 작품. 모델은 실제 일어났던 치정사건이죠. 이 언뜻 하찮은 재료로부터, 당대 프랑스를 정치사회사상적으로 철저히 해부한 역작이 나왔어요. 치정사건에서 그게 어떻게? 라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지만, 속칭 존잘러들에게는 이게 가능한 모양입니다.
제목을 적과 흑이라고 하니 뭔가 알듯말듯 심오해 보이지만, 실은 그냥 <빨강과 검정>인데요. 여담이지만 일본판 제목(赤と黒)도 음독이 아니라 훈독(あかとくろ)을 합니다.

빨강은 군대의 제복이며 곧 혁신적 사조를, 검정은 사제의 그것으로 사회의 관습, 즉 반동성을 뜻하죠.
편집자가 팬지에게 스칼렛, 즉 선명한 빨강이라는 이름을 지어 준 이유가 바로 여기에서 비롯하였는지도. 그리고 그 스칼렛에 대비되는 검정이라는 이름이 바로 그리스어로 멜라니아(μελανία) 입니다.
멜라니는 이런 <개츠비> 또는 <빨강과 검정>의 캐릭터 유형을 계승합니다. 저기 저 앞에서 말씀드렸듯, 이런 유형을 일컬어 흔히 <반-영웅>이라고들 하죠.
반-영웅은 단순한 빌런과는 살짝 다르죠. 정통적인 서사의 주인공으로서의 자질을 갖추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방식에, 어쩌면 목적 자체에 결함이 존재하고, 인물은 부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다 대개는 실패하죠.
인물의 무엇이 긍정적이고 무엇이 부정적인지는 이미 작가가 어느 정도 계획해 놓았겠죠. 하지만 그 궁극적인 평가는 독자들에게 맡겨진 것이겠어요. 물론 같은 인물을 놓고도 독자마다 평가가 때로 판이하게 갈릴 테지마는요. 왜냐하면 사회의 문제성에 대한 인식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근대적인 이야기에서, 인물이 꼭 어떻게 살아야 맞는지는 확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니까요. 우리가 걸어가는 길은 아주 불명확하죠 - 스칼렛이 마주한 안개처럼요.
한때 후쿠야마 선생이 역사의 종언을 고하며 자본주의의 영원한 승리를 확인하는 듯했지만, 오늘 아베 선생은 무슨 기본적 가치를 운운하며 자유무역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합리적-보수 분들은 또 거기에 박수를 치고 있지 않겠어요. 우리 시대의 가장 강력한 이념조차 이처럼 하찮은 것입니다.
여기서 멜라니는 이렇게 말하지요. “하늘의 별들이 보고 있다”

애슐리의 생일 며칠 후 스칼렛을 만나서 하는 대사였죠. <돈키호테>에서는 돈키호테가 목동들을 데리고 하는 이야기인데, 이것이 소설이라는 <장르>의 주제의식에 해당한다고 하겠어요.
곧 근대적 현실은 안개에 휩싸여 있지만, 서사의 인물은 하늘의 별을 그리며 사는 것입니다. 주인공은 - 어쩌면 주인공만이 - 무언가를 현실에서 추구하고 있죠. 그이가 추구하는 것은 당연히 현실에 그 자체로 없거나 부족한 것입니다.
아주 성공적인 서사들에는 서로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실로 장르죠. 가령 주인공은 무언가를 추구하는 사람이며, 대개 적극적이죠. 작품은 주인공의 일대기, 특히 모험담의 구성을 지니곤 하고요. 주인공은 사람들과 갈등을 겪곤 하는데, 그 사람들은 사회의 특정한 면들을 대변하죠.
이렇게 되는 이유는 인간의 행동을 통해 세계의 문제성을 드러내는 데, 앞서의 방식들이 가장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대적으로 적합하기 때문. 루카치에 따르면 그 문제성의 핵심은 세상의 ‘산문적인 저열성’이며, 소설은 그에 맞서 주인공의 내면성이 떠나는 모험으로 정의되는데 하여튼,
그것이 근대서사의 과제라고 하겠어요. 돈키호테는 앞서의 과제에 대한 최초의 응답이며 영원한 모범. 돈키호테는 복합적이고 굉장히 모순적인 인물이지만, 현실과의 대결에서 좌절하거나 붕괴하지 않아요. 그이는 우스꽝스럽고 또 영광스럽게 고향으로 개선하죠.
돈키호테는 여러 모순성을 개인 안에서 통합하는 데 유일하게 성공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일까 이후의 서사들에서는 캐릭터들의 분업이 시작되었는데, 가령 히어로 영화 중에서 드물게 정통적인 <블랙 팬서>의 인물들이 그렇죠.
그곳에서 인물들은 저마다 하나의 이념을 담당합니다. 가령 유머스러한 자연주의라든가.
하지만 단순한 기분이나 선언에 그치지 않고, (영화 안의) 현실을 실제로 움직이고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그 이념의 깃발 아래의 인물들에게 부여되어 있죠. <블랙 팬서>는 보수적인 결론으로 끝나는 판타지인데도 그렇죠.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 중에서도 <블랙 팬서>처럼 정치성이 구현되는 작품은 흔하지 않죠. 선조나 고종이라고 한들, 최수종이 분한 수많은 왕들보다 백성을 덜 사랑하는 기분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러니 유교적 명분론은 장식으로만 걸어 놓고, 암투에만 헌신하는 <여인천하>가 더없는 수작인 것입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인물들의 정치성은 진정 디테일하죠. 애슐리는 토지귀족의 구체제를, 레트는 천민적이라고 우리가 흔히 부르는 그런 <순수한> 자본주의를, 멜라니는 자본주의에 대한 현대적 불만을 대변하고 있어요.
위 셋은 역사에서 실제로 등장했던 이념을 갖고, 그것의 정치적 강령을 따르고, 그것들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반영하고 있죠. 그리고 그 결과도 정말 의외로 역사에 충실합니다.
스칼렛만이 단순한 캐릭터죠. 말씀드렸듯 데이지와 비슷합니다. 일반인들의 소망과 욕망에 피와 살을 입히고 숨을 불어넣은 캐릭터. 뭐, 수학천재라는 설정 하나만으로도 (어쩌면 원본인) 데이지보다 더 낫다고 하겠지마는요.
스칼렛은 언뜻 정신적으로 평범해 보이며, 그것은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내죠. 하지만 사실은 아주 이상화된 캐릭터입니다. 은근슬쩍 머리가 좋은 건 둘째치고, 강한 내적 에너지를 가지고 있죠.
개츠비가 1920년대를 상징한다면, 스칼렛은 미국의 1930년대의 정신에 잘 어울리죠. 당시는 불황 극복을 위한 진취성이 다시 미국 사회에 요구되던 때였습니다. 미래는 분명 불확실하지만 - 무엇이 다가오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믿음을 독자는 스칼렛에게서 얻게 되죠.
그런 의미에서 스칼렛은 미국의 일명 <프론티어 정신>을 직격하는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뭐 미국의 프론티어성도 정신적인 태도의 문제라기보다는 압도적으로 유리한 지정학적 위치와 풍부한 자원을 가진(아니, 원주민에게 빼앗은) 결과물에 지나지 않을까도 싶습니다만.
어쨌든 주인공의 진취성은 언제나 위기였던 한국이나 또 북한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인기가 좋았던 이유 중 하나겠죠.
레트도 언뜻 스칼렛과 똑같아 보이지만, 소설의 극후반에서 레트는 정신적 활력은 물론 육체적 활력마저 잃고, 결국 고향인 찰스턴으로 돌아가지요. 어쩌면 미첼은 내심 자본계급의 역사적 사명은 딱 거기까지라고 믿고 있었는지도.
뭐 우리가 알다시피 자본주의는 미첼의 그 시점에서 80년이 지난 지금까지 꾸역꾸역 살아남고는 있죠. 사명 같은 건 모르겠지만요. 배트맨은 앞서 평했듯 한심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겠습니다... 만, <아이언맨>의 생존투쟁은 뻔뻔하면서도 재미나긴 합니다!
스칼렛의 집요한 즉물성은 작법적으로도 독특한 효과를 낳았죠. <위대한 개츠비>는 첫 문장들에서

<이것은 엘리티시즘을 자각하는(글쎄요?) 유산계급이 단순한 인간들을 관찰하는 이야기>

라고 못박아 놓아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그 반대로 단순한 인간이 복잡한 인물들을 관찰합니다.
애슐리, 레트, 멜라니 셋 다 정치광인이며 미친 인문학 빌런들이죠. 스칼렛은 정치적 또는 사상적 문제를 이해하려 들지 않기에, 사건들은 사실 그 자체로만 스칼렛에게 전달되죠. 한데 앞서도 말했듯, 스칼렛이 빼먹는 그런 <인문학적>인 것들은 진정한 실체라고 보기에는 좀 애매한 것들입니다.
따라서 이 소설은 언뜻 굉장히 진부해 보이면서도 은근히 전위적인 형식의 작품이 되었는데요. 자기네들끼리 난리를 치다 모두 고꾸라진 인문학 광인들의 어리석은 머리들 위로, 내일의 태양은 무심히 떠오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유물론적 세계는 인간들의 어리석음을 역사로만 간직한 채. 꿋꿋이 전진하고 있지요. 그런데 그 형식은 너무 효과적이라 독자들을 지나치게 잘 속여 버렸죠. 미첼도 이렇게까지 사람들이 잘 속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물론 여성 작가의 여성서사가 아니었다고 해도 그런 반응이었을까는 솔직히 좀 의문이지만요. 멜라니가 남자였으면 저는 이 타래를 아마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교과서에 이미 나와 있는 내용이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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